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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2/21
    프라하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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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6/02/16
    나는 발코니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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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5/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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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11/09
    몇 개의 그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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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봄

프라하는 봄이었다

                                       - 정운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

 국경을 넘어 밤새 달려온 기차가 프라하 중앙역에 이르렀다. 카프카의 게토, 스메타나의 조국 체크에 도착한 것이다. 미명의 적막에서 나를 깨운 것은 작가와 음악가가 아니라 예전 체코슬로바키아 시절의 한 정치인과 한 경제학자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들을 불러낸 호출 부호는 단연 혁명이고, 그들 모두 혁명의 보헤미안이었다. 보헤미아는 기원전 이곳을 정복하고 다스린 민족으로 지금은 이 지역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프라하는 봄이었다. 1968년에는 ‘프라하의 봄’이 있었다. 서구에서 타오른 68혁명의 봉화는 부패한 자본주의 문명을 성토했고, 중국 대륙을 휩쓴 문화혁명은 주자(走資)로의 탈선을 고발했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경직된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과녁이었다. 카프카의 복권으로 개시된 60년대 해빙기에 작가 밀란 쿤데라, 영화감독 밀로시 포르만 등 문화계 지식인이 저항의 불씨를 지폈다. 불길은 공산당에서도 올랐는데, 47세로 제1서기에 오른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주역이었다. 그는 구체제를 개혁하고, 당과 사회의 민주화를 정력적으로 추진했다. 의회제도 확립, 정당 정치 부활, 법에 의한 재판, 사전 검열 폐지 등 그의 민주주의 상식 실험을 흔히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문제는 ‘야수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의 역공이었다. 이해 8월 소련 탱크를 앞세운 바르샤바 동맹군 50만명이 체코슬로바키아에 진주했다. 프라하의 성지 바츨라프-영어로는 윈체슬라스-광장은 점령군과 시위대의 격돌로 피를 뿌렸고, 외국군 장갑차와 대포가 공산당 중앙위원회 청사를 겨눈 가운데 둡체크를 비롯한 개혁 지도부는 모스크바로 압송된다. 뒤따른 고문․투옥․유배․숙청 등 ‘사회 정화’의 미친 바람 속에 프라하의 봄은 여지없이 뭉개졌다. 프랑스의 코스타-가브라스 감독은 당시의 고통과 좌절을 영화 ‘고백’으로 만들었는데 취조가-배후의 권력이-얼마나 간악하며 사람의 육체가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를 현실보다도 ‘리얼한’ 이브 몽탕의 연기로 모골이 송연하도록 그려냈다.

 이해 11월 소련은 소위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천명한다. 한 사회주의 국가의 행동으로 주변국 생존이 위험할 경우 이를 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위협으로 간주해 주권을 제한할-무력으로 개입할-권리가 있다는 희한한 주장이다.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를 ‘살해하고’ 급조한 명분이었다. 프라하 시위대의 구호대로 “레닌이 깨어나 브레즈네프가 미쳐버린” 것일까? 이듬해 공산당에서 제명된 둡체크는 잠시 터키 대사로 유배됐다가 슬로바키아 지방의 산림 감시원으로 목숨을 부지한다. 새 권부는 반혁명을 물리치고 ‘정상화’를 되찾았다면서, 봄을 빼앗은 대신 빵을 늘리는 ‘실질적 사회주의’ 건설을 약속했다.

 자유란 참 묘한 것이어서 한번 맛들이면 좀처럼 끊기 어렵다. 바츨라프 하벨을 위시한 민주화 인사들은 작품과 무대에서 줄곧 프라하의 봄을 풀무질했고, 스웨덴 한림원은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줌으로써 잊혀진 봄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과 연대를 부추겼다. 나치의 학생 학살 50주년 기념일을 맞아 대학이 휴업과 시위를 결정한 89년 11월 체코슬로바키아 민중은 공산당 체제에 전면전을 선포했다. 이에 극장들도 동조했는데 이것이 '벨벳 혁명'의 발단이었다. 혁명은 거리의 폭력이 아닌 극장의 우단 의자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벨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둡체크는 연방의회 의장으로 복귀했다. 봄에서 벨벳으로! 20년 방랑 끝의 멋진 복수였다.

 프라하를 보려거든 동구의 물이 빠지기 전에 보라고 했다. 그러나 홈쇼핑 채널의 비만 치료제 선전에서 역전 광장의 섹스숍까지 도처에 서구의 물이 찰랑거렸다. 개나리와 진달래만 피라는 봄은 아니니까…. 체크의 젖줄 블타바-몰다우-강을 가로지르는 카를루프 모스트-찰스 브리지-는 정재와 미연의 10년 사랑이 이뤄지는 커피 광고의 배경이 된다. 둡체크의 공관은 지금 한국 대사의 관저로 쓰인다. 혹시 최고 권력자의 상징이나 흔적이 있더냐는 질문에 L대사는 “전혀 없어요. 검소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경제학자 얘기는 뒷날로 미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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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발코니에 앉아...

나는 발코니에 앉아...
Ich sitze auf einem Balkon...



