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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에서 매디슨까지 : 늙은 두더지가 초봄에 고개를 내밀다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1/07/24 17:39
  • 수정일
    2011/07/24 17:39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카이로에서 매디슨까지:  늙은 두더지가 초봄에 고개를 내밀다

로렌 골드너

 

 

 

『반란자 노트』(Insurgent Notes)는 첫 호가 나온 지 아홉 달이 지난 지금 두나라(튀니지, 이집트)에서 정권이 무너지고 세 번째 나라(리비아)가 위험 지경에 빠져 있고, 알제리와 예멘, 바레인에서 대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실에서 용기를 얻는다.

 

볼리비아에서는 추가 내핍 조치에 대한 반응으로2월 총파업이 일어나 에보 모랄레스의‘21세기 사회주의’ 신화를 끝장내버렸다. 프랑스에서는 작년 가을 노조 외부의 직종 간 위원회들이 사르코지의 공공부문 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대중 운동에 참여하는 모습을 드러냈고 영국에서는12월에 노동계급 청년들이 데이비드 캐머런의 대규모 예산 삭감에 저항하는 폭동을 이끌었다. 우리가 『반란자 노트』1호에 실린 「우리를 만들어낸 역사적 순간」이라는 글에 ‘1789-1848-1870-1905-1917-1968-20??’이라는 부제를 달았을 때, 우리의 조심스런 역사적 낙관주의조차도 그 순서에서2011년이 다음 해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언하게 해주진 않았다. 우리는 이런 사태 전개에 대해 영향력을 주장할 정도로 경솔하지는 않다. 우리는 그저 일어나는 폭풍의 바람을 일찍 느꼈을 뿐이고 그 일부가 될 것을 염원했고 또 염원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반란자 노트』3호의 발간을 준비하고 있는 지금 세계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 전염병이 자본주의 미국의 심장부 위스콘신 매디슨에서40년 만에 미국 노동계급의 최대 결집을 통해 확장되고 있다.

 

중단기 미래에 무슨 다른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최근의 사태는 한 쪽 즉 자본가 계급만 투쟁해온 지난40년간의 계급전쟁(무엇보다 미국에서의)은 끝이 났음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체제를 보호하고 재생산하는 제도들이 타도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매일 펼쳐지는 현실에 뒤떨어지지 않으려 그런 제도들이 이제는 애를 많이 써야만 하게 되었다고는 해도 말이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지금 “관리 정부들”, 정치인들, 정당들, 노조들이 대중운동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을 좀 더 온건한 물길로 이끌고 가려는 사회협약 개혁을 분장하느라 초과 근무 중이다.

 

그렇다면 위스콘신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세력들의 균형을 살펴보자. 1945년 이후 미국에 도입된 케인스주의적 시혜를 갉아먹어온40년 동안의 무지막지한 선전전이 현재의 순간을 준비해왔다. 이 순간 자본은 자신이 오래 진행해온 소모전을 한 판 승부로 전환시키려고 하고 있다.

 

지배 세력들이2011년을 미국의 주 단위 및 지방 단위 공공부문 노조를 상대로 결판의 해로 지정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별로 없다. 이들 세력은 분명 위스콘신을 전국적 시험케이스로 만들어 이를 다른 곳에서도 최대한 빨리 반복하려고 한다. 이들 세력은 악명 높은 코치 형제 따위의 부추김과 재정 지원을 받아 자신들이 추구하는 거리낌 없는 “자유시장식”먹이 경쟁에 대한 마지막 장애물에 케이오 펀치를 날리기 위해 오바마의 “사회주의” 정책들(특히 보험회사들이 써준 보건의료 “개혁”)에 맞서 작년에 강경우파(티파티 등)가 거둔 성공의 여세를 활용하고 있다. 그들은 반대편의 지명 대변인들(민주당 의원, 노조간부)이 이미 다양한 예산 삭감을 통한 “고통 분담’에 동의하겠다고 꼬리를 내린 후에도 공공부문의 집단교섭을 철폐하려는 계획을 세워 이것을 주정부로부터는 공공서비스 일체를 마음대로 없애버리도록 하게 해주고 민주당으로부터는 공공부문 노조라는 그들의 주요 재정 원천을 없애버리게 해줄 원투 펀치로 여기는 것이다.

