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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아도 우리는]자본주의 가부장체제에 질문을 던지는 여성감독들의 다큐멘터리 <외박>, <아무도 꾸지 않은 꿈>, <깃발 창공 파티>

고정갑희(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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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여성노동자들이 사는 세상에 대해 다른 듯 같은 이야기를 던지는 여성감독들과 그들이 만난 현장의 여성노동자들, 노동운동가들을 만난다. 세 편의 다큐멘터리는 여성노동자들을 따라가면서 묻는다.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이며 여성/노동자들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어디를 향할 것인지를 묻는다. <외박>, <아무도 꾸지 않은 꿈>, <깃발 창공 파티>는 영화를 본 사람들의 마음속에 시대와 세상에 대한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세 편의 다큐멘터리는 역설적이게도 멋진 여성들을 우리 앞에 드러낸다. 가부장체제가 자본주의의 모습을 띠고 지배하는 세상에서 노동하는 여성들이 멋지기는 어렵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지배에 굴하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이자 노동운동가들인 여성들은 멋지기까지 하다. 척박한 땅에서 보호막 하나 없는 세상에 자신들의 온 몸으로 세상의 바람을 맞으며 부딪치며 자기 삶을 개척하는 공장노동자 여성들도 늠름하다. 세 편의 다큐멘터리는 척박한 세상에서 여성노동자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치열함을 혹은 자본과 공권력에 맞서 싸우는 치열함을 드러낸다.

 

자본주의-가부장체제 시대가 만드는 척박한 세상에서 여성들은 세상을 떠받치고 있으나 가정에서는 부불노동을, 임노동 현장에서는 저임금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노동운동 현장에서조차 노동자로 불리지 않거나 주역이 아니었다. 세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는 공장노동자 여성들과 서비스노동자 여성들의 힘든 현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에 맞서서 온 몸으로 바람을 맞는 여성노동자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성들은 이 현실과 현장에서 쳇바퀴 돌 듯 노동하며 저임금과 비정규직노동자로서의 삶을 단순히 살아가지 않는다. 세상에 대해 자신에 대해 질문을 하며 행동하는 쪽으로 움직여 간다. <아무도 꾸지 않는 꿈>이 척박한 현실을 보여주면서 왜 세상이 이러한지 묻는다면, <외박>과 <깃발, 창공, 파티>는 그런 세상에 대해 온 몸으로 저항하고 싸움을 거는 투지를 보인다. 자본과 가부장체제에 대해 점거농성으로 임금투쟁으로 집단해고와 폐쇄에 맞선다. 엄마이자 아내이기도 한 여성들은 외박과 파업으로 자본에 맞서 투쟁하고, 자본의 계략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파티처럼 놀이처럼 회사에 맞장 뜨는 노동조합 임원으로 선봉에 선다. 그리고 끈끈한 연대와 동지애를 보여준다.

 

● 다큐1. 510일 점거농성 파업으로 이랜드 자본을 굴복시킨 여성노동자들:

비정규직 여성/노동/운동가들의 투쟁사, <외박>

 

<외박>은 2007년 6월에서 2008년 11월 까지 510일 동안의 치열한 파업투쟁을 통해 여성노동운동사, 비정규직 노동운동사를 새롭게 쓴 월드컵 상암 홈에버 판매대 노동자들의 투쟁사다. 이들의 투쟁을 따라가는 영화는 여성/노동이 처한 문제들을 드러낸다. 가정과 노동의 관계, 여성과 여성노동자라는 정체성의 문제, 비정규직보호법과 여성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 민주노총이 갖는 정규직/남성중심성의 문제를 드러낸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하겠다고 마련된 ‘비정규직보호법’이 시행되기 하루 전에 이랜드 자본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해고한다. 여성노동자들이 주로 비정규직으로 고용되는 상황에서 ‘비정규직보호법’의 시행은 오히려 여성노동자들이 투쟁의 길을 가게 만들었다. 하루 아침에 갑작스러운 파면을 통보받은 500여명의 여성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보호법은 칼날이 되어 다가왔다. 이에 500여명의 여성노동자들이 뭉쳐서 홈에버 상암점을 점거한다. 처음 계획했던 1박2일은 510일이 되었다.

