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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0/12
    [밑줄] 코르푸스
    고엄마

[밑줄] 코르푸스

 

코르푸스

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

장-뤽 낭시/ 김예령2006 Editions Metailie / 2012 문학과 지성사

 

 

코르푸스

오크 에스트 에님 코르푸스 메움Hoc est enim corpus meum…… (옮긴이 – 이것은 진정 나의 몸이니) 우리 서구 문명은 이 제례 문구로부터 발원하였다. (7)

 

밖-갗으로의 노출Expeausition

몸들은, 추락이든 이탈이든 분리든, 어떤 움직임의 임박성 하에 언제나 출발에 직면해 있다.

이 같은 공간의 열림, 혹은 이 같은 출발이야말로 몸의 내밀성 그 자체이자 몸이 행하는 자기 절단의(다른 표현을 쓴다면 그것의 변별성이나 개별성의, 나아가 그것의 주체성의) 맨 끝부분이다. 몸은 그것이 떠난다는 한에서, 바로 여기에서 여기로부터 이탈한다는 점에서, 출발에 듦으로써 자아가 된다. … 출발로서의 자기 분리l'ápart soi en tant que départ가 거기서 드러난다.

이 현기증 나는 자아로부터의de soi 절삭이야말로 자기까지jusqu’ à soi 이르는 잘라냄의 무한함을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몸은 이같이 자기로부터 자기에 이르는 출발이다. (36-37)

 

자리의 실재성

그런 이유에서 몸에 관한'사유'는 굳이 그 어원을 따지든 그렇지 않든 간에 실제적인 무게 달기pesée(옮긴이- 프랑스어 ‘생각하다penser’는 ‘무게가 나가다’ 혹은 ‘무게를 측정하다’라는 뜻의peser와 어원이 같다) 될 수밖에 없고, 그런 이유에서 자리의 실재성, 아레알리테aréalité에 의거하여 굽혀지면서-펼쳐지는 하나의 접촉이다. (46)

 

무게달기

접촉의 코르푸스를 열거해보자. 살짝 닿다, 스치다, 압박하다, 박다, 조이다, 매끈하게 하다, 긁다, 비비다, 쓰다듬다, 톡톡 두드리다, 더듬다, 주무르다, 마사지하다, 껴안다, 포옹하다, 치다, 꼬집다, 물다, 빨다, 적시다, 잡다, 놓아주다, 핥다, 뒤흔들다, 바라보다, 듣다, 냄새 맡다, 맛보다, 피하다, 입 맞추다, 어르다, 안다, 살랑살랑 흔들다, 무게를 달다…

그런데 굳이 종합하지 않아도 결국 모든 것은 무게 달기la pesée와 통한다. … 몸은 곧 하나의 무게이다. … 모든 몸은 다른 몸들 위로, 다른 몸들을 대고 누른다.

몸들은 가볍게 무겁다. … 따라서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의 원칙과 예측은 내리누름peser이 아니라 달아 올림être pesée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내리누르는 것은 단 하나의 지지대 위에서 이루어지며, 따라서 하나의 우주를 조립montage하는 것을 가정한다. 그러나 무게를 달아 올리는 것은 또 다른 몸의 협력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한 세계의 펼쳐짐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이는 더 이상 전제의 영역이 아니라 도래의 영역이다. 몸들은 서로서로 누르면서 온다. 바로 그것이 세계다. 세계가 아닌 것immonde, 그것은 모든 것이 미리 놓여버린 것, 즉 전제pré-supposé를 뜻한다. (92-93)

 

