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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선거 쟁점과 코뮤니스트 대안

부르주아 선거 쟁점과 코뮤니스트 대안
 
 
이번 선거에서(선거 때마다) 쟁점이 된 “부동산·자산 투표”, “정의·공정”에 대한 코뮤니스트 대안

"선거에 진 것은 노동계급이 아니라 부르주아 분파(여, 야)이며, 이긴 것은 자본주의 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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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정책
 
한국의 주택보급률은 이미 100%를 넘었고, 수도권도 100%에 가까운 상황이다. 주거 문제는 공급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자본이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토지와 건물, 주택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매매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렇기에 아무리 주택을 많이 공급해도 무주택자가 아닌 자본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이런 현실을 감추기 위해서 더 현실성 없는 고위정책 관료층과 국회의원에게 1가구 1주택의 퍼포먼스까지 진행하겠는가?
 
자본주의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서 부르주아 정부의 저금리정책은 필연적으로 유동성을 증가시켰고, 그 대부분은 대자본 중심으로 집중되고 있다. 자본에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 투자는 관심 밖이다. 이윤이든 지대든 자본에는 부가가치 증가만이 목적이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배경은 부동산 같은 자산 가격을 폭등시켰다. 이처럼 부동산 가격 폭등의 배후에 작동하는 힘은 자본주의 경제 위기와 이것이 유발하는 초저금리와 천문학적인 유동성 증가이다. 부동산 가격 폭등은 그 결과 중 하나일 뿐이다.
 
부르주아 정부는 집값을 억제할 생각이 없을 뿐 아니라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인한 정권의 몰락도 피하고 싶을 것이다. 겉으로는 ‘갈지(之)’자 행보처럼 보이지만, 일관되게 자본의 이익을 추구한 부르주아 정부는 심화하는 위기 때문에 더욱 노골적으로 노동자의 목을 죄어 올 것이다. 이윤율 하락,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체제에서 발생하는 거대한 경제 위기라는 배경에서 부르주아의 계급적 선택은 노동자에게 더 많은 착취와 고통을 요구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부동산 대책은 집값 안정을 결코 해결할 수 없지만, 집값 안정이라는 문제는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를 전제로 하고 그 바탕 위에 있다. 자본주의 소유 관계를 그대로 둔 채로는 어떠한 정책을 내놓아도 주거 문제는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자본주의 소유 관계는 토지와 주택에 대한 사적 소유와 매매와 임대를 통해 소유주가 이득을 취하는 것을 보장한다. 또한, 부동산 가공을 통해 증가한 부가가치까지도 보장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동산 관련 세금을 올리고 공급을 확대해도 더 비싼 집값의 형태로,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노동자에게 전가될 뿐이다. 결국, 노동계급은 주택 가격 안정이 아니라 토지와 주택에 대한 자본주의 소유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토지와 주택에 대한 자본주의 소유 관계를 그대로 둔 채 어떠한 정책을 내놓더라도 노동자인민에게는 1가구 1주택과 주거환경 개선은 현실화할 수 없다. 자본주의 소유 관계를 그냥 둔 채 주택 투기와 개발 이익에 대한 사적 취득을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가 환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가가 이를 환수하여 양과 질을 담보로 한 공공임대주택을 마련하는 것 또한, 공상에 불과하다. 자본주의에서 국가는 자본의 총체로서 전자본의 이익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인민에게 양질의 공공주택을 공급하는 것은 토지와 주택에 대한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가 폐지된 사회, 즉 인민의 필요에 따라 생산하는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토지와 주택을 비롯하여 사유재산과 착취, 계급 분열에 기초한 자본주의 생산은 가치법칙 및 시장과 화폐를 통한 분배와 소비에 종속됨으로써 경쟁과 무정부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는 가치법칙이 사라지며, 생산은 평의회 체제에 의해 사회화된다. 모든 토지와 (거주 목적 이외의) 주택도 생산수단과 마찬가지로 몰수하여 평의회의 통제 아래 사회화시킨다. 이때 비로소 모든 사람에게 거주 장소를 선택할 권리와 주택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제공된다. 코뮤니스트 사회는 노동자인민에게 공공임대주택을 저렴하게 제공하는 자본주의적 복지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인간답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주거 공간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평등한 사회이다. 주택뿐 아니라 의료와 건강권, 교육권을 무상으로 제공하여 개인의 행복 추구권이 처음으로 실현되는 사회이다. 코뮤니스트는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해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 폐지와 무상 주거권 쟁취를 내걸고 근본적으로 투쟁할 것이다.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 폐지만이 주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코뮤니스트 혁명만이 주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모두에게 거주 장소를 선택할 권리와 주택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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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공정
 
 
한국 사회는 선거 때마다 공정 담론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공정에 대한 논의의 핵심은 능력주의를 전제로 진행되고 있다. 공정한? 경쟁을 통해 능력을 갖춘 사람을 사회의 모든 요소에 선발하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능력은 자본주의 물적 토대인 생산관계를 반영하지 못한다. 개인의 능력은 사회·경제·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다. 게다가 가족을 경제단위로 하는 자본주의에서는 가족 배경이 능력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 또한, 노동력이 상품으로 되는 자본주의에서는 어떤 능력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자본의 이해관계와 관점에 따라 좌우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순수한 개인의 능력은 환상에 불과하고, 이러한 능력주의를 전제로 한 공정은 계급지배의 통치 수단이다.
 
공정의 핵심 전제인 능력주의는 봉건귀족에 대항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였다. 또한, 무산자계급에 대한 차별과 배제,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원시적 자본 축적기부터 자본주의가 세계적 지배 질서가 된 이후에도 자본은 능력주의를 통해 노동계급의 연대와 단결을 막고 분열을 획책했다. 이에 포섭된 노동계급 일부는 능력주의 신분 상승 대열에 개별적으로 합류하는 데서 전망을 찾으면서 불평등 사회를 인정했다. 한국의 주류 노동조합운동도 능력주의에 편승하면서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했다. 그러면서 노노 갈등은 증가하였다. 그 흐름은 노동운동의 역할을 계급의 해방이 아니라 당면 생존권에 대한 협소한 방어로 제한했다.
 
노동계급 일부의 능력주의로의 편승은 노동자 자기해방에 대한 전망 부재를 스스로 폭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미래 노동계급에 능력 중심의 불평등 사회를 지양하기보다는 더욱더 능력과 공정에 집착하도록 하였다. 전망의 부재는 한편으로는 불평등 완화를 부르주아 정부에 대한 기대로 나타나기도 했고, 한편에서는 공정성 시비로 적법한 노동권마저도 빼앗고 있다. 이렇게 능력주의에 갇히는 순간 노동운동의 전망을 잃어버리고 체제를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본과 지배계급의 이익에 복무하게 된다. 즉, 노동운동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는 사라지고 형식적 공정성과 실질적 불평등을 인정하고 노동계급의 투쟁을 탄압하는 자본주의 신봉자가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능력주의는 노동계급에 초등학교부터 취업 이후까지 학업/취업/임금인상/승진 경쟁을 요구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본이 요구하는 능력에 부합하도록 노동자를 재창조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능력주의에서 패자에게는 결과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사회 부적응자로서 온갖 차별에 노출되고 적법한 요구마저도 무시된다. 그래서 능력주의는 인종주의, 엘리트주의, 평가주의, 성과주의 등 차별의 여러 형태와 같은 패러다임을 가진다. 하지만 부르주아에게 요구되는 능력이란 부와 권력에 대한 세습이 가장 중요할 뿐, 실수로 거액을 날려도 그들의 태생적인 능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능력주의는 계급마다 다르게 적용되며 계급적 성격을 갖는다. 자본가계급에는 공정을 초월한 정의이지만, 노동계급에는 억압적이고 차별적이다.
 
지금까지 능력주의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은 공정에 기준을 두고 조건, 과정에 대한 평가였다. 또한 능력주의가 차별과 불평등을 정당화하며, 능력이 세습되는 시대에는 능력주의 자체가 불공정을 내포하고 있다는 비판까지 등장한다. 하지만 차별과 불평등의 원인을 공정의 기준, 능력주의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공정 담론과 능력주의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무시한 결과이다. 그래서 비판의 결론은 불평등과 차별의 원인인 능력주의를 다시 계급 상승의 수단으로 기능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계급사회에서 정의, 공정, 능력주의는 언제나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자본이 요구하는 능력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은 노동계급의 단결과 연대의 힘이다. 계급 단결로 노동력이 상품이 되지 않는 사회, 생산수단이 사회화된 사회, 가치법칙이 더는 작동하지 않는 코뮤니즘 사회로 나아가야 비로소 노동계급의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 즉, 정의, 공정, 능력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더는 필요 없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의 사유화는 자원 희소성, 자원의 불평등 분배의 원인이었다. 자본주의 고유의 모순을 감추고 노동계급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서 공정 담론,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유포시켰다. 하지만 노동계급에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는 결코 자본주의에서는 불가능하다. 오로지 계급의 단결과 연대로 불평등과 차별의 원인인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해야 억압과 모순을 뿌리 뽑을 수 있다.
 
노동계급의 가장 큰 능력은 야만과 착취의 낡은 사회를 혁명적으로 전복하고 집단으로 자기 권력을 행사하며 스스로 해방할 수 있는 능력이다. 반대로 지배계급의 능력주의와 공정 담론은 노동계급의 삶을 피폐화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단결과 연대라는 진정한 능력을 빼앗아가는 반동 이데올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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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 다시 투쟁으로! 항로는 희망행으로!

 

 

다시 투쟁으로! 항로는 희망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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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을 위한 투쟁 속에서 
당연히 온갖 오류를 다 범하게 돼 있다.

 

그러나 
자신 한 몸의 영달을 위해 사는 것보다 
더 무서운 오류는 없으니 
그래도 투쟁하는 게 더 낫다.

 

(「한 혁명가의 회고록」, 빅토르 세르주)

 

 


항로는 희망 행으로!

 

 

 

리가에서 죽임을 당한 앙드레
에스파냐에서 죽임을 당한 다리오
내가 붕대로 상처를 싸매준 보리스

 

내가 눈을 감겨준 보리스
프랑스의 어느 조용한 과수원에서
스무 살 된 심장에 총알 여섯 발이 박혀
영문도 모른 채 죽은
나의 이층 침대 친구 다비드

 

이미 흙이 다 되었을 때
내가 손톱을 보고 알아낸 카를
너, 높은 지성과 숭고한 사상을 가진 너를,
죽음이 너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검고 거친 인간 넝쿨

 

북쪽, 물결, 바다가
배를 뒤집고, 이제는 핏기가 사라진 네 사람이
고뇌를 깊이 들이켠다,
파리여, 잘 있거라, 너희 모두 다 잘 있거라,
삶이여, 잘 있거라, 제기랄!

 

바실리, 우리가 잠 못 이루던 한밤 내내
너에게는 상하이에서 온 투사의 넋이 있었다
그리고 아르마비에르의 옥수수 밭에 있는 
너의 무덤이 바람에 씻겨 지워진다.

 

홍콩에 불이 들어오고, 때는 고층 빌딩의 시대,
종려나무 잎은 아랍의 반달칼을 닮았고
광장은 묘지를 닮았고,
저녁은 무더운데, 감옥 침대에서
응우옌, 너는 죽어가는구나

 

그리고 너희, 목 잘린 나의 형제여,
길 잃은 자, 용서받지 못한 자
학살당한 자, 르네와 레이몽
유죄이지만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오, 어둠 속에서 내리는 별들의 비,
죽은 형제들의 별자리!

