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줌인 GP]2019년 홍콩은 어떤 모순 속에서 어떻게 싸워왔는가?

홍명교(플랫폼 c)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홍콩 항쟁을 둘러싼 모순과 두 자본주의의 충돌

 

2018년 개혁개방(改革开放) 40주년과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화려하게 보내려 했던 중국공산당은 바람과는 달리 혼란스럽고 불안한 한 해를 보내야 했다. 바깥으로는 트럼프에 의해 촉발된 무역 분쟁으로 경제적 긴장이 가속화됐고, 안으로는 전국적 규모의 노동쟁의와 정치적 성격이 강화된 학생-노동자 간 연대 저항이 부상했다. 이는 코뿔소처럼 달려오던 시진핑(习近平) 주석의 리더쉽을 손상시켰고, 지배 엘리트 내 의구심을 낳았다. 오른쪽에서는 지배 엘리트내 우파들의 견제를 키웠고, 왼쪽에서는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마오주의 좌파들의 경고를 일깨웠다.

개혁개방 40년을 성대하게 평가하고자 했던 의도는 적지 않게 손상됐다. 2018년 한 해 타워크레인 파업·덤프트럭 파업 등 전국적 규모의 노동자 집단 투쟁이 발생했고, 여러 도시에서 디디추싱 등 플랫폼 노동자와 제조업 공장 및 서비스업 노동자들의 쟁의가 줄을 이었다. 특히 자쓰커지 공장 노동자들의 공회 설립 투쟁이 극심한 탄압에 직면하기도 했다. 일부 마오주의 좌파 그룹은 당면한 중국의 위기가 신자유주의의 실패라고 비판했다. 막대한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불평등은 가속화되고 경제 모순은 심화되는 현실에 대한 우회적 비판이 쏟아졌다.

사실 중국의 정치‧경제적 위기에 대한 경고음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2008-09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의해 촉발된 세계 금융위기 이후 중국의 고공 성장가도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2010년 혼다자동차 포산공장 파업을 기점으로 촉발된 연안지역에서의 신세대 농민공 파업의 물결은 새로운 노동자계급의 출현을 알리고 있었다. 대중운동 속에서 새롭게 성장한 광둥성의 노동운동가들은 중국 정부로 하여금 통치 안정성을 위협하는 ‘사회 불안 세력’으로 간주됐다. 2015년 이래 강화된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은 2019년 초를 기점으로 극단으로 치달았다. 현재까지 약 100여 명의 활동가들이 체포됐는데, 자생적 노동운동가부터 마오 좌파 학생운동가·여성운동가 등을 가리지 않았다.

중국 대륙 내에서 체포된 활동가들과 홍콩 직공맹의 석방 요구 집회 홍보물

2019년 홍콩에서 촉발된 반송중 운동(返送種運動; 혹은 ‘홍콩 항쟁’)은 상기한 대륙의 정치·경제적 위기와 맞닿아 있다. 2019년 홍콩특별행정구 정부는 1년 전 있었던 한 남성의 여자친구 살인사건을 빌미 삼아 범죄인 송환 조례를 개정하겠다고 공포했다. 이는 홍콩 시민사회운동의 즉각적인 반발을 낳았다. 홍콩의 시민사회운동 진영은 3월부터 6월까지 이어진 집회들을 통해 이 법안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했다. 가깝게는 직전까지 자행된 대륙 내의 사회운동 탄압, 멀리는 5년 전의 우산 운동과 몇 차례의 납치 사건 등 추문들이 이 법안에 숨겨진 정치적 의도와 연결돼 사회적 맥락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홍콩 항쟁은 6월 이후 현재까지 2019년 글로벌 뉴스 지면을 장식하는 뜨거운 쟁점이 됐다. 이 글은 홍콩 항쟁의 흐름을 시간순으로 간략하게 짚어보고, 홍콩 항쟁이 관통하는 쟁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쟁점은 어떤 모순점이 있는지 짚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대면해야 하는 질문들을 통해, 작금의 홍콩 항쟁이 왜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와 연결되어 있으며, 동시에 한국 사회의 모순과 동떨어져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고자 한다. 비록 이 글이 홍콩 사회의 복잡한 모순을 충분히 분석하지는 못하지만, 여러 분석들을 자료 삼아 개략적인 소묘를 그리고, 홍콩 항쟁을 둘러싼 한국 내 토론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

홍콩 항쟁의 흐름

시민사회운동 차원의 항의성 캠페인에 불과했던 시위 규모가 대규모 항쟁으로 촉발된 건 6월 9일이었다. 6월 9일 103만 명, 12일 80만 명, 16일 200만 명이 참가하면서 홍콩 역사의 전무후무한, 2014년 우산 운동을 상회하는 대규모-장기간 항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2020년 새해 첫날 개최된 원단행진 투쟁에도 103만 명 이상의 시민이 집결하면서 해를 걸친 대규모 저항이 이어지고 있다.

6월 한 달 간의 최대 쟁점은 직면한 ‘범죄인 송환 조례’ 통과를 저지할 수 있느냐에 있었다. 매우 긴박한 입법 스케쥴은 시위를 격화시키기에 충분했다. 덧붙여 홍콩 경찰 당국은 시위 초기부터 매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6월 9일 밤부터 최루액이 등장했고, 이는 밤 사이 청년 시위대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초기 20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주요 시위 대오는 검정색 옷과 마스크, 고글을 착용하고 경찰에 대항했다. 모바일 보안이 강조됐으며, 프라이버시를 지키면서 보다 강력한 형식의 항쟁이 강한 동의의 지반을 형성했다. 이런 강경 기조는 우산 운동의 실패에 대한 청년 세대의 평가에서 비롯된다. 온건한 시위 방식, 정부나 경찰에 대해 뭔가 기대하는 것은 순진했다는 생각이 20대 전반이 내린 평가였다.

애당초 시위는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시위 초기부터 ‘열사’가 등장했고, 그중엔 20대 여성도 있었다. 어떤 요구도 포기해선 안 된다는 비타협적 기조가 형성됐고, 홍콩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한다는 생각이 ‘용무파(勇武派)’를 형성했다. 용무파는 대오 맨 앞에 서서 우산과 각종 보호도구로 무장한 청년 시위대를 일컫는다. 이들은 우산 운동 때보다 확연하게 진화된 형태를 보였다. 거리의 감시 카메라를 무력화했으며, 모든 수단을 다 해 바리케이트를 쌓았다. 6월 말 행정부처 건물들을 무력화하는 시위를 전개하다가 급기야 30일에는 입법회 건물 입구를 공격해 2시간 동안 입법회 의사당을 점거하기도 했다.

몇 년 간 입법회 건물은 홍콩 시민들에게 ‘패배’의 상징이었다. 우산 운동의 패배는 이 공간 앞에서 강하게 확인되곤 했다. 홍콩에서 만난 한 시민은 몇 년 동안 그 근처를 지나간 적이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이 점거가 매우 충격적인 타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위 방식의 찬반양론을 거의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평화 시위를 지지하는 시민들조차 오히려 이 점거 투쟁이 있었기에 항쟁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우산 운동이 과격파와 온건파 간 거센 논쟁으로 허무하고 무기력하게 끝난 것과 비교해 확연하게 달라진 점이었다.

시위 전개 과정에서 홍콩 시민들의 여론이 확연하게 이반됐다. 캐리 람 행정장관을 비롯한 주요 고위 관료들이 시민들에게 ‘애국’과 ‘질서’를 강조했지만, 정작 그들의 가족들의 국적은 영국이나 캐나다로 바뀌어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폭력은 갈수록 시민들의 분노를 증폭시켰다. 당초 범죄인 송환조례 자체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된 시위는 경찰폭력과 정부에 대한 총체적인 분노로 번졌다.