나는 소피아의 어느 발코니에 앉아 아내를 기다린다, 맞은 편에는 어느 죽은 자의 이름을 딴 공장의 네온사인. 사회주의 혁명 조국은, 그는 그 이름으로 죽임을 당했으나, 그에게 그의 이름을 되돌려 주었다. 그 공장은 화력발전소, 그것이 도시를 덥힌다. 트라이쵸 코스토프의 경우와 관련해 문장들이 떠오른다. 나는 다른 경우들도 알고 있다, 이름들은 교체 가능하다. 사회주의 혁명 조국이 제 자식을 잡아먹는다. 민중은 나와 사회주의 혁명이 잠자길 원치 않았으므로, 그것이 자본주의와 음탕한 짓거릴 한 이후로, 그것은 까다로운 입맛을 갖게 되었다. “그 때 우리는 그래도 알고 있었지 / 저질에 대한 증오가 또한 / 얼굴을 일그러뜨리게 만들고 / 부당함에 대한 분노 또한 / 목이 쉬게 만든다”. 낡아 버린 브레히트의 비장하게 긴장된 시구는 오늘 날 얼마나 억지처럼 들리는가. 아침나절 억지로 태반을 삼킬 때 나무에 대한 대화가 끊긴다. 테러의 기능으로서의 변증법, 계모의 철신발을 신고 화산 위에서의 춤. 목소리는 울부짖음이 되어 버렸고 얼굴 표정은 알 수가 없다, 등등. 네 시간 전부터 기다렸던 아내에 대해선 떠오르는 문장이 하나도 없다. 나에겐 사랑을 위한 언어가 없다. 능욕 당한 자의 언어는 폭력, 마치 도둑질이 빈곤한 자의 언어이고 살인이 죽은 자의 언어이듯. 나는 식민화된 존재, 회백색 광대분장 아래 (내 피부는) 검게. 나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쓸 빚이 있다, 새해 안부편지를. 나는 그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두 결혼 사이에서, 어느 새해 아침, 베를린의 어느 발코니에서, 아버지가 자신의 희망이자 실망이었던 그 국가를 떠난 지 3, 4, 5년 간.
3년 동안 나는 새해편지 쓰기를 시작하고 그만두길 계속했다. 그리고 또 다시 그만두고 싶다, 내 목소리를 거두어들이고, 나의 맨 얼굴을 (닫혀진) 울타리 뒤로, 문학의 면갑 뒤로, 드라마의 기계 속으로 되가져 가고 싶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내가 어디로 갈 것인지, 내가 누구인지 난 알고 싶지 않다, 밖에서는 현실이 일어난다. 편지가 쓰여지든, 쓰여지지 않든, 그것은 읽혀지지 않을 것이다, 수취인은 주소불명으로 이사를 가 버렸다 : 죽음 속으로. 아내가 오더라도, 난 내가 아내를 기다렸노라 말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가 버렸다 시계들이 / 내 심장을 친다 너는 / 언제 올 것인가”
다른 기다림의 시간을 기억하며, 베를린 소소폴 소피아에서, 다른 도시에서 내가 기다렸던 다른 여자들에 대한 생각, A에서 욕정으로 몸을 떨며, G에서는 자기연민에 울부짖으며 운율에 도달하지 못하는 너의 가슴. 드라마의 기계, 그것의 언어는 내게 가해졌던, 그리고 가해질, 그리고 내가 가할, 그리고 내게 속하지 않는 내 언어로 다시금 가할 수 있는 테러.
자기연민에 울부짖으며 “어제 / 난 나의 심장 너를 죽이기 / 시작했다 / 지금 난 / 너의 시체를 사랑한다 / 내가 죽으면 / 나의 먼지는 너를 향해 소리지르리”
(1977)

하이너 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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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쿠스

[스파르타쿠스] 인간해방, 노예들의 드라마!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혁명가1 - 스파르타쿠스]
 

로마 지배계급을 공포에 떨게 한 검투 노예들의 무장봉기… 그 정점에서 빛나는 스파르타쿠스의 전설

▣ 오귀환/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더러운 로마놈들아, 너희들은 인간의 모든 꿈과, 인간의 손에 의한 모든 노동과, 인간의 이마에 맺힌 모든 땀을 조롱하고 있다. …너희들은 살인을 위한 살인을 하고, 취미라곤 유혈의 검투를 관람하는 것뿐이다. …너희들의 화려한 그 생활은 전세계에서 강도질한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이젠 끝장이다. 전세계의 노예들에게 우리는 외칠 것이다. 일어나라! 쇠사슬을 풀어버려라!” (하워드 파스트, <스파르타쿠스>에서)

검투 노예 봉기, 70여명으로 시작하다

기원전 73년 여름,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정복하고 부와 영광으로 흥청대고 있을 때 검투 노예들이 카푸아에서 탈출해 무장 폭동을 일으킨다. 70여명으로 시작한 검투 노예의 이 봉기는 곧 수많은 노예들이 가세하면서 수만명 규모로 커진다. 그들은 중부에서 북부의 알프스까지 치고 올라가서 다시 남부의 땅끝 항구 레기움까지 전진하는 등 2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휩쓸었다. 자유와 해방을 외치는 그들의 분노 앞에 로마는 연전연패하면서 공포에 떨어야 했다. 고대 세계를 뒤흔든 이 검투 노예들의 투쟁은 그 지도자의 이름을 따 이렇게 기록됐다. ‘스파르타쿠스 노예전쟁’ (The Spartacus Slave War).

노예제를 운용했다는 점에서 인간은 영원히 죄악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을 일하는 가축처럼, 마음대로 죽이고 살릴 수 있는 동물처럼, 움직일 수 있는 소유물처럼, 사고팔 수 있는 동산의 재산처럼 간주하고 취급하던 죽음과 죄악의 시대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런 식으로 번영을 누린 나라들이 지금도 세상에서 큰소리를 치고 있다. 그게 현실이다. 본격적인 노예무역을 대대적으로 벌인 네덜란드와 영국, 아메리카 대륙에서 인간을 살육하고 노예로 만드는 데 혈안이 된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흑인 노예를 19세기 후반까지 활용했던 미국…. 이런 압제 앞에서 인간이 인간다움을 증명하기 위해 궐기하곤 했다. 그 시발점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로마의 지배계급을 겨냥해 무장봉기를 일으킨 노예들이다. 그 가장 빛나는 정점에 스파르타쿠스의 노예전쟁이 있다.


