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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사랑의 급진성...

  • 「사랑의 급진성」을 읽고서...

     

     

     성? 사랑의 무엇이 어떻게 급진적이란 말인가? 얼핏 자유주의적 연애관이 떠오르기도 한다. 차가운 친밀성 시대에 만남은 종종 미리 설정된 프로그램(단순한 섹스 파트너 찾는 만남)에 따라 이뤄진다. 이렇듯 섹스 파트너 시대에 사람들은 단지 섹스하는 육체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회적 현실에서 사랑이 혁명적이라고 생각하기는 더더욱 쉽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사랑의 급진성이 아닌, 사랑 없는 섹스이며 결코 급진적이지 않은 사랑의 비급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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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레츠코 호로바트(저자)는 몇 가지 전제를 제시하며 사랑은 급진적이고 혁명적이라고 주장한다. 즉, 사랑이냐 혁명이냐가 아니라 사랑과 혁명의 관계에서만 사랑의 급진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든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넘어서 사회, 정치혁명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과연 사랑은 급진적일 수 있을까? 사랑은 사람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등등

     

     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성생활 및 관련 제도를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사유재산제도와 계급이 발생하기 전에는 무리 단위로 생활을 하며 군혼을 하였다. 이 사회에서는 성 억압과 성 불평등이 없는 모계혈통 중심이었다. 지금처럼 사랑에 대한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이 없는 사회였다. 그 결과는 반사회적 성폭력, 성행동이 아니라 무리의 유대 강화와 생존으로 이어졌다.

     

    - 사랑과 섹스

     

     계급의 발생과 사유재산제도의 등장은 필연적으로 형식적이고 강제적인 일부일처제와 가부장적 가족 탄생을 낳았다. 형식적 일부일처제는 혼전 순결 등의 성도덕과 성 억압, 성차별을 권위와 가부장적 권력을 통해 강제하였다. 그 결과 여러 가지 문제가 파생되었다. 특히, 빌헬름 라이히는 이러한 성 억압을 통해 복종적이고 순종적인 인간이 재생산된다고 주장한다.

     

     라이히1)는 (남성의 경우) 발기/사정 능력은 단지 오르가즘 능력의 전제조건일 뿐이며 성기 장애가 신경증의 가장 중요한 증상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보완하였다. 사랑 없는 섹스는 오르가즘 능력이 없으며 당연히 신경증을 해소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즉, 혁명과 사랑의 이분법뿐만 아니라 사랑과 섹스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부정한다.

     

     그래서 충동의 만족을 통한 오르가즘에 이르는 길이 라이히가 생각하는 성해방의 방식이다. 하지만 성해방으로 나아가는 데는 개인 내적인 장애물과 사회적인 장애물이 있다. 라이히는 사회적 장애와 관련하여 성정치, 성혁명을 통한 성해방을 강조했다. 라이히에게서 성혁명은 정치혁명과 함께이며 다른 개념이 아니었다.

     

     성혁명과 정치혁명이 다른 개념이 아닌 근거는 신경증을 극복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과 충동의 삼중 구조이다. 신경증 증상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모습은 성 억압이 존재하는 사회의 성격 구조가 아닌 단순하고 자명하고 온당한 성격을 보인다. 이에 따라 충동의 삼중 구조를 제시하였다. 자연스러운 일차적 충동(생물학적 충동), 반사회적 이차적 충동(생물학적 충동이 억압되어서 왜곡되어 나타난 반사회적 충동), 표면적 충동이다. 이를 통해 더는 충동을 억압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회에 의한 왜곡을 풀어주어 자연스러운 충동이 펼쳐져 나가게 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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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정치, 파시즘의 대중심리 : 빌헬름 라이히>

     

    - 욕망, 다시 사랑의 급진성

     

     라이히의 작업은 사랑의 쟁취는 자본주의 사회의 억압을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욕망은 비사회적이고 금기시되어야만 하는 무엇이 아니다. 사랑의 급진성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욕망은 전체주의뿐만 아니라 서구의 자유방임주의부터 이슬람근본주의까지 적대시하고 있다. 왜? 욕망은 본질에서 혁명적이고 기존 사회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즉, 욕망은 현 사회체제에 위협적이고 전복적이기 때문에 금지해야 한다.

     

     계급사회에서 욕망 역시 철저하게 계급화되어있다. (서구사회도 마찬가지이지만)이슬람근본주의 사회의 사례를 통해 피지배계급의 욕망은 철저하게 억압당하지만, 지배계급에는 관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흥 부유층의 경우에는 상품 물신숭배와 욕망의 상품화에 따라 개인적 자유에 대한 제한에 반대하기보다는 소비의 자유를 통해 체제 위선적인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한다.

     

     1917년 10월 혁명은 욕망의 폭발이고 초반부에는 성혁명에서도 큰 변화가 생겼다. - 법적으로 열등한 여성의 지위 폐지, 이혼/ 낙태 허가, 여성들이 결혼한 후에도 재산과 수입에 대한 전적인 통제권을 가지는 것을 허용했다. 그런데 1934년에는 동성애 반대법 통과, 낙태 금지 등등으로 후퇴하였다.

     

     구소련에서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경직된 속류 맑스주의자들의) 주된 불만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개인의 사회 기여를 막는다는 것이다. 레닌에게서도 성적인 문제가 지나치게 널리 퍼지면 사람들이 혁명을 위해 애쓰는 대신 기분 좋은 것들을 말하게 될 수도 있으므로 위험한 일로 여겨졌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이네사 아르망은 코뮤니스트(공산주의) 혁명은 성/사랑 혁명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많은 혁명가는 혁명을 먼저 이루어야 사랑의 문제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10월 혁명 직후 진보적 성해방 조치가 1930년대 접어들면서 퇴보한 상황 및 1960 -70년대 독일 등지에서의 코뮌에서 성해방 실험의 실패로 저자는 사랑과 성의 이분법적 사고를 원인으로 주목했다. 하지만 사랑의 급진성의 주제인 ‘사랑과 혁명’ 모두에 어떻게 헌신해야 하는지 등의 구체적 분석과 방법을 제시하지 않은 한계도 있다. 그런데도 사랑의 급진성은 혁명의 급진성에서 발견되고 혁명의 급진성은 진정한 사랑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저자는 사랑에 빠져 사회와 혁명에 무관심한 경우와 정치혁명이 우선이며 그 이후에 성혁명을 하자라는 주장에 모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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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인생의 원천은 사랑과 노동과 지식이다.

    인생은 그 세 가지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

    - 빌헬름 라이히

     

    - 사랑의 급진성, 오늘날의 의미

     

     노동해방 없이 성해방, 여성해방은 요원할 뿐이다. 왜냐하면, 성적 불평등과 성 억압은 어느 날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계급 발생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평등, 성해방을 포함하는 성혁명은 계급타파로 가기 위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따로 일수가 없다. 이에 성적 자유와 성평등은 남녀 사이만의 문제가 결코 아니며 계급 타파와 인간해방의 주제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이슈인 미투는 남녀 사이 문제에서 더 나아가 권력 문제로까지 제기되었다. 하지만 좀 더 본질을 보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일반적 성억압(혼전 순결, 낙태 금지, 부르주아 도덕 교육, 종교 교리 등등)과 그 파생적 결과로 성적으로 파편화된 지배계급의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도덕과 혼전 순결, 낙태 금지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폭로해야 한다. 그러면서 성적 자유가 무엇인지, 실질적 일부일처제 실현을 위한 사회적 전제조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에 불거진 특정 조직의 내부 민주주의 문제 제기와 더불어 혼전 순결과 낙태 반대를 내부 규정으로 삼아왔던 것이 폭로되었다. 충격을 넘어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부르주아도 내팽개친 부르주아 도덕을 내부 규정으로 무장한 그들은 노동계급의 적일 뿐이다. 

     

     욕망과 도덕은 그 사회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영향을 받는다. 욕망과 도덕은 사회적이며 시대와 계급에 따라 다르다. 대중의 계급의식은 그들의 구체적인 생활과 연계되었다. 대중의 다양한 구체적 관심들을 끌어내고 해결해 가면서 어떻게 커다란 문제와 연결해 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대중에게 향하는 것을 넘어서 대중의 욕망에 귀 기울여 갈 것을 주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자신과도 담을 쌓고 대중과도 담을 쌓고 깃발만 꽂으면 대중이 따라나선다는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찬 이들에게는 허위와 기만부터 버려야 할 것이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조덕연

     

     

    <주>

     

    1)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1887-1957) :

     1897년 갈리시아(폴란드 남부 지방)의 도브르치니카에서 태어났다. 1918년 비엔나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했으며, 1920년에 비엔나 정신 분석학 협회에 들어갔다.

     이후 1930년 베를린으로 가서 정신분석상담소와 맑스주의 노동자 대학에서 강의했다. 라이히는 한편으로 코민테른, 오스트리아 맑스주의, 독일 공산당과, 다른 한편으로는 프로이트 학파와 대결한 뒤에 1934년 공산당에서, 그리고 국제 정신 분석 협회에서 추방당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1939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오르곤 에너지'를 발견하였고, 1957년에 죽을 때까지 오르곤 에너지 연구에 몰두하였다. 라이히는 뉴욕주와 메인주에 연구소를 설립했고, 1947년 식품의약 관리부의 조사대상이 되었고, 1954년 법정의 금지명령을 요청하는 고소장이 발부되었다. 라이히는 기초자연 연구에 관해 '피고'로 재판받는 것을 거부했는데, 법정모욕죄로 2년 형을 선고받았다. 1957년 11월 3일 한 연방교도소 안에서 사망했다.

     주요 저작으로는 『강제적 성 도덕의 출현』(1932), 『문화적 투쟁에서의 성』(1936), 『성 혁명』(1966), 『파시즘의 대중 심리』(1933), 『성격 분석』(1933)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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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사회(이행기)의 평등과 차별철폐에 대해

  • 코뮤니스트 사회(이행기)의 평등과 차별철폐에 대해

     

    이번 주말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평등행진'이 있다. 그동안 이 사회는 인권과 기본권에서 형식적으로도 평등은커녕 철저하게 소수자를 배제하고 혐오세력을 양성해왔기에, 너무나 당연한 권리를 위해 사람들이 '평등'이라는 거창한 구호를 들고 나서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행진을 지지하고 참여하면서, 실질적 평등과 차별철폐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할 것이다.

    이 글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미래의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근본적인 문제의식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기에 '혁명'을 이야기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기본전제

     

    자본주의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전 세계에 걸쳐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해야 하는데, 그것은 전 세계에 걸쳐 자본주의 국가기구들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코뮤니스트 사회는 새로운 노동자권력의 계급적인 목적을 정치적으로 공공연하게 선언하는 체제이며, 경제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착취계급의 소유권을 몰수하고 사회화를 점진적으로 전체 생산으로 넓혀 나가는 사회이다. 노동자권력의 형식은 역사적으로 노동자평의회와 프롤레타리아 총회의 연합으로 나타났다. 노동자평의회는 노동자계급 전체를 망라하여 조직될 것이고, 계급 속에서 선출되고 언제나 소환 가능한 직접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평의회 체제로 중앙화(집중)될 것이다.

     

    코뮤니스트 혁명 과정에서 혁명당은 평의회 내부에서 활동하지만, 노동자계급 전체의 조직인 평의회를 대신할 수 없다. 혁명당은 평의회 안에서 코뮤니스트 강령을 위해 활동하고 투쟁해야 하며, 평의회 체제는 프롤레타리아계급에 대한 혁명당의 명령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동자평의회, 프롤레타리아 총회로 구성된 전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계급만이 정치권력을 가진다.

     

    코뮤니스트 사회는 자유로운 사고를 억압하는 종교와 이데올로기, 낡은 전통과 윤리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다. 계급과 계급 적대가 사라지면 국가는 필요 없게 된다.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국가는 소멸한다. 코뮤니스트 사회는 국가 없는 사회다. 사회의 행정적 업무는 모든 구성원의 협력, 합의, 집단적 의사 결정에 의해 처리될 것이다. 따라서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진정한 이상이 처음으로 실현된다.

     

    코뮤니스트 사회와 기본권(평등, 차별철폐)

     

    그렇다면 코뮤니스트 혁명과 함께 시작될 사회에서는 평등과 차별철폐가 어느 정도 이루어질 것인가? 현재 시점에서 즉각적인 목표로 삼은 코뮤니스트 강령 일부를 소개한다.

    이 강령은 이른바 '사회주의'를 참칭하는 국가(구소련, 중국, 북한, 베트남, 쿠바 등)의 지배계급과 그들을 '노동자국가'라면서 방어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하나,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가장 넓고 평등한 자유와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받는다.

     

    모든 사람은 신체와 정신에 있어 어떠한 침해를 받아서는 안 되며, 사회에서 보편적인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물품을 얻고 생계를 유지할 권리를 갖는다.

    모든 사람은 노동할 권리와 직업 선택의 자유를 갖는다. 사회는 모든 노동자에게 차별 없는 일자리를 보장하고, 노동에 필요한 교육과 평등한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사회에서 이용 가능한 모든 교육 자원을 누릴 권리를 갖는다. 모든 교육기관은 무상교육을 하고, 모든 사람은 평생교육의 권리를 갖는다.

    모든 사람에게 의료와 건강권은 무상으로 제공하며, 거주 장소를 선택할 권리와 주택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하나,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 사상, 신념, 표현, 결사, 집회, 파업에 대한 ‘완전한 자유’를 보장받는다.

     

    반혁명적 정치 활동을 제외한 모든 정당 활동과 노동자 조직, 비정부 조직에서의 정치 활동을 완전히 보장하며,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언론, 집회, 결사, 파업에 대한 완전한 자유를 갖는다.

    모든 사람은 사회에서 모든 영역에 대한 진실을 조사하고 알 권리를 가지며, 사회의 모든 정치·문화·윤리·이데올로기적 측면에 대해 제한 없이 비판할 권리를 갖는다.

     

    하나, 코뮤니스트 사회의 기본원리인 ‘인간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성, 직업, 국적, 종교, 인종, 신념, 지위, 신체조건, 학력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어떤 차별도 없이 정치, 경제, 사회적 권리와 기회를 평등하게 보장한다.

     

    코뮤니스트 혁명과 함께 완전하고 조건 없는 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 사회, 경제의 모든 영역, 모든 노동에서의 성평등을 위한 즉각적인 조치를 한다. 결혼과 가족에 대한 모든 제한을 철폐하며, 법적인 통제 없이 부부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의 요구만으로도 이혼을 보장한다.

     

    하나,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건강하고 안전한 환경을 누릴 권리와 자연과 환경의 파괴를 막을 의무를 동시에 갖는다.

     

    모든 인류가 누릴 건강하고 안전한 환경을 위해 평의회와 기업과 사회구성원들의 활동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감시하고 통제할 권리를 모두가 갖고 실천한다. 자연을 보전하고 환경파괴를 막기 위해 사회는 자원 수탈과 대량소비에 의존한 생활양식의 근본적인 전환을 추진한다.

     

    공약과 강령(형식과 실현)의 차이

     

    부르주아 정치와 선거에서의 공약은 소수 지배계급(정치세력)의 다수 대중에 대한 지키지 못할 약속이거나 명령이지만, 코뮤니스트 강령-프롤레타리아 혁명 강령은 다수 계급이 혁명과 자기 권력을 통해 직접 실현할 목표이자 실천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차별철폐를 위한 법 제정 투쟁은 한계가 있지만, 모든 차별과 혐오에 맞서 투쟁하는 것은 소수자, 사회적 약자, 억압받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생존조건이기에 더욱 확산되어야 하고 근본적인 투쟁이 되어야 한다. ‘국가가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게 만드는 투쟁’은 평등하지 않은 사회가 존재하는 한 지속될 것이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이 될 것이다.

     

    하지만, 국가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실현할 수 없는 목표가 있다면, 형식을 과감히 넘어서야 한다. 평등을 위한 투쟁과 스스로 결정한 직접행동이 ‘공약’이나 ‘국가 의탁’을 넘어 소수자를 포함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자기 권력으로 사회를 직접 통제함으로써 진정한 평등과 차별철폐를 실현할 수 있음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근본적인 평등을 주장하고 행동해야 그곳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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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1&document_srl=336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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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투쟁] 자회사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대안이 될 수 없다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8/10/07 20:47
  • 수정일
    2018/10/07 20:47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 자회사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대안이 될 수 없다

    SKB비정규직지부 농성 현장을 찾아서

    - 임성용

     

     

    1. SK그룹 본사 농성 77일째

     

    지난 9월 14일 저녁, 종각역 6번 출구에 있는 SK그룹 본사 앞에서 희망연대노조 산하 ‘SKB비정규직지부 투쟁 승리를 위한 금요연대문화제’가 열렸다. 77일째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문화일꾼들이 참여해 진행해온 연대문화제다.

    SK브로드밴드(SKB)는 거대 통신사인 SK텔레콤의 자회사로, 인터넷, IPTV, 전화를 설치하고 유지 관리하는 업무를 주로 하고 있다. 전국에 103개 센터를 운영하고 있는데, 각 지역센터는 SK텔레콤과 위, 수탁 계약을 맺은 별도 법인 형태이며 노동자들은 전원 간접고용형태다.

    문화제는 노동조합 정책실장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전남동부센터에서 상경한 조합원의 투쟁발언, 섹소폰 연주, 비보이 춤꾼의 신나는 춤, 시낭송, 노동가수 김성만 씨의 노래가 곁들여졌다. 참석자는 50여명,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요즘 분위기로는 적은 숫자도 아니다.

    부분파업 중인 조합원들이 문화제 때마다 각 지역에서 교대로 단체 상경하고 있었다. 이날 순천에서 버스를 대절해 올라온 조합원은 활달하고 의지가 넘쳤다. 순천센터에는 30명 정도의 조합원이 있고, 순천과 여수 등 도시지역뿐 아니라 인근의 군ㆍ 읍면까지 전남 동부일대의 서비스를 담당한단다.

     

    “노동시간 단축, 안정된 임금 보장도 중요하지만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은 자회사 전환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우리는 비정규직 노조를 만들고 파업을 하면서 애초부터 ‘진짜 사장이 책임질 것을 요구’하고 투쟁을 벌여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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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경 조합원의 말에는 문제의 핵심이 담겨 있다. 여기서 SKB비정규직지부의 역사를 살펴보자.

     

    2. 자회사 만들기 꼼수

     

    SKB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한 것은 4년 전인 2014년 3월 30일이었다. 상부노조로는 ‘희망연대노동조합’에 가입했다.

    ‘희망연대노동조합’은 통신노동자, 콜센터, 물류 등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또한 노조 가입이 힘든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과 서비스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권리보장 사업을 하고 있으며, 지역이나 기업과 관계없이 개인도 가입할 수 있는 초기업노조이다. 노동조합이 지향하는 활동이나 신조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철폐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목표로 한다. 2009년 12월에 창립되었다.

    SKB에 노조가 생기고 각 현장에 지회가 결성되자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노동자들이 센터의 부당한 처우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수당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야간근무, 휴일 근무를 거부하기도 했다. 노조의 교섭 공문을 부착하지 않은 센터들은 조합원들의 거센 항의를 받아야 했다.