 

나는 너희에게 나의 가장 암울한 침묵,
나의 결의, 나의 탐닉을 빚지고 있다.
텅 비어 보이는 이날을 생각하면,
그리고 내게 남은 긍지는 그 무엇이든지
사막에서 이는 불길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러나 이물을 장식하는 이 숭고한 조상에
정적이 있으라!
맹렬한 항해는 계속되고,
항로는 희망행이다

 

언제 네 차례가 될까? 내 차례는 언제일까?
항로는 희망행이다

 

(「죽은 형제들의 별자리」, 빅토르 세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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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선거의 본질과 노동계급의 대안 2

거부: 자본주의 선거에 대한 계급적 대응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부르주아 선거의 본질과 노동계급의 대안”을 밝힌 「국제주의노동자그룹」(IWG) 동지들의 과거 기사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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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언론 매체가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거부’ 요구를 검열하는 데 앞장서고 있으므로[1], 우리는 선거에서 거부할 것을 촉구하는 임무를 스스로 맡는다. 오늘날 어느 국가에서든 진정한 의사결정 과정은 국민 대표자들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 진정한 권력은 의회나 백악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 기관 배후에 있는 기구에 있다.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그 배후에 있는 자본주의 이념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레닌의 "혁명적 의회주의"조차도 본래 목적은 차르 두마(하원)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것이었다. 집권당의 지지를 얻기 위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급진적 개혁주의자들의 활동은 그들이 지지하는 반동적 자본주의 분파에 정당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 활동에 끌려 들어간 사람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부르주아지는 누가 후보 명단에 오르고, 누가 선거에 출마할지 집단으로 결정한다. 그리고 나서는 모든 유권자에게 자신의 조건에 맞는 정당에 투표하라고 요구한다. 반면 시민들은 후보 명단에서 가장 덜 악한 거짓말쟁이로 보이는 사람을 기준으로 투표한다. 지배계급의 정치적 쇼(선거)를 거부하라는 요구는 결국 일부 자본가들에게 위협이 된다. 실제로 한 주요 소셜 미디어 기업이 그러한 정치적 발언을 금지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응의 원인은 미국 정권을 이끄는 두 분파(민주당, 공화당) 사이의 정치적 경쟁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경쟁은 너무나 심해서 지배계급이 더 강력한 검열을 해야 한다는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파리 코뮌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 이르기까지 노동자 민주주의의 사례들이 있다. 이는 소수 지배층이 장악한 자본주의 정치 체제에서 단순히 자리를 차지하는 정치적 꼭두각시가 아니라, 위임받은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선출자가 소환할 수 있는 대의원(대표)을 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였다. 이러한 노동자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지를 권력에서 체계적으로 배제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독재"라고 할 수 있다. 자본가들에게 자신들이 배제된 모든 형태의 사회 조직은 독재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정치 기구인 정당의 등장은 19세기 경찰 조직의 형성과 민족주의의 부상과 함께 나타났다. 계몽주의 혁명의 시대에 ‘당파적인 사람(당원)’이란 민중의 이익보다 자기 정치 분파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을 의미했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이는 옛 귀족 계급의 한 분파에 가담하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 혁명 직후 휘그당과 공화민주당과 같은 느슨한 정치 세력은 19세기 후반에 명확하게 확립된 경직된 정치 구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자본의 좌파 일부는 누구나 부르주아 공화국의 가장 오래된 정치적 득표 획득 기구에 들어가 대중 정당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해당 기구로부터 정치적 자율성을 유지하는 모든 정치 세력을 이념적으로 압박한다. 이 과정에서 진정한 종파주의자들은 정치적 자율성을 표출하는 모든 행위를 종파주의라고 비난을 퍼붓는다.

 

노동자들이 투표를 거부하는 것은 혁명가들이 자본주의 선거라는 부르주아 정치쇼 참여에 반대하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개인적인 정치적 성향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고, 선거 과정 자체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외는 무관심과 불만으로 나타난다. 이는 강렬한 이념적 공격을 받는 노동자들의 방어기제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거부를 촉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사회적 영역에서, 계급의 방식으로 지배계급에 맞서 투쟁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인터넷이라는 주류 매체에서 표현의 자유를 검열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노동계급의 정치적 표현을 부르주아 양당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투표소에 가두어, 누구나 부르주아 전쟁광들에게 투표하게 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표현의 제한은 누군가가 금지된 ‘거부’ 주장을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이러한 주장이 용인되고 무시되곤 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의 위기는 이러한 정치적 각본에 대한 통제력 상실을 초래했다. 부르주아지는 끝없는 축적의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집단적 행동에 대한 반응으로 스스로 반대되는 현상을 만들고 있다.

 

미국에서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외국인 혐오 캠페인이 자행되고 있다. 이 캠페인은 모든 반대 의견과 사회적 저항을 경쟁 관계에 있는 제국주의 세력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몰아 공격한다. 이는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만, 부르주아지가 역사적으로 제국주의 전쟁을 향해 나아가면서 사용해 온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한 것이다. 이는 국외에서 전쟁의 명분을 쌓는 동시에 국내에서는 정치적 검열과 탄압을 강화하는 것이다. 지난 10여 년간 발생한 모든 사회 운동은 제국주의 세계 무대에서 특정 적대 세력이 조장한 분열의 산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경찰의 총격에 시달리는 것이 싫다면 "X"라는 나라에 속았기 때문이고, 전쟁에 지쳤다면 "Y"라는 나라 탓이라는 식이다.

 

우리는 이러한 계급 분열이 항상 존재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국가, 모든 민족 집단, 모든 정체성은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 부르주아 이념가들은 이러한 계급 구분을 감추려 하지만, 결국 계급 분열은 그들의 정체성 정치로도 지울 수 없을 만큼 뿌리 깊다. 미국의 두 주요 부르주아 집단인 민주당과 공화당은 모두 시민들의 신뢰에 대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그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똑같이 반동적이다. 달라진 점은, 거대한 소셜 미디어 기구를 장악한 일부 사람들이 선거 거부를 촉구하는 모든 목소리를 금지된 표현으로 규정해 버렸다는 것이다.

 

미국 선거에서 어떤 투표도 제국주의 전쟁 기계를 정당화하는 행위이다. 이는 부르주아 행정부의 양 진영 모두 해외에서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확장하고 유지하는 데 전적으로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결국 핵심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충돌로 이어질 영구적인 전쟁 상황에 몰두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민주적 선택이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이 체제의 실체를 폭로할 것을 촉구한다. 그것은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집행위원회를 누가 운영할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2]

 

부르주아 정치에 대한 거부는 지배적인 자본주의 세력의 이념적 통제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한다. 계급이 스스로 '자신을 위한 계급'으로 자각하기 위해서는 [3] 정치적 단절이 첫걸음이다. 유진 V. 뎁스(Eugene V. Debs)는 민주당에 입당해서 정치적으로 ‘주목받는’ 인물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을 탈당해서 그러했다. 실제로 그는 특히 풀먼(Pullman) 파업의 유혈 사태 이후 민주당 초기 활동을 개인적인 수치의 원천으로 여겼다. 초기 볼셰비키들도 차르의 경찰국가를 개혁하겠다는 목적으로 두마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지위를 이용해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지지를 규탄했고, 의회 연단을 통해 부르주아 정권을 비난했다. 냉전 시대의 유물과도 같은 이름을 가진, 제국주의 전쟁 지지가 명백히 드러난 우리의 "미국 민주사회주의자(DSA)"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자본주의 정당 앞에 우리 모두를 무릎 꿇게 하려고 한다. DSA는 미국 사회민주주의가 최종적으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전쟁 정당으로 전락하여 붕괴한 결과물이다. 그들은 열린 무덤을 응시하며 그것이 요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부르주아 선거 정치를 거부하고 노동계급 자신의 혁명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집권당에 대한 불만으로 나타나는 부르주아 지배의 정치적 위기를 활용하여 우리의 정치 세력을 구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노동자들에게 선거란 착취자들이 자행하는 의례적인 굴욕 행위에 불과하다. 자유주의자들이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표하지 않는다고 외칠 때, 우리는 자본주의 선거에서는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할 방법이 전혀 없다고 지적한다.

 

부르주아 선거를 거부하자!

 

2019년 9월 6일

ASm

국제주의노동자그룹(IWG)

 

<주>

 

[1] 클라이모어(Clymore), A. “페이스북, 미국 유권자들에게 투표하지 말라고 권유하는 광고 금지할 예정”. 로이터. 2019년 6월 30일.

https://www.reuters.com/article/us-usa-election-facebook/facebook-will-ban-ads-that-tell-people-in-u-s-not-to-vote-idUSKCN1TV0Y8/

[2] 『코뮤니스트 선언』 제1장, “현대 국가의 행정부는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동 업무를 관리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 (맑스)

[3] 『철학의 빈곤』, “따라서 이러한 대중은 이미 자본에 대항하는 계급이지만, 아직 자신을 위한 계급은 아니다.” (맑스)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19-09-06/abstention-a-class-response-to-capitalist-e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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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선거의 본질과 노동계급의 대안 1

모든 투표는 자본주의에 대한 찬성표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부르주아 선거의 본질과 노동계급의 대안”을 밝힌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동지들의 과거 기사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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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조건이 악화하는 가운데 또 하나의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후보”에 투표할 “민주적 권리”를 행사하게 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선거에서 누가 승리하든 노동계급이 맞이할 결과는 모든 분야에서 삭감과 위기뿐이다

 

자본주의 투표는 노동계급에 무의미한 것 이상으로 해롭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이다. 설령 노동자 정당이나 이른바 사회주의 정당에 투표한다 해도, 결국 현 체제를 정당할 뿐이다. 우리가 투표에 더 많이 참여할수록 그들은 자신들이 통치할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더 커진다. 국민(유권자)의 뜻이라는 것이다! 사실, 1974년 이후 영국 선지(The Sun)의 지지 없이 당선된 정부는 없었으니, 국민의 뜻이 아니라 머독 언론이 대변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이처럼 생산 수단을 장악한 자들은 사상의 재생산 수단도 장악하고 있으며, 매일같이 자신들의 언론매체로 우리를 압도하고 있다.

 

진정한 권력은 의회에 있지 않다

 

어떤 이들은 우리 조상들이 참정권을 위해 싸웠으니 “투표권을 행사해야 한다”라고 여전히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더는 차티스트 운동(참정권 요구)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진보적인 역할을 상실했다. 노동계급이 투표함에 종이 한 장을 넣는다고 해서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 체제의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다. 19세기에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승리했던 것은 지금과는 사정이 다르다. 당시 자본주의 언론은 노동계급에 접근할 수 없었고 국가는 다른 매체를 활용할 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이 자본주의 지배계급에 공포감을 심어주고, “대중” 언론이 이미 확립된 후에야 비로소 모든 노동자에게 투표권이 부여된(1918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보편적 참정권이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을 위한 발판이 되기는커녕, '민주주의 수호'가 자본의 실질적인 지배를 감추는 의회주의라는 허울에 노동자들이 충성하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에서 일부(생산 수단의 소유자와 지배자들)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유롭다. 그리고 만약 1923년처럼 자본이 결과에 만족하지 못했다면, 1년 뒤 데일리 메일(Daily Mai)에 실린 가짜 지노비예프 편지(1)처럼, 거짓 정보를 퍼뜨려 결과를 뒤집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노동당을 걱정할 필요조차 없었다. 노동당은 오래전부터 의회 정치에만 관심이 있었고 영국 자본의 이익에 반할 의도는 전혀 없었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니 노동자들이 왜 선거에 무관심한지 의아해할 만도 하다!

