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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코뮤니스트 김수행을 기리는 열 가지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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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8/07/28 20:24
  • 수정일
    2018/07/2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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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로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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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코뮤니스트 김수행을 기리는 열 가지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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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수행은 나의 친구이면서 마르크스주의자 동지이자 코뮤니스트 동지다. 우리 모두가 같이 이루어야 할 역사적 과제와 실천을 남겨두고 먼저 간 동지를 기억하며, 소중한 그와의 만남을 남기고 싶다. 그와 얽힌 10가지 기억을 정리한다.
 

 

 

하나. 첫 만남.
 
 
 

 

 

김수행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한신대에서 해직당한 후 기고하던 학술계간지 <현상과 인식>(1977년 창간) 필자들과의 만나는 자리였다. 우리 둘은 40대 초반이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엇물림을 줄곧 시도한 <현상과 인식>에는 우리나라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필자로 참여했는데, 그가 실은 글은 ‘현대 학문의 새 경향’(1983년 여름호), ‘상업자본과 상업이윤’(1986년 봄호), ‘현대 경제학의 새로운 동향들’(1983년 봄호) 등이다. 연구 논문과 토론 그리고 뒷풀이에서의 이야기로 30년을 넘는 동지 관계를 시작했다.

 

 
둘. 사회과학 대학원 설립

 

 

2004년부터 ‘사회과학 대학원’ 설립을 위한 모임을 가졌다. 몇 차례 토론과 외국 사례 발표회를 거쳐 2015년 10월 김수행과 나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사회과학 대학원’ 설립을 제안한다. 우리는 설립 취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역사 진보의 과정, 즉, 계급 없는 사회, 모든 억압과 착취가 사라진 인간 해방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인류의 미래는 역사주체로서의 노동계급과 민중과 유기적 지식인의 변증법적 결합·통일을 통해 이루어진다.” “자본주의의 근본적 위기를 더욱 가혹한 억압·착취를 통하여 모면하려는 21세기 자본주의 체제의 시대에 노동과정을 포함한 인간의 총체적 삶의 과정이 비인간적으로 파괴되고 변혁주체로서의 노동계급과 민중이 철저하게 분권화될 뿐 아니라 지식이 시장에서 상품화되고 교육이 지배 이데올로기화되고 있음을 인식한다.”

 

 

자본주의에 맞설 수 있는 유기적 지식인을 양성할 고등교육기관으로서 부르주아 체제에 포섭되지 않는 대안학교의 건설이 시급하다고 우리는 보았다. 이렇게 시작한 사회과학 대학원의 실험은 2008년 봄학기부터 세 학기 정도 시험운영을 하고 그 후 김수행이 대표로 전념했다. 나는 2008년 2월 ‘사회주의 노동자 연합’을 만들면서 역할분담을 했다.

 

 

 

10년이 지나 다시 한 번 새롭게 마르크스주의 학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이 때 그가 먼저 떠났다. 안타까울 뿐이다.

 

 

 
셋. 사회실천연구소 설립

 

 

2006년 11월 사회실천연구소 설립 제안이 있기 전 종합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 연구소를 향한 주제를 놓고 김수행과 나, 그리고 최규진이 토론했다. 이 토론이 사회과학 대학원 설립과 맞물려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이 제안에 김수행은 흔쾌히 함께 만들어 가자고 했고, 그 날 우리는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셨다. 김수행은 나처럼 자주 많은 양의 술을 마시지는 않지만 애주가다. 술맛 나는 자리에서는 대주가가 된다. 특별히 막걸리를 좋아했다. 정년퇴임 후 주로 집에서 글을 쓰고 밖으로 나오지 않아 연구소에 가끔 들렀지만 마르크스주의 종합 연구소와 마르크스주의 학교를 향한 그의 꿈과 열정은 젊은 회원 연구자들보다 훨씬 컸다. 연구소 설립 취지에 “사회실천 연구소는 사회주의 운동 종합연구소를 지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밑바닥을 다지면서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사상을 곧추세우는 일에 나서려고 합니다”라고 했다. 우리가 말한대로 김수행과 함께 했던 일들을 이루어 갈 것이다.

 

 

 
넷. 정년퇴임

 

 

한신대에서 해직된 후 시간강사로 지내다 서울대 교수가 된 것은 김수행 개인에게는 행운이었다. 개인의 행운을 넘어 그것은 서울대를 포함한 여러 대학 학생들의 교과과정 개혁 투쟁의 성과였다. 1984년은 전두환 체제 밑에서 억압받아 숨죽여왔던 학생운동이 한꺼번에 분출한 해였다. 학생회장을 스스로 뽑고 군사훈련을 반대하고 학원 자율화를 주장하는 대자보가 곳곳에 나붙고 집회가 열렸다. <자본론>을 가르치는 마르크스 경제학자를 채용하고 그들이 담당할 교과목을 개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김수행은 서울대에서 24년을 원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자리를 굳게 지켰다. 재직기간이 25년이 채 안된다고 그는 명예교수가 되지 못했다. 더구나 자신을 이을 후임교수를 선택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2008년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자리에 나는 친구이자 동지 대표로 축사를 했다. 나는 2004년에 이미 명예퇴직을 했기 때문에 선배라고 농담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앞에 이야기한 마르스크주의 학교와 마르크스 연구소를 만드는 데 앞장섰던 김수행이 정년퇴임을 하더라도 지금부터 다시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시작되는데 발벗고 나설 것이고, 그 대열에 우리 모두가 같이 서자고 했다. 마르크스주의자 김수행에게 정년은 없다. 그 후 성공회대에서 그를 석좌교수로 초빙한 것은 그가 다시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아, 그런데 몇 걸음 떼어놓다가 가다니!

 

 

 
다섯. 사회주의 노동자 연합 재판 투쟁

 

 

2008년 8월 26일 나를 포함한 일곱 명의 동지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긴급체포되어 서울 종로구 옥인동 공안분실에 잡혀있을 때 김수행은 ‘참세상’에 가장 먼저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는 이명박 정권을 규탄하는 글을 올렸다. 그는 그 글에서 “이명박 정권은 오세철 교수와 동료들의 구속을 빨리 풀고 ‘새로운 한국사회의 미래’를 고민하는데 동참하기 바란다. 이 벌집, 저 벌집을 자꾸 쑤시다가는 벌들의 반격을 받아 자기의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몰락하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재판과정에서는 변호인 측 증인으로 참석해 판사와 검사에게 마르크스주의와 사상·학문의 자유, 그리고 자본주의의 모순과 그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에 대해 호통치며 일갈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과 집회에 참석해 힘차게 발언하던 김수행의 모습은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큰 힘이 됐다. 그는 서슴지 않고 “나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도 잡아가야지”라며 국가보안법 철폐를 외친, 행동하는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여섯. 단호하고 간결한 성품

 

 

김수행은 경상도 사나이라 말수가 적지만 한마디 하면 그 뜻이 확실하다. 여기서 처음 밝히는 이야기가 있다. 그가 사회과학 대학원의 대표를 맡고 내가 사회주의 노동자 연합에 참여했을 때다. 조직 운동을 할 때에는 늘 사무실 공간이 필요하다. 그 때 그 때 돈을 모은다. 교수직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동지들보다 여유가 있어 십일조를 냈다. ‘사노련’ 사무실을 얻어야 하는데 목돈이 없었다. 연구소를 설립하면서 사무실 보증금에 돈을 보탠 적이 있는데, 그 일부를 차용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김수행을 만났다. 얼마를 빼 갈테니 그 부분을 메꿔달라고 했다. “그래 알았어.” 단 한 마디였다. 여러 말이 필요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머리를 굴리지 않는다. 이른바 ‘진보적’인 사람들이 보이는 약삭빠름과 여기저기를 살피는 못된 버릇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나이가 들수록 단순명쾌하고 낙관적이 되는 마르크스주의자의 훌륭한 본보기를 보여준 사람이 김수행이다.

 

 

 
일곱. 절제하는 술

 

 

술 문제에 대하여 김수행은 그야말로 모범생이다. 애주가이며 가끔 대주가이지만 모임 뒷풀이는 밤 10시를 넘기지 않는다. 집이 멀어서가 아니라 그 다음날 일을 위해 절제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2012년 11월 내 고희 출판기념회에서 김수행은 여러 사람 앞에서 나의 술 문제를 비판했다. 내가 술을 너무 좋아해서 건강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일을 못한다는 지적이었다. 나의 가장 큰 약점을 호되게 나무라는 진정한 동지요 벗이었다. 그와 함께 한 잔 하면서 나도 밤 10시를 넘기지 않겠다고 약속하려고 했는데 술 동무가 우리 곁에 없다. 이 자리를 빌어 그에게 약속한다. 술에 빠지지 않고 즐기는 진정한 술꾼이 되겠노라고.

 

 
여덟.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생각

 

 

김수행은 2012년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한울)라는 책을 쉽게 풀어 출간했다. 그는 지금까지 러시아 혁명 이후 존재했던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 성격 규정을 한 적이 없다. 마르크수주의자들 사이의 토론과 논쟁에서도 그들 국가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앞으로 올 세계 혁명에 대한 실천적 쟁점을 정면으로 다루거나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름방학 동안 ‘사회실천연구소’가 개설한 ‘자본’ 강의가 끝난 후 수강생들과 함께 종강 뒤풀이를 하는 시간에 함께 하면서, ‘현실 사회주의’와 미래사회에 대한 입장을 같이 하게 됐다. 그의 책의 한 단락을 옮겨보자.

 

 

“노동자가 해방되고 자본가도 해방되어 인간이 해방되는 ‘새로운 사회’가 공산주의이고 사회주의라고 가르쳤습니다. 사실상 소련이나 동유럽 나라들은 노동해방의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당과 정부의 관료들이 점점 더 인민 대중을 옥죄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나라들은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였다는 것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조금만 읽었더라도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소련식 자본주의’가 내부의 위기 때문에 ‘일반적 자본주의’로 성장·전화한 것이 바로 1990년의 소련사회의 붕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그의 책, 4쪽). 얼마나 명쾌한가?

 

 

 
아홉. 코뮤니스트 김수행과 못다한 과제

 

 

김수행은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면서 스스로 자신이 코뮤니스트임을 여러 동지들 앞에서 밝혔다. 젊었을 때의 관념으로서의 사상이 아니라 70 평생 마르크스주의 연구자와 코뮤니스트로서의 실천을 통한 귀결점이었다.

 

우리는 그 후 그가 이론적으로 정립하려는 ‘새로운 사회’의 구체적 모습을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 모습을 책에 담아 그 내용과 세계 코뮤니스트 운동의 역사 속에서 검증되고 비판된 실천적 강령을 비교토론하는 논쟁을 하자고 약속했다. 우리가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코뮤니스트임을 대중과 함께 확인하고 실천하자고 다짐했다.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아쉬운 점이다. 김수행 동지, 우리가 못다한 과제를 다른 코뮤니스트와 함께 풀어갈 것을 약속하네.
 

 

 

열. 그의 마지막 강의 - 재능 농성장 거리 강연

 

 

김수행과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현장도 대학 강단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현장과 거리라고. 2011년부터 김수행과 나는 시청 앞 환구단 재능농상장에서 거리 강연을 했다. 그 해 11월 15일 김수행이 한 말이다.

 

 

“모든 공장이나 생산수단이나 기계나 토지나 모든 것은 모든 사람들이 소유해서 모든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이런 사회를 만들자고 자꾸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재능 투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회를 만들면 여러분이 재능교육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만듭시다.”

 

 

잠시 중단했던 거리 강연을 금년 6월부터 혜화동 농성장에서 다시 시작했다. 1회는 내가, 2회는 김수행이 맡았다. 2015년 6월 26일 오후 6시, “세계 공황, 어디로 갈 것인가”였다. “좋은 자본주의는 있을 수 없다. 오직 자본주의를 폐절하고 넘어서는 ‘자유로운 개인이 연합’하는 코뮤니즘 만이 우리의 대안입니다”라고 김수행은 생애 마지막 강의를 했다. 이런 말이 있다. 배우는 무대에서 쓰러지고 선생을 실천의 현장에서 쓰러지는 거라고. 김수행은 재능투쟁 농성장의 거리에서 단호하고 힘찬 노동자의 세상을 외친 것이다.

2015년 8월 18일

오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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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에 의한 테러와 민중당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8/07/09 12:33
  • 수정일
    2018/07/09 12:33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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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에 의한 테러와 민중당

플랜트노조 충남지부, 2·24 조합원 폭력사태
- 임성용

 

 

 
지난 2018년 2월 24일,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 충남지부의 조합원 정기모임에서 충남지부 유승철 조직국장과 조합원들이 집단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해자들은 충남지부에 소속된 같은 조합원들이었다. 
민주노총의 주요 노조인 플랜트노조는 조합원이 8만 명에 이르며, 그 중 충남지부는 조합원 1만여 명으로 조합비 분담금 2위의 대규모 지부다. 그런데 이번 폭력 사태에 관련된 플랜트노조와 민중당의 행동은 민주노조의 근본정신을 훼손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번 집단 폭행으로 대의원인 표건희는 손목 골절, 뇌진탕, 목과 허리 근육 손상으로 입원했으며, 조직국장 유승철은 안구 손상, 코뼈 골절, 안면 함몰 등으로 의식을 잃고 응급실로 긴급 이송되는 중상을 입었다. 또한 ‘폭력반대’를 외치던 전영철 조합원도 뇌진탕과 목 근육 및 뇌혈관 손상을 입는 등 여러 조합원이 부상을 당했다.
충남지부에서는 1년 전인 2017년 임금 및 단체협약 투쟁 때도 일부 조합원들 간에 물리적 충돌이 빚어진 바 있었는데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들이 얽힌 채 ‘분열과 대립’을 반복해온 끝에 결국 집행부 반대세력들이 회의 단상을 점거하고 조합원들을 집단폭행하는 살인적인 테러가 벌어진 것이다.
이 충돌 사건들은 겉으로는 노조운영과 주도권을 둘러싼 세력다툼으로 보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갈등의 요인은 노동조합 내의 ‘비공개 조직’ 문제에 있다. 이른바 ‘철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임’ 약칭 ‘철노회’라고 하는 현장조직과 2017년에 선출된 신임집행부 간의 뿌리 깊은 불신이 적대적 관계를 형성해 왔다. 
이번 테러에 대해 피해자인 충남지부와 가해자들은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지부는 철노회가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주도한 ‘노조파괴 책동’이라고 규정했다. 철노회에 소속된 폭행가담자들은 발언권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벌어진 ‘우발적인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조합원들의 입장은 명백하다. 회의 중에 갑자기 단상 뒷문을 통해 몰려나온 20명 이상이 회의 진행자의 마이크를 빼앗고 바닥에 쓰러뜨린 뒤, 쓰러진 사람을 에워싼 채 작업화로 짓밟고 집단폭행을 했다는 것이다. 
충남지부 조합원들은 사건 직후인 3월 10일에 비상총회를 열어 '노조파괴에 대한 전 조합원과 함께 하는 집단대응 대책의 건'을 압도적인 찬성으로(90.69%) 통과시켰다. 사건의 엄중함을 고려하여 개인적 보복행위를 금지하고, 폭력 피해자와 조합원,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조합원을 폭행한 자는 조합원들과 함께 일할 수 없다! 2월 24일 집단폭력 가담자와 회계부정에 관여된 자는 상벌규정에 따른 징계완료시까지 기타 분회로 편재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민주노총의 입장도 명백하다. 충남지부는 민주노총 규율위원회에 폭력행위자들을 제소했으며 민주노총 규율위원회는 해당 사건의 진상조사가 실시될 때까지 가해자들에 대한 사전조치를 명령했다.
 