7월이 되자 시위 규모는 다소 줄었으나 연령대별로 주체들이 다양해졌고, 시위 장소 역시 도시 전역으로 확대됐다. 주말에는 도심 내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지만, 주중에는 지역별로 다양한 저항들이 펼쳐졌다. 사구(社嘔)별 행진이나 파업이 제기됐고, 그간 지역주민 운동을 펼쳐온 여러 세력들이 앞장섰다. 7월 5일엔 엄마들의 집회가, 17일엔 노인들의 집회가 열렸고, 13일엔 지역별 동시다발적으로 집회가 열렸다.

경찰의 대응 역시 강화됐다. 경찰이 난사하는 고무탄과 최루탄에 부상자가 속출했고, 원인 불명의 사망자도 등장했다. 특히 7월 22일 새벽 위엔롱역에서는 끔찍한 백색테러가 등장하기도 했다. 흰색 티셔츠를 입은 익명의 남성 100여 명은 귀가하려던 시위 참가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폭력을 자행했다. 하지만 이런 강경대응과 백색테러가 항쟁의 기운을 누그러뜨리기는커녕 보다 격화된 저항을 낳을 뿐이었다. 홍콩 시민들은 다양하게 역할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일반 참가자들은 소그룹을 형성해 함께 다니기 시작했고, 대규모 시위가 열리면 각자 본연의 역할을 맡았다. 민주파 인사들 역시 마찬가지인데, 어떤 이들은 국제연대를 호소하는 일을 했고, 어떤 이들은 시위에서의 국가폭력을 감시했으며, 누군가는 의료 지원이나 영상 중계, 혹은 법률 지원을 맡았다. 2000년대 이후 성장한 홍콩 ‘시민사회’가 그 물질적 토대였다.

8월이 되자 시위는 보다 격화됐고, 탄압도 더 거세졌다. 8월 5일, 노동운동 세력은 파업을 성공적으로 일으켰지만 지속적인 파업은 끌어내지 못했다. 노조 조직력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7일에는 레이저 시위가 있었는데, 레이저 포인터를 ‘공격 무기’라고 지목하는 경찰에 반박하기 위한 퍼포먼스였다. 그러다 11일, 경찰이 쏜 고무탄에 의해 한 여성이 실명 위기에 빠지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한쪽 눈을 가리는 인증샷을 통해 홍콩경찰의 폭력에 항의했다. 8월 중순부터 시위대는 공항을 마비시키는 행동에 돌입했고, 8월 말이 되자 중학생들이 집단적인 참가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또한 31일에는 프린스에드워드역에서 무자비한 경찰 폭력이 자행됐다. MTR(Mass Transit Railway: 홍콩철로유한공사)은 지하철 운행을 멈춰 경찰 폭력에 협조했다. 이로 인해 MTR에 대한 시민의 분노가 치솟았고, 지하철역에 대한 방화 공격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9월 이래 청소년 참가가 눈에 띄게 늘기 시작했다. 그간 부모의 만류로 시위 참가를 하지 못했던 많은 청소년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에 동참했다. 새 학기를 맞은 동맹휴업, 등교 중 한 시간 인간띠 잇기 시위, 학교에서의 국가 제창 거부, 집단적인 구호 제창 등 중학교들이 들썩였다. 문화적 저항도 확장됐다. 홍콩 항쟁을 상징하는 노래가 등장해 많은 사람들이 노래를 함께 부르는 방식으로 시위하기 시작했다. 이는 용무파가 아닌 대다수 시민들이 저항에 동참할 수 있는 기제가 됐다.

저항이 그칠줄 모르자 홍콩 경찰은 진압의 수준을 매우 크게 높였다. 살인적 수준의 경찰폭력이 쏟아졌다. 물대포가 등장해 시도 때도 없이 시민들을 향해 직사했고, 최루탄은 시민들의 얼굴을 곧바로 향했다. 반면 용무파는 곳곳에 불을 질렀고, 백색테러는 이곳저곳에서 일어났다. 도시 어디에도 안전한 공간은 없었다. 일반 시민들은 백화점 등의 공간 안에서 노래를 부르는 방식으로 저항을 이어나가야 했다. 그런 가운데 9월 29일 우산 운동 5주년을 맞이했고, 이는 홍콩 항쟁이 잠시 숨을 돌릴 틈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10월이 되자 극단적 형태의 경찰 폭력이 벌어졌다. 10월 1일, 한 경찰은 17살 시위대에게 총을 발사했다. 천만다행으로 총알은 폐를 빗겨나갔고 소년은 목숨을 보전했지만, 시민들의 분노를 더 크게 촉발시켰다. 이런 가운데 캐리 람 행정장관은 이른바 ‘복면금지법’으로 알려진 ‘긴급법’을 발동했다. 복면을 착용하는 모든 시민을 연행할 수 있도록 한 조치였다. 이는 홍콩 경찰에게 날개를 달아주었고, 곳곳에서 무자비한 곤봉 세례가 등장했다. 매일 같이 수많은 시민들이 경찰이 두드리는 곤봉에 의해 피흘리거나 붙잡혀갔다.

그러던 중 11월 초, 한 대학생이 경찰에 쫓겨 도망치다가 주차장 건물 3층에서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경을 헤매던 그는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는 대학생들을 필사적으로 싸우게 했다. 친구를 잃은 수많은 학생들이 용무파가 됐다. 홍콩 경찰은 대학생들이 홍콩 시위의 최전선에 있다고 판단하고 각 대학 캠퍼스를 공략했다. 먼저 표적이 된 건 학생운동이 가장 활발한 홍콩중문대학이었다. 중문대 학생들은 이틀 내내 치열하게 싸웠다. 화염병과 최루탄 수천여 개가 쏟아졌다.

홍콩 경찰이 다음 표적으로 삼은 건 홍콩이공대학(The Hong Kong Polytechnic University)이었다. 침사추이 동쪽 도심 속에 위치한 이 캠퍼스는 홍콩 경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됐다. 수백 명의 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캠퍼스를 지키려 했다. 열흘간 이어진 공방전은 비참하게 끝났지만, 그 사이 시민들은 포위된 이공대 학생들을 지키기 위한 시위를 이어나갔다.

이 공방이 끝난 건 11월 23일 구의회 선거 승리 때문이었다. 민주파는 전무후 무한 선거 승리를 통해 18개 구 중 17개 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쥐었다. 민주파 선거연맹에 함께 한 후보라면 깃발만 내걸어도 승리한 사례가 줄을 이었다. 심지어 민주파 지지가 강한 몇 개 구에서는 모든 의석을 차지하기도 했다. 홍콩 민간인권진선 의장이었던 지미 샴 등은 이 선거를 통해 구의원이 되어 다시 전선으로 돌아왔다.

12월 8일, 몇 달만에 열린 민간인권진선 주최 집회에서 80만여 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시민들은 선거 승리 이후에도 이 항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대규모 시위를 통해 증명했다. 경찰 폭력에 대한 강력한 규탄이 이어졌다. 용무파에 탄압과 체포가 이어지고 있고 지금까지 체포자가 무려 6천 명에 이르지만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한국 사회 내 논의의 한계

최근 홍콩 항쟁은 이주자들과의 연대, 전 업종에 걸친 노동조합 가입 캠페인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런 점들은 홍콩 항쟁이 갖고 있던 일부 우익적 성격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는 요소다. 왜 이런 방식으로 발전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면밀한 고찰이 필요하다. 하지만 홍콩 항쟁에 대한 국내 논의는 대부분 매우 단편적이다. 주류 언론들은 홍콩 시위의 일면만을 부각시키며 왜곡된 스토리를 전달하는 것에만 흥미를 보이고 있다. 이를테면 홍콩 항쟁 초기에 잠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렸던 사건이나, 광주 항쟁에 대한 몇몇 홍콩 활동가의 멘트를 빌어 마치 홍콩 시민들이 한국의 “발전된 민주주의”를 학습해 시위를 진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는 등 구색 맞추기식 보도가 많았다.

