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순이

알라딘 2011/10/02 19:04

바람 불면 괜히 쓸쓸해지고 낙엽지면 눈물짓던 시절 문학청년 아닌 사람이 누가 있었겠느냐마는 나도 그런 문학청년이었다. 학교 공부보다는 소설책을 더 읽고 싶어 했고 노트 필기보다 머리에 떠오르는 잡스런 생각을 끼적거리길 더 좋아했던 것 같다. 복도에서 내다보이는 창밖의 하늘에 피어오르는 구름이 고향 생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아마 고달픈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에 공부보다는 소설책을 더 가까이 하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소설 속의 세계가 더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끔찍한 내용일지라도 현실보다 더 끔찍할까.

나는 “내 어머니는 공장 노동자”라는 제목의 시를 쓴 적이 있다. 아마 스무 살 무렵이었을까. 하얀 연기처럼 공장 문을 나서는 많은 여공들을 아이들이 공순이라고 손가락질하던 시절이었다. 더러운 먼지로 뒤덮인 녹슨 창살 틈으로 보이는 여공들은 모두 하얀 두건을 쓰고 있었다. 회색 작업복을 입은 여공들이 손에는 기름때가 묻은 헤진 하얀 면장갑을 끼고 빠르게 손을 놀리며 박스 속에 든 물건을 이리저리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틈에서 나는 엄마를 보았다. 내 어머니는 공장 노동자였다. 손놀림이 빨라야 작업량이 밀리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던.


[여적]여공과 식모
(경향신문 입력: 2008년 08월 06일 18:17:23)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향신문은 정부수립 60주년을 맞아 ‘국가를 묻는다’는 특집을 연재 중이다. 현대사 60년의 주인공으로 농사꾼, 노동자와 함께 식모와 여공(여성노동자)을 꼽았다. 여러 가지를 떠올리게 한다. 식모와 여공,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 시대를 적신 물기 어린 호칭이었다. 시골에는 농사 외에 마땅히 벌어먹을 일터가 없었다. 정부의 도시와 기업 위주의 정책은 젊은이들을 농촌에서 몰아냈다. 젊음을 부릴 공간을 찾아 서울로 서울로 올라갔다. 기차역은 눈물 마를 새가 없었다. 떠나면서, 보내면서 울었다. 기적소리만 들어도 슬펐다. 아는 사람이 없으면 친구의 편지 한 장 달랑 들고 서울로 올라갔다. 연고가 없는 ‘무작정 상경’이 사회문제가 됐다. 경찰이 역 앞에서 대책 없이 두리번거리는 소녀, 소년들을 찾아내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서울에서 가장 쉽게, 가장 많이 들어간 곳이 공장이었다. 좀 어리다 싶으면 있는 집의 식모로 들어갔다. 대개 그만그만한 일터에서 그만그만한 돈을 받았다. 거의 기계가 될 때까지 일하고, 하녀처럼 쓸고 닦았다. 공순이라고 식순이라고 불렸다. 서럽고 힘들어도 아버지의 약값을, 동생의 등록금을 모았다. 하지만 젊음은 또 그렇게 야위어 갔다. 모두 가난이 죄였다. 서울 생활이 고달플수록 고향이 그리웠다. 밤이면 머리를 고향 쪽으로 두고 새우잠을 잤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고향으로 달려가지만 어쩌다 내려간 고향은 여전히 남루했다. 그래서 또 울었다. 햇빛을 보지 못해 해쓱한 얼굴을 사람들은 수돗물을 먹어서 뽀얘졌다고 했다. 그럼 그저 웃었다. 서울살이가 고됨을 절대 말할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구로공단, 청계천, 영등포가 서울에서도 번화가인 줄 알았다.


누이들은 가난을 절대 물려주지 않겠다고 이를 물었다. 어떻게든 자식들은 가르쳤다. 마침내 이 땅에서 여공과 식모를 몰아냈다. 한국경제는 누이들의 땀과 눈물을 먹고 자랐다. 그 누이들은 억척스러운 아줌마에서 하나 둘 노인으로 편입되어가고 있다. 정부수립 이후 60년, 삼가 치열한 삶을 기리는 바이다. 고되고 힘들어도 저들이 제 자리를 지켰기에 한국은 탈선하지 않았다. 그리고 저들이 낳은 딸들은 어느 시대보다 당당하고 똑똑하다. 위대한 어머니가 쌓은 덕이다.

<김택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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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2 19:04 2011/10/02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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