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공예(?)에 눈뜨다
category 朱鷄  2017/06/05 18:04

어릴 적 해보던 스케일 모델(일본식 영어로는 프라모델)을 다시 만들어 보고 싶어서 탱크 모델을 하나 사다 놓은 지 만 2년만에 엉성하지만 조립을 끝냈습니다. 어릴 적 솜씨보다 크게 나아진 게 없어서 실망하던 중, 좀 더 멋지게 만들기 위한 방법을 검색하다 보니, 남들 다 아는 세계를 뒤늦게 알아버린 늦바람난 뒷북쟁이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한 2주, 흠뻑 빠져있다 보니 여러 가지 용어들부터 도구와 기법, 그리고 나름의 생태계에 이르기까지 스케일 모델링이라는 취미 생활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말이 취미 생활이지 고수들의 경우는 공방 수준으로 작업실을 꾸리고 창작 생활을 하더군요. 흔히들 나이 먹은 사람들은 아이들 장난감으로 많이들 알고 있지만 스케일 모델링은 사회의 여러 분야에 응용 가능한 분야로서 우습게 볼 게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장난감 가지고 논다는 아내의 핀잔에 대비한 설득 논리는 따로 준비 안 해도 될 겁니다. 작게는 취미이고, 나아가 생활 속의 ‘공예’이지만, 크게는 각종 전시 산업의 한 분야이기도 하니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비루한 솜씨의 알몸 탱크, 그러나 도색부터는 품이 많이 듭니다.

 

취미 수준을 뛰어넘어, 디오라마 작품을 만드는 모델러들의 경우에는 각종 컨테스트 경력을 활용하여 작품을 주문 제작하거나, 제작한 작품을 eBay 같은 경매 사이트에 올리기도 하고, 또는 아예 관련 업체를 차리기도 하는 등 나름의 생태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역시 알게 됐습니다. 글도 쓰고 강좌를 열거나 유튜버로 나서는 등등 아직은 가능성 뿐이지만, 수익 창출의 방법도 여러 모로 엿보이더군요.

스케일 모델링의 단계는 단순 조립급에서 도색, 워싱과 웨더링, 그리고 역사를 재현하는 디오라마급 단계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솜씨의 급이 아니라, 각각의 과정이 분화하여 다른 분야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령 조립의 경우는 3D 퍼즐인 셈인데, 치매 예방와 손가락의 감각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부품을 너무 잘게 ‘회지기’하지 않으면 노인들에게도 좋은 취미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아마 지금의 모델러들이 더 나이를 먹는 10년 정도 후면 언론이 그런 기사 많이 내보내리라 봅니다. 또 도색만 하더라도, 최근 몇 년간 인기를 모은 컬러링 북이나 앱이 무색할 지경으로 복잡합니다. 특히 도료와 재질에 대한 이해나 도색 기법 등은 3D 프린팅의 결과물이나 그밖의 생활용품들에도 얼마든지 활용 가능할 것 같군요.

한국의 스케일 모델링은 크게는 밀리터리 아니면 건담류가 주를 이루지만 외국의 경우는 기차나 도시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분야로 나뉘어 있습니다. 우리도 스케일 모델들이 더 다양화하고 그에 따라 동호인 모임도 더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꼭 상황의 재현만이 아니라 상상력이 많이 가미된 창의적인 모델링, 나름의 가치관이 담긴 모델링도 시도되었으면 합니다. 예컨대, 반 세기도 넘게 히틀러의 독일군 모형을 계속 재탕할 것이 아니라 5ㆍ18 당시 광주의 시민군들을 소재로 하는, 정치 의식과 사회적 의미가 담긴 모델링을 해야 단순한 손재주 이상의 진정한 작품들이 탄생할 거라 봅니다. 지금처럼 2차 대전 당시의 독일군 탱크 정보나 찾는 밀덕질보다 현대사의 아픔을 전시하고 교육하는 데에도 모델링 취미가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 분야에서도 인터넷의 수많은 아마추어 사진 애호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결국 ‘솜씨 자랑’의 장에 그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돈과 시간적 여유, 그리고 그것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교류, 몸에 쌓인 솜씨와 관련 지식정보의 습득, 나름의 심미안 등등이 모여 누가 봐도 사회자본(social capital)과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을 서로 드러내 보일 뿐입니다. 사진이 됐든, 스케일 모델링이 됐든, 아니면 또 다른 것이든 결국 철학과 세계관을 담느냐의 여부로 딜레탕트와 아티스트가 나뉘는 것이겠죠. 아마추어가 아무리 덕질을 해도, 설사 덕업일체를 이루더라도 도를 이루지 못하면 그저 부지불식간에 하게 되는 자기 과시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우리 부부가 살고 있는 곳이 나름 공예 전통이 있는 곳인데, 지역 특성을 살릴 생각은 안 하고 그저 땅값 올려서 팔아먹고 튈 생각만 하는 원주민들 때문에 도시가 망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그 공예 전통을 어떻게 하면 살려낼 수 있을까 지역의 뜻있는 분들과 함께 고민하는 있는 중입니다. 우연히 다시 만지게 된 스케일 모델링, 혹은 도색 관련 직종이 이 지역 아이들의 취미가 되고, 지역 특성화 산업이나 관광이나 축제의 소재가 되면 어떨까 생각하다 보니 글이 길어진 감이 있군요.

 

2017/06/05 18:04 2017/06/05 1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