궂은날

일상 2014/02/08 14:55

재클린 뒤 프레와 바렌보임이 함께 연주한 베토벤의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소나타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조금 부드러워진다. 특히 기분이 언짢거나 마음이 심란하여 무엇을 해도 집중이 되지 않을 때 이 연주를 듣고 있으면 기분이 나아진다. 첼로의 굵은 선율이 그렇게 강하지도 않고 바렌보임의 피아노는 요즘과 달리 강하고 때론 부드럽고 때론 거친 감이 뒤 프레의 첼로와 기이한 조화를 이루는 것 같다. 뒤 프레의 이 음반은 아마도 67년 바렌보임과의 결혼 전후에 가졌던 실황공연을 녹음한 거라고 생각된다. 그러니 이 음반은 60년대 후반 또는 71년, 또는 72년이었을 텐데, 당시 사람들은 요즘과 달리 천식이 심한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 이 음반의 가장 큰 골치는 연주 중간 중간에, 가끔씩이긴 하지만 객석에서 아주 거슬리는 기침 소리가 들려 온다는 거디. 내가 연주자였더라면 나는 벌떡 일어나서 그 사람을 쳐다보고 그냥 무대를 나왔을 것 같다. 나는 이런 문제 때문에 이 음반은 아주 가끔 듣는다. 오늘 같은 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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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8 14:55 2014/02/08 14:55

" ... 종교에 대한 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이다. 오류의 제단과 화덕 앞에서의 천국의 기도가 논박당한 후 그 오류의 세속적 실존이 논박에 내 맡겨져 있다. 어떤 초인을 찾던 천상의 환상적 현실 속에서 단지 그 자신의 반영만을 발견했던 인간은 그의 참된 현실을 찾고 또 찾아야만 할 곳에서 이제 더 이상 그 자신의 가상만을, 비인간만을 찯는 경향을 가지지 않게 될 것이다.
비종교적 비판의 기저는 이것이다 : 인간이 종교를 만들지, 종교가 인간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종교는 자기 자신을 아직 획득하지 못했거나 혹은 이미 자기 자신을 다시 상실해 버린 인간의 자기 의식이고 자기 감정이다. 그러나 인간, 그 자신은 결코 세계 바깥에 웅크리고 있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곧 인간의 세계이며 국가이며 결사체(Sozietät)이다. 이 국가, 이 결사체는 전도된 세계이므로, 종교 즉 전도된 의식을 생산한다. 종교는 이 세계의 일반 이론이요, 이 세계의 백과사전적 개요이며, 통속적 형태로 된 이 세계의 논리학이요, 이 세계의 유심론의 명예가 걸린 문제이며, 이 세계의 열망이요, 이 세계의 도덕적 재가(Sanktion)이며, 이 세계의 장엄한 보충이요, 이 세계의 일반적 위안 근거이자 정당화 근거이다. 종교는 인간적 본질이 아무런 진정한 현실성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인간적 본질의 환상적 현실화인 것이다. 따라서 종교에 대한 투쟁은 간접적으로 그 정신적 향료가 종교인 저 세계에 대한 투쟁이다.(헤겔 법철학에 대한 비판을 위하여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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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2 14:32 2014/01/12 14:32

잡다한 생각

일상 2014/01/06 16:10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언제나 신발에 물이 샌다. 바지 가랭이가 젖는 거야 뭐라 할 수 없지만 축축한 발을 꺼집에 내면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아니 아주 좋지 않아서 매번 망할 놈의 신발!이라는 욕이 튀어 나온다. 21세기에도 신발에 물이 새다니, 끔찍한 일이야. 나는 사실 21세기에는 비에 젖지 않는 옷이나 신발이 등장할 거라고 생각했다. 옷은 비옷도 있고 하니 신발은 당연히 물이 새지 않을 거라고 거의 확신했다. 그런데 아직 물이 새지 않는 운동화는 등장하지 못한 모양이다.

신발에 대해 말하자면 한 가지는 확실하게 달라진 것이 있다. 등산화가 그렇다. 18살 처음 지리산을 오를 때 등산화를 신지 못했다. 그냥 학교에 신고 다니는 운동화를 신었다. 눈이나 진눈깨비가 오는 경우에는 비닐로 신발을 싸매고 산 입구에서 2500원을 주고 싸구려 아이젠을 사서 끼웠다. 나는 이렇게 산 아이젠을 두 번 사용한 기억이 없다. 겨울이건 여름이건 산을 오를 때 가장 괴로운 일은 등허리와 머리에서 쏟아지는 땀을 닦는 거였다. 특히 겨울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산을 오르다 잠시 쉴 때 등허리의 땀이 식으면서 몸이 으쓱한 기분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즘이야 좋은 등산복이 나왔다지만 나는 여전히 싸구려 등산바지에 그냥 평소 입고 다니는 잠바를 걸쳐 입고 산을 오른다. 요즘은 산에서 잠을 자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짐이 가벼워진 것 이외는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등산화를 빼면 말이다. 그래서 가끔은 땀을 잘 흡수하고 잘 마르는 등산 내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겨울 산을 오를 때는 단순한 방한이 아니라 전자 장치가 부착되어 몸을 덥혀주고 따듯하게 해 주는 그런 등산복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아마 곧 그런 옷들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로즈 젤라즈니의 단편을 읽는데, 먼 어느 행성의 산을 오르는 주인공을 묘사하는 이런 부분이 있다. "... 상당한 높이까지 올라갔다. 그 무렵에는 호흡 장치를 쓰고 있었고, 등산복의 전열 장치도 켜 놓은 상태였다."

 

가벼우면서도 전자적인 전열장치까지 갖추고 있는 등산복이 있다면 분명 획기적일 게 틀림없다. 나야 뭐 전문 산악인이 아니니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사람들이 어떤 장비를 사용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 10년 전의 장비와 지금은 많이 다를테고 20년 전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다를 것이다. 그런데 좀 더 편하고 몸의 땀과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그런 등산복을 입고 산에 오르는 것이 더 좋을까? 그런 (과학적으로 디자인된) 등산복을 입는 것과 예전처럼 특별한 장비 없이 산을 오르는 게 더 좋을까? 물론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이 오른다는 목적이 중요하다면 사람들은 그런 옷을 선호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걸 등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등산은 산과 나를 맞추는 방식이 중요하다. 추우면 추운 대로 산과 기후에 나를 맞추어야 하고 내가 더 겸손해야 할 거다. 올해는 이런 생각을 한다. 나를 세상에 맞추는 것과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를 좀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나이를 먹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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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6 16:10 2014/01/06 1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