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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과 최동원

'국민'학교 때, 아주 잠깐 야구부를 했었다.

 

육상부를 먼저 했는지, 축구부를 먼저 했는지 가물가물 하지만, 교내 체육대회 때, 반에서 나갈 사람이 없어 무심코 던진 공(당시에는 돌로 만든 수류탄을 던졌다)이 60m인지 70m인지를 넘기면서 야구부 선생이 찾아왔던 것 같다.

 

당시 국딩 남자애들은 프로야구에 열광했다(여자애들은 양배추 인형을 좋아했다). 수원의 4대문 밖 변두리 남자애들은 대부분 서울 연고의 베어즈(박철순!)나 청룡(김재박,백인천)을 좋아했던 것 같다. 마땅한 적수가 없었던 무등산 호랑이를 좋아하는 애들도 있었다. MBC청룡의 좌익수 이종도와 2루수 김인식에 왠지 정이 갔지만, 청룡을 좋아하는 애들 중에 좀 재수없는 애들이 있어서 가끔 좀더 쎄 보이는 타이거즈를 좋아한다고 했던 것도 같다.

 

이종도 하면 사람들은 대개 프로야구 개막전 10회말 끝내기 만루홈런을 기억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아직도 1인칭이 어색해서 '저는/나는'이라는 단어를 차마 못쓰겠다) 외야 깊숙한 곳에서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좋았다. 김인식의 경우는, (그를 설명하기 위해 반드시 사용되는 키워드인) 깡다구, 데드볼왕, 연속출장, 노삼진 등과 같은 기록 보다 심판한테 엄청 게기다가도 금방 생글생글 웃는 까무잡잡한 얼굴이 친근해 보였다. 평생 딱 한번 가입했던 어린이 회원 생일 선물도 김인식의 사진과 사인을 받아 우표집에 꽂아 두었다.

 

그러고보면 야구뿐만 아니라 농구에서는 강정수(중대), 탤런트 중에는 강남길이나 임현식 같은, 좀 가난하고 불쌍(?)해 보이면서도 성실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닌 촌스런 아저씨 스타일을 좋아했는데(물론 대학 후에는 아저씨라는 단어 자체가 싫어졌지만..), 이건 아마 국민학교 입학 전부터 (아빠가 다니던) 담배공장 목욕탕에서 선한 표정의 노동자 아저씨들과 친해져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여튼, 5, 6학년 때는 평소 학교에 갈 때나 자연농원/민속촌으로 소풍을 가는 특별한 날에도, 노랑과 파랑이 적당히 섞여있던 청룡 잠바와 검정과 빨강의 타이거즈 모자를 자주 입고/쓰고 다녔다. 어린이 회원 무료입장 이벤트 때는 친구하고 짜고 친구 엄마한테 생일이라고 뻥치고 그 돈으로 생전 처음 잠실 구장에 갔다가, 다음 날 담임한테 개박살 났던 적도 있다. 방과 후에는 동네 공터나 ㅅㅇ여고 운동장에서 변변치 못한 비닐 글러브와 나무 방망이를 들고 밤늦게까지 야구를 하곤 했다. 공부 잘하고 앞에 앉는 애들팀은 버팔로, 운동부 소속(5, 6학년때 담임이 체육선생이었는데, 육상부와 씨름부가 2년 동안 같은 반에 다녔다)의 뒤에 앉는 애들팀은 맘모스였는데, 물론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가끔 근처 ㅅㅇ국민학교 애들하고도 티격태격 원정경기를 했던 것 같다. 주 포지션은 포수-유격수, 공은 주로 테니스볼을 사용했다. 

