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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9/09/28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9/28
    변명1
    구라
  2. 2009/09/28
    중국식 화장실에 싸놓는 소리
    구라

변명1

 

6개월째 목소리가 쉬어 갈라진다.

말이 너무 많았나 보다.

소리를 너무 질렀나보다.

아니, 담배를 너무 오래, 많이 폈나보다.


마이크를 달고 수업하는 몰골이 우습지만 궁여지책으로 그렇게 했다.

역시나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질러대니 기계음이 애들 신경만 자극하는 것 같다.


급기야 목이 아파서 더 이상 수업은커녕 말이 하기 싫은 지경에 이르러서야

내 꼬라지가 새삼 부끄러울 것 없는 한 명을 대동하고 병원을 찾았다.

불안이 같잖은 품위마저 부숴버린 한 시간여를 버텨 받은 진단.

성대물혹이랜다.

목소리를 혹사해서 그런단다.


불안에 떨던 꼴이 무색하다.

하지만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에 반 위로를 받으며 소용없을 것 같은 약 붕투를 받아

돌아왔다.


과연, 약은 소용이 없나보다.

여전히 쇳소리가 거슬린다.

담배를 줄였다.


말이 많았나보다 하는 대목에서 영 불편한 심정이 올라온다.

그렇게 많이 뱉어 낸 말들이 흙먼지가 되어 어딘가 내려 앉아 있으려나 생각한다.

그러다가

어디 산 속에라도 가서 내가 하고픈 속 얘기들 한 번 시원하게 하고 싶다는 절절한

욕망을 본다. 그 아이러니가 보인다.


난 도대체 무슨 얘기를 못다 했다고 이리 절절한 것일까?


어쩌지 못한 것들에 대한 억울함??

싸가지 없는 것들에 대한 제대로 된 분노?

변명?


그 대목이 적절하다.

변명!


변명이 하고픈 것 같다.

내 몰골에 대한

내 부조리에 대한

내 무거운 딜레마에 대한

구슬픈 변명을 하고픈 모양이다.


아이들 앞에 서면 내가 보인다.

모순 덩어리, 포장된 부조리, 허접한 양식 그런 것들이 알몸을 드러내고 조롱하기도 한다.


‘너희들도 살아봐라. 살다보면 정의도, 진실도, 도덕조차 귀찮아질 때가 오지’하면서 뇌까리지만 날 속일 수는 없지.

멀리 있는 것들에 대해 정의롭기는 얼마나 쉬운가?

그래서 난 늘.....자신을 속일 수 있을 것처럼 목에 핏대를 세우며 규탄하지만

정작 가까운 문제들에 대해선 관성과 버릇을, 취향을 내세우기도 하지.

그러다가 목소리가 맛이 갔다.

정작 난 할말이 많은 것 같은데 말을 줄여야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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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식 화장실에 싸놓는 소리

친구가 내 블로그를 보고 평해주었다.

'중국식 화장실'이라고

적당히 가려져 있는데 보일 건 다 보이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난 혼자이기를 원하지만, 또한 소통을 원한다.

이 중국식 화장실에서 낯선 사람들을 향해 배설하지만 그 배설물이 곧 '나' 인 것을 안다. 그래서 소통도 당연한 바램일 것이다.

 

몇 년전 아이들을 인솔하여 중국 기행을 다녀왔다.

그것도 2년 연달아서.

그곳 화장실에서 눈에 띈 것은 노랑, 분홍의 질 나쁜 휴지였다.

한국의 70년대 풍의 한적한 시골, 허술하기 짝이 없는 회색의 화장실에 뜻밖에도 노랑, 분홍의 휴지들이 미친년 머리처럼 널부러져 있는 모습이 괴이스럽기까지 했다.

 

그것은, 어릴적 무당집 벽 여기저기에서 울긋불긋한 천들이 풍겨대던 괴이함과도 통하는 것 같았다. 

난, 무당 옷이나 그 원색의 천들이 전하는 강렬한 메세지앞에서 늘 공포를 느꼈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음을, 그 앞에서 벌거벗은 채 심판받아야 할 것 같은 두려움, 그러나 거역할 수 없을 것 같은 힘 그런 것들이었다.

특히 나의 유년시절,  옆방 박수무당이 들려주던 징소리와 구슬픈 주술소리는 중년의 정서 어딘가에까지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중국식 화장실에서 너무 나갔다. 요즘 이렇게 생각이 밑도 끝도 없이 흐른다.

중년의 푸념인가 아니면 맥락의 상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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