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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8/05
    D+1095
    고엄마

D+1095

Home - Y + 3

 

0.

2011년 8월 4일

밑창이 떨어진 낡은 구두와 쌍팔년도 조폭들이 입을 법한 오래된 F/W 정장을 입고, 

침탈당한 마리에 들러 경ㅅㅅ에게 비타500 두 박스를 건넨지 어느새 3년이 지났다.

(물론, 경ㅅㅅ는 예의 그 쿨씩한 표정을 지으며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1.

1999년 3월 3일

첫 회사는 H 뭐시기 정보통신회사였다.

1999년 2월 대학원 졸업 후, 현역입대에서 전문연구요원으로 급 진로를 변경했다.

광전송장비, ADSL/VDSL, CDMA 단말기의 s/w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양재동에 있던 연구소를 성남 상대원동 구석의 공장으로 이전하니 직원들이 알아서 퇴사를 했다.

그렇게 시작된 구조조정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특례였던 관계로 거의 막판까지 공장을 지켰다.

입사한 해에 한국시리즈 우승 기념으로 주석잔 받았는데,

퇴사한 해에는 공장 사무실에서 김ㅂㅎ의 월드시리즈 원맨쇼를 보며 낄낄 댔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오락실 주인집 아들) ㄷㅎ형과 함께 걸었던 양재천 점심 산책 길도 생각난다.

다 때려치고 군대나 가자 했을 때, 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며, 

마사루+주성치 사이트나 만들자고 토닥여주던 딸기에게도 큰 빚을 졌다.

마지막 출근날, 혼자 양재천을 한바퀴 돌고, 여의도에 있던 두번째 회사에 가서 첫 출근을 했다.


2.

2001년 12월 10일

두번째 회사는 닛산자동차의 구조조정으로 분사한 J 뭐시기 자동변속기 제조업체였다.

여기에 오면 일본에 주재원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이 결정적 떡밥이 되었다.

사토 신지의 묘지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이직의 유일한 이유였다.

여전히 특례였기 때문에 외국에 가는 게 쉽진 않았는데,

'해외선진기술이전'이라는 명목으로 정확히 365일 동안 일본의 관동지방에서 인생을 허비할 수 있었다.

대체로 외로웠지만,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주 노동자의 권리를 만끽했다.

일본 노동자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도 나름 의미있었고,

가끔씩 새로운 무언가와 마주치거나 반가운 친구들이 놀러왔던 것도 좋았다.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대학 3학년 배낭여행의 기분으로 

(95년 여름, 런던 하이게이트 묘지에서 독일 트리어의 고향집까지 M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유령처럼 배회했다) 

256과 여의도를 한바퀴 돌거나, 요코하마~시부야~시모키타~키티죠지를 돌아다녔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주재원에 목을 메나 했더니 월급이 두 군데서 나왔다.

일본에서 받은 돈은 술-공연-음반의 악순환에 모두 사라지고,

한국에서 받은 돈은 귀국 후 오프라인 공중캠프를 만드는 데 탕진했다.

딱히 다음 스텝이 정해지진 않았지만,

특례만료일(2월28일) 다음 날짜로 사표를 냈다.

회사에서는 어차피 3월1일은 휴일인데, 왜 3월2일이 아니냐고 의아해했다.


3.

우등상은 못타도 개근상은 타자는 가훈에 따라,

국딩6+중딩3+고딩3+대딩4+원딩2+특례5=23년 동안 개근을 했기 때문에,

1년 정도는 쉬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마침 한겨레21에 세계여행 관련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중략))

과테말라에서 도난당한 ㅆㅌ카드를 재발급받으러 갔다가,

2005년 4월 11일, 뜻하지 않게 세번째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ㅎㅁ은행을 잡아먹고 막 전산 통합을 하고 있던 터라 사람이 급히 필요했던 것 같다.

여튼, 메인프레임이라는 옵티머스 프라임 냉장고를 여기서 처음 만났는데, 

그 믿음직한 모습에 첫눈에 반해버렸다.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쓰잘데기 없는 환상이 없었다면,

뭐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무모하고 대책없는 생각만 하지 않았다면,

그 K 씨뱅이가 환갑 드립만 치지 않았으면,

추석 연휴 전날 날씨가 그렇게 좋지 않았다면,

아직도 구월동 중앙공원에서 코알과 캐치볼을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24-365 콜대기 상태가 점점 스트레스가 되었고,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자주했던 것 같다. 

여튼, 그 와중에 k#이 재건되었고, 창전동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4.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두번째 대학원은 패스.

한 가지 기록해 두고 싶은 것은,

첫번째 대학원 때는 세미나 시간에 근대철학 얘기를 하다가 졸다 깬 교수한테 욕을 바가지로 먹었는데,

두번째 대학원 때는 강화학습 알고리즘을 설명하다가 교수한테 정신나간놈 취급을 당했다.

첫번째 대학원 때는 IMF 덕분에 제때 독일 비자를 받지 못해 대공분실 체험을 할 수 있었다면,

두번째 대학원 때는 서브프라임 덕분에 경제적/인격적 파국을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첫번째 대학원 때는 컴퓨터라는 closed world에서 자기 학습/조직화를 하는 intelligent multi-agent system에 대한 논문을,

두번째 대학원에서는 real world에서의 self organization, 소위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의 사례와 구현 방법, 한계와 딜레마 등)에 대한 논문을 쓰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둘 다 똥 망했다.)

매일 아침 각종 빚독촉 모닝콜로 잠에서 깨어, 하루 한끼 김밥을 먹고 남은 김치를 싸달라고 하던 때,

그나마 받은 알바비를 의료보험공단에 몽땅 털리고 난 뒤, 백기를 들고 다시 이력서를 썼다.

이번에도 역시, 이전 경력과도, 개인적인 관심이나 흥미와도 전혀 상관없는 롤이었지만,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아 이번엔 역삼동인건가......'

그로부터 어느새 3년이 지났다.

무엇보다 먼지처럼 쌓여있던 각종 빚덩어리들을 청산할 수 있어 다행이다.

(신세진 분들께 다시한번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얼마 전에는 9년만에 ㅊㅈㄷ 집 청소를 하기도 했다.

(몇번이나 쓰레기통을 뒤졌다. 버리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아직 진행형이기 때문에 이 곳에 대해서는 언젠가 다시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5.

우연인지 무의식의 의지인지,

자본론의 챕터처럼 제조, 금융, 유통 관련 업종과

한국계, 일본계, 미국계, 영국계 회사를 두루두루 다녔다.

특별한 오브젝티브나 비젼 없이, 그저 회사 일은 회사 일로, 

적어도 맡은 일로 크게 민폐는 끼치지 않으면서,

최소한 서로 얼굴 붉히거나 마음 상하는 일 없이,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참여관찰 하듯 지내온 것 같다.

모두 사려깊게 배려해 준 동료들 덕분이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여전하지만, 하루하루 제때 퇴근하고, 한달한달 월급 받으며,

퇴근 후에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으로 적당히 타협한 셈이다.

나이/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지만, 올해는 30대의 마지막이기도 하다.

(일본어로 39는 '상큐'로 읽기도 한다.)

언제까지 이 생활을 계속할지,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모쪼록 괴물이 되지 않는 선에서, 신념을 배반하거나 영혼을 깨드리는 일은 없길 바란다.

6시다. 퇴근하자.

 

201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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