 

그런데, 정작 야구부에 들어가서는, 제대로 연습 한 번 못하고 그만 두었는데, 어린이 회원 가입비가 없어 곤란해 하던 엄마한테(당시 장남인 아빠와 (재래시장에서 통닭장사를 하던) 엄마가 시골에서 올라온 11명의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다) 유니폼 살 돈을 달라는 말을 못했기 때문이다. 선생한테는 돈이 없다는 말은 못하고, "축구가 더 좋아서요"라고 했던 것 같다. 정확하진 않지만, 학교 야구부 자체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금방 해체를 했는데,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근처 국민학교에 야구부가 있었기 때문에 뭔가 윗선에서 압력이 있었거나 경쟁력이 없다는 의사결정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며칠 전 언니오빠 운동회의 여운도 있고 얘기가 쓸데없이 길어졌지만, 그로부터 어언 27년만에 처음 야구 유니폼(이라기 보다는 달랑 티사쓰 한장이지만)이라는 것을 장만했다. 블루윙즈 서포터즈나 ㄱㅈㅅ 팬클럽으로 한참 축구장에 다닐 때부터도 어언 14년만이다. 작년에 두어번, 올들어 서너번 동네친구들과 야구장 음주가무를 즐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때보다 공도 더 못던지고 더 빨리 달리지도 못하지만..

 

어렵지 않게 공구 사이트를 찾아 청룡 유니폼을 주문했는데, 문제는 백넘버였다. 처음엔 별 생각없이 "김인식(4)"으로 하려고 했지만, 주위에서, "엥? 왠 김인식 감독?"이라고 물을 경우, "아 그 사람 말고, 어쩌구저쩌구..." 매번 같은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이 귀찮아, 다른 대안을 생각해야 했다. 그렇다고 이종도나 백인천, 이해창 등을 적는 건 그들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기 때문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티셔츠에 넣을 이름으로는 뭔가 좀 부족했다.

 

물론 축구 유니폼이라면 대학 축구'반'에서부터 회사 동호회 등등 새로운 유니폼을 만들 때마다, 이미 너무 확실한 one solution - "윤정환"이 있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야구는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사토신지를 넣는 것도 좀 거시기 하고, (사실 마사루의 샤론(캐서린)이나 마츠모토 타이요의 "하나오",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에 나오는 인물 등도 떠올려 보기는 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결국, 공구 마감 마지막 날, 신청한 이름이 바로 "최동원(11)"이다. 혹시 고인이나 자이언츠/청룡 팬들에 대한 실례가 아닐까 조심스럽긴 했지만. 그 티셔츠가 한달이 훨씬 넘어 지난 목동 직관+즉석만남-_- 다음 날(5/25(토)) 도착했다. 물론, 1984년 한국시리즈 4승이나 87년 5월 16일 선동렬과의 전설적인 명승부 등 한 야구 천재에 대한 오마주의 의미도 있지만, 그 보다는 아래 글과 같은 선수협 활동에 대한 연대감/respect의 의미가 훨씬 크다.

 

오늘 드디어 (트윈즈와 자이언트의 시합에) 이 유니폼을 입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덧붙여, (제일 밑에 옮긴 댓글에 동의하며) 앞으로 프로야구/스포츠 관련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기업명은 생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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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민/산하의 오역]

 

1987년 5월 16일 퍼펙트 게임 그 후 

 

 

조승우와 양동근이 최동원과 선동열 역을 맡은 영화 "퍼펙트 게임"은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한다. 조승우와 양동근 두 연기파 배우의 열연도 훌륭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조승우의 연기에 더 점수를 주고 싶다. 조승우는 故 최동원을 많이 연구한 것 같다. 고인의 와인드업 시 보여주었던 다이나믹한 킥킹 (한창 때는 거의 이마까지 올라가던)을 거의 근사치까지 흉내를 냈고, 부산 사투리도 거의 흠잡을 데가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감동했던 것은 최동원을 그린 듯이 닮은 미소였다. 때로 활짝 웃기도 하지만, 대개는 입이 우선 오무려진 뒤 조금씩 이를 보이며 그려가던 최동원 특유의 수줍은 미소. 그걸 조승우가 스크린상에서 선보일 때는 아까운 나이에 하늘로 간 최동원이 돌아온 것 같은 착각에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했다.
 