여성노동자들이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노동하는 원인 중 하나는 ‘가정’과 여성의 관계에서 온다. 가부장체제 하에서 여성이 가정에 있고, 여성이 가족을 위해 가사, 양육, 돌봄, 간병을 하는 것은 당연한, 자연스러운 일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여성의 노동을 자연적인 것으로 여기는가부장적 사고를 자본은 철저하게 활용한다. 사측은 ‘자연화된’ 여성의 노동력을 저임금으로 살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는 여성들이 ‘반찬값을 벌기 위해’ ‘아이들의 학원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때로는 여성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외박>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노동자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투쟁하는 노동자로서의 정체성 사이의 관계를 드러낸다. 그리고 엄마와 아내로서, 가정에 속한 여성으로서 자신들의 위치와 노동운동 투쟁 사이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여성노동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집밖에 몰랐던 아줌마”들이 “이제 가정일은 뒷전이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영화는 엄마와 아내로서의 위치를 각인시키는 남편의 손에 끌려 투쟁현장을 떠나게 된 경우도, 남편이 죽고 시어머니 간병을 하던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대형마트 노동이라는 임노동의 현장으로 나오게 된 경우를 통해서도, 가정과 가족 그리고 여성노동자의 관계를 보여준다.

<외박>은 여성들이 투쟁현장에서 자신의 새로운 자아를 찾는 모습을 보여준다. 투쟁현장은 여성들 사이의 연대의 공간으로, 소통의 공간으로 바뀐다. 웃음소리가 가득차고, 소풍이 되고 해방구가 된다. 경찰에 몸이 들려 끌려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관객들이 투쟁하는 여성노동자들에게서 활력을 느끼고, 힘을 느끼고 유쾌함마저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은 여성노동자들 스스로가 투쟁 공간을 해방구로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투쟁을 통해 사회적 자아를 발견하고, 부조리에 맞서는 힘을 스스로에게서 발견하면서 기존의 가부장체제적 사회가 요구하고 거기에 순응했던 여성들이 바뀌는 순간들을 만나게 된다.

<외박>은 노동운동 내부, 특히 민주노총의 정규직/남성중심성을 드러낸다. 대의원대회 중, 위원장이 “아줌마들”이라 함으로써 여성대의원이 동등한 “동지”이니 “사과”하라고 한 장면이 보여주듯이,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아줌마’가 된다. 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노동운동 내부에서 여성들이 임금노동자로서의 투쟁력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 중 하나가 된다. 2007년의 일이지만 2021년에도 여전히 여성은 노동현장과 노동운동 현장에서도 노동자로 동지로 여겨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원인으로 여성들의 주된 공간이 가정이라는 통념이 여전히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홈에버 투쟁은 ‘외박’에 그치지 않았다. 임금노동 현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이 치열한 싸움을 하는 모습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박’을 넘어 여성노동의 또 하나의 현장인 가정에서의 노동을 위한 투쟁으로 진전되지는 않았다.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이 더 근본적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가정에서 여성들이 하는 것이 노동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현재 유급노동이 된 가사노동은 임금노동으로 바뀌기도 했으며, 노동권 보장을 주장하는 단계에 있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내라는 전업주부 가사노동자의 노동은 여전히 ‘사랑’의 이름으로,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외박>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들의 가정에서의 일이 노동으로 인정되고, 자신의 가정에서의 노동 또한 지불노동이 되도록 만들어야, 여성들의 노동이 저임금, 저평가의 늪을 빠져나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09년에 상영된 <외박>이 가정과 일터, 가정과 투쟁 사이에서 분열된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이제 2021년 우리는 가정에서의 일도 노동임을 주장할 때가 된 것으로 보인다. 가정에서 가족을 위해 노동하는 것에도 사회적으로 임금이나 화폐를 지불할 수 있게 될 때, 여성들은 가정이든 공장이든 회사에서든 일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도 저평가되어 남성과 임금격차가 나지 않게 될 수 있다. 이제 잠시 잠간의 ‘외박’이 아니라, 510일의 ‘외박’이 아니라 가정과 일터를 분리하는 통념을 바꿀 때가 온 것으로 보인다. 엄마와 아내가 가정에서 지불노동이라는 가사노동을 한다고 해서 ‘사랑’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여성에게 붙은 ‘과잉희생’이 사라지는 것이다. 여성의 주부가사노동에 가치를 부여한다 즉 지불노동으로 만든다고 해서 여성을 모두 가사노동에 붙잡아 두는 것 또한 아니다. 김미례감독의 <외박> 다음 편을 기다려 보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큐2. 자본주의-가부장체제가 만드는 척박한 세상을 온 몸으로 살아가는 ‘공장’ 여성노동자들: <아무도 꾸지 않은 꿈>

