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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예랑(NGA 인턴)
서론
이방인, 특히 ‘우리’의 현실에서 직접적으로 마주할 수 있는 이민자들은 제노포비아의 대상이 되기에 가장 편리한 존재다. 더욱이 팬데믹 시대에 그들의 존재와 물질적 근접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두려운’ 것으로 묘사된다. 세계적 위기가 도래하면서, 이방인은 보다 직접적으로 질병과 죽음의 기호가 되어 공동체의 완전무결성을 위협한다고 여겨지고 있다. 나는 중국의 우한에서 COVID-19 바이러스 환자가 발생했을 때 온라인상에서 보고 오프라인상으로 들은 숱한 중국인 혐오 발언들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실제로 바이러스를 한국에 옮겨 온 환자들의 상당수는 어떤 목적으로 중국을 방문한 뒤 귀국한 한국인들이었다(강양구, 2021: 302). 그런데도 당시에 직접적인 두려움의 대상이 된 존재는 중국 혹은 중국인이었다. 한 연구는 코로나 발생 초기, 바이러스의 확산이 중국에 국한되어 있을 때와 이후 바이러스가 서구로 확산되었을 때의 CNN 뉴스 보도가 각기 다른 이미지적 프레임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이종수, 2020). 해당 연구에 따르면, 바이러스의 주 확산지가 중국이었던 시기에는 야생동물 밀거래 현장 영상과 비위생적인 재래시장의 잠행 촬영 영상이 자주 보도되었으나, 바이러스가 미국으로까지 확산된 이후에는 전문가의 자문이나 정치인들의 기자회견 및 브리핑 이미지가 유의미하게 많이 보도되었다(291). 이 연구는 중국에 대한 보도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서구권에서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은 중국인뿐만이 아니었다. ‘겉모습만 보아선 구별이 어렵기 때문에’, 중국인을 향한 두려움은 동아시아인 일반에게로 확장되었고 한동안 아시안 혐오 범죄가 두드러졌다. 이런 측면에서 “글로벌 전염병에 대한 불안”이 “상상의 면역 공동체imagined immunological communities를 둘러싼 ‘국경’의 개념을 강화”한다는 지적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252). 팬데믹 시대에 ‘우리’와 타자를 가르는 경계가 점점 더 견고해지고 또 배타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시점에 이방인과 타자의 윤리를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고민에서 비롯되었다. ‘우리’에게 타자로 여겨지는 것들의 공통점은 낯섦이다. 그리고 그것이 낯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타자를 두려워하고, 두려움을 넘어서 미워한다. 그런데, 낯섦이 타자에게 귀속되는 고유한 속성인가? 무언가가 낯설다는 것은 우선 그것을 낯설다고 판단할 기준점을 요구하니, 낯섦은 ‘우리’와 타자의 관계에서 발생되는 것이 아닌가?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1941~)와 사라 아메드(Sarah Ahmed, 1969~)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러한 질문을 풀어나가고 있는 저술가들이다. 논의의 방법론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이들은 공통적으로 동일성과 차이를 가르고 경계를 수립하는 기준 자체가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문제 삼는다.
이 글에서 목표하는 바는 크리스테바의 『우리 안의 이방인Strangers to Ourselves(2004)』과 아메드의 『혐오의 구성The Organisation of Hate(2001)』을 독해하면서 이방인과 타자의 윤리가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의식과 무의식의 논리를 통해, 나에게 동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나에게 이질적인 것도 본래 나의 내면에 존재한다는 차이의 공존을 주장한다. 차이를 긍정하는 것은 크리스테바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한 문제의식이다. 크리스테바의 초기 연구는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비롯한 서구의 주류 철학담론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독자적인 이론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크리스테바는 철학적 체계화의 방법론에서 선회하여, 보다 문학적이고 실천적인 저술을 남기기 시작한다. 『공포의 권력』을 통해 알려진 아브젝시옹의 이론에 비해서는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크리스테바의 『우리 안의 이방인』 역시도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질성과 차이를 포용할 것을 촉구하는 타자의 정치윤리학이다. 이 저작에서 크리스테바는 주체 안의 이질성을 발견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주체가 새롭게 거듭나는 차이의 윤리를 촉구한다. 이러한 낯섦은 타자와 ‘함께’ 존재하는 ‘우리’의 궁극적인 조건이 된다. 한편, 아메드는 사회문화적으로 미리 결정된 감정이 인간의 ‘몸’들의 물질적 이동과 근접을 통해 순환한다고 본다. 크리스테바가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유동화하되 여전히 인간 주체의 내면이라는 틀을 활용한다면, 아메드는 그보다 더 급진적인 관점에서 주체가 오로지 ‘교점’에 불과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아메드는 교점과 교점 사이를 지나다니는 감정의 순환경제를 통해 타자를 향한 혐오를 설명하고자 한다. 경계로부터 얻는 내적 안정성과 더불어 그 바깥에 대한 배타적 감정도 강화되는 시대에, 이들의 이론을 검토하는 작업은 분명 시의성을 가지리라고 생각된다.