 

미국의 소득 불평등이1929년 이전의 수준에 이른 것은 물론이고 그 수준을 넘어선 지난40년 동안(공공의 구유 안에 주둥이를 더 깊숙이 집어넣으려고 당연히 나름의 국가권력 사용을 위해 자신들의 의제를 판촉하고 있는) “자유시장” 신봉자들은 모든 차원의 시스템을 통제하는 미국의 가장 부유한 자들로서 “엘리트” “특수 이익집단들”을 상대로 이들이 공공의 재산을 탈취한다며 악마로 만드는 데 꽤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수 이익집단들”은 때에 따라 흑인, 라틴계, 여성, 게이를 포함하곤 했지만 어떤 “특수 이익집단”도 조직 노동운동의 잔여세력만큼 우익의 앙심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한 예로 약간의 성공을 거둔1996년UPS 파업을 놓고 보여준 월스트리트지의 발작적 반응을 상기해 보라). 그 사이에 노동운동은1955년 정점에 달했을 때 보유한 노동인구35%에서 오늘날의12%로 하락했고 사적 부문에서는 겨우8%뿐인 상태다. 이런 하락은 아웃소싱, 임시고용, 자본집약적 발전의 결합으로 인해 무엇보다도 월급이 좋고 안정적이며 노조가 결성된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으로서, 공공부문과 사적 부문 간의 노동 조건에서 격차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한 요인이다. 우익의 포퓰리즘적 분노에 대한 지지를 끌어 모으려는 오늘날의 선전은 수백만의 다른 노동자들이 너무 오랫동안 열악한 상태에 있다는 것만 이유로 들이대면서 반면에 오늘 공공부문 종사자들 전체는 “특권층”으로 보인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사적 공적 부문 가릴 것 없이 노조들이 지독한 편협성에 사로잡힌 지난40년 동안 이런 현실을 다루려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렇게 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할 것이다.)

 

“특수 이익들”에 대한 이 끝나지 않는 노랫가락과 연계되어 있는 것이 침체되고 나태한 국가 및 “큰 정부”를 놓고 부르는 비슷한 조의 노래다. 마치 이들 특수 이익의 미개한 영혼들이1930년대 불황기에 자본주의를 절벽에서 구한 것이 “큰 정부”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반란자 노트』에 있는 우리는 전적으로 다른 시각에서 자본주의 국가란 쓸모가 없다고 보지만, 똑 같은 현실 왜곡을 우익의 선전에서도 본다.

 

그들은1960년대 이래 아시아(일본, 남한, 대만, 그리고 오늘날의 중국)의 경제 성장에서 행한 국가의 역할이나 미국 자본주의 자체의(해밀턴 식) 국가-보호주의적 기원들(독일을 경유했지만 아시아인들은 이로부터 경제성장의 아이디어를 얻었다)은 말할 것도 없고, 맨해튼 프로젝트나 테네시 강 유역 개발과 같은 국가주의적인 프로젝트를 무시해버린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물을 흐리게 만들려는 실제 목표는 물론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는 사회보장제도와 노인의료보험과 같은 “수혜들”이다. “자유시장” 신봉자들은 기생충 같은HMO(건강유지기구, Health Maintenance Organization)가 건강 비용을 증가시켜 더 많은 재정 적자를 일으키는 주된 원인이라는 사실은 절대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2008년 이후 은행에 퍼부은 수조 달러 금융구제와 그로 인해 헤지 펀드 및 증권 패거리에게 계속 주고 있는 보너스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런 부채 때문에 발생하는(완벽하게 보호를 받는 투자자들에게 돌아가는) 원리금 상환이나(더 최근에)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에 퍼부은 수조 달러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 엄청난 부조의 수혜자들은 물론 “지대 추구자”가 아니다. 하지만 우익이 보면 연1만9천 달러를 받고 은퇴하는 주정부 공무원, 탈-산업화로 슬럼에 버려져 장애수당이나 사회보장제도, 노인의료보험으로 생존하고 있는 궁핍한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회색 양복을 입은 수백의 머저리 박사들이 미국기업연구소, 카토연구소, 혹은 피터피터슨연구소에서 나날을 보내며 이런 현실왜곡을 영구화하기  위해 통계와 선전을 가동시킨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은 괴롭힘을 당하는 “납세자”를 위함이라고 논변되(고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소득에서 누구보다도 더 낮은 퍼센티지의 세금을 내는 계급에 의해 재정 지원을 받)고 있다. 마치 “납세자” 대부분이(통상) 공적 교육, 교통, 보건의료, 주택과 그 외의 다양한 서비스로부터 도움을 받는 보통의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끝으로 주류의 “자유시장” 선전은1970년 경 이후로 “큰 정부”와 그런 정부의 대규모 적자(대부분 재무성 채권의 외국보유자들에 의해 재정이 조달된)가 없었으면 오래 전에 자신들의 체제가 붕괴했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침묵한다. “작은 정부” 프로그램과 밀턴 프리드먼 및 그의 동류가 주창한 균형예산 프로그램(예컨대110개국에 있는 미국의 군사 및 첩보 작전 비용을 누가 지불할 것인가?)을 실제로 시행할 경우1970-2008년의 “은폐된 불황”은 즉각 양과 범위 면에서1929년 이후의 침체를 질적으로 능가하는 것으로 변할 것이다.