 

자본주의라는 괴물은 인간을 기계로 만들고, 반복되는 기계적 노동을 통해 잉여를 남기며 모두를 쥐어짜기 하여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게 만든다. 가부장제를 자본주의적으로 전유하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체제는 그 중에서도 여성들에게 더 선택권을 주지 않는다. 빈곤한 10대 여성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공장 아니면 유흥업소라고 <아무도 꾸지 않은 꿈>은 말하고 싶어 한다.

영화는 왜 세계가 이러한지 묻는다. 구미를 ‘전자도시’로 치켜세우는 국가에 사는 여성노동자들은 공장노동이 삶의 전부가 된 이 시대와 세계를 살고 있다. 구미에는 태광, 갤럭시아 디스플레이, 구미 KEC 등의 공장이 있다. 이 세계에서 어떤 꿈을 꿀 수 있는지, 답은 거의 절망적이다. 이 도시에서 노동은 꿈을 잃어버렸고, 바람에 길을 맡겨 버렸으며,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이 도시가 만드는 욕망은 여성노동자의 절망과 맞닿아 있다.

<아무도 꾸지 않은 꿈>은 16살에 구미 태광에 들어가 일을 하기 시작했던 여성노동자가 하는 말로 시작한다. “한번 공순이는 영원한 공순이라고, 한번 공장에 발 들이면 못 벗어난다고. 난 스무살 때 그 말을 이해를 못했어요… 근데 어느 날 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공장밖에 없더라구요. 다시 공장으로 가는거에요.” 공장 생활 10년째지만 정규직으로 일해 본 경험이 없다. 영화는 19세에서 37세까지 구미에서 공장 노동을 하는 15명 여성들의 인터뷰로 구성된다. 인터뷰를 통해 드러나는 노동은 이 시대의 부조리를 드러낸다. 구미의 아침과 밤은 감정이 없다. 여성노동자들이 출근하기 위해 통근 버스를 기다리는 곳과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밤의 도시를 비춘다. 밤의 도시는 유흥업소 간판 속의 여성들을 비춘다. 그리고 영화는 바람과 비에 찢기기도 한 구인광고와 원룸광고들이 붙어 있는 벽보에 시선을 주기도 한다.

구미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따라 감독은 이 세상에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며, 왜 세상은 이러한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을 최승자의 시 ‘왜, 세계는’을 자막으로 삼아 묻고 답한다. ”바람이 독점한 세상, 저 드센 바람 함대“의 지상에서 이미 ”너의 집“은 깨어진 상태다. 욕망과 절망 사이에서 세상의 드센 바람 속에 여성노동자들의 꿈과 현실이 있다. 이 현실은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는 노동 현장이며, 다르게 살 수 있는 길은 막혀 있다. ”한 사회의 아마도 광대한 몇 바퀴의 헛바퀴와/ 한 개인의 아마도 무수한 개미 쳇바퀴가/ 여전히 맞물려 돌아가면서/잘 구도된, 또 하나의 완벽한 폐허를 향해 전진해 가고” 있다. 이 세계를 향해 최승자시인과 홍효은감독은 “각성하라/ 너희의 꿈을 뒤덮을/ 홍수가 진행되고 있다./그리고 너희에겐 되돌아갈 땅,/세습의 땅도 없다.”라는 경고를 보낸다.