 

갈등의 원인

 

 

그렇다면 충남지부 사태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먼저, 갈등의 중심이었던 ‘철노회’와 충남지부의 문제부터 살펴보자. 충남지부에서는 철노회가 ‘비공개 언더조직’이라고 말한다. 반면 철노회에서는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사조직’이라고 말한다. 
철노회의 성격은 그 운영구조와 활동방식을 보면 알 수 있다. 철노회는 창립총회를 갖고 발족하였으며 회칙을 제정했다. 회칙에는 ‘노동조합의 합리적 운영을 위한 견제와 비판활동, 노동조합의 발전적 대안 마련을 위한 공론형성 활동을 목표로 한다’고 되에 있다. 대표자회의와 실행위원회를 두고 월 1회 이상 회의를 가졌다. 대표자회의는 직종별 단위모임 대표자와 회장, 실행위원장으로 구성되고, 실행위원회는 각 직종별 단위모임 실행위원과 실행위원장으로 구성되었다. 실행위원회의 회의는 실행위원장이 주재하였다. 이와 함께 회원용 소식지를 발간하였다. 모든 면에서 사조직, 또는 단순한 현장조직과는 다른,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치밀한 조직체계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민주노조에는 다양한 의견 그룹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노동조합의 발전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한 모임들이다. 만일 철노회가 현장조직이라면 민주노조에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특정 세력들이 그들의 정치적 성격에 치우친 활동기조와 목적을 바탕으로 노조를 장악하려 한다거나 반대 세력들을 배척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노조 내에 분열과 갈등의 핵심이 된다. 
충남지부 집행부는 철노회가 ‘비공개적이고 음모적인 활동 속에서 운영위원회나 대의원회의를 장악하여 자신들만의 독립된 이해와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활동들을 주요 목적으로 삼았다’고 본다. 곧 조합원 전체의 이해와 함께하기 보다는 철노회 자신들만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분파적이고 종파적인 활동으로 현장과 조합원들을 교란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철노회 소속 간부들이 충남지부 김준수 집행부가 출발할 때부터 조직적으로 충남지부 흔들기에 매진했고 이를 멈춘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충남지부의 다수 조합원들도 ‘지난 6년 동안 충남지부를 장악했던 사람들이 철노회이고 전대 간부들이 그 세력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들이 집행부를 장악하지 못하자 자신들이 집행부로부터 탄압 받고 있는 민주세력이라면서 역공을 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철노회에서는 지부의 공세를 철노회에 대한 ‘정치공작’이며 ‘조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부에도 ‘씨앗 동지회(현재 해산한 상태)’라는 현장조직과 연관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철노회’와 뭐가 다른 것이냐, 한마디로 ‘내로남불’이라는 것이다. 철노회가 가장 강하게 반발하는 것은 자신들을 ‘외부정치세력’이라는 프레임에 가두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양측의 주장이 부딪치는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을 비호하고자 공정하지 못한 접근을 하면, 갈등이 해결되기는커녕 서로가 서로를 더욱 불신하고 적대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 따라서 사건 경과부터 객관적으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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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경과

 

충남지부 노동조합 블로그에 게시된 폭력사태의 경과를 ‘주요 쟁점’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2017년 >

 

- 1월 14일 : 충남지부 노조 임원 선거에서 2차 투표 끝에 단독출마 한 김준수 지부장 당선.
- 6월 ~ 7월 : 임단투 쟁의, 파업과정에서 1차 잠정합의안 부결, 철노회 측 노동자들의 폭력으로 조합원 내 대립 격화.
- 7월 31일 : 2차 잠정합의안 찬반투표 결과 찬성 72.5% 로 가결됨
- 8월 26일 : 철노회 측에서 지부장 불신임 총회 열었으나 불신임 반대가 65.97% 로 재신임 됨. 
- 10월 24일 : 전임 집행부 회계에 대한 특별외부회계감사 1차 회의 시작 (장석우 변호사·회계사, 이장희 공무원노조, 박인기 대학노조, 유영주 금속노조, 조지영 충남세종본부 외)
- 10월 31일 : 지부 운영위에서 일부 분회장 등 간부를 파업 파괴를 이유로 제명 및 정권 등 징계 의결함
- 12월 13일 : 철노회 38명이 지부장을 상대로 4,800만원의 명예훼손 민형사 손배소 제기함

 

< 2018년 >

 

- 1월 17일 : 플랜트노조 중앙 재심 징계위에서 절차적 문제를 들어 분회장 등에 대한 징계조치를 무효로 결정함.
- 1월 22일 : 민중당 김창한 대표, 충남지부장을 상대로 3,100만원의 명예훼손 손배소 제기
- 1월 30일 : 충남지부 조합원들, 플랜트노조에 ‘충남지부 갈등 문제 해소를 위한 진상조사위원회 공개조사(조합원 공개토론회)' 요청. 
- 2월 24일 : 충남지부 2월 정기모임 중 비계, 제관, 계전, 보온분회 간부들에 의해 집단 폭행이 발생해 표건희, 유승철, 전영철 등 간부와 조합원 다수가 입원하는 사태가 벌어짐. 
- 3월 5일 : 충남지부 구집행부에 대한 외부특별회계감사 결과가 발표됨. 조합비에 대한 횡령 및 유용 의심 환수금 297,613,412원. 조합비 반환에 필요한 법적 조치를 취하고 횡령 및 유용 의심 부분에 대한 형사책임을 묻기로 함.
- 3월 10일 : 충남지부 비상총회, 특별외부회계감사 결과 보고. ‘노조파괴에 대한 전 조합원과 함께 하는 집단대응 대책’ 통과.
- 3월 12일 : 철노회 소속 4개 분회장, 대전지방법원 서산지원에 ‘총회결의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서’를 제출. 
- 3월 23일 : 충남지부 비상지도부, '특별외부회계감사 결과보고'에 따른 회계부정 의심자 2명을 대전지방검찰청 서산지청에 '업무상 횡령죄'로 고소장 제출. 
- 3월 27일 : 플랜트노조 5차 운영위, 충남지부 징계 회부 결정.
- 4월 3일 : 충남지부장 김준수, 민중당 대표에게 ‘2.24 집단폭력 가담자들과 조합비 공금횡령 피고소인들 중에 핵심 주동자들이 민중당 충남도당 위원장 및 민중당 충남도당 소속임을 밝히고, 집단폭력가담 당원들과 노조 공금횡령 회계부정 당원들에 대한 민중당의 징계와 탈당 처리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
- 4월 26일 : ‘충남지부 회계부정, 폭력사태에 가담한 민중당원을 민중당은 신속히 징계하라’는 입장을 발표하고 민중당 대표단과의 면담 요청.
- 4월 26일 : 충남지부 3가지의 요구 사항을 가지고 여의도 민중당사에서 항의집회.
1. 민중당은 민주노총의 지지를 받는 공당의 책임을 다하라!
2. 건설노동자에게 제기한 손배소 당장 철회하라!
3. 집단폭력 및 회계비리 관련 당원 즉시 징계하고 출당시켜라!
강성철 노동안전국장, 요구사항 해결을 촉구하며 민중당사 앞에서 항의농성 돌입. 충남지부, 길거리 농성과 점심 항의집회를 이어감.
- 5월 7일 : 민중당 측에서 충남지부에 ‘비방행위 등의 금지에 대한 가처분 소송’을 제기.
- 5월 9일 : 여의도 민중당 중앙당사에서 충남지부와 민중당 중앙당 사이에 면담 진행, 면담 결과를 듣고 민중당 중앙당사 농성장 철수.
1. 충남지부의 사과를 전제로 손배소 철회한다.
2. 집단폭력과 조합비 공금횡령에 관여한 민중당원에 대해서는 노조에서 민중당 중앙당으로 제소장을 올리고 중앙당 차원에서 징계를 진행한다.
- 5월 11일 : 부당한 상벌규정 개정 철회 및 징계절차 진행 중단 촉구 플랜트노조 전·현직 간부 연서명. 본조 및 여수, 울산, 전북, 경인, 강원, 전동경서, 충남지부 등 189명 서명.
- 5월 11일 : 민중당 측에서 충남지부의 후속조치 요청.
1. ‘사실관계 정정 및 사과문’을 노조 홈페이지, 블로그, 페이스북 등에 즉시 게시
2. 조합원 모임에서 ‘사실관계 정정 및 사과문’을 유인물로 배포
3. 이전 시기 인터넷 등에 게시한 민중연합당(민중당) 비방과 공격의 내용물 일체를 즉시 삭제
- 5월 21일 : 충남지부장, 민중당 대표에게 민중당이 보내온 5월 9일 면담결과에 따른 후속조치 요청에 대한 답변 전달.
- 5월 24일 : 민주노총법률원, 전국플랜트건설노조 운영위에서 결정한 충남지부 김준수 지부장에 대한 제명은 ‘노동조합 규약 위반, 현행 노동조합법 위반, 노동부 행정해석 위반’ 등으로 무효이며, 개정된 상벌규정 또한 규약에 위반되어 '무효'라는 답변.
- 5월 29일 : 민중당, 충남지부의 후속조치 요청에 대한 답변에 대한 재답변. 5월 11일에 민중당이 충남지부에게 보내온 후속조치와 동일.
- 5월 29일 : 플랜트노조 이종화 위원장, 2018년 충남지부 충남지부 단체교섭권 철회 공문을 지부와 사측에 발송, 임금교섭 무산.
- 6월 4일 : 충남지부 최종입장을 민중당 상임대표에게 전달.
‘민중당은 또 다른 가처분 소송(5월 7일 비방행위 등 금지 가처분 소송제기함)은 5월 9일 공식면담 일정을 잡은 놓은 상태에서 그 2일 전에, 지부 상대로 가처분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또한 민중당에서 협의진행 공문 형태를 보면 지부가 협의조정을 제시하였지만, 이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는 첫 번째 공문과 똑같은 공문을 재차 보내므로 더 이상 민중당과 협의가 ‘의미없음’으로 판단하였습니다.’
 

 

누구를 위한 민주노조인가?

 

 