무엇을 낯설어하는가
이방인이 ‘두렵다’고 표현할 때,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유럽의 전통적 감성학에서 동의해 온 전제는 다음과 같다. 생존을 목표로 삼는 인간 주체는 ‘나’에게 안전하고 ‘내’가 자신의 안에 받아들여도 되는 것의 근접만을 허용한다. 그것은 나에게 유익하고, 위협이 되지 않으며, 본질적으로 ‘나’와 동질적인 것이다. 반면 ‘내’ 존재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것은 주체의 존속을 위해서는 거부되거나 배출되어야만 한다. 이는 본질적으로 ‘나’에게 이질적인 것이다. 이런 논리로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역겨움, 혐오 등의 감정은 흔히 인간의 진화 및 문명 형성과 연관되어 왔다(『문명 속의 불만』, 2020을 참조).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지 않는 존재들마저 두려워하는가? 심리학자인 마크 셸러(Mark Schaller)는 인간의 신체에 새겨진 혐오의 작동 원리가 마치 예민한 ‘화재경보기’처럼 조금이라도 ‘낯선 대상’에게 울린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낯선 사람에게 혐오를 느끼는 것도 인간 본성의 결과라는 것이다(2011: 99-103, 강양구, 2021: 291에서 재인용). 이 글에서는 감정과 인지의 진화심리학적 메커니즘을 상세히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논의들은 분명히 우리에게 시사하는 질문들이 있다. 우리는 왜 낯선 것을 두려워할까? 우리에게는 무엇이 낯설다고 느껴지는가? 낯설다고 느껴진다면, 무엇이 그러한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가?
니체는 『도덕의 계보』 서문의 첫머리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하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이방인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자신에게 이방인인 까닭은, 우리가 자신에게서 스스로를 찾지 않고 ‘다른 것’으로부터 찾기 때문일 것이다. (권순정, 2013)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이방인들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일까? 이와 같은 맥락에서 크리스테바는 이방인이 우리의 안에 있으며,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그 안의 이방인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1. 우리 안에 존재하는 낯섦을
『우리 안의 이방인』은 타국에서 살아가는 이방인이 겪는 실제적인 문제점들과 연관지어 타자의 윤리를 고찰한다. 우선, 이방인이 쓰는 언어는 어떤가? 이방인의 언어는 낯선 자의 언어다. 크리스테바의 고찰에 따르면, 이방인의 언어는 그 땅에서 사회적으로 약속된 상징으로서의 기능을 적절하게 수행하지 못한다. 이방인의 말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고, 이는 “엄밀히 말해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목적으로만 수행되거나 발화될 수” 있다. (2004: 28) 즉, 이방인의 말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하는 중간적인 존재이다.
크리스테바는 타국에서 이방인이 누리는 권리의 범위가 좁다는 점도 문제시한다. 예컨대 「어떤 권리로 당신은 이방인인가?」라는 장에서, 크리스테바는 이렇게 질문한다. “인간의 권리인가, 혹은 시민의 권리인가?” (97) ‘혹은’이라고 강조하며 이 장에서 크리스테바가 주목하는 논점은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가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떤 국가에서든 국민의 권리는 오로지 국민이 아닌 자와의 관계와 차이로부터만 끌어낼 수 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인즉, 국민의 권리를 규정하려면 반드시 누가 국민이고 누가 국민이 아닌지를 구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와 같은’ 인간은 국민으로, ‘우리와 다른’ 인간은 외국인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타국의 시민권을 얻지 못한 이상, 이방인들은 ‘우리와 다를’ 뿐인 ‘인간’인데도 그 국가에서 인간으로서 완전한 권리를 누린다고 할 수 없다. 이를테면 법적 외국인은 모든 공공 서비스에서 배제되고, 많은 경우 부동산을 소유할 권리를 거부당한다. 자국민의 유산을 상속받을 권리에 대해서도 외국인의 권리영역은 더욱 모호해진다. 시민도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는 완전한 인간도 되지 못한 채, 이방인은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하나의 ‘흉터’로서 존재한다. (98)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방법론은 이방인들을 공동체의 내부에 통합하는 대신, 이방인의 낯섦을 그 자체로 환영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가 분열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해 준다. (192)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 보자. 주지하다시피,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적인 충동의 영역은 사회화된 주체에게는 ‘부적당하다’고 여겨져 억압된 것이다. 이러한 억압은 문명을 형성하는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다. 인간이 자신의 본능적 충동을 마음껏 누리고자 한다면 사회적 약속은 유지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적당한 것으로 배척된 무의식은 실은 주체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이며, 억압당하기 전에는 본래 주체와 한 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무의식은 거부당한 뒤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주체에게 충동의 형태로 출현하면서 주체의 근원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정신분석학의 전제는 서구 전통 철학에서 통일적이고 자율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이성과 판단의 주체가 실은 분열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크리스테바는 개념적 경계로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을 확정짓는 것보다, 그 둘이 끊임없이 서로를 오가는 관계라는 점에 더욱 주목할 것을 요청한다. 이로써 크리스테바가 주장하는 정신분석의 윤리란 다음과 같다.