 

결국, 의회는 자본주의 지배를 가리는 허울에 불과하다. 의회 자체가 국가는 아니다. 진정한 권력은 배후에서 지배계급의 의제를 설정하는 네트워크에 있다. 국회의원들은 로비스트들을 앞세워 실질적인 의제를 좌우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독점 자본가들에 비하면 무력하다. 언론이 '질문 대가로 금품을 수수한 스캔들'과 같은 의회 부패 사건을 집중 조명할 때, 폭로되는 것은 주로 국회의원들이다. 그러나 로비스트에게 뇌물을 주고 부패를 조장하는 기업들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의회는 서커스와 같고, 투표는 누가 당선되든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가리는 연막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노동계급이 의회를 통해 권력을 잡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는 우리 투쟁에 필요한 것과 정반대이다.

 

좌파 민족주의의 환상

 

1970년대 초, 전후 호황이 끝나고 오래된 자본주의 경기 순환 위기가 다시 찾아왔을 때,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1950년에는 영국 유권자의 85%가 투표에 참여했지만, 1970년부터 이 수치는 꾸준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2001년에는 59.3%만이 투표했고, 온갖 매체를 동원해 투표를 독려했던 2010년에도 65%에 그쳤다. 언론은 체제의 정당성 하락을 우려하는 지도자들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물론, 특별한 지역적, 정치적 쟁점이 있을 경우는 예외적으로 투표율이 놓을 수도 있다. 어느 지역에서 좌파 세력에 대한 지지가 높아질 수도 있고, 설령 그들이 가치 있는 정책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전 세계적인 문제이다. 지역이든 영국 전체든, 국가적인 해결책은 없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저항(좌파) 정당에 투표하는 데서 쾌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그것은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다.

 

대안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은 없다. 노동계급이 깨어나 자본주의 공격이 절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급전쟁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현재 우리는 패배하고 있다. 비록 반(反)자본주의 사상이 고조되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 저항은 산발적이고 단편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이러한 사상들은 아직 반(反)자본주의 운동으로 구체화하지 못하고 있다.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대안이 명백히 부재하다는 점이다. ‘코뮤니즘’이라는 단어는 신뢰를 잃었으며, 자본주의 야만성을 대신해 문명화된 미래의 열쇠를 노동계급이 쥐고 있다는 생각은 언론에서 절대 다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전 세계의 전쟁과 경제 위기 소식에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느끼기보다는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라고 위안 삼으며, 위기가 곧 사라져 긴축 정책이 과거의 일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심지어 가장 큰 피해자들조차 투쟁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어떤 이들은 다른 누군가가 앞장서 주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긴축 정책에 저항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 투쟁을 하는 사람들과 저 투쟁을 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있다. 사실 모두 같은 투쟁이지만, 대다수는 아직 큰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영원히 지속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극심해지고 있다. 결국, 노동자들이 더는 예전처럼 살아갈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주장에 동의해 온 사람들은 그 순간을 대비해야 한다.

 

집단으로 조직하자

 

따라서 우리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들은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호소한다. 투표를 거부하자! 이 부르주아 사기극을 거부하자! 하지만 이것은 수동적이거나 체념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악화하는 자신들의 처지에 맞서 싸워야 한다. 하지만 조합비로 급여를 받으며 투쟁을 점점 더 협소한 법적 테두리 안에서만 유지하도록 감시하는, 어쩌면 얼굴도 자주 볼 수 없는 노조 대표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 강제 퇴거에 맞서 싸우든, 의료 혜택 삭감에 맞서 싸우든, 악화하는 노동 조건에 맞서 싸우든, 우리는 파업위원회·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직장과 지역 사회에서 모임·총회를 개최하여 우리만의 조직 형태를 마련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발언권을 갖고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자본주의 대의제보다 훨씬 더 민주적인 우리만의 직접 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한다. 이는 모든 대의원(대표)을 선출한 사람들이 즉시 소환할 수 있는(4년·5년에 한 번이 아닌) 민주주의다. 유급 관료나 자칭 ‘대표자’들이 밀실에서 결정을 내리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파업을 벌일 때는 몇 시간이나 하루이틀 정도 피켓을 들고 하는 형식적인 시위가 아니라,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표로 투쟁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조직하자

 

사실 생활 수준 저하에 맞선 투쟁은, 이를 일으키는 체제에 대한 단호한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아무리 전투적인 투쟁이라 할지라도 자본가들은 신속하게 재정비하여 양보했던 것들을 되돌려 놓기 때문에, 단기적인 성공만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는 이들은 투쟁의 핵심 목표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취해야 할 구체적인 단계를 설명할 정치적 의무가 있다. 이는 계급투쟁의 부활과 분리된 진공 상태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투쟁 또한, 자체적인 정치 조직이나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명확한 강령 없이는, 궁극적으로 현 자본주의 국가 체제를 전복한다는 정치적 목표를 이룰 수 없다.

 

날이 갈수록 가혹해지는 자본주의 야만성을 피하려면,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변혁이 필요하다. 이는 의회 선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코뮤니스트의 목표는 노동하는 사람들이 생존 수단을 집단으로 장악하고 이를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운영하여 인류의 건강과 복지, 그리고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는 과거 노동당이 추진했던 산업 국유화 계획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직 이러한 방식만이 소수 엘리트의 이윤 창출을 최우선으로 삼고 인간의 필요는 부차적으로만 다루는 자본주의 생산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야만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를 끝장낼 수 있다. 이러한 변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존 제도를 전복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인류에게 코뮤니스트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혁명은 소련, 중국, 쿠바 등의 국가자본주의 체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사회주의는 착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사람들이 아래로부터 건설할 때만 가능하다.

 

노동계급은 쟁취해야 할 세상이 있다.

 

2015년 5월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역자 주>

1. '지노비예프 편지(Zinoviev Letter)'는 1924년 10월 영국 총선을 불과 4일 앞두고 일간지 데일리 메일(Daily Mail)이 특종으로 대서특필한 조작 문서이다. 이 편지는 코민테른 의장과 지노비예프가 영국 공산당에 보낸 것으로 위조된 문서이다. 편지의 내용은 영국 노동당을 통해 영국 내 적색혁명을 일으키고 군대 내 반란을 선동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편지는 러시아 반공주의 망명객들이 위조하여 영국의 정보기관 요원들과 보수당 측에 전달한 가짜 문서였다. 우익 성향이 강했던 데일리 메일은 이 편지의 출처가 의심스러움을 인지하고도 총선 직전이라는 절묘한 타이밍에 이를 폭로했다. 편지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당시 영국 사회에 만연했던 '적색 공포(Red Scare)'를 자극하여 많은 유권자의 반발을 샀고, 이는 보수당이 압승하고 노동당이 선거에서 패배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훗날 진상 조사와 문서 검토를 통해 이 편지는 소련을 악마화하고 노동당을 실각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100% 위조 편지로 판명 났다. (위키피디아)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15-04-28/every-vote-is-a-yes-for-capit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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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화된 전쟁으로 질주하는 자본주의: 오직 노동계급만이 해결책을 갖고 있다.

일반화된 전쟁으로 질주하는 자본주의:

오직 노동계급만이 해결책을 갖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26년 3월 「콤파스 그룹」(Kompass-gruppen) 정기 총회에서 채택된 '정세 전망' 문서>

 

 

2025년에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이 계속되고, 가자지구에서는 (학살이 계속되는 가운데) 불안정한 휴전이 유지되고, 수단에서는 참혹한 내전이 벌어졌고,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폭격했고, 한국, 터키, 세르비아에서는 다소 자유민주주의 성격을 띠는 대규모 시위가 연이어 일어났다. 이 외에도 언론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하는 약 50건의 분쟁이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미국은 베네수엘라를 폭격하고 마두로 대통령을 '납치'했으며, 이란에서는 대규모 봉기가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에 이어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란에 대한 대규모 전쟁을 시작하여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고 이란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려 시도했는데(실패했고), 이는 유가 상승을 비롯한 세계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국제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오늘날 궁극적으로 세계정세를 규정하는 핵심은 미국과 중국 사이의 제국주의 경쟁이다. 중국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계속 성장하며 전 세계에 걸쳐 제국주의 이권을 확장하고 있고, 미국은 오랫동안 유지해 온 패권에 대한 점점 더 큰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사태(그리고 그린란드 관련 위협)는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석유나 기타 천연자원과 같은 경제적 이익 외에도, 궁극적으로는 '자국의 뒷마당'에서 패권을 확보하고, 중국(그리고 러시아)과 경제적, 정치적 협력 관계를 맺고 있거나 이미 긴밀히 협력하고 있는 국가들에 분명한 신호를 보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트럼프가 자신만의 접근 방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과도 연속성을 갖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점점 더 치열해지는 투쟁의 일환이며, 또한 미국이 파산 직전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도널드 트럼프는 작년(2025년) 초, 새로운 관세 부과를 발표하고 유럽이 안보를 더욱 철저히 관리하고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EU와 NATO 내부에 큰 우려를 불러일으켰고, 대규모 군사력 증강은 물론 ‘전쟁 의식’ 고취를 위한 선전 활동으로 이어졌다. 스웨덴은 NATO 가입을 완료했고, 크리스테르손(Kristersson) 총리는 “우리는 전쟁 중도 아니고, 평화 상태도 아니다”라고 밝혔다.(1)

 

따라서 2026년 현재, 프롤레타리아적이고 국제주의적인 주도권의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상황은 점점 더 세계대전으로 치닫고 있다. 노동자들이 지배계급을 위해 전쟁터에서 서로를 학살하는 것을 막고, 정당한 불만이 부르주아지에 이용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국제적 차원에서 더 높은 수준의 계급투쟁이 필요하다. 그러나 스웨덴에서는 당분간 이러한 움직임의 조짐이 미미할 뿐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와 계급투쟁을 이해하려면, 1970년대 초 위기의 재발, 즉 전후 호황이 끝나고 부채 기반 경제 정책이 더는 유지될 수 없게 되면서 이윤율이 하락함에 따라 케인즈주의가 최종적으로 실패한 시점을 고려해야 한다. 서구 세계 전역(스웨덴을 포함)에서 발생한 인플레이션과 실업,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 석유 파동 등, 이 모든 현상의 근본에는 이윤 위기가 자리 잡고 있다. 이는 국제적으로 널리 퍼진 현상으로, 산업계(그리고 노동자)에는 철강 위기, 특히 스웨덴에서는 1970년대 조선업 위기와 같은 형태로 나타났다. 자본가들이 내놓은 해결책은 구조조정이었다.

 

부르주아지의 치열한 투쟁과 이윤 확보를 위한 생산 구조 개편은 결정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중공업의 중요성은 감소하고, 대신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초소형 전자 기술), 정보 기술, 서비스업과 같은 분야가 부상했다. 스웨덴의 산업 노동자 수는 1970년대 초 140만 명에서 현재 60만 명 미만으로 감소했다. 동시에 서비스 부문은 전체 노동자의 70~80%를 차지하며 압도적인 규모로 성장했다.

 

이러한 변화는 노동 시장의 구조와 노동계급의 구성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켰고, 이에 따라 노동자의 정체성 또한 변모시켰다. 예전의 공장, 제분소, 그리고 수많은 동료와 함께 일하고 생활하던 장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기본적인 노동자 정체성은 상당 부분 사라져 버렸다. 오늘날 노동 시장은 서비스 부문이 지배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 부문은 매우 이질적이다. 대학 졸업자부터 무학력자까지, 시간제 임시직, 정규직, 계약직, 인력 파견업체, 비자발적 자영업자(2) 등 다양한 고용 형태가 존재하며, 임금, 근무 조건, 생활 방식, 주거 형태 또한 제각각이고, 계급 공동체 의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긴축 정책은 노동조합을 넘어선 투쟁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비공인(와일드캣) 파업의 물결로 이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투쟁이 패배로 끝났다는 점도 분명하다. 자본은 생산 시설을 저임금 및 저비용 지역으로 이전하고 생산, 경제, 그리고 노동계급의 구조를 재편하는 데 성공했다.