△ 영화 <스팔타쿠스>의 전투장면. 노예들은 위대하게 싸웠으나 결국 패배하고 죽어간다. (사진/ Rex Features)

역사적으로 스파르타쿠스의 노예전쟁은 로마 시대에 벌어진 대규모 노예전쟁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자 세 번째의 것이다. 그에 앞서 두 노예전쟁은 시칠리아에서 일어났다. 첫 번째 시칠리아 노예전쟁은 기원전 135년에서 132년까지 계속됐고, 두 번째 노예전쟁은 기원전 104년부터 102년까지 이어졌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첫 번째 전쟁은 에우누스와 클레온이라는 이름의 시리아(또는 중동) 출신 노예들이, 두 번째 전쟁은 아테니온과 살비우스라는 시칠리아 출신 노예들이 지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로마에서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에 이르는 약 70년 동안 30여년 주기로 세 번씩이나 노예전쟁이 잇따라 벌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당시 광범한 농업노예제도가 정착하면서 무자비하고 가혹한 억압·수탈 체계를 노예들에게 종신토록 강제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노예들의 반발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이런 가혹한 체제와 달리 노예가 되는 사람들은 한때 자유롭게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다수였다. 새로운 정복지에서 전쟁포로로 잡히거나 로마 지배 지역에서 정치적 혼란이나 범법에 따라 갑자기 노예로 전락한 사람이 많았다. 자유를 아는 사람들이 마침내 떨쳐일어날 수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셋째, 시칠리아 등 변경에 새로운 경작지가 조성되면서 반농·반목축 형태의 독특한 노예들이 크게 늘어났다. 환금작물을 집중적으로 재배하는 라티푼티움 지대에서는 농업노예를 엄격한 감시 아래 노역을 시키고 밤에는 쇠사슬을 채워 재우는 데 반해, 변경의 노예들은 상대적으로 이동도 자유롭고 상황에 따라선 가축을 보호하기 위해 가벼운 무장도 해야 했다. 기동성과 무장 가능성이 뛰어났던 셈이다. 시칠리아에서 두 차례 노예전쟁이 벌어진 것은 이런 배경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알프스 돌파’를 목표로 삼았으나…

스파르타쿠스에 대해선 <영웅전>으로 유명한 플루타크와 <로마내전사>를 쓴 그리스 출신의 아피안 등 역사학자들에 의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그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본다.


△ 19세기 지오바뇰리의 소설 <스파르타코>의 삽화에 나타난 스파르타쿠스. 영화와 달리 스파르타쿠스가 동료 크릭수스를 구하는 것으로 돼 있다.

로마 검투 노예의 중심지인 중부 카푸아의 한 검투 노예 양성소에서 주로 골인(Gauls·오늘날 프랑스 지역 사람들)과 트라키아인(그리스 북동부 변경지대 출신 사람들)으로 이뤄진 검투 노예 70여명이 탈주한다. 다른 검투 노예 양성소로 무기를 싣고 가던 마차 행렬을 털고 무장한 노예들은 산속에 거점을 마련한다. 그들의 지도자 세명 가운데에는 트라키아 목부 출신으로 강인한 정신력과 뛰어난 체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지적이고 고결한 성품을 지닌 스파르타쿠스도 있었다. 로마에서 행정관인 클로디우스가 병력 3천명과 함께 진압군으로 파견된다. 클로디우스는 노예들이 진을 친 험준한 산에서 내려오는 유일한 길목에 전진 기지를 세웠다. 스파르타쿠스는 산에 자생하는 식물의 넝쿨을 이어 튼튼한 밧줄 사다리를 만들어 병력을 비밀리에 내려보낸 다음 로마군을 기습해 대승을 거둔다. 이 승리를 계기로 주변에 있던 목축 노예들과 농업 노예들이 대거 노예군에 합류한다. 두 번째로 다시 행정관인 프블리우스 바리니우스가 진압군 사령관으로 파견된다. 스파르타쿠스는 바리니우스의 부관으로 2천 병력을 이끄는 푸리우스와 격돌해 그들을 물리치고 여세를 몰아 로마 진압군의 진지를 유린해버린다. 이 전투에서 바리니우스의 부관인 코시니우스를 죽이고 그의 말도 빼앗는 것을 계기로, 로마 전역에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이 퍼짐에 따라 로마인들은 공포에 떨기 시작한다.

이 단계에서 스파르타쿠스는 자신들이 로마에 대해 군사적으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알프스 돌파를 목표로 삼는다. 알프스를 넘어 각각 골과 트라키아, 게르마니아 등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다수의 추종자들에 의해 거부된다. 결국 스파르타쿠스는 알프스 돌파를 저지하려는 로마 키살핀 골 총독 카시우스의 1만 병력을 패퇴시켰는데도 알프스를 넘지 못한다. 노예군 진영에 가담한 엄청난 머릿수에 도취한 노예들은 스파르타쿠스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이탈리아 전역으로 흩어져 약탈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 로마 검투경기를 묘사한 2세기 무렵의 모자이크. 리비아 트리폴리 고고학 박물관 소장.

로마 원로원은 이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노예들의 봉기를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집정관을 두명이나 파견한다. 그 가운데 한명인 겔리우스 프블리콜라는 스파르타쿠스 주력군에서 이탈한 게르만 노예군을 기습한다. 게르만군은 자신감에 가득 차 스파르타쿠스의 통제로부터 독립한 상태였다. 게르만군은 대패하고 노예군은 살육된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건재했다. 또 다른 집정관인 렌툴루스가 대규모 야전군으로 포위하자 스파르타쿠스는 반격에 나서 렌툴루스를 향해 돌진했다.

