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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5/27
    해방 전후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참여사회연구소
  2. 2008/05/27
    뉴라이트의 역사의식, 무엇이 문제인가?
    참여사회연구소

해방 전후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참여사회연구소는 5월 14일부터 6월 18일까지 총 6회에 걸쳐 '대한민국 60년,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 강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강좌는 뉴라이트 교과서포럼의 역사교과서 출간으로 촉발된 우리 근현대사의 쟁점들에 대한 이해를 돕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좌표를 모색하는 자리로 마련되었습니다. 이 글은 2강에 대한 강의노트로 자원활동가 박소현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3강은 5월 28일 '식민지 경제는 대한민국을 근대화시켰는가?'라는 주제로 충남대 허수열 교수가 강의에 나설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참여사회연구소 기획강좌
대한민국 60년,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



제2강 해방 전후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정용욱|서울대 국사학과

1. 무엇이 문제인가?

1) 교과서포럼(이하 포럼)의 해방전후사 인식과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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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 역사교과서에서 전근대편의 해당 부분 서술의 주어는 주로 무엇으로 시작할까요?  대부분 ‘무슨 무슨 왕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검인정 근현대사 역사교과서는 어떻게 시작할까요? 주로 ‘우리 민족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런데 포럼은 이 “민족으로부터 벗어나, 한국인”을 주어로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한국인’이라기보다는 주로 ‘지배층’을 말합니다. 교과서포럼이 ‘우리 민족’ 대신에 ‘한국인’을 역사적 행위의 주체로 보겠다고 한 이유로 ‘보통 사람들의 역사’를 보기 위해서라고 서두에 써놓았습니다. 그러나 결론 부분에서는 “해방 후 건국 과정에서는 자유민주주의의 확고한 신념을 가진 정치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였다”라고 씁니다. 서론과 결론이 어긋나는 겁니다.

 주요 역사적 쟁점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와 포럼의 인식이 너무 다릅니다. 여러 가지 오류를 많이 저지르고 있지만 대표적으로 식민지시기를 ‘능력 축적’을 위한 시기로 파악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또한 포럼 측은 기존교과서의 좌편향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신들의 교과서를 실증주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실증으로 포장한 제멋대로의 서술입니다. 그 예로 포럼은 제주 4.3 항쟁을 두고 “대한민국의 성립에 저항”하기 위해 일으킨 “무장반란”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4.3의 본질은 대한민국 정부 성립 이전의 단선 반대운동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시간’에 대한 개념마저도 없다는 비판이 성립하는 겁니다.

 그들은 실증주의를 주장하나 대안교과서의 사관은 근대사관(近代史觀)이 아니라고 봅니다. 전(前)근대사관과 근대사관을 구분할 수 있는 지점은 ‘정통성’과 관련한 부분입니다. 전근대 역사서는 모두 스스로의 정통성을 주장합니다. 포럼 교과서는 이런 맥락에서 전(前)근대적 사관으로서, 스스로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포럼 교과서의 또다른 문제점은 그들이 ‘민족’을 경시하거나 부인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구체적 서술에서 일제식민지기 민족 억압의 실상을 제대로 인식하고 평가하지 않거나 민족운동의 역사성을 평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족주의에 대한 긍부정성에 대한 평가와 민족의 실체성에 대한 평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일부 민족주의의 부정적 사례를 들어서 민족의 실체를 부정하면 민족허무주의에 빠져버리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또한 그들의 엘리트주의도 문제입니다. 당시 선진적 지식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김옥균 등의 갑신정변은 높게 평가하면서 동학농민혁명을 ‘봉기’, 즉 일회성 업라이징(uprising)이라고 비하합니다.

  이영훈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이승만에 대해서는 사실 의식적으로 부각하려고 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사실 1994~95년에 조선일보가 했던 주장 바로 그대로입니다. 아니,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지요. “대한민국의 기틀을 잡는 데 동시대 어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커다란 공훈을 세웠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상대적으로 김구에 대해서는 저평가로 일관하지요.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2) 포럼 교과서의 서술 전략과 선전 전략

 포럼이 만든 교과서는 교과서라는 이름에 값하지도 않을 뿐더러 학문적 성과도 없이 선전, 선동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좌편향을 시정했다고 선전하고 있는데, 역사학계에서는 과거 친일·독재 세력의 자기 변호용 책자로 보고 있습니다.