정신분석의 윤리는 정치를 함축한다. 정신분석의 윤리는 정부와 경제, 시장을 가로질러, 무의식의 의식에서 유대를 발견할 수 있는 인류에게 작동하는 새로운 종류의 세계시민주의를 수반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미 모순적이게도 부성적이고 신성한 권위에 빚지고 있음이 지적된 형제애를 요청하는 것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2004: 192)
크리스테바가 보기에 형제애의 윤리는 동일한 아버지, 곧 혈연 공동체를 지배하는 권위의 상징을 공유한다는 전제에 기반한다. 그러나 기존의 ‘부성적이고 신성한 권위’를 따라서는 결코 부성적이지 않고 지배적이지 않은 것, 신성하지 않은 것, 나아가 억압된 무의식의 인정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형제애 대신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무의식의 가능성을 들여다봄으로써 유대를 발견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여기서 거듭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크리스테바가 주장하는 정치윤리학은 이질성을 나에게 ‘동질적인’ 것으로 통합해 버리는 윤리보다는, 나의 안에 ‘이질성’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나아가는 윤리다. 이를 통해 크리스테바가 향하는 길은 ‘우리’를 둘러싼 견고한 경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가능성의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다.
3. 낯섦은 누구에게 속하는 것인가
사라 아메드는 『감정의 문화정치학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s(2004)』의 서문에서, 감정과 사유의 위계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실은 감정 간의 위계라고 주장하면서,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인간 삶의 측면들을 해명하는 주요 장치로 감정을 도입한다. 이 저작 전반에 걸쳐 아메드는 특정한 감정에 특정한 가치판단이 결부되는 이유를 탐구하고자 한다. 아메드의 이런 질문은 결코 복잡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왜 용기는 훌륭하고 좋은 것이고, 두려움은 나약하고 나쁜 것일까? 용기와 두려움이 각기 이런 위계를 부여받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질문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 아메드의 문제의식은 감정이 무엇인지 밝혀내기보다 특정한 사회적 함의를 담는 감정이 그러한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원인을 파헤치려는 것이다. 감정 간의 위계를 살펴보는 것은 특정한 감정이 고양된 것으로 존재하고 다른 감정은 하찮은 것으로 존재하는 이유를 질문할 수 있게 해 준다.
아메드는 감정 간의 위계구도에서 더 나아가, 감정과 물질적 신체가 맺는 관계에도 주목하고자 한다. 감정은 좋은 것이나 좋지 않은 것을 신체적인 특징들로 변형함으로써 몸의 특질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몸의 특질이 된 감정은 어떤 신체적 행동을 반복적으로 발생시키면서, 타인을 향하거나 타인에게 반하는 정향orientation을 표출한다. 예를 들어,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감정은 그에 반하고 그로부터 달아나려는 행동을 발생시키면서 신체에 움츠림이라는 특징을 부여한다. 개체의 몸, 그리고 사회적인 의미에서 집단적인 몸은 감정이 일으키는 행동과 정향을 통해 그 모습을 바꾸는데, 아메드는 이를 두고 몸의 “표면surface”이 조형된다고 표현한다. (2004: 4) 그러나 아메드는 자신의 논리가 감정을 신체적 특성으로 환원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보다, 아메드가 질문하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감정이 몸의 표면을 조형한다면, 왜 어떤 몸들은 감정적이라고 여겨지고 어떤 몸들은 그렇게 여겨지지 않을까?
