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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러시아혁명의 교훈과 혁명적 소수의 복원

  • 러시아혁명의 교훈과 혁명적 소수의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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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러시아혁명 100주년, 지워진 혁명

     

    1917년 러시아혁명은 노동계급에 세계혁명의 길고 험난한 과정을 깨우치게 했다. 반면에 지배계급에는 혁명의 위협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했고, 혁명을 억누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게 했다. 1917~1921년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이 패배한 이후 지배계급은 노동계급을 학살하며 직접 공격했는데, 이 시기가 바로 파시즘과 반혁명이라는 전대미문의 길고 깊은 계급투쟁의 암흑기1)이다.

     

    이후 1945~1989년 미-소 제국주의 블록의 냉전 시대에는 서로 간의 대립과 경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왜곡하고 음해했다. 동유럽에서는 러시아 자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스탈린주의 국가를 10월 혁명의 연속선상에 있는 사회주의 국가라고 왜곡했고, 서구권에서는 소비에트 전체주의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면서 제국주의 간 대립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1991년 소련 붕괴 이후에는 소련의 붕괴가 ‘공산주의의 사망’, ‘맑스주의의 파산’ 심지어는 ‘노동계급 자체의 종말’을 의미한다며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인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공세로 혁명운동은 강력한 타격을 받는다. 그리고 지금은 지배계급뿐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 포섭된 노동계급 내부의 억제력으로 혁명의 불씨는 물론 일상적인 계급투쟁까지 잠재우고 있다.

     

    ‘공산주의(코뮤니즘)의 붕괴’에서 포퓰리즘의 등장까지 지난 수십 년간, 아직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좋게 봐도 세상과 관계없는 괴짜, 멸종 위기에 처한 희소 동물로 비치고 있다. 현재 노동계급의 다수는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에 대해 대부분 잊었고, 혁명 전통의 일부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망각 과정은 우연이 아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그 이전보다 생산 수단에서뿐만 아니라 소비의 대상에 이르기까지 더욱 ‘새로운 것’에 의존한다. 무엇이 ‘구식인가’, 무엇이 진정한 역사적 경험인가에 대한 왜곡은 노동계급에 기억상실을 일으킨다. 새로운 것에 대한 의존은 소비뿐 아니라 노동계급 혁명의 기억도 구식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 교훈까지 잊게 하는 데 유용했다. 이렇게 노동계급은 미래의 투쟁에 적용할 진정한 교훈까지 버리면서 자신의 혁명적 전통을 망각할 위험에 처해 있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여전히 인류의 미래와 함께하는 계급이며, 과거 투쟁에서 교훈을 끌어내 공산주의(코뮤니즘)를 위한 투쟁으로 발전시킬 역량을 가진 유일한 계급이다. 따라서 역사적 과거에 대한 교훈을 찾고 혁명전통을 계승하는 것은 지워진 혁명의 기억을 되살릴 뿐 아니라 노동계급의 현재 위기를 돌파해 낼 첫걸음이다.

     

    2. 혁명적 소수란 무엇인가?

     

    작년은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자 세계혁명의 미래’를 꿈꾸게 했던 러시아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오늘날의 계급투쟁과 러시아혁명의 교훈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혁명적 상황과 무관한 지금의 노동자투쟁은 러시아혁명의 엄청난 경험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더욱이 지금은 러시아혁명과 같이 혁명적 투쟁이 분출하는 시기가 아니라서, 그런 대중행동을 예측할 수도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들 수도 없다. 하지만 모든 정세에서 일관된 목표를 갖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혁명적 소수’의 문제는 러시아혁명의 교훈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1905년 자발적으로 출현한 소비에트를 촉진했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도 혁명적 소수의 역할이었고, 1917년 소비에트를 다시 등장하게 만든 것도, 부르주아의 도발과 함정에 맞서 참을성 있게 대중을 설득하고 계급의 원칙을 고수하며 10월 봉기의 기반을 마련한 것도 혁명적이고 계급적인 소수였기 때문이다.

     

    혁명적 소수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최종목표와 혁명의 전망을 갖게 된 인자로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부터 나오고 계급 전체의 이해관계에 복무하기 때문에 ‘계급의 일부’이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르주아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계급의 소수일 수밖에 없다. 노동자투쟁에서 계급적 소수파도 운동의 최종목표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지만, 계급투쟁에 원칙적이며 가장 활성화된 부분을 차지한다. 계급투쟁의 확산과 계급의식의 발전은 바로 이들이 얼마나 계급 안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아 투쟁에 활력을 불어넣고 상승시키느냐에 달려있다. 물론 이들이 대중행동을 대신할 수 없고, 정세와 무관하게 대중의식을 고양할 수는 없다. 따라서 대대적인 투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러한 소수가 계급투쟁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어 대대적인 투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런 투쟁이 일어나기까지 끊임없이 투쟁을 자극하고 전형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오랜만에 분출된 투쟁은 우리 희망과는 다르게 지배계급의 의도대로 좌절되거나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소수파 운동의 존재 이유이며, 단순히 소수라서 항상 다수를 추종하고 계급투쟁의 최종 승리보다 다수파가 되기 위한 운동은 혁명적 소수의 운동이 아니다.2)

     