    2014년 11월, SKB지부는 다단계 하도급 근절, 고용 보장, 노동시간 단축 등을 요구하며 첫 전면파업에 나섰다. 이 시기에 현장지회장들이 자발적인 모임을 결성하여 즉각적인 파업에 나설 것을 노동조합에 촉구하기도 했다. 현장지회장들의 행동은 조합원들의 압력을 반영한 것이었기에 매우 의미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SK의 태도는 변화가 없었다. 이에 노동조합은 파업 50일 만인 2015년 1월 6일 SK그룹 본사 건물에 대한 점거투쟁에 돌입했다. 이날, 200여 조합원이 종로구 SK그룹 본사에서 점거 농성을 벌이다 전원 경찰에 연행되어 크게 보도가 되었다.

    한 달 후인 2월 6일에는 SKB와 LG유플러스 비정규 노동자 두 명이 장기파업사태 해결을 촉구하며 서울중앙우체국 앞 15미터 높이의 전광판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장연의, 강세웅 두 노동자는 고공농성에 돌입하면서 “원청인 통신대기업들이 사용자로서 책임을 갖고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나설 때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통신노동자들의 광고탑 농성은 80일 동안이나 이어졌다.

    이런 투쟁에 힘입은 희망연대노조는 이듬해 3월 초, 중재인이 참여한 가운데 회사 측과 교섭을 벌인 끝에 그 결과를 전체 조합원 찬반투표에 붙여 통과 시키고, 4월17일 조인식을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시작이었다. 임단협이 체결되었으나 각 현장은 이를 적용하는 문제로 센터 측과 승강이를 벌여야 했고, 센터의 탄압은 노골화되었다.

    게다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요구가 계속되자 SK는 교묘한 수법을 택한다. ‘홈엔서비스’라는 자회사를 만들어서 기존의 비정규직들을 이 회사에 정규직으로 고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는 SKB에 직접 정규직으로 고용하라는 요구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간접고용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 무늬만 정규직인 전형적인 꼼수를 부린 것이다. 현재 투쟁 중인 노동조합의 이름은 ‘SKB 비정규직 지부’인데, 그 사용자 주체가 ‘홈앤서비스’로 바뀌었을 뿐이다.

    회사 측이 노동자의 여망을 자회사를 통한 하청화로 교묘히 왜곡시킴으로서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복수노조가 만들어져 노동조합이 분리되고, 노동자들은 전환과 미전환으로 이간질되었다. 홈엔서비스가 만들어지면서 일부 노동자가 홈엔서비스 쪽 노조에 가입, 사측 입장에 동조해 투쟁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다행히 그 숫자는 훨씬 적어서 SKB비정규직지부는 2017년 8월, 창구단일화 절차를 통해서 교섭대표노조의 지위를 획득한다. 2018년 현재 홈엔서비스 조합원은 760명으로, SKB비정규직지부의 1,600명보다 훨씬 적다. 또한 홈엔서비스 조합원 중에도 200명은 이번 파업에 찬성했고 극히 일부지만 파업에 동참하기도 한다.

    회사가 자회사를 택한 이유는 당연히 직접고용을 회피하기 위함이다. 실제로 노동조건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임금도 변한 게 없고, 오히려 근로환경은 더 악화된다. 자회사는 노동자에 대한 통제를 쉽게 하는 수단임이 입증되었을 뿐이다.

    결국 올해 2018년 6월 29일, SKB비정규직지부는 다시 파업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3. 파업의 의미와 문재인 정부

     

    SKB비정규직지부 파업의 의의는 정치적으로도 크다.

    공공부분을 비롯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사항이었다. 그러나 일부 공공부문에서 무기계약직 전환을 했을뿐,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이었다. 오히려 여러 공기업들의 정규직을 가장한 기만적인 자회사 꼼수는 더 심했다.

    민간부문의 비정규직 문제도 다를 바 없는 문제였다. 문재인 정부는 재벌 중에서 특히 현대, SK와 손발을 맞춰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정책을 발표하자 민간 기업에서는 최초로 SK가 비정규직 직고용을 발표했다.

    문제는 그 직고용이라는 것이 한낱 자회사 설립이었다. SK 투쟁에서 보듯이,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정책은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실상 ‘정규직화 제로’이다. 따라서 SKB비정규직지부의 파업은 문재인 정부를 정조준하는 셈이다.

    이번에 쌍용자동차 해고자 전원 복직 합의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쌍용차 해고자 119명 전원복직 합의에 매우 기쁘고 감회가 깊다”고 했다. “걱정이 많으셨을 국민께 희망의 소식이 되었기를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편으로 “긴 고통의 시간이 통증으로 남는다.”고도 했다.

    대통령이 진심으로 고통을 느꼈다면, 여전히 고통 받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마음속으로만 희망이니 기쁨을 생각할 게 아니라, 실제로 희망을 주는 정책을 실행하고, 비정규직에게 기쁨을 주고, 노동자 모두에게 위로를 주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

    언제부터인지 노동, 사회에서 만연한 사회적 합의주의는 이젠 몇몇 개인이나 특정 노조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전 노동자적인 단결과 계급투쟁의 전망이 실종되면서 사업장도 변하고, 현장도 변하고, 노동자도 변하고, 노조도 변했다. 변하지 않는 것은 한가지다. 연대하여 투쟁해야 한다는 점이다.

    SKB비정규직지부 노동자들이 아직은 자기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싸우고 있지만, 상급노조와 노동자조직에서는 이 중대한 투쟁의 불씨를 전국적으로 상승시켜야 한다.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싸우고 있는 SKB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모든 노동자들이 지지와 연대를 보내야 할 것이다.

     

    4. 승리를 위하여 연대를!

     

    이번 파업을 이끌고 있는 정범채 지부장은 이날 문화제 마지막 발언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화수목, 교섭을 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사측에서 우리 조합원들을 징계하고 고소고발하고,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이 어떻게 교섭이란 걸 할 수 있겠습니까? 저들도 사람이라면 우리 민족의 명절인 추석도 앞두고 있는데, 이렇게 탄압일변도로 나올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교섭장에 나간 겁니다. 저들에게 얘기했습니다. 교섭 이틀 전에 대표에게도 얘기했습니다. 진짜 추석이라 좋게 마무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대체인력부터 빼고, 징계와 고소고발도 무효로 해라! 저들은 이야기합니다. 대체인력은 고객서비스 때문에 뺄 수 없고 징계라든가 고소고발은 법과 원칙에 따라서 하겠다고 합니다. 교섭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일 쟁대위를 통해서 앞으로 투쟁방향을 동지들과 함께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저는 투쟁에 있어서 동지들이 정말 가열차게 잘 싸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측은 이렇게 잘 싸우는, 특히나 가열차게 선봉에선 부대들을, 대표적인 조합원들을 징계하고 고소고발하고, 그것으로 우리 노동조합의 예봉을 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내일 쟁대위를 통해서 앞으로 우리 투쟁기조가 진짜 생활임금이고 뭐고 다 좋은데, 그런 생활에 필요한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 소중한 동지들에 대한 징계와 고소고발을 기필코 막아낼 수 있는, 그러한 강력한 투쟁계획을 같이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현재 저들이 벌이고 있는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의 작태들, 저런 기세를 우리가 꺾지 못한다면, 교섭도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교섭위원들에게 많은 좋은 말씀을 해주십니다. 근데, 교섭자리에선 그런 게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강하게 저들을 압박할 때, 저들은 꼬리를 내리는 것이지,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교섭에서 물론 최선을 다하겠지만, 정말 우리 노동자들의 이 절박한 마음 하나하나가 묶여서 투쟁심으로 똘똘 뭉치지 않는 이상 교섭은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소중한 동지들, 정말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교섭이고 투쟁이고 정말 나를 지키고 내 앞에 동지를 지킨다는, 내 가족을 지킨다는 그러한 각오와 투지로 싸워나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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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여름, 그 무더운 폭염을 이겨내고 농성장을 지켜온 정범채 지부장은 6월 말에 보았을 때보다 얼굴이 많이 거칠어져 있었다. 지친만큼이나 목소리도 차분했다. 그러나 그가 외치는 “질긴 놈이 승리한다 끝까지 투쟁하자!”는 구호 한마디에는 절박함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SK그룹 본사가 있는 서린빌딩 기둥을 등지고 세워진 농성천막, 빌딩 앞 도로변에 묶인 많은 현수막들, 가로수를 이은 줄에 매달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와 결의가 적힌 빨간 리본들 너머로 수많은 행인들이 무심하게 또는 궁금한 듯 바라보며 지나간다.

    저 펄럭이는 것들, 나부끼는 것들을 깨끗이 걷어내고 SKB비정규직지부 노동자들이 투쟁의 승리를 만끽하며 활짝 웃는 날은 언제일까?

    문재인 정부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외면하고 기업에게만 맡겨둔 채 방관하고 있는 한, 그런 날은 요원해 보인다. 우리가 비정규직 투쟁을 개별사업장 문제로 보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다면 역시 좌절의 시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보다 많은 관심과 격려, 그리고 문재인 정부에 대한 압박이 필요하다. 자회사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대안이 될 수 없다!

     

     

    *필자 : 임성용. 운수노동자, 시인. 시집으로 <하늘공장> <풀타임> 산문집 <뜨거운 휴식>이 있다.

    *월간 '시대' / 201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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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소개 3 : 노동계급과 혁명조직

    •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소개 3

    • 노동계급과 혁명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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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계급이 자신을 계급으로 조직하는 것, 즉 ‘계급으로서의 자기 조직화’와 ‘혁명적 계급의식’은 서로 연결되어 분리될 수 없으며, 노동계급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다. 노동계급은 사회 전체를 떠맡아야 할 사명이 있지만, 이전 계급들과는 달리, 현존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는 미래 사회를 지배할 권력의 어떠한 경제적 토대도 갖고 있지 않은 유일한 계급이다. 노동계급이 가진 유일한 물질적 힘은 그 조직화이다. 그래서 노동계급에 조직화는 다른 계급보다 훨씬 더 그들 투쟁의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조건을 이룬다.

     

     노동자들이 가진 유일한 사회적 힘은 조직상의 절대 우세이다. 그러나 그 힘은 단결하지 않으면 분쇄 당한다. 노동자들의 분열과 경쟁을 극복하고 자본주의에 대항해 최종적으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공통된 이해를 위해 조직하여 함께 투쟁하는 길밖에 없다. 노동계급은 생산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인해 단결과 연대에 기반을 두어 계급으로 조직을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자기 조직화는 가공할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조직화와 연대만으로는 자본주의 사회를 붕괴시킬 수 없다. 노동계급의 ‘자기 조직화’는 반드시 전투적 의지와 집단적인 의식으로서의 ‘혁명적 계급의식’과 결합해야만 계급투쟁과 계급의식을 더욱 강고하게 발전시킬 수 있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혁명적 투쟁을 벌일 수 있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과업이다. 노동계급의 한 부분인 혁명조직(당)은 전체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혁명 강령을 실현하기 위해 조직된 계급의 가장 의식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혁명조직은 계급을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하지 않는다. 모든 권력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장악하고 행사한다. 

    혁명조직은 계급의식의 발전과 조직의 성장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혁명조직은 대중들이 혁명 강령으로 향할 수 있도록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 투쟁에 앞장서서 싸우며,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철폐하는 길에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자본주의 아래 노동자들이 일상적 투쟁의 과정에서 얻게 된 계급의식은 혁명 의식으로 진전될 수도 있지만, 투쟁의 시기가 지나면 다시 돌아가 버리기 때문에, 노동계급에는 계급의 모든 역사·이론적인 성과들을 온전히 담아내는 강령을 가진 혁명조직이 필요하다. 따라서 혁명 강령 없는 혁명조직은 존재할 수 없으며, 혁명조직은 투쟁하는 노동계급과 조직적으로 함께해야만 혁명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코뮤니스트들과 혁명조직은 항상 적대하는 계급과의 투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 속에서 노동계급의 요구와 자기 조직화를 방어하고, 계급의 민주주의와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항상 계급투쟁에 복무해야 한다.

     

     혁명조직은 계급투쟁을 확산시키고 강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원해야 한다. 노동계급이 자본에 대해 독립적으로 자신을 조직하려는 모든 경향들(비공인 파업 투쟁, 직접행동, 파업위원회, 대중총회, 노동자평의회 등)의 출현과 확산을 촉진해야 한다. 혁명조직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총회, 점거 투쟁에서의 대중총회와 같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토론의 장, 프롤레타리아 정치 광장을 통해 계급의 민주주의와 토론문화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노동자들의 토론능력(문화)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실현이 계급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으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맞선 계급의 무기가 될 것이다.

     

     혁명조직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노동조합(주의)의 한계에 막혔을 때 과감히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직접행동, 노동자 공동행동, 비공인 파업, 대중(대대적)파업을 촉진해야 한다. 비공인 파업 투쟁의 형태는 역사적으로 노동계급의 자기 조직화를 가장 급진적으로 실현했다. 혁명 시기가 오기 전까지 혁명조직은 모든 계급투쟁 속에서, 자본에 맞선 경제적 요구들과 정부에 대항한 낮은 차원의 정치적 요구들을 부르주아 국가권력의 타도를 위한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키려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들이 상시화, 전면화되고 정치적으로 상승할 때 혁명조직은 구체적으로 파업위원회들과 노동자총회, 대중총회 조직들을 정치적으로 집중시키고, 노동자평의회 건설로 나아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국제적이다. 세계혁명은 세계혁명당(인터내셔널)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 당은 노동계급 사이에서 혁명 강령을 위한 투쟁을 만들어 내려고 서로 조직한 가장 계급 의식적인 노동자의 구체적인 정치표현이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당을 만들려는 시도는  너무 늦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었다. 따라서 세계혁명당이 만들어지기 전에 혁명 강령의 명확한 세부 내용이 잠재적인 구성 부분 사이의 토론과 논쟁을 통하여 관련된 모든 면에서 명료화해야 한다.

     

    •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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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다시 혁명조직의 기본을 말하다.

  • 다시 혁명조직의 기본을 말하다.

     

     최근의 이른바 (노동당) 비선/언더 조직 사건은 그 조직이 무엇을 지향하고 무슨 활동을 하는 가와 상관없이 가부장적, 위계적, 반여성주의적, 반인권적 조직 행태가 드러나면서 모두에게 충격과 분노를 안겨 주었다. 20년 전 기준으로도 지금 폭로된 폐해들은 정상적인 조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권의 탄압이 극심했던 시기 혁명 운동 조직은 필연적으로 비공개, 비합법, 수직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모든 비공개 조직이 이토록 폐쇄적이거나 억압적이지는 않았다.

     

    현재에도 코뮤니스트 조직과 같은 혁명조직은 활동을 공개적으로 해나가면서도 적들의 공격과 탄압에 대비한 조직구조로 되어있다. 하지만, 혁명적인 조직일수록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가져야만 혁명적 실천과 과업을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조직 내부에 분파활동의 자유는 철저하게 보장하지만, 사적인 비선이나 언더는 존재할 수 없다. 이번 ‘언더’ 조직 사건과 같이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규율은 조직과 운동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시킨다. 혁명조직의 규율은 강요가 아니라 정치의식의 균질화와 민주적 토론능력을 통해 강화되기 때문에 토론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는 운동을 갉아먹는 반운동적 해악으로 간주하고 그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그렇다면 혁명조직은 왜 민주적이어야 하는가? 우리가 다시 혁명조직의 기본을 말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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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조직(당)의 본질에 대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당은 계급의식의 정치적 표현이며, 바로 그 이유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투쟁에 필수불가결하다. 혁명당(또는 그에 선행하는 혁명조직)은 전체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강령을 방어하기 위해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 가장 의식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혁명당은 늘 프롤레타리아트의 소수일 것이지만, 혁명당이 방어하는 코뮤니스트 강령은 전체 노동계급에 의해서만 이행될 수 있다. 코뮤니즘을 확립하는 임무는 전체 노동계급에 달려 있다. 그것은 의식적인 계급의 전위일지라도 위임될 수 없는 임무이다.

    따라서 혁명당은 계급을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하지 않는다. 모든 권력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장악하고 행사한다. 당은 계급의식의 발전과 조직의 성장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국제적이며 그렇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세계혁명은 세계혁명당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 당은 노동계급 사이에서 혁명 강령을 위한 투쟁을 만들어 내려고 서로 조직한 가장 계급 의식적인 노동자의 구체적인 정치표현이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당을 만들려는 시도는 너무 가련하고 너무 늦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었다. 따라서 세계혁명당이 만들어지기 전에 혁명 강령의 명확한 세부 내용이 잠재적인 구성 부분 사이의 토론과 논쟁을 통하여 관련된 모든 면에서 명료화되어야 한다.

    이처럼 혁명당은 국제적인 전망이 있어야 한다. 현재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수행해야 할 어떠한 ‘민족적 책무’ 갖지 않으며, 세계적 기반 위에서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혁명당은 국제적인 차원에서 건설되어야 한다.

     

    - 혁명조직의 구조에 대하여

     

     오늘날 혁명조직은 일상적 정치토론과 직접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아래로부터의 평의회 구조와 높은 정치의식 통일(균질화)과 행동 일치를 끌어내는 ‘민주적 중앙화’를 조직 운영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

     

    “제국주의의 지배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단계에서 혁명당의 조직은, 상상처럼 존재할 수 없으며, 고도로 중앙집중화된 구조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비록 혁명당의 평당원 동지와 그 안에서 선출된 지도부 사이의 관계에서, 즉 ‘자유와 권위’ 사이의 관계에서 ‘민주적 중앙화’는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유일하게 건강한 방식이며, 더욱 민주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유지될 수 있다.” (유기적 중심주의냐 민주적 중앙화냐), 1951, 오노라토 데이먼

     

    이러한 구조는 한국과 같이 대중조직, 정치조직을 막론하고 박제된 구조(총회-대의원/전국위-중앙위-중집/운영위/대표)를 갖는 곳에서는 생소할 것이다. 특히 조직 내 다수파 차지와 핵심 기구의 장악이 전체 조직의 장악으로 연결되는 형식적 민주주의(낡은 민주집중제)에 갇혀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러한 낡은 구조가 아래로부터의 권력, 의식과 투쟁의 발전을 막아온 주요 원인 중 하나이었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현재의 이른바 ‘민주집중제’는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 형식적인 ‘다수결 원칙’, ‘대의제’와 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형식으로 변질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상설로 위임된 ‘중앙기구’에 의해 관료화되어 버렸다. 더욱이 최근까지도 일부 정파는 ‘민주집중제’와 아무 관련이 없는 ‘분파금지’ 제도마저 유지하고 있다.

    정보통신 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사회의 다양한 기능에 더 많은 사람이 집단으로 참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이것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세계적으로 소통하고, 세계적인 공동체를 조직하는 것의 가능성을 높여가고 있다. 이런 시대에 그들이 추구하는 민주집중제는 너무 낡았다. 가장 민주적인 방식이 가장 소통이 잘되는 구조이며 가장 집중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적들의 탄압이 정교해진 만큼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정교하고 창조적인 소통의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

     

    - 조직 내부의 차이와 통일에 대하여

     

     혁명조직은 내부의 의견 차이와 행동의 통일을 위해 두 가지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하나, 조직 내부의 정치의식 발전이 제한 없이 완전히 가능해야 하고, 획일화되지 않은 조직에서 당연히 존재하는 수많은 의문과 의견 차이를 억압하지 않고 가장 광범위하고 구체적으로 토론할 수 있게 보장한다.

