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보고 한 단락을 읽었을 때는 단순한 K9 자동차에 대한 평인줄 알았다. 지주회사의 이익을 위해 발악을 하는 것도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바로 자본의 속성이 아닌가. 그러나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등짝을 후려치고 손가락이 잘리고 손목이 잘려도 이윤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그 추악한 본성 이면에는 더 사악한 자본가가 도사리고 있지 않은가. 맑스가 자본가는 단지 자본의 담지자라고 말했을 때 나는 맑스가 대단한 낙천가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자본가가 단지 자본 운동의 기계적 대리인에 불과한가? 자본은 하나의 실체이고 상이한 자본가들이 있을 뿐인가? 

K9이 잘 안 팔리는 이유 /경향신문, 2012. 11. 2.

K9은 기아자동차의 플래그십 모델이다. 벤츠 S클래스, BMW 7시리즈에 해당한다. 회사의 자존심을 걸고 모든 기술과 역량을 투입해 만든 차인 셈이다. 이런 K9이 지난 5월 출시된 뒤 고작 6600여대밖에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판매 부진의 원인으로 여러 가지 문제점이 거론되는 모양이다. 세계적인 불황에 시장이 얼어붙어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는다는 분석, 회사 측의 포지셔닝 실패로 에쿠스급임에도 제네시스급으로 인식됐다거나 출시 초기에 물량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왔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얼마 전 차를 좀 안다는 지인들에게 K9이 안 팔리는 이유를 물어봤다. 건축설계사 ㄱ씨는 이렇게 답했다. “기아차는 K9을 프리미엄 대형 세단이라고 소개한다. 고급차라는 얘기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K9은 ‘대형차’이긴 해도 ‘고급차’는 아니다.” 일러스트레이터 ㄴ씨의 평이 이어진다. “차는 주택과 같다. 차에 타면 화려한 겉모습은 운전자의 시선에서 사라진다. 페라리 250GTO나 람보르기니 미우라도 실내에서 보면 보닛만 덩그러니 보일 뿐이다. 고급차로 평가받으려면 외양 못지않게 실내 설계가 중요하다.”

자동차 평론가로 활동하는 ㄷ씨의 지적도 비슷했다. “고급 가죽과 정성들인 바느질로 완성된 시트, 은은한 조명과 오감을 자극하는 각종 조작 버튼이 탑승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플래그십 모델 자격이 있다.” 다음은 K9을 몰아봤다는 수입차 업체 임원 ㄹ씨의 평가다. “K9 외양은 외제차 부럽지 않다. 잘 빠졌다. 주행성능도 만족한다. 3.8ℓ 엔진은 밟는 대로 나가더라. 탄탄한 서스펜션도 매력적이다. 하지만 실내가 아니더라. 운전대에 감긴 가죽은 너무 싼 티가 났다. 부드럽고 탄력있는 양가죽 운전대를 잡아본 사람들이라면 실망할 것이다.”

개인적인 호불호가 가미된 평가여서 아주 객관적이라 할 순 없겠지만 이들의 지적에는 공통점이 있다. 요약하면 K9이 겉은 미끈하지만 차에 타면 고급차인지 대중차인지 구분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들과 통화한 이틀 뒤 다시 한번 K9 안팎을 훑어봤다. 좀 거칠지는 몰라도 그들의 지적이 과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운전대 중앙에 박힌 기아차 로고는 벤츠나 BMW, 볼보처럼 세련되지 못했다. 광택 나는 운전대 플라스틱 커버에는 자잘한 조작 스위치와 초록색, 붉은색, 흰색 글씨가 시선을 분산시켰다. 센터페시아 쪽으로 시선을 옮겨도 고급스러움은 찾아보기 힘들다. 플라스틱 소재의 실내 공기조절 버튼과 시계는 블랙톤이지만 가볍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비슷한 가격대의 볼보 S80의 인테리어는 그런 면에서 좋은 교재가 될 수 있겠다. 계기판과 각종 스위치의 조명, 대시보드에 붙은 시계, 스테인리스 스틸제의 재떨이를 K9의 그것과 비교해 보시라.

실내를 고급스럽게 만들면 차값이 크게 올라가 소비자가 더 외면할 것이라고 반박할지 모르겠다. 대안이 있다. K9에는 헤드업 디스플레이, 어라운드 뷰 모니터링 시스템, 후측방 경보 시스템, 시트진동경보시스템 같은 첨단장치들이 가득하다. 이들 대부분이 많은 돈 들인 만큼 제값을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이들을 떼내면 수백만원이 빠진다.

문제는 기아차가 이런 부품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주행 안전성 때문만은 아니다. 지주회사인 현대모비스의 매출 및 영업이익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디테일이나 감성이 부족하다는 K9의 시계, 재떨이, 운전대 같은 제품은 대부분 협력업체가 만든다. 가죽 공급도 마찬가지다.

순간 자동차 평론가 ㄷ씨가 한 말이 떠올랐다. “협력업체들이 기아차가 요구하는 납품 단가를 맞추려면 세 겹 칠하던 크롬 도금도 두 겹으로 줄여야 할 판인데 감성이니 디테일 따위를 신경쓸 정신이 있겠어? 김 차장, 기아차 디자이너들을 너무 무시하지 마시게. 그들은 K9이 잘 안 팔리는 이유를 더 잘 알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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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2 18:54 2012/11/02 18:54

왜소한 정치, 상상력의 빈곤[김종철의 수하한화]

/경향신문

 

대선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포부와 이상, 그리고 그 실현 방안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발언을 아직 들을 수 없다. 참으로 답답하다. 물론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신기하게도 여야 가릴 것 없이 경제민주화를 말하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복지국가를 들먹이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이러한 원론 수준의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누구든 듣기 좋아할 만한 언설일 뿐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공허한 이야기이다.