    지금의 암울한 현실에서 러시아혁명의 교훈을 끌어내면서 혁명적 소수의 복원에 중점을 두는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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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러시아혁명에서 혁명적 소수의 역할과 교훈

     

    첫째, 혁명적 소수는 1905년 최초의 소비에트 출현에 기여했다. 소비에트는 자발적으로 출현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지는 않았다. 역사적으로 당시 자본주의는 발전의 정점에 있었고, 전 세계를 하나의 경제 및 정치 조직으로 만들었다. 이에 노동계급의 투쟁 또한 전 세계적으로 분출되었다. 러시아에서는 1896년부터 1896년, 189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직물 노동자들의 총파업, 남부 러시아 일대를 뒤흔들었던 1903년, 1904년의 주요한 파업 등 줄곧 수많은 파업이 일어났다. 이것이 최초의 소비에트 출현 배경이다. 이때 혁명적 소수였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끊임없는 정치 선동과 조직 활동이 소비에트의 출현에 크게 기여했다.

     

    소비에트는 본질에서 노동계급의 집단적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다양한 계획, 토론,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온 제안, 모든 사건의 발전, 그리고 혁명적 소수의 적극적인 개입이 소비에트를 탄생시켰다. 이 과정에는 ‘대규모 토론과 투쟁의 급격한 급진화’라는 두 가지 결정적 요인이 있었다. 여기서 대중의식의 주목할 만한 성장(자신의 규율과 성숙함을 유지하면서 질서 있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토론하고 심사숙고하여 처리하는 집단적 흐름)이 있었는데, 여기서 혁명적 소수의 역할이 중요했다.

     

    둘째, 혁명적 소수는 10년간 사라졌던 소비에트를 부활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1905년 12월 혁명의 패배 이후 소비에트를 되살리기 위한 수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서서히 쇠약해졌고 1907년 봄 결정적으로 사라진다. 소비에트의 자발적 참여와 집중을 경험한 정권이 파업 투쟁과 새로운 소비에트를 파괴하기 위해 끔찍한 탄압을 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는 1917년 부활하기까지 10년이 넘는 기간 러시아에서 사라진다.

     

    소비에트가 사라진 1905년에서 1917년 사이 소비에트는 단지 소수 투사의 정치 투쟁 지향점이었다. 혁명적 소수파들, 특히 1905년 이후 볼셰비키는 투쟁을 단호하게 밀고 나아가기 위해 소비에트 건설이라는 발상을 방어하고 전파했다. 이 소수파들은 노동계급의 집단 기억에서 소비에트의 불씨를 살려냈다. 순식간에 퍼진 2월 파업과 함께 소비에트를 세우기 위한 수많은 계획과 호소가 있었다. 볼셰비키는 오랜 기간 소수파들에 국한되어 왔던 소비에트라는 발상을 투쟁하는 대중 안에서 광범위하게 전파하고 이끌었다. 볼셰비키가 소비에트의 출현에 기여한 것은 소비에트 형성을 위한 중개 조직의 역할이 아니라 정치 투쟁을 통해서였다. 그들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해 정치적으로 투쟁했다. 1915년 레닌은 제국주의적 반동적 전쟁으로 나가는 군수사업위원회 참여를 반대하면서, 파업위원회의 선거, 전 러시아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를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셋째,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 혁명적 소수는 10월 봉기의 기반을 마련했다. 볼셰비키는 1917년 6~7월 소비에트의 위기와 대중들의 이반이 나타났을 때, 부르주아의 도발과 함정에 맞서 참을성 있게 대중을 설득하고 계급의 원칙을 고수하며 10월 봉기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 사건은 가장 선진화된 노동자들의 대량학살로 이어져 완전히 사기가 꺾이는 것으로 귀결될 수도 있었다. 볼셰비키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뒤에 숨지 않고 노동자들의 시위에 동참하면서 왜 지금 시기가 권력을 쟁취하는데 무르익지 않았는지 설명했다. 이것은 당시에 전혀 대중적이지 않았고, 심지어 독일 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중상모략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코르닐로프 장군의 쿠데타 시도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풀뿌리 소비에트 조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소비에트의 부활을 위한 투쟁에 앞장섰고, 러시아 전역의 소비에트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면서 계급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 열정적이고 친밀하고 인내심 있는 볼셰비키당의 토론3)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안타깝게도 1919년 독일 베를린 노동자들과 스파르타쿠스는 이런 함정을 피하지 못했고,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살해당한다.

     

    넷째, 볼셰비키당의 오류 : ‘소비에트와 국가 문제’에서 볼셰비키당은 국가를 끊임없이 강화했다. 소비에트 국가는 혁명을 통해 부르주아지를 배제했지만, 프롤레타리아트만의 국가가 아니라서 소농계급, 쁘띠부르주아지 및 여러 중간계층을 포괄했다. 이 계급은 필연적으로 자신들의 편협한 이익을 방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로 가는 길을 방해했다. 혁명의 일차적 과제는 이러한 쁘띠부르주아 사고방식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전과 세계혁명의 지체는 전직 차르 관료 재고용과 자본주의적 방식을 도입하게 했고, 프롤레타리아트에서 새롭게 나타난 관료를 포함하여 자신을 소비에트 국가와 동일시하는 관료 계층을 형성케 한다. 결국, 관료주의의 성장과 국가기구의 강화는 노동자권력인 소비에트를 제압했고, 국가의 이익이 노동계급의 이익보다 우선하기 시작한다.