충남지부 폭력사태의 경과를 보면, 플랜트노조에 관한 쟁점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조합원 폭행이 발생하기 전인 2018년 1월 30일, 충남지부에서는 본조인 플랜트노조에 ‘충남지부 갈등 문제 해소를 위한 진상조사위원회 공개조사’를 요청했다. 그러나 플랜트노조에서는 지부의 입장보다 철노회 입장의 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을 받아들였다. 당시에라도 노조 중앙이 지부의 요청대로 갈등 해결을 위한 조사 및 조합원 토론회를 열고 보다 적극적인 역할에 나서야했지만 그러한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2018년 2월 24일, 끝내 폭력사태가 터졌다. 그러나 피해자인 지부는 더 곤경에 빠졌다. 플랜트노조가 이해할 수 없는 대응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특히 조사위 구성과 절차에서 플랜트노조는 충남지부 조합원들의 공분을 샀다. ‘부정’과 ‘폭력’에 대한 처리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위해 진행’하는 것으로 전도되었다는 것이다. ‘2017년도 임단협 투쟁에서 자행된 철노회의 쟁의행위 파괴 행위에 대해 징계’하고자 했던 충남지부의 의지를 본조가 막아서고, 오히려 폭력사태를 일으킨 가해자들을 비호하는 자세를 취한다고 분노했다. 
이 과정에서 눈에 띠는 대목이 있다. 플랜트노조 중앙에서 충남지부의 사태를 바라보는 관점이 지부와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플랜트노조 이종화 위원장은 2018년 2월 27일 입장문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1. “충남지부 2/24 정기모임 테러에 대해” 노동조합 조합원들 사이에 물리적 충돌로 인하여 부상자가 생긴 사태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2. 취업 제한에 관련한 이해관계가 직접적인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플랜트노조 위원장이 “충남지부 2/24 정기모임 ‘테러’에 대해”라는 표현을 썼다시피, 당일 사태를 물리적 충돌 이상의 것으로 보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폭력이 일어난 원인을 ‘취업 제한에 관련한 이해관계가 직접적인 원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는 있다. 건설 노동자들은 일반기업체나 정규 상용직과 달리 고용불안이 항상적으로 존재한다. 조합 내에서 세력 간의 갈등은 곧바로 실업과 취업기회 배제로 이어지는 상황이 많았다. 2·24 폭력 가해자들 역시 ‘취업제한을 당했다.’라는 피해의식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노조의 주도세력으로 있을 때에는 반대로 다른 조합원들이 그들로부터 양질의 일자리 획득 기회를 배제 당했다고 여겼다. 충남지부에서는 ‘철노회가 집행부를 장악했을 때 취업제한을 하고 업체에게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공문으로 보낸 바 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것만 봐도 노동조합의 권력을 가진 세력이 자신들과 대립하는 조합원들을 취업기회에서 부당하게 배제시켰다는 의심을 갖게 한다. 그렇다면 플랜트노조는 취업, 회계, 운영, 폭력까지 과거와 현재의 문제점을 조사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노조 차원에서 객관적이고 철저한 조사를 하면 충남지부와 철노회 문제도 그 허위와 진실이 무엇인지를 가릴 수가 있다. 
더구나 폭력사건이 ‘테러’라고 인정한다면, 노조의 즉각 조치가 필요하고 단호한 징계가 요구된다. 그 요구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충남지부는 플랜트노조에 조합원 폭력사건을 신속하고 엄중히 처리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지부의 요청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플랜트노조 운영위원회는 노조상벌규정까지 변경하면서 절차상의 문제를 들어 충남지부장, 수석부지부장, 사무장 등 지부 임원에 대한 역징계를 내렸다. 이것이야말로 조합원 폭행사건으로 한층 격화된 충남지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민주노조에서 조합원들에게 가하는 내부적인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전체 조합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회의 진행을 방해하고 특정인을 지목하여 집단적으로 ‘무자비한 린치’를 가했다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왜냐하면 폭력 자체가 반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이고 반노동자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폭력은 노동조합의 존립 자체를 흔드는 중대한 ‘범죄행위’이다. 그 어떤 변명이나 이유가 통용될 수 없다. 폭력 앞에서는 사과와 반성이 먼저다.
우리가 이성적인 눈으로 바라봐야할 문제의 본질은 ‘부정’과 ‘폭력’이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에 전에, 폭력의 경위와는 상관없이, 무엇보다 명백한 것은 민주노조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끔찍한 ‘폭력’이 저질러졌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가해자들을 징계해야할 1차적 책무가 있는 플랜트노조에서는 손을 놓았다. 사건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정상적인 조치와 처리과정을 밟지 않았다. 
폭력은 민주노조의 정신이 아니다. 폭력은 상대적 배제를 전제로 행해진다. 폭력은 굴복을 강요하고 선택을 가로막는 것이므로 상호조정의 방식이 될 수도 없다. 전국플랜트건설노동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민주노조의 원칙과 정의는 무엇인지, 그 질문을 노동자 스스로에게 되묻게 해야 한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뜻에 반하는 모든 결정은 반민주적인 폭력이다. 그것은 노동조합의 주인인 노동자를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전락시킨다. 비민주적인 노조는 노동자 전체의 권리와 자유로운 의지, 투쟁보다는 특정 집단의 목적과 이익에 부합하는 ‘노동자 정치’에 몰입한다. 그것을 우리는 민주노조의 근간인 ‘노동자 민주주의’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한 조직은 어디나 통제적 지위를 점유한 상부가 있다. 상부가 지시하고 명령한다. 그것을 우리는 관료주의라고 한다.
누가 보더라도 충남지부 폭력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플랜트노조 위원장과 노조간부들은 즉시 충남지부를 방문하고 조합원들 곁으로 달려갔어야 했다. 노조는 조합원들을 보호해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플랜트노조는 충남지부 조합원들과 면담이나 토론, 간담회를 한 번이라도 열었던 적이 있는가? 폭행 피해를 당한 조합원들을 찾아보고 위로를 한 적이 있는가? 사태 해결을 위해서 과연 얼마만큼의 노력을 기울였는가? 정말로 폭력을 행사한 가해자들보다도 먼저 지부 임원들을 제명시키는 게 옳은 일이었는가?
 

 

누구를 위한 진보정당인가?

 

 

충남지부는 현재 2018년 임금교섭을 앞두고 사측과의 투쟁에 모든 힘을 모아야 할 시기에 내부적으로는 조합 내의 폭력, 그리고 플랜트노조 중앙, 밖으로는 민중당과 싸워야할 처지에 놓였다. 지부의 내부갈등이 노조 외부로까지 옮겨져 ‘민중당’과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충남지부는 철노회의 간부들이 특정 정치세력인 ‘민중당 당원’이라는 이유로 철노회와 민중당의 연계성을 문제 삼았다. 2017년, 지부와 철노회가 부딪친 것도 회계부정과 같은 노조 운영문제도 있었지만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민중당과 관련된 철노회의 ‘정치성’ 논란이었다. 즉 철노회는 민중당의 정치적 편향성을 가진 조직이라는 것이었다. 철노회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인물이 일반 당원이 아닌 ‘민중당(전 민중연합당-이하 민중당) 충남도당 공동대표’였으며, 철노회의 구성원 다수가 당원이라는 동일성이 작용했다. 충남지부는 철노회에 대한 그런 혐의를 민중당에게 두고 공개적으로 민중당을 비판했다. 그러자 2018년 1월 22일, 민중당 김창한 대표는 충남지부장을 상대로 민중당에 대한 명예훼손, 허위사실유포 등으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그런 갈등과정에서 발생한 2·24폭력사태는 충남지부와 민중당이 결정적으로 대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충남지부는 민중당 당원들을 중심으로 모인 철노회에서 조합원 폭행사건을 주동한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그들의 소속 정당인 민중당 대표에게 "회계부정, 폭력가담 당원에 대한 징계요청" 공문을 보냈다. 그리고 “민중당은 민주노총의 지지를 받는 공당의 책무를 다하라!”면서, 민중당 대표단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폭력 당원’ 문제는 엄중하게 처리되지 않았다. 민중당에서는 다시금 충남지부에 비방금지가처분신청을 냈다. 
철노회는 이미 2017년 12월 중순 경에 충남지부장에게 민형사 소송을 제기했다. 철노회 텔레그램방 문자를 공개하고 철노회의 민중당 당원 명단을 공개한 것은 개인의 사생활보호를 침해한 불법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철노회와 민중당의 소장에는 ‘토씨 한 글자 빼지 않고 동일한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충남지부는 철노회와 민중당의 관계를 개인이 아닌 조직적 관계로 보았다.
충남지부에서 민중당에게 문제제기를 한 부분은 처음부터 첨예하게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흔히 노조에서 조합원들은 ‘외부정치세력’이라고 하면 자신들을 기만하고 노동조합을 그들의 정치활동 수단으로 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충남지부에서도 그랬다. ‘민중당이 노동조합 내 철노회를 사주하고 있는 세력이며 민중당원들은 전체 조합원의 이익과 무관하게 권력을 탐하는 부정한 사람들이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선전물이 배포되었다. 현장에서 수년 간 헌신적으로 현장투쟁을 벌여온 조합원들은 점차 ‘철노회’와 ‘민중당’에 대한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지부에서는 ‘민중연합당이 지역노동조합에 조직적으로 개입하여 노사관계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내기도 했다. 
이에 대해 민중당에서는 ‘민중당은 노동자를 비롯한 서민과 민중들의 권리를 대변하고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정당을 목표로 지지자들의 신뢰와 믿음을 얻기 위해 노력해 왔다. 철노회 회원이 민중당 당원과 일부 중복된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근거 없이 민중당을 비방하고 공격하는 것은 민중당 지지자들과 구성원들에게 씻을 수 없는 불신과 오해를 사게 되었다.’고 반박했다. 
또한 여기서 끝나지 않고 충남지부를 상대로 법적 대응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충남지부 김준수 지부장은 민중연합당이 민중당으로 바뀌기 전, 현장통신 유인물을 통해 ‘민중연합당 관련 유감표명’을 했다. 충남지부 내 당원 일부의 행위가 아니라 민중연합당 전체가 충남지부에 개입하는 것처럼 오해를 살 여지가 있었다. 이에 대해 충남지부는 해당 사항을 전혀 알지 못했던 민중연합당 당원들에게 유감을 표한다’는 내용의 사과문이었다. 그러나 민중당은 손배를 철회하지 않았다. 민중연합당의 소송을 계속 이어받아 그대로 유지한 채, 다시 비방금지가처분신청을 내면서 충남지부를 압박했다. 
민중당이 노동자민중을 위하는 진보정당이라면 묻고 싶은 게 있다. 여야 보수 정치판에서는 정당이나 정치인들에게 서로가 무수한 비난과 공격을 퍼붓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특히 인터넷과 SNS에서 행해지는 일반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 표현은 거의가 합리적 비판을 뛰어넘는 비방 수준이다. 비판이든 비방이든 그것은 대중들의 감정과 정서가 담겨 있고 여론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일베와 같은 악질적인 언어폭력, 불순하고 악의적인 유언비어, 특정인의 신상과 명예에 관한 인신공격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비판과 표현의 자유가 허용된다. 법적인 처벌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충남지부에서 민중당에게 ‘회계부정과 폭력당원에 대한 징계’를 처리해달라고 바라는 것은 당연한 요청이다. 만일 당원의 징계에 관한 제소 규정과 절차를 중앙당에서 진행하기 곤란하다면 도당과의 협의를 통해서라도 분명한 입장을 취하는 게 옳지 않은가? 그런데 대한민국의 정치정당에서 일개 노조의 지부와 노동자를 상대로 단지 ‘비방을 했다’는 이유로 수천만 원에 달하는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하는 것은 보수 정당들에서조차 유래가 없는 일이다. 극우보수정당인 자유한국당에서도 그런 일로 소송을 걸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박근혜의 국정농단 시국에서 새누리당을 공격하는 시민단체와 국민들에게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비방금지신청을 냈다면, 이 나라의 국민들은 아마 수백만 명이 법적인 분쟁에 휘말리고 걷잡을 수 없는 소송을 당했을 것이다. 
경우는 다르지만,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사건에 대한 더불어민주당의 대응은 어떠했는가? 진상조사나 소명도 없이 그 즉시 제명 조치했다. 성폭력과 집단폭력은 다른 문제인가? 똑같이 ‘인권’을 짓밟는 문제이고 똑같은 ‘폭력’의 문제이다. 폭력문제에 있어서는 ‘폭력을 당한 자’가 억울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폭력은 ‘폭력행위자’를 반드시 처벌하고 폭력에 대한 죄를 묻는다. 즉 폭력은 응징의 대상일 뿐이다. 그게 상식이고 법이다. 
그럼에도 민중당에서 노조 지부장과 노동자를 상대로 소송을 건다는 것은 진보정당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민중당이 추구하는 민주주의와 노동자들이 추구하는 민주주의가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민주주의의 개념에는 필수적으로 '비판의 자유'가 있다. 진보정당과 노동조합 사이에서 발생한 문제를 ‘비방'과 ‘명예훼손'으로 단정 짓고 법으로 보상을 강제하고, 소송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사실관계 정정, 반론과 토론, 대중적 검증을 통해 좀 더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방안을 찾고 좀 더 직접적인 노력을 쏟았어야 했다. 그것이 운동적 해결방법이다. 그것이 자본가계급과 다른 노동자민중의 정치적 해결방식이다. 민중당이 지배계급과 똑같은 방식으로 노동자를 대해서야 되겠는가? 
하물며 충남지부에서 사과 의사를 밝히고 사과를 했음에도 또다시 재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마치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전제적 사고와 다를 바 없다. 피소를 당한 노동자들의 심경은 참으로 참담할 것이다. 노동자와 함께, 민중과 함께 하는 민중당이라면, 노동자를 꼭 법정에 세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자본가들이 만들어놓은 법전을 뒤적거리는 것은 결국, 드높은 명예를 가진 자와 손해를 보지 않고 이득을 얻겠다는 힘 있는 자를 위한 판결로 마무리 된다. 노동자와 민중들을 다스리기 위해 법관들의 손아귀에 움켜쥔 ‘법의 심판’에 어찌 민중당이 기대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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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는 노동자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

 

 

노동조합의 위기와 파국은 자본과 권력에 의한 파괴가 아니라면, 보통 노조 주도세력들 간의 분열에서 기인한다. 플랜트노조도 마찬가지다. 액면 그대로 보자면 충남지부 조합원 폭력사태는 노조 주도세력과 지부 주도세력의 대립으로 변했다. 
이런 경우엔 둘 중 하나의 누군가는 조합원들의 이해를 대변하지 못한다. 패권적이고 관료적인 행보를 취한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패권주의를 버려야만 한다. 더구나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켜 부당한 징계를 고수한다면, 플랜트노조와 충남지부는 노동조합 주도세력 간의 끝없는 쟁투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할 것이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은 2018년 6월 18일, 플랜트노조 제11차 운영위원회에서는 중앙 징계위를 통해 충남지부 비상지도부 8명에 대한 제명을 결정했다. “노동조합을 지키자!”는 조합원들의 총의를 담은 총회민주주의는 어디로 갔는가, 과연 민주노조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지부 비대위에 대한 징계를 요청한 자들은 2·24집단폭력가담자들이었다. 노조 중앙 운영위는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조합원 총회의결사항을 집행했다는 이유로 지부 임원 3명을 전원 제명 조치한 이후, 또다시 조합원들이 구성한 비대위원들까지 제명시키는 폭거를 저질렀다. 
또한 플랜트노조를 대표하는 위원장은 충남지부의 2018년 교섭권마저도 회수했다. 조합원들은 임금인상 투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조합원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이 같은 곤경에 처해도 되는 것인지, 어찌하여 노조가 노동자에게 희망이 아니고 절망이 되는 것인지 답답한 노릇이다. 교섭권 회수는 만 명이 넘는 충남지부 조합원들 전체의 이해와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독단의 결과이다. 조합원들에게 신뢰받지 못하는 노조와 노조 위원장은 노동자에게 버림받는다. 누가 뭐래도 분명한 사실이 한 가지 있다. 플랜트노조 충남지부는 조합원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이 노조 주도세력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수만 명의 조합원들 모두가 인정하는 합리적인 결정이 반드시 내려져야할 일이다. 다만 우려스러운 것은 ‘노조 주도세력과 민중당의 관계’이다. 충남지부는 ‘노조의 임원 및 운영위 다수를 민중당 당원으로 의심’하고 있다. ‘노조와 민중당’이 뗄 수 없이 관계된 지점이 있다고 여전히 우려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그것은 2차례에 걸친 노조 상벌규정 개정을 보면서 더욱 심각해졌다. 
노조 운영위는 8대 지부 지부장, 수석부지부장, 사무국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더불어 사무국장의 조합원 선출은 지부마다 다르다고 한다. 즉 조합원들에 의해 선출된 지부 임원이 비선출된 사람들에 의해 징계되고, 나아가 노조 주도세력의 눈 밖에 나면 어떤 지부이든지 날릴 수 있는 관례가 상벌규정 개정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충남지부에서는 노조가 분회 임원에 대한 징계는 어렵게 하고 지부 임원에 대한 징계는 쉽게 했다면서 노조 주도세력이 지부 임원들을 징계의 표적으로 삼았다고 반발했다. 결국 철노회와 노조 운영위 임원과 민중당은 한 몸 아니냐는 것이었다.
설령 철노회가 민중당과 관계가 있는 조직라고 하든 노조 임원들이 민중당 당원이라고 하든, 사실상 충남지부의 문제에 민중당이 현실적으로 개입할 여지는 없다. 폭력 당원 문제는 민중당에서 의지가 있다면 절차나 규정에 따라 처리하면 된다. 다시 말해서 민중당 당원이라고 해서 하등의 문제가 될 건 없다. 민주노조의 기본과 도덕을 지키고 조합원 전체를 방어하는 조직, 자신들의 활동에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의 ‘현장정치’는 조합원들의 지지를 받고 더욱 확대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반대로 기본도 상식도 지키지 않고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면 조합원들로부터 외면당할 건 뻔한 일이다. 노조는 노동자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 진보정당은 노동자의 미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의 기본은 노동자조직의 주인은 노동자라는 상식을 지키는 일이다.
 