이제는 수십만이 알다시피 이 영화는 1987년 5월 16일, 불세출의 두 투수가 벌인 그야말로 '영웅적인' 투수전을 소재로 한 것이다. 그때까지 1승씩을 주고받았던 두 사람은 나란히 선발투수로 사직운동장 마운드를 밟았고 그때부터 징하도록 긴 명승부를 조율해 나간다. 82년 세계 선수권 대회 때 그랬듯 초반 난조를 종종 보이던 선동열이 먼저 2점을 내 줬지만 해태 타선도 최동원에게 그 정도의 점수를 낼 능력은 있었다. 2대2. 그러나 롯데와 해태 양팀 타선 모두에게 그 이상은 허락되지 않았다.
 

마치 용의 뱃속에서 뿜어나오는 불같은 강속구로 거의 혼자 힘으로 롯데를 우승시켰던 중천의 해 최동원과, 고려대 시절부터 그때까지 부동의 에이스로 상대팀의 공포의 대상이던 떠오르는 해 선동렬은 그야말로 공 하나 공 하나에 자신들의 명예를 실어 던지는 듯 했고, 투수전은 재미없다는 말은 적어도 그 시점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몰매도 모자랄 망언으로 화한다.
 

가끔 선수단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배트로 의자를 부숴 버리던 카리스마짱 김응룡 감독도, 롯데의 성기영 감독도 감히 마운드에 올라가 공을 달라고 요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타자들은 본의 아니게 조역이 되어 갔다. 9회를 넘어서도 더욱 쌩쌩해지는 둘의 공은 관중들을 무아지경으로 몰아넣었다. 나이 서른의 최동원은 던질수록 젊어지는 듯 했고, 대주자 작전을 쓰느라 포수 자원을 다 써 버려서 직구만 겨우 포구 가능한 내야수 백인호에게 마스크를 맡긴 선동열은 직구로 롯데 타선을 농락했다. (이 대목은 영화에서 만년 후보 포수 박만수의 인생역전 스토리로 각색된다)
 

경남고 연세대를 나와 부산에 연고지를 둔 제과회사 롯데의 수호신이었던 최동원과 광주일고 고려대를 나와 광주에 둥지를 튼 제과회사 해태의 간판이었던 선동렬은 각각 2백개가 넘는 공을 던지며 격렬하게 맞섰다. 장엄하기까지 한 승부였다. 또 그때 그 시절이니만큼 가능한 승부였다. 요즘이라면 2백개 이상의 공을 뿌려대는 1:1 승부란 상상할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희대의 명승부는 선동렬이 15회말 롯데 타자 3명을 내리 삼진으로 잡아내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1승 1무 1패를 마지막으로 둘의 맞대결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보자면 선동렬을 떠오르는 태양이었고 최동원은 저녁 하늘을 붉게 물들이긴 했지만 지는 해였다. 선동렬은 더욱 승승장구하여 일본에서도 '쥬니치의 태양'으로 군림했고, 선수 뿐 아니라 감독으로서도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는 행운을 누렸지만, 최동원은 그 뒤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은퇴한 뒤 야구계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 하나 얻지 못하는 '야구계의 야인'(野人)이 되었던 것이다. 그 결정적 계기는 88년 "선수상호간의 친목과 복지"를 내세운 선수협의회 결성 시도였다.

 

최동원은 그 선봉장이었다. 인척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하고, 체육부, 노동부 등에 적법성을 문의하고 선수들을 설득하는 그 까칠하고 귀찮은 일을 도맡아 했다. 당시 최동원의 코멘트는 영화 <퍼펙트 게임>에서 조승우가 멋지게 내뱉던 대사, "게임은 최동원이 끝냅니다. 이겨도 내가 끝내고 져도 내가 끝냅니다!"만큼이나 사람을 울컥하게 만든다.
 

"누군가가 앞장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사실 제 생각만 한다면 선수회 만들 일 없습니다. 어려운 동료, 불우한 후배들을 돕자는 취지에서 저같이 연봉 많이 받고 여유있는 선수들이 앞장선 거죠."
 