 

1990년대 이후 파업은 감소세를 보였고, 최근 10~15년 동안은 파업 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이래 최저 수준의 파업 활동을 기록했다. 이처럼 노동 시장의 급격한 변화, 분열된 계급, 그리고 오랜 기간 투쟁 전통과 경험이 잊혀진 현실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매우 어려운 상황이 조성된 것은 분명하다.

 

동시에 최근 몇 년 동안 주목할 만한 사례가 적어도 몇 가지 있다. 2023년 스톡홀름( Stockholm) 통근 열차의 비공인 파업(3), 2024년 베르크슬라겐(Bergslagen)에서 열린 노조 밖 대중 집회(4), 그리고 2025년 볼트(Volt) 택배 노동자들의 소규모 비공인 파업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투쟁들은 칭찬할 만하고 중요하며, 노동계급은 이러한 투쟁을 통해 투쟁 범위를 확대하고, 투쟁이 성장하면서 (이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더욱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해야 한다. 오늘날 분열된 계급에게 출발점은 어렵겠지만, 새롭게 등장해야 할 계급의식은 독립적이고 노조를 넘어선 투쟁을 통해서만 생겨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투쟁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026년 스웨덴 자본의 좌파(사민주의, 좌파) 정치 상황은 ‘팔레스타인 연대’와 위선적인 ‘반제국주의’(국제주의적 관점은 완전히 부재)가 지배적일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는 2026년이 선거의 해라는 사실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현재 상황은 일종의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극우) 스웨덴 민주당(SD)은 20%가 조금 넘는 득표율로 안정적인 위치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들의 영향력 유지는 ‘부르주아’ 정부에 달려 있다. 여론조사에서는 여전히 적-녹 연합이 여전히 근소한 차이로 앞서고 있으며, 그 격차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우파 정당들은 지지율이 너무 낮아 의회에서 퇴출될 위기에 처해 있다.

 

NATO 가입이나 군비 경쟁 전반에 대한 비판적 의견이나 반대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부르주아지는 "러시아에 대한 공포", 불안정한 세계정세, 그리고 "백악관의 미치광이"라는 소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좌우 양측 모두 군비 경쟁과 전쟁 선동을 부추기는 데 협력하고 있다. 동시에, 스웨덴의 경제적, 사회적으로 가장 심각한 문제인 유럽에서 세 번째로 높은 9%에 달하는 실업률에 대한 해결책은 아무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물론 계급 문제는 그들의 세계에서는 완전히 낯선 개념이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앞서 언급한 실업 문제 외에도, 불안정한 노동 조건과 위험한 작업 환경이 확산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사망 사고(2025년에는 매주 한 명꼴)와 산업재해가 발생하고 있다. 또한, 2022~2023년 이후 인플레이션이 상대적으로 진정되었는데도, 여전히 높은 생활비는 문제다. 계급과 공동의 이익을 위한 투쟁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개인주의적이고 분열적인 정체성 정치가 여전히 지배적이며, 이는 좌파와 보수 우파 모두에서 나타난다.

 

점점 더 가혹해지는 노동 환경, 인종차별과 분열, 치솟는 생활비, 그리고 재무장과 전쟁 준비를 위해 계속해서 긴축 정책을 펼치는 국가... 지금, 이 순간이 바로 투쟁해야 할 때이며, 투쟁을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어느 때보다 절박해지고 있다. 이를 위해 노동계급은 우리의 공통된 입장과 집단으로 행동할 때 발휘할 힘을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집단 투쟁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조직 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 사이의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 현재 스웨덴 노동조합총연맹(LO)의 조직률은 58%에 불과하다. 또한, 우리는 민족주의 신화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계급 협력을 조장하고 노동자들을 서로 대립시키는 것이지, 계급 대 계급의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계급은 투쟁과 연대를 통해 우리가 전 세계 노동자들과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결코, 특정 ‘민족’이나 국가와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때문에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NWBCW)’ 운동이 매우 중요하다. 자본주의 위기가 우리를 전쟁으로 몰아넣고, 우리 모두를 극도의 야만적인 행위로 위협하고 있는 이 시점에, 진정한 국제주의자들이 힘을 모으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러한 위원회를 통해 우리는 노동계급과 그들의 투쟁에 국제주의 메시지를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결국, 전쟁을 멈추고 전쟁 준비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계급뿐이다. 노동계급이 국가가 아닌 계급으로서 독립적으로 행동한다면, 우리의 생활 조건을 지키고 전쟁을 막거나 멈출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독립적인 노동자 투쟁과 국제주의, 이것이 바로 2026년에 지향해야 할 목표이다. 그것은 여기 스웨덴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같다.

 

2026년 올해의 과제가 작년보다 더 쉬워지지는 않겠지만, 다른 대안은 없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본질과 노동계급이 그 어떤 자본주의 분파도 지지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정치적으로 명확히 밝혀야 한다. 노동계급이 의회주의 환상에서 벗어나, 노동조합 밖에서 독립적인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우리의 입장을 널리 전파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양한 노동자 집단 사이 차이를 넘어, 국경을 넘어,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투쟁을 확대하는 데 힘써야 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체제 전체를 전복하는 데 필수적인 무기인 국제적인 혁명적 노동계급 정당(세계혁명당)의 건설로 이어져야 한다. 제3차 세계대전과 환경 재앙으로 치닫는 세상에서, 우리는 더는 낭비할 시간이 없다.

 

2026년 4월 16일

콤파스 그룹(Kompass-gruppen)

 

<주>

 

1. 스웨덴에서 비자발적 자영업자(bemanningsföretag och ofrivilliga F skattare)는 기업이 정규직을 고용하는 대신 외주(underleverantör) 형태로 계약하기 위해, 구직자나 노동자에게 강제로 F-skatt(법인세/사업소득세) 등록을 요구하거나 실직의 두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인 사업자로 등록하는 노동자를 뜻다.

2. 스웨덴과 나토 가입: 재무장에 맞서 싸우자,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자!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5-06-14/sweden-and-the-nato-accession-fight-against-rearmament-fight-against-capitalism

3. 스웨덴: 통근 열차의 비공인 파업이 나아갈 길을 보여준다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3-04-28/sweden-the-wildcat-strike-on-the-commuter-trains-shows-the-way-forward

4. 스웨덴의 계급투쟁: 노동조합에 대한 분노와 불만 - 그 다음은 무엇인가?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5-01-06/class-struggle-in-sweden-anger-and-dissatisfaction-with-trade-unions-and-then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6-05-26/capitalism-s-drive-towards-generalised-war-only-the-working-class-has-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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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22호]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자의 태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자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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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현재의 정치 체제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부르는데, 그 뿌리는 '부르주아지 독재'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수 계급인 부르주아지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권력(경제, 정치, 군사적)을 갖는다. 반면에 다수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는 살기 위해 부르주아지가 부과한 조건에서만 자기 노동력을 팔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현대의 노예, 즉 임금 노예이다. 따라서 두 계급의 이해관계가 양립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가 중립적이고 계급을 초월한 전지전능한 기관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전의 모든 국가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국가는 계급 통치의 기구이며, 그 기능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 즉 노동계급을 임금 노동의 사슬로 묶어 부르주아지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거는 누가 부르주아지를 대신하여 국가를 운영할지 결정한다. 선거 제도는 부르주아 독재 체제를 주권자(국민)의 명령으로 포장하고, 동시에 그것을 민주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부르주아지는 독재를 위한 이상적인 정치적 외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계속 의지해왔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보통 선거권을 통해 '다수' 또는 '국민'이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는 강력한 착각을 만든다. , 자본주의 국가가 실제로 중립적인 기관이라는 착각, 유권자가 단순히 주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해 진정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을 만든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후보자가 누구든 (우파든 좌파든) 기껏해야 부르주아지 이해관계를 방어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해 줄 사람 중에서 선출하게 된다. 따라서 노동계급이 누구에게 투표하든 자본주의적 요구가 승리한다. 보기를 들어 경제 위기 때마다 자본주의 체제는 긴축과 해고 등을 요구했고, 선거에서 누가 이기든, 모든 정부는 자본주의 요구에 따랐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선거, 의회)에 대한 맑스주의자의 태도는 무엇이었나?

 

이에 대한 맑스주의자의 태도는 어떤 영원한 반()정치적 '순수주의' 원칙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의 일부인 의회의 역사적 발전에 근거한다. 오늘날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이해하려면 그것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그리고 각 단계에서 노동자 운동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살펴봐야 한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의회는 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의 전임자인 봉건 귀족에 대항하는 핵심 무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노동자들은 정치 과정에서 명백히 배제되어 투표하거나 후보를 낼 수 없었다. 따라서 초창기 노동계급 운동에서 제기된 요구 중 일부는 정치적 대표성(영국의 차티즘 등)을 포함했다. 지배계급은 양보할 수밖에 없었고 노동자들에게 제한적인 정치적 권리를 부여해야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맑스와 같은 혁명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새롭게 제공되는 공간을 활용하도록 장려했다. 맑스는 영국, 미국, 네덜란드처럼 거대한 관료 체제와 군사 기구가 없는 일부 국가에서는 의회를 통한 평화적 전환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지만, (1871년 파리 코뮌의 경험이 보여주듯) 다른 대부분 국가에서 노동계급의 정치권력 장악은 혁명을 수반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노동계급은 단순히 기성 국가기구를 접수하여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것을 행사할 수는 없다.”(맑스, 프랑스 내전, 1871) 이제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국가를 파괴한 후 새로운 기관을 건설해야 한다.

 

자본주의 발전과 더불어 자본주의 국가들이 규모와 정교함을 갖추면서 실제 정치권력은 점점 더 의회에서 벗어나 관료주의 복합체와 상비군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국가 복합체 내에서 부르주아 의회는 자본주의 통치를 최적화하기 위한 토론장과 위원회로 위축되었다.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의회 밖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2 인터내셔널의 혁명 세력에게 의회와 선거 참여는 전술적이고 선동적인 것이었다. 선거 출마는 혁명가들이 선거 유세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연설하거나, 의회 연단에서 연설과 시위를 하거나, 의회 면책을 이용해 혁명가들을 기소로부터 보호하는 등 선전을 확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17년 혁명 물결이 발발한 후 제3 인터내셔널 내에서 이를 정확히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즉시 제기되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건의 영향을 받은 노동자평의회’, 일명 소비에트 운동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하고 있었다.

 

투쟁의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대안을 찾았다. 부하린이 작성하고 제3 인터내셔널 제2차 대회에서 채택한 테제는 국가 체제로서 의회주의는 부르주아지 통치의 민주적형태가 되었기 때문에 부르주아지 국가기구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파괴하고 노동자 대표로 구성된 지역 소비에트로 대체해야 한다라고 인식했다. 동시에 그들은 혁명적 상황에서도 의회 연단을 여전히 유용한 선전 도구로 여겼다. 이를 묘사하기 위해 혁명적 의원들이 '적진에 들어가 지뢰를 매설'하고 '의회 담장 뒤에서 대중이 의회를 폭파하도록 돕는' 군사적 이미지를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코뮤니즘은 미래 사회의 국가기구 또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기구로서 의회를 부정한다. 장기적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의 대의를 위해 의회를 사용할 가능성을 부정한다. 의회 파괴를 자신의 임무로 규정한다. 부르주아 국가기구는 오직 분쇄 대상으로만 여겨질 것이다. 이것이 [그 기구들의] 이용과 관련하여 제기될 오직 하나의 그리고 유일한 길이다. (...)