 

* 필자 : 임성용 시인. 화물운수노동자. 시집으로 <하늘공장> <풀타임> 산문집 <뜨거운 휴식>이 있다.

 

* 월간 '시대' / 2018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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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에서의 집단이성과 관료주의의 대결

  •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에서의 집단이성과 관료주의의 대결

    -충남지부 조합원들의 노동자민주주의를 지지하며-

     

    1.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 운영위원회의 관료적 결정

     

    지난 2월 24일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 충남지부(이하 충남지부) 2월 정기모임에서는 민주노조에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집단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모든 증거와 정황이 계획적인 집단테러임을 증명하고 있고, 노동조합(충남지부)의 존립 자체를 흔드는 사건이라서 신속하고 엄중한 처리가 필요했다. 이에 충남지부 조합원들은 3월 10일 비상총회를 열어 '노조파괴에 대한 전 조합원과 함께 하는 집단대응 대책의 건'을 압도적인 찬성으로(90.69%) 통과시켰다. 또한, 충남지부는 사건의 엄중함을 고려하여 민주노총 규율위원회(이하 규율위원회)에 제소했고, 규율위원회는 가해자에 다한 사전조치를 명령했다. 즉, 충남지부는 테러 피해자와 조합원, 그리고 노동조합을 2차 가해로부터 지키기 위해 민주적인 절차와 규약에 따라 "정당한 조치"를 했다.

    이러한 조치는 조합원들을 보호할 임무가 있는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이하 플랜트노조)에서 먼저 해야 한다. 하지만, 플랜트노조 운영위원회에서는 충남지부의 정당한 조치를 방어하고 더욱 엄격히 적용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오히려 조합원들의 뜻을 거스르는 결정을 했다. 운영위원회는 테러 사건이 "명백한 범죄행위", "사전에 계획된 노조파괴 행위"이었음에도 총회 결정사항 집행을 유보하라는 결정을 했다.

    민주노조운동의 상식에서 충남지부의 총회 결정사항은 조합원들의 안전하고 민주적인 노동조합 활동 보장을 위해 가해자들에게 해야 하는 필수적인 조치였다. 따라서 이러한 최소한의 조치마저도 무력화시키는 운영위원회의 결정은 충남지부 조합원들의 민주적 의사결정을 부정하는 반민주적 행위이자, 조합원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반인권적 행위로 볼 수밖에 없다.

     

    플랜트노조 운영위원회의 관료적 행태는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운영위원회는 회계부정, 집단테러 세력에게 신속하고 단호한 징계를 내리는 대신 그들에 맞서 싸우면서 노동조합을 지켜낸 충남지부장을 징계하겠다고 나섰다. 노동조합 안의 부패-폭력세력을 조합원의 힘으로 몰아내는 일은 민주노조 운동에서 존경받고 교훈으로 삼을 일이다. 더욱이 충남지부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집단이성과 노동자 민주주의"로 대응했다.

    그런데, 플랜트노조 운영위는 이러한 충남지부를 지원해주기는커녕, 사사건건 방해하면서 부패-세력을 방어하더니, 급기야 "조합원들이 직접 선출한 지부장"을 징계하겠다고 나섰다. 게다가 “부당한 징계”를 위해 노동조합규정마저 일방적으로 바꿔가면서 조합원들의 뜻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결정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조 조합원은 이 정도의 부당한 압력으로 물러서지 않는다. 지금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거리에서 농성장에서 현장에서 자본의 부당한 압력과 탄압에 맞서 싸우고 있다. 독재정권의 엄혹한 시기에도 부당한 권력과 자본에 맞서 싸워온 것이 노동자들이었고, 그것이 민주노조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한 전통을 가진 민주노조 조합원들에게 "노조 권력"을 악용해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야말로 민주노조에 대한 모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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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집단이성과 관료주의의 대결

     

    노동조합의 주인은 조합원이며, 총회는 조합원 전체로 구성되는 노동조합 최고의 의사결정기구이다. 총회는 조합원들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기구이며, 노동자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모든 조합원은 노동조합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정보에 대해 알 권리가 있으며, 총회는 노동조합 관련된 현안 보고와 정확한 정보제공, 그리고 민주적인 토론을 통해 조합원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곳이다.

    노동조합에서의 "집단이성"이란 부당한 지시나 명령에 수동적으로 따르지 않고, 특정세력의 사적 이익에 이용당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의 기준을 세워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민주적으로 토론하고, 결정에 대한 책임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집단이성이다. 이것이 노동자 민주주의의 기반이 된다. 충남지부 조합원들이 비상총회에서 결정하고 집행한 것은 바로 집단이성이자, 노동자 민주주의의 기반이었다.

     

    그런데 지금 플랜트노조에서는 집단이성과 노동자민주주의의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불순한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운영위원회의 관료적 결정이 그것이다. 그들은 충남지부 조합원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 하자, 관료적으로 굴복시키려 하고 있다. 특정세력의 사익(私益)을 위해 노동조합 조직질서를 악용해 조합원들을 분열시키고 있다. 그래서 충남지부 조합원들의 투쟁은 패권적 관료주의, 부패한 노동조합 조직질서와 전면적으로 싸우는 "노동운동 바로 세우기" 투쟁이기도 하다. 전선은 분명하고 단순하다. 집단이성 대 반민주적 관료주의 세력, 민주노조 세력 대 부패세력의 전선이 그것이다. 충남지부 통지들의 투쟁에 민주노조운동 진영이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노동자민주주의를 지지하며

     

    ‘노동자 민주주의'는 투쟁하는 노동자의, 토론하는 노동자의 발전하는 계급의식이다. 대의제-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 투쟁하는 노동자의 원칙이 존중받고 토론과 논쟁과 실천적 검증을 통해 언제든 소수가 다수가 되고, 다수와 소수 모두 왜 다수와 소수가 되었는지 인식하고 더욱 깊게 연대하고 단결하면서 투쟁을 확산하고 발전시키는 민주주의다.

    노동조합 안에서 집행부(간부)와 조합원들의 판단이 다를 때, 위로부터의 조직질서와 상층부 회의체계를 통해 조합원 위에 군림하며 통제하려는 것이 관료주의이고, 조합원들과 직접 토론하고 설득하고 자신도 설득당하면서 공개적으로 검증받고, 결정한 것을 직접 실천하면서 조합원 스스로 행동이게 하는 것이 노동자민주주의이다.

     

    조합원 다수가 이러한 민주주의에 익숙해졌을 때, 노동조합의 민주주의는 다른 조직보다 훨씬 우월한 의식수준과 조직력을 갖게 되고, 자본과의 싸움에서도 강력한 무기가 된다. 또한, 조합원들의 의식적이고 민주적인 토론 능력과 집단이성만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노동조합 내부의 오류를 스스로 교정할 수 있다. 이것은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노동조합은 반민주적 요소와 관료주의에 의해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지금 충남지부 조합원들은 관료주의에 맞서 싸우면서 집단이성을 지켜내고 있다. 어떠한 오류도 집단이성으로 교정하면서 노동자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동지들은 승리할 것이다. 누구보다 제대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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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6호] 프롤레타리아 조직 - 당과 평의회에 대한 문제의식 (남궁원, 윤웅태)

  • 프롤레타리아 조직 - 당과 평의회에 대한 문제의식

     

    <편집자 주> 코뮤니스트 운동의 역사에서 현재까지도 토론될 만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당과 평의회>에 대한 문제를 먼저 가신 남궁원, 윤웅태 동지의 운동을 평가하는 차원에서 주요 내용을 발췌하여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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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주의운동의 좌초와 평의회의 복권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와 억압의 역사를 끝내기 위해 계급해체, 인간해방을 향한 매우 힘든 투쟁을 벌여왔다. 이론적 사회주의로부터 러시아 혁명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 운동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평등한 생산양식을 창조해 나가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열망과 투쟁의 역사였다.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 혁명의 좌절 등 세계적인 계급투쟁의 패배를 딛고 선 러시아에서의 혁명의 승리, 그리고 뒤이은 중국 혁명의 승리는 사회주의운동에서 ‘광범위한 노동조합과 이를 토대로 하는 사회민주주의당’의 종말을 선언한 것에 다름없었다.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시도된 ‘노조-당’과 이후 ‘산별노조-사회민주주의당’의 형태는 오래지 않아 개량주의로 경도돼 그 역할이 급진적 개혁당 수준으로 떨어졌고 당의 관료화와 비대화는 ‘당 위기론’을 불러왔다. 바로 그때 러시아 혁명이 대안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러시아조차 곧바로 반혁명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결국 러시아 사회주의는 결과론적 국유화, 노동자민중에 대한 독재, 야만적 국가 패권주의 등을 생채기로 남긴 채 노동대중의 희망과 기대를 물거품으로 만들며 몰락해갔다. 역사적 사회주의는 전체주의와 노동자민중을 억압, 통제하는 당 권력화 문제를 여전한 숙제로 남겼다. 이제 당 위기론은 사회주의운동 내부에서 절박한 화두가 되었다. 나아가 자본주의와 역사적 사회주의 모두에게서 나타난 당의 오류는 당 무용론을 강화했다. 특히 68년으로 대표되는 좌절한 사회혁명은 당 무용론을 더욱 심화시켰다. 68혁명은 자본에 포섭된 자본주의 내의 ‘노조-사회민주주의당’과 역사적 사회주의의 ‘당 독재’로 확인된 배신에 대한 투쟁이었다. 노동자 민중은 자본주의와 역사적 사회주의 체제 모두를 반대하고 국가와 모든 권위에 대해 투쟁했으며 이후 일상으로부터 제기되는 미시 조건에 대한 집착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68년의 경험은 무정부적 자율주의 경향과 민중주의, 그리고 비판적 정치 분파로서 ‘좌파’ 개념을 강화했다.

     

     이러한 사회주의운동의 역사는 오늘날 비판적 정치 분파로서 ‘좌파’가 자본주의 체제 위기극복의 보조단위로 기능하고 있는 것을 용인하게 하였다. 이제 사회주의운동과 사회주의자는 설 곳을 잃고 비판적 정치 분파로서의 ‘좌파’만이 남게 되어 사회주의운동은 좌파운동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사회주의운동은 혁명적 사회주의니 변혁적 노동계급운동이니 하는 갖가지 수사가 붙게 되었다.

     

     이처럼 20세기 사회주의운동의 역사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하위파트너로 종속됐던 노동조합운동과 사회민주주의당, 그리고 이의 반대 관념인 무정부주의에 의해 주도됐다. 이러한 가운데 전투적 노동조합운동이 특수한 지위를 부여받아 오기는 하였으나 오늘날 자본주의의 개량적 조치와 자본의 유연화 전략으로 인해 그조차 위기를 맞고 있다. 경험한 대로 전투적 노동조합운동과 전투적 노동운동이 사회주의운동의 주체세력으로서 전화/발전되지 못하고 자본주의 내에 포섭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제기되는 ‘평의회-사회주의당 운동’의 복원은 이미 자본주의에 포섭된 노동조합운동과 사회민주주의당 파트너쉽 극복을 의미한다. 즉 노동조합의 한계를 넘어서는 노동자 평의회건설은 20세기 사회주의운동의 좌초와 분화 위에서 제기되고 있는 역사적 사회주의의 한계와 오류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사상으로 현대적으로(탈근대주의 운운의 역편향이 아니라) 복권하는 것이다.
     