     

    국가의 강화는 볼셰비키당의 흡수로 이어진다. 레닌은 볼셰비키당과 중요한 당원들이 정부의 관여한다면, 스스로 그 체계에 갇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세계적인 관점을 상실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1918년 7월 소비에트 정부가 최종적으로 볼셰비키화 되자 볼셰비키당은 온갖 종류의 기회주의자들과 출세주의자들, 전직 차르 관료들, 멘셰비키 전향자들로 들끓었다. 그들에게 당은 출세와 취업의 수단이었다. 그 후 볼셰비키당은 수많은 숙청을 통해 이런 유입과 싸웠지만, 효과가 없었다. 왜냐하면, 강력해진 국가기구와 볼셰비키당의 통합 문제의 본질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당의 독재로 이론화되었고, 볼셰비즘은 당국가로 변화한다. 1919년 3월, 제8차 당 대회에서는 소비에트의 정치적 장악과 당의 지배를 결정했고, 카메네프는 “공산당(볼셰비키당)은 러시아의 정부이다. 60만 명의 당원이 러시아를 지배한다.”라고 선언했다. 이어서 1920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제2차 대회에서 지노비예프는 "모든 의식적인 노동자는 노동계급의 독재는 계급의 전위인 공산당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결국, 볼셰비키당은 프롤레타리아계급 일부로서 전위 역할을 포기했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전위로서 볼셰비키당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이 아무리 어려웠다 해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국가기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끊임없는 투쟁과 토론, 참여의 힘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기구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노동대중의 욕구를 반영하며, 토론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게 하는 진정한 계급의 기구이어야 한다.

     

    다섯째, 우리는 러시아혁명의 교훈에서 혁명적 소수-볼셰비키를 비판하는 또 다른 혁명적 소수에 대해서도 정확히 비판해야 한다.

     

    먼저 러시아혁명의 실패가 전적으로 볼셰비키당 때문이었다는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이다. 그것은 러시아에서 소비에트가 몰락하고 볼셰비키당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문제였지만, 세계혁명 패배의 한복판에서 볼셰비키의 선택지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간과한 주장이다. 비록 당이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을지라도, 당이 평의회(소비에트)와 함께 혁명의 필수적인 도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단지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와 조직적으로 함께하지 않았을 때 반드시 실패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는 내전 동안 급감하는데, 전쟁으로 인한 견딜 수 없는 경제적 곤궁과 시골로의 많은 프롤레타리아의 탈출은 소비에트를 약화했고, 1921년 권력의 실제 중심에서 소멸로 이르게 된다. 이때 볼셰비키당은 세계 자본주의에 대항한 세계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중단된 상태에서, 특히 독일혁명 실패에 따른 고립으로 혼자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실제 상황이자 결과였으며, 그 안에서 볼셰비키는 수많은 오류가 있었고, 결국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만약 세계혁명이 그들을 도와줬다면 그런 오류들은 범하지 않거나 바로 잡을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교훈은 앞으로 모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혁명적 소수는 국제적 전망을 하고 국제적 수준에서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을 경험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당을 불합리한 것으로 생각하는 평의회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평의회(소비에트)가 아닌 모든 정치조직은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이라고 비판했다. 평의회주의자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계급의 조직인 평의회(단일조직)를 제외한 별도의 정치조직을 거부하게 된다. 대중행동과 계급의식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평의회와 당의 차이는 좁아진다. 이때 모든 노동자조직을 평의회로 통일시키는 것은 계급투쟁을 확산시키며 계급 중심성을 강화한다. 하지만 대중행동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계급의식이 퇴조할 때, 평의회는 소멸하며 대중은 자기방어를 위해 분화한다. 이때 계급의식을 방어할 정치조직을 거부한 평의회주의는 파편화되거나 타락한 대중운동에 영합하여 기회주의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평의회주의자들이 처음 문제의식을 느꼈던 볼셰비즘에 대해 너무 지나친 적대감을 표현한 결과이자 그에 대한 반대로 대중의 '자발성'과 '평의회 민주주의'를 절대화했기 때문이다.

     

    평의회주의자들은 또한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 비판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첫 조치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실현. 즉, 노동자평의회의 (국제적) 권력 장악을 위한 정치 경제적 조치가 아니라, ‘해방구’로서의 공산주의적 경제 조치의 채택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부르주아지도 ‘민주적 통제’, ‘자주 관리’의 이름으로 그들이 주장하는 미시적 개혁을 한다는 점을 간과했다. 평의회주의의 위험은 바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역사적 과업(세계혁명)에 대한 관점을 상실하고 하나의 공장, 하나의 지역(국가)에 갇혀 패배한다는 점이다.4) 평의회주의자들의 볼셰비키 비판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당과 계급, 계급의식'에 대한 총체적 인식과 세계혁명의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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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다시 혁명적 소수의 복원을 위해

     

    우리는 한 시대, 한 계급의 혁명을 언급할 때 한편의 무용담이나 화석화된 경전으로 비치는 것을 경계한다. 그것은 혁명의 기억을 지우거나 왜곡하는 자들이 바라는 것이다. 역사는 일어날 것 같은 상상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다. 러시아혁명은 실제 일어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역사이자, 계승해야 할 혁명 전통이다.