    둘, 토론의 자유와 함께 조직의 단결과 행동 일치를 보장해야 한다. 이것은 특히, 조직의 모든 단위가 토론과 아래로부터의 결정으로 채택한 사안을 수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혁명조직에서는 만장 일치주의를 경계해야 하며, 토론의 중요성, 논쟁과 이견의 불가피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직 내부의 분열적 요소와 존재는 조직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토론문화는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 사이의 격렬한 대립을 절대 배제하지 않는다.

     

    “혁명조직이 자신에게 주어진 주요 임무인 계급의식의 발전과 확장을 완수하려면, 집단적이며 국제적이고 동지애가 담긴 공개토론 문화의 발전이 필수불가결하다. 물론 이것이 정치적 성숙(좀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인간적 성숙)을 요구하는 것도 사실이다.”

    - 국제코뮤니스트 흐름, 『International Review)』131호, [토론문화 : 계급투쟁의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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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현재의 수준에서 혁명조직에 대한 이해 부족과 왜곡, 그리고 악의에 찬 거짓선전과 힘든 싸움에서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프롤레타리아 운동 내부에 건강한 토론을 끌어내고 활성화해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 위기가 심화 될수록, 부르주아지의 무기는 날카로워지고 있다. 더욱이 계급 운동 내부에 조합주의, 의회주의, 민족주의(스탈린주의), 반여성주의, 인종주의 등 대중들이 피해야 할 수많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기본을 말하고 기초를 튼튼히 하고자 한다. 많은 시간과 조직적 개인적 성숙이 필요한 만큼 더 열어놓고 토론하고 경험하고, 투쟁 속에서 원칙을 세워나가고자 한다. 우리가 제안한 정치원칙이 이러한 토론의 시작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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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조선공산당 창건 93주년에 부쳐

조선공산당 창건 93주년에 부쳐

임성용

 

 

 지난 4월 17일, 낮 열두 시 무렵이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뒤편에 있는 추모비 앞에 30여 명의 사람이 모였다. 봄바람이 좀 세차게 불었다.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 붉은 담벼락이 높다랗게 둘러싼 언덕 아래에는 ‘조선의 혼그릇’이라고 이름 붙인 주발 형태의 철재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고, 혼그릇을 이룬 쇳조각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죽은 항일독립투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거기에는 6·10만세 항쟁의 주역 권오설의 이름도 있었다. 그 추모비를 정면에 두고 한 장의 현수막이 걸렸다. ‘권오설 88주기 추도식’이라고 적힌 것이었다. 현수막에는 오래된 흑백사진에 담긴 얼굴 하나가 점차 또렷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수인복과 수형번호, 그리고 權五卨이라는 흰색 성명을 앞가슴에 달고 있는 강고한 인상의 사내였다. 수형자의 모습으로 찍은 당시의 나이는 스물아홉, 그는 다름 아닌 조선의 젊은 볼셰비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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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볼셰비키 혁명가, 권오설

 

  6·10투쟁 지도특별위원장 권오설은 1928년 2월,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 독방에 갇혔다. 재판에서 징역형을 받기 전까지 일경은 예심 기간이라는 것을 두어 2년 동안이나 그를 심문했다. 결국, 혹독한 폭행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그는 서대문형무소 병감에서 숨졌다. 1930년 4월 17일이었다.

오늘날에 이르러 보통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은 ‘대한독립만세’를 떠올린다. 아니면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를 받던 조선의 독립을 위해 활동한 ‘독립군’이나 ‘광복군’과 같은 무장투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권오설 역시도 독립운동가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권오설은 단순한 독립운동을 뛰어넘는 사회운동가이자 혁명가였다. 그가 책임지고 투쟁을 주도한 6·10만세 항쟁의 혁명적 성격을 살펴보면 그것은 확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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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인민이여 귀를 기울여라- 들려오지 않은가 노동자 농민을 전위로 한 인민들이 일제에 항거하는 우렁찬 발소리- 이 강산을 진동시킨 「조선 독립 만세」의 고함- 이날이 바로 지난 21년 전 일제와 가장 용감히 싸운 조선공산당의 영도 아래 노동자 농민을 전위대로 한 학생 소시민 지식층 등 모든 조선 인민이 독사 같은 일제의 눈초리와 총칼 밑에서 잔악한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조선 독립 만세」 「토지를 농민에게」 「애국자 혁명가를 석방하라」하고 과감히 궐기한 조선해방역사상 찬연히 빛나는 제21주년 6·10만세 운동 기념일이다. 일제에 항거하여 노동자가 일어섰다. 농민도 궐기하고 학생도 소시민도 지식층도 일본의 주구 이외의 조선 인민은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국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일제와 항쟁한 이 날. 전 인민의 무자비한 투쟁은 일제의 가슴을 서늘케 하고 자유와 해방을 외치는 만세 소리의 폭풍은 전선 방방곡곡을 휩쓸었다.’    - 《독립신보》 「민족의 자랑 6·10만세 기념일-조선공산당 영도 아래- 이조 최후 왕·국장일에 반제항쟁」이라는 제목의 기사

 

 위의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권오설이 특별위원장을 맡았던 6·10만세 항쟁은 1919년에 전개되었던 3·1만세 운동과는 다르다. 6·10운동은 그 규모가 3·1운동보다는 작았지만, 조선공산당 중앙기구 위원이며 고려공산청년회 비서인 박민영, 조선공산당 조직원이며 공청 선전부원인 이지탁,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이며 고려공산청년회 책임 비서였던 권오설 등이 주도했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창립되고 나서 바로 다음 해에 일어난 6·10만세 항쟁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 특히 권오설이 핵심을 맡은 사업이었다. 1926년 5월 3일, 고려공산청년회 간부 회의에서 6·10투쟁 총책임자로 권오설을 선임했고,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고려공산청년회, 조선노동총동맹을 주축으로 해서 ‘6·10투쟁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권오설은 6월 7일, 사전에 투쟁계획이 발각되어 서대문경찰서 형사대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당시 중앙고보 학생이었던 이현상(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 권오상, 이선호가 다시 선전문을 만들어 예정대로 6·10투쟁을 진행했다.

따라서 일부의 관점에서는 3·1운동보다 6·10투쟁을 더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종교, 청년학생, 노동자와 농민, 좌우는 물론 조선의 모든 혁명 대중을 하나로 한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3·1운동 때, 조선 민족 대표라는 33인들의 얼빠진 행적과는 달리 6·10투쟁은 조선공산당이라고 하는 ‘전위당’이 있었다. 이들은 노동자 농민을 기반으로 하여 인민대중들의 민족해방 의지를 끌어모으는 데 집중했다. 즉 6·10투쟁에는 ‘당’이 있고, 강철 같은 당에 목숨을 맡긴 ‘당원 동지들’이 있었다. 3·1운동 앞에 이름을 내세운 종교 지도자들, 부르주아 및 소부르주아인텔리들, 민족주의자들은 6·10투쟁이 일어나자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천도교 신파에서 함께 참여한 것뿐이었다.

3·1운동 때의 ‘독립선언문’과 6·10투쟁 때의 ‘격고문’은 뚜렷이 다르다. 6·10투쟁의 격고문이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민족해방운동 싸움에서 처음으로 맑스-레닌주의 운동의 혁명적 방법론을 꾀하고 있다는 점이다. ‘토지를 농민에게!’ ‘공장의 직공은 총파업하라!’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를!’ ‘보통교육을 의무교육으로!’ 같은 투쟁 슬로건은 조선 혁명의 전환적 성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혁명 정신은 조선공산당이 와해한 1928년 이후에도 경성 트로이카, 경성 콤그룹으로 끊임없는 재건작업을 시도했다. 격고문을 보자.

 

 ‘......현재 세계정세는 식민지 민중 대 제국주의 군벌의 투쟁과 무산자계급 대 자본가계급의 투쟁으로 전개되고 있다. 제국주의 군벌에 대한 식민지 민중의 투쟁은 민족적 정치적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자본가계급에 대한 무산자계급의 투쟁은 계급적 경제적 해방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식민지에 민족해방이 곧 계급해방이고 정치적 해방이 곧 경제적 해방이라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식민지 민족이 총체적으로 무산자계급이며 제국주의가 곧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는 당면한 적인 침략국 일본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모든 권리를 탈환하지 않으면 죽음의 땅을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형제여! 자매여! 눈물을 그치고 규탄하라! 전 세계의 피압박민족과 무산자 대중은 모두 함께 정의의 깃발을 들고 우리와 함께 보조를 맞춰나갈 것이며 붕괴하고 있는 제국주의의 하나인 일본 지배계급도 운명이 다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명백하다.’ - 1926년 6월 10일, 격고문 중에서

 

 그럼 이와 같은 민족해방-계급해방 정신을 바탕으로 6·10투쟁을 계획하고 준비한 권오설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권오설은 경북 안동의 잔반가에서 태어났다.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가난한 형편에도 가숙인 남명학교에 들어가 동화학교에 편입, 졸업한다. 대구고등보통에 입학했으나 민족사상을 부추기다 퇴학당한다. 2년 뒤, 경성으로 올라가 중앙고보를 다니다가 학비가 없어 그만둔다. 그리고 전남도청에서 고용원으로 근무하게 되는데, 광주 3.1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체포된다. 그는 배후조종혐의로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한다. 1920년부터 고향에서 ‘안동청년회’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풍산학습강습회’ ‘풍산소작인조합’ 등의 농민조합과 청년회를 설립하고 농민,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그는 불과 일이 년 만에 사회주의단체에서 지도자급으로 활동한다.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화요회)’에 가입했다. 화요회는 조선공산당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24년 4월, 260여 개의 가입단체와 5만 3천여 명의 회원을 가진 조선 노동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된 그는 대동인쇄 동맹파업, 양말직공파업, 고무직공파업, 양화직공파업을 조직하고 지도한다. 1925년 2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준비회 조직 준비위원을 한 그는 1925년 4월 18일,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된다. 아울러 그는 조공의 산하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에 조선노동총동맹 대표로 참석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고 조직부 책임자를 맡았다. 1925년 11월, 조선공산당 1차 검거(신의주 사건)로 책임 비서 박헌영이 붙잡히자 김찬, 조봉암 등이 해외로 망명하였다. 중앙집행위원 중 유일하게 국내에 남게 된 그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 비서가 되었다. 즉 2차 조선공산당의 강력한 실력자가 권오설이었다. 그가 벌인 대표적인 업적이 바로 6·10투쟁 이었다. 그는 만세시위에 나설 학생들을 규합하고 상해에 있던 김단야, 조봉암 등과 연락해서 격문전단을 만들어 보내도록 하는 한편 국내에서 투쟁 슬로건이 담긴 격문을 십만 장이 넘게 인쇄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 날인 국장일에 맞춰 전민족적인 규모의 거사를 실행하려던 그는, 거사 사흘 전에 인쇄물이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만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도중, 그는 일경을 고소하면서까지 고문에 맞서 대항하였으나 끝내 옥사하였다. 이로써 조선공산당은 1925년 창건 이후, 그해 11월 ‘신의주사건’ 1926년 6·10투쟁, 그리고 1928년 당 책임비서 차금봉이 피검되면서 조직이 와해되었다.

 

 

 

조선공산당 창립 93주년 만에 열린 추도의 기념식

 

 

 권오설을 비롯한 조공 핵심 인물들의 망명과 검거, 구속, 옥사로 조공은 치명적인 손실을 보았다. 그러나 재건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그대로 끝난 게 아니었다. 1931년 2월, ‘ML파’ 사회주의자그룹은 상해에서 기관지 『계급투쟁(階級鬪爭)』을 발행하고 조선공산당 재건설동맹을 결성하고, ‘화요파’ 출신인 김단야, 권오직 등은 1929년 11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재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톡 등지에서 활동하던 김단야 등은 1931년 3월, 박헌영과 『콤뮤니스트』 창간호를 발간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을 시도하였다.

1933년 8월, 서울에서는 이재유를 중심으로 경성 트로이카그룹이 결성되었다. 1934년 11월 경성재건그룹, 1935년 9월 조선공산당 재건경성준비그룹 등을 거치면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투쟁하였다. 1939년 4월, 이관술과 김삼룡이 경성 콤그룹 지도부를 다시 구성했다. 특히 1930년대 들어와서는 혁명적 노동조합, 혁명적 농민조합 결성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 전국적으로 수만 명에 달하는 검거자가 발생하였다. 이들은 코민테른의 당 재건 방침에 따라 ‘아래로부터 위로의’ 전국적 조직건설을 통해 당을 재건하려는 목적이 최우선이었다. 하지만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위한 운동은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해방 직후, 박헌영 등 과거 화요파가 중심이 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통한 조선공산당의 재건이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미소공위의 결렬과 조선정판사사건, 미군정의 탄압과 우익의 테러, 미소 간의 정세 변화에 따라 통합적 지도력 강화를 위해 남조선로동당으로 해소되었다.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이재유, 이현상, 김삼룡 삼두마차를 필두로 하는 경성 트로이카라고 할 수 있다. 이재유는 서대문형무소에서 6년의 형기를 다 마치고도 사상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주보호소에서 병사했고, 이현상은 지리산에서 토벌대의 총격으로 죽었고, 남로당 책임자였던 김삼룡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되어 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주하와 함께 총살당했다.

2018년 4월 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린 ‘권오설 88주기 추도식’을 진행한 주최자가 <경성 트로이카 프로젝트>로 되어 있었다. 경성 트로이카 프로젝트는 단체가 아니다.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가열 차게 했던 경성 트로이카 혁명가들의 정신을 기리고 그들의 삶을 복원하기 위한 몇몇 사람들의 모임이다. 마침 조선공산당 창립일과 권오설 사망일이 4월 17일로 같은 날짜였다. 그리하여 권오설이 끌려가 고문당하고 죽었던, 이재유를 비롯한 경성 트로이카 조직원들이 옥살이했던, 바로 그 서대문 형무소에서 보다 의미 있는 행사를 추도식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하였다. 공식적으로는 권오설 동무가 옥사한 지 88년 만에야 역사와 죽음의 현장에서 열린 ‘권오설 88주기 추도식’이었다. 그 이면에는 사실 ‘조선공산당 창립 93주년 기념식’이기도 했다. 현재의 서대문형무소는 시민들에게 입장료를 받고 정부에서 관리하는 국가의 시설물이므로 조선공산당 기념식을 할 수는 없었다. ‘조선공산당 창립 93주년 기념식’이라는 현수막을 만들어갔지만, 그것을 공공연하게 내걸지도 못했다. 권오설의 삶과 죽음이 조선공산당 투사들의 삶이었고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정신이었기에 그 모든 동무를 위해서 한 송이 하얀 국화꽃을 바치고 인터내셔널가를 제창하는 것으로 위로 삼았다. 차후에는 더 많은 사람이 참석하고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게 하여 조선공산당 창립 100주년 기념을 앞두고,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성원 넘치는 행사로 자리 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선공산당 창건 93주년 만세!’ 추도식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누구나의 가슴 속엔 이 한 마디의 외침을 품고 있었으리라. 이러한 의미를 되새기며, 앞으로 우리의 동지들이 분명한 결의와 각오로, 공부와 실천으로, 공산주의 운동을 한 선배 동지들의 뜻을 이어가자고 한 사회실천연구소 오세철 동지의 추도사를 옮겨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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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운동을 하는 좌익공산주의자 오세철입니다.

 

오늘 이 자리는 굉장히 뜻깊은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권오설 선생 시대에, 1910년 20년대 초기부터 조선 공산주의운동 역사를 제대로 실천하신 동지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경성 콤그룹 구성원들이 있지만, 우리가 공부하고 이해하기로는 세계 공산주의 운동사에 특별히 맑스주의 원칙과 사상을 끝까지 올바르게 붙들고 실천한 사람들이 경성 콤그룹 포함해서 조선의 공산주의자 그룹이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공부했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를 포함한, 또 공산주의 운동을 하는 젊은 동지들은 도대체 어떻게 무얼 붙들어야 하는가? 세계사적으로 붙들기도 하지만 조선의 공산주의 역사에서 누굴 붙들어야 하느냐? 어떻게 운동을 붙들어야 하느냐? 이런 고민을 하거든요. 공부하면서 그래도 그 시대에, 그 운동을 앞장서서 하셨고 또 실천하셨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셨던 동지들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오늘 여기에 처음 나온 이유입니다. 역사 현장에서 이런 이야기하는 것도 처음이고, 그래서 추도사가 아니고요. 오히려 저는 어떤 생각으로 나왔냐 하면, 앞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공산주의자들이, 또는 앞으로 공산주의 운동을 하겠다는 젊은 동지들이 무엇을 하겠는가? 그런 결의와 각오를 우리 권 선배님에게 전달하는 의미로 나왔어요. 추도사 아닙니다.

 

그래서 짧게 이야기할게요. 최근에, 작년이 1917년 러시아혁명 100주년이었고, 올해가 맑스 탄생 200주년입니다. 내년이 코민테른 100주년이에요. 3년이 연속으로 이어져서, 이것도 역사적인 의미가 있어서, 제가 3년 동안 행사를 하는 게 아니고 공부를 좀 합시다! 그랬어요. 동지들한테 제발 공부 좀 합시다. 그래서 작년엔 러시아혁명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하고, 러시아혁명이 무엇이 문제였는가? 그건 혁명 자체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이었지만 왜 변질되고 퇴화했는가를 우리가 알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걸 여전히 모르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제가 한마디로 하면 그거는 그 원칙과 사상을 져버린, 우리가 보니 공산주의자가 아닌데 특별히 총칭으로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서 역사를 망쳤다고 생각해요. 제가 공부하기로는... 그래서 우리는 공산주의자로 안 봅니다. 우리는 백 개의 공산주의가 있고 백 개의 맑스주의가 있는데, 그러면 진짜가 뭐냐? 그것을 찾는 운동! 저는 그게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지금 특별히 권오설 선배 동지가 했던 그런 운동과 세력은 거기에(공산주의) 가장 가까웠다고 저는 공부한 사람이에요. 그렇기에 백 년 가까이 지난 지금 뭘 해야 하는가? 그것을 세계운동 속에서 찾아야 하고, 우리 운동도 있었지만 이제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작년에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계속 토론을 하면서 그것을 찾자, 제발 스탈린주의 좀 버리자, 운동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게 우리가 작년에 공부했던 것이거든요. 올해 이제 맑스에요. 올해가 맑스 2백 주년인데, 맑스를 다시 찾아야 하는데, 다시 찾는 게 아니고 먼저 돌아가서 찾자. 다 떠났으니까. 제가 보기에는 다시 제대로 된 사상으로 돌아가서, 그럼 지금 맑스가 살아 있다면 어떻게 이야기를 하겠느냐, 아 그걸 계속 공부하자. 금년은 그 공부를 합시다. 맑스 2백 주년 맞아서 그 공부하고, 2년 공부한 다음에 내년 아니에요? 그럼 코민테른 백 주년이에요. 그런(공부) 다음 당이고 뭐고 전략은 그다음에 이야기하자, 내가 그랬어요. 아까 무슨 당 이야기도 하셨지만, 우리가 그런 당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공부 좀 하시고 그 토대 위에서 전략도 이야기합시다. 그때 뭐 세계 혁명당을 이야기하든지 그렇게 합시다. 저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공부하고 있어요. 많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가 올해 고딩이 됐거든요. 고등학생... 무슨 말씀인지 모르죠? 제가 열여섯 살이 됐다는 겁니다. 60을 버리고 한 바퀴 돌았으니까, 이제 열여섯 살이 됐으니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그래서 공부 좀 합시다, 제발!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이제 공부하는 것을 보여드릴게요. 공부만 하지 않고 한 다음 실천을 하겠다는 것을 분명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면서...

