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이유로 신문을 읽지 못했다. 그동안 뉴스에 눈과 귀를 닫은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스마트 기기로 접하고 신문은 헤드라인과 제목만 죽 훑는 편이었다. 오랜만에 신문을 펼쳐 글을 읽으니 마음이 편안해 진다.

[사유와 성찰]길을 잃지 않는 사회, 길을 나서지 않는 사회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스함을(…) 산속에서 밤을 맞아본 사람은 알리라 (…) 먼 곳의 불빛은 /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나희덕 ‘산속에서’ 중에서) 

정보 공간의 무한 확장 속에서 ‘현실’의 정체가 애매해지고 있다. ‘리얼리티 쇼’라는 장르가 유행하듯, 점점 더 많은 ‘실재’가 미디어 이벤트로 대체된다. 삶이 고단할수록 가상의 세계에 도피하고 싶은 충동이 만연하고,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하는 판타지 소설도 그런 욕구를 반영한다. 친구들에게서 괴롭힘을 당하고 공부 스트레스에 짓눌리다가 자살한 주인공이 마법세계에 환생하여 전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거나 절대자로 변신해 복수한다는 등의 스토리가 그것이다. (‘학교폭력 성적…고통을 환상으로 풀려는 고교생’ 경향신문 8월5일자 게재) 낯선 곳을 방문하면 길을 잃기 일쑤다.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목적지를 찾지 못해 초조해하기도 한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어둠이 내린 후의 방황은 두렵기까지 하다. 시인은 막막한 가운데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이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가 되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그렇듯 경이로운 순간을 종종 만나게 된다. 


스마트폰이 필수품이 된 시대에 그런 길 찾기는 점점 희소해지고 있다. 인터넷의 도움으로 언제 어디서든 현재 지점과 이동 경로를 간편하게 검색할 수 있다. 기계의 안내만 따라가면 낯선 곳에서도 편리하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지금 젊은이들은 그러한 정보 환경에서 성장해왔다. 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는 그들을 가리켜 ‘길을 잃어본 적이 없는 세대’라고 했다. 그들은 디지털 기기의 도움이 없이는 스스로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정보가 주어지지 않으면 좌절하고 문제를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 그 안에 숨어 있는 위험을 회피하는 가운데 인생을 주도적으로 꾸려가는 힘이 점점 박약해진다. 

‘길을 잃어본 적이 없는 세대’는 다른 말로 하자면 ‘스마트폰이나 패드 없이 낯선 곳에 가본 적이 없는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또는 ‘지도에 나타나지 않은 길을 가본 적이 없는 세대’이기도 하다. 젊은 세대만이 아니다. 정치적 불안, 빈곤의 확대, 인간관계의 해체 그리고 만성화되는 각종 재난들 속에서 대다수 사람들의 생존은 점점 불투명해지고 있다. 사회 자체의 앞길이 잘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저마다 안개 자욱한 미로를 탐색해야 한다. 때로는 없는 길도 뚫어야 한다.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지난달 안산의 단원고 2학년생 30여명이 국회의사당까지 1박2일 동안 행진했다. 죽은 친구들을 위해서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에 길을 나섰고, 어느 구간에서는 시민들이 깔아준 노란 꽃잎들을 지르밟고 가기도 했다. 햇볕이 뜨거워 많이 힘들었지만, 행인들이 보내준 갈채에 힘입어 한 명의 낙오도 없이 무사히 목적지에 이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500여 명의 시민들이 함께 걸었다. 생존학생 학부모 대표 장동원씨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의도에 도착한 뒤에도 행렬은 끝이 안 보였습니다. 아이들에게 ‘뒤돌아보라’고 했지요. 그걸 보고 우는 애들도 있었고요. 정말 이 아이들의 한 발걸음이 큰 발걸음을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 ‘우리 사회가 아직 죽지 않았구나,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아이들이 직접 본 것이죠. 매일 기사에 달린 댓글만 보다가 끝이 없는 행렬을 목격한 것이죠. 앞으로 살아가는 데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살아남은 아이들이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오마이뉴스 7월19일자)


세월호의 참사는 우리에게 고통을 직면하는 힘을 요청하고 있다. 입시 공부와 인터넷 그리고 비좁은 또래 집단에 갇혀 지내던 아이들이 자신의 아픔에 온몸으로 함께 해주는 행렬을 목격하면서 감동했다. 그 순간의 위대한 연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했는가. 앞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누구와 함께 길을 찾아 나설 것인가. 지친 발걸음을 격려하는 ‘먼 곳의 불빛’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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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0 18:32 2014/08/10 18:32

 

 

녹색당은 집권을 꿈꾸지 않는 유일한 정당이라는 이필렬의 말에 공감한다. 녹색당의 목표는 권력을 해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언제나 중심화하는 힘이다. 권력에 저항하는 모든 힘들은 주변화된다. 그래서 권력은 언제나 그 자체가 폭력이며 억압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은 새로운 권력(집단)이 기존의 권력(집단)을 대체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물리적인 수단을 통해서든 선거라는 형식을 통해서든 그 근본은 동일하다.

그런데 한 집단이 기존의 권력을 장악하여, 즉 기존의 권력을 대체할 경우 권력은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한 온갖 수단을 강구하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에 대한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집권을 목표로 하지 않는 정당. 그런 정당이 존재할 수 있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존재의 정당성이 권력의 장악이 아니라 권력의 해체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권력은 곧 다른 권력에 의해 대체된다. 마치 하나의 힘이 더 큰 힘에 억눌리는 것처럼 힘으로써 힘을 억압하는 악순환과 같다. 한국에서 새누리당의 권력을 새정치민주연합이 대체하고 다시 새누리당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두 권력 집단은 모두 권력 그 자체를 유지하고 재생하기 위해 존재하는 권력 기계에 불과하다. 이런 악순환의 연속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한국에서 지배적인 권력 기계는 지역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지역이 아닌 계급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권력 기계가 존재한다. 지역이건 계급이건 그 집단이 권력을 지향하는 한 억압을 재생산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녹색당이 권력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이 권력 기계를 해체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과 같다. 하나의 권력은 언제나 또 다른 권력에 의해 대체되기 마련이다. 이것이 권력의 존재양식이며 권력의 본질은 억압에 있다. 녹색당이 억압이 아닌 해방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은 녹색이 근본적으로 생명이며 자유이기 때문이다.

 

[녹색세상]추첨 민주주의
이필렬 |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이번 지방선거에 녹색당도 참여했다. 녹색당은 선거에 후보를 낸 여러 정당 중에서 유일하게 집권을 꿈꾸지 않는 정당일 것이다. 추첨을 통해서 대의원을 뽑기 때문이다. 추첨은 모든 추첨 대상이 주어진 일을 수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그러므로 능력있는 사람들에게 통치 권력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원천봉쇄하고, 이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음으로써, 집권 자체를 가능하지 않은 일로 만든다. 임기까지 짧게 제한하면, 직접민주주의를 위한 최상의 장치도 될 수 있다. ---> 읽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604231119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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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7 19:24 2014/06/07 19:24

선남선녀

일상 2014/03/26 23:22

출신이 화성이건 금성이건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존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 그 사랑이 진정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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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6 23:22 2014/03/26 2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