     

    100년 전 혁명을 돌아보며 필자는, ‘혁명의 기억’이 지워지는 과정과 현재도 계속되는 지배계급의 ‘거짓 환상’ 공세가 같은 맥락임을 지적했다. 이러한 공세는 너무 오랜 기간 지속하였고 지금의 노동계급은 자신의 유일한 혁명의 기억, 미래에도 필요한 혁명적 전통까지 망각할 위험에 놓여있다. 그래서 과거 투쟁에서 교훈을 찾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지금과 같은 계급투쟁과 혁명운동의 극심한 침체기에 그것은 더욱 혁명적/계급적 소수의 책임이다.

     

    혁명적 소수의 복원도 바로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혁명적 실천의 복원은 지배계급의 의도대로 과거를 지우고 혁명적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왜곡되고 지워졌어도 과거 혁명으로부터 교훈을 찾고, 혁명적 전통을 복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기억에서 러시아혁명이 지워진 것은 지배계급의 공세 때문이지만, 혁명적 소수의 책임도 크다.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거짓 환상’과 다른 한 편의 ‘가짜 사회주의’와 철저히 단절시키지 못했고, 계급투쟁에서 ‘세계혁명과 코뮤니즘’이라는 최종목표를 분명히 하면서 전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 년간의 후퇴와 패배의 연속은 혁명적 소수를 계급투쟁과 계급의식 발전에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는 작은 점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프롤레타리아트의 미래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지금의 극심한 침체는 낡은 운동의 몰락과정에서 겪어야 할 필연적 고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며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 이제는 실패의 유산을 반복하지 말고 새로운 승리를 준비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1919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 낡은 운동인 ‘사회-애국주의 반역자와의 단호한 단절’로부터 시작했듯이, 낡은 운동과 지금 당장 단절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필자는 낡은 운동과 단절한 혁명적 소수의 운동을 혁명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과거 운동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코뮤니스트 운동’이라 규정했다.

     

    첫째, 새로운 코뮤니스트 운동은 총체적이어야 한다. 모든 것을 정치사상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고 여러 운동과 다양한 대중행동과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더욱 창조적이고 풍부하게 발전해야 한다. 코뮤니스트 운동은 정치뿐만이 아니라 생산과 소비, 문화와 심리 등 인류의 삶을 규정하는 모든 영역으로 문제의식을 확장하여, 자본주의 가치법칙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넘어설 수 있는 총체적 운동이어야 한다.

    둘째, 코뮤니스트 운동은 혁명적 계급의식의 집단적이고 역사적인 산물이다. 따라서 개별 활동의 연합이 아니라 ‘집단적 활동’, ‘지속성’, ‘실현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 혁명 강령과 코뮤니스트 노동자의 집단적 존재가 이를 가능케 해주며, 이것은 코뮤니스트 조직의 생존 기반이자 물질적 힘이다.

    셋째, 코뮤니스트 운동은 조직에서도 코뮤니즘 원리가 실현되어야 한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모두가 기여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코뮤니스트조직은 과거 왜곡된 전위당 노선이나 스탈린주의 공산당들과 같이 일방적 지도체제와 획일적 성원 규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식의 균질화’에 기반을 두고 성원들의 자발성, 다양성, 창조성을 극대화하는 조직체계를 가져야 한다. 또한, 모든 조직 운영은 총회에 책임을 지는 직접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며, 내부 소통에서는 이론과 지식, 정보에 대한 정직한 표현과 전달, 그리고 토론에서 상호 존중과 모욕 금지, 차별금지를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반성과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이형로, (코뮤니스트 5호, 2017 . 4)

     

    여기에 더해, 그동안 계급 운동을 왜곡하고 새로운 운동과 주체의 성장을 가로막아온 운동 사회 내부 모순과의 단호하고 전면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또한, 코뮤니스트는 프롤레타리아트가 현실에서 느끼는 고통과 차별에 대한 ‘집단적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 피지배계급은 자본주의 생산관계 속에서만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계급 내부에서도 다양한 차별과 억압구조 아래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주체와 새로운 운동은 바로 이러한 공감과 투쟁을 통해 내부모순을 극복하면서 성장할 것이다.

     

    5. 혁명적 소수의 기본임무는 분파 활동

     

    노동자운동과 계급을 위한 교훈은 레닌이 말한 것처럼, “노동자운동의 역사가 조직의 역사”라는 것이다. 오늘날 아무런 원칙 없이 ‘계급정당’을 선언하거나 퇴행적 강령(정치원칙)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혁명조직’을 자임하는 것이 유행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패한 과거의 반복이거나 퇴행하는 노동자운동에 따른 결과이다. 러시아혁명과 코민테른의 역사에서 우리는 혁명적 소수의 진정한 태도를 볼 수 있다.