페텔리아 산속에서 최후를 맞다

치열한 전투 끝에 스파르타쿠스군은 로마군을 물리치고 막대한 병참 물자를 노획한다. 로마 원로원은 이 패전 소식에 분격해 두 집정관에게 작전을 중단하라고 명령하고, 크라수스를 노예전쟁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많은 로마의 귀족들이 전쟁 수칙에 따라 크라수스의 진압군에 가담한다. 크라수스는 일단 로마 방어에 주력하는 한편, 스파르타쿠스 후방에 있는 무미우스에게 2개 군단을 둥글게 배치해 스파르타쿠스를 지속적으로 포위하는 진형만을 유지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무미우스는 이 명령을 어기고 스파르타쿠스와의 전투에 돌입해 대패하고 만다. 많은 로마군들이 죽고, 전장에서 꽁지가 빠져라 하고 달아난다. 크라수스는 이 패전 뒤 오랫동안 전혀 시행하지 않았다는 고대 로마의 무시무시한 의식을 재현한다. 전장에서 맨 먼저 도망친 군인 500명을 10명씩 50개 그룹으로 나눈 뒤 징벌로써 각 그룹에서 한명씩 제비를 뽑아 죽이게 한 것이다. ‘데시마시용’(10분의 1씩 죽이는 것)이 벌어진 것이다. 이 참혹한 처벌을 모든 병사들이 똑똑히 지켜보게 만들었다.


△ 서기 1세기 무렵 로마 폼페이에 있던 검투 노예 양성소 막사. 마당은 훈련장이다.

이 무렵 스파르타쿠스는 남쪽을 향해 전진하면서 바다를 통해 해외로 탈출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는 남쪽 땅끝 레기움까지 가서 배로 시칠리아로 건너가기 위해 해적들과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해적들은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바다로 달아나버린다. 그사이 크라수스의 로마군은 남쪽까지 쫓아내려와 노예군의 전진을 막기 위해 어마어마한 장벽 구축 작업에 돌입한다. 폭 4.5m, 깊이 4.5m 되는 도랑을 동쪽 바다 끝에서 서쪽 바다 끝까지 약 50km 거리에 걸쳐 판 뒤 다시 그 뒤에 높은 장벽을 견고하게 쌓은 것이다. 처음에 이 장벽을 대수롭게 보지 않던 스파르타쿠스는 보급물자가 바닥나면서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자신들이 바다와 장벽에 섬처럼 갇힌 채 겨울에 내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는 전면 공격에 나섰으나 병력의 3분의 1만 장벽을 돌파할 수 있었다. 결국 크라수스 군대의 공세에 맞서 노예군은 용감히 싸웠으나 패배한다. 스파르타쿠스와 분리된 노예주력군은 모두 1만2300명이 살육당하는 패배를 겪는다. 크라수스는 전투 뒤 노예군 가운데 단 2명만이 등쪽에 치명상을 입고 죽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머지는 모두 도망치지 않고 정면에서 로마군에 맞서 싸우다 죽어간 것이다.

한편 동쪽 항구 브린디시움을 향해 가던 스파르타쿠스는 외국에 주둔하던 로마군이 이 항구를 통해 이미 상륙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양쪽에서 협공을 받게 된 그는 어쩔 수 없이 병력을 이끌고 크라수스의 주력군과 대혈전을 벌인다. 이 전투 뒤 스파르타쿠스는 페텔리아 산속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추격해온 로마군과 싸우다 숨진다.

스파르타쿠스는 죽었다. 그러나 인간해방을 위해 무장봉기한 그의 이름은 2천여년이 지난 지금도 인류에게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고대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대표?


△ 마르크스. 그를 시작으로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는 모두 스파르타쿠스를 열렬하게 존경했다. (사진/ GAMMA)

1865년 칼 마르크스는 숙제를 하는 딸 제니로부터 ‘영웅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스파르타쿠스’와 ‘케플러’라고 대답한다. 스파르타쿠스를 마르크스가 주목한 것은 당시 벌어지고 있는 2가지 사건 때문이다. 하나는 외국의 간섭 아래 있던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를 해방시키려는 낭만적 애국주의자 주세페 가리발디의 투쟁에 대한 열광적 분위기이고, 다른 하나는 노예해방 문제를 놓고 벌어진 미국의 남북전쟁 소식이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쓴다.

“아피안의 <로마 내전사>를 그리스어 원문으로 읽었네. 매우 가치 있는 저술이야. …스파르타쿠스는 고대 역사를 통털어 가장 훌륭한 인물로 꼽힐 만하네. 위대한 장군(가리발디와는 또 다른 측면에서)이자 고결한 인물이며, 고대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대표야.”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의 유럽 사회주의 운동은 스파르타쿠스를 경제적 착취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편지에서 보인 스파르타쿠스에 관한 작은 힌트를 계급투쟁론으로 확대 발전시킨 것은 바로 레닌이다. 그는 이런 논지에 따라 로마 세계를 노예와 지배자 사이의 투쟁으로 특징지어지는 계급투쟁으로 정의한다. 레닌은 <국가>에 이렇게 쓴다.

“역사는 압제를 벗어던지려는 피압박 계급의 지속적인 시도로 채워져왔다. 노예제의 역사는 수십년 동안 지속된 노예해방 전쟁의 기록을 담고 있다. 현재 자본주의의 멍에에 대해 진정으로 투쟁하는 유일한 독일의 정당인 공산당이 ‘스파르타쿠스주의자’의 이름을 채용하고 있다. 독일 공산당은 가장 위대한 노예봉기(slave insurrections) 가운데 하나인 2천여년 전의 그 봉기에서 스파르타쿠스가 가장 걸출한 영웅 가운데 하나였기에 그 이름을 채용한 것이다. 전적으로 노예제에 기반한 채 오랜 세월 절대전능한 것만 같던 로마 제국은 스파르타쿠스의 지도하에 무장하고 단합해 거대한 군대로 변신한 노예들의 전국적인 봉기로 충격 상태에 빠지고 치명상을 입었다.”