또 시위 양상에 대해서도 그것의 사회적 맥락이나 홍콩 경찰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분석을 생략하고, 시위의 폭력 양상이나 과격성 등 표면에 대한 겉핥기 보도, 중국 대륙에서 인민해방군이 진입하느냐 마느냐 등에 대한 논란 등 주마간산(走馬看山)식 보도도 많았다. 이런 전달은 홍콩 항쟁에 대한 국내 수용을 단순화시킬 뿐이다.

시민사회 내에서의 논의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한편에서는 좌우 양편의 심정적 지지를 얻었지만, 일부 구좌파 사이에서는 중국 관방언론이나 구좌파 들의 음모론을 뒤섞은 의구심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같은 몰이해는 홍콩 사회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것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는 국제주의적 시각의 공백을 낳으며, 동아시아 정세와 정실자본주의에 의해 잠식된 현대 중국의 모순에 대한 통찰을 놓치게 한다.

기실 홍콩 항쟁은 150년 식민지 역사의 모순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위기 국면의 미-중간 대결이라는 국제 정세, 홍콩이라는 금융도시의 분업화된 노동 구조와 이주노동, 전통적인 부동산 재벌 체제와 불평등 문제, 중국 대륙 내부 사회운동과 홍콩 시민사회의 관계 등 다양한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혼재돼 있다. 이렇게 뒤섞여 다양한 세력관계에 의해 발산되고 있는 모순들에 대해 총체적으로 사고하지 않으면, 홍콩 항쟁이 왜 이토록 격렬하게 지속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우며, 자칫 복고적이며 이원론적인 세계관으로 문제를 단순화시킬 우려가 크다. 이런 단순화는 홍콩 정세에 대한 통찰을 놓치게 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모순을 가린다.

홍콩이라는 식민지 체제

오늘날 홍콩 시위의 풍경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이미지가 하나 있다면 영국 식민지 시절 홍콩 깃발이다. 간혹 유니온잭이 보이기도 하고, 성조기도 등장했다. 민주화 시위에서 이런 풍경을 목격하게 되면, 우리로선 당황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와 식민지가 무슨 상관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 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한국의 여러 시위들 중에서 성조기가 나오는 장소는 극우 주의자들의 시위 현장이다. 그래서 생경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중국 정부나 중국 대륙 사람들은 바로 이런 점을 들어 이 시위가 서구 세력의 지원을 받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걸 우리는 안다. 식민지 시기 깃발을 드는 사람이 시위대 중 다수파가 아니기도 할 뿐더러, 단지 시위에 그 깃발이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시위라고 말할 순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홍콩 시민들은 국가에 대한 관념이 강하지 않고, 지극히 실용적으로 국제연대를 호소하기 위해 타국의 깃발을 든다는 취지가 발현된 측면이 크다. 따라서 이런 풍경을 우리의 시각으로 재단해선 안 된다.

아편전쟁 패배는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중국 지식인들의 인식을 뒤바꾼 결정적 사건이었다. 식민지 홍콩과 광저우와 상하이를 통한 서구 열강들의 난입은 19 세기 중국의 깨어있는 젊은 지식인들에게는 각성의 계기가 됐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중국에 수입될 근대 자본주의의 통로이기도 했다. 1927년 홍콩을 찾은 루쉰은 홍콩이 “하나의 섬에 불과하지만 중국 제 도시의 현재이자 미래”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장밋빛 미래를 그리는 청사진이 아니었다. 홍콩이라는 식민화된 도시는 ​서양인 주인-부유한 중국인 등을 제외하고는 피억압 민중에 대한 착취로 구축된 불평등 체제​였다.

식민지 홍콩의 역사엔 제국주의 권력에 맞선 저항의 역사 역시 존재한다. 1922년, 홍콩항에서 일하던 중국인 선원 노동자들은 56일에 걸쳐 파업했다. 이는 1919년 중국 5.4 운동 이래 막 태동하기 시작한 중국의 노동자운동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보인 첫 사건이었다. 이는 광저우 등 광둥성 일대 노동자운동의 고조로 이어졌다. 1925년 상하이에서 시작된 5.30 운동의 물결 역시 홍콩까지 이어졌다. 중국 각지에서 600여 개의 운동 조직이 결성됐고, 1700만 명에 달하는 이들이 시위에 참여했으며, 광둥-홍콩 파업(省港大罷工)으로 번졌다. 1967년 파업은 홍콩 현대사에서 매우 중대한 사건이다. 오랫동안 아주 값싼 노동력으로 일해온 노동자들의 증폭된 불만에 의해 촉발된 이 저항은 민주적 지식인과 학생들의 동참으로 이어졌고, 홍콩 내 공산주의자들도 동참하면서 거대한 투쟁이 된다.

이처럼 식민지 홍콩의 역사에서도 식민통치와 불평등에 맞선 역사가 있다. 그런데 홍콩 항쟁에선 왜 유니온잭이 서슴지 않고 등장하는가? 우선 명확한 차이가 하나 있다면 국가 관념에 대한 차이다. 종별적인 도시국가 체제를 150년 가까이 지속해온 홍콩은 국가주의적 관념이 희박하다. 그렇기에 국기를 든다는 것의 의미를 한국인들만큼 두지 않는다. 그저 ‘연대를 요청한다’ 정도의 취지로 봐야 한다는 게 대다수 홍콩 시민들의 해석이다. 나아가 식민지 홍콩의 역사에서 저항의 주체들은 반환 이후에는 대부분 주류 통치그룹에 편입되면서 역사적 단절을 겪었다. 그러면서 지난 10년 사이 홍콩 시민들의 경제적 조건은 나아지기는커녕 악화됐고, 정치적 민주 역시 보장되지 않았다.

더구나 전후 홍콩에서 ‘좌파’는 친중국공산당이었고, ‘우파’는 친국민당이었다. 친중파들은 계급투쟁과 반제국주의를 강조했지만, ‘애국’ 역시도 중요했다. 문화혁명 이후 ‘애국’은 중국 대륙 안팎을 막론하고 계급투쟁을 상회하는 가치였고, 홍콩 반환이 가까워질수록 이는 더 강해졌다. 홍콩 반환 시기까지 ‘좌파’라는 틀로 규정되던 이들 일부는 친정부 세력이 됐다. 대다수는 대중운동의 퇴조 속에서 사라졌지만, 어떤 이들은 식민지 시기의 지배세력들과 함께 정부 요직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런 역사적 기억 때문에 홍콩에서 ‘좌익’이 자신의 자리를 잡기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홍콩이 ‘조국’에 반환된 후에도 불평등 문제를 비롯한 사회적 모순은 현존했고 심지어 심화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애국’은 대중에게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반환 전까지 중국 대륙에 대한 막연한 자부심을 갖고 있던 홍콩 시민들에게 ‘중국공산당’은 홍콩인의 자유나 발전과는 무관한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중국 대륙은 거리를 두고 경계를 그어야 할 대상이 됐다. 물론 홍콩에도 여전히 노동자운동과 함께 하고 마르크스주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하는 좌파 활동가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규모가 미약하고, ‘좌’로 호명되는 일도 거의 없다. 민주파 내 좌파들은 그저 ‘민주파’로 통칭될 뿐이다. 이처럼 홍콩에서 민주와 좌우 구도는 애국의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런 가운데 반환 이후 홍콩에 형성된 ‘본토주의’는 두 가지 가능성을 함께 내포하고 있었다. 새로운 홍콩의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해 어지럽게 혼종된 본토·국민·국제도시 시민이라는 세 자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새로운 주체성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로서 그것이 쉽지는 않다. ​중국 당국은 홍콩 시민들의 보통선거 요구는 중국을 흔들려는 서구 패권세력의 배후 조종에 의한 것이라고만 보고 싶어하며, 민주파에 대해서도 이런 의구심을 거두지 않는다.