     

    제 2 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자본주의 체계 속으로 통합(자본주의와의 어떠한 혁명적인 단절 없이도 사회주의를 향해 평화적으로 진화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개혁주의적 흐름)되어 갈 때,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새로운 조건들을 최초로 인지했던 ‘좌파’ 흐름(분파)이 그것이다. 러시아의 레닌, 독일의 로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의 판네쿡, 이탈리아의 보르디가는 러시아의 볼셰비키, 네덜란드의 트리뷴그룹 등으로 활동해야 했지만, 이들 중 누구도 고립되어 활동하지 않았다. 기회주의 흐름이 제2 인터내셔널 전역으로 퍼지자 그들은 각각의 정당들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조직된 분파로써 활동했다. 1920년대에는 타락해가는 제3 인터내셔널로부터 분리해 나왔던 코뮤니스트좌파들의 국제적인 분파 활동이 있었고, 1928년 이후 스탈린주의 반혁명세력에 맞서 투쟁해 온 수많은 코뮤니스트들의 공헌이 있었기에, 소수이지만 오늘날 진정한 맑스주의의 살아있는 연속성이자, 미래의 인터내셔널(세계혁명당) 형성에 기여할 혁명세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분파의 역할은 무엇보다 살아있는 사건을 통해 간부를 교육하고 이러한 사건의 의미와 철저하게 대면하는 것이다.··· 분파의 역할 없이 러시아 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분파 없이 레닌 자신도 책벌레로 남아 혁명지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분파는 계급조직을 위해 계속해서 일하는 유일한 역사적 장소이다.” << 4/3 인터내셔널을 향하여>>, Bilan(빌랑), (1933. 11)

     

    그러므로 혁명적 소수는 여기서 후퇴를 멈추어야 한다. 모든 낡은 실천과 조직을 멈추고 다시 ‘혁명’으로 돌아가야 한다. 낡은 운동의 복원이 아니라 혁명적 전통의 복원을 통해 다시 한번 제대로 된 운동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그것의 시작은 혁명적 분파 형성과 활동이다.

     

    현실에서 원칙을 지키며 ‘투쟁하는 노동자’, 계급의식을 갖고 실천하는 ‘의식적 노동자들과 함께 다시 한번 소수파 운동, 그 고난의 길에서 투쟁하자.

     

    노동계급 자기해방의 최종목표, 세계혁명과 코뮤니즘의 목표를 분명히 하는 혁명적 분파 운동으로 전진하자.

     

    혁명 강령,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혁명적 실천에 기반을 둔 분파 형성, 혁명조직 건설로 나아가자.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이 글은 <러시아혁명 100주년 혁명운동 평가와 전망 토론회> 발제문을 보완하여 편집한 글입니다. 

     

     

    <주>

     

    1. 빅토르 세르쥬(Victor Serge)의 말에 따르면, 1930년대는 "그 세기의 자정"이었다. 혁명 물결의 마지막 파고- 1926년 베를린에서의 총파업, 1927년 상하이봉기-는 이미 소멸하고 말았다. 공산당들은 민족수호의 정당이 되어 버렸고,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적 테러는 혁명운동이 최고점에 도달했었던 나라들에서 가장 극심했으며, 자본주의 세계 전체가 또 다른 제국주의적 대학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혁명적 소수들은 추방과 억압과 증가하는 고립에 직면해야만 했다. 계급 전체가 사기저하와 부르주아의 전쟁이데올로기에 침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계급투쟁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2. "계급에 대한 당의 궁극적 목표는 계급을 혁명적 의식으로 무장시키고, 그들이 다수가 되어, 계급 자신의 힘으로 혁명을 만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상시기(계급의식이 충분히 성숙되어 있지 못하고 균질하지 못했을 때) 당의 역할은, 이러한 상태의 계급 안에서 다수를 획득하거나 국면적 인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수가 되더라도 혁명의식으로 무장하지 않은 계급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노동계급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당장 인기와 계급 대중의 다수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판단하여 “미래에 계급이 얼마나 혁명적으로 변화되었나?”로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계급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것도 혁명적 정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 일상시기 또는 침체기에 혼란스러워하는 다수의 계급의식과 타협하는 영향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수에 대한 영향력을 잃더라도, 혼란에 대해 단호하게 단절하도록 밀어붙이는 것이 노동계급에 진정으로 공헌하는 길이다. 혁명조직이 노동계급에 근거하고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끈기 있는 인내만이 아니라, 오히려 조직의 모든 활동의 방향이 진정으로 노동계급을 변화시키고, 계급적 단결을 도모하고, 코뮤니스트 혁명에 실질적인 공헌을 하는 것에 있다." <<사노위 실패의 교훈과 혁명당 건설 투쟁의 연속성>>, 이형로, (마르크스21 제11호, 2011.9)

     

    3. 역사 속에서 토론의 “예술” 혹은 토론의 “과학”의 가장 모범적인 예는 1917년 2월에서 10월까지 있었던 볼셰비키당의 토론이다. 각종 낯선 이데올로기가 대량으로 끼어드는 상황에도 이 토론들은 열정적이지만 매우 친밀한 분위기에서 진행됐으며, 모든 참가자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토론들은 트로츠키가 정당의 “재무장(再武裝)”이라고 불렀던, 승리를 위해 혁명과정의 변화가 꼭 필요하다는 정치적 중재를 가능케 했다.

