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서든 네이버에서든 '구글'과 '신의직장'을 키워드로 검색하면 거의 모든 언론 매체가 구글을 신의 직장, 꿈의 직장이라고 추켜세우며 극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구글이 신의 직장인 이유야 어떻든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직장을 갖고 싶어한다.

 

신의 직장이 따로 있나. 정규직에 처우와 복지 수준이 높고 노동환경이 잘 갖추어져 있는 곳이 바로 신의 직장이 아닌가? 모든 매체에서 한국에 구글 같은 신의 직장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를 댄다. 분배 없는 부만 축적하는 재벌 기업들의 행태, 노동자들을 말 그대로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착취하면서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있는 현실을 잘 안다.  

 

철도노조의 파업에 대해 정부 관리들이 이놈저놈 할 거 없이 철도 노동자들을 철밥통이라고 부르고 철도공사를 신의 직장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해서 철밥통에 신의 직장에 다니는 것이 잘못인가?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서고 그 차별이 이루 말할 수 없고 언제 해고될 지 몰라 불안 속에 하루를 지새고 있는 수천만의 노동자들에게 철밥통과 신의 직장이야 말로 당장 이루어야 할 현실이 아닌가? 

 

언제는 구글이 신의 직장이라고 추켜세우고 난리법석을 떨든 놈들이 이젠 완전히 엉뚱한 소리를 해대니 저들의 머리에 진짜 뇌가 있기나 한건지, 무뇌아가 바로 저런 놈들이 아닌가 싶기는 하지만 신의 직장이라는 철도공사의 현실을 제대로 알고 하는 소린지 귀싸대기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다.

 

구글링해서 찾아보니 신의 직장이라는 철도공사가 이런 수준이다. 산업안전보건법 적용 이전인 2000년에는 사고발생 건수 49건에 사망(8), 중상(40), 경상(4)으로 인한 사상자가 총 52명이다. 산업안전보건법 적용 이후 2005년에는 사고발생 건수 59건, 사망(3), 중상(50), 경상(8)으로 인한 사상자가 총 61명이다  --> 관련 자료는 여기(http://www.krri.re.kr/webzine/y2006/m59/fortrend/20060711/1_13250.html)

 

신의 직장이 이렇다. 신의 직장이 아니라 지옥이다. 노동자가 죽거나 다쳐 불구가 되어야 노동을 멈출 수 있는 삶.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나는 정부 관리들이 신의 직장이라고 저 지랄하는 것보다 일반 시민들이 신의 직장이니 철밥통이니 하며 받아쓰기 하는 놈들이 더 싫다. 자기 삶을 돌아볼 용기도 여유도 없는 사람들, 자신의 분노를, 그 분노의 원인을 찾을 수 없어 자기 보다 잘났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욕하고 소리지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것 잘 안다. 그렇다고 이런 불행한 인간들을 한없이 가엽게 여기고 측은하게 여기기에는 그 행태가 너무 괘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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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7 22:34 2013/12/27 22:34

들뢰즈는 현대사회에서 예술(작품)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고 묻고 있는데, 들뢰즈에게 예술은 일종의 반체계, 곧 탈중심화된 자율성의 세계다. 들뢰즈는 예술은 "반-정보"를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들뢰즈에게 언어는 정보 전달 체계이고 커뮤니케이션은 상호적이 아니라 일방적이다. 말하자면 언어는 명령 체계다. 한 사람이 애인에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은 곧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너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일종의 명령이다. 

 

현대사회를 통제사회라고 규정하고 이를 고속도로에 비유하는 것은 재미있다. 고속도로는 일방통행이다. 앞만 보고 달릴 수 밖에 없다. 무한히 달릴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특정한 방향으로, 즉 지시된 방향으로만 달릴 수 있다. 그럼에도 고속도로는 우리에게 자유로운 질주라는 환상을 심어준다. 고속도로는 사실 닫힌 체계이다. 안내 표지판은 정보체계, 곧 명령체계이며 일종의 법적 체계를 상징하는 셈이다. 나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표지판을 볼 때마다 자주 오른 손으로 몽둥이를 들고 왼손 바닥을 탁탁치며 운전자를 꼬나보고 있는 경찰관을 떠올린다. 그런데 우리는 표지판이 없으면 난감해하는 것이다. 이게 사실 딜레마다.