    현 한국사회주의운동에 대한 부분적 비판

     

     한국사회에서 맑스주의 운동진영은 현장실천가(활동가)들, 투쟁하는 노동자민중들, 그리고 노동자민중의 뇌리에 대안 세력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세를 놓치지 않는 계급투쟁의 전위를 자임한다면 다음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먼저-, 현실적인 역량을 넘어서는 선도적 투쟁의 길을 열어감에 있어 다양한 수준의 투쟁과 조직, 나아가 운동미래에 대한 전략수립의 문제. 이어-, 현실 변혁운동단계와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민중주의와 중도주의를 근절시키고 맑스주의를 발전시키는 문제이다. 중도주의는 '급진적 민주주의 운동'이라 봐도 무방하며 그 실체는 자유주의와 스탈린주의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중도주의는 변혁전략과 이행문제, 그리고 주체형성에 있어 변혁운동의 수준 높은 발전을 현실내부로 가두려는 그야말로 당면투쟁의 급진성만으로 변혁운동의 장래를 제한하려는 경향을 띤다. 현실에서 중도주의는 대기주의, 전위적 질서와 역할의 신비화, 그리고 현실 변혁운동에서의 무기력과 자기 보존의 패권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민중주의는 노동자민중의 생존권 요구를 절대화하여 대중추수주의와 무정부성을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민중주의는 노동자민중의 투쟁과 각성을 제한하여 변혁운동의 주체적 성과를 유실시키고 노동자민중의 이익집단화를 용인하여 결국 자본가 권력에 모든 것을 갖다 바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노동자민중에 대한 그들의 따뜻한 시선과는 하등 관계없는 것이다. 여기에다 ‘사회주의’라는 개념을‘자유주의적 사회성 강화’로 사용하는 흐름이 노골화되면서 사회주의 자체가 희화화되기까지 한다. 이처럼 한국사회주의운동은 한편 과거 유물로서 자유주의와 스탈린주의의 경계, 또 한편의 경제투쟁과 무정부성의 경계에서 새로운 모색을 힘겹게 진전시키고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주의운동의 중요한 과제는 비판적 정치분파로서의 ‘좌파’의 색채를 걷고 자본주의의 하위파트너로 자리하고 있는 ‘노조-사회민주주의당’의 개량논리를 걷어치우고 사회주의운동을 다시 세워나가는 것이다. 물론 이를 돌파하기 위한 새로운 주체형성-재조직화를 위한 노력은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맑스-꼬뮤날레도 그러한 노력일 것이며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주체형성 논의도 그러한 노력의 일부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한국사회주의운동은 계급해방, 인간해방이라는 목표가 가지는 내용과 형식의 측면에서, 이행전략의 측면에서 전면적인 논의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이러한 논의를 책임있게 시작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평의회운동>>, 윤웅태,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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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레타리아 조직 - 당, 평의회 조직문제를 중심으로

     

      나는 이 글에서 레닌의 1902년「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보여준, 외부로부터 계급의식 도입을 통한 당 이론이 1905년 소비에트 투쟁 경험 속에서 변화했다고 본다. 즉 당은 계급의 일부이며, 대중의 계급투쟁 속에서 변화된 것이다. 당은 대중의 혁명적 투쟁기구로 나타난 평의회 내에 활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 이후 레닌은 당과 새로운 국가기구 사이에 관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관료화와 프롤레타리아 반혁명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국가의 위험성을 보지 못했다. 레닌은 내란의 위기가 가속화되고, 도시에서 경제가 완전히 붕괴되자, 당기구의 중앙집권화를 가속화시켰다. 아울러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정의는 노동대중에서 나온 계급적 성분보다 혁명에 대한 헌신성, 당성에 의해 내려질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혁명 이후 레닌의 당론은 결국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당의 독재로 변질됐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룩셈부르크가 지적한 대중의 자발성에 기초한 투쟁에 근거하는 당의 역할은 유의미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독일 좌익공산주의자와의 논쟁에서 드러나듯이, 혁명적 대중투쟁 기관으로서, 사회주의 사회의 재조직화 기구인 평의회에 대한 동요를 보였다. 이것은 룩셈부르크가 독일공산당내 논쟁 지형에서, 자신이 그렇게 반대했던 국민의회 개입을 선택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1905년과 1917년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쇠퇴하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시기에 자본주의 질서의 전복을 위한 새로운 조직인 노동자평의회를 창조했다. 독일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의회의 이용불가능성, 사회민주주의의 배반과 반동적 본질,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국가의 옹호자이자 제국주의 전쟁의 신병모집관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새로운 시기의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소비에트와 동일한 원칙에 근거한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들은 이후 공장안에 갇힌 노동자 투쟁을 강조함으로써, 정치조직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반면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통일전선, 민족해방 투쟁을 지지하는 코민테른 입장에 반대하고 국제주의 원칙에 입각한 투쟁을 전개했다.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 그룹은 당을 계급의식의 능동적 인자이자 동시에 계급 전체 내에서의 의식 발전의 표현으로서 파악했다.

     

    계급투쟁의 역사적 조건의 변화는 계급조직의 형태에도 상당한 변화를 초래한다. 통합된 세계자본주의 체제, 자본의 세계화에 따른 ‘위기의 세계화’는 노동계급운동을 전지구적 투쟁이라는 새로운 지평으로 끌어올리고 있고 노동계급의 국제주의 관점은 더욱 요구되고 있다. 맑스주의는 세계노동자의 혁명적 연대를 통해서 자본주의 전복을 의도한다. 따라서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독일혁명 (1918-23) 중심으로 한, 레닌과 유럽 맑스주의 내부논쟁을 되새기는 것은, 우리 사회 혁명적 맑스주의 실천운동 복원과도 연관돼 있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조합 운동은 1997년 역사적인 총파업투쟁 이후 점차 자본과 국가기구에 포섭되고 있다. 진보정당-산별노조의 낡은 구도를 벗어나 이제 노동자평의회, 혁명당 문제가 새로이 제기되어야 한다. 당과 평의회 관계는 지속해서 연구해야 할 주제다. 여기서는 앞에서의 논쟁에서 시사점을 받아 한국 사회에서의 당과 평의회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정리해본다.

     

    첫째, 부르주아당과 달리 프롤레타리아 당은 국가를 접수하거나 국가 운영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 원칙은 전체로서의 계급이 이행국가를 통하여 그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계급이 당 없이 존재한 시기도 있었지만, 계급 없는 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둘째, 모든 노동자에게 열려있는 대중조직과 정치조직인 당 사이에는 진화의 차이가 있다. 자본주의 상승기에는 당면 경제이해를 방어함으로써 영구조직인 노동조합이 존재한다. 하지만 당은 그렇지 않다. 당의 존재는 계급투쟁의 상태에 의존하는데, 상승기에는 나타나고 후퇴기에 사라진다. 자본주의 쇠퇴기에는 영구조직인 노조가 프롤레타리아 내용을 상실하고 국가기구의 부분이 된다. 그리하여 이때는 대중파업, 와일드캣 파업이 일어난다.

     

    셋째, 노동자평의회에 의한 투쟁이 절정에 이르기 전에 당은 나타난다. 왜냐하면, 당의 존재는 부상하는 계급투쟁의 시기 때문에 조건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의 역사적 진화와 함께 당 기능은 변한다.

     

    넷째, 당은 계급의식의 유일한 담지자라고 주장할 수 없다. 계급의식은 전체로서의 계급 속에 있다. 당의 활동은 계급의 방향을 제시하고 투쟁에 비료를 주는 것이지, 계급대신에 결정을 하는 지도자가 아니다. 계급에 여러 개의 일관된 혁명 경향이 존재하는 것처럼 강령 틀 내에 차이와 경향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공산당은 일괴암적 관념을 거부한다. 당은 투쟁이 제기하는 모든 문제에 구체적으로 답하는 처방을 낼 수 없다. 그것은 계급의 기술적 행정기관도 아니고 집행기관도 아니다. 당의 역할은 봉기의 “참모부”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조직 – 당, 평의회 조직문제를 중심으로>>, 남궁원,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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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복간호가 발간되었습니다!

실천지 복간호가 발간되었습니다!

 

사회실천연구소의 『실천』지가 복간되었습니다. 2012년 내부 사정으로 발행이 중단된 『실천』지가 회원들의 논의를 거쳐 복간이 결정됐고, 2018년 6월 15일(금) 자로 복간호가 발행됐습니다.

이번 복간호는 크게 [특집]으로 68혁명 50주년, <정세> 스페인 여성총파업과 한반도 정세, [기획번역] 베네수엘라, 터키의 새 좌파정당, 블록체인, [사실연 지상강좌] 노동자 정치학, 과학으로 읽는 자본론, 노동자를 위한 회계 등이 실렸습니다. 그 외에도 만평과 그림판, 서평, 인터뷰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됐습니다.

권두언에서 회원인 오세철 선생은 “ 맑스주의 연구자와 혁명적 실천가가 이론적 실천을 뛰어넘어 우리 사회 그리고 나아가 세계 사회의 변혁을 일구어내는 구체적 행동을 포함한 실천운동에 앞장서겠습니다... 6년 만에 새로운 모습으로 복간되는 『실천』지가 우리 연구소의 밝고 힘찬 미래를 드러낼 징표임을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복간의 변을 밝히셨습니다.

 

가격 : 15,000원
구입문의 : sopractice@jinbo.net
홈페이지 : http://blog.daum.net/sopractice

 

주요 목차

특집: 1968년 혁명 50주년
다른 1968: 덜 알려진, 주변부의 1968 / 우고 베제티 외 
68혁명/운동의 정치적 재해석을 위하여 / 원영수

정세 
우리가 멈추면 세상이 멈춘다: 스페인 3.8 여성총파업 / 원영수
요동치는 한반도 정세를 어떻게 볼 것인가 / 배성인

기획번역
베네수엘라의 허약한 혁명 / 스티브 엘너
터키의 새 좌파정당 / 칭귀즈 귀네쉬 
블록체인과 사회주의 / 스티브 허클 & 마틴 화이트

사실연 지상강좌 
노동자를 위한 정치학(1) 국가란 무엇인가 / 배성인
과학으로 읽는 자본론(1) 왜 『자본론』을 썼을까 / 김진업
노동자를 위한 회계(1) 노동자에게 회계란 무엇인가 / 한형성

연구노트
한반도 전쟁위기와 미중 제국주의 패권쟁투 / 홍수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운동사 / 최규진
책 읽어주는 남자: 바네겜 『일상생활의 혁명』 / 김종원 
인터뷰: 김수행 선생과 “실천”으로 다시 만나기/ 이형로

 

『실천』지는 독자들과 소통하는 잡지입니다. 『실천』지를 읽고 의견을 주실 분들은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실천』의 모든 문은 활짝 열려있습니다.

독자 의견 : sopractice@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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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의 계급적 의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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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의 계급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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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68혁명 50주년 : 1960년대 학생운동의 의미와 노동계급의 부활

68혁명 50주년 : 1960년대 학생운동의 의미와 노동계급의 부활

 

 <우리는 1968년 투쟁을 '혁명'이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대적이고 급진적인 투쟁에서 노동계급이 부활했기 때문에 '미완의 혁명'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1960년대 말 무렵이 되자, 전후 호황이 사라지고,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일상생활이 동과 서를 막론하고 가난과 위선임이 밝혀지고, 두 제국주의 블록 간 대리전쟁이 베트남에서 아프리카까지 계속됨에 따라, 부모세대가 겪었던 패배와 트라우마를 경험해 보지 못한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세대는 자본주의 사회의 정상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 제기는 다른 층위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1968년 5~6월 프랑스에서 거대한 대중 파업으로 터져 나왔고, 이 운동은 반혁명의 시대가 끝을 고하는, 모든 대륙에서 노동자 투쟁의 국제적 물결을 알리는 신호였다. 68년 5월 프랑스, 그 운동의 정점에서 거리 곳곳, 학교, 대학, 그리고 작업장에서, 존 리드(John Reed)가 1917년 10월 이전 러시아에서 관찰했던 바와 똑같은 깊이 있는 정치적 토론의 신호를 관찰할 수 있었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자본주의를 새로운 사회로 대체하자는 생각이 노동자와 학생들 가운데 중요한 소수파 사이에서 심각하게 논의되었고, 이러한 정치적 동요의 가장 중요한 열매는 혁명적 정치 조직의 새로운 세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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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0년대 세계학생운동의 전개과정

 

 미국에서는 1964년부터 가장 대대적이고 가장 격렬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캘리포니아의 버클리 대학에서 학생들의 항의가 최초로 대규모 확대되었다. 학생들이 주요하게 제기한 것은 대학에서 자유로운 정치적 발언을 위한 ‘자유로운 발언 운동’의 요구였다.

미군 신병모집에 항의하는 학생들은 베트남전 반대, 인종 분리 반대를 선동했다. 처음에 당국은 학생들의 평화로운 점거에 경찰력을 동원해서 억압했고, 1965년 초 대학 측은 학교 내에 경찰의 활동을 허가했으며 그로 인해 버클리 대학은 미국 학생 저항운동의 주요중심지가 되었다. 동시에 로널드 레이건이 ‘버클리에서 무질서를 일소하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자, 운동은 강한 자극을 받았고, 그다음 해에 인종 분리 반대, 여성권리 옹호 그리고 특히 베트남전 반대 항의시위를 벌이면서 과격화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항의운동은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1967년 말 952명의 학생이 베트남 신병소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1968년 2월 8일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시민권을 위한 시위 도중 3명의 학생이 살해당했다. 운동은 1968년에 가장 강력히 확대되었다. 이러한 불만과 과격화는 4월 4일 마틴 루터 킹의 암살로 한 층 더 증폭되었는데, 이 사건은 그 나라의 흑인 게토에서 수많은 폭력충돌을 불러일으켰다. 컬럼비아대학의 점거는 미국 학생운동의 최고정점 중 하나로 다시 새로운 충돌을 불러왔다.

 

 미국 대학생들의 반란은 같은 시기에 많은 다른 나라로 퍼졌다. 아메리카 나라들 가운데서는 브라질과 멕시코 학생들이 가장 활동적이었다. 1967년 브라질에서는 브라질 정부와 미국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가 지속해서 발생했다. 당국의 엄청난 진압과 대대적인 검거에도 브라질 학생들은 1968년 10월까지 거의 날마다 시위를 벌였다.

몇 달 뒤에는 멕시코가 휩쓸렸다. 7월 말 멕시코시티에서 학생반란이 일어났다. 경찰은 탱크를 투입했다. 경찰 총수는 올림픽 대회를 명분으로 잔인한 진압을 지시했고. 9월 18일 대학캠퍼스가 경찰에 점령되었다. 마침내 10월 2일 정부는 멕시코시티의 3문화광장에서 만 명의 학생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도록 했는데, ‘틀라텔롤코의 학살’로 기억되는 이 진압에서 최소 200명이 살해당하고 500명 이상이 중상을 입었으며 2,000명 이상이 검거되었다. 그렇게 올림픽을 조용하게 치를 수 있었지만, 학생들은 올림픽이라는 강제된 휴식이 있은 뒤에도 몇 달 동안 투쟁을 계속해나갔다.

 

 당시 학생 운동 물결은 아메리카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라 모든 대륙을 휩쓸었다. 아시아는 일본에서 극적인 운동이 나타났다. 1963년 이래 미국과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폭력시위가 발생했는데, 주로 전학련(전국일본학생자치위원회연합)이 주도했다. 1968년 봄의 끝 무렵, 이 학생운동은 수많은 학교로 퍼졌고, 노동자들이 운동에 가담한 1968년 10월에는 절정에 달했다. 반봉기법이 통과되자, 80만 명이 거리에 나와 시위를 했다. 도쿄대학 점거를 경찰이 진압하자,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했다. 하지만 1969년 1월 중순 학생운동의 마지막 요새였던 도쿄대학이 무너졌다.

 

 아프리카에서는 세네갈과 튀니지에서 학생들의 투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렇게 모든 대륙을 휩쓸었던 운동은 유럽에서 가장 거대하고 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영국에서는 이미 1966년 말에 런던경제학교(LSE, 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시작하여 점거 운동이 퍼져나갔고, 1967년 3월에는 5일간의 점거가 있었는데, 미국의 예를 따라 ‘자유대학’이 만들어졌다. 가장 극적인 시위는 베트남전에 반대하여 1967년 3월과 10월, 1968년 3월과 10월에 일어났는데, 모두 경찰과의 폭력적인 충돌이 있었다. 벨기에에서는 학생들이 베트남전에 반대하고 교육부문의 개선을 요구하기 위해 1968년 4월부터 수차례 거리로 나섰다. 5월 22일에는 브뤼셀 자유대학을 점거하여 ‘민중을 위해 열린 대학교’라고 선언했다.