 

미국 사회의 주요 부문에서 이데올로기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결과적으로 거의 아무런 의심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자명한 진리로 통하게 된 유행어들(큰 정부, 고통 받는 납세자, “엘리트” 특수 이익집단들, 수혜들, 지대 추구자, 급증하는 의료비용 등)을 사용하며 우파가 위스콘신의 계급전쟁을 확대시키는 무대를 마련하는 수단으로 작용한 지난40년간의 선전전에 대해서는 충분하게 말한 셈이다. 『반란자 노트』를 읽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은 대부분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알 것이다. 우파의 선전전은 실제 전쟁의 일부로서 대부분 케인스주의적/사민주의적 전제들에 최면이 걸린 바람에 오래 전에 시작된 생산과 재생산 부문의 실질적 위기를 보지 못하고 따라서 우파의 이데올로기적 융단 폭격이 깔아 놓은 거짓말 안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던 “좌파”의 이데올로기적 무장해제에 의해 부추겨진 측면이 매우 크다.

 

우리의 관심사는 물론 우파 및 강경 우파에 대한 다들 잘 아는 비판을 통해 손쉽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매디슨에서 일어나는 대치 국면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좌파의 강점과 약점을 평가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좌파의 몇몇 약점들이 우파가 펼쳐놓은 이데올로기적인 안개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1970년대 초 이후로 보지 못했던 규모로, 그리고 같은 지역(미네소타의 오스틴)의1985-1986년 호멜푸즈사의 파업, 1993-1996년에 일리노이 데카투어에서 일어난 더 오래 간 “세 파업”처럼 주목할 만하지만 고립되어 실패한 투쟁들을 훨씬 능가하는 대중 동원력을 지닌 계급투쟁이 미국 중심부에 귀환한 사실에 대해 기쁨을 표시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1). 2월 중순 이후 위스콘신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의 규모는1970년대나1990년대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오늘 미국 및 세계 자본주의가 직면한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동일한 위기의 확장이자 심화이지만 여기서는 상론할 수 없다.)

 

