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범, 이 사람.

일상 2014/03/13 22:23

나는 구자범 지휘자를 잘 모른다. 이런 말을 하면 웃기는 이야기지만 사실 구자범을 만난적도 없고 그의 연주를 경험한 적도 없다. 그저 지인이 페이스북에 올린 사연을 접하면서 구자범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고 하고 철학과 석사과정을 다니다 독일로 음악 유학을 떠났다고 한다. 다음에서 검색을 하니 '독일 하노버 국립 오페라극장 수석 상임 지휘자'라는 경력이 뜬다. 다음에서 경력을 찾기 위해 구자범이라는 이름을 검색란에 쳐보니 이런 식으로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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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런 일을 겪게 되었을까?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구자범과 관련된 기사를 몇 개 읽었다. 가슴이 아프다. 기사를 찾아 읽을 수록 화가 난다. 다음 인물지식 검색이라는 곳에 올라와 있는 글을 보니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우리 삶의 자화상이라는 생각조차 든다.


전두환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을 때 쓰레기 더미에서는 장미꽃이 필 수 없다고 영국놈들이 지껄였다고 하는데, 우리 삶이 쓰레기보다 못한 것 같다. 구자범은 한국에서 처음 지휘를 한 곳이 광주 시향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말러를 지휘했다고 한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구자범이 지휘대에 서면 꼭 한 번은 그 사람을 직접 만나고 싶다.

 

 

[왜냐면] 구자범, 그리운 지휘자 / 장원섭

한겨레 | 입력 2014.03.13 19:20

[한겨레] 가끔 연주회에 가서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일을 10년 넘게 해왔다. 지난 2월7일엔 앨런 길버트가 지휘한 뉴욕필 연주를 들었다. 사무실에서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면, 예술의전당까지 40분이면 도착한다. 힘든 하루가 끝나면 음악회에 가서 음악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바람처럼 부질없는 음악이 삶과 사회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음악은 어디서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 어디로 사라지는가. 클래식 음악 연주장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어릴 때부터 클래식 음악을 들은 아내는 클래식 연주장에서 오랫동안 일했다. 어제 저녁 우리는 구자범 지휘자에 대한 슬픈 대화를 또 나누었다. 아내와 나는 2007년 11월2일, 윤이상 패스티벌 폐막공연에서 구자범 지휘자를 처음 만났다. 케이비에스(KBS)교향악단이 연주하고, 하인츠 홀리거와 우르줄라 홀리거가 협연한 그날 연주곡은 윤이상의 <견우와 직녀 이야기>와 <교향곡 4번 '암흑 속에서 노래하다'>였다.

연주회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열정적이고 진실한 지휘자와 첫만남을 기뻐했다. 그 후 아내는 구자범 지휘자 연주회가 언제 있는지 묻곤 했다. 2011년 구자범 지휘자가 경기필 지휘를 맡으면서, 우리는 그의 지휘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2011년 5월13일, 경기필 제121회 정기연주회에서 아내와 나는 구자범의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을 들었다. 그 연주회 소감을 나는 이렇게 썼다. "구자범은 악보 없이 연주했다. 악보 없이 연주하는 지휘자는 처음 봤다. 악보대가 없는 공간에는 그의 고뇌하는 몸짓이 춤을 추었다. 무거운 곡들을 치열한 정신으로 뜨겁게 지휘한 그의 지휘가 놀랍다. 이 맑고 가열한 정신이 잊혀진 광주의 정신이 아닐까? 음악이 오락이 아니라 고통이며 싸움임을 그는 보여주었다."

지난해 4월6일, 경기필 '류재준의 밤' 연주회가 지휘자 구자범과 마지막 만남이었다. 후드득후드득, 비가 오는 오후에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아내와 나는 서울에서 수원까지 갔다. 경기도 문화의전당 로비에서 작곡가 류재준 얼굴도 볼 수 있었다. 류재준의 <장미의 여름 서곡>으로 시작된 1부 연주회가 백주영이 협연한 <바이올린 협주곡 1번>으로 끝났다. 연주회 2부, 류재준의 <교향곡 1번 레퀴엠>이 끝나자마자 많은 관객들이 지휘자와 경기필에 기립박수를 보냈다. 아내도 의자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환상적인 연주회가 서울로 돌아가는 비 내리는 어두운 거리를 밝게 했다. 아름다운 '류재준의 밤'이 아름다운 지휘자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어 버렸다. 지금도 아내는 마지막 만남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슬퍼한다.