 한홍구 교수는 “지금까지 나온 교과서 중 가장 이데올로기적”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지요. 또한 이승만과 친일세력을 정당화하려는 동기에서 출발햇기에, 역사학계의 보수적인 분들조차 감당할 수 없는 주장이 많아요. 심지어 상명대의 주진오 교수는 ‘한국판 후소샤(扶桑社) 교과서’라고 말합니다. 이외에도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서 같은 입장입니다.
 일본의 '새로운 역사교과 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와 포럼을 비교해보지요. 이들은 모두 국가주의를 고취하고 기존의 역사관을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취하는 입장도 서로 같습니다.
 
 이들은 논의 조건을 재정의해버립니다. 그리고 새로운 논의 조건에서 문제를 협소하게 좁혀버립니다. 사실 해방 전후사에 얼마나 풍부한 역사가 있었습니까. 그런데 모든 것을 분단정부 수립이냐, 건국이냐로 몰아갑니다. 이 시기의 역사적 사건을 의도적으로 좁혀서 단순화하고 프레임화해서 건국문제, 이승만 평가 문제로 논점을 몰아가는 겁니다.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게 위안부문제입니다. 그건 구조적 폭력과 구조적 시스템이 중요한 사안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새역모는 '징집의 강제성 여부' 문제로 프레임화해버립니다. 자기가 돈 벌러 온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직접 위안소를 설치했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가능하게 하는 제반의 조건이 있었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닙니까. 위안소에 가는 병사들에게 일본 육군에서 콘돔을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다 있습니다. 이는 국가 시스템이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걸 의미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축소의 과정은 동시에 중요한 수사적 기능을 가집니다. 이른 바 ‘말살의 역사학’입니다. 이게 포럼과 새역모의 아주 유사한 점이지요.

3) 역사교과서, 그리고 포럼 교과서

 역사교과서는 학생들에게 전달되어 평생의 이념·가치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학계의 논의를 거쳐 검증되고, 공감대를 확보해야 합니다. 그런 논의와 합의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역사교과서에는 또 딜레마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정체성 함양과 국민 통합, 다른 한편으로 창의적인 역사적 상상력·비판적 인식 태도의 함양이라는 이중적 목표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객관적인 지식을 전달해야 합니다. 비판적 인식은 객관적 지식을 통해 함양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나라는 역사적 사유 방식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암기를 시키는 구조예요. 세계사 교과서를 보면 진나라, 명나라 등의 시기가 각각 한 문단만을 차지하고 있어요. 이건 외우라는 거죠. 여기서 무슨 비판적 인식이 길러질 수 있겠습니까.
 또 원시시대의 천년보다 현대의 하루가 더 의미있는 발전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 근현대사를 가르쳐야죠. 모든 나라의 교과서는 혁명정통성을 설명하기 위한 교과서입니다. 프랑스는 그들이 이룩한 자유·평등·박애가 너무 중요해서, 프랑스 역사의 대부분은 중고등학교에서 60~70% 근현대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많게는 1/8, 적게는 1/10에 그치고 있어요.
 이런 근현대사 교과서 중 포럼의 교과서는 너무나도 문제점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국민적 역사인식과 역사적 상식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찰·반성·비판이 부재하는 3無 교과서가 되어버린거죠. 또 사후적 평가와 결과론적 인식이 지배합니다. 또 단선적이고 독선적인 인식이 난무하죠. 우리는 식민지와 전쟁, 분단 등 근대세계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걸 겪은 나라입니다. 이게 어느 한 세대만이 이뤄낸 일은 아닙니다. 시련이 많았으면 고통도 많았고 또 성취도 많았습니다. 그런 과정에 대한 역사적 상상력을 기르기보다 퇴행적 역사인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탈냉전의 시대에 냉전적 시각을 강요하고 민주화 시대에 독재를 찬양하고 통일을 향한 시대에 통일 무용론을 설파하고 있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책입니다
.

