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7/16 빈화폐 세미나

내 발제문.. ㅋㅋ

일단 요약문부텀 올리고....

 

================================================================================

<빈마을> 대안화폐세미나 2009. 7. 16() 대인배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

-자본의 내면화에서 벗어나기, 강수돌, 홀거 하이데(2009), 이후

 

 

 

2부 자본의 내면화, 뒤틀린 주체성

04/ 두려움과 자본-신자유주의 시대, 저항이 어려운 까닭 _하이데

 

들어가며

새로운 저항 운동들은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을 정면 돌파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추상적인 이해관계가 아니라 참된 욕구를 중심에 두는 것이다. 저항 운동이 앞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저항 운동들이 좌절하게 되었는지, 어느 순간에 자율성을 잃고 자본화되는지 역사적으로 분석해봐야 할 것이다. 결국 주체 내부에 존재하는 투쟁의 추동력을 집중 고민해봐야 한다.

- 하이데의 세 가지 전제

첫째, 우리를 자본에 결박시키는 것은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자본의 파괴적 논리에 기인한다. 현실적인 삶을 위협하는 자본에 맞서기 위해 저항하지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재정적 안정성'을 추구하거나 중앙집권주의, 위계질서, 통제와 관료주의에 기댈 때, 우리는 내적 힘이나 저항력을 읽어버린다. 따라서 자신감의 결핍, 두려움의 본질이 뭔지 보려면 자본의 본질 속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둘째, 이 구조화된 두려움은 집단적 상흔의 결과다. 이 상흔에 대해서 지금껏 제대로 고찰된 바 없지만, 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주체들이나 좌절한 희생자들의 주관적 상태들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셋째, 현 단계의 사회 조건 속에서 구조적 두려움은 새로운 질적 차원에 이르렀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노동자는 자기 통제력을 한층 발전시킬 것을 요구받으며, 노동자 입장에서 이런 요구를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자아가 탈진 상태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기존 시스템을 넘어서는 실천으로 나가려면, 이 두려움을 개인적 혹은 집단적으로 돌파해야 한다. 여기에 연대가 필수적이다. 연대는 내면적 안정감을 높이고 그럴 때 지속적 투쟁이 가능하다.

 

두려움과 자본

인간의 주체성 문제를 보려면 인간의 생명력과 자본의 관계를 먼저 고찰해봐야 한다. 맑스는 “노동자의 산노동이 가진 원초적 창조력이 자본의 힘으로, 또는 낯선 권력으로 노동자 자신에게 맞선다.”고 주장했다. 이때 산노동은 자본이 자기증식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에 자본에게 그만큼 낯설고 두려운 존재가 된다. 네그리는 “노동계급이 늘 자본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 밖으로 나갈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즉 노동계급이 자본의 울타리를 벗어나겠다고 늘 새로운 위협을 가하기 때문에” 케인스주의도 등장했다고 말한다. 산노동 중심성. 자본이 스스로 자기를 재생산하는 것처럼 보일 때, '자기 재생산'처럼 보이는 현상의 이면에는 사람들이 느끼고 사고하고 행위하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그들의 삶이 총체적 사회관계 속에서 통제될 때, 스스로 소외시키는 삶을 살 때 그 과정을 기반으로 자본이 증식하는 것이다. 죽은 노동이 산노동을 지배한다. 네그리는 반대로 죽은 자본이 산노동, 즉 인간의 생명력을 빨아들이고 있는 만큼, 인간이 자본 밖으로 나갈 가능성 자체가 자본을 위협하는 토대가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인간 자신 속에 깃든 적대 관계를 볼 수 있다. 사람의 생명력과 사람이 재생산하는 자본의 대립. , 산노동 역시 이미 자본의 산물임을 알아야 한다. 자본 적합적인 사용가치 계발을 통해 비로소 인간의 생명력이 노동력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생산양식=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결합. 즉 여기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인간의 생산력을 특정한 생산관계로 포섭할 때 가능하다는 이야기인 듯. 그렇다면 생명력과 자본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전제적이라 봐야 하지 않은가?)노동력의 사용가치는 결국 사람들이 그 자신의 생명력을 자본으로 변환시키는 데 얼마나 잘 협력하는가 하는 정도에 따라 측정된다. 자본이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므로 타도해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을 버려라.