 

예술작품이 반-정보라는 의미는 일방향에 반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중심화의 체계를 벗어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반-정보가 본래 저항 행위이지만 실제로 저항 행위가 될 때에 한해서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들뢰즈에게 예술은 커뮤니케이션의 도구가 아니며 커뮤니케이션과 마무런 관련이 없다. "엄밀하게 말해서 예술작품은 최소한의 정보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통제사회는 더 이상 감금의 환경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학교도 마찬가지지요. 직업과 학교를 동시에 하는 것이 멋질 거라고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는, 지금 막 태어나고 있는 테제들, 앞으로 40~50년 동안 발전될 테제들을 잘 감시해야 합니다. 학생들을 감금의 환경 속에 강제로 군집시킬 필요가 없으며, 또 우리의 미래가 되고 있는 평생교육을 통해 학교와 직업의 정체성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흥미로울 것입니다. 통제는 훈육이 아닙니다. 고속도로로 사람들을 감금하지는 않지만, 고속도로를 통해 통제 수단을 늘릴 수 있게 됩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 고속도로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전혀 갇혀 있지 않고 무한히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데도 완벽하게 통제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입니다.

 

정보는 바로 이것, 즉 주어진 사회에서 통용되는 명령어의 통제 체계라고 간주합시다.

 

예술작품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있습니까?

...

철학을 할 때 우리가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개념을 고안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이것이 아주 멋진 철학적 개념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봅시다. 죽음에 저항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로의 대답이 상당히 좋은 대답이라는 것은 우리 시대보다 3,000년 전에 만들어진 작은 조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관점으로는, 최소한 예술만이 유일하게 저항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예술은 저항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항 행위와 예술작품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여기서 나옵니다. 예술작품이 어떤 방식으로는 저항 행위이기는 하지만, 모든 저항 행위가 예술 작품은 아닙니다. 모든 예술작품이 저항 행위는 아니지만, 어떤 방식으로는 예술작품은 저항 행위입니다."

(사유 속의 영화, 이윤영 엮고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 322-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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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8 15:56 2013/12/08 15:56

어제 [연합뉴스]에 국민의례를 꼴사납다고 한 장학사 이야기가 실렸다. 기사에는 이런 글도 있다. "박 장학사의 발언에 도교육청 관계자와 초·중등학교 교원 500여명을 물론 외국인도 다수 참석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물론 생각 없이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경향신문에도 오늘 같은 기사가 실렸다.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의 제목은 이렇다. "국민의례 꼴사납다" 장학사 발언 논란.

내가 경향신문에 특별한 애착을 가져서 일수도 있지만 나는 이 기사 제목을 보고 아, 역시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국민의례에 대해 좀 비판적인 기사를 기대했으나 연합뉴스의 기사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오늘 확인해 보니 댓글이 4000개 넘게 달렸다. 연합뉴스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찬반이 거의 반반이다. 난도 댓글을 달았는데,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선진국" 중에 국민의례를 하는 나라가 얼마나 있는지, 국민의례는 국가주의의 상징이다. 이 멍청이들아, 이런 식의 댓글을 달았다. 새벽에 달고 나서 아침에 후회했다. 지울까 하다 그냥 두었는데 오늘 경향신문 기사를 보니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앞섰다. 경향신문의 이 기사는 온라인에서는 검색이 되지 않는다.

앞의 기사와 연동해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오피니언 난을 펼치니 "애국심은 위험하다"는 제목을 단 김철웅 논설실장의 칼럼이 실렸다. 안타깝게도 김철웅 칼럼도 그저 그런 글이다. 진짜 애국심과 가짜 애국심을 구분한 후 가짜 애국심은 위험하다는 식의 글이다. 나는 애국의 의미와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글일 거라고 지레 짐작했다. 그런데 국가를 사랑하라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리는데 왜 국가를 사랑해야 하는가?

 

[김철웅칼럼]애국심은 위험하다
김철웅 논설실장
 
애국심은 거룩한 것이다. 그런데 영국 문필가 새뮤얼 존슨(1709~1784)은 “애국심은 악당의 마지막 도피처”라고 악담을 했다. 지금도 심심치 않게 인용되는 이 말은 왠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그러나 무슨 생각에서 이 말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앞뒤 맥락이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인즉 존슨이 이 말을 했다고 세상에 알린 사람은 그의 전기를 쓴 동시대인 제임스 보스웰이었다. 보스웰은 존슨이 비난한 건 전반적 애국심이 아니라 가짜 애국심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한편 사전 편찬자이기도 했던 존슨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자신이 만든 영어사전에 ‘애국자’에 대해 “가짜 주화를 가려내듯 외관만 그럴듯한 가짜 애국자를 가려야 한다”고 썼다. 애국자를 자처하면서 당파적 분란만 일으키는 행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존슨이 뭘 말하려 했는지 어느 정도는 파악된다.