2. 이승만 선전의 계보와 민초들의 망각에 대한 싸움 
 
아까 말씀드렸듯이 포럼의 교과서는 해방 전후를 이승만으로만 몰아가는 프레임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집권기였던 50년대에는 그 측근 혹은 정부에 의해 활동과 업적을 찬양하는 홍보물이나 전기가 많이 나옵니다. 60년대에서 80년대에서는 관련자나 저널리스트 등이 본격적 연구를 하기 위한 전 단계를 수행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역사 바로보기와 비판론, 옹호론이 공존하던 시대입니다. 90년대에 들어와서는 사상·노선·활동·업적에 대한 재평가와 본격적인 인물연구가 언론계와 학계에 의해 시작됩니다. 기억의 투쟁이 시작되는 거지요. 2000년대에는 ‘이승만 띄우기’와 ‘역사 지우기’ 프로젝트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승만으로 그 시대의 역사를 모두 대체해버리면 그 외의 다른 역사는 지워지는 거라고 봐야지요.

<이승만 전기 연구의 시기별 특징과 경향>

 

1950년대

1960-80년대

1990년대이후

편찬주체

측근, 정부

저널리스트, 관련자

언론계, 학계

관점과 대체적 내용, 저술동기와목적

활동․업적 찬양 일색의 홍보물

노선․활동․업적에 대한 비판과 옹호. 본격적 연구의 개시

사상․노선․활동․업적에 대한 재평가. 본격적인 인물 연구

외화형태

전기 및 홍보물

전기, 사론, 실록

기사, 사론, 전시, 전기, 논문, 저서

필자

양우정, 서정주, 김광섭, 한철영, 박성하, 올리버 등, 공보처

리챠드 알렌, 이원순, 허정, 실록편찬회, 송건호, 김도현, 손세일

서중석, (이한우, 조갑제), 유영익, 이정식, 고정휴, 정병준

주요활용자료

관찰기, 회고, 전기류, 왕복문서

 

미국 측 외교, 정보 문서 + 이화장 문서


  중요한 것은 90년대에 이미 포럼이  하고 있는 이야기가 다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를 기억하십니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신문의 역할인데, 한면을 통틀어 ‘이승만과 나라세우기’라는 기획기사로 메꾼다는 것은 다른 나라 언론에서는 생각도 못하는 일이예요. 공정성이 생명인 신문의 역할은 찬반 입장 설명하고 평가내리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조선일보의 태도는 이승만 살리기에 주력하고 반대진영 얘기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승만을 ‘역사적 거인’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독자들과 비판자들에게 ‘역사를 보는 틀’을 바꿀 것을 요구합니다. 극도의 엘리트주의와 영웅주의, 대중경시 사상과 맞물린 채 나타나는 역사 인식입니다. 이승만 절대주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거대 언론에 의해 이런 일이 자행되는 한편, 한편에서는 민초들이 '잊혀지지 않기 위한' 망각에 대한 싸움을 시작합니다. 위안부 문제, 제주 4.3항쟁, 노근리 민간인 학살 등이 이 때 본인들과 유족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탈냉전 이후에, 냉전시대에선 생각도 못했던 일들을 민초들이 시작한 것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사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게 2000년대 와서 과거사 위원회로 제도화해낸 것입니다. 그거 정부가 한 거 아닙니다. 90년대 민초들이 해낸 일에 정부가 숟가락 하나 달랑 얹은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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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실(史實), 성찰, 상상력: 해방3년사? 점령3년사? 분단3년사?

