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 41호(2006년 8월호)에 쓴 글>

어렸을 적부터 이야기를 좋아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다 있었던 난 꽤나 유복했다. 심지어 외증조할머니한테까지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옛날 이야기나 옛 말들을 들려주셨던 그 분들은 다 돌아가셨고, 지금은 외할아버지만 살아계신다. 할아버지는 화투로 하는 표떼기를 가르쳐주셨다. 화투패에 담긴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운세 떼기는 물론 귀신같이 숫자계산을 해서 갑오표까지 떼는 것을 보고 동네 어른들은 나더러 '화투신동'이라며 놀리기도 했다.
한글을 깨치고 난 뒤부터는 이야기책을 끼고 살았다. 만화도 재미있었다. 내가 읽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한테 해주는 것도 신났다. 학기 초에 교과서를 받으면 그 날로 국어책은 다 읽어버렸다. 전과에 나오는 다른 이야기들까지 다 읽었다. 더 읽고싶었고, 머리가 커지면서 소설책을 읽었다.
불행히도(?) 지금은 드라마를 본다.
결혼도 안한 처지에 이상하게도 KBS2에서 하는 '부부클리닉-사랑과 전쟁'이 너무 재미있다. MBC에서 일요일 낮12시10분에 하는 '출발!비디오 여행'과 함께 방영시간을 외우는 딱 두개의 프로그램이다. 지금은 별로 시들하지만 전창걸이 '영화대영화'를 진행하던 때에 '출발~'은 참말로 재미났었다.
요즘은 사실 드라마 방영시간을 외울 필요도 없다. 언제라도 TV를 켜면 어디서든 드라마는 하고 있다. 특히 나처럼 저녁 늦게 들어가서 TV 전원을 켜면 50여개의 채널 가운데 어디서든 공중파에서 방영중인, 아니면 예전에 방영했던 드라마를 볼 수 있다. 처음 켰을 때 드라마를 하고 있으면, 난 날을 꼬박 새워 채널 돌려가며 볼 수 있고, 또 본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다들 알겠지만, 한국 드라마는 처음이든 중간이든 5~10분만 보면, 대강의 스토리라인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이른바 '안봐도 비디오'다. 그런데도 뚫어져라 본다. 욕하면서 보고, 키득거리면서 보고, 울면서 보고.
울면서 본 프로그램은 '명동백작'이 있다. 교육방송(EBS)에서 2004년 가을쯤 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한국전쟁 직후 예술가들이 몰려다녔던 명동의 정취를 참으로 맛깔스럽게 다뤘다. 난 '안식휴가' 중이었고 다행히 EBS는 인터넷으로 '다시보기'가 무료여서 보고 또 봤다. 담배와 술로 한평생을 살다간 공초 이상순 선생이 자신의 뒷모습을 그윽하게 쳐다보는 명동백작 이봉구를 돌아보며 "사람의 뒷모습을 그렇게 쳐다보는 게 아니야"라고 말한뒤 다시 고개를 돌려 가던 길을 쓸쓸히 걸어가는 장면에서 나는 너무도 서럽게 울었다.
혼자 낄낄거리며 본 것도 있다. 얼마 전에 종용한 '연애시대'를 보며 난 끊임없이 낄낄거렸다. 손예진을 '재발견'했고, '역시' 감우성이였으며, 공형진은 '짱'이었고, 이하나를 '발견'한 드라마였다. 그들의 대사 하나하나에 난 낄낄거리다가 훌쩍거렸다. 감우성이 손예진에게 프로포즈를 했다는 바닷가를 다시 찾은 네 사람. 손예진은 감우성이 기억하지 못하는 그 때를 떠올리며 이야기한다. 너무 추웠던 겨울에 그는 "내~ 따당을...바다에 맹데해...부더디는...파더에 맹데해..."라고 했노라고. 감우성은 민망해 어쩔 줄 모르고, 자지러지던 이하나. 공형진은 한술 더 떠서 "너! 평소에 맹세잘해?" 난 또 자지러졌다.
김수현이 썼다는 드라마는 주로 욕을 하며 본다. 하긴, '보고 또 보고' '인어아가씨' '왕꽃선녀님'에 이어 임성한이 섰다는 '하늘이시여'를 보면서도 욕 무지하게 했다. 그래도 김수현은 못 따라간다. 언젠가 김수현 인터뷰기사를 본 적이 있다. "왜 김작가님 드라마에는 잘난 사람들만 나오나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김수현은 "난 잘난사람이 좋다"고 했다. 그 기억이 너무 컸는지, 난 '잘난' 김수현이 너무 싫다.