애국심에 관해서라면 박근혜 대통령의 애국심을 의심할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아버지의 서거 소식을 듣고도 제일 먼저 한 말이 “전방은요”였다고 한다. 투철한 국가관·안보관이 몸에 배어 있음이다. 2006년쯤 김무성 당시 한나라당 의원에게 어떤 기자가 “왜 박근혜 전 대표를 지지하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정치인 가운데 박근혜만큼 애국심이 깊은 사람은 없다”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재미있다. “MB는 한참 뒤떨어진다. 자기 생각만 하고 산 사람 아닌가.” 

김 의원의 말이 아니더라도 박 대통령은 정말 나라 생각만 하고 사는 것 같다. 지난달 말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도 3년 전 연평도 사태 때 “휴가를 포기하고 복귀한 장병들의 애국심”을 치하했다. 안보를 지키는 데 무기보다 훨씬 중요한 건 “국민들의 애국심과 단결”이라고도 했다. 

대통령이 뜨거운 애국심으로 단결을 호소하는데 나라는 왜 이리 분열로 치닫는 것인가. 답은 애국심 자체가 아니라 어떤 애국심이냐에서 찾을 수 있다. 존슨이 설파했듯 만약 가짜 애국심이라면 ‘악당의 마지막 도피처’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애국심의 독선성이다. 국정 운영이 독선·불통인데 나라사랑마저 자기만의 방식을 고집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애국심은 결코 특정인이나 집단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애국의 길, 방법론은 여러 가지인 것이다. 그걸 인정하지 않고, “이것만이 애국”이라 외치는 독선적 애국심, 이를테면 ‘애국독점주의’는 때로 아주 위험하다. 남이 하는 애국은 애국이 아니고, 내 것만 진짜 애국이라는 독선은 자칫 독재와 파시즘으로 가는 길이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 가운데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란 게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1910년 뤼순감옥에서 순국하기 전 남긴 것이다.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며 애태운다”라는 글엔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위기를 염려하는 애국정신이 절절히 흐른다. 나는 이 휘호를 천주교 순교성지인 서소문 공원에서 처음 접했다(원본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있다). 경찰이 설치한 입간판 안보 포스터에 사용됐는데, ‘함께하는 안보의식 행복한 대한민국’이란 표어와 함께였다. 안 의사의 휘호가 천주교 성지에서, 하필 범죄·간첩신고 독려 표어에 쓰였다는 게 심한 부조화로 여겨지긴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안보 포스터로 적절하다는 게 경찰의 판단인 것을.

민주주의는 생각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데서 출발한다. 저 사람이 추구하는 애국적 가치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인정해 주는 거다. 애국심이라고 해서 무슨 금단의 성역이 아닌 것이다. 
 
박정희는 1940년 23세 때 교직을 팽개치고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해 충직한 일본제국의 군인이 된다. 장준하는 1944년 26세 때 일본 학병을 탈출해 중국군 유격대에 가담하면서 독립운동가로 나선다. 지금 새삼 두 사람의 인물론을 펴려는 게 아니다. 둘의 운명은 결국 독재자와 민주투사로 갈렸지만 다카키 마사오 생도를 움직인 것도 긴 안목으로 본 애국의 길이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지금 급속히 공안시대로 가는 것을 두고 여러 갈래 분석이 가능하지만 이 애국적 가치에 대한 편협한 이해가 중요 원인이 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국가안보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공안시대 종북몰이를 정당화하는 데 애국심이 동원되는 것이다. 9·11 테러 후 미국이 제정한 패트리엇법(애국자법)은 무제한적 개인정보 접근을 허용하는 등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 위협이란 비판을 받았다. 긴 법이름의 두문자를 딴 이 법은 미국인들의 애국심을 결집하자는 의도였지만, 오도된 애국의 전형적 사례로 비판받았다. 

실로 애국자들이 넘쳐나는 공안시대다. 대통령의 애국심이 전염성이 강한 탓에 소나 개나 애국을 부르짖는 것 같다. 그럴수록 찬찬히 살펴보고 진짜와 가짜 애국심을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 예리한 감식안이 필요한 이유다.
* 원문은 이곳에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2032015465&code=990344&s_code=ao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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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4 17:14 2013/12/04 1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