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선, 잠을 충족하게 못자니 힘들었다.

 

- 반성폭력을 고민하는 건 좋은데, 아니 당연히 있어야 하는데, 고민의 내용이 공문구로 느껴져 답답했다. 모든 상황에 성별권력구조를 대입하는게 반성폭력 운동일까? 그런 접근이 가해자/피해자로 이분한뒤 여성을 피해자로서의 섹슈얼리티로 구속한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그 쟁점에 대해서는 부차화시키고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서 성폭력을 고민하자는 말을 반복하는 건, 그것을 강조하는 게 더욱 목표에 부합한 효과를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지, 아니면 당위에 불과할지 의심스러웠다. 물론 후자로 보였기에 적는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반성폭력은 얼마나 성폭력적 상황을 잘 발굴하는지, 그 능력을 경연하는 도구가 되어있었다. 여성에게 억압적이고, 여성이 피해입는 것으로 이미 정의내려진 틀에 맞는 현실을 찾는 것은 여성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 빈곤에 대한 접근 역시 마찬가지다. 개인/구조를 이분(대립)하고 빈곤은 신자유주의라는 구조에 의한 것이라는 말을 되뇌이는 건 '자본주의 나빠요'라고 외치는 것과 몇걸음 쯤 떨어져 있는걸까? 빈곤이 재생산되는 구체적인 기전 없이 신자유주의가 모두를 가난하게 만든다는 서술은 너무 공허하다. 이런 접근은 빈곤을 물질적 부의 양으로만 파악하며, 착취를 산술적 계산으로 치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절대빈곤/상대빈곤의 구분은 빈곤을 화폐 혹은 내적 기준으로만 규정하는 양 편향이다. 노동빈곤에 대한 개념을 아는 사람들이야 알고 있었겠지만, 그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조차도 공유되지 못한채 최저임금과 빈곤을 연결시키면 역시 빈곤은 물질적 재화의 소유정도로만 규정될 뿐이다. 그리하여 빈곤은 내 삶과 분리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오히려 빈곤한 이들과 어떤 관계에서 연대맺을 것인지가 불투명해졌다. 한 택시기사가, 빈활하면서 택시를 타냐며 탑승을 거부했는데, 빈활에 참가한 사람들 스스로는 빈곤에 대해 택시기사가 가졌던 인식과 달랐을까? 자신이 빈곤하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 빈활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택시를 타도 빈곤한거지. 집에 에어컨이 있어도 빈곤한거라고. 정말 안타까운 건, 집행부 스스로도 빈곤을 대상화시킨 지점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한 프로그램은 역 앞에서 홈리스를 찾아 인터뷰를 하는 것이었는데, 참가자들이 빈곤을 내가 아닌 다른 이의 문제로 바라보는 상황에서, 더군다나 노숙인에 대해서는 공고한 선험적인 인식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마치 그것이 없는 것인마냥 '객관적'으로 홈리스를 찾는 게 가능하리라고 생각한 것일까?

 

- 최고 연장자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렇지는 않았다.)게 꽤 부담스러웠다. 굳이 학번/나이를 밝히진 않았지만, 번번이 자기검열에 시달렸다. 새로이 만난 사람들은 반갑고 좋았으나, 앞으로 다시 만날 기약이 없다는 생각이 들고나니 심드렁해졌다. 누구를 만나든, 그럴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관계가 미리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순간의 관계에 충실하면 될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삐딱을 부린다.

 

- 못씻는 건, 나에게 그리 힘든 일은 아니다. 은박매트 위에서 자는 것도 마찬가지. 수면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1년 내내라도 그렇게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