    “볼셰비키적 대화”가 가능하게 하려면 모든 토론이 같은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푸르동(Proudhon)에 반대하는 마르크스의 논쟁은 “파괴적인” 성격의 논쟁이었다. 그에게 있어 푸르동의 이론은 노동운동의 의식 발달을 방해하는 걸림돌이므로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려 없애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마르크스는 헤겔과 유토피아 사회주의에 대항하는 거대한 싸움 중에도 그가 인류의 영원한 공동유산으로 여긴 헤겔과 푸리에(Fourier), 생 시몽(Saint Simon)과 오웬(Robert Owen)을 향한 무한한 존경심을 결코 잃지 않았다. 엥겔스는 헤겔 없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없었을 것이며, 유토피아주의자 없이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사회주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토론 문화 : 계급투쟁의 무기>>, ICC, )International Review no.130 - 3rd quarter 2007)

     

    4. (필자) 평의회주의는 1930년대 평의회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발생한 당과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오류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평의회주의는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규정하였고, 세계혁명이 아닌 '자주 관리'사회주의를 주장했다. 특히 평의회가 아닌 정치 조직의 모든 형태는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판하며, 당 조직 자체를 거부했다. 이러한 오류는 1920년대부터 시작된 반혁명의 조류에 저항하는 데 장애물이었고, 결과적으로 혁명의 퇴조기에 생존해야 하는 코뮤니스트들에게 파편화라는 재앙을 겪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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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삼성공화국-최고 권력과 싸우는 투사들 :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김민수 조합원 인터뷰

  • 삼성공화국-최고 권력과 싸우는 투사들 :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김민수 조합원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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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이재용과 박근혜 재판 판결은 한국 사회가 "삼성 공화국"임을 증명했습니다. 삼성 권력이 사법 판결도 좌우하는데, 이렇게 거대한 권력에 맞서 직접 싸워오신 주체로써 느끼는 현실은 어떠신지요?

     

    A. 삼성의 탄압이 있는 동안 법원은 과연 조사할 마음이나 있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2014년도 염호석 열사의 시신탈취에 삼성이 개입한 정황들이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당시에 염호석 열사 유골 탈취를 위해 경찰 3개 중대를 끌고 온 경비과장을 향해 저는 “왜 세월호부터 여기까지 가족이 죽어 슬픈 유족들만 따라다니며 괴롭히느냐, 그 게 경찰이 할 일이냐” 고 크게 항변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삼성과 결탁한 (정부의) 경찰 앞에 열사의 유골함까지 모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지나고 나서 보니 작년 촛불에서 드러난 삼성의 박근혜 정부 로비 사실을 확인하면서 자본이 정부를 지배하는 삼성공화국은 모두 사실 이었다는 것을 알고 치를 떨었습니다.

    염호석 열사의 묘는 아직도 동해안의 모레 한 줌만 들어있는 가묘입니다. 반드시 저들을 처벌하고 열사의 시신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사의 시신부터 찾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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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호석 열사의 유서>

     

      염호석 열사 시신탈취 사건 경과

       - 5월 17일 : <삼성> 염호석 열사 부친 접촉

       - 5월 18일 : <삼성> 부친 회유, 시신 값 6억

                                        <경찰> 1차 대규모 경력 투입, 시신 탈취

    - 5월 20일 : <경찰> 2차 대규모 경력 투입

                 <경찰, 친부> 유골함 탈취

     

    Q. 최근 폭로된 노조파괴 문건으로 이재용 부회장을 다시 구속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는데, 막대한 권력을 가진 삼성이 노조파괴까지 하면서 반노동자적, 반인권적 경영을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삼성 서비스 지회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직접 경험하신 삼성의 노조파괴에 대한 사례를 말씀해 주세요.

     

    A. 사내유보금 늘리기와 그룹 경영 3대 세습 구조가 반노동, 반인권 경영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노동조합이 생기기 전부터 한 회사 내에서 각 셀로 무리를 구분하여 서로 경쟁 또는 반목을 하도록 유도하는 경영을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전국의 많은 삼성노동자들을 하청비정규 노동자로 다시 분류하여 노동자 간 계급을 구분하고 서로를 반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노조를 세우니 각종 불이익을 주었습니다. 삼성전자서비스 전산에서는 수리기사의 제품별 수임 능력이 A, B, C, D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모든 직원들에게 티비, 냉장고, 모니터 등 콜 수임 능력을 모두 A로 규정해서 유지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확인해보니 조합원들은 모두 C나 D등급으로 분류되어 있고 비조합원만 모두 A등급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사측은 아니라고 발뺌했지만 조합원만 낮은 수임등급을 주고 일감 줄이기를 하여 고사작전을 펼친 게 분명했습니다. 결국, 투쟁으로 제자리에 돌려놓았지만, 그 외에도 많은 사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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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뇌물공여, 노조파괴, 산업재해 등 헤아릴 수 없는 삼성의 범죄행위는 단순히 윤리적,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절대권력을 가진 재벌의 잘못된 사회 지배, 노동자 통제 시스템의 문제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현재와는 반대로 사회가 기업을 지배하고, 노동자가 일터를 통제해서 스스로 안전과 인권을 보장받아야 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무엇보다 학교에서 노동법 한번 배워보지 못하고 사회에 나오고, 아침 일찍 등교해 밤늦게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며 자연스레 회사의 장기노동시간을 예비체험 시키는 교육구조 개혁이 중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주입식 교육과 수동적 행태 속에 모두 예비노예가 된 상황이라 노동조합을 설립하기도 힘들고, 지속시키기도 힘들고, 조합원의 생각이 사측과 흡사해서 함께 좌절을 겪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교육을 먼저 바꾸고 그 바탕 위에 노동조합을 세우는 것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약한 처벌규정이 조합 활동에 큰 걸림돌입니다. 삼성과 같이 사내유보금이 많은 대기업은 벌금에 연연하지 않고 노동자를 납치, 감금, 해고, 폐업 등 수단 가리지 않고 탄압을 합니다. 이번 노조파괴 문건을 계기로 더 강력한 처벌 규정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Q. 박근혜를 연인원 1,700만 명이 넘는 촛불 투쟁이 계기가 되어 끌어내렸듯이, 삼성도 전 사회적인 투쟁이 있어야 작은 승리라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싸워오셨습니다만, 삼성의 태도로 봐서는 앞으로도 긴 싸움이 계속될 것 같은데, 오랜 기간 싸우시면서 바뀐 상황(삼성, 정부, 노조)은 있습니까?