3-1. ‘누구’의 ‘것’도 아니다
아메드의 주장에 따르면 어떤 몸이 타인과 맺는 관계는 그 몸이 하는 일을 결정하며, 이러한 면에서 모든 행동들은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1) 이는 감정이 “몸이 행하는 행동의 힘을 증대시키거나 약화시키는 몸의 수정modifications”이라는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스피노자 1959: 85, 아메드 2004: 4에서 재인용). 그리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은 “하나의 표면이 다른 하나의 표면에게 가지는 정동”이자, 그 표면 위에 “자국 혹은 흔적을 남기는 정동”과 관련된다. (6)
아메드는 감정이 무언가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도적이라는 주장들을 수용하여, 감정이 세계에 대한 태도를 수반한다고 주장한다. 감정이 태도를 수반한다는 주장을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아메드는 곰을 만나 두려워하며 도망치는 아이의 예시를 든다. 이 예시에서 아이는 곰을 처음으로 보는 것이며 경험적으로 곰의 위험성을 배운 바가 없을지라도 곰으로부터 도망친다. 아메드가 주목하는 것은 아이가 곰에 대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이미지, 즉 두려운 대상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와 곰의 접촉은 현재에 존재하는 접촉이 아닌, “과거의 접촉의 역사들”(7)에 의해 조형되는 접촉이다. 이 접촉에 대한 독해는 곰을 느낌의 원인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아이에게 두려움의 대상으로 만들어 그가 대상으로부터 떨어지게 한다. 이런 점에서, “감정은 재정향의 정동적 형태를 수반한다”(8).
아메드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 고려해야 하는 지점은, 어떤 대상이 특정한 감정을 발생시키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 감정이 단순히 대상 자체의 속성으로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메드는 감정에 대한 “안에서 밖으로inside out”(9) 모델과 “밖에서 안으로outside in”(10) 모델을 모두 비판한다. 감정이 개인의 내부에 속하며 외부로 표현된다고 보는 전자의 모델은 개인의 생각과 경향에 외부가 미치는 영향을 간과한다는 단점이 있다. 다른 한편 사회적 형태의 감정이 집단적인 몸들을 결합시킨다는 후자의 모델은 군중을 ‘감정을 가진’ 개인으로 치환한다는 단점이 있다. 아메드에게 감정은 둘 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으며, 그보다는 “내부와 외부를 구별할 수 있게 하는 표면들과 경계들”(10)의 효과를 빚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상의 대상성은 감정의 원인이 아닌 효과로 설명된다. 그리고 아메드는 이 효과가 감정의 순환을 통해 발생한다고 제안한다.
그렇다면 감정이 순환하는 원리와 과정은 어떠한가? 아메드는 “정동적 경제affective economy”라고 부르는 모델로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맑시즘과 정신분석학을 빌려온다. 맑시즘을 수용하는 관점에서, 아메드는 감정이 자본과 유사하게 작동하며, 정동적 가치의 형태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축적된다고 본다. 감정의 대상들은 사회적 영역을 순환하며 분배된다. 맑스의 M-C-M 공식에서 ‘M’ 항이 순환을 통해 더 많은 자본 가치를 축적하게 되듯, 감정은 기호나 상품에 내재적인 가치가 아니라 그 사이를 순환하는 이동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다. 아메드는 “기호들 간의 움직임의 효과로 기호의 정동적 가치가 증대되며, 기호들이 더 순환할수록 그들은 더 정동적이게 된다”고 주장한다(45). 그러나 상품가치가 물건에서 감정을 소거한다고 보는 맑스와 달리, 아메드는 정작 소거되는 것이 감정의 생성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느낌은 물신화되어, 생성되고 순환하는 대상의 역사를 지우면서 대상에 귀속되는 특질로 받아들여진다(11). 또한 아메드는 이러한 순환의 원리를 취할 뿐,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같은 개념들을 엄밀히 구분하여 도입하지는 않겠다고 명시한다(45).