‘일국’양제인가, 일국‘양제’인가

오늘날 홍콩 내정을 관할하는 최고기구인 입법회의 역사는 식민지 홍콩이 막 시작된 18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입법회는 1884년 처음으로 선거를 실시하는데, 민간인 직능단체 대표가 의원이 되는 간접선거 구조였다. 이것이 1991년까지 이어졌고, 107년 간 홍콩 입법회 의원 선출은 완전히 간접선거였다. 입법회는 친영 조직 위주로 구성됐는데, 1984년 홍콩 반환협정이 결정된 이후 영국은 갑자기 홍콩에 선거민주주의를 이식한다. 비민주적인 식민통치를 펼쳐온 영국으로선 모순적 행위였지만, 어쨌든 1991년 홍콩 반환을 6년 앞두고 (60석 중 18석에 대한) 주민투표가 실시됐다.

1997년 반환 이후 중국 정부는 1995년 설립된 의회를 해산해 2년 임기의 임시 입법원을 만들었다. 그리곤 선거제도를 대폭 후퇴시킨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중첩된 모순들이 오늘날 홍콩 입법회 정치의 모순을 낳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홍콩의 행정장관 선거는 형식적으로는 자유선거를 표방하지만, 후보자는 두세 명으로 제한하고, 친중국 성향의 소수이익집단에 의해 지배되는 지명위원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현실을 적시했다. 이는 단일 정당의 공산주의 논리와 영국식 식민 전통의 혼합이다.

더구나 오늘날의 홍콩 체제에는 또 하나의 정치 모순이 중첩돼 있다. 바로 ‘일국양제(一國兩制)’다. 홍콩 반환의 과정에서 시민의 목소리는 철저히 배제됐다. 홍콩 시민들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던 반환 협상의 결과를 어느날 갑자기 신문을 통해 접해야 했다. 홍콩 반환은 대중운동의 결과가 아닌, 19세기 세계를 지배하던 제국과 오랫동안 1세계에 의해 괴물처럼 인식돼왔던 중화인민공화국 간 거래의 산물이었다.

신자유주의의 상징적 정치 리더였던 마가렛 대처가 왜 중국에게 홍콩 반환을 약속했을까? 포틀랜드 전쟁에서의 패전 이후 불리해진 국제 정세 속에서 반환 이후에도 홍콩을 통한 중국과의 경제 거래를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영국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약속받을 수 있고, 게다가 홍콩이라는 경제적 거점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국양제란 무엇이며, 중국 정부는 왜 일국양제 약속을 지키지 않는가? ​일국양제란 중국​의 “중국현대사회주의” 체제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조건부로 공존하는 정치제도다. 한 국가​ 안에 ​사회주의​•공산주의​ 정책과 ​민주주의​/자​본주의​ 정책을 유지하는 두 가지 체제를 인정하는 것 인데, ​영국​과의 홍콩 반환 협상에서 덩샤오핑(邓少平)이 제안한 것이 그 시발점이다.

“홍콩특별행정구는 사회주의 제도와 정책을 시행하지 아니하며, 원래의 자본주의 제도와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50년간 변동하지 아니한다.”
– 「​中华人民共和国香港特别行政区基本法」 제5조

중국의 주류 학자들은 “일국양제의 전제는 150년 간 다른 체제의 역사를 지내 온 홍콩 지역의 독특성을 인정하고, 고도의 자치성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보면서도, 그것은 온전히 중국이라는 국가 안에 속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고도의 자치성”에 대한 중국 정부의 규정과 홍콩 시민들의 바람에는 크나큰 간극이 있다. ‘일국양제’에서 중국 중앙정부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일국’이고, 홍콩 시민들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양제’다. 애당초 일국양제란 것에 대해 받아들이는 인식에 큰 차이가 있는 셈이다.

정치적으로 중국 정부는 50년 동안의 일국양제를 약속했다. 하지만 동시에 홍콩인들에게 ‘애국심’을 주입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면서 “홍콩인은 민족이나 국가의식이 결핍되어 있으며, 그들은 애국주의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봤다. 홍콩인의 입장에서 홍콩인을 본 게 아니라, 대륙 정치 엘리트의 입장에서 홍콩을 바라봤을 뿐이다. 그러니 중국 정부에게 홍콩이라는 이데올로기 공간을 ‘리밸런싱’하는 것은 지상 최고의 과제가 된다. 통용되는 언어를 보통화로 갈음하고, 현지 역사는 중국 국가 역사의 맥락 안으로 편입한다. 홍콩이라는 독특한 문화공간 역시 ‘민족-국가’ 중국의 하위범주로 재구성하려 한다. 그래야 50년 이후의 ‘통일’을 예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홍콩은 여전히 ‘식민 체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거 홍콩이 영국 주도 하 자본주의 체제의 식민지였다면, 오늘날 홍콩은 중국식 정실자본주의 식민지나 다름없다. 중국 정부는 영국 식민지 하에 유지된 식민지적 통치기구를 그대로 둔 채, 그것의 편의성만을 활용해왔다. 이는 홍콩을 중국과 통일하는 결과를 낳기보다는 경제위기와 빈부격차의 확대라는 경제적 모순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오히려 반중 정서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사실 중국은 이미 거대한 자본 시장이다. 중국의 평범한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살고 있다기보다는 고도의 타락한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다. 중국의 빈부격차는 (비록 한국이나 미국보다는 덜하긴 하지만) 극심한 상태이고, 2억 9천만 명에 달하는 농민공들은 오늘날 중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홍콩에서 고속철도를 타고 15분 정도를 가면,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적 도시 선전시에 도착하는 데, 이곳의 공단지역 인력시장에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젊은 일용직 농민공들이 하루종일 누워 있다. 한편 선전 도심의 백화점이나 금융센터에 가면 온갖 값비 싼 상품들이 즐비하고, 그것을 구매하는 사람들도 줄서 있다.

폭스콘 노동자 연쇄자살 항의 퍼포먼스

최근 많은 연구자들이 반복해서 확인하고 있듯, 중국 사회의 사회주의적 성격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오히려 거대한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보는 게 훨씬 정확한 표현일 게다. 대륙-홍콩 간에는 사회주의-자본주의의 분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언론 자유’와 ‘집회 시위의 자유’ 뿐이다. 즉, 둘의 차이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규정된 ‘자유’뿐이다. 물론 대륙에도 민간-사회주의의 정치적 자유가 보장 되던 때가 있었다. 불행히도 그 역사는 1989년 이후 거의 실종됐다. 여전히 지하에는 정치적 자유를 위해 싸우는 이들이 있지만, 겉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양제’의 모순은 여기에 있다. 홍콩 시민들은 서구 언론이 부풀린 허구와 싸우고 있는 게 아니라, 반환 이후 자신들 스스로 마주해온 억압적 권력의 실체와 싸우고 있을 따름이다.