<아무도 꾸지 않은 꿈>이 드러내고 싶은 세계는 10대에 공장에 취직하여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 그 길을 계속 가야하는 현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에 대한 고발과 경고를 담는다. 노동에 대한 경고를 넘어 대안이 없는, 출구가 막힌, 구성원에게 아무런 보호막도 제공하지 않는 사회 전체와 시대에 대한 경고를 담는다. 최근 한국에서 SNS를 중심으로 청년시국선언이 있었다. 세대가 아니라 시대가 실패했다는 내용의 선언이면서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자본주의-가부장체제 시대에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 모두는 자본의 홍수에 잠겨 되돌아갈 땅이 없다고 영화는 말한다. 이 말은 노동운동을 넘어, 자본에 맞서는 투쟁을 넘어 자본주의 가부장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할 인식과 방안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담는 것으로 읽힌다.

 

 

다큐3. 8년 투쟁의 선봉에 선 KEC 지회 여성지도부의 투쟁 형식과 내용:

--<깃발, 창공, 파티>

 

 

<깃발, 창공, 파티>는 구미 KEC 지회의 노동운동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금속노조 KEC 구미지회의 투쟁을 키워드로 표현하면 ‘깃발과 파티’다. 노동조합 역사에서 드물게 여성지도부로 구성된 노조는 투쟁의 형식이 다르다. 카메라는 여성지도부로 구성된 노조투쟁의 독특함을 간간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따라간다. 투쟁 속에 파티가 아무렇지 않게 스며든다. 생일축하 케익과 회의 중에 등장하는 복숭아와 귤, 물놀이와 단합대회, 화투치기, 양말이야기가 단일호봉제 쟁취, 동일노동 동일임금, 교섭창구단일화, 기본급과 상여금 관계, 최저임금 삭감법 반대, 외주화 같은 투쟁 언어들과 자연스럽게 섞인다. 여성들의 서사구조, 담론의 특징이기도 하다. 경중이 따로 없다. 깃발과 파티를 함께 섞는다. 파티는 깃발에 스며들고, 깃발은 파티에 스며든다. 따라서 진지한 투쟁도 유쾌하게 비쳐진다.

 

복수노조 시대의 소수노조로서 투쟁하면서도 8년을 버티는 힘은 웃음과 놀이와 사소함을 잃지 않는 데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구미 KEC는 노조에 여성지도부가 들어선 첫 사례라 한다. 2017년 여성지회장과 수석, 여성교육국장으로 지도부가 구성되었다. 지도부는 회사의 임금차별, 남녀차별에 민감하다. 그리고 KEC 임원들이 된 여성들에게서 다른 여성서사를 만난다. 이들은 흔히 여성들이 하는 그런 방식의 공간을 만든다. 치열하면서도 웃음을 담고, 파티를 열고, 노조이야기를 하다가 양말이야기를 한다. “어제부터 수석 왜 나하고 똑같은 양말 신어”라는 말, 그 앞 뒤에는 ‘진지한’ 투쟁이야기가 들어간다. 생일이라고 케익을 놓고 노조원/간부/임원들이 모이고, 아주 맛나게 보이는 복숭아를 먹기도 하고, 귤 하나가 예쁘게 문건 위에 올려져있기도 한다. 여성지도부의 섬세함이면서 동시에 장윤미감독의 섬세함이기도 하다. 투쟁 복돼지 저금통을 비추는 시선 또한 그렇다. “21세기 세계 초우량 반도체 전문회사 KEC” 나무젓가락 종이집을 몇 번 비추는 시선 또한 그렇다. 진지하게 노조 관련 용어들을 설명하는 여성교육국장은 지회장과 수석과 화투를 친다.