20년 전, 나 고등학교 2학년때 '사랑과 야망'을 했었다. 그때의 태준이었던 남성훈은 죽었고, 미자였던 차화연은 뭐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그때의 태수 이덕화는 여전히 TV에서 볼 수 있다. 과수원여인 김청은 요즘도 '속청' 광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 때 '사랑과 야망'의 인기는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일요일날 자율학습하러 학교에 나가면 '사랑과 야망' 토요일분을 본 아이들 중심으로 그룹이 형성됐다. 50분짜리 드라마를 거의 50분동안 이야기했고, 그 주변에 10여명이 둘러앉았다. 말똥 굴러가는 것만 봐도 우습던 시절의 소녀들은 깔깔거리면서도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는 이덕화와 김청의 사랑이 이루어지기까지 얼마나 가슴아팠던가. 과수원에서 김청과 이덕화가 함께 빨래 한쪽씩을 부여잡고 짜는 모습을 볼 땐 가슴이 찡하기까지 했다. 엉뚱하게 끼어있는 정자가 정말 미웠다. 지금 보는 '사랑과 야망'은 어째 가슴이 아프지 않다. 도리어 정자가 얄밉다가도 불쌍하단 생각이 설핏 들 뿐이다. 과수원여자는 솔직히 재수없다. 남의 자식 둘 키우면서 어쩌면 그렇게 천사같은 표정인지. 정자 딸인 수경이가 ‘계모’에게 반항하는 걸 보면 문득, "하긴 누가 뭐래도 지 엄마가 좋겠지..."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야 간다'라는 드라마가 있다. 김미숙과 정보석의 애틋한 사랑이야기이던가. 김미숙의 동생 정선경은 아들, 오대규는 딸이 있는데 각각 이혼한 뒤 결혼했다. 두 아이를 같이 키우는 이 집에 정선경의 전 남편이 찾아와 초인종을 눌러대며 "내 아들 내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당황한 정선경이 남편을 쳐다보며 "어떻게 해..."라고 하니 남편이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당신 일인데"라고 한다. 처음엔 그걸 보며, ‘으휴, 한심해. 저걸 믿고 어찌 사나~’싶다가 가슴에 확 와닿았다. '그렇지. 대개 저렇겠지. 나라도 같이사는 남자의 전 부인이 찾아와 지 딸 내놓으라고 하면 내일 아니다 싶겠군~' 하는 생각이 든다. 간만의 리얼한 드라마 장면이었다.
그런가 하면 리얼하지도 않고 재수도 없었던 장면이 있다. 역시 김수현드라마 2006년판 '사랑과 야망'. 태준이 있는 공장에서 17명의 여성노동자들이 월급이 적다며 다른 공장으로 옮기려고 한다. 당장 생산량 맞추기가 힘들어진 태준은 다른 여성노동자 3명을 타일러서(?) 17명을 데리고 돌아오라고 한다. 여성노동자 3명은 17명 중 15명을 설득해서 데리고 돌아온다. 한낱 '월급 몇 푼' 때문에 오락가락하던 그녀들이 돌아오자, 공장을 지키고 있던 다른 노동자들이 다같이 달려나와 서로 부둥켜안으며 운다. 아~ 감동의 도가니. 태준은 그 전 방영분에서도 한 밥맛 했다. 청춘을 바쳐서 일한 회사에서 강등된 태준을 위로한답시고 덩달아 회장 욕을 해대는 부하직원에게 "그 분이 주시는 월급 받아서 가족 먹여살리면서 그 분을 욕할 수 있나? 계속 일하려면 침묵하고, 존경할 수 없다면 존경할 수 있는 사장이 있는데로 옮겨"라고 한다.
하긴, 한국 드라마에서는 징계절차 없는 '해고'가 언제든 가능하다. 그 사유라는 것도 보잘것없어서, 자기 남자(또는 여자)를 빼앗아간 사람, 가업을 이어받아야 할 딸(또는 아들)이 사랑하는 별볼일없는 사람에겐 “너 해고얏!”하면 바로 해고다.
요즘 101번째 프로포즈란 드라마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배우 이문식이 이 드라마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난 그 배우가 싫어졌다. 극 중 박달재는 방송국 비정규직 세트맨이다. 아나운서 한수정(박선영 분)을 너무 사랑해서 그녀를 위해선 뭐든 할 수 있을뿐더러 너무 착한 사람인데, 방송국에서는 정규직을 뽑는다고 한다. 박달재는 수정을 위해 정규직이 되고자 한다. 드라마에서는 수십명의 비정규직들로부터 근무평가를 받아 가장 좋은 점수를 받은 비정규직 딱 한명을 정규직으로 뽑아준단다.
콩쥐처럼 착한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팥쥐같이 못된 것들은 평생 비정규직? 비정규직이 이젠 ‘천형’인가 보다. 콩쥐, 신데렐라도 모자라 이제는 착한 비정규직 타령이다.
리모콘 부여잡고 채널 돌려가며 이런 드라마들 꼬박꼬박 찾아보면서 깔깔거리고 흐느끼고 기암하는 내가 참말로 한심하다. '보고 또 보고'란 드라마도 있었는데, 난 '씹고 또 보고'다.
현실성 없다며 드라마들을 씹지만, 어쩌면 그런 드라마들이 제대로 현실적인지도 모른다. 말도 안되는 설정들! 말도 안되는 세상 아닌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가는 설정들! 상식 지키다간 지 한 몸 지키기 힘든 세상 아닌가.
그런 노래가 있다. “산타할아버지는 알고계신데 누가 착한앤지 나쁜앤지 오늘밤에 다녀가신데 잠잘때나 일어날때 짜증낼때 장난할때도 산타할아버지는 모든것을 알고계신데”
산타가 어린이들을 감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협박하는 것도 같아서 영 찜짐한 노래였는데, 이젠 비정규직노동자들도 감시당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 현실이 드라마에 반영된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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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30 21:38 2006/08/30 21:38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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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9/13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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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ㅎㅎ
  2. 2006/09/13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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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희/내 블로그에 첫 흔적, 정말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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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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