 

코뮤니스트당은 이 의회 체제 속에서 자기 역할을 하기 위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기구와 의회 분쇄를 의회 안에서 돕기 위해 들어가는 것이다.” (3차 인터내셔널 첫 4개 대회 테제, 결의와 선언, 1920)

 

반면, 보르디가의 기권주의 분파로 대표되는 코뮤니스트좌파의 입장은 의회가 전술적 문제라는 부하린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혁명이 임박하고 노동계급 당면 임무가 부르주아 지배의 정치 기구를 파괴하고 자신의 것으로 대체하는 것일 때, 혁명가들이 의회에서 의석을 차지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노동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더 중요한 일에 쏟아부을 에너지를 빼앗아 가며, 결정적인 순간에 이들 기구에 정당성을 부여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맑스주의 원칙으로 민주주의 질서가 오랫동안 발전해 온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선동은 선거와 부르주아 기구에서 보이콧을 확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선거 활동에 막대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실천은 이중적인 위험이 있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활동이라는 인상을 주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당의 모든 힘을 빨아들여 당의 다른 모든 부분을 마비시킨다. (...)

 

선거 활동을 수행하는 당 조직은 혁명에 필요한 합법적 혹은 비합법적 활동에 맞는 조직의 성격과 뚜렷이 다른 매우 특수한 기술적 성격을 발전시킨다. 당은 유권자들을 준비하고 동원하는 것에만 관심을 쏟는 여러 선거위원회로 쪼개진다. (...)

 

1 인터내셔널은 선동, 비판, 선전하기 위해 의회 제도를 활용했다. 그 뒤 제2 인터내셔널에서 의회주의의 해악적 영향이 나타났다. 그것은 개량주의와 계급협조를 가져왔다. (...)

 

언론, 결사의 자유 등과 같은 방식으로 선거를 활용할 수는 없다. 언론, 결사의 자유 등을 활용하는 것은 행동 방식 문제이다. 선거 캠페인과 의회 연단을 활용하는 것은 부르주아 기관 문제이다. 부르주아 기관은 노동자 소비에트 같은 프롤레타리아 기관으로 대체해야 한다. 우리는 혁명 이후에 언론, 선전 등의 활용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기구를 분쇄하고 그 자리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세우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

 

착취계급에서 피착취 계급으로 권력 이전은 그 뒤로 대의제 기구 변화를 불러온다. 부르주아 의회주의는 소비에트 체제로 대체해야 한다. 혁명적인 직접행동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을 은폐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낡은 가면을 찢어버려야 한다. 이것이 의회주의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며, 이 관점은 혁명적 맑스주의의 방법에 완전히 부합한다. (...)

 

코뮤니스트혁명의 대의는 바로 착취계급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직접행동을 요구한다." (아마데오 보르디가, 의회주의에 대한 테제, 1920)

 

믿을 수 없는 자들이 의회에 들어가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혁명의 노선에 따라 투쟁할 거로 생각하는 건 순진한 생각이다. (...) 의회에 들어가면 연설을 통해 선동할 수 있다고 흔히들 말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주적 제도들을 믿도록 길들이는 것이다. 의회에 들어간 자들에게 선동을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 세계 코뮤니스트당은 이제 의회 선거로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다른 할 일을 찾아야 한다. (...)

 

리프크네히트 동지는 분명 위대한 일을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의회 밖 대중들 속에서 활동하는 한에서만 그랬다. 만약 리프크네히트 동지가 의회 안에서 발언만 했었다면, 맥도널드나 다른 많은 배신자처럼 아직 살아있었을 것이다. (...)

 

모든 나라 인민이 그런 것처럼,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앞에도 이제 양자택일의 선택이 있다. 두 가지 전술이 있다. 하나는 갖가지 민주적 단계를 통해 인민들 속에 순종의식을 키우는 것이다. 다른 것은 대중들 속에 혁명적 정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

 

이제 우리 힘은 대중들 속에서 혁명적 투쟁을 날카롭게 만드는 데 사용해야 한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지금 순종의 길이냐 투쟁의 길이냐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갈라처(영국)의 지지 발언, 위의 글)

 

코뮤니스트좌파 뿐만 아니라 아나키스트, 생디칼리스트 등도 원칙적으로 부르주아 의회 참여를 완전히 거부했다. 이들 모든 분파는 노동자들이 자기 정치를 포기하고 자신의 적()인 부르주아 정당의 약속, 즉 자본가 식탁에서 더 많은 빵 부스러기를 뜯어내겠다는 약속에 넘어가는 것은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데 동의했다. 노동계급은 투쟁을 통해 그 부스러기를 직접 가져갈 수 있고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코뮤니스트좌파가 선거 참여가 유용하다고 판단하여 마지막으로 선거에 참여한 것은 1948년이었다. 이탈리아의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PcInt)투표하지 말자라는 구호 아래, 선거 유세를 하기 위해 참여했을 뿐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냉전의 경계가 형성되고 노동자들은 각각 (스탈린주의)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과 기독교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두 제국주의 블록, 소련과 미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기 때문에, 선거 자체는 제국주의 갈등의 한 장면으로 축소되었다. 그때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에 선거는 도전이었다. 73개 도시와 읍내에 있는 지부와 수천 명의 당원으로 당은 빠르게 성장했지만, 아직은 다양한 제국주의 세력의 지원을 받는 주요 정당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일부는 1919년 보르디가의 기권주의분파의 입장으로 돌아가 선거를 강력하게 비난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대다수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의회 방식을 통해 이룰 수 없다는 원칙에 모두가 동의하면서도 선거 문제는 전술적 문제라고 주장했다. 1948년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한 결정적 요인은 후보자를 내세운 정당이 모든 도심 광장에서 열리는 집회나 공청회에서 발언권을 가졌다는 사실이었다. 공적인 공간을 사용함으로써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은 더 많은 노동자에게 다가갈 수 있었고 동시에 체제 전체를 공격할 수 있었다. 아래 전단에서 볼 수 있듯이 당의 목표는 여전히 반()의회적이었다.

 

우리 국제주의자들은 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의 신비를 여전히 믿고 있는 대중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가 부활할 것이며, 전쟁 세력을 물리칠 방법을 찾을 것이라고 보다 효과적이고 현실감 있게 말할 수 있어서 선거와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오직 부패한 투표용지와 의회를 모두 쓸어버릴 수 있는 의식과 힘을 가질 때만 가능하다고 말하기 위해서.” (“투표하지 말자”, 19484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집행위원회)

 

실제로 계급의식을 발전시키는 가장 나은 방법이 무엇인지는 전술적 문제로 남아 있으므로 선거 참여를 배제하지 않았지만,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은 의회 선거에 참여해서 얻을 수 있는 전술적 장점을 결코 찾지 못했다. 그리고 선거에 대한 자본주의 미디어의 역할이 증가하면서 의회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 전술적으로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략적으로 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 이후의 모든 선거에 참여하지 않게 된다.

 

오늘날에는 자본주의 미디어와 자본(선거비용)이 선거 자체를 더 지배하게 되어, 노동자들을 자본의 경쟁 영역으로 강력하게 끌어들인다. 이러한 선거에서 노동계급이 자신의 후보를 출마시킨다 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고(거대한 물량 공세 앞에 작은 선전의 효과도 초라해진다), 오히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노동자들의 환상만 강화할 뿐이다.

 

부르주아 선거를 넘어, 어떻게 할 것인가?

 

선거를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계급투쟁으로 대응해야 한다. 선거에서 자본가계급은 우리에게 온갖 장밋빛 공약과 미래를 제시하지만, 실제로는 임금 노예와 전쟁만을 제안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이 자본가 편에 서서 싸우도록 속이기 위한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는다. 대안은 노동자민주주의이다. 노동계급은 위대한 투쟁 역사에서 파업위원회, 대중총회, 노동자평의회와 같은 독립적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곳에서 노동자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었다.

 

노동계급은 특히,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수백만, 수천만 명이 자기 삶의 수준과 일상을 스스로 결정하고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1871년 파리 코뮌은 노동계급 대표자를 직접 선출할 가능성을 열었고. 1905년에 이어 1917년 러시아혁명에서 만들어진 소비에트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실제로 노동자 민주주의를 실현했다. 전 세계 노동계급은 여기에서 영감을 받아 각 나라와 지역에서 노동자평의회를 만들었다. 심지어 기차 승객들도 달리는 열차에서 모든 승객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도록 위원회를 구성할 것이다. 이러한 조직들은 노동자들이 투쟁의 물결 속에서 자주적으로 투쟁을 조절-통합하고 자기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스스로 만들었다. 일단 선출되고 나면 유권자의 통제를 받지 않는 대통령, 국회의원과 달리, 노동자의 대표는 노동자평의회에서 위임받은 내용에 반드시 따라야 하며, 유권자가 언제든 교체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각 대표와 함께 대체 대표를 선출했고, 탄압 시기에는 대표가 체포되었을 때 역할을 대신할 대체 수단이 되기도 했다.

 

미래에 노동자 투쟁이 대대적으로 확산하고 계급의식이 발전하여 세계적인 계급투쟁이 벌어진다면, 세계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체제에 맞설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계급투쟁이 혁명적 절정에 이르고, 마침내 지배계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노동계급은 자기 조직인 노동자평의회를 통하여 생산과 사회를 민주적으로 통제할 것이다. 이때 비로소 노동계급은 처음으로 자기 권력을 갖게 되며, 사회는 계급 철폐와 인간해방을 위한 자유로운 인류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자 민주주의로 대체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노동자 민주주의는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자 민주주의가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최초로 성공한 프롤레타리아혁명이 한 나라(러시아)에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모든 경험은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의 노동계급은 혁명에 가까워졌을지 모르지만, 오늘날 노동계급은 자신을 계급으로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게다가 수십 년 동안 계급이 아닌 민주 시민이나 애국하는 국민으로서 투표하도록 길들어졌다.

 

여전히 유일한 해결책은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며, 그것은 혁명적 투쟁을 통해 썩은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의회와 자본주의 권력의 모든 기구를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민주주의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선출한 사람이 직접 소환할 수 있는 노동자평의회와 같은 노동자 권력 기구를 만들어 현재 우리를 지배하는 가짜 민주주의를 대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이형로

 

 

이 글은 <코뮤니스트 정세토론회> "선거 이후 위기와 노동계급의 대안" 발제문에서 발췌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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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에 부쳐 - ‘선거 환상’을 넘어서자

지방선거에 부쳐 - ‘선거 환상’을 넘어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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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에 이어 또 하나의 선거가 시작되었다. 이번엔 지방 권력과 교육감을 뽑는 선거다. 부르주아 선거라는 측면에서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는 본질에서 같다. 오히려 경제적인 이해관계와 일상생활과 관련된 정치에서는 중앙정치보다 계급적이기도 하다.
 