철학을 공부한 지휘자 구자범 음악의 성격은 진실과 자유 그리고 열정이다. 열정적으로 지휘하는 그는 언제나 연주자들을 음악적 한계까지 몰고 갔으리라. 한계까지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에 그의 음악은 다른 지휘자 음악과 달리 진실하다. 진실은 철학의 마음이며, 고통스러운 삶과 사회의 나침판이다. 철학은, 음악은 진실이라는 나침판으로 거짓과 싸우고 견디며 진리의 길을 찾아간다. 구자범의 지휘는 연주자와 관객 그리고 스스로를 억압하지 않아 자유롭다. 자유는 권위를 떨쳐버리려는 삶과 사회의 빛이다. 진실과 자유 그리고 열정으로 구자범은 2010년 광주에서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을 지휘할 수 있었다.

지난해 6월, 불미스러운 일로 구자범은 지휘봉을 놓았다. 아내와 나는 그 일을 전해 듣고 너무나 어이가 없어 웃어버렸다. 구자범의 지휘를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말 같지 않은 웃기는 사건에 우리처럼 비웃었으리라. 하지만 하이에나 같은 살벌한 여론이 광풍처럼 몰아쳐 결국 뛰어난 지휘자가 무대에서 내려왔다. 구자범과의 이별은 사실 내 잘못이고, 그다음으로 아내의 잘못이다. 나와 아내는 그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음악을 그리워하는 우리는 그때 무슨 일이라도 했어야만 했다..... 계속 http://media.daum.net/editorial/column/newsview?newsid=20140313192009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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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3 22:23 2014/03/13 22:23

모차르트

일상 2014/02/15 22:55

"모차르트에게는 여러 가지 미소가 있지. 그의 음악은 비극적인 삶 속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낙천적이야. 왜? 음악을 완성하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냥 떠오르는 악상들을 악보에 옮기기만 해도 되었지.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삶은 그 자체가 사랑이었기 때문이야."(피아노 레슨, 애나 골드워디, 아니마) 

 

아주 오래 전에 극장에서 영화 "아마데우스"를 봤을 때 나는 모차르트보다 살리에르에 더 집중했는데, 살리에르의 고뇌가 나에게는 더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나는 누구나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때 이런 말이 유행이었다. "능력은 있다. 그러나 열정은 없다. 열정은 있다. 그러나 능력은 없다." 뭐 이런 말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종종 누군가를 놀리기 위해 우리는 그에게 "열정은 있다. 그러나 능력은 없다."는 말을 하고는 했다. 곰브리치의 <예술과 환영>인지 <서양미술사>인지 모르겠으나 그 책의 서문에서 곰브리치는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 당신의 그림은 art가 아니다." 물론 이 말도 그 사람을 놀리기 위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얼마나 놀라운가. 단지 떠오르는 악상을 악보에 옮기기만 하면 되었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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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5 22:55 2014/02/15 22:55

얼마전 일본 애니메이션 <늑대아이>를 보면서 아마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지독하게 냉소적이거나 아주 웃기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어떤 이유로 끝까지 보지 못하고, 여전히 보지 못하고 있는데, 나는 이 영화의 기본적인 전제가 남자와 아이들은 모두 '짐승'이라는 은유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이들은 잔인하다. 스스로 잔인함에 대한 반성이 없거나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이지만 아이들의 행동이 잔인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생각은 이성이 아니라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본능이 아이들의 심성의 근본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아이들의 잔인성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지양된다. 만약 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잔인성을 지양할 수 없거나 제거할 수 없는 사회는 그 자체로 잔인하다. 내가 아이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여기 있나 보다.
 

사랑이 이 모든 것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는 그렇게 믿었다. 가족과 부모의 사랑만이 아이들을 잔인한 짐승의 세계로부터 인간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그런 믿음이 많이 사라졌다.