 미소가 점령했었기 때문에 분단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결과론이 포럼 교과서의 한 축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구조적이고 극복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분할점령에서 분단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가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이야기하고, 당시 상황을 역사주의적으로 평가한다면  결과론적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겁니다.  해방직후 좌우대립의 역사성에 대해서도 얘기해보지요. 좌우대립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또한 식민지하에서 가장 중요한 현안은 어떻게 좌우합작을 하느냐였어요. 물론 노선은 있었죠. 김구는 공산주의자를 테러했고 공산주의자는 자유시 참변을 일으켰어요. 그런데도 서로 연합하려 했습니다. 그게 해방 직후 조선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주요 대립구도는 민족 대 반민족이었습니다. 45년의 정국이라는 것은, 독립과 정부수립을 위해 뭉쳐야 하는 단계였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구도가 어느 순간 절대적인 개념으로 바뀌었습니다. ‘좌=빨갱이=국보법으로 처단해야 하는 자들’로 절대화됩니다. 그 계기는 찬반탁 문제였죠. 1945년 연말, 신탁통치 소동이 벌어집니다. 결정적인 것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모스크바 3상회의 보도였습니다. 신탁이 확정되었고 제안자는 소련이다라는 내용이 보도되었습니다. 보도된 것이 1945년 12월 27일인데, 기사 출처는 해외의 육군을 위해 발행하는 육군주보 12월 27일자였습니다.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석간이라 하더라도 당시 기술 수준으로, 같은 날 외신 기사를 받아 쓰는 것은 불가능하죠. 같은 날 나올 수가 없어요. 이건 누군가 정보를 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의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흘렸고 여기서, ‘전민족 대동단결’에서 ‘좌우 대립은 골육상쟁의 지경’으로 변화됩니다. 결국 좌=친소=친공=국가보안법 대상자이고, 우=민족주의자=친미=반공이란 개념이 새롭게 착근됩니다. 미군정을 지지하면 우고, 반대하면 좌라는 것이 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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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아줌마의 편지, 테러로 인한 위협을 호소하는 탄원서]

 
사실 해방정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너진 민초들의 삶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라는 문제였습니다. 당시에는 엄청난 테러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 그것이 바로 민생이고, 다른 말로는 먹고사는 문제였습니다. 그걸 극복하는 방법이 그 당시에는 민족의 길과 민초의 길이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외세의 점령이라는 구조적 조건 속에서 자기 삶의 복원과 새로운 정부 수립을 일치시켜 가는 게 삶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해방 전후사에서는 바로 민초들의 삶의 복원과 새로운 정부 수립의 길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저지당했습니다. 민초와 민족의 길이 일치되는 것이 저지당했다면 어떤 구조적이고 객관적인 요인에 의해 저지당했고 어떤 주관적인 문제에 의해 실패했는지 따져보는 것이, 건국의 의미를 따지는 일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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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의 역사의식, 무엇이 문제인가?

참여사회연구소는 5월 14일부터 6월 18일까지 총 6회에 걸쳐 '대한민국 60년,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 강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강좌는 뉴라이트 교과서포럼의 역사교과서 출간으로 촉발된 우리 근현대사의 쟁점들에 대한 이해를 돕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좌표를 모색하는 자리로 마련되었습니다. 이 글은 1강에 대한 강의노트로 자원활동가 박소현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2강은 5월 21일 '해방전후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주제로 서울대 정용욱 교수가 강의에 나설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참여사회연구소 기획강좌
대한민국 60년,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

제1강 뉴라이트의 역사의식, 무엇이 문제인가?

한홍구|성공회대ㆍ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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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는 국내외 역사를 둘러싼 전쟁을 보고 있습니다. 일본·중국과의 역사 기록을 둘러싼 갈등도 있지만 우리의 근현대사를 두고도 논쟁이 벌어지고 있죠. 일본 후소사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 교과서와 비견할만한 뉴라이트의 ‘대안교과서’ 등장 때문입니다. 오늘은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뉴라이트의 등장배경, 그들의 속성과 역사인식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자유주의의 빈곤 - 뉴라이트 등장의 토양

1) 해방 이전
  우리 사회는 자발적으로 자본주의의 맹아를 틔우기도 전에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으면서, 일본의 식민자본주의가 들어온 거죠. 바로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은 반근대적이면서 반제국주의적인 정서를 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화에 저항하고, 근대에 휩쓸리지 않았던 기층 민중들에게 반일이라는 것은 반근대성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또한 우리를 침략했던 제국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라는 점에서 반제국주의 운동은 반자본주의적 정서와도 맞물립니다. 즉, 반제국주의는 동시에 사회주의적일 수 밖에 없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신학문을 수학해 근대화의 세례를 많이 받았다면 그만큼 자유주의적 성향과 개인주의적 성격이 생기는가에 대한 물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 근대학문이라는 것이 일본제국주의 하에서 수학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제국주의는 제국주의 중에서 가장 후진 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겠죠. 천황을 섬기는 봉건적 성격과 군국적 성격, 그리고 ‘천황의 신민’이란 집단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자각한 개인들이 모여 민족이란 단위를 만든 것이 아니라, 민족이란 집단이 먼저 형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질 토양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는 것이죠. 게다가 그나마 자유주의적 성향의 지식인들도 전쟁수행에 강제 동원되거나 협력해야 하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자발성이냐, 강제 동원이냐라는 정도의 차이 혹은 딜레마가 있었겠지만 그 과정에서 존경받을만한 우파마저 거의 소멸됩니다.