이탈리아에서는 1967년부터 여러 대학을 점거했고, 경찰과 학생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프랑코 지배하의 스페인에서는 1966년부터 노동자 파업과 대학 점거의 물결이 전개되었다. 1967년에 그 운동은 더욱 강하게 성장했고 1968년까지 지속되었다. 학생과 노동자는 서로 연대를 표시했다.

당시 유럽의 모든 나라 중에서 독일의 학생운동이 가장 강력했다. 독일에서는 1966년 말, 사회민주당이 정권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반응으로 ‘의회 외부의 반대파(APO)’가 출현했다. APO는 특히 학생들의 총회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그 회의에서는 저항의 수단과 방법에 관한 열띤 논쟁이 이루어졌다. 많은 대학에서 미국의 모범을 따라 토론그룹이 만들어졌고, 기성의 부르주아적인 것에 대한 반대로 ‘비판적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시기에 논쟁의 오랜 전통, 즉 공개적인 총회에서의 토론 전통이 일부 부활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극적인 행동에 대한 충동에 이끌리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래도 이론과 혁명운동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출현했고, 더불어 자본주의 극복을 생각할 용기도 다시 나타났다. 독일의 저항운동은 국제적으로 ‘가장 이론적이며, 토론에 있어서 가장 깊게 파고들었고, 가장 정치적이었던’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토론에 병행하여 수많은 항의시위가 있었다. 베트남전 문제는 확실히, 미국의 군사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정부가 있는 나라와 2차 대전의 영향이 계속 남아 있던 나라에서 주요 원동력이 되었다. 1968년 2월 17일과 18일 서베를린에서 국제 베트남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그에 뒤이어 12,000명이 참가한 시위가 있었다. 1965년 이후 시위는 모두 ‘비상사태법령’의 제정을 반대했는데, 이 법령은 독일의 내부적인 군국주의화와 진압에 대한 강화된 권리를 국가가 갖는 것이었다. 1966년 대연정에 참가한 사회민주당(SPD)은 이러한 법령을 주장하면서, 그들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유혈진압을 지휘했던 1918~1919년과 같은 자신들의 오랜 전통을 이어갔다.

 

 프랑스의 학생반란은 1968년 3월 22일 파리 서편 근교인 낭트에서 시작되었다. 그날의 사건은 그 자체로는 특별한 게 아니었다. 파리에서 베트남전에 반대해 많은 폭력적인 시위가 벌어졌던 시기에 낭트 대학 소속 극좌파 학생 한 명의 검거에 대항해 그의 동료 학생들이 대학위원회 건물을 점거하기로 결정했다. 대학위원회 건물을 점거한 142명은 건물을 떠나기 전에, 3월 22일 운동(M22)의 성립을 결정했다. 그것은 트로츠키주의 성향의 혁명적 공산주의 연맹(LCR)과 아나키스트들이 초기에 속해있던 비공식적 운동의 하나였다. 4월 말에는 맑스-레닌주의 공산주의 청년연합(UCJML)의 마오주의자들이 가담했다. 그에 뒤이어 대략 1,200명의 학생이 참여했다. 대학교 벽면에는 점점 더 많은 현수막과 낙서가 등장했다. ‘교수들, 너희는 낡았고 너희의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삶을 살자’, ‘너희의 꿈을 실현하라’ 등. 3월 22일 운동(M22)은 3월 29일을 ‘비판적인 대학교’의 날로 선언하면서 독일 학생운동의 전철을 밟는다.

낭트 캠퍼스에서는 극좌파 학생들과 ‘볼셰비키들을 혼내주기 위해서’ 파리에서 원정을 온 옥시당(Gruppe Occident) 그룹 소속 파시스트들 사이에 점점 더 자주 충돌이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총장은 학교를 다시 폐쇄하기로 결정했고, 경찰이 학교를 봉쇄한다. 낭트 학생들은 대학 폐쇄에 반대하고 M22 구성원에 대한 대학위원회의 징계에 항의하기 위해 다음날 소르본 대학 광장에서 집회를 갖기로 한다. 그 집회에는 300명만이 참가했지만, 학생 시위가 끝나기를 바라던 정부는 경찰에 라탱지구(파리의 대학가)를 점령하고 소르본을 포위하도록 명령했다. 경찰이 수백 년 이래 처음으로 소르본 대학에 난입했다. 자유로운 귀가를 약속했던 경찰은 남학생들을 연행했다. 이에 분노한 수백 명의 학생들이 소르본 광장에 모여 경찰과 충돌했다. 경찰의 진압이 강압적일수록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그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충돌은 그날 저녁 4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그다음 날 경찰은 소르본 일대를 완전히 봉쇄했다. 하지만 정부의 단호한 진압은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 시위를 끝내기는커녕 점점 더 대대적으로 확산되어갔다. 4만5천 명의 학생이 ‘소르본은 학생들의 것이다’, ‘경찰은 라탱지구에서 물러나라’, ‘우리의 동지를 석방하라’라는 투쟁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참여했다. 시위대에 점점 더 많은 학생, 선생, 노동자, 실업자가 동참했다.

5월 7일 시위행렬은 센강을 건너 샹젤리제를 따라 이동했고 대통령궁 근처까지 나아갔다. 평소에 라 마르세예즈나 장례의 조종이 들리던 개선문 아래에서는 인터내셔널가가 불리기 시작했다. 몇몇 지방 도시에서도 시위가 번져나갔다. 정부는 자신들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 5월 10일 낭트 대학을 개방했지만, 그날 저녁 만 명의 시위대는 라탱지구에 모여 소르본을 봉쇄했던 경찰과 대치했다. 몇몇 시위대가 바리케이트를 치기 시작했고, 새벽 2시에 CRS(경찰기동대)는 최루탄을 발사하며 바리케이트를 향해 돌격했다. 그 충돌은 매우 폭력적이어서 양측에서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시위대 중 5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라탱지구에서는 많은 주민이 학생들에게 호의적이어서 경찰의 공격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집으로 피신하게 하거나 거리에 물을 뿌려주었다. 이 모든 사건들, 특히 진압세력의 잔인성에 관한 보도는 사람들을 자극했다. 5월 11일 파리와 프랑스 전역에서 분노가 거세졌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이러한 시위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다양한 직업의 수십만의 시위자들, 특히 젊은 노동자와 학부모가 참여했다. 지방에서도 많은 대학을 점거했고, 곳곳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사람들은 토론하기 시작했고 진압세력의 만행을 비난했다.

 

 시위의 전개는 이제 극좌파 학생들을 비난했었던 CGT를 포함한 노동조합 중앙조직과 몇몇 경찰노동조합까지 강경 진압과 정부 정책에 항의하기 위한 5월 13일의 파업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5월 13일 전국의 모든 도시에서 2차 세계대전 이래 최대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노동계급은 학생들 곁에서 대대적으로 참가했다. 가장 널리 확산된 구호 중 하나가, ‘10년(드골이 권력을 잡은 기간),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었다. 시위의 결과는 거의 모든 대학을 학생뿐만 아니라 수많은 젊은 노동자들이 점거한 것이었다.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발언을 했고, 토론은 대학 관련 문제나 진압에 관한 것에 한정되지 않았다. 노동조건, 착취, 사회의 미래 등 가능한 모든 사회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토론은 많은 직장에서 계속 진행되었고 노동자들은 자발적인 파업에 들어갔고 작업장을 점거하기로 했다. 특히 젊은 노동자들이 운동을 추진했다. 드디어 노동계급이 다시 계급투쟁의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2. 1960년대 학생운동의 의미

 

 1960년대 학생운동의 특징은 전반적으로 베트남전쟁 반대에 있었다. 이 운동은 1950년대 초 한국전쟁 동안의 반전운동처럼 소련-스탈린주의 당과 연계된 운동이 주도권을 쥘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들은 사실상 어떤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고, 오히려 자주 그 운동과 대립했다. 이것이 1960년대 말 학생운동의 특징 중의 하나였다.

 

 베트남전에 반대한 미국에서의 저항이 서방 세계 모든 나라에서 가장 중요하고 널리 확산된 동인이었다면, 학생반란이 주요한 나라들에서 일어난 건 확실히 우연이 아니었다. 미국의 젊은 세대는 징집으로 인해 전쟁문제와 직접 대면했다. 베트남전에서 미국의 젊은이들은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만 명이 부상당해 돌아왔으며, 수백만 명은 그곳에서 겪은 경험으로 평생 후유증을 앓았다. 그들이 현지에서 경험한 공포를 제외하더라도, 많은 이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했다. 우리가 베트남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가? 공식적으로 그들은 ‘민주주의’, ‘자유 세계’ 그리고 ‘문명’을 수호하기 위해 그곳에 파견되었지만, 그들이 현지에서 경험한 건 공식적인 것과 완전히 모순되었다. 그들이 이른바 방어해야 할 정권, 즉 사이공의 정부는 민주적이지도 문명적이지도 않았다. 그 정권은 군사독재로서 부정부패가 극에 달해 있었다. 현지에서 병사들은, 비무장의 가난한 농민, 여성 그리고 아이와 노인에게까지 폭력을 가하고 살해하도록 요구하는 현실에서, 자신들이 ‘문명’을 수호한다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국 정부가 제시하는 ‘문명과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공식적인 말과 베트남에서 실제 행동 사이의 엄청난 모순은 미국 부르주아지의 권위와 전통적인 가치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킨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이러한 반란은 처음에는 히피 운동과 함께 비폭력적이고 평화주의 운동의 하나였다. 그러나 1968년 프랑스에서와같이 버클리에서의 진압은 그 운동이 과격화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비폭력운동에 잠시 함께했던 제리 루빈(Jerry Rubin)이 국제청년당(Youth International Party)을 창립한 이후, 반란운동은 자본주의에 대항한 일종의 혁명적인 전망을 스스로 부여했다. 이제 운동의 새로운 영웅들은 더 이상 밥 딜런이나 조안 배스가 아니라, 체 게바라와 같은 사람이었다. 이 운동의 이데올로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이었다. 여기에는(자유 숭배, 특히 섹스의 자유나 마약 소비의 자유와 같은) 아나키스트적인 면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쿠바와 알바니아를 모범으로 찬양하는) 스탈린주의적인 면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1960년대 미국에서 확산된 저항운동의 주요 특징은 베트남전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인종차별에도 반대했으며, 성차별에도 반대하고, 미국의 전통적인 도덕과 가치에 반대했다. 이 운동은 결코 노동계급의 운동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에 대항한 혁명적 세력은 노동계급이 아니라 다른 사회계층, 즉 인종차별의 희생자인 흑인, 제3 세계의 농민, 반항하는 지식인이었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1960년대 학생운동은 유사한 모습을 보였다. 미국이 베트남에 관여하는 것에 대한 비난, 권위(특히 대학의 권위)에 대한 거부, 권위주의 일반에 대한 거부, 전통적인 도덕(특히 성도덕)에 대한 반란 등이 그것이다. 이것이 바로 권위주의의 상징이었던 스탈린주의 당들이 비록 미국의 베트남 개입을 강력히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자들 사이에서 전혀 반향을 얻을 수 없었던 이유였다. 하지만, 1960년대의 반란자들은 호치민(오랜 당원이었지만 훨씬 더 모범적이었고 영웅적인 것처럼 보였던)의 포스터를 걸어놓기를 더 좋아했고, 체 게바라(마찬가지로 스탈린주의 당의 당원이었지만 이국적으로 여겨졌다)나 안젤라 데이비스(미국 스탈린주의 당의 당원이었지만 흑인 여성이라는 이미지와 체 게바라와 같이 낭만적인 외모로 인해)의 낭만적인 사진을 걸어두기를 가장 좋아했다.

베트남전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자유스러워 보이는 이러한 현상은 독일에도 나타났다. 1965년 이래 독일의 대학에서 전개된 토론 과정에서 ‘반권위주의적인 진정한 맑스주의’에 대한 모색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당시 평의회주의 운동의 많은 글이 다시 회람되었다.

프랑스에서 1968년 전개된 학생운동의 주제와 요구도 근본적으로는 동일했다. 그 과정에서 베트남전에 반대했던 저항은 상황주의적이거나 아나키스트적인 일련의 슬로건에 밀리게 되었다.

 

 특히 아나키스트적인 영감은 아래와 같은 슬로건으로 표현되었다.

“금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자유는 모든 범죄를 포함하는 범죄이다“

“선거는 어리석은 자들을 위한 함정이다“

“불손하고 파렴치하다는 것은 새로운 혁명 무기이다“

 

 상황주의의 영향은 이렇게 반영되었다.

“소비사회 타도”

“볼거리의 상품사회 타도“

“소외를 타도하자“

“절대로 일하지 말라“

“지루함은 반혁명적이다“

“현실적으로 되자, 비현실적인 것을 요구하자“

 

 다른 세대에 대한 표현은 이러했다.

“달려라 동지, 낡은 세계가 네 뒤에 있다“

“젊은이들은 섹스를 하고, 늙은이들은 음란한 몸짓을 한다“

 

 바리케이트가 세워졌던 68년 5월 프랑스에서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이 나왔다.

“바리케이트는 거리를 차단하지만 길을 연다“

“모든 생각의 결론은 경찰의 주둥이에 짱돌을 처넣는 것이다”

 

 이시기의 가장 큰 혼란은, 다음의 두 가지 슬로건으로 표현되었다.

“혁명적인 사고란 없다. 오직 혁명적인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할 말이 있지만, 그것이 무언지 모른다“

 

 이러한 슬로건이 다른 나라에서 유포된 대부분의 슬로건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보여주는 건 1960년대 학생운동은 비록 여러 나라에서 노동자 투쟁으로의 가교를 만들려는 의지가 있었을지라도, 노동계급의 본질을 반영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접근방식은 잘 못 이해한 맑스주의 고전 문서에서 영웅이었던 육체노동자에 대한 매혹과 뒤섞여 노동계급에 대한 오만을 반영했다.