노동, 자본

몸들은 먼저 어디에 있는가? 그것들은 우선 일터에 있다. 몸들은 우선 노동이라는 수고에 처한다. 몸들은 우선 교통수단을 타고 일터로 가거나 일을 끝내고 돌아오고, 휴식을 기다리고, 휴식을 취했다가 이내 그것을 포기하고, 일하고, 상품 속에 병합되어 상품 그 자체가 되고, 노동력이 되고, 축적되고 축적하는 자본 시장에서 축적할 수 없되 팔거나 소진시킬 수 있는 자본을 형성한다. 창조하는 테크네는 공장과 공방과 건설 현장과 사무실의 몸들을 창조한다. 부분이 다른 부분의 바깥이 되게끔 형상과 움직임을 시스템 전체와 연계하여 부품, 레버, 연동장치, 케이스, 나사, 마개, 프레이즈반, 전기회로 분리, 도금, 굴종의 체계, 체계의 굴종, 저장, 관리, 하역, 파기, 통제, 수송, 타이어, 연료, 다이오드, 커플링, 갈퀴, 크랭크암, 회로, 디스켓, 복사, 계표기, 고온 가열, 살포, 굴착, 배선, 도선, 그리고 오직 스스로의 힘이 화폐로 전환되는 쪽으로만, 거기에 모여 집적되는 자본의 최대치로만 유도되는 몸을 구성한다.

무엇보다도 이런 식의 담론이 이젠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지 말자.

자본이란 이것이다. 몸이 상품화되고, 수송되고, 이동되고, 재배치되고, 대치되고, 하나의 자리와 자세에 처하는 그 과정을 마모될 때까지, 결국 실업의 상태에 빠져 기아에 이를 때까지 계속 밟는 것. 도쿄의 오토바이 위에 올라앉은 벵골인의 굽은 몸, 베를린 참호 속 터키인의 몸, 하얀 소포 꾸러미들을 짊어진 쉬렌이나 샌프란시스코의 검은 몸…… 따라서 자본은 몸들의 초-기호 작용 체계système de sur-sifnification를 의미하기도 한다. 계급이나 노고, 그리고 계급 간의 투쟁만큼 기표/기의적인 것도 없다. 각종 힘에 의해, 근육과 뼈와 신경의 뒤틀림에 의해 겪게 되는 노력만큼 기호학의 망을 피하지 못하는 것도 없다. 저들의 손에 앉은 굳은살과 딱지를 보라. 저 허파들을, 척추 뼈들을 보라. 더러워지며 일당을 받는 몸들. 기호 작용의 환環을 완벽히 아물리는 더러움saletè과 보수salaire.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가 문학이다.

철학의 종말. 특히 노동의 철학 전체의 동의어로서 몸의 철학 전체의 끝. 점점 더 조여들고 새되고 날카로워져만 가는 시간 안에 자본이 집적하고 과잉 투여한 몸을 해방하고 공간을 재개진하는 일. 시간으로 만들어 진 몸corps made in time. 하지만 창조는 영원한 것이다. 영원, 그것은 펼져진 것, 태양과 섞인 바다, 그리고 창조된 몸들의 반발과 반항이란 의미에서, 간극의 창출이다. (107-108)

 

영혼에 관하여

그러니가 제가 피하고자 한 것은 닫히거나 종결된 것의 효과입니다. 몸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국 닫힌 것, 종결된 것과 정반대되는 것에 대해 말하는 셈이니까요. 몸에 관해 말하는 것은 열려 있고 무한한 것에 대해서, 다시 말해 닫힌 것 그 자체의 열림과 유한한 것 그 자체의 무한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전개해보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도 따지고 보면 ‘몸은 열림이다’라는 것입니다. 열림이 있으려면 무언가 닫힌 게 있어야 하겠지요. 닫힌 것을 감지할 수 있어야 열리는 것도 가능합니다. 닫혀 있는 것에 접촉하는 것, 그것은 벌써 여는 것입니다. 하나의 접촉이나 건드림이 없다면 열림도 결코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여는 것, 다시 말해 접촉하는 것은 찢거나 사지를 분해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121)

 