이 적대 관계의 핵심은 사회적으로 계급 분열로 드러나며, 개인적 차원에서는 자아로부터의 분리된 이기적 자아가 내면의 참된 자아를 지배하는 '자기지배'가 일어난다. 구체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희생시키며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는 자기 착취를 행한다.

오늘날 이러한 구조적 두려움은 이미 마약 중독처럼 일중독과 연관된다. 복종, 경쟁, 폭력으로 귀결되는 이런 두려움은 초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노동 사회에서 특징적인 것이다.

 

노동 사회의 역사

톰슨에 따르면, 산업화 이전 시기에는 사람들이 그 작업리듬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었고, 높은 노동 집중도와 충분한 여유 사이에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산업혁명 초기,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노동사회라 불릴, 오늘날에는 병영적 노동 규율에 복종하는 노동 체계가 일반화되었다. 이는 부르주아적 생산 체제에서 노예에 의존했던 생산의 영역을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에 의존하게 될 때 적용했던, 그 노동규율이 역사적으로 여러 저항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스스로 내면화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한,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력 향상 투쟁의 결과이다. 이것은 처음 이탈리아 북부에서 시작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산업혁명으로 일차적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더 보자.

 

자본주의적 변혁기의 폭력

영국의 노동자 헌장, 유혈 입법, 형무소 등, '자기 규제'나시간에 대한 '정확성' 등이 강제되었다. 자동기계처럼 노동하게 하는 훈련 등이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심리적, 신체적 건강이 많이 훼손되었다. 구체적으로는 굴욕감과 공동체 상실 등. 톰슨에 따르면 이는 노동의 분할, 노동 감시, 벌금 제도, 종시계나 손목시계, 상금 제도, 설교, 교육제도, 명절 장터나 민속 잔치의 제거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외적 강제가 내면화를 가능케 했다. 1790-1830, 빈민들 사이에서 “자포자기적인 천년기설”로서 침례주의가 유행했다. 이는 사회적 폭력이 인간 심리나 생각과 행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보여준다. 물론 억압에 직접적으로 저항한 경우도 많았는데, 그런 정치적 운동들이 최종 탄압된 후, 산업혁명기에 이르러서는 노동규율에 반하는 투쟁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싸고' 투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노동의 필연성에 대해 어떤 의문도 품지 않는 사회, 즉 노동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더이상 공장체제에 문제를 제기하기 보다 공자 그 자체를 인정한 위에서 일종의 집단 종업원 의식을 형성했다. 계급 적대 관계를 일종의 분배 투쟁으로 전환시키는 일, 그것은 기존의 사회적 관계들과 삶의 방식을 성공적으로 파괴시킴으로써만 가능했다. 노동자들이 갈수록 자신을 부르주아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해달라고 투쟁하게 된 것 속에서 포드주의에 따른 노동 일반화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 유연화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갈수록 노동자들이 통제 자체를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고 자기 조절 능력도 충분히 성장함으로써 이제 더 이상 위로부터의 통제와 감시가 불필요해진 시점이 된 것이다.(이 부분은 푸코가 지적하는 신자유주의 통치성 이야기인 듯. 신자유쥬의 통치성은 주어진 규범을 내면화하는, 규율 메커니즘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자기 스스로 자기를 어떤 기준을 통해 성장시키고 훈육할지 규범 자체를 생산하고 실행하는 통치성을 말한다.) 하여간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이제 자본의 공격에 맞설 수 있는 적합한 의식을 개발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공장은 이제 새롭게 노동자들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따라서 제한된 범위 안에서 결정의 독립성이 커질 수도 있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집단적 상흔

