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성서공단 근처에 있는 어느 노조 사무실에 들를 일이 있었다.

그 곳을 나서며, 아! 오늘 여기 온 건 참 잘한 일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

난 정말 그동안 관료였나보다.

대구에서 본 모든 것이 나에겐 멋진 각성제가 됐다.

 

입구에 더덕더덕 붙은 포스터, 소식지, 팜플렛 따위.

사무실 한가운데 있는 난로. 내가 들어선 지 얼마 안 있어 그 사무실에 있던 한 여성동지는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부삽으로 자두알만한 조개탄을 긁어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연통은 기역자로 꺽어져 창문 밖으로 연기를 뿜어낸다.

 

한 켠에서는 이주노동자 서너명이 의자에 앉아있기도 하고, 사무실 안팎을 둘러보기도 한다.

또다른 여성노동자가 그들에게 상담을 해주고 있다.

"돈 못 받았어요?" "무슨 일 했어요?" "여권 갖고 있어요?"

이주노동자들의 서투른 한국말을 듣다보면, 상담하는 여성노동자의 어투도 어눌해진다. 말투와 억양을 맞추는 것이다.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도.

 

이곳에는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기도 하고,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방송국도 운영하고 있다.

사무실에는 그렇게 이러저러한 용도로 쓰이는 방이 여러개 있는데, 게 중 하나는 식당이다.

식당에 들어서니 정갈하게 정돈해 놓은 씽크대, 식수대, 밥통, 식탁 따위가 있고,

소형 라디오 소리를 틀어놓았다.

네팔, 방글라데쉬, 인도네시아 등 이주노동자들 그네들 말로 진행하는 방송을 틀어놓은 것이다.

이것저것 어떻게 운영하는 것인지 묻고싶은 게 많았지만,

신기한 듯 이것저것 묻는 내 모습이 너무 재수없을듯 해서,

그냥 곁눈질로 훔쳐보기만 했다.

 

또 화물연대 동지들 몇 명을 만났다.

아~놔~참, 이것이 또 감동이다.

그들은 토요일까지 노동일을 하기 때문에 일주일에 그나마 쉬는 날은 일요일 뿐이라는데, 그 일요일에는 화물연대 투쟁에 함께한다고 한다. 회의며, 연대투쟁이며, 모임이며...

오늘도 일요일인데, 모임이 있어서 나온거란다.

세상물정 모른다는 듯 지나가듯 하는 한마디 한마디 들어보면, 이보다 원칙적이고 건강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자신들 맘같지 않은 지도부에 대해 비판은 하되 절대 비난은 않는다.

일주일에 6일을 노동하고, 남는 하루를 '노동운동'에 쏟아붓는 사람들...

 

부끄럽다. 그러나, 돌아서면 그만이다.

나이가 든 것일까.

갈수록 다짐을 많이 하게 된다...

의식적으로 나를 통제하지 않으면

나중에 내가 그토록 비난하던 모냥새가 돼버릴 지 모른다는 긴장이 요즘 부쩍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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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6 21:43 2007/02/06 21:43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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