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한국은행]해외직접투자(FDI...
- 재영
- 2009
-
- 1015 산업은행 앞 집회
- 재영
- 2009
-
- [경향]이진경_‘미누’를 위한...
- 재영
- 2009
-
- [참세상]“18년 체류한 미누 ...
- 재영
- 2009
-
- [박상원의 자동차 인물열전]...
- 재영
- 2009
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시론]‘미누’를 위한 ‘이민청’ 필요할 때다
이 진 경
서울산업대 교수
사회학
정문교 기자 moon1917@jinbo.net / 2009년10월14일 15시50분
▲ 1999년 외국인예능대회 참여로 문화부장관에게 받은 감사패. 미누씨는 2003년 인권의 날 기념식에 노무현 전 대통령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
고용허가제도는 물론 산업연수생제도조차 없던 1992년에 미누 씨는 한국을 찾아왔다. 그는 18년 한국생활동안 이주노동자 운동(2003년 이주노동자 강제추방 반대농성), 다문화 강사, 가수(밴드 ‘스탑크랙다운’ 보컬), 미디어 활동(2007~8년 MWTV 공동대표, 3회 이주노동자영화제 집행위원장), 학생(성공회대학교 ‘노동대학’ 19기 부회장)으로 살아왔다. 많은 언론은 이주노동자 문제를 다룰 때마다 그를 찾았다. 14일 전주인권영화제 개막제에 그의 공연이 예정돼 있기도 했다.
출입국사무소의 단속으로 강제출국 위기를 맞은 미누 씨를 위해 사회각계에서 힘을 모으고 있다.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 이주노동자후원회 등 이주민 단체는 물론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진보신당 서울시당,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한국독립영화협회 등 30개 가까운 다양한 분야의 단체가 모여 ‘미누의석방을위한 공동대책위’(가)를 구성했다.
공대위는 14일 서울 양재동 출입구 사무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미누 씨의 석방을 요구했다.
고병권 수유너머 연구원은 “법 바깥에 있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불법행위자로 모는 것은 이주민과 함께 산 한국인의 삶까지 부정하는 것이다. 정부는 다문화정책을 이야기하면서 한국에 존재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추방해 스스로 다문화를 부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 가수 하림 씨가 '연어의 노래'를 부르며 미누 씨의 연행을 안타까워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50명이 넘게 참여해 미누 씨가 18년 한국 생활동안 폭넓은 활동을 했음을 증명했다.
|
미누 씨의 단속이 있기 전 법무부는 10월부터 12월까지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집중 단속을 벌일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이주노동자 단체들은 미누 씨의 연행을 ‘표적단속’으로 보고 있다.
정영섭 이주노조 사무차장은 “정부는 집중단속에 맞춰 이주노동자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을 표적단속해 이주노동자운동을 탄압하려 한다”고 했다. 집중단속을 앞두고 정부의 이주노동자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경고라는 이야기다. 이주노조는 작년 한 해 동안 출입국사무소의 ‘표적단속’으로 인한 강제추방으로 지도부 5명을 잃었다.
이주노조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합동단속에 맞춰 불법 사찰이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지난 9일과 11일 이주노조 사무실 앞에 출입국관리소 차량으로 보이는 차량들에 노조 관계자들이 다가가자 달아나는 일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출입국사무소 직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조합원의 사진을 들고 전에 다니던 공장에 탐문을 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입력 : 2009.08.28 03:01
그는 1925년 디트로이트에서 루마니아 이민자 아버지와 헝가리 이민자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포드 노조간부로 일했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자주 싸웠고, 드로리언이 17세 때 이혼했다. 가정환경은 불우했지만 학교에선 뛰어났다. 공학석사와 경영학석사(MBA)를 마치고, 패커드 자동차회사에 취직한 뒤 그의 경력은 탄탄대로였다. 4년 만에 개발 책임자가 됐고, GM에 스카우트돼 폰티액(Pontiac)의 차석 엔지니어가 됐다. 수많은 특허를 출원했고, 36세에 수석 엔지니어가 됐다. 미국인들이 그를 기억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미국의 첫 머슬카(muscle car·출력을 중시하는 근육질 스포츠카)인 폰티액 GTO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나이 든 이미지였던 폰티액 브랜드는 이후 돈 있는 젊은 세대를 끌어들여 성공했다.
드로리언은 폰티액 총괄 책임자가 된 이후에도 실력을 발휘했다. 파이어버드·그랑프리 등 성공작을 내놓았고, GM 브랜드 중 가장 큰 시보레(Chevrolet) 부문장으로 영전한 뒤에도 히트작을 쏟아냈다. 이후엔 GM 그룹의 자동차·트럭 생산총괄 부사장까지 올랐다. 사장도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그는 1973년 48세 나이로 "사회적인 일에 더 신경 쓰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GM을 떠난다.
1979년 그는 비즈니스위크 전직 기자와 함께 자서전 '맑은 날에는 GM의 본사를 볼 수 있다(On a Clear Day You Can See General Motors)'를 출간, 그가 20년간 경험했던 GM의 무능한 관료체제를 신랄히 비판했다. "GM의 경직된 시스템이 독창력을 질식시킨다" "이대로는 혁신이 불가능하다" "GM은 오랫동안 누구보다 차를 많이 팔아 어느 자동차 회사보다도 돈을 많이 벌었지만, 자기들 길만 옳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며 GM 파산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해 화제를 모았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GM에 밉보였기 때문인지, GM에서 나온 이후 그의 진로는 순탄치 못했다. 1975년 자신이 세운 자동차 회사 DMC(Delorean Motor Company)가 개발한 'DMC-12'라는 스테인리스 스틸 차체로 된 2도어 스포츠카는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크게 호평받았지만, 1981~1982년 심각한 판매난에 빠졌다. 그는 회생 자금을 급히 구하는 과정에서 FBI의 마약 함정수사에 빠지게 됐고, 그는 이것이 GM을 비판한 데에 따른 보복이라고 믿게 됐다. 이후 연방법원에서는 함정수사의 불법성을 들어 그에게 무죄선고를 내렸지만, 결국 그는 DMC 투자가들의 투자금 반환 소송 때문에 1999년 개인파산을 했다. 노년에 재기를 꾀했지만, 2005년 80세 나이로 굵고 화려한 인생을 마쳤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성서 구절처럼 드로리언의 GM 파산 예견은 그의 사망 4년 뒤 현실화됐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