달팽이 아파트(劏房)와 불평등

지금까지는 홍콩의 역사적·정치적 모순에 대해 살펴봤다. 그렇다면 사회경제적 모순은 어떻게 드러나고 있을까? 가장 적나라하게 살펴볼 수 있는 게 홍콩의 부동산 문제다. 이는 중국 정부 역시 중대하게 인식하고 있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홍콩의 아파트 방세는 뉴욕, 런던, 샌프란시스코의 2배에 달하면서도 크기는 절반 정도다. 9.3제곱미터(2.8평)의 방의 월세는 우리 돈 62만원 정도인데, 이 작은 방에서 요리도 하고, 잠도 자고, 온갖 옷가지와 물건들도 쌓아놓고 산다. 그런데도 최저임금은 시간당 4.82달러(우리돈으로 5800원)다. 인구의 5분의 1이 빈곤층이다. 수치상 인구 740만의 홍콩은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도시임에 틀림없다. 이런 조건에서 정치적 불만이 고조된 것이지만, 정치적 불만의 근저에는 경제적 불평 등에 대한 불만, 공포가 내재돼 있다.

2017년 NGO단체 ‘달팽이 아파트 문제 해결을 위한 플랫폼(全港關注劏房平台)’의 조사에 따르면, 30년 이상 된 낡은 건물 중 약 42퍼센트가 쪽방으로 개조됐다. 아파트 하나를 평균 4.3개의 쪽방으로 개조한 점으로 미뤄볼 때 최소 6.7만 개의 쪽방 아파트에 28만 가구가 생활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집의 평균 임대료는 40만원에서 60만원 정도다. 집값도 매우 비싸서 4평짜리 초미니 아파트가 4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최근 분양되는 아파트들은 아무리 커도 9평이 채 되지 않는다. 이런 아파트를 분양 받는 건 대부분 80년대 이후 출생한 젊은 세대인데, 90퍼센트를 은행 대출로 마련한다. 평생 빚더미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지난 10년 동안 집세는 3배 이상 올랐고, 주택 중위가격은 중위가구 연간소득의 20배가 넘는다.

홍콩 시민들의 삶은 ‘임대료’에 좌지우지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절반에 가까운 홍콩 인구는 월 2만 HKD(약 300만 원)이상의 임대료를 내고 있으며, 이는 가구당 평균 소득의 70퍼센트에 달한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주택시장”이라는 악명에 걸맞는 수치다.

무엇보다 홍콩은 수치상으로도 세계에서 빈부격차가 가장 큰 도시다. 특히 최근에 그 차이가 가파르게 벌어졌고, 빈부격차가 반세기만에 최대치였다. 1인당 소득은 한국이나 일본보다도 높지만, 법정최저임금은 한국보다도 낮다. 2016년 스위스금융그룹 조사에 따르면 홍콩 사람들은 평균 주 50.11시간을 일하는데, 이는 세계 평균보다 38퍼센트 길다. 노동시간이 아주 길기로 유명한 한국이 주당 42.8시간인데, 이것과도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홍콩이 면적이 작은 도시이고 그에 비해 인구가 너무 많기 때문에 이런 주거 문제가 발생하는 걸까? 언뜻 보기에는 정말로 새로 집을 지을 공간이 없는 듯 보인다. 관광객들이 자주 가는 홍콩섬이나 몽콕 같은 곳에 가면 높은 빌딩들이 옴닥옴닥 붙어있는 걸 볼 수 있다. 그러니 그것은 정말 사실처럼 느껴진다. 갈색으로 칠해진 부분이 활용도가 낮은 땅, 그리고 노란색 부분은 정부 소유의 땅인데, 이런 공간이 그나마 여지가 있는 땅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집을 새로 지을 곳은 정말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홍콩의 주택면적은 전체 토지의 7퍼센트에 불과하다. 반면 녹지나 골프장은 65퍼센트이다.

홍콩의 시민사회운동 진영은 정부에게 현재 홍콩에 있는 골프장들을 폐쇄하고 공공주택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2600명의 부자들이 골프를 즐길 수 있는 54홀 코스 짜리 골프장 하나를 폐쇄하면 그 땅에 3만7천 명이 살 수 있는 아파트를 지을 수 있다. 하지만 홍콩 정부는 이 땅의 5분의 1도 채 되지 않는 택지만 골라 주택 개발을 하기로 했다. 터무니없이 모자라는 규모다. 정부가 소수의 엘리트들을 위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또 그들의 편익을 중대하게 고려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더구나 정부 정책은 부동산 개발업자들을 위해서만 만들어져 왔다. 이런 경향이 홍콩의 주택난을 악화시켰다. 정부는 부동산 개발업자에 대한 토지 매매를 통해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땅을 매각하고, 저렴한 주택보다는 고급 주택을 선호한다.

현재 홍콩에서는 2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공주택을 기대하고 있다. 그나마 홍콩 당국이 연수익 12,000달러 미만인 시민으로 자격을 제한했기 때문에 이 정도에 그치는 것이 공공주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훨씬 많다. 하지만 이 문턱을 낮출 경우 너무나 많은 시민들이 공공주택 대기자로 신청할 것이기 때문에 홍콩 당국은 문턱을 낮출 생각이 없다.

『홍콩의 토지와 지배계급』의 저자 앨리스 푼(Alice Poon; 潘慧嫻)은 그 주범으로 홍콩특별행정구 정부가 토지의 주요 공급자로서 주요 재정 소득을 토지 수익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홍콩 정부는 토지 가격을 높이면서 빈부격차를 심화시킨 부동산 개발자들에 편승해 이익을 취해 왔고, 공공주택‧교육‧의료보험‧노인복지 등에 예산을 쏟는 대신, 토지가격 인상을 부추길 뿐인 ‘자본사업 예비기금(The Capital Works Reserve Fund)’에만 돈을 쏟아부었다. 결국 토지 재벌 사업자들을 위해 세금을 쓰고 있다는 거다. 정부 스스로 부동산 불평 등을 낳는 악순환의 주범 역할을 해온 셈이다.

이런 극심한 경제 모순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홍콩특별행정자치구 당국이 나 중국 정부는 곧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만 말한다. 중국 정부는 홍콩이 ‘광둥·홍콩·마카오 대만구(大灣區)’에 의해 발전하면 현재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는 현실감 있게 들리지 않는다. 어차피 대만구에서의 발전은 홍콩의 과거 영예를 선전이나 광동성의 다른 도시들에 넘겨주고, 그나마 남은 성과도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나 부자들의 몫으로 돌아갈 수 있을 뿐이라고 여긴다.

6월 9일, 범죄인 송환조례 반대 시위가 대규모 시위로 번지기 시작했을 때 미디어가 처음으로 주목한 집단은 바로 대학생들이었다. 왜 그런가? 단지 대학생들이 자유를 사랑하고 깨어있기 때문인가? 이는 지나치게 일면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근본적인 생활에서의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11월 한 달 간 전쟁을 치룬 홍콩이공대학 캠퍼스엔 “나는 잃을 게 아무 것도 없다(I have nth to lose)”, “이 사회에 아무 지분이 없다(I have no stake in the society)”라는 낙서가 적혀 있었다. 홍콩 출신의 정치경제학자 존스홉킨스대 훙호풍(孔誥烽) 교수는 “많은 청년들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빠져나갈 길이 거의 없다고 보고 있으며, 이것이 현 상황에 대한 절박함과 분노의 배경”이라고 말했다.

이런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시민사회운동은 홍콩의 법정최저임금인 최소 7US달러는 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홍콩 당국은 2년에 한 번, 아주 조금씩만 최저임금을 올린다. 반면 기업에 대해 매기는 법인세는 세계 여느 도시보다도 낮다. 최저임금 인상과 질 좋은 일자리 창출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연간 200만 홍콩달러 이상을 버는 사람들에게는 세금을 인상하고, 연간 1000만 홍콩달러 이상 규모의 부동산 거래를 하는 이들에게도 부동산 거래세를 높여야 한다는 게 시민사회 의 주장이다.