1960년대 학생운동의 성격은 쁘띠부르주아적 이었다. 아나키스트적인 표현 이외에 가장 분명한 것은 삶을 즉시 변혁하려는 의지였다. 이러한 조급함과 ‘모든 것을 지금 당장’이라는 주장은 쁘띠부르주아의 계급적 특징이다. 이 운동 지도부의 혁명적인 과격주의 그리고 운동 일부의 폭력 미화는 쁘띠부르주아적인 본질을 반영한 것이었다. 1968년 학생들의 혁명적 관심사는 의심의 여지 없이 옳았지만, 운동은 혁명을 일으키는 노동계급 운동의 실질적인 발전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혁명에 관한 낭만적인 관점만을 갖고 있었다. 스스로 혁명적이라고 여겼던 프랑스의 학생들은 68년 5월 운동이 이미 혁명이었다고 믿었고, 날마다 세웠던 바리케이트를 1848년과 1871년 코뮨의(바리케이트) 유산으로 묘사했다.

 

 1960년대 말 학생운동의 특징 중 또 하나는 세대 간의 갈등 즉 새로운 세대와 그들이 비난하는 부모세대 사이에 존재한 아주 큰 간극이었다. 특히 부모세대는 제1차 세계대전이 초래한 가난과 굶주림을 극복하기 위해 힘들게 일해야 했다는 이유로 오로지 물질적인 번영에만 신경을 썼다고 비난받았다. 그래서 소비사회에 관한 환상과 ‘절대로 일하지 말라’와 같은 슬로건이 성공을 거두었다. 반혁명을 철저히 경험한 세대의 자녀들로서 1960년대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부모가 자본주의의 요구에 무릎을 꿇고 순응했다고 비난했다. 반면 많은 부모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것보다는 더 나은 경제적 조건을 자녀에게 안겨주려고 치를 수밖에 없었던 희생에 대해 자녀들이 경멸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기도 힘들어했다.

 

 하지만, 1960년대 학생반란에는 진정한 경제적인 요인이 있었다. 오늘날의 상황과 비교할 때, 당시에는 대학 졸업 후 실업으로 인한 또는 불안정한 노동조건으로 인한 큰 위협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대학생들의 주요한 근심은, 자신들이 그 이전 세대의 대학졸업자와 같이 동일한 사회적인 지위 상승을 더는 이룰 수 없을 거라는 점이었다. 1968년 세대는 이른바 ‘사무관리직 인력의 프롤레타리아화’ 현상에 직면한 최초의 세대였다. 이 현상은 학생 수가 현저히 늘어나자마자 위기가 공공연하게 시작했다. 이러한 증가는 경제의 필요에 부응한 것이긴 했지만, 또한 그 부모들이 자신의 경우보다는 더 나은 경제적 사회적 처지를 자녀들에게 부여하려는 의지와 능력에도 부합했다. 특히 학생 수의 대규모 증가는 불편의 증대를 초래했다. 이는 대학의 구조와 관행이 단지 엘리트들만이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강한 권위주의적 구조가 지배했던 시대의 소산으로서 그대로 존속했기 때문이었다.

 

 1964년에 시작된 학생운동이 자본주의의 번영 시대에 전개되었던 반면, 경제적 상황이 벌써 매우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그래서 학생들의 불편도 더 커졌던 1967년의 상황은 이미 달라 보였다. 이것이 바로, 그 운동이 1968년에 그 절정을 경험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왜 1968년 5월에 노동계급이 무대 위에 등장하여 운동을 이끌어나가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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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68년 5월 노동계급의 부활

 

 낭트에서는 학생 또래의 노동자들이 운동에 동참했다. 그들의 논거는 단순하면서도 명료했다. ‘학생들이 결코 파업을 통해서 압력을 가할 수 없음에도 정부를 강제하여 승복하도록 할 힘을 가지고 있다면, 노동자들도 정부를 승복하게 만들 수 있다.’ 낭트의 학생들도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선언하고, 노동자들의 파업에 연대했다.

5월 14일 저녁 총 3,100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했다. 5월 15일에는 노르망디의 클레옹에 있는 르노 작업장과 다른 작업장으로 운동이 확산되어 총파업과 무기한 공장점거가 이루어졌고 공장 정문에는 붉은 깃발이 내걸렸다. 저녁 무렵에는 파업노동자가 11,000명에 달했다. 5월 17일에는 총 215,000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파업 물결은 이제 프랑스 전역, 특히 프로방스에 도달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생적인 운동이었고 노조들은 그 꽁무니를 뒤따랐다. 모든 지역에서 젊은 노동자들이 선두에 섰다. 빈번하게 학생들과 젊은 노동자들이 연대했다. 젊은 노동자들은 학생들이 점거한 대학교로 가서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공장 구내식당에 식사하러 오라고 권했다.

5월 18일 정오에 CGT의 파업호소가 알려지기 전에 이미 100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 날 저녁에는 200만 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5월 20일에는 6백만 명이, 5월 21일에는 6백50만 명이 작업을 멈추었다. 5월 22일에는 8백만 명이 무기한 파업에 참여했다. 그것은 국제 노동운동 사상 최대의 파업이었다. 이 파업에는 모든 부문이 포함되었다. 산업, 운송 및 교통, 에너지, 우편 및 텔레커뮤니케이션, 교육, 행정(정부의 여러 기관들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언론매체(국영 텔레비전이 파업을 했고, 종사자들은 특히, 강요된 검열을 비판했다), 연구소 등등. 그리고 장례사업장마저도 파업을 했고, 심지어는 프로 스포츠 선수도 그 운동에 동참했다. 프랑스 축구협회 건물에 붉은 깃발이 나부꼈다. 예술가도 참여해서 칸 영화제가 감독들의 권유로 중단되었다.

 

 이 시기에, 점거된 대학은(파리의 오데옹극장과 같은 다른 공공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정치적 논쟁 공간이 되었다. 많은 노동자들, 특히 젊은 노동자들이 이러한 토론에 참여했다. 노동자들은 혁명의 필요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점거한 공장을 방문해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 달라고 요청했다. 마찬가지로 거리에서도 보도에서도 많은 토론이 이루어졌다. (68년 5월에는 날씨마저 매우 좋았다). 토론은 매우 즉흥적으로 생겨났다.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서로 대화를 나눈다’ 가 슬로건이었다. 곳곳에서 축제 분위기가 지배했지만, 예외적으로 부유층 구역에서는 공포와 증오가 쌓여갔다. 프랑스 전역에서 도시구역에서, 몇몇 큰 작업장이나 인근 구역에서 행동위원회가 출현했다. 그곳에서는 어떻게 투쟁해야 할지, 혁명적 전망이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지에 대해 토론했다.

 

 이러한 상황에 지배계급은 방황하게 되었고, 이는 혼란스럽고 효과적이지 않은 발의를 통해 나타났다. 우파가 지배하는 의회는 좌파가 2주 전에 제시한 검열안을 토론한 후 거부했다. 프랑스 공화국의 공식적인 제도권들은 딴 세상에 사는 것처럼 보였다. 정부도 마찬가지여서 같은 날, 독일로 출국했던 다니엘 콘벤디트의 재입국을 금지하기로 했다. 이 결정은 한층 더 불만을 들끓게 했다. 5월 24일 이에 항의하기 위해 더 많은 시위가 있었고, 많은 젊은 노동자들이 시위에 합류했다. 이날 저녁 드골 대통령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는 국민투표를 제안했다. 상황을 그보다 더 잘못 파악할 수는 없었다. 이 담화문은 소귀에 경 읽기였고, 정부와 부르주아지의 전반적인 혼란스러움을 나타냈다.

거리에서 시위대는 담화문을 라디오를 통해서 들었고, 즉시 분노가 더 고조되었다. 파리 시내 전체에 그리고 몇몇 지방 도시에서 폭력적인 충돌이 일어났고 바리케이트가 세워졌다. 수많은 쇼윈도가 깨졌고 자동차가 불탔다. 이 때문에 여론의 일부가 학생들에게 등을 돌렸는데, 이들은 이제 폭도로 비춰졌다. 시위대 중에 드골주의 민병대원이나 경찰이 섞여 있었으나, 많은 학생들은 바리케이트를 세우거나 소비사회의 상징인 자동차를 불태움으로써 자신들이 혁명을 만들 거라고 믿었던 것은 분명했다. 이러한 행위는 특히, 역사상 최대의 파업 물결에 대한 당국의 한심스럽고 도발적인 반응에 대해 시위대, 학생들, 젊은 노동자들이 갖는 분노를 드러냈다. 체제에 대한 이러한 분노의 표현으로 자본주의의 상징인 파리 주식거래소가 화염에 휩싸였다.

 

 결국 부르주아지는 그다음 날에야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했다. 토요일인 5월 25일에 노동부에서 노동조합, 고용주들 그리고 정부 사이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고용주들은 노동조합이 기대했던 것 이상을 제공할 용의가 있었다. 부르주아지가 겁에 질려 있는 건 명백했다. 5월 26일 밤 그르넬협정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협정은 이 운동의 강력함에 비해 한참 미치지 못하는 도발에 지나지 않았다. 5월 27일 총회는 그르넬협정을 만장일치로 거부했다. 이 협정을 거부한 가장 좋은 증거는 5월 27일 파업자 수가 9백만으로 증가한 것이었다.

 

 5월 28일은 좌파당의 작전과 조치가 있는 날이었다. 아침에 ‘좌파 민주주의자 및 사회주의자 연합’(사회당, 과격당 그리고 서로 다른 작은 좌파그룹을 대표하는)의 총수 프랑스와 미테랑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가 보기에 권력의 진공상태가 존재하며, 그래서 자신이 공화국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오후에는 CPF의 지도자 발덱-로쉐는 공산주의자들의 참여를 포함하는 정부를 제안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혼자서 그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는 것을 막는 것이 관건이었다. 5월 29일에 큰 시위가 있었는데, CGT가 그것을 주관하고 국민정부를 요구했다. 우파들은 즉시 공산주의의 음모에 대해 경고했다.

 

 이날 드골 장군이 사라졌다. 그가 퇴위할 거라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사실 그는 독일로 날아가서 그곳 프랑스 점령군을 지휘하고 있던 마수(Massus) 장군의 지지와 군대의 충성을 확실히 하려 했다. 5월 30일은 부르주아지가 상황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려는 시도에서 결정적인 날이었다. 드골은 다시 담화문을 발표했다. ‘지금 상황에서 나는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 나는 오늘 국회를 해산한다. ……’

 

 동시에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에서 드골을 지지하는 엄청난 규모의 시위가 있었다. 부유층 구역에서, 잘 사는 교외 지역에서, 그리고 시골에서 군용트럭으로 ‘국민’이 운송되어 왔다. 겁먹은 자들과 가진 자들, 서민들, 부유층 자제들을 위한 지역 학교 대리자들, 자신들의 우월함을 의식하고 있는 지도층들, 쇼윈도가 파괴될까 조바심내는 작은 상점 주인들이 모두 한곳에 모였다. 국기에 대한 공격 때문에 격노한 참전용사들, 은폐물 아래서 지하 세계와 더불어 잠복하는 비밀경찰들 그리고 알제리 정착민들, 파시스트적인 옥시당 그룹의 젊은 회원들인 OAS와 비시(Vichy)에 향수를 느끼는 늙은 추종자들이(이 모두는 드골을 경멸하지만) 함께 모였다. 이 모든 사람들이 노동계급에 대한 자신들의 증오와 ‘질서 사랑’을 알리기 위해서 모여들었다.

 

 그 목요일부터 조업이 재개되긴 했지만, 이것은 느리게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6월 6일에도 여전히 약 6백만 명이 파업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업은 매우 분산적으로 재개되었다. 6월 10일 플랭스의 르노 작업장을 경찰이 점령했다. 경찰에게 폭행을 당한 고등학생 중의 한 명이 센강에 추락해서 익사했다. 6월 11일에는 소쇼의 푸조 작업장에 CRS가 개입해 2명의 노동자가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 전역에 다시 한번 엄청난 시위가 발생했다. ‘그들이 우리 동지들을 살해했다’며 노동자들의 결연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CRS는 소쇼 작업장을 정리했다. 하지만 조업은 그 후 10일이 지나서야 재개되었다.

 

 그러한 분노가 다시 파업의 부활(아직 3백만이 여전히 파업 중이었다)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CGT를 그 선두로 한 노동조합과 CPF를 선두로 한 좌파정당은 선거가 실시될 수 있고, 노동계급의 승리를 위해서 조업이 재개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노동조합에 의해 5월 20일에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파업 호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은 운동을 통제해서 덜 전투적인 부분에서 조업 재개를 손쉽게 이뤄낼 수 있도록 했고, 다른 부문으로 그러한 사기저하를 확산시킬 수 있도록 만들길 원했다’ 발덱-로쉐는 선거운동 동안 자신의 연설에서, ‘공산당은 질서의 당’이라고 선언했다. 사실상 부르주아적인 질서가 서서히 회복되었다. 6월 30일 결선투표에서는 우파의 역사적인 승리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라디오 및 TV 방송국이 7월 12일에 업무를 재개했다. 업무가 재개된 후 많은 이들이 해고당했다. 곳곳에서 질서가 다시 회복되었고, 특히 국민을 설득하는데 중요한 언론매체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역사상 가장 큰 파업은 CGT와 CPF의 주장과는 반대로 패배로 끝났다. 그 심각한 패배는 그 운동 동안 분노와 경멸을 샀던 당과 권위의 복귀로 확실히 증명되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패배와는 상관없이 1968년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서도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반혁명의 시대, 기나긴 암흑의 침체기를 거쳐 1968년 드디어 노동계급이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원문 ㅣ국제코뮤니스트흐름

정리 ㅣ국제코뮤니스트전망

 

<원문 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nternational-review/201804/15127/fifty-years-ago-may-68

 

*68 투쟁 50주년을 맞아 ICC(국제코뮤니스트흐름)에서는 팸플릿을 발행했다. 「코뮤니스트」에서는 토론과 함께 다음 호에 한국어 번역본을 실을 예정이다. 이 글은 토론의 연속성을 위해 ICC의 문제의식을 담은 글을 재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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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반(反)성폭력 규정

  • 코뮤니스트 반(反)성폭력 규정

     

     

    제1조 목적

     

    이 규정은 국제코뮤니스트전망에서 발생하는 성차별, 성폭력, 가정폭력 사건의 해결을 위해 필요한 제반 사항을 규정하며, 성차별, 성폭력, 가정폭력의 근절과 예방을 통해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실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정의

     

    1. 성차별이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성별과 성 정체성을 이유로 행해지는 모든 차별, 배제, 제한을 말하며, 성별과 성정체성에 관계없이 표현하더라도 특정 성에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간접차별)도 성차별로 본다. 또한, 물리적이고 언어적인 폭력과 위협 상황 안에서도 그것이 성이나 성 정체성의 차이를 바탕으로 발생한 경우에는 성차별로 본다.