2) 해방- 전쟁 - 학살
  해방 이후, 미군정이 성립되면서 친일파가 득세해 제대로 된 과거 청산에 실패하게 됩니다. 아니, 친일 청산을 주장했던 민족적 세력이 오히려 친일파에게서 청산당하는 아이러니(반민특위, 백범 김구의 암살 등)까지 일어나죠. ‘조선의 몸, 황국신민의 마음, 미국 옷’이란 말은 그 시대를 상징합니다. 그 후 친일 정권이 수립되었고, 분단이 되었고, 전쟁이 발발했고, 학살이 있었습니다. 관용이라는 것이 없는, 거의 멸균실 수준의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보도연맹사건 등 사실상 좌익과 무관한 민간인마저도 학살당하였는데, 이러한 민간인 학살은 친일파들이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말이 필요없는 시대, 담론이 없는 시대가 1950년대였습니다.

3) 군사독재
  휴전 7년만에 민중의 힘으로 정권을 바꾼 4.19혁명이 있었습니다만 5.16 군사 반란으로 그마저도 꺾입니다. 4.19에서 주장되었던 것은 (북은 청산한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남한의 잘못에 대한 지적과 통일이었습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통일의 열기에서 친일파와 군대들은 위기감을 느꼈고, 그래서 결국 군사반란과 군사 독재가 시작된 것입니다. 군사독재 시기 우리의 국시는 반공이었습니다. 반공이라는 것. 이건 제대로된 이념의 부재를 의미합니다. 살아남은 친일 세력들이 ‘반공’이란 개념을 사용한건이죠.
 저는 식민치하에서 생계형 친일을 할 수는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그 친일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은 하지만, 용서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정말 용서하지 못 할 친일파는, 독립운동 하던 사람을 밀고·체포·학살한 주체. 즉, 고등경찰들입니다. 그러나 고등경찰이 반공을 무기로 살아남았습니다. 친일에 대해선 가급적 입을 다물고 반공·경제성장을 두 축으로 나라를 운영하였던 겁니다. 체육관 선거가 정당화된 나라에서 자유가 설 자리가 어디 있었습니까. 게다가 70년대, 한국적 민주주의가 주장되면서 외래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부정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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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현대사에서 보수와 진보의 단순 이분법 가능한가?

1) 한국의 진보
  진보진영의 정신적 지주들은 과연 진보적이었을까요? 김구, 장준하, 함석헌, 계훈제, 문익환, 김수영, 이영희 등의 사상이나 이념의 성격은 사실상 보수주의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단지 양심적이었던 것이 진보적이었던 시절에, 양심적이었을 뿐입니다.

2) 한국의 보수
  우리나라의 속성은 사실 보수적이라고 봅니다. 왕조의 지속성을 봐도, 유교문화의 전통을 봐도 그렇습니다. 200~300년만에 지배층이 완전히 교체되던 중국과 비교해 보아도, 신라부터 대한민국까지 지배층이 완전히 물갈이 되는 경우가 없었지요. 그런데 현대에 오면서 한국의 진짜 보수는 다 사라지고 가짜 보수, 친일파가 득세했습니다. 분단이란 특수상황에서 주먹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담론을 형성하지도 않았고 형성할 필요도 없었던 거지요. 담론생산 능력이 결여된 극우세력은 전향한 진보로부터 많은 것을 빌려옵니다. 4.19세대, 6.3세대들이 정권에 복속합니다. 류근일, 조갑제, 송복, 김진홍, 이석연, 김문수, 이재오, 심재철 등 지금은 수구지만 사실, 진보의 총아였던 자들 아닙니까? 이들은 개별적으로 수구에 충원되어갔던 것이죠. 그런데 이제 우리는 2002년에 ‘뉴라이트’라는, 과거 주사파였던 자들의 집단적인 전향을 목격하게 됩니다.