그 뒤 소련 시대에 이르러 스탈린이 승인한 ‘단계이론’(stage theory)에 따라 로마의 노예 반란은 당대 계급 시스템의 지배를 전복시킨 러시아혁명이나 프랑스혁명과 같은 범주로 간주되기까지 한다. 역설적으로, 이런 국가 주도의 공산주의 이론작업에 따라 스파르타쿠스는 본래의 인간주의적 활력을 잃어버리는 손해를 본 측면도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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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r'kii says

"늘 일상적인, 일상적인 것 뿐이다! 인간들, 생각들, 사건들 모든 것이 일상적인 것들이다...., 하지만 창조적인 삶을 촉구하는 소리는 어디에 있는가? 용기를 가르치며 영혼에 날개를 달아주는 강력한 말들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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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어제와 오늘이 별 다르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과 내일

사이에도 경천동지할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한하게 지속되는 그 반복성이 두려워

자꾸만 시간을 인위적으로 나누고 구별 짓고 싶어한다.

 

아아, 그렇게 해서라도 복잡한 현재를 깨끗이 털어버리고

맑은 새날을 맞이할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맨발로 폴짝폴짝 뛰어 내일을 마중나가겠다.

 

 

정이현 연재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中

 

 



♪ Milonga_Tris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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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요구

최원 씨의 실명 요구, 노동자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 현종혁 | 시론/사설 2005.03.0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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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 씨의 실명 요구, 노동자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현 종혁


  최원 씨는 “논의를 위한 조건”으로 필자의 개인 신상을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로 인해 「사회주의노동자신문」(이하 - 「사노신」) 홈페이지에 본인의 실명과 신상 공개 문제에 대한 논쟁이 조금은 거칠게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 대해 당사자인 필자의 태도 표명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노동자들에게 다시 한번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해 볼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최원 씨의 실명 요구에 대해 조금은 긴 답변을 보낸다.


1. 인터넷 실명제 논란

  얼마 전, 한 시사지에 「중국, 인터넷이 ‘죽(竹)의 장막’을 걷는가」라는 기사가 실린 적 있다. 중국은 통제와 감시 체계가 강하다. 그런데 인터넷의 도입으로 중국 사회의 통제 시스템이 약화될 가능성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시사지는 그 징후로서 사스라는 전세계적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중국 정부로 하여금 전염병의 진원지가 중국이라는 진실을 말하게 했던 주인공이 인터넷이었다는 사실과 지난해 도시 유랑민에 대한 단속법을 폐지하게 만든 ‘쑨즈강(孫志剛) 사건’(쑨즈강이라는 청년이 불심 검문으로 잡혔다가 임시 수용소에서 맞아 죽은 사건) 등을 예시한다.


  또한 시사지는 여기에 대한 중국 정부의 대응 방식 역시 고발한다. 중국 정부는 인터넷으로 인해 감춰져왔던 진실이 폭로되고 정부 정책에 대한 아래로부터 민중들의 개입이 강화되자, 인터넷 여론에 대한 탄압으로 들어갔다. 최근 쑨자정(孫家正) 중국 문화부장이 인터넷 콘텐츠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중국은 전국의 PC방을 집중 단속하고 있으며 베이징 시의 경우 ‘건전한 인터넷 문화 조성’이라는 명분으로 베이징 전역의 PC방을 두 달 넘게 폐쇄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6만 명가량의 인터넷 감시단을 운영하고 인터넷 활동을 빌미로 지금까지 54명을 구속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PC방 이용자들에게 의무적으로 개인 신상을 기록하라는 등 강력한 조처를 취했다. 여기에 대해 국제 인권 단체인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 인터내셔널)는 중국 정부의 과도한 인터넷 감시를 비판하고 구속자들을 ‘양심수’로 간주하고 무조건 · 즉각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 역시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1998년부터 한국 정부는 ‘온라인 실명제’를 추진해왔으며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는 지난 2월 9일 ‘인터넷 게시판 실명제’를 도입했다. 실명제를 옹호하는 자들은 익명성으로 인해 흑색 비방과 허위 날조가 난무하고 있으며 이것은 심각한 피해라고 말한다. 또한 실명제의 도입은 무책임한 발언이나 명예훼손 · 모욕, 혹은 유언비어 등의 폐해뿐만 아니라 자살 · 원조교제 · 음란 등 사회적 이탈행위에 대한 규제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론은 정치가들이 실명제를 도입한 이유를 그것(올바른 인터넷 문화 조성)보다는 ‘정치인이 인터넷상에서의 낙선운동을 의식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통과시켰다’고 생각하고 있다. 중국에서처럼 비판 여론을 억압하는 데 실명제 도입의 주된 목적이 있다.


2.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익명성과 실명제 논란을 어떻게 볼까

 

  ‘인터넷 실명제’ 문제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어떻게 바라볼까? 앞서 국제사면위원회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정통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부정적으로 본다. 동일한 사례가 1990년대 후반 미국에서도 있었다.
  미국 조지아주에서는 컴퓨터 사기를 예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허위 명의에 의한 데이터 전송을 금지하는 ‘컴퓨터시스템보호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 대한 논란은 미국연방지방법원으로 넘어갔으며 연방지방법원은 이 법의 적용을 정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연방지방법원은 그와 같은 결정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실명제법이 범죄적 목적을 가지고 허위 명의를 사용하는 자와 자기 보호의 필요로 허위 명의를 사용하는 자를 구분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광범위한 규정으로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게 만들 것이라는 것이다.(한상희, 「사이버공간에서의 익명성과 책임」)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익명성을 표현의 자유로 보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신체의 자유, 양심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과 같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핵심적 가치이며 이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한에서만 제약될 수 있다. 그런데 익명성은 참주선동이나 유언비어와 같은 형태로 (실명일 경우에 비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을 높인다. 익명성이 갖는 이러한 역기능에도 불구하고 순기능이 더 강하다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믿는다.
 

  1960년 미국연방대법원은 “익명의 팜플렛이나 전단, 브로슈어 또는 책자는 인류의 진보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각종의 언론보도에서 정보원을 익명으로 인용하는 관행이 있음을 감안할 때, 익명성이 표현의 자유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쉽게 거스르기는 어렵다고 덧붙인다. 이것이 익명성을 표현의 자유로 보장하는 이유이다.