엄청난 폭력에 노출된 후에 한 인격은 공격자와의 동일시가 생존 전략이 된다. 생존을 보장받기 힘든 상황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생존을 보장하는 어떤 행위 자체가 패턴으로 굳어지면서 당사자의 정체성을 구성하기 쉽다. 자신의 정체성은 더 이상 가치가 없는 것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에 희생자는 시스템에 대한 복종을 통해 무소불위의 권력, 즉 시스템의 패러다임을 내면화한다. 깊은 패배 이후 개인은 패배의 원인이 자신의 느낌, 생각, 행위 등 그 미약함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을 추방 내지 억압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상대적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경멸이나 공격성으로 이것이 드러나기도 하는데, 인종주의도 그 예이다. 이런 상태의 사회적 적용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다. 대안에 대한 믿음의 상실 후, 그는 자본주의에 참여하고 그 재생산에 기여한다.

이처럼 어떤 사회에서 한 세대가 완전히 직접적으로 엄청난 상흔을 경험한 이후 그 사회 전체가 형성하는 의식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그 상흔의 결과가 그 다음 세대까지 곧바로 전달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일종의 “지속적 흔적들”을 남기게 된다. 상흔화의 결과 한 개인에게는 다양한 형태의 중독이 일아날 수 있다. 현실의 고통을 피하려는 과정에서 겪는 이끌림으로서, 자율성의 결핍 상태가 그렇다. 그리고 포스트포드주의적 현실에서 드러나는 중독은 우울증적 질병들과 성과 중독, 노동중독이다. 자기 통제를 위한 자기 요청, 그리고 모두를 책임지려는 자세. 그래서 기진맥진한 자아로 나타난다.

 

나가며

포스트포드주의로부터 노동하는 개인들의 새로운 자율성 운운하는 것은 어리석다. 노동 자체가 자율성의 결핍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라 한다면, 두려움의 순환 자체를 깨는 것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지금껏 노동운동이나 사회운동은 이 지점을 보지 못하고 분노에만 호소한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두려움을 깰만큼의 분노가 모이지 않을 때 쉽게 분열되거나 관료화되었다. 그리고 분노 자체는 좌절, 우울, 등 희생자의 입장을 강화시키고 자기 소외를 부추기는 형식이다. 중요한 것은 분노는 부당함에 대한 반응일 뿐 그 자체 자립화 과정은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한 내적 욕구에 기반한 운동, 연대가 필요하다. 새로운 종류의 협동 조직을 발전시켜야 한다. 내부 토론 과정이나 조직의 형성 과정에서, 구성원들 사이의 일상적 상호작용 과정에 있어서도 개방성을 확보해야 한다. 최근 많은 운동들이 스스로 지니고 있는 두려움을 과감하게 말하고 토의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

 

할 말이 참 많은 세미나였죠~

지난 시간, 강수돌씨 강연회에 가서 이야기 듣고 우리끼리 뒷풀이 할 때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기본적으로 강수돌씨는 민중들은 착한데 속아서 이러고 있다.

그러니 두려움을 넘어서서 진정한 본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도덕적으로 훈계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자본주의적 위계구조에 자신의 삶을 위탁하고 있는데, 그러면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이죠.

대개, 그런 자본주의적 위계를 철저히 부정해왔던 자들이 그 자식들은 그런 위계의 꼭대기에 올라가도록

갖은 노력을 하는 역사적 과정을 볼 때,

강수돌씨의 입장은 착하기는 하나 뭔가 실질적으로 작동시키기엔 너무 어려워보인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정말 필요한 건, 강수돌씨 자신이 하고 있는 실험, 그가 속한 마을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실험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생생한 사례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물론, 그 강연회의 주제 자체가 노동의 가치를 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에 대한 것이어서

논의 자체가 제한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걸 차치하고도, 듣기 힘들었던 것은

공동체 내에서 가치화되지 않는 노동에 대한 그의 입장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일들은 공동체 내에서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어떤 일들은 그렇지 않을 수 있죠.

그에 대해, 그는 어머니, 가족 공동체에서 그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 사랑으로- 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비가시화되는 가치창출의 영역을 다룰 것인가에 대해서

노사관계와 달리 공동체에서는 사랑으로 이걸 다룬다, 그러니 문제될 게 없다는 식의 입장이었는데요.