몸에 관한58개의 지표

9. 몸은 가시적이나 영혼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몸이 마비된 사람이 자신의 한쪽 다리를 알맞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은 잘 보지만, 심술궂은 사람이 자기 영혼을 좋은 쪽으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은 보지 못한다. 우리는 그의 심술궂음이 영혼이 마비된 탓이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같은 영혼의 마비에 대항하여 싸워 그것을 굴복시켜야 한다. 이것이 바로 윤리의 기초다, 친애하는 니코마코스. (164-165)

 

10. 영혼에게 몸은 또한 일종의 감옥이기도 하다. 영혼은 이 몸이라는 감옥 속에서 비록 그 성질을 간파하기 어려우나 매우 심각했음에 틀림없는 고통을 씻어내야 한다. 몸이 영혼에게 그토록 무겁고 불편한 것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몸은 먹은 것을 소화해야 하고, 자야 하고, 배설해야 하고, 땀 흘려야 하고, 스스로를 더럽혀야 하고, 상처를 입어야 하고, 병에 걸려야만 한다. (165)

 

11. 치아는 감옥의 채광창에 설치된 철책이다. 영혼은 입으로부터 말이 되어 빠져나간다. 그러나 말 또한 여전히 몸에서 비롯하는 방출물이자 발산물, 몸에 의해 데워져 허파에서 솟아나는 공기의 가벼운 주름들이다. (165)

 

23. 머리는 몸에서 따로 분리된다. 그러기 위해서 참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머리는 그 자체가 스스로 분리되고 떨어져 나와 있는 것이다. 몸은 하나의 전체로 서로 연관되고, 구성되고, 조직된다. 머리는 단지 구멍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구멍들의 텅 빈 중심은 점이자 자기 자신을 향한 무한한 집중인 정신을 매우 훌륭하게 표상한다. 동공, 콧구멍, 입, 귀, 이런 것들은 다 구멍이자, 공동空洞이 되어 몸 바깥으로 도주하는 것들이다. 다른 구멍들, 즉 하체의 구멍들을 제외하면, 이러한 공동들의 집중은 가늘고 부서지기 쉬운 통로, 즉 골수 및 부풀거나 끊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 기타의 경로가 지나가는 목에 의해 몸에 부착된다. 복합적인 몸을 구부려 단순한 머리에 연결시키는 가냘픈 부착점. 근육을 지니지 않은 머리에는 다만 힘줄과 뼈,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무른 회색의 실질, 순환 회로와 시냅스가 있을 뿐이다. (167-168)

 

28. 몸. 즉 매끈하거나 주름진, 기름지거나 마른, 털이 없거나 많은 영혼. 혹이 났거나 상처가 난 영혼. 춤추거나 잠겨드는, 굳은살이 박였거나 축축하거나 땅바닥에 넘어지는 영혼…… (169)

 

36. 코르푸스. 몸은 온갖 부분과 조각들, 사지, 지대와 상태, 기능의 총집합체이다. 머리, 손, 연골, 화상, 감미로움, 분출, 졸음, 소화, 격분, 흥분, 호흡, 자기 재생산, 자기 갱신, 타액, 관절액, 비틀기, 경련, 그리고 미인점. 집합체들의 집합체, 곧corpus corporum이 몸이다. 그러나 이러한 몸의 일치는 일치 자체에도 하나의 의문으로 남는다. 심지어 기관 없는 몸의 자격으로 고려될 때조차도 몸은 어쨌든 백 가지 기관을 지니며, 그 기관들은 전체를 저마다 제 편으로 당겨 탈조직화한다. 그럼으로써 전체는 더 이상 스스로를 총체화하는 데 도달하지 못한다. (171)

 