 

  저명한 역사학자 로버트 단턴은 『책과 혁명』이라는 저작 전체를 통해 혁명 직전 파리의 치안총감이 했던 말을 증명한다. “파리인들은 정부의 명령이나 허가받은 출판물보다는 은밀히 떠돌아다니는 금서들을 더 많이 믿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루소와 볼테르, 디드로와 달랑베르 같은 계몽주의 서적으로부터도 자양분을 공급받았지만 오히려 ‘외투 밑에서 은밀히 팔리던 비합법적 책들’, 즉 금서(禁書)야말로 앙시앵 레짐(구제도)의 정통 가치체계를 아래로부터 잘라버렸다고 말한다.
 

  발리바르주의자들이 의존하고 탐구하는 스피노자 역시 1673년 『신학정치론』이라는 책을 익명으로 출판했었다. (아마 최원 씨가 당시에 살았다면, 최원 씨는 스피노자와의 논의를 거부했을 것이다. 익명성이란 이유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익명성이 표현의 자유에서 갖는 투쟁의 전통을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익명성과 표현의 자유가 가져올 수 있는 역기능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그것은 ‘이성의 힘’이다. 개인이나 사회가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이나 증오 혹은 편견, 습관, 전통 따위에 의해 끌려가는 것을 막고 개인의 자유가 자신과 사회의 선(善:행복)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게 하는 인간 본래적인 능력이 있다. -- 그것이 ‘이성의 힘’이다.
  이 ‘이성의 힘’에 의해 익명성의 역기능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것으로 제어될 수 있다는 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믿음이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원리를 현실에서 견지하지 못하고 있다. ‘온라인 실명제’, 집시법의 개악, 비자 문제 등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현실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사회질서의 보호라는 명분 하에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제약하고 침해하고 있다. ‘컴퓨터시스템보호법’ 논란과 같이 것처럼 민주주의가 원리대로 수호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것은 왜 그런가? 해방을 위해 봉건제도와 투쟁하던 시기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진리가 자신의 편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자신감이 표현의 자유가 갖는 긍정적 역할이 부정성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진보하는 계급, 억압과 착취를 폐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계급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들은 이제 노동자들의 해방투쟁을 억압해야 할 위치에 올랐으며 노쇠한 자본주의의 위기가 그들의 독재를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독실하고 양심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자 노명식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고 20세기의 서양 세계에서도 권위주의적 경향이 커져 가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자본주의의 불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자유주의적 정치균형이 깨진 경우도 있었고, 또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힘겨운 싸움이 정치적 자유라는 <사치품>을 언제까지나 허용할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근자에 자유주의 경제학이 다시 대두하고 있으나 거기에 비등하는 자유주의 정치학은 뒤따르고 있지 않다. 그리하여 그 <자유> 경제는 오히려 거꾸로 <강한> 국가와 연합하고 있다.”(노명식, 『자유주의의 원리와 역사』)

  이제 역사적 진리는 우리 노동계급 편에 있다. 일관된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는 부르주아지들을 폭로하고 노동계급의 힘을 강화시킬 것이다.


3. 노동운동에서 익명성과 민주주의

  노동자 운동의 역사에서 익명성과 표현의 자유는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가? 1987년 대투쟁이후 등장한 민주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익명성에 대한 억압은 노동자 민주주의의 굴절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다.
  
  아래로부터의 활기와 능동성으로 출현한 민주노조운동은 노동자 민주주의를 어떠한 제도적 틀 없이도 실현하고 있었다. 워렌 비티와 다이안 키튼 주연의 <레즈>라는 영화에서 러시아의 노동자들이 국적과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의 발언과 참여를 보장하는 것처럼, 우리 노동자 운동 역시 시장통처럼 시끄럽고 정신없지만 ‘노동해방’이라는 대의를 인정한다면 모두의 참여와 발언을 보장했었다.
  합법 · 반합 · 비합 가릴 것 없이, 개인이냐 집단이냐, 직책이 있는 사람이냐 없는 사람이냐 상관없이, 모든 세력과 개인들은 노동자 운동에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투쟁의 현장과 집회장에서 선동하고 유인물을 뿌렸다. 1988년에 이미 외국에서 파란 눈의 뜨로츠키주의자들이 국내로 들어와 유인물을 뿌리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등록되지 않은 익명성이었다. 무슨 무슨 노동자 일동이거나 사회주의자들이거나 또는 그들이 비합법적으로 발간하는 잡지의 기관지명 이었다.

 

  이러한 자유로운 노동자 민주주의는 1992·3년경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중반 전두환 정권 시기 대학교에서는 정권을 비판하는 익명의 대자보가 곧잘 붙었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전두환 군사독재정부의 태도는 명확했다. 그 대자보를 떼어다 국립과학수사대에 요청하여 필체로 범인을 잡겠다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사태가 노동자운동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92·3년 전노협 집회에서 이미 당시 사노맹이나 여타 비합 운동조직들의 유인물을 수거하여 불태우고 플랭카드는 주최 측의 허락을 받은 것만 걸 수 있다며 갈기갈기 찢겨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명분은 합법적인 집회에 전경이 침탈할 명분을 준다는 것이었다. 1, 2년 전까지 특정 정파의 견해에 부정적일지라도 자본가 정권에 맞서 그들의 표현물을 방어하던 민주노조운동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전투적 비판세력에 대한 방어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97년 총파업 투쟁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총파업 집회 기간동안 정체가 불분명한 단체나 개인의 유인물은 배포가 제한됐었고 탄압받았다. 명분은 정보 경찰의 공작에 당할 위험이었다. <다함께(당시 IS)>마저 주최 측과의 협의 없이 신문을 판매하고 있다는 이유로 70년대 유명한 노동운동가이자 민주노총 지도위원이었던 000 씨로부터 신문을 빼앗기고 머리채가 잡혔었다.
  2001년 화섬 3사 투쟁 때는 총파업 투쟁을 기각한 현대자동차 이상욱 집행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현자의 몇몇 활동가들이 익명의 신문을 배포하는 사람들을 잡으러 쫓아다니고 쫓기는 해프닝이 벌어졌었다. 그들은 집회장에서 울분에 찬 목소리로 신문을 쥐어들고 “할 말 있으면 신분을 밝히고 직접 나와서 말해!”라고 외쳤었다.