본토파와 ‘이주노동자’ 사이

홍콩은 ‘빌려온 공간(1842년 홍콩섬 할양, 1898년 신계 조차)’이다. 할양과 조차로 생성된 공간은 거주민에게 빌려준 공간으로 인식됐다. 따라서 영구 거주지와는 다르게 ​잠시 피난하는 곳​이라는 이미지를 형성했다. 반환 이전의 거주민들은 언제든지 다시 떠날 수 있다는 ​‘과객 심리’​를 갖고 있고, 강한 디아스포라 정서가 형성됐다.

한데 이 역사적인 디아스포라들의 도시에는 그보다 더 밑바닥을 형성하는 이주민들이 존재한다. 이 중 대표적인 게 40만 명에 달하는 이주여성 가사노동자들이다. 주말에 홍콩 도심을 걷다보면 길거리에 한족이 아닌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옹기종기 쪼그려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돗자리를 깔고, 커다란 파라솔 양산을 지붕 삼아 거리에서 살아간다. 주로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에서 온 여성 노동자다. 그들은 대형 쇼핑몰 앞, 육교 아래 인도를 점령하고 삼삼오오 모여 있다. 그곳에서 수다를 떨거나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혹은 잠을 자기도 한다.

이들은 평일에는 고용주의 집에서 노동하고 생활한다. 하지만 일요일이 되면 고용주 가족이 쉴 수 있도록 밖으로 나가야 한다. 거주할 곳 없는 그들이 거리로 모여 앉아 있어야 하는 이유다. 보통 오후 9시까지 거리에 있다가 다시 들어간다. 가사 노동자들에게 집안 내 공간을 마련해주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학대와 욕설, 성폭력, 임금 체불, 과로(하루 16시간 가량)는 이들의 일상이다. 보통 한 달에 4410홍콩달러를 받지만, 물가를 고려하면 너무 적은 돈이다. 생활비를 제외하고, 남은 돈은 필리핀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낸다.

홍콩에는 40만 명의 이주 가사노동자들이 있다. 이 중 절반이 필리핀에서 왔고, 인도네시아나 베트남 등에서 온 노동자들도 많다. 홍콩의 ‘엔리치’ 보고서에 따르면 가사 이주노동자들의 홍콩 경제 공헌도는 126억 달러(약 14조 원),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3.6퍼센트를 차지한다. 외국인 가사노동자를 고용하지 않을 경우 25~54세 여성의 49퍼센트만이 경제활동 참여가 가능하다고 한다. 고용했을 땐 78퍼센트다. 하지만 이같은 공헌에도 불구하고 이들 가사 이주노동자들은 홍콩의 경제 시스템에서 배제돼 있다.

이주노동자들의 문제가 극심해지자 홍콩의 시민사회운동이 결합하기도 했다. 지난 몇 년 간 이주노동자들은 ‘살인을 멈춰라(Stop the killings)’, ‘여성 노동자의 권리(Women workers’ rights)’, ‘임금 인상(Wage increase)’, ‘노동시간 규제(Working hours regulation)’ 등 구호를 걸고 투쟁했고, 스스로를 조직화해 왔다.

홍콩 항쟁 기간 이 이주노동자들을 둘러싼 이슈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상당수의 이주노동자들은 항쟁에 연대를 표했다. 일단 홍콩 내 이주노동자들의 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돼 왔었다는 점이 그 조직적 동력이었고, 필리핀의 반중 정서나 이주노동자 공동체 내에 만연한 중국의 사법제도에 대한 불신도 한몫했다.

물론 이주노동자 대부분이 시위에 참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집에서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홍콩 시위 연대를 표한다. 이주노동자들은 특히 그 지역의 출신지 커뮤니티를 통해 소통하기 때문에 필리핀 공동체나 인도네시아 공동체, 그리고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등에서의 여론은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게 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이주노동자 노조들은 조합원들에게 거리 시위 참가를 독려해왔다. 문제는 이주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감당하고 있는 다양한 억압들이 그들의 참가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취업비자가 취소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시위 참가를 가로막는 요소다. 예컨대 필리핀영사관은 자국민들의 시위 참여를 금하는 통지를 발송했다. 게다가 많은 고용주들이 시위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며, 일부는 법적으로 의무화된 휴식조차 막기도 한다. 더구나 주말에 이주노동자들이 모여 수다를 떨거나 쉬는 지역은 최근 시위에서 경찰과 시위자 간 충돌의 주된 장소가 되어버렸다. 주말에 이주노동자들은 거리로 나서지도, 집에 있지도 못하는 형국이다.

국제가정노동자연맹(International Domestic Workers Federation)의 한 활동가에 따르면 정부가 통지했다는 가짜 뉴스, 살해 위협 등이 위챗과 왓츠앱을 통해 퍼졌고, 이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은 심각한 위협을 느꼈다. 네팔인, 인도인, 파키스탄인들이 시위에 참여하면 공격하겠다는 위협도 있었다. 게다가 홍콩 경찰은 총파업 하루 전날인 8월 4일 필리핀 댄서를 폭력적으로 체포함으로써 이러한 두려움을 더 높였다. 일부 소수 민족들이 유엔롱 시위대에 대한 공격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에서 비롯된 보복으로 다른 위협들이 제기되었다.

홍콩의 대중시위는 홍콩의 구조적인 모순을 사유할 기회를 부여했다. 하지만 이주노동자 권리는 여전히 사각지대에 있다. 홍콩 시민사회가 이주노동자 상황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이 운동의 약점이라는 것이 이주노동자 활동가의 지적이다. 왜냐하면 홍콩의 곤란은 세계화된 착취 경제에 깊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이민노동자동맹(IMWA) 소속의 한 노동자는 이 운동이 “이민자들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 투쟁이 “지역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지속적인 촉구의 결과로 홍콩 항쟁에서 ‘이주노동자’의 존재에 대한 목소리가 완전히 무시당했던 것은 아니다. 많은 활동가들은 항쟁에 이주노동자들의 참여를 조직하기 위해 분투해왔다. 얼마 전 홍콩 정부에 의해 비자가 중단된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 유리 리스와티(Yuli Riswati)가 항쟁에 함께 해오며 사진 촬영과 글쓰기 등을 한 걸 빌미로 추방될 위기에 몰렸을 때 홍콩의 운동진영을 비롯한 많은 시민들이 연대하기도 했다. 12월 7일 시민들은 센트럴 에딘버러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시민들의 뜻을 모았다.

지난 10월 홍콩 민간인권진선 의장이자 동성애자 인권 활동가, 좌파정당인 사회민주연선의 활동가 지미 샴(岑子杰)이 익명의 남성 5명에게 테러를 당했을 때, 외양상 가해자들은 동남아시아 출신일 것이라고 짐작된 바 있다. 어쩌면 홍콩 내 수십만 명에 달하는 동남아시아인과 홍콩 시민 간 분열을 획책하려는 기획이었는지 도모르겠다. 하지만 홍콩 시민들은 이에 현명하게 대처했다. 동남아시아 사람들에 대해 공격하기는커녕 캐리 람 정부에게 그 책임을 물었고, 시민들과 적극 연대하려는 동남아시아 및 남아시아 공동체에게 연대로 화답했다.