     

    2. 성폭력이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모든 언어적, 정신적, 물리적, 환경적 폭력을 의미하며, 동성 간 성폭력에 대하여도 같게 적용된다. 또한, 개인의 성정체성을 본인이 원하지 않는 대상에게 폭로(아우팅)하는 행위나 성정체성에 대한 혐오를 표현하는 행위 역시 성폭력으로 본다.

     

    3. 가정폭력이란 현재 혹은 과거의 법적, 비법적(동거) 가정 구성원 사이의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또는 재산상 피해를 수반하는 폭력 행위를 말한다.

     

    4. 2차 가해란 사건 이후 피해자에게 직․간접적인 또 다른 가해와 고통을 주는 일체의 언행(언어적인 폭력, 정신적인 협박이나 물리적 강압, 집단적인 따돌림, 괴롭힘, 피해자 신변 공개, 사건과 관련 없는 피해자의 과거 경력이나 행동, 성격 등을 문제 삼는 행위 등)을 하거나 피해자와 조직이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는 것을 막거나 방해하는 행위를 포함하며, 본 규정에 따라 처리한다.

     

    5. 대리인이란 피해자가 그의 권리를 대리하도록 선임한 자연인을 말한다.

     

     

    제3조 적용 범위

     

    이 규정은 국제코뮤니스트전망 회원에게 적용되며, 피해자, 가해자, 제소자, 피제소자 어느 한쪽만 회원인 경우도 이 규정이 적용된다.

     

     

    제4조 사건처리의 원칙

     

    1. 사건처리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원칙으로 한다. 피해자 중심주의란 피해자의 권리를 확보하고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 처리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사건처리 과정에서 피해자 중심주의의 내용은 아래와 같은 내용을 포함한다.

    1) 사건의 성립과 처리 과정에서 피해자의 구체적인 진술에 바탕을 둔다.

    2) 사건의 처리 과정과 결론에서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한다.

    3) 피해자가 제2의 피해를 보지 않도록 조직이 각종의 조치와 노력을 한다.

    4) 피해자의 치유와 복귀를 목적으로 하며, 최대한 신속하게 해결한다.

     

    2. 사건의 처리는 공식적 해결을 원칙으로 한다.

    사건의 해결은 공식적 해결을 원칙으로 하며, 필요한 경우 가해자의 실명, 사건의 처리결과, 조직의 입장을 대내외적으로 공개할 수 있다.

     

     

    제5조 피해자 권리 및 보호

     

    1. 피해자는 사건의 조사와 처리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권리를 가지며, 조직과 대책위원회는 피해자에게 다음과 같은 권리가 있음을 알려야 한다.

    1) 피해자 대리인을 동반하거나 선임할 권리

    2) 특정인의 대책위원회 참여를 요청하거나 거부할 권리

    3) 필요 이상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거부할 권리

    4) 증인이나 참고인 등을 신청할 권리

    5) 임시조치를 청구할 수 있는 권리

    6) 사건 해결의 전 과정과 결과에 대해 알 권리

    7) 가해자 처리에 대해 의견을 개진할 권리

     

    2. 이 규정에 따라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대책위원회는 피해자 보호와 권리를 보장하는 데 필요한 기타의 조처를 할 수 있다.

     

    3. 대책위원회와 회원은 피해자와 그 대리인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하며, 피해자 또는 대리인의 동의 없이 신원이 노출될 우려가 있는 제반 내용을 타인에게 누설해서는 안 된다.

     

    4.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이나 처리된 이후 3항을 위반하여 피해자나 대리인에게 부당한 피해가 발생할 경우 그 사건 역시 이 규정에 따라 처리한다.

     

    5. 조직은 피해자의 치유와 복귀를 위해 노력해야 하며, 피해자의 요청이 있는 경우 상담, 치료, 쉼터 이용 등에 필요한 비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우선 지원하고 이후 가해자에게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

     

     

    제6조 사건의 성립

     

    1. 국제코뮤니스트전망(회원)에 사건을 신고/제소함과 동시에 사건이 성립되며, 사건을 접수한 조직은 사건의 조사 및 해결을 위한 대책위원회 구성을 10일 이내에 완료하여야 한다.

     

    2. 사건의 신고/제소는 피해자, 피해자의 동의하에 피해자 대리인,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다.

     

     

    제7조 적용시한

     

    제소기한은 따로 두지 않는다.

     

     

    제8조 임시조치

     

    1. 조직은 신고/제소 직후, 대책위원회가 구성되기 전까지 피해자의 권리가 훼손되지 않도록 피제소자를 피해자로부터 격리하거나 활동중단 등의 조처를 할 수 있다.

     

    2. 조직은 피해자가 1항과 같이 청구할 시 48시간 이내에 임시조치 여부를 결정하여야 한다.

     

    3. 조직은 임시조치를 결정한 때에는 이를 피해자, 피해자 대리인, 대책위원(장)에게 통지해야 한다.

     

    4. 피제소자가 조직의 임시조치 결정을 이행하지 아니하는 경우, 피제소자를 이 규정에 따라 규제한다.

     

     

    제9조 대책위원회

     

    1. (구성)

    1) 조직은 사건이 신고/제소된 직후 10일 이내에 대책위원회를 구성한다.

    2) 조직은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하여 대책위원회를 구성한다.

    3) 대책위원회에는 피해자 대리인이 참여할 수 있다.

    4) 대책위원회에는 성폭력 전문교육을 받은 자를 참여시켜야 한다.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성소수자일 경우 성소수자 전문위원을 둘 수 있으며, 대책위 성원으로 외부 전문위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5) 대책위원회는 7인 이내의 홀수로 구성한다.

     

    2. (위상과 역할)

    1) 대책위원회는 사건 처리를 위한 한시적인 기구이다. 사건의 처리란 가해자의 징계 및 피해자의 치유를 위한 일정한 조치를 완료함을 의미한다.

    2) 대책위원회 해소 이후에도, 필요한 경우 재소집할 수 있다.

    3) 대책위원회는 신고/제소된 사건 처리에 대한 제반 활동을 수행한다.

    4) 대책위원장은 직권 또는 피해자 또는 피해자 대리인의 요청으로 이 규정에 따라 가해자에 대한 징계 절차 종결 시까지 가해자와 피해자의 공간분리 및 접근금지(전화, 온라인 접속 등을 통한 접근금지 포함),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가해자에 대한 활동중단 등에 해당하는 조치를 조직에 청구할 수 있다.

    5) 대책위원회는 가해자와 2차 가해에 대한 처리 방법을 조직에 요청할 수 있다.

    6) 대책위원회는 활동내용과 결과를 피해자와 피해자 대리인, 조직에 보고한다.

     

    3. (권한) 대책위원회는 사건의 처리를 위해 모든 회원과 조직에 필요한 자료의 제출과 관련인의 소환을 요청할 수 있으며, 모든 회원과 조직은 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제10조 가해자에 대한 조치

     

    1. 조직은 조사결과에 따라 다음과 같은 조처를 한다.

    1) 가해자 교육 등 성평등에 대한 재교육 프로그램 이수

    2) 가해자의 피해자와의 공간 분리 및 접근금지

    3) 피해자의 치료, 상담, 쉼터 이용 등에 드는 비용의 부담

    4) 조직 규약에 따른 징계

    5) 기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사항

     

    2. 사회적으로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가해자의 경우 회원 여부와 상관없이 국제코뮤니스트의 행사에 참여시키지 않는다.

     

    3. 조직은 2차 가해를 한 사실이 명백할 경우 제10조에 근거하여 처리한다.

     

     

    제11조 공동해결

     

    1. 피해자, 가해자, 제소자, 피제소자 중 어느 한쪽이 회원이 아닌 경우 또는 사건의 사회적 해결을 위해 당사자의 소속집단들과 공동해결의 원칙에 따라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다.

     

    2. 조직은 가해자가 회원이 아닐 경우, 가해자의 소속집단에 가해자에 대한 처리나 징계를 요청할 수 있다.

     

     

    제12조 예방

     

    1. 성폭력의 근절과 예방,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정립하기 위하여 성폭력 예방 교육 및 성평등 교육을 신입 회원 및 회원 교육에 포함하여 실시한다.

     

    2. 조직은 연 1회 이상 소속 회원을 대상으로 성평등 교육을 한다.

     

    3. 성차별, 성폭력, 가정폭력 예방을 위해 회원이 전문교육을 이수할 시 조직에서 비용 일부를 지원한다.

     

     

     

    부칙

     

    1. 이 규정은 제정 즉시 효력이 발생한다.

     

    2. 이 규정은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의 공식적인 온라인 공간에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게시한다.

     

     

    2018년 6월 1일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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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지방선거에 부쳐 : 선거 환상’을 넘어서자.

  • 6.13 지방선거에 부쳐 : 선거 환상’을 넘어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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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의 삶과 투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2018년 <6.13 지방선거>를 맞이하여 "선거 환상을 넘어선 노동자 투쟁"을 촉구하며 코뮤니스트 입장을 다시 공유합니다. 부르주아 선거에서 노동자계급의 입장은 4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거 환상을 넘어서자.

     

     투표는 속임수일 뿐이다. 우리가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실업자이든 퇴직자이든 현재의 선거는 노동자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지난 4년 전에도, 8년 전에도 정치인들은 선거에서 수많은 약속을 해왔다. 노동자들이 조금 더 참고 함께 위기를 극복한다면 머지않아 우리의 생활과 노동조건은 좋아질 것이라 약속했었다. 말 그대로 4년 후, 8년 후 변화된 상황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나빠지는 쪽으로의 변화였지, 개선이 아니었다. 끝 모를 경제위기는 모든 노동자에게 중압감을 느끼게 했고, 그것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지불하게 만들었다. 복지와 연금은 줄어들고, 주거와 생활비용은 비싸져만 가고, 상시적인 해고 위협과 불안정한 일자리, 장기적인 실업, 불안정 노동자의 증가와 저임금은 다수의 노동자들이 겨우 먹고살 수 있는 정도만 허락하고 있다. 이것이 그들이 약속한 변화의 전부였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 그리고 1991년 부활하어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치러진 지방선거 이래 19년에서 27년이라는 기간, 여러 차례 정권이 바뀌고 정치인이 바뀌고 노동자 출신이 정치무대에 등장하기도 했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후퇴하거나 안정적인 삶을 누구도 보장받을 수 없는 매우 위험한 사회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여전히 생존권 위협과 각종 차별에 직면해 투쟁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해결책도 없으며, 투쟁할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정치인들의 약속은 이제 지키지 못할 약속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선거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른바 진보-노동정당들이 자신들에게 투표하고 집권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약속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노동자를 팔아 정치판에 뛰어들어 엄청난 재정적, 인적 자원과 시간을 낭비하면서도 투쟁을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들에게 환상과 좌절만 안겨주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르주아 선거를 ‘서커스’나 ‘환상’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선거에 참여하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정치인에게 권력을 위임했다고 생각하며, 투표행위로 자신들도 권력 일부로 참여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선출된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의 직접 통제를 받지 않으며 선거기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유권자와 분리되어 행동한다. 즉, 이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항은 몇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선거라는 이벤트에서만 적용된다는 이야기다.

     

     또한, 부르주아 선거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지배질서를 강화하거나 재편하기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를 넘어서 자본주의 지배질서 자체를 바꾸거나 착취와 억압제도를 폐지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부르주아 선거라는 무대에서는 원래 무대의 주인인 ‘대중’이 아니라 무대의 설치 관리자인 ‘국가권력’이 이를 주도하기 때문에, 그들이 정한 시간과 장소, 그들이 정한 순서와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으며, 대중들도 무대를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넘어서겠다는 정치세력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지배계급이 차려놓은 서커스 공연에 곡예사로 참여하는 것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들이 선거에 참여하면서 선거를 통해 투쟁을 확산시킨다거나 후보를 내세워 투쟁의 구심을 세우겠다는 발상 역시 또 다른 ‘환상’에 불과하다.

     

     유권자의 측면에서도 부르주아 선거판에서 투표하는 행위는 노동자계급을 자신의 주장이나 목소리 없이 정해진 규칙과 객관식 선택지 안에서의 수동적인 개인들로 축소시킨다. 개별의 투표함과 투표소 안에서 노동자계급은 작업장, 회사의 동료들과도 투쟁현장의 동지들과도 차단된 채, 자본가를 포함한 얼굴도 모르는 지역주민들과 섞여 분간하기도 힘든 1개 정당이나 정치인을 자신들의 대표로 뽑아주어야 한다. 즉, 이러한 부르주아 선거판의 투표 속에서는 그 어떠한 계급연대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투표행위를 두고 지배계급은 ‘우리 국민(주민)’들이 이 정부를 위해 투표했으니 따르라’는 것을 임기 내내 홍보하고 협박해 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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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계급의 정치는 투표소가 아닌 투쟁하는 현장에서만 가능하다!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의 민주주의 규칙과 선거제도에 복종하고 놀아나는 한, 자본주의를 결코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극적이거나 투표를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실현할 수 없다.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선거보다 훨씬 민주적이고 계급적인, 그리고 삶에 직접 도움이 되는 투쟁을 위한 파업위원회, 투쟁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한 투표(결의)와 행동에 나서야 한다. 노동계급의 미래는 노동자계급 스스로 일어서는 것에 달려있기 때문에 누가 대리해 주거나 다른 계급과의 뒤섞임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다가올 지방선거에서 선거운동과 선거정책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 동원되거나 힘을 낭비하지 말고, 투표소가 아닌 지역의 투쟁사업장과 투쟁의 현장에 가서 투쟁의 쟁점을 걸고 파업을 위한, 연대를 위한, 저항을 위한 행동을 준비하자. 고립되거나 장기간 투쟁으로 지쳐있는 우리의 노동자 투쟁에 하나의 계급으로 연대하자.


    2018년 6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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