“사실들”―물론 널리 알려진 바이지만―에 대한 간단한 요약이 역시 필요할 것이다. 2010년11월 선거에서 말도 되지 않는 우익의 포퓰리즘적 반동 물결(특히 크게 울렸던 구호 하나가“큰 정부는 내 의료보장에서 손을 떼라!”였다)을 타고 스코트 워커와 공화당은 “일자리 창출”을 중심으로 한 프로그램으로 위스콘신 입법부의 양원을 장악했다. 그들은 권력의 품에 안기자마자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 한 페이지를 빌려 말하면, 부자들과 기업에게는 대규모 감세를 해준 다음 바로 그런 감세로 인해 악화된 주정부 적자를 들먹이며 온갖 유형의 사회서비스에 삭감을 시도한 것은 물론이고 최소한의 공공감시도 없이 주정부가 멋대로 민영화할 수 있도록 하고, 게다가 덧난 데 긁는 식으로 공공부문 종사자의 집단교섭권을 박탈하는 법안을 밀어붙이려고 했다. (이 법안은 위스콘신 상원 민주당 의원14명이 공화당 다수파에 의한 법안 통과에 필요한 정족수 충족을 막으려고 주를 벗어나버려 바로 통과되지는 못했다. 문제의 법안은 추가적인 사법적 책략에 의해 민주당 의원들이 부재한 가운데 결국3월10일에 통과되었다. 워커와 그의 앞잡이들은 비밀과 충격의 방법으로 전리품을 챙기려고 했으나(우리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계속되는 주 의사당 점거, 혹한의 날씨 속에7만에서10만 명 사이의 규모로 반복되는 대중 집회(지금까지로 보면3월12일에 절정에 달한), 그리고50개 주에서의 지지 집회로 이어진, 주 전체는 물론이고 인근 지역, 그리고 결국에는 전국적으로 전개된 대중 동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법안 추진에 대한 반응으로 위스콘신 전역의 학교들이 휴교하도록 만든 파상 파업의 형태로 운동이 거의 즉각 전개되었다.) 이런 규모의 시위는40년 전 월남전 이후로는 매디슨에서 목격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1960년대 말, 1970년대 초의 운동에 대해서는 냉담하지 않으면 노골적으로 적대적이었던 조직 노동운동이 지금의 대중 결집에서는 훨씬 더 광범위하게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당시와의 거리를 가늠할 수 있다. 이번에는 진짜 게임인 것이다.

 

양측의 모두가 이번에는 진짜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코치 형제들과(같은 전술을 다른 곳에서, 지금 당장은 오하이오와 인디애나에서 시도할 목적으로) 어떤 사태든 면밀하게 모니터하는 공화당 중앙 지휘부가 위스콘신을 특별히 선호하는 시운전 지역으로 선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 측에는, 즉 워커와 그의 무리보다 더 오래 버티려는 생각으로 매일 매일 시위를 하고 점거를 하는 대중들의 끈질김 속에는 “타흐리르 광장”의 분위기가 역력하다. 물론 위스콘신과 미국은 튀니지도 이집트도 아니다. 결정적 순간이 왔을 때 아무런 대중적인 기반이 없기 때문에 바로 비틀거리는 저 노인정치의 독재와는 달리 이곳 미국은 아직도 워커가 하려는 짓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처음 기회가 오면 그것을 흉내 내고 싶어 하는 우익 포퓰리즘이 상승 국면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우파로 하여금 과거 자신이 강압적으로 밀어붙인 똑 같은 사적 부문 노동자들에게 선동을 통해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다른 모든 사람들을 감축한 것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선진적인”(주로 노화에서만 선진적이지만)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장 퇴행적인 세금구조로 인해(무엇보다도) 조세기반의 침식이 일어남으로써 “지속 불가능”하게 된 다양한 혜택, 건강보험, 그리고 이른바 롤스로이스식 연금을 가지고 있고, “경쟁”과 “시장의 힘”에 무풍지대인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소위 특권적 종신 직장을 거론하면서 말이다. 다른 주에서는 이와 똑 같은 공격들이 자신들의2010년 선거에 돈을 대 준 바로 그 노조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제리 브라운(캘리포니아)이나 앤드류 쿠오모(뉴욕)와 같은 민주당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주류 언론은 주와 지역의 연금 펀드가2008년 주가폭락에서AAA 등급 정크본드에서 일어난 대규모 손실로 인해 곤란에 처했다는 점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월스트리트 발 “독성 자산”은 미국정부의 긴급 융자를 통해100% 상환이 이루어졌고, 그 독성은 각 주와 지자체에 전가되어 그 유명한 “납세자”―평범한 일하는 사람들―는 이제 세금은 더 많이 내면서 연금은 더 적게 받지 않으면 심지어 아예 받을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위스콘신의 결집에 절대적 지지를 표하면서 우리는 이번 운동이 다가올 몇 달 동안 분명 전국적 사안으로 떠오를 국면에서 첫 번째 대결이며 매우 초기적인 단계에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운동의 초점이 된 수도 매디슨은 캠브리지(매사추세츠), 앤아버(미시건), 버클리(캘리포니아)처럼60년대의 잔광(비록 축소는 되었지만) 일부가 아직도 어른거리는 자유주의 대학 도시다. (60년대에 거기서 살았던 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거기에 있고 이번에도 거리에 나왔다.) 그 곳은 미네소타, 노스다코타에서처럼, 북유럽(스칸디나비아와 독일)의 사민주의와 미국 본토박이 초원 포퓰리즘이 오늘날은 그 전통이 희석되기는 했지만 주로 로버트 라 폴레트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정치문화를 깊숙이 물들이고 있는 북부 중서부 주의 수도다. 주말의 대규모 시위에 모인 군중들 가운데 일부는 미국국기를 흔들었고 심지어는 국가가 아니면<신이여 아메리카를 축복하소서>를 부르기도 했다.