3. 2004년 뉴라이트 등장

1) 2002년 대선과 노무현 정권 출범의 의의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의 승리는 수구 세력도 납득할 수 있었을 겁니다. 외환위기에, 군사독재 등 장기집권 30년에 대한 국민적 염증에, 김영삼-김현철 부자의 실정이 있었죠, 그리고 DJP연합으로 지역구도도 탈출했지요. 여기에 후보 개인에 대한 평가도 한 몫했으며 500만표를 가져갔던 이인제 효과도 있었습니다. 하나만으로도 대선 결과가 바뀔만한 중대요인이 여러 개 중첩되었던 것이죠. 수구 세력도 패배를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002년 노무현의 승리는, 수구세력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구세력이 탄핵을 통해 반격을 합니다만 탄핵도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수구의 위기로 이어졌던거죠. 그 때 사실 진보개혁진영이 제 역할을 못함으로써 수구 세력을 분리수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바로 수구의 헤게모니를 깰 수 있는 호기를 놓치게 됩니다. 민변출신 대통령·국정원장·원내대표·법무부장관과, 여당 단독과반수, 그리고 덤으로 민노당 10석을 가지고도 국가보안법을 폐지못했지요. 이른바 4대개혁입법을 가지고 정치적 야합을 하는 와중에 민심은 진보 진영에서 떠나게 됩니다.

2) 뉴라이트 등장 요인
 2004년 하반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국가보안법,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대법원과 헌재의 판결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8.15 경축사와 과거청산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에 노무현 정권의 과거청산(친일/민간인 학살/군사독재) 작업에 대한 뉴라이트의 위기의식이 발동하게 된 것입니다. 2004년 가을. 뉴라이트는 수구좌파와 수구우파를 비난하면서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이념적 정당성과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적 정통성이 집권세력에 의해 의문시되면서 국가정체성이 훼손되고 있다"며 결집하기 시작하엿습니다.
 여기에 수구언론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과거 수구세력의 충원이 개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뉴라이트 세력은 집단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에 수구측은 자신들의 주장이 과거 운동권 전술을 통해 관철되기를 기대하였고, 실제로 그들의 투쟁력도 증강되었습니다. 그리고  2007년 대선을 두고 ‘좌파 정권’ 재창출을 저지할 필요성을 느껴 보수층이 총집결합니다.

4. 뉴라이트의 문제점과 미래

1) 약점과 문제점
  뉴라이트들에게는 사상적 깊이가 없습니다. 그들은 주로 독재정권으로부타, 그리고 스스로의 내면으로부터도 억압받던 시절에 대학을 다녔습니다. 반공교육을 가장 철저히 받은 세대가 가장 극렬한 운동권이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 것이 바로 주사파 집단입니다. 그런데 지금 뉴라이트는 사실 그 주사파 집단 출신들입니다. 20대에는 좌익 소아병을 앓더니 40대가 되어서는 극우 소아병을 앓는 행태를 보이는 것이죠. 이들이 수구의 관심과 지원을 받고있지만, 뉴라이트의 출현으로 인해 한국사회에서 합리적 보수집단이 출현하기는 더욱 어려워진 겁니다.