1988년 9월 30일 마침내 계룡산에서 선수협 대의원 총회가 개최되던 날. 물론 방해 공작은 간악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지경이었다. '노조 없는 기업'의 대명사 삼성은 담당 이사가 직접 설득에 나서는 한편, 박승호, 장효조, 김시진 등 해당선수의 부인을 협박해서 남편의 행동을 저지하도록 했다. (아 삼성......) 해태는 새벽부터 구단직원들을 선수들의 집 앞에 대기시켜 거머리처럼 물고 늘어졌고, 태평양은 선수 전원을 구단사무실에 집결시켜 일일이 포기 각서를 받아냈다. 롯데의 경우도 선수들을 소집하여 오후 6시까지 잡아놓은 뒤 이제는 못 가겠지하고 풀어 줬는데 롯데 소속 대의원들, 김용철 유두열 김민호 한영준 김용운 윤학길 (아아 내 추억 속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 등은 나는 듯이 계룡산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어렵게 모였지만 정족수는 미달됐고, 구단들의 압박은 더욱 강화되면서 끝내 선수협은 와해되고 만다. 그리고 선수협의 주동 최동원은 롯데 유니폼을 벗는다.
 

선수들의 참여가 가장 두드러졌던 롯데의 경우 선수들에게 "선수협 포기 각서"를 요구한다. 이 치졸한 요구에 견결히 불응했던 이가 영화 "퍼펙트 게임"에서 최동원의 앙숙으로 등장하는 김용철이었다. "안한다 캤으면 됐지 각서까지 낼 이유가 뭐꼬?" 예나 지금이나 속 좁기로는 롯데껌 껌종이만도 못한 롯데 구단은 김용철의 훈련 참가를 불허한다. 선수단은 이 구단의 조처를 두고 단체 행동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투표에 부치지만 "롯데의 최동원"이 한칼에 날아가는 것을 지켜봤던 선수들은 단체 행동에 반대하고 김용철은 여기에 분통을 터뜨린다. "우째 자~들이 내 동료란 말이고. 자들 믿고 무슨 야구하겠노." 롯데에 정나미가 떨어진 김용철은 트레이드를 요구했고 롯데 구단은 얼씨구나 그마저 롯데에서 쫓아내 버렸다.

 

영화 <퍼펙트 게임>의 주연과 감칠맛 나는 조연은 그렇게 '롯데 자이안츠'에서의 야구 인생을 마감했다. 뒷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새삼 영화의 장면들과 1987년 5월 16일 실제로 벌어졌던 야구 영웅들의 혈투가 머리 속을 감아든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던 장엄한 승부. 그러나 그 주인공들 중 한 켠은 치졸하고 추악한 구단들의 횡포 속에 쓸쓸하고 씁쓸한 뒤안길로 퇴장해야 했다. 그 전말은 정말로 '퍼펙트'한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다시 한 번 최동원 선수. "코리안 시리즈 네 번을 다 나갈 수 있겠나?"라는 감독의 어이없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질문에 "해 보입시다 마."를 부르짖었던 불굴의 투수, "내가 안하모 누가 하겠능교?"라고 금테 안경을 쓸어올리며 선수협의 필요성을 주장하던 용감했던 사람, 고 최동원 선수의 명복을 빈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559087687469754&set=a.210233439021849.59837.100001055837349&typ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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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의 댓글 중 전재성 님의 좋은 글이 있어 같이 옮깁니다.)

 

선수협이 기어이 태어났을 당시, 송진우 회장을 비롯 심정수, 박충식등 선수협 결성에 앞장섰던 이들을 방출하겠다는 협박에 맞서 팬들이 강남역 인근에 모인 일이 있습니다. 당시 롯데 응원단장이라고 소개하셨던 분의 말을 여지껏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전국에서 많은 분들이 모이셨는데 다들 좋아하는 팀은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다들 야구를 좋아하는 분들이고 우리 선수들의 편에 서있는 분이라는 것, 그것은 확실하시죠?(환호) 저는 원레 롯데를 싫어합니다. 아마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일 것 입니다. 저는 롯데팬이 아이고 자이언츠팬입니다. " 그 날 그 곳에는 기업을 좋아하는 이들이 아닌 호랑이팬, 거인팬, 곰팬, 독수리팬, 사자팬, 비룡팬, 쌍둥이팬들만 모여 있었습니다. 저 역시 곰팬으로 그 자리에 있었음을 아직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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