오늘 추모제를 보면서, 각 공산주의자의 추모사업회가 따로 있어요. 제가 알기로 이일재 선생도 계시고 이수갑 선생도 있고 남궁원 동지도 있고, 아! 개인으로 제발 그러지 맙시다. 이제 개인추모사업회는 자기들끼리 하더라도 좀 다르게 합시다. 그래서 얼마 전에 코뮤니스트정신계승회의라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실천하는 모임을 하자고, 모시는 것만 하지 마시고. 그래서 전 여기 오면서 나중에 점심 드시면서도 말씀드렸으면 좋겠습니다만 운동을 그렇게 하자는 거죠. 추모하실 분들은 또 이렇게 하시고 실천으로 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을 제대로 하는 그런 모범을 좀 보입시다. 또 그렇게 하겠다는 말씀을 이 결의로, 헌사로 권선생님에게 바칩니다. 감사합니다.    -오세철 동지의 추도사

 

 

 

*웬 뜬금없는 조선공산당 추모식이고 기념식인가 하고 궁금한 사람들을 위해 추모시 한편으로 답을 대신한다.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옆에는 미루나무 한 그루가 있다. 사형수의 가족들이 사형장 밖에서 목 놓아 울며 그 미루나무를 붙잡고 통곡했다고 한다. 예전에 사형장을 지키고 섰던 미루나무는 언젠가 비바람에 쓰러져 없어졌고, 지금은 새로 심은 미루나무가 서 있다고 한다. 새로 심은 미루나무가 푸르게 자라듯, 코뮤니즘 혁명을 향한 진군의 역사는 또다시 되살아올 것이리라 믿는다. 모든 사라진 것들은 돌아온다.

 

 조선공산당 창건 93주년에 부쳐.pdf

 

 

미루나무

 

임성용

 

미루나무는

비바람에 쓰러진 게 아니었다

가슴이 저미도록 사무친 것이 있다

 

어떤 통곡이 있다

어떤 기억이 있다

달그림자 드리워진 올가미가 있다

 

울며 울며 땅을 치더라는

울지도 못하고 하늘을 보더라는

목 놓아 부여잡던 손톱자국이 있다

 

검은 구멍 속으로

깊숙이 햇볕이 든다

시구통으로 질질 끌려나오는 사람이 있다

미루나무 혼자서 붉은 담벼락 언덕을 본다

 

피맺힌 것이 있다

잊혀진 것이 있다

무덤의 유골로도 남아 있지 않은 것

사라진 뼈에 사무친 것이 있다

 

외로운 목숨이 질 때

미루나무가 쓰러질 때

인간의 땅에 태어나 푸르른 미루나무가 있다

인간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마지막 숨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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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검거와 재판을 다룬 기사 (1927년 9월 13일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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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 3부. 1917, 2017년, 그리고 코뮤니즘의 전망

    •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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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부. 1917, 2017년, 그리고 코뮤니즘의 전망

     

    23. 1917년 10월 혁명에 대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주요 공격 중 하나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은, 2월 봉기의 민주주의적 희망과 볼셰비키에 의한 10월 “쿠데타”를 억지로 대비시키는 것이다. 볼셰비키의 10월 쿠데타가 러시아를 재앙과 폭정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0월 혁명을 이해하는 핵심은 그것이 제국주의 전선을 무너뜨릴 필요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이며, 이 제국주의 전선은 “민주주의” 편을 포함한 부르주아지의 모든 분파 때문에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10월 혁명은 세계 혁명의 첫 번째 일격이었다. 그것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가 쇠퇴의 시기에 들어선 것에 대한 첫 번째 명확한 응답이었으며, 이런 수준에서 1917년 10월은 잃어버린 시대의 폐허와는 거리가 먼, 인류의 미래의 이정표였다.

     

    오늘날, 세계 부르주아지로부터 받은 모든 반격 이후, 노동계급은 그 혁명적 프로젝트의 회복에서 거리가 멀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직, “어떤 의미에서는 코뮤니즘에 대한 문제가 오늘날 인류가 처해 있는 곤경의 바로 그 핵심에 있다. 코뮤니즘이 부재함으로써 만들어진 공허함의 형태로 그것은 세계의 상황은 곧 지배한다.”(세계의 상황에 대한 보고, 국제코뮤니스트흐름 22차 대회). 20세기와 21세기의 수많은 야만, 히로시마와 아우슈비츠에서 후쿠시마와 알레포까지, 그것은 수십 년 전 코뮤니스트 혁명의 실패로 인류가 치러야 했던 매우 값비싼 대가였다. 그리고 만약, 부르주아 문명 쇠퇴기의 이 늦은 시간에, 혁명적 변환의 희망이 결정적으로 사라진다면, 인간 사회의 생존의 전망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그리고 아직, 우리는 이러한 희망이 여전히 살아있으며, 진정한 가능성을 띠고 발견된다고 생각하고 확신한다.

     

    한 편에서 그들은 객관적인 가능성과 코뮤니즘의 필연성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들은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첨예해지는 충돌에 내포되어 있다. 쇠퇴기 해체의 자본주의는 모든 불황의 시대를 견뎌왔던 이전의 계급 사회들과는 달리 지구적 확장을 멈추지 않고, 사회적 삶의 모든 세포에까지 침투하기 때문에, 그 충돌은 더욱 날카로워져 왔다. 몇몇 수준에서 이를 관찰할 수 있다.

     

    - 현대 기술과 자본주의 아래에서 그 실제 사용에 잠재적으로 내포된 모순. 정보 기술과 인공 지능의 발달은 고된 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고 노동 시간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이용할 수 있지만, 한 편에서 그것은 일자리를 줄이고 다른 한 편에서 노동 시간을 연장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 자본주의 생산의 세계적이고 연합된 성격의 자본주의 생산과 그 사적 소유권 사이의 모순, 다시 말해 한 편에서 수백만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적 부를 생산하는 데 참여하는데, 다른 한 편에서 손톱만 한 소수의 오만과 낭비 때문에 그 사회적 부가 전용된다는 모순은 삶의 수준을 정체시키고 대다수가 직면하고 있는 노골적인 빈곤에 대한 모욕이 되고 있다. 노동의 연결 수준의 객관적인 세계적 성격은 최근 수십 년 동안 특히 중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산업화와 함께 어마어마하게 증가했다. 종종 스스로 극단적으로 전투적인 모습을 보였던 이러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군대는 잠재적으로 국제 계급투쟁의 힘에 새로운 원천을 구성하는데, 이는 서구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에 맞서는 혁명적 대결을 향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성숙의 열쇠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그러하다.

     

    -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모순은 그 자체로 무엇보다 과잉생산의 위기와 자본주의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모든 수단들, 특히 대규모 부채에 의존하는 등을 의미한다. 과잉생산은 자본주의 고유의 불합리함으로, 풍요의 가능성과 자본주의 아래 그러한 풍요로움을 달성할 수 없는 불가능을 동시에 가리킨다. 다시, 기술적 발전의 예시가 이러한 불합리함을 부각시킨다. 인터넷은 모든 종류의 무료 재화(음악, 책, 영화 등)를 분배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나, 이윤 시스템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 자본주의는 어떠한 무료 배포도 축소하거나 상품을 광고하는 광장으로만 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거대한 관료체계를 만들어야만 했다. 더욱이, 과잉생산의 위기는 노동계급의 삶의 수준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과 인류 대중의 빈곤으로 귀결된다.

     

    - 자본의 지구적 확장과 민족 국가의 경계를 넘어설 수 없는 불가능성 사이의 모순. 1980년대 시작된 지구화의 특정 단계는 맑스가 그룬드리세(Grundrisse)에서 예언한 바로 그 지점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저항할 수 없는 지향으로서의 보편성은 그 자신의 본질에 의한 장벽에 직면한다. 이 본질은 발전의 특성 단계에서 스스로 보편성 경향의 가장 거대한 장벽으로 인식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자신의 극복으로 나아갈 것이다.”1) 1차 세계대전 시절의 혁명가들은 물론 이 모순을 인식했다. 왜냐하면, 전쟁 그 자체가 민족 국가가 여전히 존재하여 자본이 실제로 그 너머로 이동할 수 없는 상황의 첫 번째 명백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의 이러한 극복이 – 사실 몰락이 – 순수하게 경제적인 형식을 취하지 않을 것을 안다. 자본주의가 경제적 막다른 길에 가까워질수록, 군사적 수단들을 통해 타자를 희생하면서 “생존”을 향한 추동이 커질 것이다. 트럼프, 푸틴 등등의 노골적인 민족 전쟁은 인류의 통합과는 먼 자본주의 지구화가 우리를 자기-파괴에 더욱 더 가깝게 몰고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심연으로의 몰락이 반드시 세계 전쟁이라는 형태가 아니라도 그러하다.

     

    - 자본주의 생산과 자본주의 시작에서부터 “공짜 선물”로 여겨지는(애덤 스미스) 본질 사이의 모순과 전례 없는 수준으로 해체의 단계에 도달한 것. 이는 기후 변화에 대한 미국의 반대와 같은 노골적인 공공 파괴, 그들의 주적인 중국의 성장,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중국은 희생을 감수한 성장을 향한 열띤 사냥으로 도저히 숨을 쉴 수 없는 대기의 도시들을 탄생시켰고, 이는 지구 온난화의 위험을 크게 가중시켰다. 그리고 고대의 미신과 현대의 깡패 자본주의의 기묘한 결합은 아프리카의 모든 종의 파괴를 가속했으며, 다른 곳에서는 그들의 뿔과 가죽의 마법적인 힐링 효과를 찬양했다. 자본주의는 성장에 대한 열광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나, 이는 인류가 살아 숨 쉬는 자연환경의 건강과는 양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바로 자본주의의 영속화가 군사적인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교환 수준에서도 인간종의 존재를 위협한다.

     

    위에 언급한 더는 견딜 수 없이 첨예화된 모순은 어쨌든 하나의 해결방법을 가리킨다. 이윤이 아니라 사용을 위한 세계 생산의 연합, 인간 존재 간의 연합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와 자연과의 연합이 그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전환이 주로 드러나는 것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중심, 그리고 가장 현대적인 부분, 젊은 세대들 가운데서, 비록 역사적 상황의 심각성을 점점 더 깨닫고 있기는 해도, 그들이 이전 수십 년간 공유해 왔던 “미래가 없다는” 절망을 더는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확신은 자신의 연합된 생산력에 대한 앎에 기반을 둔다. 이 앎이란 과학적, 기술적 진보로 표현되는 잠재성, 지식과 그에 접근하는 수단의 “축적”, 그리고 인류와 나머지 자연의 상호작용에 대한 심오하고 결정적인 이해의 성장이다.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이 부분 – 2011년, “세계 혁명”의 깃발을 한껏 높였던 서유럽 운동에서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 은 오늘날 노동의 연합이 띠는 국제적 성격을 훨씬 더 잘 알고 있으며, 그러므로 투쟁의 국제적 통합의 가능성을 더 잘 움켜쥘 수 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지구적 통합은 자본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회피해야 할 해결책이며, 그것이 교환을 위한 생산에 내재적 한계를 드러내는 방법일지라도 그러하다. 쇠퇴의 시기 국가 자본주의의 발전은 어떤 의미에서는 전제주의적 방식으로 사회 통합하는 방법을 찾으려는 다급한 탐색의 일종이며, 자신의 붕괴를 부추기는 체제의 “자연법칙”이 전개되는 시기에 지배계급이 경제적 삶에 대한 통제를 행사하려는 시도이다.

     

    24. 자본주의가 코뮤니즘의 필연성을 마법으로 없앨 수 없는 이상, 이러한 새로운 생산 양식은 자동으로 나타날 수 없으며, 혁명 계급,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 개입이 필요하다. 오늘날 노동계급이 직면하고 있는 극단적인 어려움 - 코뮤니즘의 “소유권”을 부활시킬 수 없는 명백한 무능력 - 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코뮤니즘을 향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부활, 재구성이 여전히 오늘날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몇 가지 이유를 개략적으로 서술하였다. 왜냐하면, 코뮤니즘의 객관적인 필요가 마법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새로운 사회를 향한 주관적인 바람을 완전히 억압할 수도 없고, 연합한 계급,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서 어떻게 그것을 성취해 낼지 이해하기 위한 탐색 또한 완전히 억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붉은 10월의 기억, 실제로는 독일혁명과 세계규모의 혁명적 물결이 10월에 의해 활성화된 것을 포함한 기억은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 말하자면, 그것은 억압되었으나, 모든 억압된 기억은 조건이 무르익었을 때 다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노동계급 안에는 진짜 이야기와 그로부터의 교훈을 의식적인 수준에서 유지하고 정교화하며, 그 자신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를 회복할 때 계급의 사고를 살찌워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소수가 항상 있다.

     

    계급은 실천적인 투쟁이라는 엄격한 학교를 통하지 않고서는 대규모로 이러한 수준의 의문에 도달할 수 없다. 자본의 공격이 심화하는데 대한 반응으로서의 이러한 투쟁은 연합된 노동이라는 현실에 의해 만들어진 자기 확신과 구속되지 않는 연대의 발전을 위한 강고한 기반이다.

     

    그러나 1968년 이후 프롤레타리아트의 순수하게 방어적인, 경제적 투쟁은 교착상태에 이르렀고, 이러한 상태는 또한 한 편에서 이론적인 투쟁, “깊은” 과거와 그 가능성 있는 미래를 이해해야 하는 과제를 필연적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과제는 계급 운동이 지역과 민족 수준에서 보편적인 수준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 그리고 경제적 수준에서 정치적 수준으로, 방어에서 공격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지적한다. 계급의 당면한 투쟁은 다소 자본주의의 삶 자체이지만, 이러한 다음 중요한 단계를 밟을 수 있을지에 대한 보장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한계가 있고 혼란스러운 방법으로라 할지라도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재 세대들의 투쟁, 무엇보다 전체 체제 – 시위자들이 그들의 깃발에 공공연히 써 놓았듯이, “구시대적” 체제 - 에 대한 진정한 분노의 표현이었던 스페인의 분노 운동(Indignados)과 같은 투쟁은 어떻게 이 체제가 작동하고 무엇이 이 체제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인지 이해하고자 하는 바람, 동시에 현존하는 질서라는 제도를 부수고 나올 수 있는 조직적 수단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바람을 표현한다. 그리고 보라, 그러한 수단은 본질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대중 집회의 일반화, 위임된 대표의 선출은 1917년 소비에트 시절로부터의 명확한 메아리다. 이것은 사회적 삶의 깊은 지하에서 활동한 “노련한 두더지(Old Mole: 1968년 9월부터 1970년 9월까지 매사추세츠의 케임브리지에서 발간된 지하신문 중심의 급진적 신좌파 그룹)”의 작업의 명백한 표현이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정치-도덕적 차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발전을 위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계급의 더욱 넓은 부문의 일부로서 현존하는 삶과 행동의 방식에 대한 고질적인 거부의 등장이다. 이러한 순간의 진화는 계급 영역에서의 대중 투쟁과 혁명적 관점의 준비와 성숙에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동시에, 분노 운동이 진정한 계급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은 이러한 거리와 광장에서의 초기 정치화와 경제적 투쟁, 노동 계급이 여전히 가장 뚜렷한 존재감을 가진 노동 현장에서의 운동이 연결될 필요성을 보여준다. 룩셈부르크의 「대대적 파업」에서 볼 수 있고, 주창되듯이, 혁명적 미래는 경제적 투쟁을 현대주의자의 선언인 것으로 “부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 운동의 경제적, 정치적 차원의 진정한 통합에 있다.

     

    25. 운동의 경제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의 연결을 볼 수 있는 역량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코뮤니스트 정치 조직은 수행해야 할 필수불가결한 역할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왜 부르주아지가 1917년 볼셰비키 당의 역할을 전력으로 부정하며 자기 자신이 권력을 획득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광신도와 지식인들의 음모론이라고 내세우며 의심하는지 그 이유이다. 코뮤니스트 소수의 책무는 투쟁을 유발하거나 앞서서 그들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수단과 목표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 속에 있는 것이다.

     

    또한, 붉은 10월을 지키는 것은 당연히 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스탈린주의가 붉은 10월에 반대하는 부르주아지 반혁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무는 스탈린주의의 붕괴가 코뮤니즘의 경제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생각이 무겁게 다가오는 오늘날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생각이 코뮤니스트좌파와 자본의 좌익 사이에서 불안정하게 존재하는 정치적으로 탐색하는 소수들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심각하다. 1989년 이전에는 반대로 혼란스럽지만, 식별가능했던 반자본주의 생각들은, 보기를 들어 평의회주의자 또는 자율주의자(autonomist)와 같은 종류의 이들은 상대적으로 그런 그룹들 내에서 영향력 있었는데, 그 이후 실물 경제 또는 현존하는 “상품”의 영역의 보존과 확장에 대한, 지역 수준에서 상호 교환 네트워크의 형성에 기반을 둔 개념의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 그런 생각의 진전은 오늘날 프롤레타리아트의 더욱 정치화된 계층들조차 종종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환경 아래서, 미래의 혁명가 세대의 출현을 준비하는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는 오늘날 현존하는 혁명적 소수들이 가능한 가장 심오하고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유토피아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왜 오늘날 코뮤니즘이 필연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가능성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오늘날 코뮤니스트좌파는 극단적으로 감소했고, 분산되어 있으며 정치적 명확성을 찾는 광범위한 요인들은 거대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오늘날 작은 혁명운동에서 미래의 대중 계급 운동의 진정한 전위로 행동할 역량을 갖추는 것까지 나아가는 데에는 갈 길이 매우 먼 것이 명백하다. 혁명가들과 정치화된 소수들은 이런 상황의 순수하게 수동적인 산물이 아니다. 그들 자신의 혼란은 자신의 분열과 방향 상실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혁명적 소수의 약점은 계급 전체 약점의 표현이며, 이를 극복할 어떤 조직적 비법이나 활동가주의 슬로건은 있을 수 없다.

     

    시간은 더 이상 노동계급의 편이 아니다. 그러나 그 그림자를 뛰어넘을 수도 없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1917년 이후뿐만 아니라 1968년~89년의 투쟁에서 잃어버렸던 많은 것을 되찾아야만 한다. 이 작업은 혁명가들에게 계급의 실제 운동과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위기로 드러난 전망을 분석하고, 이러한 이론적 노력의 바탕 위에 코뮤니스트로서의 입장의 첨단에 설 사람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에 대답을 제공하는 데에는 매우 오랜 시간의 끈질긴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혁명의 문제를 제기할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조건이 다시 한번 갖춰질 때, 미래 당을 위한 정치적, 조직적 준비의 일부로 여겨져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오늘날 혁명적 조직의 책무는, 1930년대 코뮤니스트좌파인 이탈리아 분파가 가장 명쾌하게 정교화한, 코뮤니스트 분파의 책무와 유사하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2017년 4월

    번역 ㅣ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주> 

    1) Notebook IV, the Chapter on Capital.