“루터와 칼뱅의 사상, 그리고 칸트와 프로이트의 사상 저변에 깔려 있는 가정은, 이기심과 자기애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즉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미덕이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죄악이다. 게다가 타인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사랑은 서로 배타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론적으로 사랑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다. 사랑은 원래 어떤 특정한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오래 머물러 있는(lingering) 자질이 어떤 ‘대상’에 의해 현실화될 뿐이다. 증오는 파괴를 원하는 열망이고, 사랑은 어떤 ‘대상’을 긍정하려는 열망이다. 사랑은 ‘애착’이 아니라, 그 대상의 행복과 성장과 자유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이고, 그 대상과 내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사랑은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도 얼마든지 나아가게 할 수 있다. 배타적인 사랑이란 그 자체로 모순이다. 물론 누군가가 명백한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런 특정한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너무 많고 복잡해서 여기서 논할 수는 없다. 하지만 특정한 ‘대상’에 대한 그 사랑은 마음 속에 오래 머물러 있던 사랑이 한 사람과 관련하여 현실화되고 그 사람에게 집중되었을 뿐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사랑에 대해 낭만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기가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은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뿐이라고 말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일생을 사는 동안 그 사람을 찾을 가능성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 그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과 관계를 끊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한 사람에게만 느낄 수 있는 사랑은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사랑이 아니라 가학-피학적 집착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에는 기본적인 긍정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긍정이 애인을 향하는 것은 그 애인을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자질들의 구현으로 보았을 때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당연히 인간에 대한 사랑을 수반한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인간에 대한 사랑은 특정한 한 사람에 대한 사랑 ‘다음에’오는 추상 개념도 아니고 특정한 ‘대상’과의 경험을 확대한 것도 아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발생적으로는 구체적인 개인들과의 접촉에 의해 생겨나지만, 이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특정한 한 사람에 대한 사랑도 생겨날 수 없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원칙적으로 나 자신의 자아는 타인과 마찬가지로 내 사랑의 대상이다. 내 삶과 행복, 성장과 자유에 대한 긍정은 기본적으로 그런 긍정을 할 준비가 되어 있고 긍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데 뿌리를 둔다. 개인이 이런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자신에 대해서도 그런 준비가 되어 있다. 그가 오직 타인만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예 사랑을 할 수 없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원칙적으로 나 자신의 자아는 타인과 마찬가지로 내 사랑의 대상이다. 내 삶과 행복, 성장과 자유에 대한 긍정은 기본적으로 그런 긍정을 할 준비가 되어 있고 긍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데 뿌리를 둔다. 개인이 이런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자신에 대해서도 그런 준비가 되어 있다. 그가 오직 타인만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예 사랑할 수 없다.

이기심은 자기애와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자기애와는 정반대의 것과 동일하다. 이기심은 일종의 탐욕이다. 모든 탐욕이 그렇듯이, 이기심은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불만족을 포함하며, 그 결과 진정하 만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탐욕은 바닥이 없는 구덩이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지만 끝내 만족에 도달하지 못하고 기진맥진한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이기적인 사람은 항상 불안하게 자신을 걱정하지만, 절대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안절부절못하고, 충분히 얻지 못하거나 뭔가를 놓치거나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늘 사로잡혀 있다. 그는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에 대한 불타는 질투심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무의식적 역학 관계를 좀 더 관찰해 보면, 이런 유형의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며, 사실은 자신을 몹시 혐오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뜻 모순되어 보이는 이 수수께끼는 쉅게 풀 수 있다. 이기심은 바로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이 별로 없다는 데 뿌리를 두고 있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 자신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항상 자신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 그에게는 진정한 사랑과 긍정의 기반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내면의 안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기본적으로 안정과 만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걱정해야 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차지하려고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이른바 자기도취적인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을 위해 뭔가를 얻는 데 관심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칭찬하는 데 관심이 많다. 이들은 표면 상으로는 자신을 무척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들의 자기도취는--이기심과 마찬가지로--자기애의 근본적인 결핍에 대한 과잉 보상인 것이다. 자기도취적인 사람은 사랑을 남으로부터 빼앗아,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돌린다고 프로이트는 지적했다. 이 말의 앞부분은 맞지만 뒷부분은 틀렸다. 자기도취적인 사람은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다."(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김석희 옮김, 휴머니스트,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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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8 19:31 2014/02/08 19: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