투쟁의 내용 또한 세세하다. 복수노조 시대에 어용노조를 활용하는 회사와 싸우는 구미에는 KEC 지회는 단일호봉제, 임금인상, 외주화 반대를 관철하려 한다. 단일호봉제는 임금차별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보고, 회사가 노동자를 나누어 등급화하고 차등화하는 것과 맞서야만 노동자들의 권리침해가 덜해 질 수 있다고 본다. 회사는 같은 등급 내에서도 1, 2, 3(J1, J2, J3...S1, S2)으로 나누는 방식으로 노동과 노동자들을 통제한다. 등급을 나누는 기준에 성별이 포함된다. 최저임금법 개악 저지를 놓고 싸운다. “1억 4천만원 받는 국회의원이 모여 천만넘는 비정규직의” 최저임금 삭감법을 통과시켰다는 날선 비판을 한다. 꼼꼼하게 임금 및 단체협약 요구안 비교표를 검토한다.

 

 

<나가며: 자본주의 가부장체제에 전면적 싸움을 건다는 것은>

 

세 편의 다큐멘터리는 자본주의-가부장체제 하의 여성/노동/운동을 보여준다. 자본이 만드는 바람 속에서 여성/노동/운동의 출구와 대안을 만드는 길은 무엇일까?

먼저, 자본주의의 속성을 파악하는 일이 출구와 대안을 찾기 위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이 속성을 파악하는 일은 자본주의를 가부장체제와 연동시키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자본-노동의 관계는 자본과 성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자본과 여성노동의 관계를 보는 일은 무엇이 여성노동이고, 누가 여성노동자인지 새롭게 정의하는 일이다. 자본은 여성들을 배치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낙인을 찍게 만들기도 한다. 임신출산은 노동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주부 가사노동을 하는 여성들은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매매 현장의 노동은 노동이 아니라고 한다. “나누고 차등화하여 통치한다”는 전략은 자본주의-가부장체제의 전략이다. 어떤 것은 노동이고, 어떤 것은 노동이 아니라고 말하고, 가치의 등급을 매긴다. 여성노동자들을 갈라놓는 자본주의-가부장체제는 가치를 다르게 매기는 것, 임금을 다르게 매기는 것, 어떤 것은 노동이 아니라는 것으로 전략을 펼친다. 이 전략을 간파하고 자본주의 가부장체제의 가치체계를 바꾸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가부장체제와의 전면적 싸움은 일차적으로 여성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오래 전 다양한 여성노동자들이 색색의 깃발을 여의도 창공에 휘날리며 총파업을 하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여의도는 세계의 곳곳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노동자들이 모여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을 펼치기 위해 깃발들을 높이 드는 꿈이다. 임신출산노동자, 전업주부 가사노동자, 청소와 세탁과 음식을 담당하는 유급가사노동자, 성노동자라 불리는 섹스노동자, 양육과 돌봄과 간병을 담당하는 노동자, 공장노동자를 포함한 여성임금노동자들이 모이는 꿈이다. 다양한 여성노동자들이 모인다는 것은 자본주의-가부장체제가 아닌 다른 시대를 만들어갈 꿈을 현실화하는 공간들을 마련한다는 의미다. 여성노동자들이 자본주의 가부장체제의 바람에 주저앉지 않고, 함께 모여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대안을 제시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기존의 노동의 범주를 바꾸고, 노동자의 개념을 바꾸고, 노동운동을 바꾸고, 노총을 바꾸는 시도가 필요하다. 이는 기존의 가부장적, 남성중심적, 이성애중심적, 그리고 인간중심적인 노동/운동을 전환하는 물결을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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