    한국 사회에서는 삼성의 사회적 책임보다는 긍정적인 기업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싸움의 과정에서 삼성의 본질은 얼마나 폭로되었나요?

     

    A. 박근혜 투쟁 때 삼성전자서비스지회는 ‘이재용 구속’이라는 전단지를 만들어 광화문 광장에 오는 분들에게 아주 많은 양을 배포했습니다. 그 결과 이재용도 구속하라는 구호가 촛불 투쟁 속에서 묻어나왔습니다. 결국, 박근혜와 이재용은 함께 구속되었지만, 아쉽게도 박근혜만 감옥에 있고 이재용은 풀려났습니다.

     

    삼성은 무노조경영을 신화라고 불렀던 기업입니다. 6천 번에 걸친 사상 초유의 헌법 유린이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이를 가만히 덮어두고 가면 안 됩니다. 이재용을 처벌하고 3대 세습을 반대하며, 그간 반도체공장의 산재노동자와 각 현장의 산재 은폐, 삼성물산의 폭력적인 제주 해군기지 건설과 그 건설자재인 철근이 세월호에 무리하게 실렸던 모든 정황까지 밝혀내고, 대한민국의 헌법은 삼성의 것이 아닌 노동자와 빈민의 힘에서 나오는 것임을 증명해 내야 합니다.

     

    Q. 한국사회에서 삼성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삼성 노동자의 문제는 전체 노동자의 문제이고, 삼성의 노조파괴 문제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민주노총 조합원을 비롯한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에게 "삼성 서비스 지회 투쟁"에 대해 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십시오.

     

    A. 염호석 열사는 저 뜨는 정동진의 해처럼 지회가 빛나길 기도하며 떠나갔습니다. 가는 길까지 함께했던 조합원의 아버지 병원비를 걱정하며 떠나갔습니다. 삼성이 6천 번의 돌을 던졌지만,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았던 것은 바로 염호석 열사 정신입니다. 누군가를 구분하지 않고 만인을 위해 희생하는 정신이 바로 그 정신이라 생각합니다.

    자본가와의 대투쟁 앞에 동지들의 사소한 아픔은 잠시 접어둔다는 전제를 깔고 서로를 혐오하고, 노동자 간에 차별을 두고, 빈민, 장애, 여성, 성소수자 등을 차별, 혐오한다면 우리가 모두 조직화 되어도 해방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곧 무너질 따름입니다. 우리 서로가 서로를 차별하지 않고 서로를 위해 더 희생할 때 비로소 해방세상은 오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이 곧 열사정신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Q.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동안 삼성 서비스 지회 투쟁에 연대했던 분들께도 한마디 해주십시오.

     

    A. 연대가 살아있는 한 우리는 영원한 승자이며 저들은 패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무노조경영은 무너졌었고 우리는 이겼었습니다. 함께 도와주신 모든 연대 동지들께 감사드립니다.

     

    그 정신 잊지 않고 몸이 다할 때까지 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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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탄생 200주년 기념 토론회 「자본주의와 맑스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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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스 탄생 200주년 기념 토론회

    「자본주의와 맑스주의자」

     

    ▶ 일시 : 2018년 12월 8일(토요일) 오후 2시 ~ 5시

     

     

    ◆ 사회 ┃ 한형성

     

    ◆ 발제

     

    21세기 맑스주의??? ┃ 원영수

    자본주의 쇠퇴기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 오세철

    계급투쟁 100년과 노동자계급의 험난한 길 ┃ 이형로

    현 시기 격화하고 있는 제국주의 패권쟁투와 사회주의자의 임무 ┃ 양효식

    미제국주의에 맞선 북한식 사회주의의 선택 ┃ 배성인

     

    ◆ 토론 ┃ 김진업, 김종원, 김충석, 최규진

     

     

    주최 : 사회실천연구소, 혁명운동 평가와 전망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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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복간호] 김수행 선생과 “실천”으로 다시 만나기

  • 김수행 선생과 “실천”으로 다시 만나기

     

     

     김수행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지 3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맑스주의자이었던 그는 강단의 학자 역할에 머물지 않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현장이면 어디든 달려가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연구자와 활동가가 한데 어우러져 노동자 관점에서 연구하고 실천하는 연구소"를 만들자는 취지와 만나 지금의 『사회실천연구소』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실천』지는 “맑스주의 이론 진영의 동향을 점검하고 좌파 저널에 실린 해외논문과 세계사회주의 정치운동 진영의 주요 기관지 등을 소개하고 평가하여 한국 맑스주의 이론진영에 튼튼한 밑바탕을 제공”하기 위해 발간했습니다.

