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거친 들판으로 오라
- 구로동맹파업 정신을 되살리며
백무산

한 그루 푸르른 나무가 쓰러졌다
비바람 천둥번개에도 의연하던 나무가
지축을 뒤흔들던 지진 해일도 꺾지 못하던 나무가

암울한 한시절의 어둠을 몰아내고
푸른 새벽을 이고 오던 나무가
메마른 대지 위로, 갈라터진 가슴 위로,
방황하던 우리의 정수리 위로
폭포처럼 시퍼런 정신을 쏟아 붓던 나무가
삶의 공포, 생의 불안을 떨쳐내던 너른 그늘을 가진 나무가
때로는 봄날 연인의 가슴처럼 따뜻하던 나무가

그 나무가 쓰러지자
생기를 잃어버린 숲은 다시 잿빛 바람에 휘감겼다
저 그늘 아래 사람들을 보아라
저 눈빛을 보아라
저 가슴을 헤쳐보아라
저 손들을 보아라
진리를 고뇌하고 한점 티끌을 부끄러워하던
그 반짝이던 눈빛들은 잿빛이 되었구나
무엇이 진실일까, 무엇이 인간의 의로움일까?
활화산처럼 타던 가슴들은 식은 죽그릇이 되었는가

저 손에 손에 힘주어 쥐고 있는 것은 무언가
잃어버릴까 두려워 돌아서서 손을 감추고
눈을 희번덕이며 돌아보는 저 눈빛은
진실밖에 그 무엇도 잡을 수 없던 그 빈손들은 어디로 갔는가

우리가 딛고 일어서야할 그 거치른 대지가
그 대지가 이제는 부동산이 되었는가
전위는 코스닥이 되고 혁명의 열정은 로또 대박이 되고
붉은 머리띠는 계급장이 되고
내어 뻗던 주먹은 권력이 되었는가

어제 저녁 술상을 탕탕 치며 부정을 저지른 동지들을 욕하며
정의에 불타던 자들이 오늘 아침 2억 3억 통장이 들통 나서 끌려가고
오늘 아침 기자회견에 양심선언으로 결백을 주장하던 자들이
저녁에는 복날 개처럼 질질 끌려서 가는구나
타락과 부패의 복마전이라고 돌을 던지던 그곳
반란과 전복을 꿈꾸던 저 국가권력기관으로부터
그 무엇도 아닌 무릎 꿇고 도덕적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이 치욕은 어쩌고 머리띠를 두르고 성명서를 낭독하고
그 신성한 행위를 끌어다가 썩은 것을 지키는 도구로 삼기도 하는구나
그러나 어쩌랴 이미 집권을 꿈꾸었으니!

여기까지 끌고 왔구나, 험한 길 가시밭길 피흘리며 왔다더니
끌고 오지 말아야 할 것도 끌고 왔구나
끌고 와야 할 것도 많이 버리고 왔구나
잃어버릴 것이 있는 계급은 이미 오염된 계급이다

이제 그만 밖으로 가자
들바람처럼 훌훌 들판으로 가자
내 식구들 입에 밥술 들어가는 일밖에 아무일도 않는 이들
우리 패거리 힘 생기는 일밖에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 이들
우리는 개돼지가 아니고 인간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차별없는 세상은 없다고 당당히 말하는 자들이여
해방은 이미 저들 너른 평수의 아파트에 와있고
이미 예금잔고 속에, 재산 목록 속에 와있고 벼슬길에 와있으니
저들의 목소리가 큰 세상이여
저들을 뒤로 하고 이제 들판으로 가자

저기 길게 쓰러져 누운 나무를 보아라
하늘 닿을 듯 크고 푸르던 나무가 아니던가
쓰러진 나무 위로 불어오는 잿빛 바람을 보아라
저것은 언젠가 우리 가슴 가슴에서 뜨겁게 타오르던 나무가 아닌가
저 거치른 대지를 기억하는가
마구 가슴이 뛰던 저 들판을 기억하는가
그곳에서 울고 뛰고 환호하며 서로를 껴안던 날을 기억하는가
여기, 쓰러진 나무의 뿌리를 찾아 다시 일어선 이들을 기억하는가
땅에서 쓰러져 다시 땅을 딛고 일어서는 이들을 기억하는가

들판으로 가자, 광장으로 가자, 광야로 가자
비바람 천둥이 치는 인간의 광장으로 가자
삶의 대지
생의 푸른 숲
인간의 지평
생명이 파도처럼 춤추는 인간의 광장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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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5 12:57 2005/07/25 12:57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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