37. ‘이 포도주는 얼마간의 몸을 지닌다.’ 포도주는 입 안에 일종의 두께, 맛에 동반되는 어떤 견고성을 남긴다. 포도주는 양 볼 사이와 입천장 아래에서 혀에 감기며 그 혀가 저를 접촉하고 더듬도록 내버려둔다. 포도주는 위장에 유입되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어서, 입 안에 얇은 껍질 같은 것, 다시 말해 제 향취와 원기로 이루어진 섬세한 막 또는 침전물을 깔아놓을 것이다. 우리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이 몸은 얼마간의 포도주를 지닌다.’ 포도주는 머리로 올라가고, 정신을 매혹하고 마비시키는 증기를 발산한다. 정신을 건드리라고, 그것과 접촉하여 전율하라고 부추기고 선동한다. (171-172)

 

38. 어떤 몸이 우리에게 감각적이고 에로틱하며 정감적인 방출을 초래한다는 것처럼 기이한 사실도 없다. (역으로 또 다른 몸은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몸의 어떤 생김새, 마르기의 유형, 머리색, 자태, 눈을 뜨는 방식, 어깨나 턱, 손가락의 어떤 움직임이나 특유의 형태….. 거의 아무것도 아닌, 그저 하나의 억양, 주름,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선….. 이런 것들은 한 몸의 영혼이 아니라 정신이다. 정신의 뾰족점, 정신의 서명, 정신의 냄새. (172)

 

42. 몸은 무의식이다. 세포 속에 배열된 조상들의 유전자, 무기염의 섭취, 연체동물 쓰다듬기, 불쏘시개와 땅 밑의 시신이 된 몸을 먹는 벌레들, 혹은 그 몸을 태우는 불꽃, 그 불꽃에서 비롯하는 재, 손대서는 안 될 재가 된 몸, 몸이 스치거나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 식물들, 그리고 동물들, 먼 옛날 유모들의 전설, 허물어져 지의地衣류로 뒤덮인 유적들, 공장의 거대한 터빈들이 몸을 위해 가공해내는 전대미문의 합금 – 그것으로 만든 의치와 그 의치에 혀가 닿으면서 만들어내는 말의 소음, 거칠거나 스스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되어버리는 음소들, 비석에 새겨진 법문들, 그리고 살해나 불사를 꿈꾸는 은밀한 욕망들. 몸은 뼈마디가 불거진 제 손가락들로 비밀스러운 끝 전체를 건드린다. 그리고 몸을 형성하는 것으로, 그리하여 세계의 마지막 날을 종결하는 빛의 세필 아래 모여들어 격렬히 춤추는 먼지들의 코르푸스에 다다르는 것으로 끝난다. (173-174)

 

44. 영혼, 몸, 정신. 영혼은 몸의 형태이고 정신은 영혼을 생산하는 힘이다. 몸은 따라서 정신의 표현 형태la forme expressive이다. 몸은 정신을 표현한다. 다시 말해 정신이 바깥으로 솟아오르도록 하고, 그것의 즙액을 짜고, 그것의 땀을 빼고, 그것의 불똥을 뽑아내어 공간 속에 송두리째 투척한다. 몸은 급작스러운 폭발과도 같다. (174)

 

47. 몸의 외부성과 이타성altérité은 마침내 견딜 수 없을 지경에까지 다다른다. 배설물, 오물, 혐오스러운 배출물은 여전히 몸의 일부를 이루고 몸의 실질에 포함되며, 무엇보다도 몸의 활동에 속한다. 몸은 그것들을 추방해야 하고, 그것은 결코 사소한 직무가 아니다. 배설물에서부터 자라나는 손톱이나 털, 온갖 종류의 사마귀나 화농성의 뾰루지에 이르기까지, 몸은 흡수 과정이 남긴 찌꺼기와 여분, 즉 자기 생명의 잉여분을 저 자신으로부터 분리해 바깥으로 떼어내야만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지도, 보거나 느끼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몸은 그 사실에 관해 수치심과 온갖 종류의 일상적인 불편함과 곤혹감을 느낀다. 영혼은 몸의 어떤 일부에 대해서는 – 저 자신이 그것의 고유한 형태인데도 – 깡그리 침묵하기로 한다. (175)