     

    <원문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nternational-review/201711/14435/22nd-icc-congress-resolution-international-class-struggle

     

    <이전 글> 

    1부. 계급투쟁 100년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4117

    2부. 해체의 충격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4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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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 2부. 해체의 충격

    •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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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해체의 충격

     

    11. 폴란드의 투쟁과 그 패배는 세계 계급 균형을 요약하여 보여주었다. 그 파업들은 동유럽 노동자들이 그들의 러시아 대군주를 대신하여 싸울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체제 위기 심화에 대한 혁명적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음을 명확히 했다. 실제로 폴란드 노동자들의 물리적 충돌은 그곳의 전 지역의 노동계급에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정치적 결과를 일으켰다. 이들 노동계급은 스탈린주의 정권의 해체를 촉발시킨 정치적 격변 때에는 계급으로서 존재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이후의 러시아, 헝가리, 그리고 폴란드의 권위주의적 정권이 내재하고 있는 사악한 민족주의 선전 파도에 취약해졌다. 잔혹한 억압 없이는 위기와 계급투쟁에 대처할 수 없었던 스탈린주의 지배계급은 역사적 환경의 변화에 적응할 정치적 유연성이 부족함을 드러냈다. 따라서 1980~81년의 상황은 이미 동쪽 블록의 전반적인 붕괴를 준비하는 것이었으며,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쇠퇴라는 새로운 단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자본주의 해체의 시기로 정의하는 이 단계는 보다 광범위한 계급 간의 교착상태에 그 기원이 있다. 1968년 이후 선진국들에서 터져 나왔던 계급운동은 반혁명의 끝을 고하는 것이었고, 노동 계급의 지속적인 저항은 경제 위기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해결책”, 다시 말해 세계 전쟁으로 가는 길을 막는 걸림돌이었다. 이 시기는 “대규모 계급 적대를 향한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었고, 또한 저항하는 노동계급과 정면으로 맞붙어 패배시키지 않고서는 전쟁으로 향하는 길이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새로운 단계에서는 계급투쟁의 수준과는 별개로 제국주의 블록 양쪽 모두의 해체가 세계 전쟁을 의제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과정에 대한 문제가 더는 동일한 용어로 제기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적대자를 극복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무능력함은 자본주의가 인류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야만의 미래밖에 없음을 의미했으며, 이 야만적인 미래의 윤곽은 지역적, 국지적 전쟁, 생태계의 황폐화, 계획적 대량학살, 동족상잔의 사회 폭력이 결합된 지옥과도 같은 광경에서 이미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이데올로기적 패배와 직접적인 물리력이 모두 필요한 세계전쟁과는 달리, 야만으로 떨어지는 이 “새로운” 하강은 더욱 느린 속도로, 노동계급을 집어삼키고 계급으로서 스스로 재구성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더욱 교활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세계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고 있는 상황은 더는 계급 간 세력 균형의 진화 정도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전반적으로 이를 측정하기는 더욱더 어려워졌다.

     

    12. 1968년 이후 코뮤니스트 운동 부활의 초기 단계에는 자본주의 쇠퇴라는 주제가 수많은 지지자를 설득시켰고, 부활한 코뮤니스트좌파의 강령적 기반을 제공했다. 오늘날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코뮤니즘을 인류가 직면한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여기는 새로운 이들의 다수는 쇠퇴라는 개념을 부정할만한 온갖 종류의 이유를 댈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자본주의 쇠퇴의 마지막 단계라고 정의하는 해체라는 것을 언급하기 시작하면,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다소 세계에서 동떨어져 나온 것처럼 여겨진다. 다른 그룹들은 모두에게 자유로운 제국주의 사이의 새로운 시기의 다음과 같은 주요 특성을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그들은 종교적 근본주의와 무시무시한 민족주의와 같은 심각하게 반동적인 이데올로기의 귀환, 자연과 사람의 관계 위기 등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주요한 징후를 인정하는 다른 그룹들은 존재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계급 간 세력 균형의 교착상태로부터 비롯되었다거나, 이러한 현상이 자본주의 쇠퇴의 질적 변화의 표현이라거나, 이러한 모든 단계나 시대가 프롤레타리아 혁명 없이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끌어내는 이들은 거의 없다. 해체라는 개념에 대한 반대는 종종 국제코뮤니스트흐름의 “세계종말론적” 성향에 대한 비판의 형태를 띠는데, 이는 우리가 해체의 시기를 자본주의 말기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관념론”적이라는 비판은 우리가 해체 배후의 경제적 위기를 핵심 요인으로 오랫동안 바라보았기 때문이지만, 우리는 순수한 경제적 요인이 새로운 시대의 출발에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러한 비판은 역사상 계급 사회의 마지막으로서의 자본주의가 이러한 종류의 역사적 막다른 길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전의 계급사회가 그 쇠퇴의 시기에 진입했을 때와는 달리, 자본주의는 그 내부에서 새롭고 보다 역동적인 생산 양식을 끌어낼 수 없으며, 사회적 삶의 보다 높은 형태로의 유일한 길은 경제적 법칙으로부터 비롯된 어떠한 자동화된 노동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인류 다수의 의식적인 운동, 말 그대로 역사상 가장 힘든 작업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다.

     

    13. 해체는 두 주요 계급의 전쟁 중 교착 상대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1989년 이후 계급의 어려움을 증가시키는 유효한 요인임이 드러났다. 지배 계급이 해체의 징후들을 착취 받는 이들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러시아 블록의 몰락을 동반한 코뮤니즘의 죽음에 대한 매우 잘 편집된 선전은 계급의 자신감과 역사적인 임무를 새로이 할 수 있는 역량을 더욱 침식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다. 코뮤니즘, 맑스주의, 심지어 계급투쟁 그 자체는 끝났다고, 죽은 역사일 뿐이라고 선언되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의식, 전투성, 그리고 정체성에 거대하고 지속적인 악영향을 미친 1989년의 사건은 단순히 거대한 규모의 반공산주의 선전의 결과가 아니었다. 이 선전의 효과성은 그 자체로 설명되어야 한다. 그것은 오직 1917년 이후 계속된 혁명과 반혁명의 독특한 발전의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소련을 적대한 전투적 반혁명의 실패와 더불어 동시에 세계 혁명의 패배와 함께 완전히 예측하지 못했던, 전례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프롤레타리아트 진영 내부에서 반혁명이, 소련 내부에서 역사적으로 발전한 자본주의 계급이 없는 자본주의 경제가 발생했다. 그 결과는 어떤 보다 높은 역사적 필연성의 표현이 아니라 단지 역사적 일탈의 표현이었다. 반혁명 부르주아 국가 관료제가 운영하는 자본주의 경제는 완전히 자격이 없는 것이었고, 그러한 임무에 적합하지도 않았다. 비록 스탈린주의 명령 경제가 소련이 2차 세계대전의 시련을 견뎌내는 데 효과적임은 드러났을지라도, 장기적으로 경쟁력 있는 국가 자본을 형성시키는 데에는 완전히 실패했다.

     

    비록 스탈린주의 정권이 쇠퇴하는 부르주아 사회의 특히나 반동적 형태였을지라도, 봉건적이거나 전제적인 종류의 정권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었고, 또한 “정상”적인 자본주의 경제도 결코 아니었다. 비효율적인 회사가 제거됨으로써 처벌되지 않는, 노동자들이 해고되지 않는 자본주의 경제는 부르주아지의 성공이 될 수 없다. 스탈린주의의 특수성을 반혁명의 예상치 못한 산물로 심각하게 이해한 덕분에, 국제코뮤니스트흐름은 1989년의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보기를 들어 스탈린주의는 노동자 투쟁이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파열에 의해 전복된 것이며, 이러한 동쪽의 붕괴는 유사한 서쪽의 붕괴를 미루는 조짐이 아니었다는 것 말이다. 그 붕괴는 지배계급에 마지막으로 큰 서비스를 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코뮤니즘의 죽음에 대한 선전은 현실에서 입증된 듯하다. 적절히 기능하는 자본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차이는 매우 중대하고 광범위하여 실제로 사람들에게 스탈린주의가 자본주의가 아닌 것처럼 비쳤다. 스탈린주의가 존재했던 이전에는 그것이 마치 자본주의의 대안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여겨졌었다. 비록 바로 이 대안이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을지라도 그 존재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무기고에 잠재적인 상처를 남겼다. 1960년대 계급투쟁의 부활은 이러한 상처로부터 반자본주의와 반스탈린주의를 동시에 이야기하는, 그리고 국가 관료제나 정당 국가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노동자평의회에 기반을 둔 혁명의 전망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1960년대와 70년대 많은 이들에게 세계 혁명은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 “그림의 떡”이었다면, 그 이유는 지배계급의 거대한 권력, 또는 인류라는 종이 내재한 이기주의와 파괴적인 본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감은 대중 투쟁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연대에서 평형추를 찾아낼 수 있고, 종종 실제로 그러했다. “사회주의” 정권이 붕괴한 1989년 이후 질적으로 새로운 요인이 부상했다. 자본주의 원칙에 기반을 두지 않고서는 현대 사회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의식과 계급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방어적 경제 투쟁을 전개하기도 더 어렵다. 왜냐하면, 대안 없이는 자본주의 경제의 필요라는 논리가 훨씬 더 큰 무게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계급투쟁이 당장 직면한 상황이 상당한 정도로 변화할 수 있는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해 전체로서의 노동계급이 전반적으로 맑스주의자가 되거나, 코뮤니즘에 대해 명확한 전망을 발전시킨다거나 하는 것이 반드시 필수적이지 않더라도, 다양한 분야의 계급이 자본주의가 뭔가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14. 그러나 전반적인 해체의 진행은 더욱 은밀하게 작동하고, “그 자체로” 노동 계급, 그리고 계급 정체성과 계급의식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특징은 1980년대 일어난 구조적 변화 때문에 “뒤에 남겨진” 장기 실업 계층과 부분적으로 고용된 계층들 사이에서 특히 뚜렷하다. 과거 실업 계층은 노동자 투쟁의 전위였으나, 이 시기 그들은 룸펜화, 조직폭력, 그리고 성전주의자(jihadism) 또는 네오파시즘과 같은 허무주의 이데올로기의 확산에 매우 취약했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이 89년 사건의 직접적인 여파를 예견한 바와 같이, 계급은 장기간 후퇴의 시기에 막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 후퇴의 길이와 깊이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엄청난 것으로 드러났다. 2006년(프랑스의 반 CPE 운동), 그리고 2009년에서 2013년 사이의 세계 각지의 수많은 나라(튀니지, 이집트, 이스라엘, 그리스, 미국, 스페인 등)에서의 새로운 노동계급 세대의 중요한 운동, 그리고 코뮤니스트 사상에 관심을 가지는 분위기가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모두 계급투쟁이 다시 한번 무대 중앙을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혁명 운동 발전의 새로운 단계가 열렸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의 많은 발전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혁명적 전위가 얼마나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15. 2011년 전후의 투쟁들은 경제적 위기의 심화 영향에 명백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경제적 위기란 보기를 들면 그 지지자들이 자주 언급하듯이, 고용의 불안정 그리고 심지어 몇 년간의 대학 교육을 이수한 젊은이들조차 기회가 부족한 점 등이다. 그러나 경제적 위기의 심화와 계급투쟁의 질적 발전 사이에는 어떤 자동적 연결도 없다. 그것이 이미 패배한 노동계급의 사기를 더욱 악화시키는 경향을 보였던 1930년대 대공황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다. 오랜 동안의 패배와 방향 상실 이후 2007~8년의 금융 지진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에 굉장히 부정적인 충격을 주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경제적 확장의 심장부에 있었으나 내재적 모순으로 이제 그 붕괴를 예고하고 있는 신용(credit) 시스템의 확장이 바로 중요한 요인이다. 이 “금융화”의 과정은 이제 거대한 금융 기관들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수백만 노동자들의 삶 수준에서도 작동했다. 이 수준에서 상황은 1920년대와 30년대의 것과 매우 다르다. 그 시절에는 노동자들을 제외한 이른바 중산 계급(적은 재산의 소유자, 자유주의적 전문가들 등)의 대부분에게 잃어버릴 저축이 있었고, 국가가 제공하는 보험이 있는 곳에서는 노동자들이 간신히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한 편에서 그러한 국가들에서 많은 노동자들의 당장의 물질적 상황이 80~90년 전보다 덜 극적이라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국가들에서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정확히 자신을 1930년대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에 놓여있음을 정확히 알 것이다. 그들은 종종 엄청난 규모의 채무자가 된 것이다. 19세기 동안, 그리고 1945년 이전의 많은 부분 동안, 오직 채권자 노동자들이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지역 술집이나 카페, 그리고 식품 소매점밖에 없었다. 어려울 때 그들은 오직 계급 연대에 의지해야만 했다. 주택과 건물 융자와 함께 큰 규모로 시작된 프롤레타리아의 신용대출은 최근 수십 년 동안의 대규모 소비자 부채의 전개와 함께 폭발했다. 노동 계급의 많은 부분에서의 이러한 신용 경제의 전례 없이 세련되고, 교활하고 불안정한 발전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에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부르주아지의 노동계급 수입의 전유는 감춰져 있으며, 그것이 저축의 평가절하, 은행 또는 보험 상품의 부도, 또는 시장에서의 주택 소유권 몰수의 형태로 나타날 때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복지 국가”의 보장과 그들의 재정이 점점 불안정해짐으로 인해 이러한 공공 체계에 대해 지급할 수 있는 이들과, 그들만큼 지급할 수 없이 그저 이들 체계에 의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뿐인 이들로의 노동자 사이의 구분이 더욱 쉬워진다. 그리고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빚의 늪에 떨어졌다는 사실은 프롤레타리아를 훈육하는 새롭고, 추가적인, 강력한 수단임을 보여준다.

     

    붕괴의 결과가 그 순손익이 많은 이들에게는 궁핍함으로, 그리고 작은 소수에게는 파렴치한 부의 이전이 될지라도, 충돌의 전반적인 결과는 자본주의 체계의 노동에 대한 이해를 날카롭게 하거나 확장시켜주지 않는다. 불평등의 증가에 대한 분노는 대부분 “부패한 도시 엘리트”를 향했고, 이는 우익 포퓰리즘의 주요한 강조점이 되었다. 위기와 동반하는 부정에 대한 반응이 미국의 점거 운동(Occupy movement)과 같은 보다 프롤레타리아적 형태의 투쟁을 불러일으켰을지라도, 이러한 운동조차 탐욕스러운 은행가, 심지어 사회에 대한 자신들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섬세하게 붕괴를 조장한 비밀 그룹에 대한 비판으로 향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상당 부분 약해졌다.

     

    16. 1917~23년의 혁명 물결은 1871년, 1905년의 봉기 운동과 같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해 점화되었고, 혁명가들이 전쟁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있어서 매우 호의적인 조건을 제공한다고 생각하게끔 했다. 실제로는 혁명 물결의 패배가 보여준 것은 전쟁이 계급 내 심각한 분열을 낳는다는 것이었고, ‘승리한’ 나라와 ‘패배한’ 나라의 노동자 간에 특히 그러했다. 더욱이 2차 세계 대전 종결 당시의 사건들이 보여주었듯이, 부르주아지는 1917년 일어난 일로부터 필수적인 교훈을 배웠고,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응 가능성을 제한하는 역량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적군들과의 우애를 다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도록 만드는 군사 기술 전략과 형태의 발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러시아 제국주의 블록의 몰락 이후 서쪽의 지배 계급의 약속과는 반대로, 그것이 열어젖힌 새로운 역사적 단계는 결코 평화와 안정이 아니라, 군사적 혼란, 아프리카와 중동 일부를 완전히 황폐화시키고 심지어 유럽의 문마저 흔든, 점점 더 지루한 전쟁의 확산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라크에서 야만이 드러나는 동안, 아프가니스탄, 르완다, 이제는 예멘과 시리아의 사건은 이러한 전쟁과 직접 관련된 부르주아지들이 있는 자본주의의 중심부를 포함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넓은 영역들에서 공포와 분노를 불러일으켰으나, 프롤레타리아 형식의 반대는 이러한 해체의 전쟁들 가운데 매우 드물었다. 직접 영향을 받은 나라들에서는 노동 계급은 스스로 지역의 군사적 갱들과 그들의 제국주의 스폰서들에 반대하여 스스로 조직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이는 시리아에서의 최근 전쟁에서 가장 명백했다. 이 전쟁에서는 공중 폭격을 비롯한 다른 형태의 폭격과, 무엇보다도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무자비한 대학살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 전선의 건설과 정권의 반대자들을 다양한 무장 갱으로 징용함으로써 발생한 최초의 사회적 불만들의 탈선이었다. 자본주의의 가운데에서는 그러한 소름 끼치는 시나리오는 주로 절망감과 무기력감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것은 주로 현재 체제에 대한 어떤 저항 시도도 오직 더 나쁜 상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어 보이기 때문이었다. “아랍의 봄”의 우울한 운명은 혁명의 가능성에 반대하는 새로운 논거로 쉽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과거 몇 년간의 유럽 주변부 모든 국가에 대한 야만적인 분할은 체제의 중앙에 있는 노동계급에까지 부메랑이 되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는 두 가지 문제로 요약된다. 한 편에서, 세계적 수준의, 그리고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는, 그 범위에 있어서 진정으로 지구적인, 난민 위기의 진행, 다른 한 편에서, 테러리즘의 발전이다.

     

    17. 유럽 난민 위기를 촉발시킨 순간은 2015년 여름 “발칸 루트”로부터 비롯된 난민에 대한 독일(그리고 오스트리아) 국경 개방이었다. 메르켈 총리의 이러한 결정의 동기는 두 가지였다. 우선 독일의 경제적, 인구통계학적 상황(주요 산업에서 당장 질적으로 보증되고 “동기화된” 노동력의 부족해질 것이라는 전망). 두 번째로, 남동 유럽이 수백만의 난민들을 감당하지 못해 법과 질서가 붕괴될 위험. 그러나 독일 부르주아지는 다른 세계, 특히 유럽의 다른 지역에 대한 일방적인 결정의 결과를 잘못 계산했다. 중동 아프리카에서, 수백만의 난민들과 자본주의 비참함의 다른 희생자들은 유럽으로, 특히 독일로 도망갈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셍겐(Schengen)”조약 또는 “더블린 난민 협정”과 같은 조약이 있어 독일의 문제를 EU 전체의 문제로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의 첫 번째 결과는, 그러므로, 아마도 지금까지 그 역사상 가장 심각한 유럽 연합의 위기였다.