이번 지방선거는 노동자들에게 전혀 특별한 것이 없지만, 부르주아 거대 양당이 여야가 바뀌어 서로에 대한 심판(내란 세력 청산, 정권 견제)을 주장하고 있고, 유권자들에게 자신을 대변할 세력을 선출하는 민주주의의 장으로 여기게 한다. 하지만 투표는 속임수일 뿐이다. 우리가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실업자이든 퇴직자이든 현재의 선거는 노동자의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지난 4년 전에도, 8년 전에도, 그 이전에도 정치인들은 선거에서 수많은 약속을 해왔다. 노동자들이 조금 더 참고 함께 위기를 극복한다면 머지않아 우리의 생활과 노동조건은 좋아질 것이라 약속했었다. 말 그대로 4년 후, 8년 후 변화된 상황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나빠지는 쪽으로의 변화였지, 개선이 아니었다. 끝 모를 경제위기와 제국주의 전쟁은 노동자민중에 고통만을 안겨 주었고, 이에 대한 대가는 언제나 (부자도 정치인도 아닌) 우리가 치러야 했다. 복지와 연금은 줄어들고, 주거와 생활비용은 비싸져만 가고, 상시적인 해고 위협과 불안정한 일자리, 장기적인 실업, 불안정 노동의 증가는 다수의 노동자가 겨우 먹고살 수 있는 정도만 허락하고 있다. 이것이 그들이 약속한 변화의 전부였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 그리고 1991년 부활하여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치러진 지방선거 이래 30여 년이라는 기간, 여러 차례 정권이 바뀌고 정치인이 바뀌고 노동자 출신이 정치무대에 등장하기도 했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후퇴하거나 누구도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을 수 없는 매우 위험한 사회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여전히 생존권 위협과 각종 차별에 직면해 투쟁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해결책도 없으며, 투쟁할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정치인들의 약속은 이제 지키지 못할 약속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선거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른바 진보-노동 정당들이 자신들에게 투표하고 집권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약속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노동자를 팔아 정치판에 뛰어들어 엄청난 재정적, 인적 자원과 시간을 낭비하면서도 투쟁을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들에게 환상과 좌절만 안겨주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르주아 선거를 ‘서커스’나 ‘환상’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선거에 참여하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정치인에게 권력을 위임했다고 생각하며, 투표행위로 자신도 권력 일부로 참여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선출된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의 직접 통제를 받지 않으며 선거기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유권자와 분리되어 행동한다. 즉, 이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항은 몇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선거라는 이벤트에서만 적용된다는 이야기다.
 
또한, 부르주아 선거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지배 질서를 강화하거나 재편하기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를 넘어서 자본주의 지배 질서 자체를 바꾸거나 착취와 억압제도를 폐지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부르주아 선거라는 무대에서는 원래 무대의 주인인 ‘대중’이 아니라 무대의 설치 관리자인 ‘국가권력’이 이를 주도하기 때문에, 그들이 정한 시간과 장소, 그들이 정한 순서와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으며, 대중들도 무대를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넘어서겠다는 정치세력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지배계급이 차려놓은 서커스 공연에 곡예사로 참여하는 것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들이 선거에 참여하면서 선거를 통해 투쟁을 확산시킨다거나 후보를 내세워 투쟁의 구심을 세우겠다는 발상 역시 또 다른 ‘환상’에 불과하다.
 
유권자의 측면에서도 부르주아 선거판에서 투표하는 행위는 노동계급을 자신의 주장이나 목소리 없이 정해진 규칙과 객관식 선택지 안에서의 수동적인 개인들로 축소시킨다. 개별의 투표함과 투표소 안에서 노동계급은 작업장, 회사의 동료들과도 투쟁 현장의 동지들과도 차단된 채, 자본가를 포함한 얼굴도 모르는 지역주민과 섞여 분간하기도 힘든 1개 정당이나 정치인을 자신의 대표로 뽑아주어야 한다. 즉, 이러한 부르주아 선거판의 투표 속에서는 그 어떠한 계급연대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투표행위를 두고 지배계급은 ‘우리 국민(주민)’들이 이 정부를 위해 투표했으니 따르라’는 것을 임기 내내 홍보하고 협박해 댈 것이다.
 
그런데 왜 의회 제도를 부정하는 사회주의자 또는 자칭 혁명 세력조차 선거에 참여하거나 선거 전술을 사용하는 것일까? 정말 선거로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가? 아니면 합법적인 사회주의 선전⦁선동의 연단이 선거시기에는 열리기 때문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는 거짓이고 하나는 환상이다. 사회주의자들의 선거 참여는 사실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레닌과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선거에 대한 입장과 1930년대 트로츠키의 투항 전술이 ‘혁명적 의회주의’, ‘선거 전술’이라는 논리로 포장되어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원칙으로 받아들여져 온 결과이기도 하다.(1) 이른바 ‘선거 전술’에 대한 오해와 왜곡이 현재까지도 전혀 시정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역사적 논쟁의 본질은 의회 전술 자체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 상황과 그에 따른 적용 문제, 즉 러시아의 후진적 정치 상황에 적합한 볼셰비키의 의회 전술을 일반화하여 유럽 국가들에도 적용하려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일정 수준 괘도에 올라 의회의 이용 자체가 혁명운동에 걸림돌이 된 유럽 코뮤니스트 좌파들의 반(反)의회 혁명 전략의 대립이었다. 당시 서유럽은 이미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계급 일부가 되어버렸고, 이들이 진출한 의회가 오히려 노동계급을 학살하는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혁명적 코뮤니스트들은 의회를 이용하기보다는 의회를 타도할 목적으로 반(反)의회 노동자평의회 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과거의 논쟁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에도 선거 전술과 의회의 혁명적 이용이 가능해지려면, 현재의 부르주아 선거제도에서 의회 제도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연단을 열 수 있어야 하며, 의회제도의 활용이 계급의식의 발전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역사의 경험은 그것과는 반대되는 결과만을 보여주었다. ‘혁명적인 의원단’은 의회를 내부로부터 파괴할 수 없으며, 설사 그러한 전략이 있는 정당이었더라도 부르주아 정치에 적응하면서 타락하여 결국 자본주의에 흡수되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물론 이들에게 표를 던진 노동자들은 혁명적 경험이 아닌 타락의 경험만을 갖게 되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부르주아 의회와 민주주의는 ‘혁명적 의원?’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며, 애국가를 강요하고 헌법 질서를 수호해야 한다는 철의 원칙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의회제도의 활용은 바로 이런 것을 대중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의 민주주의 규칙과 선거제도에 복종하고 놀아나는 한, 자본주의를 결코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극적이거나 투표를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실현할 수 없다.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선거보다 훨씬 민주적이고 계급적인, 그리고 삶에 직접 도움이 되는 투쟁을 위한 대중총회, 파업위원회(2)를 구성하여 행동에 나서야 한다. 노동계급의 미래는 노동계급 스스로 일어서는 것에 달려있기 때문에 누가 대리해 주거나 다른 계급과 뒤섞임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다가올 지방선거에서 선거운동과 선거 정책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 동원되거나 힘을 낭비하지 말고, 투표소가 아닌 투쟁의 현장에서 투쟁의 쟁점을 걸고 파업을 위한, 연대를 위한, 저항을 위한 행동을 준비하자. 고립되거나 장기간 투쟁으로 지쳐있는 우리의 노동자 투쟁에 하나의 계급으로 연대하자.
 
자본주의 쇠퇴기 모든 부르주아 선거는 사기와 다름없다. 매일 세계 곳곳에서 수백 번 넘는 투쟁이 일어나고, 노동자들은 1년에만 수만 번의 투쟁을 벌인다. 하지만, 고작 몇 년에 한 번 치루는 선거만으로 노동계급은 자신이 누려야 할 권력을 빼앗기고, 일상의 대부분을 지배받는다. 이것이 노동자들이 선거를 통해 노예가 되는 ‘민주적인 권리’의 실체다. 노동자들이 이러한 부르주아의 정치와 선거제도에 복종하는 한, 자본주의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
 
노동계급의 정치는 투표소가 아니라 저항하고 투쟁하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노동자들이 살아 숨 쉬며 토론하고 행동하는 곳, 계급적으로 연대하고 단결하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다가올 지방선거에서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선거에 끼어들어 이용당하지 말고, 계급의 요구를 내걸고 대중총회와 파업위원회를 건설해 투쟁하자! 투표소가 아닌 투쟁의 현장에 연대하면서 파업을 위한, 저항을 위한 행동을 준비하자.

 

선거가 아닌 계급투쟁으로!

대중총회, 파업위원회 건설! 생존권 투쟁 전면화!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계급투쟁!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2026년 5월 (재발행), 2022년 5월 발행

 

 
 
<주>
1. 「코뮤니스트」22호,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자의 태도" 참고
      https://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7146
 
2.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 "2025년 조기대선: 선거가 아닌 계급투쟁으로!" 참고
      https://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1&document_srl=345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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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노조 파업 철회의 주요 의미

삼성전자 노조 파업 철회의 주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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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노조가 잠정 합의안에 서명하면서 예정되었던 18일간의 파업을 철회했다. 대신 삼성전자 노조 공동투쟁본부는 조합원 대상 투쟁 지침을 통해 오는 22일 오후 2시부터 27일 오전 10시까지 잠정 합의안에 대한 찬반투표를 실시할 예정이다. 파업은 5월 21일부터 시작될 예정이었으며, 약 4만 8천 명의 조합원이 참여할 수 있었다. 이 파업은 인공지능(AI) 및 메모리 칩 생산을 포함한 삼성의 반도체 생산에 차질을 줄 수 있었다.

 

이번 합의는 평택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사 갈등의 현재 진행 상황이다. 지난 4월 23일, 4만여 명의 삼성전자 노동자들이 평택 공장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성과급 인상, 성과급 투명화, 그리고 성과급 상한제 폐지를 요구했다. 우리는 이전 기사에서 이 분쟁의 모순을 명확히 설명했다. 삼성은 반도체 호황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지만, 노동자들은 생활비 상승, 인플레이션 압박, 전쟁과 에너지 위기의 여파에 직면해 있다. 전쟁과 위기는 직장 밖에서만 머물지 않고 노동자들의 삶에 직접적인 압박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그러나 파업 철회는 또 다른 사실을 보여준다. 삼성, 정부, 그리고 대다수 언론은 파업이 확산하고 위험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한통속이 되었다.

 

삼성의 전략: 분열, 지연, 제한

 

삼성은 노조의 요구를 단순히 수용하지 않았다. 경영진은 이번 갈등을 통제 가능한 임금 협상 범위로 제한하려 했다. 특별 수당과 일회성 성과급을 제안했지만, 성과급 제도화에는 반대했다. 삼성은 노동자들이 갈등의 흐름을 주도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갈등이 협상 테이블과 법적 절차, 그리고 제한된 안건에 대한 투표의 범위 안에 머물기를 바랐다.

 

삼성은 또한, 서로 다른 노동자 집단들을 분리하려 했다. 반도체 노동자들에게는 메모리 사업부가 흑자를 내고 있어 상황이 특별하다고 설명했고, 수익성이 낮은 사업부의 노동자들에게는 같은 요구가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는 회사의 수익성 높은 부서의 노동자와 수익성이 낮은 부서의 노동자 사이에 분열을 조장한다.

 

이러한 분열은 자본에 유리하다. 만약 노동자들이 자신이 속한 부서의 이익 분배만을 위해서 싸운다면, 그들은 계급의 구성원이 아닌 특정 부문의 일원으로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수익성이 좋은 메모리 사업부의 노동자들은 더 큰 성과급을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하청·비정규직, 물류, 청소, 경비, 다른 전자 공장 또는 기타 부문처럼 상대적으로 취약한 부문에 속한 노동자들은 투쟁에서 소외될 수 있다.

 

정부의 역할

 

이번 갈등에 이재명 정부도 개입했다. 정부의 중재는 중립적인 개입으로 포장되었지만, 실제로는 국가 전략 산업 보호를 위한 조치였다. 삼성은 평범한 기업이 아니다. 한국의 수출, 반도체 생산, 그리고 세계 시장에서 국가적 위상을 지탱하는 핵심 기업이다.

 

정부 관계자들은 파업이 초래할 경제적 위험을 경고했다. 수출, 공급망, 그리고 국가 경제에 미칠 막대한 피해를 언급하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국가 경제에 대한 위협으로 둔갑시켰다.

 

파업 금지 조치에 대한 위협도 있었다. 이재명 정부는 긴급 조정권 발동을 검토했다. 긴급 조정권은 공익이나 국가 경제를 명분으로 파업을 중단시키거나 유예할 수 있는 조치이다. 법원 또한 반도체 생산 현장 내에서의 파업 행동을 제한했는데, 특히 안전 보호 시설 및 제품 변질 방지와 관련된 작업에서 쟁의행위가 금지되었다.

