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리랑을 다시 읽어보고 있다.

반절 넘게 읽었는데, 새롭게 느겨지는 것도 많고, 불편한 것도 많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번도 어김없이 남성의 시각으로만 서술되어 있다. 여성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나 생각까지도 모두 남성의 시각으로 재단해 놓은 것들이다. 드문드문 터지는 손발 오그라드는 대사들은, 책을 꼭 덮었다 열게 만든다. 그 당시 살던 남성들이 여성은 이렇게 생각할거라 여기며 살았을지 모르지만, 그럼 아예 화자를 모두 남성으로 하든가. 여성의 입을 통해 그런 생각들을 쏟아내는 건 너무 거북한 일인데. 참 어지간하다.

 

항일운동을 민족주의 관점으로 해석해 서술하고 있는 것도 거슬린다. 매우 배타적인 민족주의. 가장 제일인 것은 독립이고, 나머지 사상은 독립을 위해 필요가 있으면 가져다 쓸 수 있다는 태도. 공산주의 또한 그렇게 편의에 따라 받아들인 여러 신사상중 하나라는 것이 일관된 서술방식이다.

 

이건 상해파와 이르크츠쿠파 사이의 갈등을 편파적으로 묘사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이르크츠쿠파는 러시아에 일치감치 귀화한 한인들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은 처음에는 차르 제정에 빌붙다가, 적군이 대세가 되니 거기에 다시 빌붙는 기회주의자들로 인것으로 서술한다. 그리고 상해파 이동휘 선생은 민족의 이익을 우선하지만 이르크츠쿠파는 소련공산당의 이익을 우선하는 사람인 것 마냥 그려낸다. 그렇다면 그런 기회주의자들이 왜 훨씬 유망전도했던 백군과 일본군에 빌붙지 않았는지에 대한 해명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쨋든 둘 사이의 갈등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관점도 있다는 건 새로웠다. 우선 대동단결이 옳다는 논리가 전제되어 있으니, 노선이 차이보다는 권력을 잡기 위한 술수로 먼저 보이나보다.

 

그리고 작가의 시각에서는, 중국이나 일본 민중들의 저항은 애초 별무관심이고, 떼놈과 왜놈들이 '선량한' 조선 민중의 밥그릇 뺏어 먹는 것으로만 그려진다. 이런 시각이, 지금에는 노동운동 이외의 운동을 부차화시키는 조합주의적인 운동으로 정확히 이어지고 있다. 저런 태도에서 이주노동자 투쟁을 어떻게 지지할 수 있을 것이며, 제 보기에 자기 밥그릇 찾기에 불과할 일본노동운동, 중국노동운동과는 어떻게 만날 수 있을 것인고. 중국공산당에 협력하는 것도, 민족의 독립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서술들과 떨어져서, 그 시기를 버텨낸 사람들에게 다시 숙연해지고. 깜깜해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