 

  이러한 변화는 개별 단위 사업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단위 사업장 노동조합은 5~10명의 대의원 연서명을 받지 못하면 유인물 배포를 하지 못하게 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대한 명분 역시 정보 경찰의 정치공작 가능성과 무질서와 혼란의 극복이었다. 대의원 연서명 제도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노동운동을 제도화하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
  대의원 연서명은 대의원 5~10명의 연서명을 받아낼 수 있을 만큼의 제도적 세력으로 등장한 개인 또는 집단에게만 언로(言路)를 열겠다는 것이었으며 그 만큼의 힘을 갖추고 있지 못한 개별 조합원들이나 노동운동가들의 입을 틀어막는 것이었다. 이 연서명 제도로 인해 현재 하청 노동자들은 공장 안에서 자신들의 유인물을 뿌릴 기회를 얻기 위해 정규직 대의원들을 찾아다녀야 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대의원들이 지시하는 만큼 문안 수정에 동의해야 하기도 한다.
 

  민주노총과 민노당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탁금을 거는 제도를 공탁금을 마련할 수 있을 만큼 힘을 갖추지 못한 소수자들의 선거권을 억압하는 제도라고 목소리 높여 비판한다. 그러나 그들은 단위 사업장에서 대의원 연서명 제도가 동일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국민파와 중앙파를 중심으로 하는 노동운동의 주류 세력들은 노동자 집회와 공장 안에서 익명성을 억압함으로써, 아래로부터의 노동자들의 목소리와 전투적 비판세력이 노동조합의 체제 내로의 제도화에 저항하는 것을 탄압했다. 남한 민주노조 역사에서 익명성을 억압하고 노동자 민주주의를 제한하는 과정은 민주노조 운동의 변질과 타락화의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4. 익명성과 관련된 혁명운동의 전통

  혁명운동에서 익명성, 또는 가명(필명)의 사용은 일반적이다.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혁명가들은 다양한 가명과 필명을 사용해왔다. 레닌은 우리에게 알려진 이름 그 자체가 가(필)명이다. 그의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아노프’이며 그가 일생 사용해왔던 가명은 십여 개가 넘을 것이다. 이것은 뜨로츠키나 로자 룩셈부르크 역시 마찬가지다.
 

  혁명운동의 전통은 익명성의 사용을 이상한 것 또는 무책임한 것이라고 바라보지 않는다. 레닌이 제1차 제국주의 전쟁기에 ‘유니우스’의 팜플렛을 로자의 것인지 모르고 비판했지만 향후 그 사실이 알려졌을 때 게거품을 물었다는 얘기는 없다.

  사회주의 혁명운동은 현사회의 타도를 원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부르주아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아무리 확장된다고 할지라도 사회주의 운동은 탄압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최원 씨는 「더 많은 민주주의」라는 글에서 ‘진정한’ 공산주의적 이행을 위해 “‘갈등’의 제도화를 추구하는 것, 또 차이들의 삭제나 융합(fusion)이 아니라 차이들의 묶음(binding)으로서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을 제기한다.
  그런데 필자가 보았을 때, 이것은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이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가치관 중 하나인 ‘관용’ --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의 홍세화 씨가 즐겨 얘기하는 주제이다. 관용의 정신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라는 인식 위에서, 그 차이를 없애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건 혹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건 간에 그 차이는 없앨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차이를 바람직한 것으로 보장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역사 속에서 ‘관용’의 실제는 어떠했는가? 아주 고약한 의견이라도 사회적으로 별 영향력이 없는 경우에는 너그럽게 봐주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그 의견이 사회적으로 미칠 영향이 큰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즉 “차이들의 삭제나 융합(fusion)이 아니라 차이들의 묶음(binding)으로서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더 많은 민주주의”에도 특정 계급계층의 이해관계가 우선적이라는 계급주권의 문제는 다시 한번 등장한다. 계급이 존재하고 국가가 존재하는 한, 힘있는 계급이 관용의 행사 주체로 등장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래서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 대혁명 모두에서 투쟁했던 무정부주의 경향의 혁명가 토마스 페인은 1791년 이렇게 말했다.

  “관용은 불관용의 반대가 아니라 불관용의 위조품이다. 둘 다 전제주의다. 한 놈은 제가 양심의 자유를 주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또 한 놈은 그것을 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토마스 페인, 『자유주의의 원리와 역사』에서 재인용)

  현재 남한 부르주아 사회는 사회주의 운동에 관용을 베풀고 있다. 이것은 사회주의 운동이 힘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구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 운동은 언젠가 곧 자본가들의 관용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될 것이다.
  또한 지금도 공장에 대한 개입에 있어서 자본가들의 불관용의 태도는 엄격하다. 이러한 이유로 생산의 현장으로부터 노동계급과 결합하고자 하는 사회주의 혁명운동은 익명성을 생활화하고 있다.

 

  1980년에서 90년대 초반 남한 운동의 역사만 본다고 할지라도, 익명성은 일반적이었으며 거의 모든 논쟁은 필명이라는 익명성 하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서 어느 누구도 익명성에 기반한 논쟁은 무책임한 논쟁 방식이라고 말한 적 없으며 책임있는 논쟁을 위해 실명을 대라고 요구한 적도 없다. 소부르주아, 기회주의, 꽁무니주의 등등의 “딱지”가 무수히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 후반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남한을 ‘식민지 반봉건 사회’라고 주장했던 ‘조진경’ 씨는 좌파와의 논쟁에서 패배할 때마다 필명을 바꿨다. 하지만 당시 누구도, 논쟁 주체들까지 포함해서, 그에게 실명 공개를 요구한 적 없다. 오히려 ‘조진경’ 씨의 필명을 자주 바꾸는 태도와 무관하게 논쟁은 이어졌고 이것 자체가 대중에게 평가됐다.
 