한편 이 모든 것의 반대편에 본토파가 존재한다. 본토파란 홍콩이라는 ‘로컬적 특성’을 근거 삼아 홍콩 고유의 것을 강조하고, ‘홍콩인’이라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강한 혐중 정서를 드러내는 집단을 가리킨다. 우산 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정치세력화 해 몇 개의 정당을 창당하기도 했다. 지난 10년 사이 지속적으로 높아져온 반중 여론은 본토파의 정서적 기반이 됐는데, 이들의 우익 포퓰리즘적 성격에 대한 우려는 홍콩 항쟁이 자칫 이주자에 대한 배제를 바탕으로 확전(擴戰) 될 것에 대한 우려를 포함하고 있다. 이를테면 우익적인 본토주의자들은 중국 대륙에서 온 모든 이들을 적대화하기도 한다. 가난한 농민공이나 여행객에 대한 혐오 표출이 대표적이다. 그 때문에 홍콩 항쟁을 구성하는 범민주파 진영의 좌파들은 본토파의 색깔이 짙어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홍콩 엘리트들에게 ‘본토 의식’이 형성된 후, 그 의식은 제도와 습관을 통해 스며들었다. 그것은 홍콩이라는 도시의 역사 속에서 성숙됐고, 이렇게 형성된 홍콩 시민의 정체성은 광범위한 집단의식으로 전화됐다. 게다가 1949년 이후 홍콩과 중국의 경계에는 이데올로기라는 경계마저 형성됐다. 이데올로기적 간극이 중첩된 것이다. 이런 모순은 2000년대 이후 경제위기와도 겹쳐졌다. 중국인들이 홍콩 의 경제를 망가뜨렸다는 것이 홍콩 다수 시민들이 갖게 된 생각이다. 실제로 오늘날 홍콩의 모순 속에는 지역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놓여 있다. 이런 지역 민족주의는 홍콩 독립파의 이데올로기적 근거이긴 하지만 이주자에 대한 배타적인 오 정서를 품고 있다. ‘홍콩 정체성’에 얽매인 지역-민족주의/소민족주의 의식은 홍콩의 모순을 보다 구조적/계급적으로 통찰하는 시선을 가로막는다.

홍콩은 세계적인 자본주의 첨단도시이고, 세계 금융자본의 허브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민자들과 지역민들이 함께 살아가는 도시이다. 어떤 이는 이 도시에는 초국가적인 반자본주의 정치의 잠재력이 이미 존재한다고 말한다. 불행히도 소민족주의에 의한 분열 정서는 도시의 노동경제, 제도적 구조적 식민유산에 대한 진지한 이해를 가로막고 있다. 홍콩의 불완전한 탈식민지화 과정에서 그 후과를 떠안은 것은 오늘날 홍콩의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동남아출신 이주여성-가사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오랜 성차별과 착취의 관행을 갖고 있는 홍콩의 모순을 온전히 안고 있다. 예컨대 영국 식민지 시기 부유한 영국인 가정은 종종 무급 혹은 저임금으로 중국 대륙 출신의 여성 가사노동자들을 데려와 노예처럼 부렸다.

모국의 성차별과 불평등, 빈곤으로 인해 자신의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주여성들은 홍콩이란 금융 도시에서 돌봄 노동을 감당하고 있는데, 라셀 파르레냐스(Rhacel Parreñas)는 이를두고 “생식노동의 국제분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주민과 초국가적인 네트워크가 도시의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소속에 대한 배타성은 인종 차별만 강화한다.

홍콩의 좌파들은 이 운동이 도시의 뿌리 깊은 모순에 도전하려면, 보편적 참정권에 대한 요구를 넘어, 서로 다른-소외된 집단들 간 연대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향후 홍콩 항쟁의 성격이 본토주의적으로 변모할 위험을 저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홍콩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하는 발본적인 싸움에 그 성패(成敗)가 달려있다.

2020년 홍콩 항쟁 전망

지난해 2019년 11월 치뤄진 구의회 선거에서 범민주파의 역사적 승리는 아무런 전망도 그릴 수 없었던 이 항쟁의 ‘다음 전망’을 위한 준거가 됐다. 민주파가 아닌 ‘범민주파’인 이유는 390여 명의 당선자 중 다양한 스펙트럼의 정치세력들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오른쪽에 본토주의자들(여기서 ‘본토’란 홍콩-로컬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선 ‘독립파’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이있다면, 왼쪽에는 민주파 좌익들도 있었다. 바로 공당(工黨), 사회민주연선(社會民主連線), 사구전진(社區前線) 등 노동자운동 기반의 정치그룹과 전통적 좌파들이다. 이들은 홍콩 항쟁 과정에서 결코 작지 않은 역할을 담당해왔다. 공당은 그 대중조직인 직공맹과 함께 대중 파업(三罷)을 조직해왔고, 사회민주연선은 민간인권진선(民間人權陣線) 등의 정치적 공간에서 이 항쟁의 동력을 지키기 위해 분투해왔다. 사구전진 역시 지역 노동자운동, 지역운동과 여성운동 NGO 활동을 기반으로 지역 파업과 주민 조직화를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보이지 않는 활동들은 지금껏 홍콩 항쟁이 보다 사회운동적 기치를 유지하게 할 수 있는 힘이 됐다.

2020년 1월 1일 홍콩 시민들은 대규모 항쟁과 함께 새해를 맞이했다. 항쟁이 촉발된 지 7개월째로 접어 들었지만 홍콩 경찰의 고강도 탄압도, 시민들의 저항도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중국 정부는 캐리 람 행정장관을 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캐리 람을 해촉하자니 저항의 사기를 오르게 할 위험이 있고, 그대로 두고 있자니 출로 없는 상태를 지속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홍콩 경찰의 무소불위식의 고강도 진압 작전과 폭력에 대한 국제적 비판이 이어지고 있지만, 아무 대책이 없는 중국 정부로서는 이를 그대로 두는 수밖에 없다. 지난해 12월로 체포자는 이미 6천 명을 넘었고, 1월 1일에만 400명 이상을 체포했으니 체포자는 곧 7천 명에 다다를 것으로 보인다. 부상자 역시 날이 갈수록 늘고 있다. 홍콩 항쟁은 서구의 음모 때문에 이토록 길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도시의 모순이 해소 불가능한 수준으로 지속되고 있고, 폭력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 사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연대가 필요한 이유다.

그런 가운데 홍콩 시민사회운동 진영은 2020년 입법회 선거까지도 싸움이 지속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이 선거에서 유의미한 득표를 통해 정치적 준거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 시민사회운동 전반의 목표다. 중국 정부가 선거 제도 개혁을 쉽사리 승인할리 없겠지만, 악조건 속에서도 힘을 키워나가겠다는 목표다.

업종별 노조 활동가들의 노조 가입 캠페인 (사진 : 二百萬三罷聯合陣線)

이런 가운데 가장 희망적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은 노동조합운동이다. 홍콩에는 총 4개의 노총이 있다. 명목상 조합원수가 가장 많은 것은 40만 명의 조합원으로 이뤄져 있는 친중 노조 홍콩공회연합회(香港工會聯合會)다. 1948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년 전 설립된 이래 중국공산당 대중조직으로서의 노선을 이어오고 있다. 한때 홍콩 내 계급투쟁의 주체이었지만, 지금은 영락없는 친정부 노조의 길을 걷고 있다. 반면 홍콩의 민주노조 연맹격인 직공맹(香港職工會聯盟)은 조합원수가 20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직공맹은 홍콩 항쟁 시기 노동운동 주체로서 적극 참여해왔고, 2019년 8월 5일 파업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지난해 11월 지방선거에서 자조직이 조직한 ‘공당’ 후보 7명을 전원 당선시켰고, 이후 불붙고 있는 노조 조직화 사업에 전력을 다 하고 있다. 이는 자발적인 공회 설립 문의와 더불어 시너지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자생적으로 모인 공회 설립 주체들과 직공맹 활동가들은 함께 협력하고 연대하며 노조 가입 캠페인에 힘을 쏟고 있다. 30개 이상의 업종별 신규 노조가 이미 설립했거나,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최근 거리마다 가장 활발한 행동을 벌이고 있는 것은 이들 신규 업종별 노조들이다. 12월부터 주간별로 이어지고 있는 업종별 파업 행동도 12월 이전의 항쟁 양상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이것이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고, 향후 조직적 노동자운동의 힘을 얼마나 키우느냐에 홍콩 항쟁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자본주의 모델의 전장이 된 ‘홍콩’