 

48. 몸의 정확성은 바로 그것이 다른 어떤 곳도 아닌,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오른쪽 엄지발가락의 끝에, 흉골의 아래쪽에, 유두에, 오른쪽에, 왼쪽에, 위에, 아래에, 깊숙이, 표면에, 희미하게 퍼져서, 혹은 점적으로 분명하게. 고통이거나 쾌이거나, 자판의 접촉면에서 내 손가락들의 표피로 옮겨가는 움직임이 그런 것처럼 그저 단순한 기계적 전달. 심지어 희미하게 번지는 두루뭉술한 감각에 의해 기술되는 것마저도, 매번 아주 명확한 방식으로 빛을 발하는 이 ‘희미함’의 정확성을 주시하는 것이다. 정신의 구체적 정확성이 수학의 영역에 든다면 영혼의 구체적 적확성은 물리의 질서에 속해서, 그램과 밀리미터의 단위로, 분출에 대한 대기로, 침전화의 속도로, 호흡 계수로 드러난다. 정신론자들이 흔히 주장하는 것과 달리, 해부에는 단순화 기제réducteur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극도로 정밀 정확하게 영혼을 드러내는 것이다. (175-176)

 

49. 몸의 비정확성은 또한 이러하다. 여기 대략 사십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있다. 왠지 냉정하고 신경질적인 태도, 수심에 차 있으며 어쩐지 약간 사람을 회피하는 듯한 표정. 그는 좀 뻣뻣한 자세로 걷는다. 어쩌면 그는 교수나 의사일 수도 있다. 아니면 판사이거나 행정가. 옷차림에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닌 듯. 광대뼈가 튀어나와 있으며 안색이 가무잡잡한 걸로 보아 지중해 지역 출신일 수 있겠다. 어쨌든 북방계는 아니다. 게다가 그는 지극히 평균적인 키를 갖고 있으니까. 그가 좀 어색해 하고 있다는 것이 감지된다. 권위와 결정권을 가진 사람인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도 좀 의심스럽다…… 이런 유의 장부는 한참 더 작성해나갈 수 있다. 그만큼 무수한 징표들이 하나의 동일한 몸 위에 산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많은 점에서 틀리리란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어쩌면 전부 다 틀릴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가 절대적으로 오류를 범할 리는 없다. … 우리는 어디서 개별성이 시작되며 어디서 유형이 끝나는지 결코 말할 수 없다.(176-177)

 

51. 미인점. 피부 위에 아주 살짝 돌출되어 간간이(어떤 이의 경우에는 번번히) 포인트나 마크, 표징 노릇을 하는 갈색이나 검은색의 입자들을 프랑스어에서는 그렇게 부른다. … 따라서 그 시대의 여인들은 이 벨벳으로 만든 ‘파리’를 필요에 따라 대로는 뺨에, 가슴에 붙이곤 했다. … 그것은 피부를 강조해주고 피부의 확장에 측량표들을 세워 그 윤곽을 선명하게 만든다. 그리고 보는 이의 시선을 인도하며 일종의 욕망의 지표처럼 작용한다. 조금 더 욕심 부려 표현하자면 미인점은 욕망의 싹이자 강도의 아주 미소한 융기이고, 젖꼭지가 그런 것처럼 그 짙은 색깔 안에 몸 전체의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는 미립자라고 할 수 있으리라.(177-178)

 