 

이것은 우리 스타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1912년 위대한 매사추세츠 로웰 파업에서처럼) IWW(세계산업노동자동맹)도 때로는 자본가들과 그들의 국가로부터 그와 같은 상징성을 빼앗아 오려고 같은 행동을 한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시위자 가운 많은 사람들 아니 아마도 대부분이 지금은 환멸을 느끼는 오바마 지지자들이고 그중 일부는 오바마가 자신들의 운동을 분명하게 지지하러 나오길 여전히 바라고 있을 것(신이 그들을 돕기를)이라고 추측한다. (회원1만1천 명의) 위스콘신 경찰협회도(미국 지방정부공무원노조의 조합원들인) 간수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운동을 지지했으며, 시위대와 경찰의 느긋하고 심지어는 명랑한 관계는 초기 단계에 있는 이 운동의 또 다른 표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뉴욕경찰과 엘에이경찰이 비슷한 여건의 흑인 및 라틴계 젊은이들에 의한 공공건물 점유를 다루며, 앞으로 그렇게 되겠지만 비슷한 예산 삭감이 일어날 때 그렇게 느긋한 모습을 보일지 상상할 수가 없다. “중산층” 삶의 방식 옹호에 대한 널리 유포된 이야기 역시 극복되어야 할 미국의 이데올로기적 혼란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경찰들과 간수들 다수는 이전의 블루컬러 노동자가 아니면 한 번도 노동계급이 되어본 적이 없는 잠재적 노동자들이다. 제이 굴드는 오래 전에 자신이 노동계급의 절반을 다른 절반을 죽이기 위해 고용할 수 있다는 유명한 말을 했는데, 최근 몇 십 년 간 미국 자본주의는 이 전술을 노동계급의 일부를 또 다른 일부의 투옥을 위해 고용하는 것으로 바꿨다.)

 

우리는 또한 적어도 매디슨 자체에서는(온라인의 사진과 비디오로 판단컨대) 일견 압도적으로 백인 중심으로 운동이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로서는 근처 시카고는 말할 것도 없고 근처 밀워키의 상당한 흑인들이 자신들이 결합하기로 한 모든 운동에 경찰과 간수들이 있는 사실을 좋게 받아들일지도 의문이다. (위스콘신은 백인에 비해 흑인을 감옥에 보내는 비율로 치자면 전체 주들 가운데 최고이거나 그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나 있다. 매디슨이 소재하는 데인 카운티의 경우25세에서29세 사이의 흑인 중 거의 절반이 투옥되어 있거나 법원 명령에 따른 감시를 받고 있다. 그 곳의 흑인 남성은 백인 남성보다 투옥될 확률이21배나 더 높다.) 위스콘신 운동은 지금까지 합법과 비합법을 가르는 선을 아슬아슬하게 걸어왔다. (이번 운동은 의사당 건물을 점거하다가 결국은 경찰 요구에 의해 그곳에서 철수했으며, 교사 농성의 경우 학생들의 수업거부라는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와일드캣 파업[노조 일부가 불법으로 벌이는―역자]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운동이나 다른 곳의 유사한 운동들이 비합법의 선을 넘어 모든 것을 폐쇄해야 할 때 법 집행 요원들은 경찰이나 간수로서의 역할을 그만 두어야 하거나 아니면 명령에 따라 운동에 등을 돌려야 할 것이다.