구체적인 방법들을 계발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그 사랑은 유지될 수 있을까요?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 공동체에서 구속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그의 주장은 어떤 영향력을 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하여간, 기본적으로 저는 그분이 참 보수적이라고밖에 느껴지지 않았어요.

 

이렇게 막 솔직히 이야기 해도 되겠지요? ㅎㅎ

 

 

그럼 좀 정돈된 말로 써볼까요.

 

 

1. 대중(민중, 노동자계급,  뭐라 부르든 간에 하여간 없이 사는 사람들)이 혁명적 주체가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기에 왜 종속을 유지하는가, 혹은 반민주적 행태, 자신이 소외 상태를 유지하고 저항하지 않는 근본 원인에 대해 :

 

강수돌씨와 저 책의 공동저자인 하이데(강수돌씨의 독일 선생님)는 공통적으로 지배집단의 헤게모니를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일면 맞는 말이죵. 그런데 어떻게 그런 헤게모니를 내면화하게 되는지에 대한 분석은 '속았다'(강수돌)라고 보거나, 집단적 상흔(하이데)의 결과로 보는 것 같습니다.

4장에서 하이데는 집단적 상흔이 전승되는 과정에 대한 분석과 동시에 지배집단의 폭력을 들고 있지만,

이 역시 어떤 구체적인 폭력이 있었는지에 대한  분석이 상대적으로 미비합니다.

톰슨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여러 가지 장치들, 즉 시간을 엄수시키고  설교하고 상금제도 등을 통해

피지배집단을 분열시킨다는 내용이 잠시 있는 듯하지만,

이는 알랭 꼬르뱅의 "사생활의 역사" 4권이나, 푸코의 "성의 역사" 1권 등에서 좀더 치밀하게 묘사된 바 있지요.

문제는 이런 폭력의 과정들은 나열만 될 뿐, 이들의 책 전체 논지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노동자의 '내면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대해 모색하는 과정에서

저자들이 구체적인 대안을 설득력있게 제시하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폭력적인 장치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되는 데에는 또 다른 근본 원인이 내재해 있습니다.

그 부분을 하이데는 집단적 상흔의 결과로 보는데, 아마도 나치즘과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집단적 상흔으로 설정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이데 본인이 원고에서 자신의 논리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연구에 일정정도 아이디어를 얻었음을 시사하고 있으니까요.

그럼, 한국의 경우에는, 다른 나라의 경우도 같은 것일까요?

집단적 상흔으로 일반화하기 어려운 다양한 세력관계와 권력의 행사가 실재한다고 봐야하는 것은 아닌지.

집단적 상흔은 치유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해라, 그런 것이 필요하죠. 하지만 두려움을 재생산하는 구조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그런 도덕적이고 당위적인 태도가 아닐 겁니다. 아주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사건, 장치, 테크닉 들이 있을 겁니다.

그것도 단순하게  먹힐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될 것이고요..

어떻게 과거의 상흔으로부터 단절하고 새로운 삶의 조직 방식이나 원칙이 도출되는지,  어떻게 그런 단절이 이루어졌었는지 역사적 사례들을 살펴보는 것이 오히려 대안을 모색하는 데 생산적 논의를 끌어올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2. 강수돌씨는 강연회에서, 그리고 책 여기 저기에서 반자본주의적이고 반신자유주의적인 삶의 형태의

구체적인 형태로, 북유럽의 복지사회를 들고 있습니다. 하이데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그의 입장에 대해선 책을 다 읽고 나서 더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쨌든, 강수돌씨는 북유럽의 복지사회가 개인들이 작은 공동체를 꾸려 살되, 소외되지 않는 노동을 하면서

개인의 가치를 최대한 실현시키면서 살 수 있는 방법이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같은 책의 저자인 하이데는, 복지사회의 모순에 대해서 짚고 있지요.

이를 테면,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면 다른 나라에서 이주해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상대적으로 복지 부담이 높아지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각 나라들은 국경 이동을 더 엄격하게 제한하게 된다는 것,

아니면 복지를 줄이게 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이 분석이 아주 중요하다고 보는데요.