한편 정신분석학을 수용하는 관점에서 아메드는 의식으로부터 억압되는 것이 느낌이 아니라, 최초에 그 느낌이 임시로 연결되었던 생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적 관점과도 달리 아메드는 이러한 감정의 순환경제를 주체의 심리적인 영역으로 돌려보내기를 거부한다. 아메드는 감정이 “누군가나 무언가에 거주”하지 않으며, 주체는 “경제 속에서의 하나의 교점에 불과하다”고 특히 강조한다(46). 정동 경제의 체계에서 감정은 일종의 행위자가 되어 개인을 집단으로 정렬하고, 신체적 공간을 사회적 공간으로 정렬한다. 이러한 경제에서 움직이며 축적되는 정동적 가치는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신체의 ‘표면’을 조형하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그리하여 신체와 세계의 표면이 어떤 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게 한다. 하나의 사례를 보자면, 아메드는 ‘가짜 망명 신청자’를 통해 어떻게 정동의 순환이 물질적인 신체를 결정하는지를 설명한다. 가짜 망명 신청자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속임수를 쓰는 소위 ‘혐오스러운’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진정한 망명 신청자와 가짜 망명 신청자는 겉으로 보이는 육신적 모습만으로는 구분되지 않는다. 이 구분 불가능성은 곧 국경을 가로질러 넘어오는 어떤 몸들이든 ‘가짜’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된다. 그러한 ‘가짜’ 몸들은 조국의 ‘국가적 몸’이 상해를 입는 원인으로 상정된다. 상해의 기호로서의 명망자들은 마치 유령과 같이, 고정된 개념을 갖지 못한 채 어디에든 있고 누구든 될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가짜 망명 신청자의 형상은 특정한 몸들에서 떨어져나간다. “혐오 감정을 특정한 몸에 환원시키는 것의 불가능성은 혐오가 어떤 이들을 경제적인 의미에서 순환할 수 있게 한다. 이때 혐오는 어떤 이들을 다른 이들과 구분하며, 이 구분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다른 이들을 기다리면서 결코 “종결되지” 않는다”(2004: 123). 따라서 아메드에게 이방인은 국경을 가로지르는 특정한 누군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부적절한 신체로서 간주되는 몸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체가 부적절하다는 인식은 인식 이전의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역사에 의해 매개된다.
위의 논리는 『감정의 문화정치학』 4장에서 드러나는 역겨움과 더러움의 문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아메드는 벌거벗은 원주민이 자신이 먹던 음식을 만지자 역겨워하는 다윈의 진술을 제시한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은 원주민의 손이 더러워 보이지 않았음에도 다윈이 역겨움을 느꼈다는 사실이다. 아메드는 다윈의 이야기에서 타자로서의 원주민이 이미 더러움으로 독해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메드는 단순히 나쁜 대상들이 ‘우리’의 몸과 합일되는 것이 문제라고 보지 않고, “그 대상들에 내재한다고 여겨지는 특질”로서 무엇이 나쁘다고 “지정designation”된다는 것에 주목한다(82). 더 나아가, 역겨움은 “친숙함”과 “낯섦”의 문제이며, “타자의 몸들의 근접성”은 그러한 타자가 “나보다 이질적이고stranger-than-me 또 우리에게 이질적일stranger-to-us 때” 역겨움의 원인이 된다(83). 그런 면에서 아메드에게 역겨움은 타자의 인상을 미리 결정하는 사유로 매개되는 문화인지적인 감정이다.
4. 나가며
2020년 초, 완전한 무지의 상태로 겪던 불안과 혼란은 잦아들어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팬데믹과 더불어 굳어진 공동체의 경계들을 마주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바대로 경계를 들고 나는 일은 이전보다도 더욱 까다로운 것이 되었으며, 이방인을 향한 공포와 이방인의 고립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여전히 곳곳에 만연하다. 이러한 질문은 현재 대한민국 사회를 살아가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상황과도 시의적 연관을 맺고 있다. 외국인 근로자의 다수는 고용 상태가 불안정하며 낮은 임금을 지급하는 일자리에 종사하는 탓이다. 한 연구는 코로나 19 사태 이후 외국인 근로자들이 겪는 삶의 주요한 위기를 크게 열한 가지 국면으로 분석하였다. 그러한 국면들 중 하나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고립이 심화되면서 '사회망 안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외톨이 이방인'이라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자기의식을 보여준다. (심미승, 박지현, 2021: 56)
이방인. 낯선 자. 그는 말하지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땅 위에 서 있지만 자신이 뿌리내릴 땅을 갖지 못한다. 어떤 말이나 땅도 그 언어와 장소에 낯선 이에게는 온전히 주어지지 않는 까닭이다. 크리스테바와 아메드는 이방인들의 ‘낯섦’을 규정하는 토대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론가들에 속한다. 이들의 글은 단순히 차이를 동질성으로서 포용하는,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슬로건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 이들은 이방인을 이방인이게 하는 낯섦이 ‘누구’의 ‘것’도 아님을 드러내 보이며, 그러한 낯섦이 왜 누군가에게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는지 질문한다. ‘우리’는 ‘이방인’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를 둘러싼 이 경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그것이 팬데믹 시대의 윤리가 될 수 있을까? 두 사람의 글을 통해 이러한 질문을 되짚어 보며, 낯섦의 윤리를 고찰하는 작업으로 팬데믹 시대가 요청하는 질문을 다시 한 번 고민해 볼 수 있지 않을지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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