 

글 초두에서 우리는 현상을 유지하고 쇄신해야 하는 제도들의 핵심 역할을 언급한 바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제도란 물론 노조와 민주당으로서 이들은 워커가 집단교섭권 철폐까지 가지만 않는다면 그가 추진하는 예산 삭감안에 자포자기식으로 서명하고 싶어 한다. 제시 잭슨과 리치 트럼카―지난 수십 년간 이들은 얼마나 많은 지는 운동에 죽음의 키스를 했던가―가 군중을 선동코자 날아 들어왔다. 마이클 무어도 자본주의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미국 헌법만 환기시킨 터무니없는 포퓰리즘적 연설을 하기 위해3월5일에 날아 들어왔다. 일리노이 주에 가서 숨어있던 민주당 정치인들은 워커가 자신들로 하여금 위스콘신으로 돌아가서 승리를 선언할 수 있도록 해줄 선물을 던져줄 것을 기대하며 주 상원의 “합리적” 공화당 의원들과 매일 접촉했던 것이 분명하다. 랜디 웨인가르텐 미국교원노조 의장도 하루 날아 들어와서 운동세력은 제안된 모든 삭감 안에 양보할 것을 충고하고는 다시 날아 나갔다.

 

정식 임명을 받은 현 체제 좌익 후견인들이 보여 준 이와 같은 쇼와는 달리 법안 내용이 알려지자 거의 바로(고등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수업 거부를 기폭제로 이번 운동을 시작한 결집된 일반 대중은 비겁하고 닳아빠진 환상을 공유하지 않았다. 임금과 수혜 부분에서는 다수가 양보하려는 것 같았지만 직장에서 못살게 구는 감독관들로부터의 최소한의 보호를 의미하는 필요불가결한 집단 교섭권을 놓고서는, 그리고 아무런 절차 없이 즉석에서 해고당하지 않고서도 그런 감독관들에게 엿 먹어라 하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놓고서는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많이 양보하는 것은 우리가 보기엔 최선의 전략이 아니지만 우리는 직장에서 하루하루 노조원 자격이 제공하는 보호막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분명히 지지한다.

 

우리는 위스콘신의 운동이 워커의 법안을 저지할 수 있기를 진정 바란다. 그러나 이기든 지든 그것이 출범시킨 전국적 운동은 이번 운동이 규모가 더 커지긴 했어도 여전히 미국 노동자계급이1970년대 초 이후 싸우다 대부분 패배한 것과 같은 종류의 방어투쟁임을 알 필요가 있다. 어떤 지점에서건 이들 방어투쟁은 공세로 나가야만 한다.

 

이들 투쟁에 참여하는 사람들, 앞으로 결합하게 될 사람들은 우리가 처한 상황이 미봉책을 쓸 여지는 전혀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자본주의의 세계적 위기는 탐욕스럽고 무자비한 월스트리트 은행가들이나 코치 형제의 음모, 부자를 위한 감세, 또는 예산 균형에 급급한 별 볼 일 없는 지역 정치인들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것들은40년 전에 시작한 자본축적의 위기가 여러 방식으로 깊어지고 있다는 징후들이다. 이제 앞으로(그리고 이미 오랫동안) 자본가들로부터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권력을 빼앗아오는 길목에서 다시 말해 사회적 혁명 과정에서 임시적 승리만 가능할 수도 있다. 위스콘신의 운동은 스코트 워커를 소환하고, 이전의 현상을 회복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그 이전 현상이라는 것은(어느 정도) 보호막이 있던 과거의 공공부문에서 결국 가혹한 희생만 요구하는, 노동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장기 착취체제였다. 이젠 돌아갈 길이 없다.