54. 몸. 그리고 살갗. 그 나머지는 전부 해부학이나 생리학 또는 의학 차원의 문학이다. 근육, 힘줄, 신경과 뼈, 체액, 샘과 장기들은 인지적 허구, 또는 기능주의에 입각한 형식주의에 속한다. 진실은 살갗이다. 진실은 살갗 속에 있으며 살갗을 이룬다. 꾸루룩 소리와 퀴퀴한 냄새로 가득 찬 ‘안’을 감싸는 동시에 전적으로 바깥을 향해 노출된, 진정으로 확장된 것. 살갗은 접촉하고 접촉된다. 살갗은 쓰다듬고 어루만지거나, 상처 입고 쓸리고 긁힌다. 살갗은 곧잘 자극을 받거나 흥분한다. 또는 태양과 추위와 열기, 바람, 비를 받아들이고 주름과 점, 사마귀, 찰과상 따위의 안의 흔적들이나 바깥은 징표들(때때로 그것들은 안의 흔적과 동일한 것들이다). 나아가 균열이나 상처, 화상, 자상들을 아로새긴다.(178-179)

 

58. 어째서 쉰여덟 개의 징표들인가? 왜냐하면5+8=몸의 주요 구성 요소, 즉 두 팔과 다리, 그리고 머리에 몸의 여덟 가지 부위, 즉 등, 배, 두개골, 얼굴, 엉덩이, 성기, 항문, 목구멍을 더한 수이므로. 또는5+8=13이고, 13은1&3인즉, 1은 일치(하나의 몸)에 해당하고3은 몸의 물질과 영혼과 정신 사이에서 순환하고 분할하며 촉발되는 끊임없는 동요와 변형에 해당하기 때문에. 또는 타로 카드의 열세번째 비밀은 죽음을 가리키며, 죽음은 몸을 진흙과 화학주기, 그리고 열과 별의 섬광으로 이루어진 결코 소진되지 않는 범우주적 몸과 합체시키기 때문에……(179)

 

59. 따라서 잉여적이고 초과적인 쉰아홉번째의 징표가 나타나니, 그것은 바로 성le secuel이다. … 몸은 다른 성을 가진 몸과 관련된다. 섹스를 통해 스스로의 경계에 접촉하는 것으로서의 몸의 육체성이 이 관계의 핵심이다. 몸의 육체성은 즐긴다. 바꿔 말하면 몸은 저 자신의 바깥에서 요동한다. 몸의 각 지대는 저 스스로를 위해 즐기는 가운데 바깥을 향해 동일한 섬광을 방출한다. 그것의 이름이 영혼이다.(179)

 

옮긴이의 말 – 몸의 사유, 바깥은 접촉

그러나 몸에 대해, 다시 말해 몸이라는 시니피앙에 대해 사유하는 것 말고 ‘몸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가. 아예 ‘몸의’ 사유라는 것은 또한 어떤 것이겠는가. … 몸의 사유란 몸의 있음 그 자체다. 동시에 저의 있음을 느끼는 몸, 제가 있다고 느끼는 사유이기도 하다. 스스로 펼쳐지면서 그 펼쳐짐을 느끼는 것. 저이면서 또한 저의 바깥으로 작동하는 감각과 의식의 움직임. 요컨대 핵심은 이 분리 불가능한 이중의 움직임과 함께 시작되는 일, 곧 있음의 ‘있음’에 있다.(181-182)

빠르게 서술하자면 『코르푸스』에서 낭시가 시도하는 모색과 실험은 다음과 같다. 앎의 불가능성과의 접촉을 통해 비로소 열리는 어떤 사유의 가능성(에고 숨!), 저 자신의 한계에 닿아 열림과 파열로써 개진되는 글쓰기, 그리고 언어의 경계와 얼개를 끊는 그 글쓰기의 파열을 통해 저 자신과의 결렬이라는 낯선 경험으로서만 스스로를 드러내는 ‘있음’의 섬광(실존). 바꿔 말해 이 에세이는 글쓰기=존재론=몸의 도래(창조)의 테크네라는 등식이 어떻게 성립하는가에 대한 면밀한 성찰이자 그 등식을 몸소 입증하기 위한 형성 기술의 적용물이다.(182)