     

    유럽에 수많은 난민이 도착하자 처음에는 전체 사람들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자연스러운 동정의 물결 – 이탈리아 또는 독일과 같이 충동이 여전히 강한 나라들에서 - 이 일었다. 그러나 이 충동은 곧 유럽의 외국인 혐오 때문에 파묻혀 버렸다. 이러한 외국인 혐오는 포퓰리스트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법과 질서의 비밀 군대와 전문적 수호자들에 의해서도 이뤄졌다. 이들은 갑작스럽고 통제되지 않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유입을 매우 경계했다. 그들이 사는 국가가 어디인지 밝혀지지 않은 엄청난 숫자의 무슬림 유입이 유럽 내에서 이민자들의 하부 공동체를 발달시키게 될 것이라는 공포는 테러리스트의 유입에 대한 공포를 동반했다. 이러한 공포는 프랑스, 벨기에, 독일에서의 테러 공격의 증가 때문에 강화되었다. 독일 하나만 보아도, 이민자들을 향한 우익 테러 공격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이전 옛 동독 일부에서는 실체적인 대학살의 분위기가 전개되었다. 서유럽은 전반적으로 경제 위기 이후 우익 포퓰리즘의 불길에 부채질하는 (근본주의자 테러 때문에 증가한) “난민 위기”가 두 번째로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2008년 이후 경제 위기가 어떻게 세계 경제를 관리하는 것이 최선인가에 대한 부르주아지 내부의 심각한 분열의 길을 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2015년 여름은 이민에 대한 합의의 종말의 시작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정책의 기반은 지금까지 반쯤 개방된(semi-permeable) 국경의 원칙이었다. 도널드 트럼프가 쌓길 원한 멕시코 장벽은 이미 존재하며, (군사적 순찰선 또는 공항 감옥 등의 형태로) 유럽을 둘러싸고도 그와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 장벽의 목적은 이민의 속도를 늦추고 규제하는 것이지 막는 것이 아니다. 불법 이민은 그들을 범죄화하여 그들이 어떤 사회적 보상의 권리도 받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조건 아래 적은 임금만을 위해 일하게 강요한다. 더욱이, 승인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 수밖에 없도록 함으로써, 국경 지역의 체제는 결국 가장 용감하고, 단호하며, 역동적인 이들만 선별하는 야만적인 선택 메커니즘의 한 종류가 되었다.

     

    2015년 여름은 사실 존재하는 이민 시스템 붕괴의 시작이었다. 이민하려는 이들은 계속 증가해 왔던 반면, 그들이 이민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나라의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감소하는(독일의 경우는 다소 예외이다) 이 불균형은 더는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하듯이, 포풀리스트들은 손쉬운 해결책을 내놓았다. 이 반쯤 개방된 국경을, 그 어떤 수준의 폭력이 필요할지라도 폐쇄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그들의 제안은 부르주아지의 관점에서 매우 그럴듯하게 여겨졌다. 그것은 전 국가 수준의 “폐쇄된 사유지(gated communities)” 논리의 적용에 불과하였다.

     

    여기서 다시, 이러한 상황이 노동계급의 의식에 미친 영향은, 당장은, 매우 부정적이다. 동쪽 블록의 붕괴는 마치 서쪽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승리의 증거인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위기의 심화가 결국 자본주의가 최고의 현실적인 체제라는 이미지에 손상을 주는 데 역할을 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위기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난민들뿐만 아니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과거 자본주의의 중심부로 목숨을 걸고 갈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은 오직 이러한 구역이 (적어도 비교적으로는) 천국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상대적으로 번영과 안정의 지역이라는 인상을 강제로 심어줄 뿐이다.

     

    세계 경제의 붕괴가 미국과 독일에 집중되었던 1930년대의 대공황 시절과는 달리 오늘날은 지구화된 자본주의 관리로 인해 자본주의 중심 국가들이 무너지는 것은 마지막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일하진 않지만) 특히 유럽과 미국에서 포위된 요새와 같은 상황이 등장했다. 이 지역의 노동계급은, 심지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뒤에서 적극적으로 동원되지는 않더라도, 외부로부터의 공동 위험으로 여겨지는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착취자들이 자신을 보호해주길 바라는데(심리학적 용어를 빌자면, “침략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이러한 위험은 현실이다.

     

    18. 중동 전쟁에서의 테러 공격에 대한 “반응”은 최근의 난민 위기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2001년 알카에다의 쌍둥이 빌딩 공격 뒤로 마드리드와 런던 교통 체계에 대한 더 극악무도한 테러는 이미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이 그들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뿌린 씨앗이 소용돌이가 되어 나타났으며 이를 거두어야 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최근 독일, 프랑스, 벨기에, 터키, 미국 등지에서의 살인의 급증은 IS(Islamic State) 탓이지만, 비록 미숙하고 심지어 변칙적인 특징임에도 불구하고 훈련받은 테러리스트 “군인”과 고립되고 불안한 개인들을 구분하기 점점 더 어려워진 탓이기도 하며, 이것이 난민 위기와 함께 발생함으로써, 전체 주민들 가운데 의심과 편집증적 과대망상을 강화하였고, 이는 결국 형식이 없고 예측할 수 없는 “내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동시에, IS와 그 모방자들의 허무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반-게토화된 거대한 서쪽 도시들 속에서 더는 미래가 없음을 인식하는 불만이 가득한 이민지 청년들에게 짧은 영광의 순간을 제공한다. 해체의 시대 테러리즘은 더욱더 국가와 준-국가 사이의 전쟁 수단이 되고 있으며, 동시에 국제주의의 표현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19. 그러므로 최근의 포퓰리스트의 등장은 이 모든 요인들 – 2008년의 경제적 붕괴, 전쟁의 충격, 테러리즘, 그리고 난민 위기 – 에 의해 성장했고, 체제 해체와, 사회의 두 주요한 계급들 모두 인류에게 미래를 위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농축된 표현으로 나타났다. 지배 계급의 관점에서는 70년대 개방 경제 위기의 출발에서부터 자본주의가 유지되고 심지어 축적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해 주었던 “신자유주의” 합의가 소진됨을, 그리고 특히 전후 호황을 지배했던 케인즈주의 정책이 소진됨을 의미했다. 2008년 붕괴는 이미 존재하던 매우 부유한 소수와 대다수 사이의 거대한 부의 격차를 보다 넓혔는데, 탈규제와 지구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들에 의해 고안된 틀 내에서의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 등은 부르주아지의 점점 더 많은 이들, 신자유주의와 신케인즈주의를 같은 선전 연설 중에 동시에 지지할 수 있는 이들 포퓰리스트 우익과 같은 이들 사이에서도 문제시되고 있었다. 포퓰리스트 정책의 본질은 부르주아 사회 불평등의 정치적, 행정적, 그리고 법적 공식화이다. 2008년 위기가 상황을 보다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이러한 공식적인 평등이 전에 없이 명확한 사회적 불평등의 진정한 기반이라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해결책 – 계급 없는 사회 - 을 내놓지 못하는 지금 상황에서, 포퓰리스트의 반동적 대책은 존재하는 위선적인 가짜 평등을 노골적이고 “솔직한” 불법적 차별 체제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것이 트럼프 대통령의 고문, 스티브 배넌(Steve Bannon)이 주창한 “보수적 혁명”의 핵심이다.

     

    “미국 먼저”(America First)와 같은 슬로건이 의미하는 바를 가리키는 첫 번째 징후는 국민 전선의 선거 강령, “프랑스 먼저”(France d’abord)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고용, 세금, 그리고 사회 복지의 모든 수준에서 유럽 연합의 다른 국적 사람들보다 프랑스 시민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것을 주장하는데, 결국 다른 외국인들에 비해 우선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논쟁이 영국에서 있었는데, 브렉시트 이후 유럽 연합의 시민들이 영국 원주민과 외국인 중간 지위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영국에서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주요 논지는 유럽 연합의 거래 정책에 대한 반대이거나, 대륙인 유럽을 향한 영국의 보호주의적 충동 같은 것이 아니라 이민과 국내 노동 시장에 대한 “민족적 주권을 다시 획득”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지였다. 이 주장은 장기적 민족 경제의 성장 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오직 다른 모든 이들을 차별함으로써만 원주민의 삶의 조건이 다소간 안정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20. 이른바 금융과 유로 위기는 1989년 이후 계급의식, 계급 정체성과 전투성의 장기간의 심각한 퇴조에 치료약이 되는 대신 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특히, 일반 프롤레타리아트 계층에서의 연대 상실의 치명적인 효과는 심각하게 증대했다. 특히, 우리는 희생양 현상, 이 사회의 잘못이 무엇이든 간에 세계의 모든 악이 투영된 사람을 비난하는 현상을 보고 있다. 그러한 생각은 대량학살로 가는 문을 연다. 오늘날 포퓰리즘은 매우 충격적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사회관계 속에 퍼져 있는 문제의 유일한 형식은 아니다. 노동계급의 일터에서, 그리고 삶에서 그것은 협력을 약화시키고, 원자화, 그리고 상호 의심과 약탈의 발전을 부추긴다.

     

    맑스주의 노동자 운동은 이러한 경향에 평형추가 되는 데 도움이 되는 이론적 통찰을 오랜 시간 동안 방어해왔다. 두 가지 가장 본질적인 통찰은 1) 자본주의 아래에서 착취는 비인간적 성격이 된다. 왜냐하면, 시장의 “법칙”(가치법칙)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자들은 스스로 이러한 법칙에 복종한다. 2) 이러한 기계와 유사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계급 간 사회관계이다. 왜냐하면, 이 “체제”는 부르주아 국가 의지의 법칙(자본주의 사적 소유의 창조와 강요)에 기반을 두고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급투쟁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다. 계급투쟁은 사람과 싸우는 대신, 사회관계를 바꾸기 위해 직접 체제 – 체제를 체화하고 있는 계급 – 를 목표로 한다. 이러한 통찰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더 의식적인 계급의 층위라고 해서 희생양에 대한 면역력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더 많은 회복탄성력을 준다. 이러한 통찰들은 심지어 반혁명의 가운데서도, 그리고 심지어 독일에서도,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반유대주의에 더욱 오랫동안 저항했는지 그 이유를 일부 설명해 준다.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전통은 지속해서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노동 계급은 계급 일부가 심각하게 그에 영향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종류의 독의 확산에 유일하게 진정한 방패로 남아있다.

     

    21. 이 모든 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정치적 성격을 전반적으로 바꾸게 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당장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유리하지 않다. 미국이나 폴란드와 같은 나라들에서는 포퓰리스트가 현재 집권해 있는데, 거리의 대규모 저항은 어쨌든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와 그 “자유주의적” 규제들을 방어한다. 대중들을 동원하는 또 하나의 이슈는 브라질, 한국, 루마니아 또는 러시아에서와 같은 부패에 대한 투쟁이다. 이탈리아의 오성(Five Star) 운동도 주요하게는 같은 문제로 고무되었다. 부패는 자본주의의 풍토병으로, 자본주의의 마지막 시기의 유행병과 같은 것이다. 국가 자본의 이해를 방어하는 가운데에는 부패가 생산력과 경쟁력을 방해하는 한 이에 저항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므로 그런 저항에서 국기를 흔드는 대중들이 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부르주아 선거 과정에서의 이해관계의 재편도 있다. 연대의 후퇴 영향 아래에서 노동계급 일부분은 포퓰리스트에 투표하는 희생자가 되거나 기존의 정치 계급에 반대하는 종류의 것에 빠진다. 오늘날 해방의 대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은 노동자들이 포퓰리스트를 선택함으로써 지배 계급에게 충격을 주고 압박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아마도 더 큰 위험은, 생산 과정의 핵심에 있는, 가장 현대화되고 지구화된 계급의 부문들이 혐오스러운 포퓰리스트의 배타주의에 분노하고, 이러한 정치적 흐름이 이미 존재하는 질서의 안정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다소 명확한 이해를 함으로써,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정권의 군림을 방어하는 함정에 빠지는 것에 있다.

     

    22. 포퓰리즘의 등장, 그리고 반 포퓰리즘의 등장은 노동 계급이 악의 파시즘과 반파시즘 사이에 붙잡혀 버렸던 1930년대와 어떤 유사함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역사적 상황은 1930년대의 그것과 같지 않다. 그 시기에는 소련과 독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 반대뿐만 아니라 물리적 패배로 고통 받았다. 이와는 반대로, 오늘날은 반혁명의 상황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지배계급이 프롤레타리아트에 물리적 패배를 강요하는 모든 시도를 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1930년대와 또 하나 다른 점이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포퓰리즘 또는 반포퓰리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집착이 전혀 결정적이지 않다. 포퓰리즘 후보를 찍는 많은 노동자들은 어느 날 자신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투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반포퓰리즘 시위에 사로잡혀 있는 노동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오늘날 노동계급, 무엇보다 과거 자본주의의 중심부에 사는 이들은, 계급의 특정 부문에서 민족주의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국가의 이해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싸울 가능성 또한 잃지 않았다. 이러한 잠재력은 68년에서 89년 시기, 그리고 2006년과 2013년 사이의 투쟁보다 훨씬 더 분산되고 단기적인 방식이라고 할지라도 지속해서 표면 위로 떠오른다. 동시에 소수 프롤레타리아 가운데 어려움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심사숙고와 성숙의 과정이 계속되며, 이것이 다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더 넓은 계층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더욱 숨겨진 과정을 반영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계급을 공포로 몰아넣으려는 시도는 정치적으로 위험하고 반생산적일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착취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강점 중 하나를 구성하는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노동자들의 현존하는 환상에 강하게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막다른 길의 해체하는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효과를 이용하는 것은 노동계급을 약화시키는 자본가 계급의 객관적인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다.  <3부로 이어짐>

     

    <원문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nternational-review/201711/14435/22nd-icc-congress-resolution-international-class-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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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 1부. 계급투쟁 100년

  •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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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이 글은 ICC(국제코뮤니스트흐름) 22차 국제대회에서 채택한 결의문이다.

     

     1. 예상치 못한 영국의 EU 국민투표 결과 직후,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불안과 공포의 파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현재 세계 질서를 책임지고 있다고 여기는 우리의 지배자들이 어떻게 그런 일 – 자본가 계급의 ‘합리적’ 이해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 – 이 발생하도록 놔두었는가? 어떻게 도박꾼, 자기도취에 빠진 악당이자 사기꾼이 이제 세계의 가장 강력한 국가의 수장인 것인가?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도, 전 세계의 향방에 대해 이 사건이 이야기해주는 바가 무엇인가?

     

     

    1부. 계급투쟁 100년

     

     2. 우리의 관점에서 인간 사회의 진정한 조건을 계급투쟁의 관점, 그리고 사회의 착취 받는 계급, 진실을 숨기는데 아무런 관심이 없고 자본주의 전복을 목표로 하여 자본주의의 모든 신비화를 간파할 수밖에 없는 투쟁을 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관점에서 볼 때만 이해할 수 있다. 똑같이, 현재 당장 지엽적인 사건들은 세계-역사적인 틀 속에 위치 지울 때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맑스주의 방법의 본질이다. 2017년, 이 해가 러시아 혁명의 100주년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이유로, 세계적 상황에서 최근 진전이 있는 역사적인 시대 – 자본주의 생산 양식 쇠퇴 또는 퇴락의 시대 - 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100년 그 이상을 되돌아보기를 시작한다.

     

    러시아 혁명은 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의 공포에 대한 러시아 노동계급의 대응이었다. 1919년 코민테른이 확인하였듯이, 이 전쟁은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자 자본주의 상승기의 폐막을 나타냈다. 경쟁하는 국가들로 세계를 나누었던 장벽을 허물면서, 자본주의 ‘세계화’의 거대한 폭발 다시 말해 ‘전쟁과 혁명’의 시대가 닥쳐온 것이었다. 모든 나라에서 부르주아 국가를 전복시킬 수 있는 노동계급의 역량,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향해 계급을 지도할 수 있는 정치 정당과 함께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역량은 자본주의 야만을 교체한다는 약속이 역사적으로 가능하며 필연적이라는 것을 나타냈다.

     

    더욱이, 1917년 혁명 운동의 전위에 있었던 볼셰비키 당은 러시아에서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의 권력 쟁취가 오직 세계 혁명의 발단으로서 첫 타격일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와 똑같이, 독일 혁명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10월 봉기가 제기한 도전에 반응하지 않고, 자본주의 체계를 끝장내지 않는다면, 인류는 심화하는 야만의 시대, 인간의 문명을 위험에 빠뜨릴 전쟁과 파괴가 휘몰아치는 시대에 돌입할 것임을 이해했다.

     

    세계 혁명을 염두에 두고, 이제는 반혁명적인 사회민주당에 대한 대안을 마련할 필요에 따라 볼셰비키 당은 코민테른의 창설을 주도했고, 1919년 모스크바에서 첫 대회가 열렸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새로운 코뮤니스트당은 서유럽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확장되는 선두에 있었다.

     

     3. 러시아 혁명은 세계적인 수준의 대대적 파업과 봉기를 촉발해 실제로 부르주아지의 제국주의 학살을 중단하도록 강제했지만, 예외적으로 헝가리와 독일의 도시들에서의 일시적인 몇몇 시도를 제외하면, 국제 노동계급은 다른 국가들에서 권력을 쟁취할 수 없었다. 잠재적이지만 자신의 무덤을 팔 이들의 위협에 직면한 지배 계급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응하여 숙원의 적과 연합함으로써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봉쇄, 침략, 그리고 무장된 반혁명을 지원함으로써 러시아의 소비에트 권력을 고립시켰고, 제국주의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자본에 충성을 보여준 사회민주주의노동자정당과 노동조합을 이용하여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에 침투하거나 그것을 무력화하고, 그들이 새로운 ‘민주주의적’ 부르주아 정권에 순응하도록 우회시켰다. 그러나 패배는 이제는 반동적인 지배계급의 지배 역량 때문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미성숙함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노동계급은 개혁을 위한 투쟁에서 혁명을 위한 투쟁으로 갑작스러운 전환에 직면해 있었고, 여전히 민주주의적 선거를 통해, 중요 산업의 국유화 또는 사회의 가장 가난한 계층에게 사회적 이득을 양도해 자본주의 정권을 개선시킬 가능성에 대한 수많은, 심각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이에 더하여 노동계급은 꽃다운 젊은이들이 학살당한 전쟁, ‘승리한’ 노동자와 ‘패배한’ 국가의 깊은 분리를 일으킨 전쟁의 공포에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당은 고립, 내전, 그리고 경제 붕괴에 직면해 있었고, 더욱이 소비에트 국가기관과의 복잡한 문제로 얽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 당은 일련의 끔찍한 오류를 저질렀는데, 이러한 오류는 결국 노동계급과 폭력적인 대립을 앞당겼다. 특히 노동자의 반대와 정치조직에 대한 억압을 포함하는 ‘적색 테러’는 1921년 크론슈타트 봉기를 진압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는데, 이 봉기는 1917년에는 존재했던 진정한 소비에트 권력 회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국제 수준에서 코민테른 역시 세계 혁명의 필요보다 소비에트 국가의 필요에 점점 더 기울었고 원래의 명료함을 훼손하는, 1922년에 채택한 통일전선전술(United Front Tactics) 같은 기회주의적 정책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타락은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 정당으로 유명하고 중요한 좌익 반대파의 등장에 이바지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정당에서 이탈리아 분파가 결국 패배한 혁명의 교훈을 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에 밝혀낼 수 있었다.