 

미국의 공공부문 고용인들만큼이나 규모가 큰 개인 부문들은 지난40년에 걸쳐 착취당해 온 모든 사람들을 찾아가야 한다. 이름값을 하는 노동계급운동이라면 모두가 가장 억압받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 오늘 이들은 현재 실업상태로 점점 무주택 상태로 내몰리고 있는 미국 인구의15-20%, 임시직 노동자들, 합법 및 비합법으로 시달림 받는 이주 노동자들, 수백만의 주변부 백인 흑인 라틴계 젊은이들, 그리고 투옥중인3백만의 사람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터져 나오는 모든 투쟁이 그런 사람들을 모두 즉각 끌어들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보편적 손 내밀기―우리가 “대자적 계급” 방향 설정이라 부를 수 있는 것―가 필요조건이라고 이해되는 “분위기”가 좀 덜 극단적인 상황에서1960년대 몇 년 동안 존재했던 것과 같은 분위기처럼 조성되어야 한다.

 

개량주의는 오늘 가능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바꾸지 않고서는―즉 사회적 혁명 없이는―어떤 것도 더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을 아직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결국 그런 인식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선 민주당과 노조 관료들, 그리고 “부자들”에 대한 공허한 포퓰리즘적 수사학의 쇄신을 일로 삼고 있는 제시 잭슨 따위, 리치 트럼카 따위, 마이클 무어 따위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런 인물들이 상황이 요구하는 만큼만 좌파에게 더 다가가서 말할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위스콘신 운동의 대부분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런 인물들은 급속하게 양분되는 상황에서 궁극의 문제는 권력과 통제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1934년 미네아폴리스 총파업 와중에 그곳 민주당 의원이 스스로 혁명적 사회주의자임을 천명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중동에서 위스콘신, 오하이오, 인디애나에 이르기까지 다가올 몇 달이 결정적일 것임은 틀림이 없다.2)

 

 

 

 1) 역자주: “세 파업”이란1990년대 초중반 일리노이 데카투어 소재 거대기업들인 캐터필러사(Caterpillar), 스태일리사(Staley), 브릿지스톤/파이어스톤사(Bridgestone/Firestone)에서 각각 일어난 파업을 가리킨다.

 

 2) 편집자 주: 필자인 로렌 골드너에게 위스콘신 사태에 대한 미국 노동자계급과 주류 언론의 반응에 대해 조금더 알려줄 것을 요청하자 다음의 내용을 이메일로 보내왔다.

 

솔직히 미국 노동자계급 전체가 이번 집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지난40년에 걸쳐 위축되어온 노동자들 다수는 이번 운동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진 않은 것 같습니다(적어도 위스콘신에서는요). 자신들과 비교하면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특권적”이라는 선전에 넘어간 때문이지요. 그들의 태도는 “왜 그들도 당해선 안 돼?”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늘 문제가 많은 매체 보도에 바탕을 두고 멀리서 내리는 판단이기도 합니다.

 

주류 언론의 보도 자체를 보면 “보수적” 매체들(예: 폭스 뉴스 등)은 물론(늘 그렇듯) 연10만 달러 연금을 갖고 은퇴하는 일부 주 관료나 다른 비슷한 “스캔들”에 관한 선정적인 이야기로 “특권적” 공공부문 노동자에 대한 보도를 하면서, 자신의 의제를 관철시키려는 스코트 워커 지사의 시도를 지지했습니다. 미국 공공부문 종사자의 평균 연금액수는 실제로는 연1만9천 달러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내 글이 지적하고 있듯이 보수 매체가 호소하는 대상은 “납세자” 즉 노동계급과는 뭔가 다르다고 하는 익명의 집단입니다(미국에서는 부자들이 누구보다도 세금을 적게 냅니다).

 

“자유주의” 매체―미국에 자유주의 주류 매체(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가 얼마라도 남아 있다면―는“우파”처럼 그렇게 악랄한 보도를 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주와 시가 직면한 예산 위기에 초점을 맞추었고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불어나는 연금이 문제의 주요 원인이라는 막연한 견해를 따르는 편이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주와 시의 채권을 구매한 공채보유자들의 전액 보상 요구와 다른 자본가들의 이해관계가 문제의 한 근원이라는 점은 대체로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주나 시의 파산이 일어나면 이들이 가장 소리 높여100% 보상을 부르짖을 텐데, 법적으로도 이들이 상환을 받는 “첫 번째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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