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꼭 15년 전, 학생회 선거 때 내가 속한 선대본에서 정책공약 자료집 머리에 실었던 詩다.

책장에 꽂힌 자료집을 이래저래 들춰보니, 종이가 누렇게 변한 바로 그 자료집이 끼어있다.

타자기로 쳐서 인쇄한 탓에 글씨도 뭉개져 있고, 번역도 어색하다.

선거 자료집 제목은 '우리가 나아갈 세계는 이제 우리가 걸어온 과거와는 다르다!'

자료집 목차 가운데는 '다시금 민중민주의 깃발을 움켜쥐고'라는 제목도 있다.

'최근의 소련사태-과연 사회주의의 몰락인가'라는 글도 보이고,

'우리는 과연 과학의 입구에 서 있는가'라는 글의 부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근본적 위기에 답하기 위한 우리의 첫번째 시도'라고 돼있다.

그 글 첫머리는 '우리가 나아갈 세계는 이제 우리가 걸어온 과거와는 다르다' -Ernest Mandel 로 시작한다.

사회주의와 함께 운동권이 망해갈 때, 붉은 깃발을 놓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나보다.

그래서 그때, 동요하는 사람이 많았나보다.

15년 지난 지금, 빛 바랜 그 깃발을 여전히 잡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오래 자작자작 말라버려서 그 깃발이 부스러지고 있나 보다.

 

네모 반듯하게 재단된 붉은 깃발은

이제는 색이 바래 알아볼 수 없을만큼 희미하지만,

부스러져 모래처럼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버려서 잡히지 않지만,

내 가슴 한 귀퉁이에 자리잡은 그 어떤 붉은 기운은 여전히 꿈틀거린다.

그 소중한 붉은 기운이 내 속에 있는 다른 기운들을 제압하길! 그러길 바란다.

 

파란 하늘, 싱그러운 초록! 모두 보기만 해도 가슴 뛰고 설레지만,

피가 끓게 하는 것은 여전히 '붉은 기운'이다.

인간은 몇십년, 아니 몇백년, 아니 수천 수만년... 계속 동요하고 있나보다.

 

 

동요하는 사람에게

- 베르톨트 브레이트

 

당신들은 말하고 있소.

우리들의 운동은 궁지에 몰려 있고

암흑이 깊어가고 있다, 힘도 쇠진해가고

수년동안 활동에 활동을 해왔지만

지금 활동이 개시되었을 때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

 

그러나 적은 이전보다 강력하다고

적의 세력은 강화되어가고 있어.

상대하기가 어려워져가고 있다.

게다가 우리들은 오류까지 범했다고 부인할 수 없는 오류를

우리들의 수는 줄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슬로건도 혼란을 겪고 있으며 우리들의 말은

볼품없이 적에 의해서 왜곡되고 있다.

 

우리들이 말했던 것 중에서 지금 어떤 것이 잘못되어 있는가

일부인가 전부인가

어디에 남아있는 아군이 있는가, 살아있는 조류에서

밀려난 조류에 지나지 않는 우리들은

이제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고, 이해시키지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운명을 하늘에라도 맡길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렇게 당신은 묻고 있소.

 

그러나

기대하지 마시오.

당신 자신의 대답이 아닌 다른 사람의 대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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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8 23:37 2006/11/08 23:37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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