  최원 씨의 요구는 필자에게는 낯설다. 정치적 논쟁은 대중을 향해 이루어진다. 여기서 논쟁의 책임은 올바른 논쟁 자세와 정치적 내용성을 의미한다. 또한 무책임성 역시 논쟁에 대한 책임성이다. 비논리적인 감정적 언사, 정치를 개인의 (정치적 활동이 아니라) 사생활 연결짓는 흠집잡기는 그 자체로써 대중에게 논쟁을 판단케 한다.  

  최원 씨는 “소부르주아”라는 비판이 미국 유학 중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건 마타도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맑스는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엥겔스는 공장주 즉 자본가였다. 레닌 역시 소규모였지만 지주로서의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출신성분을 갖고 그들을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라는 말은 최원 씨의 학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지칭하는 것이다. 현 사회의 모순을 노동자 혁명을 통해 해결하는 것을 반대하고 체제 개선을 통해 사회주의를 이룰 수 있다는 정치가 소부르주아지의 계급 존재적 성격과 동일하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지칭한다. 최원 씨는 「더 많은 민주주의」에서 맑스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을 인용한다. 그렇다면 바로 그 글에서 맑스가 루이 블랑을 소부르주아적이라고 부른 것을 알 것이다. 맑스가 루이 블랑을 소부르주아 사회주의라고 부른 것은 루이 블랑의 출신성분에 대한 “딱지”인가? 혹시 최원 씨는 그렇게 읽었는가?

 

  맑스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논쟁에서 상대방의 정치를 평가, 비판함에 있어서 소부르주아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맑스주의는 논쟁에서 각 입장의 실천적 귀결이 어느 계급의 이해에 복무하는가를 밝히는 것을 자신의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난 탄핵 논쟁에서 많은 좌파가 민노당을 열린우리당의 이중대라고 부른 것과 동일하다. 맑스주의 역사에서 소부르주아라는 비판과 규정이 출신성분을 말한다는 얘기는 코미디이다. 최원 씨의 주장대로라면 사회주의 운동의 모든 혁명가들은 참주선동가들이었다.

 

  최원 씨는 “논쟁을 제대로 하려면 나에게 그런 (소부르주아) 딱지를 붙인 것에 대해서 최소한의 책임을” 지기 위해 필자가 “누군지를 밝혀야 된다”고 말한다. 최원 씨에게 있어서 필자의 실명은 왜 요구되는가? 논쟁을 제대로 하기 위해 실명이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딱지”를 붙인 것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위해 실명이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두 경우 다인가?
  
  첫째, 필자는 사회주의 운동에서 필명이 “제대로” 된 논쟁을 저해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또한 실명이 책임 있는 논쟁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몇몇 좌파 게시판에만 가보더라도 서로의 실체를 알고 벌어지는 개싸움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논쟁의 책임은 대중에게 지는 것이다. 필자의 글이 논지 없는 마타도어라면 그것을 대중에게 증명하면 된다. 이것이 논쟁의 책임성이다.
  둘째, “소부르주아”라는 평가는 ‘노동계급 독재 사상’을 폐기하고 민주주의적 제도 개선에 한정하는 최원 씨의 정치에 대한 규정이지 마타도어가 아니다. 필자의 실명 공개가 “딱지”에 대해 책임을 지는 방식은 어떠한 방식인가? 여기에 대해 필자는 이해할 수 없다.


5. 최원 씨의 요구에 대한 필자의 답변

  최원 씨는 공권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최원 씨의 실명과 신상 공개 요구는 개인의 강한 바램일 뿐, 한국이나 중국 정부가 하는 것과 같은 그런 탄압은 아니다. 그러나 필자의 우려는 최원 씨의 주장이 익명성을 탄압해왔던 권력의 논리와 그 궤를 같이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실명이 익명성보다 논의에 책임감을 더한다는 말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러나 익명성이 곧 무책임과 등치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공개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직 자신을 공개할 수 없는 조건에 처해진 사람들도 많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150여 년 동안 사회주의 운동은 익명(필명)으로 토론하고 대화해왔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익명성을 무책임성과 등치시키고 익명성을 공격하는 행동은 우리 운동에 있어 활동의 폭을 제약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최원 씨의 주장은 신원을 공개할 수 있는 사람들만 공개적인 논의에 끼어들라는 말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본인의 실명을 개인 메일을 통해 최원 씨에게 알리는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개인 신원을 공개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비합법적 활동을 펼쳐 나가는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표현의 자유를 국가와 주류 운동이 끊임없이 억압해왔던 흐름이 좌파 운동 내에서까지 확대되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익명성은 무책임성이며 “제대로”된 논의를 위해서는 개인의 신원 공개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정면에서 부정한다. 그것은 사회주의와 혁명운동의 전통에 대한 탄압이다.

  덧붙여, 필자는 최원 씨가 공권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과 앞으로도 가질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감사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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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 Glassfield 앨범 Ballerina *

El Momento

 



♪ 환한 음악 ♪

El Momento ....Yuriko Nakamura 멋진 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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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 낙엽

토요일 아침, 과외를 마치고 나와 걷는 화랑대 길

 

 

낙엽이 깔린 길과 벤치를 따라 걷다보면 

 


하늘을 온통 나뭇잎으로 가리운 한적한 도로가 나오고

 


도착한 지하철 입구 계단에도 낙엽이 뒹굴뒹굴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기에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노독/이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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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의 그림

두벌갈이에서...

 

박은태 <창원공단에서...>1994

 

 

이해직 <아침을 여는 사람들> 1990

 

 

이경신<한 여공의 죽음> 1992

 

 

 

 

 

가을이 다 지나기 전에...눈으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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