     

     4. 따라서 세계 혁명 물결의 패배는 1917~18년의 혁명가들이 이러한 실패의 결과 – 야만의 시대로의 새로운 추락 - 에 대해 경고했던 것이 진실임을 확인시켜주었다.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변질되었을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하는 자본주의 독재로 변해버렸다. 그것은 ‘일국 사회주의’ 원칙을 내세운 스탈린주의 국가기관의 승리로 (비록 시작한 것은 그들이 아니었을지라도) 확인한 과정이었다. 혁명의 위협을 끝내기 위해 삽입된 ‘평화’는 곧 새로운 제국주의 갈등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1929년 과잉 생산으로 인한 세계 위기의 발발로 가속화, 강화되었는데, 이러한 과잉 생산은 자본 확장이 그 내재적 한계에 도달할 것이라는 신호였다. 체계의 심장부, 특히 미국과 독일의 노동계급은 경제적 불황의 충격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으나, 이 계급은 비록 미국과 스페인에서 일부 진정한 계급 저항의 표현이 있었음에도 10년 전 혁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근본적으로 패배한 계급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세계 전쟁으로의 또 다른 진군을 막을 수 없었다.

     

     5. 반혁명의 갈고리에는 세 개의 주요한 갈퀴가 있었다. 스탈린주의, 파시즘, 그리고 민주주의. 이들 각각은 노동계급의 정신에 깊은 상처를 새겼다.

     

    반혁명은 혁명의 불꽃이 가장 높게 타올랐던 국가들 – 러시아와 독일 - 에서 가장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유령을 쫓아내야 할 필요, 역사상 가장 큰 경제적 위기에 적응할 필요, 그리고 전쟁 준비의 필요에 직면한 모든 곳에서 자본주의는 전체주의적 형태를 띠기 시작했고, 사회경제적 삶의 모든 모공에까지 침투했다. 스탈린주의 정권은 완전한 전쟁 경제, 모든 반대의 격멸, 무시무시한 착취율, 광범위한 강제 수용소 등의 기조를 세웠다. 그러나 수십 년 후의 삶과 죽음에서 스탈린주의의 가장 최악의 유산은 그들이 10월 혁명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가면을 썼다는 것이다. 자본을 국가의 손에 집중시키는 것이 사회주의인 것인 양, 제국주의 확장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인 양 세계에 팔려나갔다. 10월 혁명의 기억을 여전히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을 때는 많은 노동자가 이런 사회주의 조국이라는 신화를 믿었지만, 스탈린주의 정권의 진정한 본질이 계속 폭로됨에 따라 더 많은 이들이 혁명에 대한 모든 사상에 등을 돌렸다. 스탈린주의가 코뮤니즘(공산주의)의 전망, 노동계급 혁명이 높은 수준의 사회 조직 형태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에 가한 피해는 막대하다. 스탈린주의가 구름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끌어내리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국제 계급 운동의 패배와 무엇보다도 정당을 타락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가 된 1914년 사회민주주의당의 변절 이후, 20년이 되지 않은 기간 동안 노동계급이 힘차게 만들고 방어한 조직이 노동계급을 다시 한번 배신하고 가장 최악의 적이 된다.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신감, 사회적 삶을 더 높은 수준으로 인류를 이끌어갈 가능성에 대한 확신에 이보다 더 큰 타격이 있을 수 있었을까?

     

    지배계급, 그리고 중간계급에 버림받은 이들, 그리고 심지어 노동계급 운동의 변절자들로부터 출발한 운동인 파시즘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가장 강력한 분파가 받아들였는데, 이는 그들의 필요 - 프롤레타리아트를 분쇄하고 전쟁 동원을 완수하는 것 - 에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파시즘은 부르주아 사회의 표면 아래에 있는 비합리성의 어두운 힘을 해방하는 근대적 기술 사용에 특화되어 있었다. 특히 나치즘은 독일에서 더욱더 파괴적인 패배의 산물이었는데, 중세적 대학살을 안정화, 산업화시키고, 결국 자기-파괴를 향한 광적인 행진으로 타락한 대중들을 끌고 가는 등 비합리성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노동계급은 전체적으로 파시즘에 대한 어떤 긍정적인 생각에도 흔들리지 않았으나, 반대로 반파시즘의 유혹 - 다가올 전쟁에 대비해 뭉치자는 주요한 호소 - 에는 훨씬 취약했다. 그러나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에 대한 전례 없는 공포는 스탈린주의 강제수용소 못지않게 인류의 미래에 대한 확신 – 곧 코뮤니즘의 전망 – 에 대한 타격이었다.

     

    선진 산업화 국가에서 부르주아 지배의 주요한 형태인 민주주의는 이러한 전체주의적 형태에 대해 적으로 자신을 포장했는데, 사실은 혁명적 노동자 운동을 끝장낼 때, 스탈린주의 정권과 전쟁에서 연합하여 히틀러 독일을 상대할 때에는 파시즘 지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전쟁 중에 무너져 버린 파시즘이나, (중국과 기괴한 북한 정권의 경우를 제외하고) 경제 위기의 압박과 자본주의 세계 시장과 - 이를 국가 조례 등으로 회피하려 하였으나 그러지 못하고 - 경쟁할 수 없는 무능력함으로 무너져 버린 파시즘보다 훨씬 더 지능적이고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적 전체주의의 형태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체계의 위기에 대해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관리자들은 시장의 힘을 왜곡시키는 국가와 신용의 힘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으나, 물질적, 전략적 약점으로 인해 동구 블록이 선택했던 하향식 중앙집중화라는 극단적인 형태를 선택하도록 강요된 것은 아니었다. 민주주의는 그 경쟁자들에 비해 오래 살아남았고, 이제는 서구의 오랜 자본주의의 심장부에 남은 유일한 경기가 되었다. 오늘날까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파시즘에 반대하여 민주주의를 지지할 필요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불경한 것이며, 자본주의의 정면 뒤에 지배계급의 독재가 있다는 주장은 음모론으로 기각된다. 이미 1920년대와 30년대, 민주주의에서 대중매체의 발전은 괴벨스가 부러워한 공식적인 선전 유포 모델을 제공했으며, 그동안 미국 자본주의의가 개척한, 여가와 가족의 삶의 영역에까지 침투한 상품 관계는 자본주의의 전체주의적 지배로 더욱 교묘한 경로를 제공했고, 이는 단순히 정보제공자와 노골적인 테러에 의존하는 것보다 효과적이었다.

     

     6. 30~40년대 동안 국제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던 혁명적 소수는 매우 감소했는데, 그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종전(終戰)은 새로운 혁명의 등장을 일으키지 않았다. 반대로 1917년의 교훈을 학습하여 처칠을 전위로 한 부르주아지가 독일 도시들에 융단 폭격을 하는 한편, 1943년 북부 이탈리아의 대대적 파업에 대해 “이탈리아 스튜는 그들의 국물로 만들어라!”라는 정책을 통해 어떤 프롤레타리아 봉기도 가능하지 않도록 그 싹을 잘라버렸다. 그러므로 종전은 노동계급의 패배를 심화시켰다. 그리고 또다시 혁명가들의 기대와 달리, 전후 경제는 더 심한 경제적 불황에 돌입하지 않았으며, 전쟁에 승리한 블록 간의 제국주의 적대가 인류의 목을 조이려 계속 위협하고 있음에도 세계 전쟁으로의 새로운 추동 또한 없었다. 오히려 전후 시기는 미국의 지도력 아래 자본주의의 진정한 확장기였으며, 세계 시장의 일부분(러시아 블록과 중국)이 서방 자본의 침투를 차단하려 했음에도 그러했다. 동구 블록의 긴축 재정과 억압이 계속되자 중요한 노동자들의 봉기(1953년 동독, 1956년 폴란드와 헝가리)가 발생했으나, 서구에서는 1947년 프랑스의 파업과 같이 일부 전후 불만에 대한 표현이 있었으나, 계급투쟁은 점차 사그라들어 사회학자들이 소비주의의 확산과 복지국가 발전의 결과로 노동계급이 ‘중산계급화’한다는 이론화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실제로 1945년 이후 자본주의의 이러한 측면들은 중요하게 남아, 노동계급 자신을 혁명 세력으로 재조직화할 가능성에 무게를 더했다. 소비주의는 노동계급을 원자화했고, 모든 사람이 개인적 소유의 낙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환상을 전파했다. 복지주의는 좌익 정당이 종종 도입했는데, 이것은 노동계급의 승리로 표현되지만, 사실 자본주의 통제의 훨씬 더 중요한 도구이다. 복지주의는 노동계급의 자신감을 갉아먹고 국가의 자비에 의존하도록 만든다. 또한, 대규모 이민의 단계에서 민족 국가의 복지 조직은 건강·의료, 주택, 그리고 다른 복리후생에의 접근의 문제에 있어서 이민자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노동계급 내의 분리를 발생시키는 잠재 요인이 될 것이었다. 그동안 1950년대와 60년대 노동계급의 명백한 소멸과 더불어 혁명적 정치 운동은 역사상 가장 고립된 상태로 축소되었다.

     

     7. 이러한 암흑기에도 계속 활동한 혁명가 중 일부는 자본주의가 관료제 국가 관리 덕분에 맑스가 분석한 경제적 모순을 통제할 방법을 학습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의 국제주의 그룹(Internacialismo group)과 같은 더욱 선견지명이 있었던 이들은 오랜 문제들 – 시장의 한계, 이윤율의 하락 경향 – 이 사라질 수 없으며, 60년대 후반 경험한 재정적 어려움은 노골적인 경제 위기의 새로운 단계를 예고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들은 또한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세대가 계급투쟁을 다시 주장함으로써 이러한 위기에 반응할 수 있는 역량에 대해 환호했는데, 이러한 예측은, 수십 년 동안의 반혁명이 끝을 맞이했으며, 세계 전쟁으로의 과정을 촉발하는 새로운 위기를 막아온 주요한 방해요인이 프롤레타리아 투쟁이었음을 보여준, 1968년 5월 프랑스의 엄청난 운동과 그 후의 국제적인 투쟁의 물결로 충분히 확인되었다.

     

     8. 60년대 말 70년대 초의 프롤레타리아 봉기에 앞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폭넓은 계층 사이에서 정치 불안이 고조되었는데,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러했다.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과 인종 분리에 대한 반대가 있었고, 현대 자본주의의 분석에서 더욱 이론적으로 접근하는 데 관심을 표명한 독일 학생들 사이의 운동, 프랑스에서의 베트남 전쟁과 대학의 억압적 정책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운동, 현명한 사회학자들이 진부하다고 한 계급투쟁의 필연성을 다시 주장한 전후 이탈리아 맑스주의 ‘오퍼라이스트(operaist)’ 또는 자율주의적 경향 등이 있었다. 모든 곳에서 전후 경제 번영의 감미로운 과실이라고 광고하는 비인간적인 삶에 대한 불만족이 고조되었다. 프랑스와 다른 산업 국가들에서 전투적 투쟁의 증가로 동력을 얻은 소수는 의식적인 국제주의 정치 전위의 건설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이러한 소수의 일부가 좌익공산주의(코뮤니스트좌파)의 기여를 재발견하기 시작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9.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다시피, 이러한 소수와 광범위한 계급 운동의 만남은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가끔 발생했다. 이것은 불만을 품은 소부르주아지가 정치화된 소수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일부 기인한다. 특히 학생 운동은 자본주의 조직의 변화를 가져올, 다음 수십 년 넘게 존재할 강력한 프롤레타리아 핵심이 부족했다. 또한, 전 세계에 걸쳐 강력한 계급 운동 그리고 노동조합과 좌파 정당이 노동자들을 저지하느라 발생한 심각한 대결에도 계급투쟁의 다수는 방어적으로 남아있었다. 오직, 아주 가끔 직접 정치적 의문을 제기할 뿐이었다. 더욱이 노동계급은 동서 간 ‘철의 장막’ 그리고, 자본 중심에 있는 소위 ‘특권적’ 노동자와 이전 식민지 지역 빈곤한 대중들 사이의 분리와 같은 세계적 수준의 중요한 분리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는 동안 정치적 전위의 성숙은 즉각적인 혁명의 전망에 따라 억제되었고, 소부르주아지 성급함의 전형인 활동가(activist) 관행들은 혁명적 작업과 정치화된 소수가 직면한 거대한 규모의 이론적 작업이 가지는 장기적 성격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 활동가주의(activism)의 우세는 소수의 다수가 좌익주의(leftism)의 부활에, 또는 투쟁이 침체 되었을 때는 타락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좌익주의를 거부한 이들은 종종 조직 건설의 문제 전체를 거부하는 평의회주의적 주장들에 의해 방해받았다. 그러나 작은 소수는 이러한 방해를 극복할 수 있었고, 성장과 재그룹화 움직임 활동을 개시, 1970년대까지 지속하여 코뮤니스트좌파(좌익공산주의)의 전통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코뮤니스트좌파 국제대회(International Conferences)의 몰락으로 상징되는 1980년대 초 갑작스럽게 끝났다. 1968년 거리에서 그리고 회의에서 제기되었던 동구와 서구의 자본주의를 새로운 사회로 대체하는 문제에 싹을 틔우고 보다 진전된 정치 수준에 이르게 하는 데 실패한 이 시기의 투쟁은 결국 뒤이은 시대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도 프롤레타리아 에너지의 거대한 폭발은 그 열기를 모두 잃지 않았고, 지배 계급은 이 에너지의 시선을 돌리고, 탈선시키고, 억압하기 위해 합심하여 노력을 기울였다. 근본적으로 이는 정치적 수준에서 발생했는데, 여전히 노동계급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자본주의 좌파와 노동조합의 힘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었다. 좌파 정부를 선출할 것이라는 약속을 통해서든, 1968년 이후 20년 동안의 급진적 노동조합주의 발전과 함께하는 ‘좌익 반대파’ 전략을 통해서든, 노동자들이 여전히 어느 정도는 그들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기관(역자 주: 노동조합)의 도구화는 계급투쟁 억압에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동시에, 부르주아지는 세계 위기에 따른 모든 구조 변화를 가능한 전부 이용했다: 한 편에서는 항만, 자동차, 그리고 인쇄 같은 산업들에서 숙련, 비숙련 노동을 모두 대체하는 기술적 변화를 도입하였고, 다른 한 편에서는 과거 자본 중심지의 모든 산업 연결망을 파괴하고, 노동력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싸고 이윤은 엄청나게 큰 주변 지역으로 생산을 옮겨가는 생산 과정의 ‘세계화’를 향한 운동을 가져왔다. 이러한 심장부에서의 노동계급 구성의 변화는, 종종 70년대와 80년대 초반 투쟁 중심지에 있었던 영역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제는 계급 원자화에 영향을 미치고 그 계급 정체성을 훼손시키는 데 기여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되었다.

     

     10. 1968년 해방된 투쟁의 역동성은, 몇몇 일시중단에도 70년대에 걸쳐 지속하였다. 자기 조직화와 확장에 관한 프롤레타리아 역량의 성숙도는 1980년 폴란드 대중 파업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이 절정은 동시에 쇠퇴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했다. 비록 폴란드 파업이 경제 요구와 정치 요구의 전통적인 상호작용을 드러내 보여주었음에도 폴란드 노동자들은 어떤 지점에서도 새로운 사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파업은 자기 조직화가 아직 발달 단계였으나 사회 혁명의 필요성에 대해 보다 급진적인 토론이 가능한 맥락을 제공했던 68운동보다 ‘낮은’ 수준에 있었다. 폴란드의 운동은 매우 제한적인 예외를 제외하면 ‘자유로운 서유럽’, ‘민주주의 정부’, ‘독립적인 노동조합’ 등을 그들이 원하는 대안적 사회로 보았다. 서유럽에서는 폴란드의 파업에 대한 몇몇 연대 표현이 있었고, 1983년부터 경제적 위기가 급격하게 깊어짐에 따라 그들의 범위에서 점점 더 넓은 세계적인 투쟁의 파도를 관찰했다. 많은 경우에서 노동자들과 노동조합 사이의 대립이 증가했다. 그러나 전 세계적 투쟁이 발생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연적으로 투쟁에서 의식적인 국제주의의 필요를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즉, 노동조합은 당연히 국가 일부인데, 이러한 노동조합과 충돌했다고 해서 그것이 국가 전복의 필연성을 깨달았다는 의미에서 운동의 정치화가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을뿐더러, 인류를 위한 전망을 제시할 만큼 역량이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70년대보다 더욱, 선진국들에서 80년대의 투쟁은 부문적 요구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고, 이러한 의미에서 역시 급진화한 형태의 노동조합 방해 공작에 취약한 채로 남아있었다. 이 시기 두 블록 간의 제국주의 긴장 심화는 전쟁 위협을 주요한 관심사로 등장하도록 했으나, 평화 운동이 이러한 관심을 분산시켰는데, 평화 운동은 사실 경제적 저항과 전쟁 위험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의식적 발전을 효과적으로 방해한 것이었다. 이 시기 조직 활동을 지속했던 혁명가들의 작은 그룹들은, 그들은 노동자들의 특정 제안에 더욱 직접 개입할 수 있었음에도, 더 심층적인 수준에서 노동계급 내의 ‘정치’에 대한 지배적 의혹에 전체적으로 의견충돌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계급과 그 정치적 소수의 커다란 격차 심화는 그것 자체로 노동계급이 그 자신의 전망을 발전시킬 수 없는 무능력에 기여하는 요인이 되었다.  <2부로 이어짐>

     

    <원문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nternational-review/201711/14435/22nd-icc-congress-resolution-international-class-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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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6호] 코뮤니스트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소개 3

    • 코뮤니스트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소개 

      - 노동자 자기해방을 향한 투쟁과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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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뮤니스트 좌파(좌익공산주의자)

     

    판네쿡과 호르터가 발전시킨 전략적 목표는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에만 한정된 것 아니었다. 1920년 봄, 급속히 강화되던 레닌주의적 코뮤니즘에 대한 좌익공산주의의 강력한 도전은 유럽 전역에서 부상했다. 좌익공산주의는 1920년 코민테른에 가장 위협적인 도전을 했지만, 그렇다고 (좌익공산주의가) 응집된 구성체는 아니었으며, 단지 분기된 다양한 입장들을 포괄하는 분파적 그룹/당/저널의 느슨한 연합이었다. 그들을 연계시켰던 것은 러시아 모델의 서유럽 적용에 대한 거부뿐만 아니라, 반-관료주의 추구, 비타협적 혁명적 행동주의에 있었다.