 

이는 중요한 지점이다. 파업 금지법은 계급투쟁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 내부의 중요한 무기다. 이는 노동자들의 행동이 생산, 이윤, 국가의 이익을 위협할 때 사용된다.

 

파업 금지법의 위협은 투쟁을 확대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한 기업 내부에만 머무르는 파업은 고립될 수 있다. 하나의 법적 범주 안에 머무르는 파업은 제한될 수 있다. 공식 노조 경로에만 의존하는 파업은 저지되거나 방향이 바뀔 수 있다. 투쟁을 확대한다는 것은 다른 부문, 즉 하청·비정규직, 물류, 다른 전자 공장, 운송, 에너지, 교육, 돌봄 및 기타 부문의 노동자들에게까지 파업의 범위를 넓히는 것을 의미한다. 투쟁이 확산할수록 한 기업의 법적 문제로 축소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언론과 ‘국가 이익’이라는 담론

 

대부분의 한국 언론은 이번 파업 가능성을 삼성, 반도체 산업, 수출, 그리고 국가 경제에 대한 위협으로 다루었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언론은 종종 자본과 국가의 언어를 사용한다. 언론은 파업이 기업, 투자자, 수출, 공급망에 어떤 손실을 끼칠지 묻는다. 하지만 물가 상승, 노동 시간 연장, 스트레스, 불안정이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거의 묻지 않는다.

 

이러한 일방적인 보도는 노동자들을 고립시키는 데 일조한다. 이는 삼성 노동자들이 생산을 방해하는 것이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국가 경제 전체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명분으로 다른 노동자들의 연대를 막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국가 수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여가, 주거, 식량, 교통, 돌봄, 그리고 안전한 삶을 위한 임금으로 살아간다. 언론이 국가를 위해 삼성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가가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다.

 

이익 분배 요구의 한계

 

노조의 이익 분배 요구는 노동자들의 진정한 분노를 반영한다. 노동자들은 삼성의 막대한 이윤을 보면서 "왜 주주와 경영진만 혜택을 보는가?"라고 묻게 되었다. 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하지만 이익 분배 요구에는 심각한 약점도 있다. 이는 노동자들을 자기 회사나 업종의 성공에만 얽매이게 한다. 삼성이 큰 이익을 내면 노동자들은 당연히 자기 몫을 요구한다. 반면 이익을 적게 내는 다른 공장의 노동자들은 나눌 것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간병 노동자, 교육 노동자, 운송 노동자, 또는 소규모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같은 요구를 하면 자본가는 "우리 업종은 수익성이 나쁘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는 투쟁의 확장성을 약화하고. 업종·부문을 초월한 노동자의 단결을 더 어렵게 만든다. 또한, 노동자들이 ‘자기’ 회사의 성공을 위해 다른 회사들과 경쟁에 나서게 만든다. 삼성 노동자들과 SK하이닉스 노동자들은 서로를 비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질문은 어느 회사가 더 많은 이익을 분배하느냐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노동자가 자본에 맞서 자신의 생활 조건을 어떻게 지킬 수 있느냐이다.

 

따라서 더 광범위한 투쟁을 위해서는 전체 노동자의 이익에 부합하는 요구가 필요하다. 보기를 들어, 물가 상승에 따른 임금 인상, 임금 삭감 없는 노동 시간 단축, 더 안전한 작업 환경,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평등한 권리, 해고 금지, 무급 초과근무 금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투쟁 자체에 대한 노동자 총회의 통제권이다.

 

이러한 요구는 수익성이 높은 부문과 그렇지 않은 부문 모두에서 노동자들이 공감할 수 있다. 이는 특정 기업의 재무 상태에 좌우되지 않으며, 전체 노동자의 필요에서 출발한다.

 

파업 철회의 의미

 

파업 철회가 갈등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갈등이 생산 현장과 파업 위협의 단계에서 잠정 합의안에 대한 투표 단계로 옮겨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조 지도부는 이를 책임감 있는 성과로 포장할 수 있다. 삼성은 이를 사회적 평화로 포장할 수 있다. 정부는 이를 국가 경제 보호로 포장할 수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자신들의 투쟁에 대한 통제권을 더 확보했는가, 아니면 자신들의 분노가 안전한 (노조) 협상 채널로 되돌려진 것인가?

 

4월 평택 집회는 대규모 노동자의 힘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노동자들이 노조 협상가들을 지지하는 모습으로 비치는, 조직적으로 정돈된 노조 행진의 위험성도 보여주었다. 진정한 투쟁의 발전은 노동자 자신들의 총회, 선출 및 소환할 수 있는 대표자(대의원), 부서 사이 직접적인 토론, 그리고 삼성 외부 노동자들과의 연대일 것이다.

 

삼성, 정부, 언론이 파업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은 노동자들이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확장되지 않는 힘은 언제든 억누를 수 있다.

 

결론

 

삼성 노동자 투쟁은 단순히 성과급 문제만이 아니다. 이는 전쟁 준비, 인플레이션, 세계 시장경쟁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삼성은 AI 칩 호황에 발맞춰 규율 있는 노동자를 원한다. 정부는 수출과 국력을 위해 안정적인 생산을 원한다. 언론은 파업을 경제적인 관점에서 평가하기를 원한다. 노조는 책임 있는 교섭 주체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에게는 다른 것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투쟁을 스스로 통제해야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수익성이 높은 부문과 그렇지 않은 부문 사이의 분열을 극복해야 한다:

 

“계급적 연대에는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를 배제하고 투쟁을 제한하는 정규직 노조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해, 정규직·비정규직, 작업장·부문을 넘어서는 아래로부터의 연대가 중요하다.”

 

한국의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동지들이 제안한 내용은 다음과 같은 방향성을 담고 있다.(1)

 

“노동자 스스로 결정하고 통제하는 반도체 산업 노동자 파업위원회를 건설해야 한다. 이러한 투쟁만이 자본의 분열 정책과 노동조합의 한계를 넘어 생존권 위기에 맞선 모든 노동자의 투쟁으로 확산할 수 있다.”

 

다음 단계는 삼성 노동자와 다른 전자산업 노동자 사이, 그리고 서로 다른 부문의 노동자 사이의 분열을 극복하는 것이다.

 

파업 금지법의 위협은 이 문제를 더 시급하게 만든다. 정부가 국가 경제를 명분으로 파업을 막을 수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하나의 사업장이나 법적 틀을 넘어 더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 해답은 기업 성과급을 위한 좁은 투쟁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가 공유하는 요구를 위한 더 광범위한 투쟁이다.

 

파업은 철회되었다. 투표 결과가 다음 행보를 결정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더 깊은 교훈이 있다. 방어적 투쟁은 하나의 사업장, 하나의 노동조합, 하나의 이익 분배 방식에 갇히면 그 효력을 잃게 된다. 노동자들이 투쟁을 확장하고, 스스로 조직하고, 전체 노동계급을 위한 투쟁으로 만들 때 비로소 더욱 강력해질 수 있다.

 

2026년 5월 20일

프레도코르보(fredocorvo)

 

<주>

1.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 삼성 노동자 투쟁 : 아래로부터의 투쟁 건설과 계급적 연대를 위해
https://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1&document_srl=348514

 

 

<출처>
https://leftdis.wordpress.com/2026/05/20/samsung-workers-strike-called-off-key-impl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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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 삼성 노동자 투쟁 : 아래로부터의 투쟁 건설과 계급적 연대를 위해

삼성 노동자 투쟁 : 아래로부터의 투쟁 건설과 계급적 연대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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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노동자들의 파업을 앞두고 자본, 정부, 언론은 언제나 그랬듯이 한편이 되어 노동자들에게 비난과 협박을 쏟아내고 있다. 이 공격에는 자본주의 위기와 제국주의 전쟁의 재앙 속에서 코스피 8,000시대를 연 이재명 정부와 주주들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들은 정해진 틀 안에서 제한적이고 합법적인 투쟁을 하는 노동자를 향해 ‘과도한 요구’, ‘막대한 피해’를 주장하며 전 사회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다.

 

자본가 경제 6단체는 “결정적 시기에 감행되는 대규모 파업은 글로벌 공급망 내 신뢰 훼손, 고객사 이탈, 국가 신용도 하락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초래할 것”이라며 비난했고, 주주단체는 “노조의 과도한 성과급 요구와 파업 예고가 기업 가치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라며 소송 계획을 밝혔다. 이에 이재명 정권도 윤석열 정권 못지않게 삼성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정부는 ‘긴급 조정권 발동’을 위협하며 자본의 편을 들고 있는데. 이는 최근 실적이 좋은 다른 업종으로 성과급 요구가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정부가 긴급조정권 발동을 언급한 뒤 사용자 측은 태도를 바꾸어 후퇴한 안을 내놓았다. (1)

 

하지만, 그동안 삼성의 위기와 막대한 (사회적) 피해 원인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경영진에 있었다. 삼성은 수십 년간 악명 높은 ‘무노조 경영’으로 노동자의 기본권리를 짓밟고 최소한의 저항마저 탄압해 왔으며, 족벌 체제와 막대한 부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비리와 불법을 저질러 왔다. 그동안 생명보다 이윤만을 추구하는 초일류 기업 삼성에서 수많은 노동자가 유해 물질에 중독되어 백혈병과 각종 희귀암에 걸렸고, 지금도 심각한 정신건강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게다가 노동자들의 성과급 요구가 과도하다고 비난하는 삼성은, 2023년 반도체 부문 적자를 이유로 성과급을 0%로 책정하면서도 경영진 1,000여 명에게는 총 1,752억 원 규모의 자사주를 성과급으로 지급했다. 이처럼 삼성은 세계의 자본가계급과 마찬가지로 실적이 좋을 때뿐만 아니라, 경제 위기·기후 위기·전쟁 등으로 다수가 고통받을 때도 막대한 부를 축적해 왔고, 이는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와 희생의 대가였다.

 

“삼성이 지금까지 성공해 온 이유와 토대 자체가 불의와 불법을 가리지 않고 사용해 온 방식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성과급 등으로 많이 부풀려져 있지만, 사실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한 전자업계는 임금수준과 복지, 과도한 노동 등의 노동조건이 천문학적인 이익을 내고, 전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산업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으로 자리 잡는 과정 자체가 상상할 수 없는 강도의 착취와 노동자 통제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소리소문없이 대규모 해고를 일상적으로 자행하기 때문에 삼성에 40대 중반 이후의 노동자들을 찾아보기가 어렵다.”(2)

 

현재의 삼성전자 노동자 투쟁은 ‘고액’의 성과급이라는 이유로 온갖 공격을 받고 있지만, 삼성전자의 막대한 이윤은 삼성 전체 노동자와 수십만 명의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희생과 착취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정부의 세제 지원 및 공공자원 사용 혜택과 세계적인 반도체 업계 AI(인공지능) 인프라 붐으로 인한 메모리 칩의 ‘전례 없는 슈퍼사이클’ 덕분에 가능했다.

 

따라서 이번 투쟁은 본질적으로 세계적인 거대기업 삼성의 막대한 이윤과 그 분배를 둘러싼 계급 분쟁이자, 수십 년간 정당한 권리와 요구를 무시당했던 노동자들의 반발 성격이 크다. 그리고 노사 모두 호황 이후의 상황까지 고려해야 하는 전략적 투쟁이다.