신자유주의 시대의 생산양식은 이런 이주의 통제를 통해서,

노동의 수위와 임금의 수준을 차등화함으로써 유지되는 시스템이라고 하는 그의 분석에도 들어맞지요.

신자유주의를 해체하려면 어쩌면 이렇게 가치화의 차등 문제를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다.

그것이 구체적인 차별과 폭력의 원리처럼 보이기까지 하거든요.

3장을 발제한 슈아가 말했듯, 한국은 이주노동자의 수를 50만명 정도로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국의 지금의 생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실제로 그만큼의 이주노동자들의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인데요,

그건 언제나 이주노동자들을 불법화할 수 있다는 그 자체,

즉 국가 차원에서 사람들의 생산력, 노동할 권리, 이주할 권리 자체를 통제하겠다는 것이

좀더 근본적인 폭력의 형식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람들이 이주노동자를 좋게 봐야 한다고 훈계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범죄자를 거르기 위해 국경을 강화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이 역시 같은 문제입니다.

어떤 집단이 어떤 집단 혹은 개인의 이동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신들의 '안전'(그것이 범죄에 대한 것이든, 자신의 노동할 시장에 대한 것이든)을 요구할 때

타자를 생산하고, 특정 범주를 통해 이들을 구성해내는 때,

오히려 그 타자가 특정한 방식으로 생산되고 구성되었다는 것을 폭로하는 것이 필요한 거죠.

만약 어떤 두려움을 넘어서야 한다면,

내가 당한 폭력에 대해(집단적 상흔이든, 실직 상태든), 그것을 타인에 대한 폭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것이라 믿는 환상 자체를 없애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3장에서 강수돌씨는 마붑에 대해, 노동이나 국경에 대한 인식이 '성숙해 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가 보이는 태도는, 여전히 아와 비아를 가르는, 나와 타자, 국민과 비국민, 선주민과 이주민을 가르고 있기에 가능합니다.

'그들'이 성숙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가 이렇게 성립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나와 타자를 가르는 이분법, 그 자체가 특정하게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그 임의성을

하이데는 의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상흔을 치유하고 타자와 만나려고 하지, 그것이 동시적으로 발생한다는 혹은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자신이 치유될 가능성에 대해서 묻지 않습니다.

그의 논리적 구조에서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런 우선성 속에서 언제 두려움이 극복될지, 어떻게 두려움이 극복될 지 알 수 없는 건 당연한 귀결일 것 같습니다.

 

좀, 세련된 문체로 정리해보려고 해도 잘 안되는 군요. 쿨럭.

 

하여간, 강수돌씨의 대안사회에 대한 입장에 대해,

북유럽의 복지국가 형태는 하나의 유토피아처럼 제시되는 것 같지만,

실은 그것은 스스로 '복지자석'이 되지 않기 위한 끊임없는 배제, 폭력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을

하이데가 앞서 지적한 만큼,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과연,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신체검사와 엄격한 출입국통제 없이 그런 복지사회는 가능할까요?

혹은 그것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 국가든, 소규모의 생태공동체든 어떤 노력을 해야할까요?

 

 

 

사랑으로?

 

 

 

 

사랑을 해야만 하는 사람은 또다시 '상흔'을 갖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집단에서나 그런 상처와 갈등은 발생하지만,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수많은 장치들, 시도들, 제도들이 있지요.

사실, 어떤 것이 가치화되고 어떤 것이 제도화되는가, 어떤 관행이 발생하는가 하는 부분들과 연관하여

우리의 욕망이, 우리의 습관이 어떤지를 발견하는 일이 중요할 것 같아요. 더불어

어떻게 가치화할 것인가,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가, 어떤 관행을 만들 것인가 하는 부분들을

구체적으로 실험해볼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빈집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갈등의 현장에서 누군가에게 '사랑으로'라고 말한다면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한 조건들을 만드는 것, 그것이 사랑  그 자체일 겁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