하기는 찰나적인 대중적 인기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극장정치’의 시대에 시대상황을 정확히 읽고 그것을 설득력 있는 정치적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식견과 능력을 갖춘 정치지도자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 모른다. 지금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것은 매스미디어의 주의를 끌기 위한 갖가지 수준 낮은 쇼와 이벤트, 저열한 정치적 책략일 뿐이다. 엄청난 비용과 사회적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왜 선거를 해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나라 안팎은 전대미문의 심각한 복합적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지만, 이 위기는 결국 정치의 열화(劣化) 현상에 연결돼 있음이 분명하다. 생각해보면, 폐부를 찌르는 뛰어난 정치연설을 들어본 지도 까마득하다. 물론 정치가 늘 진지하고 엄숙한 것일 필요는 없다. 엄숙주의는 권위주의의 소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가 대중에게 보다 친근한 것이 된다는 것과 정치의 천박화가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대중과의 친밀한 ‘소통’을 위한답시고 실제로 행해지는 정치적 행태는 대부분 대중을 즉자적인 욕망 충족에만 매달린 근시안적인 존재, 즉 유아나 백치처럼 취급하기 일쑤이다. 이런 식으로는 나라의 장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대중의 정치적 교양이 질적으로 고양되는 것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간단히 답할 수 없는 문제지만, 나는 지금과 같은 정치의 열화 현상이 초래된 원인은 일차적으로 이 나라 ‘엘리트들’--좌우를 불문하고--의 상상력의 빈곤, 혹은 정신적 왜소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지금 한창 얘기되고 있는 ‘경제민주화’라는 것만 해도 그렇다. 경제민주화란 시대상황으로 볼 때 결코 더는 미룰 수 없는 절박한 명제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지금 그 어떤 진영으로부터도 경제민주화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명쾌한 설명과 실현 방안이 나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간단히 말하면, 경제민주화란 극단적인 부의 양극화 현상 때문에 생긴 개념이다. 지금과 같은 극심한 부의 편중이 더 계속된다면 사회적 안정성이 파괴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결국은 특권 계층 자신의 존립기반도 허물어질 것임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러므로 경제민주화란 무엇보다 경제적 평등화를 뜻하는 개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경제적 평등화를 실질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부분적인 땜질이나 미온적인 대책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적어도 해방 공간에서 행해진 토지개혁과 유사한 수준의 과감한 개혁이 아니면 안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토지개혁보다도 더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은 그동안 우리의 삶을 지탱해온 온갖 시스템의 근본적 전제였던 ‘경제성장’이 더 이상--항구적으로--계속될 수 없는 시대가 바야흐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성장시대의 종언’이 뜻하는 궁극적인 의미를 조금이라도 깊이 생각한다면, 중앙집중적 거대 금융 및 산업시스템의 끊임없는 확대로써만 유지될 수 있는 생활방식, 그리고 그 방식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부추기는 정치, 경제, 문화, 군사, 교육 등 온갖 제도와 관행이 근본적으로 탈바꿈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에 극히 자연스럽게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사회가 문명의 존립방식 자체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중대한 과제에 대응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결국은 이 전환이라는 과제도 정치적 합의와 결정을 거쳐야 할 것인데, 지금처럼 질 낮은 정치로써 어떻게 이 사활적인 문제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사회에 지금 경제민주화의 필요성을 말하는 이코노미스트들이 적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그들 가운데 ‘성장 없는 시대’를 고려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 중 진보적이라는 이들도 결국은 성장 논리에 고착되어, 새로운 성장정책으로 가령 우주항공, 신소재, 첨단 제약의료 분야 등 혁신기술 개발에 투자해야 할 필요성을 논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혁신기술 개발에 드는 막대한 비용 때문에라도 재벌을 ‘활용’해야 한다는 논리도 나오고 있다. 

이 시대착오적인 성장 논리로부터의 탈각을 위해서도 지금 절실한 것은 과감한 상상력이다. 오늘날 우리의 상상력이나 정신력의 빈약함은 멀리 갈 것도 없이 제헌헌법의 ‘이익균점권’ 조항을 돌아보면 금방 느낄 수 있다. 제헌헌법이 외국의 헌법을 졸속으로 베낀 것일지 모른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적어도 자본과 노동간의 공평한 관계를 규정한 ‘이익균점권’이라는 조항은 국회에서 장시간에 걸친 격론을 통해서 성립된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제헌헌법 제18조 제2항의 이 조항은 초대 사회부 장관을 지낸 전진한(錢鎭漢) 등에 의해 발의되었다. 전진한에 의하면, 노동자는 ‘노력’을 출자한 자본가이기도 하기 때문에 ‘돈’을 출자한 자본가와 이윤을 균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권리였다. 전진한은 “노동을 상품시하여 자본에 예속시키는 것은 고루한 사상”임을 역설했다. 그러니까 이익균점권의 논리는 오늘날 재벌과의 협력을 운위하면서 결국은 재벌의 눈치를 보는 왜소한 자세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정신적 강인함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익균점권’ 조항이 현실에서 실천되었는지 여부는 일단 별개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60년 전 선인들의 당당한 정신과 자세에 비해서 우리들이 지금 한없이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사문화된 것이었음에도, ‘이익균점권’ 조항은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헌법에서 삭제되었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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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1 09:55 2012/11/01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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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4 20:05 2012/10/14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