 

“삼성은 현재의 호황에서 이익만 얻는 것이 아니다. AI 붐이 식거나 주문이 변동할 위험, 과잉 투자가 과잉 생산으로 이어질 위험에도 직면해 있다. 이에 따라 자본 내부에는 두 가지 우려가 생겨났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AI 호황이 지속하고 군사 또는 전략 기술 관련 수요가 증가하여, 삼성이 생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더 엄격한 업무 규율을 요구하는 것이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호황이 꺾이고 이익이 감소하여, 경영진이 위기라는 명목으로 해고, 성과급 삭감, 또는 더 엄격한 노동 통제로 방향을 틀게 되는 것이다. 두 시나리오 모두에서 그 대가는 결국 노동자들이 치르게 될 것이다.” (3)

 

여기서 계급적 관점이 명확해진다. 자본의 관점에서 이번 파업은 (독점적인) 이윤추구와 (세계적인) 경쟁력 강화에 저해되는 요소라서, 이후 생산 구조 변화와 노동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노동계급 관점에서는 임금 인상 투쟁을 통해 노동 및 생활 조건 개선을 쟁취하는 것과 (미래의 투쟁에서) 세계적인 공급망을 기반으로 한 반도체 산업의 이윤과 생산 통제권에 대한 도전, 나아가 (이윤이 아닌) 필요에 따른 생산과 분배를 의제로 삼을 기회가 된다.

 

삼성 노동자 투쟁의 의미와 과제

 

첫째, 삼성 노동자 투쟁은 (자본가·부유층의 막대한 부의 축적과는 이중잣대로) 성과급 액수가 과도하다고 비난받고 있지만, 법적으로 보장받는 임금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이다. 성과급 분쟁에서 배제된 하청·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도 노동조합의 한계를 넘어 아래로부터의 조직화와 계급적 단결, 그리고 자본의 분열 정책을 깨트리는 문제이다.

 

둘째, 현재의 노동조합 투쟁이 과거 대공장 정규직 노동조합 투쟁의 길을 밟고 있지만, 무노조 경영이 어려워진 삼성 자본과 노동자 사이의 본격적인 대립의 전초전으로 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 투쟁은, 성과급 액수만이 과도하게 부각해 있지만, 사실은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이 어떻게 작용할지가 더 중요하다. 이는 자본주의 위기에서 벌어질 수많은 개별 투쟁이 기업과 부문을 넘어 생존권 쟁취를 위한 계급적 투쟁으로 확산할지, 노동계급 분열을 더 고착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미리 보여 줄 것이다.

 

셋째, 현재의 노동조합으로는 투쟁의 확산도 계급적 단결도 이룰 수 없다. 삼성전자 정규직 노동조합들은 하청·비정규직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지 않으며, 오히려 명시적으로 배제했다.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조건을 강화하려 할 뿐 자신들의 투쟁을 전체 반도체 산업 노동자와 연결된 투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이는 노동자들이 거대 자본에 맞서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해 준다는 노동조합의 틀에 갇혀 그들의 통제(투쟁 관리) 아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투쟁은 관료화된 지침에 의한 형식적인 파업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계급적 연대를 통한 전면적인 파업으로 나아가야 한다. 계급적 연대에는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를 배제하고 투쟁을 제한하는 정규직 노조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해, 정규직·비정규직, 작업장·부문을 넘어서는 아래로부터의 연대가 중요하다. 이를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 스스로 결정하고 통제하는 반도체 산업 노동자 파업위원회를 건설해야 한다. 이러한 투쟁만이 자본의 분열 정책과 노동조합의 한계를 넘어 생존권 위기에 맞선 모든 노동자의 투쟁으로 확산할 수 있다.

 

아래로부터의 투쟁 건설! 계급적 연대 강화!

반도체 산업 노동자 파업위원회 건설! 생존권 투쟁 전면화!

 

2026년 5월 20일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주>

1.「매일노동뉴스」, 삼성전자 사후조정 시작, “긴급조정” 올라탄 사측 역주행

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4339

2. 「코뮤니스트」 7호, 삼성공화국-최고 권력과 싸우는 투사들
https://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5813

3. 프레도코르보(fredocorvo), 한국: 삼성, 이윤, 규율, 그리고 노동조합 시위
https://leftdis.wordpress.com/2026/04/26/south-korea-samsung-profit-discipline-and-the-union-par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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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삼성, 이윤, 규율, 그리고 노동조합 시위

한국: 삼성, 이윤, 규율, 그리고 노동조합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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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삼성에서 발생한 노동 쟁의는 인도와 아이티에서 일어난 대규모 투쟁과는 다소 다른 양상을 띤다. 이 쟁의는 빈곤에 허덕이는 국가에서 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의 투쟁도 아니고, 광범위한 민중 봉기의 형태를 띠지도 않았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수익성이 높은 기업 중 하나인 삼성에서 벌어지는 노동 쟁의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본 원인이 다르다는 뜻은 아니다. 그 뿌리는 같다. 노동자들의 삶에 가해지는 압박의 증가, 기업의 막대한 이윤, 그리고 에너지 위기, 군사화, 제국주의 경쟁이 빚어낸 세계적 위기가 바로 원인이다.

 

4월 23일, 삼성전자 노동자 수천 명이 평택에 있는 회사 반도체 공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AP 통신에 따르면 노조 관계자는 약 4만 명의 조합원이 시위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노동자들은 성과급 인상, 성과급 투명화, 성과급 상한제 폐지 등을 요구했으며, 협상 결렬 시 5월 21일부터 18일간 파업에 돌입하겠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시위는 삼성전자가 1분기 영업이익을 사상 최고치인 57조 2천억 원으로 전망하고, 반도체 업계 전반이 AI(인공지능) 인프라 붐으로 수혜를 입고 있는 가운데 발생했다. 한편, 언론은 중동 전쟁이 에너지 가격 상승과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헬륨, 브롬 등의 원자재 공급 차질을 초래하면서 업계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1)

 

이러한 모순은 매우 중요하다. 노동자들은 회사가 막대한 이익을 내는 것을 보면서도 경영진한테는 한계, 신중함, 불확실성에 대해 듣는다. 노동자 관점에서 이 갈등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충격으로 생활비가 상승하는 가운데, 삼성은 호황을 누리지만, 노동자의 임금과 성과급은 왜 계속 압박을 받아야 하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삼성의 사례는 인도와 아이티의 파업과 같은 세계적 흐름의 일부이다. 전쟁과 위기는 직장 밖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계급적 압력의 형태로 되돌아온다.(2)

 

하지만 갈등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삼성은 현재의 호황에서 이익만 얻는 것이 아니다. AI 붐이 식거나 주문이 변동할 위험, 과잉 투자가 과잉 생산으로 이어질 위험에도 직면해 있다. 로이터 통신은 이달 초 삼성이 AI 데이터 센터 수요에 힘입은 메모리 칩의 "전례 없는 슈퍼사이클" 덕분에 사상 최고 실적 전망을 내놓았다고 보도하면서도, 중동 전쟁으로 수요가 위축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따라 자본 내부에는 서로 다르지만 연관된 두 가지 우려가 생겨났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AI 호황이 지속하고 군사 또는 전략 기술 관련 수요가 증가하여, 삼성이 생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더 엄격한 업무 규율을 요구하는 것이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호황이 꺾이고 이익이 감소하여, 경영진이 위기라는 명목으로 해고, 성과급 삭감, 또는 더 엄격한 노동 통제로 방향을 틀게 되는 것이다. 두 시나리오 모두에서 그 대가는 결국 노동자들이 치르게 될 것이다.(3)

 

노동조합 역시 이러한 상황에서 나름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대규모 대중 시위는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을 동원하고, 조직적으로 시위를 조직하여 질서 있게 행진을 이끌고, 공인된 교섭 당사자로서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집회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임금과 성과급에 대한 노동자들의 진정한 분노를 표출하는 동시에,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피켓과 구호를 외치며 질서정연하게 행진하는 모습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에 의해 조직되고 대표되는 모습으로 비친다. 따라서 노동조합의 능력을 단순히 시위 조직 능력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노동자들이 투쟁을 직접 주도하는가, 아니면 협상과 압박이라는 틀 안에서 주로 관리되는가이다.

 

이 문제는 삼성이라는 기업의 역사적 배경 때문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삼성은 수십 년 동안 독립적인 노동조합 결성을 억압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로이터와 연합뉴스는 2024년 삼성의 주요 노조가 임금 및 복리후생 협상이 결렬되자 단기 파업에서 무기한 파업으로 전환했다고 보도했는데, 이는 회사의 오랜 ‘무노조 경영’ 모델에 대한 역사적인 도전이었다.  (삼성의 악명 높은 ‘무노조 경영’으로 노동자의 권리가 짓밟히는 동안, 수많은 노동자가 유해 물질에 중독되어 백혈병과 각종 희귀암에 걸렸고, 삼성전자 노동자들은 지금도 심각한 정신건강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삼성은 2023년 반도체 부문 적자를 이유로 성과급을 0%로 책정하면서도 경영진 1,000여 명에게는 총 1,752억 원 규모의 자사주를 성과급으로 지급했다. 한편, 이재명 정부는 삼성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정부는 긴급 조정권 발동을 위협하며 자본의 편에 서고 있는데. 이는 최근 실적이 좋은 다른 업종으로 성과급 요구가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역자>)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삼성에서 발생하는 모든 노동 쟁의는 두 가지 상반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투쟁을 통해 자신감과 경험을 얻고, 모든 결정을 노동자가 직접 내리는 총회를 (비정규직·하청 노동자를 포함하여 <역자>) 조직해, 노동조합으로부터 주도권을 가져올 수도 있다. 반대로 (일반적으로)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분노를 제한적인 교섭과 절제된 상징적 행동으로 이끄는 안정적인 중재자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따라서 계급적 관점에서 볼 때, 핵심은 삼성 경영진과 노동조합 지도부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다. 핵심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집단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이익은 세계적 경쟁 속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삼성의 이익과는 다르고, 노동 쟁의를 책임감 있게 관리하는 것이 역할인 노동조합의 이익과도 다르다.

 

인도, 아이티 노동자 투쟁과의 연관성이 명확해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는 극명하게 다르다. 인도의 광대한 산업 지대에서는 노동자들이 최저임금, 노동시간, 열악한 노동환경에 맞서 투쟁했다. 아이티에서는 섬유 노동자들이 생활비조차 감당할 수 없는 임금에 맞서 싸웠다. 한국에서는 세계적인 기술 대기업의 성과급과 보상 문제가 당면 과제이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점 이면에는 같은 토대가 깔려있다. 자본이 노동의 상대적 몫을 줄이는 동안 전쟁, 인플레이션, 세계 시장 위기는 노동자들의 삶에 더욱 큰 압박을 가한다. 겉으로 보이는 형태는 다를지라도 근본적인 원인은 같다.

 

따라서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진정한 선택은 단순히 임금 협상이나 회사와의 분쟁을 넘어선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전쟁에 속박된 채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생명을 지키고 생산 계급으로서 스스로 대안을 구축해 나갈 것인가의 선택이다. 이러한 대안은 저절로 얻어지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경영진에 대한 수동적인 신뢰, 노동조합의 중재에 대한 수동적인 신뢰를 넘어, 자신들이 직접 통제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2026년 4월 26일

프레도코르보(fredocorvo)

 

<주>
1. https://apnews.com/article/korea-samsung-union-strike-ai-38e7a5030d3688850d3e8d8baf240f58

2. https://apnews.com/article/korea-samsung-union-strike-ai-38e7a5030d3688850d3e8d8baf240f58

3. https://www.reuters.com/sustainability/sustainable-finance-reporting/samsung-flags-eight-fold-jump-q1-profit-ai-chip-demand-drives-up-prices-2026-04-06/?utm_source=chatgpt.com

4. https://www.reuters.com/technology/samsung-electronics-union-south-korea-declares-another-strike-2024-07-10/?utm_source=chatgpt.com

 

 

<출처>
https://leftdis.wordpress.com/2026/04/26/south-korea-samsung-profit-discipline-and-the-union-par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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