     

    암스테르담 사무국이 해체된 후, 좌익공산주의의 국제 센터는 비엔나 코민테른 사무국과 그 기관지 「Kommunismus」로 이동한다. 편집인이 루카치였던 「Kommunismus」는 좌익공산주의 네트워크의 주된 포럼 역할을 한다. 루카치도 판네쿡과 마찬가지로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이론가로서, 판네쿡의 영향을 받았다. 좌익공산주의의 다른 주요 센터는 이탈리아에서 형성되었는데, 아마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가 주도하는 반-의회주의 코뮤니스트가 상당한 정치세력을 구축한다. 보르디가의 반 의회주의도 판네쿡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지만, 좌익공산주의의 조직화 이론은 거부한다. 그는 강고하고 규율이 선 레닌주의-형태의 정당을 강조했고, 평의회 및 공장조직을 생디칼리스트적 이탈로 비난한다. 좌익공산주의의 또 다른 이론적 센터는 영국에서 나타났는데, 실비아 팽크허스크(Sylvia Pankhust)의 사회주의 노동자 연합(Socialist Workers' Federation)과 그 기관지였던 노동자 전함( Workers' Dreadnought)이었다. 좌익공산주의 경향은 또한 의회주의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코뮤니스트 당에서도 나타난다. 러시아 내에서 노동자 반대파는 관료적 프롤레타리아 조직화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면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1920년 4월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창립은 좌익공산주의와 코민테른 간의 대립 단계를 가져온다.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레닌주의 전술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3 인터내셔널의 존재 이유에 대해 존중해 창립 후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파견한다. 코민테른에 당 가입을 협상하고자 했고. 5월 초 도착한 대표단을 레닌이 마중한다. 이후 대표단-코민테른 집행부의 회합 후, 지노비에프는 코민테른 가입을 위한 4가지 조건((Wolffheim, Laufenberg, Rühle의 즉각 제명, 2차 대회 결정의 무조건적 복종, 독일공산당(KPD)과의 재통합을 위한 화해위원회 설치,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이 2차대회에 참가할 것)을 담은 공개서한을 전한다. 대표단은 독일로 돌아갔지만, 오토 륄레(Otto Rühle)의 2차 대표단은 1차 대표단의 토론 내용과 지노비에프의 서한을 읽을 기회도 없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륄레는 레닌, 코민테른 타 지도자들과 오랜 토론 끝에, 2차 대회 개회 전날 밤인 7월 18일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회의에 불참할 뿐만 아니라 코민테른에 가입하지 않겠다.’라는 극적인 성명을 발표한다.

     

    그렇게 2차 대회에 불참했지만, 대회에서는 주요 이슈로 대두되었다. 대표자들에게 논쟁의 배경설명을 위해 판네쿡과 레닌의 글이 배포되었는데, 이는 코민테른에 의해 외국 반대파의 저작이 배포되었던 마지막 경우였다. 가장 극적인 대립은 아마데오 보르디가가 좌파의 반-의회주의 관점을 재확인하는 테제를 제시했을 때였다.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와 마찬가지로 보르디가도 인터내셔널에 대해 점증하는 러시아의 지배에 대해 비판하고, 동구에서 볼셰비키의 경험은 서구에 기계적으로 이전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대회 마지막은 의회주의, 노조운동, 그리고 중앙집권적 정당 조직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이탈리아 사회당의 기권주의파를 대표하여 보르디가 동지가 작성한 의회주의에 대한 테제

     

    1. 의회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 고유한 정치적 대의제도의 형태이다. 의회제도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해 혁명적 맑스주의의 원칙에 의거하여 비판한 결과는, 국가 대의기구 선거에서 모든 사회계급의 모든 시민이 투표권을 부여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의 모든 정부기관이 지배적인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위원회가 되는 것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항하는 부르주아의 역사적인 투쟁 기관으로 자본주의 국가가 조직되는 것을 방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코뮤니스트는 노동자계급이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할 가능성을 부정한다. 무장투쟁만이 노동자계급을 그 목표에 데려다 줄 것이다. 코뮤니즘(공산주의) 경제 건설의 출발점이 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은 민주주의 기구들을 폭력적으로 철저하게 파괴하고 프롤레타리아 권력 기구, 즉 노동자평의회로 그것들을 대체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방식으로 착취 계급의 모든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계급적 대의기구를 가진 정부 체제를 세운다. 의회제도의 폐지는 코뮤니스트 운동의 역사적 과제가 된다. 오히려 대의제 민주주의야말로 가장 먼저 타도해야 할 부르주아 사회 형태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소유보다도, 관료적 국가기구보다도 앞서 타도되어야 한다.

    (중략)

     

    5.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장악이라는 사상이 아직 까마득히 멀어서, 혁명을 직접 준비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실현하는 것이 아직 계급적 의제로 떠오르지 않는 시기에, 선거와 의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선전과 선동, 비판에 큰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부르주아 혁명이 이제 막 시작하여 새로운 제도를 창출하고 있는 나라들에서, 코뮤니스트들이 아직 형성 단계에 있는 대의기구에 참여하는 것은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최종적인 승리에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오기 위한 사태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6. 세계혁명의 종결과 그것이 부르주아 사회조직에 끼친 결과, 즉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이라는 사상을 처음으로 실현한 러시아 혁명과 사민주의 배신자들에 반대하여 건설한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더불어 시작한 현재의 역사적 시기에는 코뮤니스트의 혁명적 대의를 위해 의회 제도를 활용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선전의 선명성을 위해서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최종 투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도, 코뮤니스트들은 노동자들이 선거를 보이콧하도록 선전할 필요성이 있다.

    (중략)

     

    10. 다수결에 의해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가입을 결정한 당들에게 선거 캠페인에 계속 참여하게 하는 것은 사회민주주의적 인자들을 걸러내는데 필요한 과정을 가로 막는다. 그들과 단절하지 않고서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그 역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11. 의회와 기타 민주주의 기관에서 벌어지는 토론의 실제 성격은 반대당들이 비판으로부터 의회주의 원리에 반대하는 선전으로, 의회주의 제도의 한계를 넘어서는 행동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다. 정확하게 동일한 방식으로 선거과정의 공식 절차를 따르기를 거부할 경우 발언권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로지 그 제도의 기본 원리라는 공통의 무기를 사용하는 기술, 그 규칙의 미묘함을 이용하는 것에 의해서만 의회제도 내부의 투쟁에서 성공할 수 있다. 그것은 선거 캠페인과 똑같이 점점 더 투표수와 의석을 얼마나 많이 획득하느냐에 따라 판단하게 될 것이다.

     

    코뮤니스트당들이 의회주의적 실천에 완전히 다른 성격을 부여하고자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시지프스의 노고처럼 힘만 허비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코뮤니스트 혁명의 대의는 바로 착취자들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직접행동을 요구한다. <<보르디가의 테제 낭독>>,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제2차 대회 8차 전체회의 (1920년 8월2일)

     

     

    코민테른과의 단절과 혁명운동의 퇴조

     

    코민테른과의 갈등이 심화하면서, 판네쿡과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 그 자체의 의미와 관련된 근본적인 쟁점에 관심을 둔다. 1920년에서 1921년 초까지 판네쿡과 호르터는 레닌에 대한 개인적 공격을 조심스럽게 피했고, 러시아는 새로운 코뮤니스트 사회를 낳았다는 신념을 확고히 유지했지만,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 내에서는 륄레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첫 번째 공개적 비판을 가한다. 러시아에서 1920년 6월 돌아오면서 그는 러시아 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허울일 뿐이며, 반-혁명적 당 독재가 권력을 쥐었다고 비판한다.

     

    2차 대회와 3차 대회 사이에 러시아와 서유럽 상황은 급변하는데, 1920년 러시아는 외부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고, 러시아 지도자들은 서구에서 혁명이 임박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1921년 러시아는 여러 국가와 무역, 외교적인 유대를 마련했고, 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임박한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러시아의 이 같은 변화된 관점은 신경제정책으로 알려진 경제정책으로 표현된다. 이 같은 변화에 따라 판네쿡은 1921년 5월부터 러시아 혁명 재평가 작업에 착수한다. 판네쿡의 분석은 처음 러시아 코뮤니즘이 구체적인 경제적 관계가 아니라, “정신적 실재”라는 생각, 그리고 러시아는 소규모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 러시아의 혼란스러운 경제조건은 노동자-농민 간 새로운 계급투쟁의 객관적 기초를 제공한다고 생각(크론슈타트 반란처럼)한다. 약하고 위축된 노동계급, 원자화된 농민 모두 그 스스로 권력을 잡을 수 없으므로, 그 투쟁의 결과는 그들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관료주의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판단하여 서구에서의 혁명적 공세만이 러시아 혁명을 재활성화 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볼셰비키에 대한 판네쿡의 비판은 코민테른으로부터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이 축출된 이후 더 많이 표명된다. 1921년 11월 판네쿡은 소비에트 체제가 프롤레타리아를 새로운 예속 조건에 처하게 하는 억압적이고 반-혁명적인 관료주의로 변질되었다는 극적인 결론에 이른다. 그는 러시아 코뮤니스트 독트린이 단지 관료주의의 점증하는 부르주아 기능을 감추기 위해 채택한 정당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 같은 상황은 전면적인 자본주의 재복원의 첫 단계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제3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의 기본 정책과 전술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코뮤니스트 슬로건은 객관적인 수렴을 위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적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와 코뮤니스트 양자 모두 노동계급을 자본주의사회에 통합하는 메커니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920년 이후 혁명적 파고의 퇴조는 판네쿡에게 깊고 슬픈 환멸을 경험케 하였고, 정치적 관점에서 실질적으로 변화된 내용은 없었지만, 정치적 행동은 대개 개인적 만남에 한정된다. 정치적 혼란도 큰 이유였지만, 그가 적극적인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았던 것은 천문학에 전업 경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볼셰비키 선전을 이유로 신분이 위태로워진 그는 암스테르담 대학의 수학, 천문학 강사로 선임된다. 이후 20년간 그 연구원에서 그는 천체물리학 분야에서 선구적 업적을 쌓는다. 혁명 운동의 의미에서 판네쿡의 적극적인 정치경력은 1921년 비-레닌주의 혁명적 좌파의 퇴조와 함께 종료된다. 이후 어떠한 사회운동에도 참여하지 않는다.(1921-27년간은 예외적인 휴지기였다) 그럼에도 그는 혁명적 이론가로서의 자기 소명을 버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중단 없는 저작활동을 한다. 좌익공산주의의 선구에서 평의회공산주의 이론가로서 그는 많은 저작을 남겼다. 평의회공산주의는 좌익공산주의와 구분되는 경향으로 갑작스럽게 대두된 것이 아니었으며, 장기간의 지적 탐구로부터 천천히 발전한 것이었다. 평의회 공산주의의 이론적 기초들은 아래 몇 가지 문제에서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발전시켰던 사상체계와 직접 맞닿아 있다. 하지만, 초기의 평의회공산주의가 좌익공산주의와 구분될 수 있었던 측면은 국제코뮤니스트운동과의 동일시 거부, 당이라는 조직 거부, 사회주의적 변형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접근을 발전시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있었고, 이후 평의회주의1)라는 극단적 오류를 낳기도 한다. “비록 소규모였고 또 자신의 사상을 실천으로 옮길 어떠한 능력도 갖추고 있지 못했지만,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적 분석은 훗날 ‘소비에트 레닌주의’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이데올로기적 도전”(McLellan, 1979)으로 평가받게 된다.

    <주>

    1) 평의회주의는 평의회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1930년대에 이론화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러시아 혁명의 성격,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식, 당에 대한 규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난 오류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평의회주의는 1917년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규정하였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세계혁명이 아닌 '자주관리'사회주의로 이론화시켰다. 특히 평의회가 아닌 정치 조직의 모든 형태는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판하며,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부정했다.

    평의회주의는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의 일종이라 판단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첫 조치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실현 즉, 노동자평의회의 (국제적) 권력 장악을 위한 정치 경제적 조치가 아니라,'해방구'로서의 공산주의적 경제조치의 채택을 주장했다. 이러한 평의회주의는 러시아 혁명의 경험에서 '아래로부터의 정치권력' 장악과 '세계혁명'의 완수라는 국제주의적 교훈을 얻은 것이 아니라,'경제적 조치' 즉, 노동자통제의 즉각적 실시, 임금노동과 상품교환의 폐지를 통해 '관료주의'를 만들지 않고 혁명을 전진시킨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결국, 평의회주의는 평의회 공산주의에서 훨씬 벗어나 마르크스주의를 속물화시키는 주장을 하게 되었고, 무정부주의, 경제주의와 연결되었다. <<평의회 공산주의-한계, 평의회주의-오류, 그리고 공산주의좌파?>>, 이형로 (코뮤니스트 4호, 2014)

     

     

     

    독일혁명 연표

     

    1905년 러시아혁명 발생 소비에트 출현. 로자 룩셈부르크 <대대적 파업> 작성

    1907년 레닌 [12년] 논문집 발표, 1902년에 쓴 <무엇을 할 것인가> 자기비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생 -> 제2 인터내셔널, 제국주의 전쟁 찬성

    1915년 찜머발트 좌파 결성 (레닌, 판네쿡 등)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 발생

    1918년 11월 독일혁명 발생, 대대적파업과 평의회(레떼) 운동 나타남.

    1918년 12월말 독일공산당 결성 (로자 룩셈부르크 스파르타쿠스 동맹+브레멘 좌파(판네쿡, 호르터, 륄레)

    1919년 1월 총선에서 독일 사민당 집권

    1919년 1월 독일공산당 무장봉기(스파르타쿠스 봉기)-> 독일사민당 진압 (로자 룩셈부르크 암살)

    1919년 10월 독일사민당 노동자평의회를 대신하는 제헌의회 제안, 노동자평의회를 합법 적 공장평의회로 전화(독일판 노사정 위원회), 바이마르 헌법 .제헌의회 참여, 독일공산당 내부 논쟁. 파울 레비가 -> 브레멘 좌파 축출

    1919년 레닌 제3 인터내셔널 창립, 2개의 독일 공산당이 코민테른 지부가 되는 격임.

    1920년~1923년 독일혁명 발발(독일경제 붕괴, 독일사민당과 그 기반인 노조 대중 신뢰 상실 -> 노동자평의회 재개)

    1920년 4월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 창립(호르터 주도하에 창당), 공장조직과 Workers Union.

    1920년 2월 독일노동자총연합(AAUD) 창립, (공장조직의 연대) 오토 륄레 주도.

    1920년 6월 레닌 [좌익공산주의 : 유아적 무질서] 팸플릿 작성 -> 이 팸플릿을 계기로 코민테른 전 세계 지부 볼셰비키화.

    1920년 12월 독일 공산당, 레닌과 코민테른 지원으로 독립사민당과 통합 -> 통일독일공 산당 (VKAPD) *독일사민당내 당내 분파가 독립사민당임 ; 1917년 로자 룩셈부르크 주도 독일사민당 좌파 + 카우츠키가 주도한 독일사민당 중앙파

    1922년 카우츠키 독일 사민당 복당 -> 제2 인터내셔널; 사회주의인터내셔널이라고 불림

    1926년 독일 노동자평의회 운동 쇠락, KAPD와 AAUD-E 유명무실화 됨

    1927년 호르터 사망

    1929년 세계대공황

    1933년 나치 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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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네쿡과 노동자평의회

     

    1920년 이후 판네쿡은 천문학의 연구에 집중했지만 평의회 공산주의의 기본 사상에 이론적인 깊이와 이해를 제공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판네쿡의 생각은 ‘노동자평의회’, ‘철학자로서의 레닌’ 그리고 출간되지 않은 ‘자유로의 노동자의 길’ 3권의 저서에서 발전된다.

    판네쿡의 『노동자 평의회』는 현재에도 노동자 자기해방 사상의 고전으로 남아, 수많은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읽고 있으며, 현실 운동의 무기로 등장하고 있다. 『노동자 평의회』가 낡은 표지를 벗고 다시 노동자들의 품에서 해방 사상으로 살아날 때, 노동자혁명의 불길은 다시 계급의 가장 아래로부터 타오를 것이다.

     

    노동자 평의회에 대한 판네쿡의 사상체계

     

    판네쿡은 사회주의 이행의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요소로서 평의회 조직의 사상을 명백하게 하려고 했고, 평의회가 프롤레타리아 조직의 높은 단계에 있지만, 이전 조직을 단순하게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 조직을 규정하던 근본적인 원칙들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대중 위에 군림하는 권력인 전문적인 지도체제를 제거함으로써 지도자와 추종 간의 충돌을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고, 평의회에서는 지도력의 모든 기능이 사라지고 대중 모두가 적극적으로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여 권력은 언제나 노동자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 주장했다.

    또한, 평의회가 혁명조직에 의해 기계적으로 선언되거나 독단적으로 생성되어서는 안 되며, 혁명조직은 단지 평의회의 사상과 필수성을 선동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판네쿡은 평의회는 단지 노동자 계급이 공세를 취하는 혁명적 시기에만 적합하기 때문에, 노동자가 혁명을 완수할 능력이 없는 경우, 평의회는 유용한 사회적 기능을 더는 할 수 없으며, 곧바로 프롤레타리아 전쟁의 수단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평의회가 단지 노동계급의 실천적 투쟁에서 자발적이고 유기적으로 생성될 수 있으며, 와일드캣 파업(비공인 파업)과 공장점거와 같은 활동에 태생적 형태로 이미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와일드캣 파업과 공장 점거를 노동자 평의회로 변형시키는 주요 요인은 노동자들이 그러한 활동을 조정하기 위하여 조직하는 파업위원회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파업위원회들은 평의회 조직의 기본적인 두 요소, 즉 직접 민주주의와 계급 공동체를 구체화시켰다고 보았다. 일단 와일드캣 파업과 공장 점거가 국가적이고 전체 계급 운동으로 발전한다면, 그것들은 즉각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와의 갈등으로 전화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 보다 높은 수준의 조직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판네쿡은 노동자 평의회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시점은 바로 이때이며, 자본주의 국가가 붕괴할 때까지는 혁명과 함께 노동자 평의회의 역할은 확장될 것으로 생각했다.

     

    판네쿡은 부분적으로는 와일드캣 파업과 공장점거 전술이 전통적인 노동조합에 대항하는 불복종의 한 형태라고 보았다. 그는, 선진 자본주의의 노동조합들은, 그들이 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프롤레타리아트 정체성의 흔적들을 잃어버렸고 또한 자본주의의 통합적인 메커니즘이 되어버렸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조를 독점적 자본이 독점자본의 조건을 전체 노동계급에 부과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자본 합리성 원칙에 대한 노동조합의 헌신 때문에, 노동조합이 결코 ‘노동자들의 통제'라는 주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의 통제’는 노동조합 권력의 원천을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노동조합들은 지도자들에 의한 지배 원칙을 기초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조합들은 자본주의 국가의 충실한 재생산이고 어떤 혁명에서도 부르주아지의 굳건한 동맹자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판네쿡의 생각에 노동자 운동의 부활은 이 옛날의 조직(노조)에 대항한 대중적 반역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 판네쿡의 혁명적 변혁 모델에서, 노동자 평의회는 두 가지의 목적, 즉 투쟁의 직접적인 기구이며 따라서 자본주의의 특정 국면에서 혁명의 물질적, 정신적 기초이며, 새로운 사회의 하부구조와 조직적 채비를 구성하는 것이다. 
     

    • <참고문헌>

      <<안톤 판네쿡과 노동자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 1873-1960>>, John Gerber (박사 학위 논문)

      <<좌익 급진주의에서 평의회공산주의로 : 안톤 판네쿡과 독일의 혁명적 맑스주의>>, John Gerber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23, No. 2. 1988)

      <<네덜란드와 독일의 코뮤니스트 좌파>>,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좌익공산주의>>, 오세철 (빛나는 전망, 2008)

      <<노동자평의회>>, 안톤 판네쿡 (빛나는 전망, 2005)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 안톤 판네쿡 (Pluto, London, 1978)

      <<국가와 혁명>>, 레닌 (돌베개, 1992)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헤르만 호르터 (Wildcat pamphlet, London, 1989)

      <<1919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창설>>,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주의자>>,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Communist Workers Organization) 

       

       

      [정리]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이전 글>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4129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4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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