5. 뉴라이트의 한국 근현대사 인식

  한국의 근현대사 연구는 연구 그 자체가 투쟁이고 운동이었습니다. 80년 광주를 겪으며 80년대에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글을 쓰는 것도, 자료를 구하는 것도 투쟁이었던 시대였지요. 젊은 연구자들 중심으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씌어졌습니다. 그런데 뉴라이트 집단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펴냅니다. 그 책의 1권은 ‘탈민족’집단이 함께 저술했는데 책이 나온 후에 포스트모던 역사가들은 『근대를 다시 읽는다』를 펴내  탈근대적 입장에서 뉴라이트와 민중사관을 함께 비판했습니다. 민중사관은 자신들의 주장이 정치적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일하는 민중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스스로 밝힙니다. 그런데 뉴라이트는 지배세력 중에서도 친일 세력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면서 자신들 스스로 객관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제 뉴라이트의 한국근현대사 인식을 짚겠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구세력에 빚진 게 없기 때문에 과거청산에 적극적일 수 있었습니다. 2004년 이후 과거 청산이 본격화됩니다. 그런데 수구세력들은 이 과거청산에 대해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자학사관’입니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세력이 사실 친일파였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자학사관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학사관’이란 말은 일본의 ‘새역모’가 만들어낸 용어입니다. 어디 빌려올 게 없어서 일본 침략사를 정당화하는 ‘새역모’의 용어를 빌려옵니까. 이 비판이 제기되자 최근에는 ‘자해사관’이란 용어를 쓰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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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대한민국을 건국한 세력과 그 정체성은 어떨까요? 우리 헌법에는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임시정부의 계승을 위해서는 두 가지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물과 정책이 그것입니다. 먼저 인물을 봅시다. 임시정부의 주축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은 당시 현역 육군 소위였던 안두희에게 암살당했습니다. 그런데 안두희는 전쟁통에 복귀해 육군 중령까지 진급하고 예편후엔 군납업으로 큰 재산을 모으기까지하지요. 이를 계승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정책은 계승했습니까? 임시정부의 강령과 정책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임시정부의 강령의 주요 내용은 주요산업 국유화, 토지는 국민에게 무상 분배, 파업의 자유 보장, 무상교육, 무상취업, 남녀평등입니다. 너무 좌파적입니까? 식민시 시절 당시 조선에서 웬만한 중요산업은 일본인의 것이었기 때문에 독립운동세력은 비자본적, 반자본적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게 1940년대의 분위기였던 겁니다. 이 당시 자유당의 강령조차도 지금 시각으로 보면 좌파적입니다.
 
 건국을 둘러싼 두가지 시각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건국 자체가 정당하다는 뉴라이트의 주장과 건국은 불행했으나 그 이후 걸어온 민주화의 길이 정당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불행하게도 친일파가 세운 나라입니다. 교과서에는 한정된 지면에, 어떤 부분의 이야기를 더 쓸 것이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독립운동을 써야 합니까? 친일파를 써야 합니까?
 뉴라이트 학자들은 세계사적 시각을 중시해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2차대전 이후 제국주의에 협력한 세력이 집권한 나라가 더 많은지, 아니면 독립운동했던 세력이 집권했던 나라가 더 많은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국주의 협력 세력이 집권한 나라는 대한민국과 남베트남, 두 곳밖에 없으며 지금은 대한민국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70~80년대 올드라이트들은 친일을 미화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뉴라이트는 친일과 독재까지 미화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느냐. 그것은 사실 뉴라이트의 역사 인식 때문입니다. 뉴라이트의 대안교과서 필진에는 한국사 전공자가 없습니다. 물론 교과서 집필이나 역사서술을 전공자만이 기술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역사학자가 빠지다보니, 사료의 오독과 역사 왜곡, 그리고 직업윤리(역사학자들은 있는걸 없다고 못하고, 없는 걸 있다고 못 합니다) 부재의 상황이 발생하는 겁니다. 그들은 이승만이 건국의 아버지이고, 박정희가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이승만에게, 박정희에게 아버지가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국가권력에 의한 피해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시절에 어떤 일이 있었고, 경제발전과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낸 역량은 무엇인가, 과거사 진실규명에 의한 성과는 무엇인가, 민주화의 성과는 무엇인가 교과서에 기술해야 할 것입니다.
  뉴라이트는 경제적 발전을 절대화하는데, 민주화와 경제발전은 대립항이 아닙니다. 87년 이후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경제발전도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민주화의 성과로 노조가 생기고, 임금이 오르고, 노동자가 인간대접을 받게 됩니다. 군대의 의문사나, 산업재해가 줄어들엇습니다. 바로 민주화의 성과로 사람의 죽음이 줄어들었습니다. 뉴라이트의 주장과는 다른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의 진짜 문제는 2010년의 교과서 편찬 기준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입니다. 뉴라이트의 주장에 일일이 대응하는 방식보다는, 큰 그림을 그리면서, 우리가 바라보는 현대사를 기술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사 진실규명과 관련된 성과, 민주화의 성과를 제대로 알려 큰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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