2013년 9월 시진핑 주석에 의해 처음 제시된 중국 정부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중국의 대외전략이 ‘도광양회’에서 공공연한 ‘중국몽’ 표방으로의 전환을 알 리는 거대한 정치‧경제적 기획이다. 그것은 “중국 건국 이래 가장 야심찬 프로젝트”라고 언급돼 왔다. 아시아‧유럽‧아프리카의 65개국 44억 인구를 포괄한다. 2014년 홍콩 우산 운동이 실패로 귀결되고 얼마 후, 홍콩 안팎의 친중파들은 중국 건국 이래 최대 프로젝트인 ‘일대일로’에 홍콩이 적극적으로 화답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육상 경로가 중국 서부를 지나 중앙아시아-유럽으로 관통한다면, 해상 경로의 출로는 홍콩을 비롯한 주삼각지역일 것이다. 친중 자본가와 미디어는 홍콩의 효율적인 인프라와 서구화된 시스템, 중국 자본의 비즈니스 관행에 대한 깊은 이해를 결합한다면, 국제금융도시로서의 홍콩이 일대일로의 허브로도 등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밋빛 미래를 그렸다.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맞선 대안이 부상하진 않고 있다. 미국식 자본주의와 중국식 자본주의의 격돌이 불안정하게 촉발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 가운데 오늘날 홍콩은 불가피하게 두 거대 권력의 격전지가 돼버렸다. 중국식 정실자본주의의 거대한 권력이 무지막지한 경찰국가의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내며 시민들을 공격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 등 서구 자본주의 세력이 영악하게 이 항쟁 을 정치적으로 활용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문제는 두 가지 자본주의 모델이 절대다수에 대한 극소수의 지배, 양극화의 심화, 불평등과 노동권의 추락 등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능력에 따른 보상을 우선한다는 서구식 리버럴 자본주의나, 철저한 현능정치로 효율적인 성장과 분배를 추구한다는 중국식의 정실자본주의나 다수 민중에게는 대안이 될 수 없다.

홍콩 좌파의 대안은 둘 모두에 함락되지 않는 새로운 대안을 구축하는 것에 있다. 하지만 이는 지독하게 어렵고 고단한 과제임에 분명하다. 150년에 걸쳐 축적된 식민지 역사의 모순과 더불어 반환 이후 22년 이상 중첩된 정실자본주의의 모순 모두와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홍콩 좌파 그룹 중 하나인 ‘사구전진’의 구의회 선거 출마자들 (사진 : 社區前進)

한국 사회가 홍콩 항쟁에 주목하고, 그것의 독특성과 역사적 모순을 깊이 있게 통찰해야 하는 이유는 주류 미디어가 전하듯 홍콩 시민들이 한국 사회운동의 항쟁사를 학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우쭐함이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이 한국과 홍콩 사이엔 기묘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두 가지 자본주의 모델의 격전지가 될 위기 앞에서 사회운동적 대안 없이 휘청거리고 있는 현실이 다가왔다는 사실에서 말이다. 나아가 우리는 글로벌 생산네트워크 하의 분업화된 이주노동·불평등·부동산 모순 등 홍콩 사회와 공유하는 사회 모순을 공히 안고 있기도 하다. 홍콩 항쟁이 이 고단한 난제 앞에서 어떤 길을 찾아내느냐는 우리에게도 좋은 참조점이 된다. 우리가 홍콩 항쟁에 좌파 사회운동·노동자운동 차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홍콩은 글로벌 자본이 중국 대륙에 진출하는 통로이기도 하지만, 노동자운동이 중국 대륙으로의 지원과 연대를 도모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동아시아 전반을 아우르는 다양한 국제 노동조직의 거점들이 있으며, 중국 대륙과 연계된 많은 활동가들이 주요한 거처로 활용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노동자운동은 발본적으로 국제주의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 국제주의적 실천이 희미해진 오늘날에는 그것이 매우 모호하게 느껴지지만, ‘동아시아’라는 권역을 실천적으로 사고하고, 상호참조을 통해 사상과 전략적 개입의 틈을 확장하고자 시도할 때에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가 된다. 최근 한반도 정세는 동아시아 권역 전체의 정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동아시아 국제연대의 필요성은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한일 갈등과 홍콩 항쟁이라는 계기를 통해, 그간 단절되어 있다시피 한 동아시아 국제연대를 확장하기 위한 고민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에 대한 부족한 논의는 향후 플랫폼c와 다양한 언론 지면, 토론 자리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밝혀나가고자 한다. ●


※ 참고 자료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탄압받는다고?」, 시사IN
민중당 정책위원회, 「홍콩 시위에 대한 단상」
장정아, 「`본토`라는 유령 토착주의를 넘어선 홍콩 정체성의 가능성」, 『동향과 전망』 2016년 10월
장정아, 「국제대도시이기를 거부하다 ─홍콩의 도시공간운동」, 『도시로 읽는 현대중국2』
류영하, 「방법으로서 중국-홍콩체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비판적인 시각을 중심으로」, 『중국현대문학』 2019년 1월
류영하, 「세계체제와 탈식민 본토 홍콩의 정치경제학」, 『중국현대문학』 2016년 7월
윤형숙, 「지구화, 이주여성, 가족재생산과 홍콩인의 정체성」, 『중국현대문학』 2006년 6월

「佳士工学运动 x 中港台左翼回响」, 思想與運動交匯處
「2019,如何防范一场黑天鹅和灰犀牛共舞的“颜色革命”?」 , 端傳媒
「香港各界就 「18-19中国劳权大扫荡」声明书」, 中国工运人士关注组
「社區前進 反送中社區特刊」, 社區前進
龍少爺, 「香港政治罷工史」, 思想與運動交匯處
「盾牌、警棍、催泪弹,19岁少年在612现场」, 端傳媒
「从治理暴力到路线斗争,香港革命是中国的内生危机」, 端傳媒
「八五香港罢工:交通瘫痪,七区集会,多个警署被围,荃湾、北角再现白衣人」, 端傳媒
「Tower crane operators across China organise Labour Day strike over low pay」, China Labour Bulletin
Promise Li, 「The ‘explosive potential’ of workers: Meet the left activists elected to district council」, 流傘
‘Glory to Hong Kong’: Hundreds gather to sing protest ‘anthem’ : https://www.youtube.com/watch?v=lEhgTBQX2kU
Wang Xiangwei, 「Carrie Lam can defuse the Hong Kong protests by taking on the property tycoons」, South China Morning Post
Brian Ng, 「How real estate hegemony looms behind Hong Kong’s unrest」, Lausan
Ho-fung Hung, 「Hong Kong’s Resistance」, Verso
Natacha Amora, Modern Slavery in Hong Kong: The Inhumane Living Conditions of Migrant Domestic Workers, Global Policy Review
『Between a rock and a hard palce』, International Domestic Workers Federation(IDWF)
Rhacel Salazar Parrenas, 「Migrant Filipina Domestic Workers and the International Division of Reproductive Labor」, 『Gender and Society』 Vol. 14
Branko Milanovic, 「The Clash of Capitalisms – The Real Fight for the Global Economy’s Future」, Foreign Affair
Trey Smith, 「In Hong Kong, Protesters Fight to stay anonymous – The democracy movement finds strength in numbers but weakness in names」, The Verge}

그밖에 미처 기록하지 못한 자료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