그러나 이 접촉은 단순하지 않다. 말의 질서와 물의 질서가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스토아학파의 분류에 따르면 렉톤, 즉 몸이 아닌 것incorporel의 질서에 속하는 말은 본질적으로 몸을 가진 것corporel의 질서로 뚫고 들어갈 수 없다. … 낭시에 따르면 의미sens의 질서와 피sang의 질서가 서로 침투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그 간극을 타고 세계가 도래하며, 의미가 중단되는 그 사이로부터 ‘있음’(의 감각sens)이 발생한다. 그러니까 그럴 때 몸은 흔히 생각하듯이 영혼과 대비되는 단순한 매스나 실질(즉 덩어리나 점적인 집중)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리로서의 실재서altérité, 다수(몸=몸들), 또는 있음이라는 강도와 밀도가 매번 하나의 실존의 테두리 말단부까지 활짝 펼쳐지는 움직임에 해당한다. 따라서 몸은 곧 영혼이다. … 말이 자신의 경계선을 이어가는 바로 그 자리에서 몸은 동일한 궤적을 타고 그 경계선의 외변으로 작용하며 바깥 – 낭시의 표현을 빌리면 언어의 ‘또 다른 고유-경계’ – 을 구성한다. … 낭시가 접촉의 경험을 천착하면서 그것이 발생하는 자리로 현상학의 살chair 개념에 반해 살갗peur이라는 표면장을 지목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결코 섞이지 않는 질서들이 서로의 바깥이 되는 자리가 낭시에게는 그것들이 닿는 자리고 그럼으로써 몸이 드러나는 자리다. (182-184)

에고의 연속성과 주체의 고유성의 형성에 불가피하며 그와 동일선상에서 일치된 움직임을 그리되, 그러나 결코 그것들에 섞여들지 않는 불연속과 비고유성의 영역으로서의 바깥, 주체sujet에 대해 주체의 배설rejet du sujet로 작동하는 바깥이다. 주체가 보기에 그 바깥은 자기가 아니며, 따라서 배척해야 할 부끄러운 배설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주체가 바로 그렇게 깨끗함과 고유함의 더없는 증표로 자기를 출현시키기 위해 모르면서 작동시키는 스스로의 형성 원리 그 자체다. 배설로서의 주체, 주체의 배설과 함께 오고 드러나는 더럽고 이질적인 바깥으로서의 세계. 낭시는 이렇게 정리한다. 코기토의 사유 행위cogitatio는 그래서 모르는 것, 낯선 것과 마주치고 닿을 때 그 경계에서 경계로서 일어나는 세계와 나의 공동의 동요co-agitation이다. … 그것은 우리가 주체의 문제에서 공동체의 문제로 넘어갈 수 있도록 길목을 튼다. 머리와 꼬리 사이에 끊임없이 미세한 간극을 벌리고 우회와 우발의 위험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전제를 전제하지 않기에 함께 오는 세계와 나, 또는 몸을 나눈다는 것의 현대적, 현재적 의미를 살펴보는 일은 요약과 함축이라는 빠르거나 뻔한 길보다는 앞서 언급했듯이 모색과 실험으로 점철된, 아니 그 자체가 모색과 실험인 긴 탐사를 요구한다. 마치 우주를 바라보기 위해서 필요한 건 현미경이야, 라고 말하는 듯한 낭시의 텍스트를 읽는 일이 커다란 인내심과 숙고를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184-185)

사유에게 몸이란 사유의 박탈dé-pense, 그러나 역설적으로 저 자신이 작동하기 위해 치를 수밖에 없는 비용이고 지출dépense이다. 있음의 무게. … 주체 따로 대상 따로 나뉘지 않는, 주체도 대상도 아닌 채 저마다에 고유한 무게이자 저 자신의 정확한 측정으로서 저울의 양팔처럼 펼쳐지는 몸-사유의 균형. 분별되되 분리되지 않는 방식으로 상호 작용하는 이 저울 또는 시소의 이미지가 몸(의) 사유의 진실, ‘나는 있다’라는 확장에 관해 낭시가 제시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예증이리라.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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