     긴 시간을 돌아 다시 『실천』지를 복간하는 시점에서 김수행 선생의 ‘특별한 실천’이 새겨져 있는 사회실천연구소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가 왜 다시금 “실천”을 강조하게 되었는지, 확인하고 토론하기 위해 과거의 동료이자 영원한 동지인 오세철 선생과 함께 그분을 다시 만나러 갑니다.

     

    다시 김수행 선생을 만나다

     

    Q : 올해가 68혁명(또는 68투쟁) 50주년입니다.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오세철 선생에게 68년 반란의 물결은 실제 현실에서 존재했는지요? 존재했다면 어떤 영향을 받으셨나요?

     

    A : 1968년은 미완의 4.19혁명, 5.16쿠테타 이후 유신으로 가는 길목이었어요. 당시 베트남 전쟁, 유럽의 68운동, 남미의 민족해방운동의 간접적인 영향은 있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유럽과 같은 반(反)관료주의 등의 아래로부터의 자생적 학생운동, 노동운동은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1965년 한일회담 반대 같은 민족주의 경향, 박정희 군사독재에 대한 반대투쟁, 월남(베트남)파병 반대 등에 간접적 영향이 있었죠.

     

    Q : 세계적으로는 68혁명으로부터 시작하여, 국내적으로는 박정희 유신 체제에서 군사정권까지 격동의 20~40대를 보내셨는데, 당시의 (급진적, 실천적)지식인과 지금의 역할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A : (1963~1983) 이 시기는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 시기였어요. 그 중 1979년 말에서 1980년 봄까지 짧은 민주화 기간을 빼고, 이 시기의 지식인 운동은 군부독재 반대(타도) 투쟁에 집중하면서 민주투사의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은 지식인 운동이 부르주아 세력에 흡수되어 부르주아 세력에 대한 비판적지지 역할을 하고 있고, 일부는 사회주의, 코뮤니스트 운동으로 분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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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4. 19혁명 49주년 - 교수․연구인 시국선언 (2009년 4월)

     

    Q : 같은 시대를 보낸 김수행 선생과 오세철 선생 두 분은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처음 만나셨습니다. 코뮤니즘이라는 목표에서 같은 곳을 향하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오셨는데 어떤 계기로 사회실천연구소까지 함께 하시게 되었습니까?

     

    A : 2004년 명예퇴직 후 실천 운동에 전념했어요. 맑스주의 연구자들과 『사회이론연구소 : 빛나는 전망』을 만들었고, 혁명적사회주의 운동 활동가들과 『사회주의정치연합』을 만들었고, 『맑스주의 대학원』을 설립하여 젊은 맑스주의 연구자와 활동가들을 양성하자는 운동도 시작했죠. 그동안 한국에서 맑스주의는 분과학문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사회과학의 분과학문에 갇혀있었고, 역사학을 포함한 보다 넓은 지평과 만나지 못하고 있었기에 맑스주의 종합연구소를 만들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회과학과 역사학(최규진), 그리고 인문학이 결합한 연구소, 연구자(맑스주의 경제학자로서의 김수행)와 실천가(사회주의자로서의 오세철)가 결합한 연구소를 만들기 위해 오세철, 김수행, 최규진이 깊은 토론을 거쳐 『사회실천연구소』의 설립을 결정합니다. 김수행에게는 최규진과 내가 사회실천연구소에 함께 할 것을 제안했는데, 에피소드로 사당역에서의 대취사건이 있었고 김수행의 제자들은 반대했지만 함께 하게 되었죠.

     

    “ 더 중요한 것은 2006년 11월 사회실천연구소 설립제안이 있기 전, 종합 사회주의연구소를 향한 주제를 놓고 김수행과 나 그리고 최규진이 나눈 토론이었다. 나와 최규진은 연구소 설립문제를 여러 해 고민해 온 사이인데, 사회과학대학원 설립과 맞물려서 김수행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한 출발의 전제였다. 김수행은 흔쾌히 동의했고, 그 날 우리는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셨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술 이야기가 나왔는데, 김수행은 나처럼 자주 많은 양의 술을 마시지는 않지만 애주가이고 술맛나는 자리에서는 대주가가 된다. ” 『술, 학문, 예술, 혁명의 사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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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013년 여름 김수행 교수 자택에서의 사회실천연구소 수련회가 끝난 후

     

    Q : 사회실천연구소를 만들 때, 그리고 연구소 주요 성원들이 참여한 사회주의노동자연합과 국가보압법 탄압사건이 있었을 때, 김수행 선생의 도움(역할)이 있었다고 하는데, 비화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죠.

     

    A : 책에 쓴 내용대로입니다.

     

    “김수행은 경상도 사나이라 말수가 적지만 한마디 하면 그 뜻이 확실하다. 여기서 처음 밝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을 결성하고 사무실을 얻어야하는데 목돈이 없었다. 연구소를 설립하면서 사무실 보증금에 돈을 보탠 적이 있는데, 그 일부를 차용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김수행을 만났다. 얼마를 빼 갈테니 그 부분을 메꿔달라고 했다. “그래 알았어”라고 한마디 했다. 우리는 그런 사이다. ” 『술, 학문, 예술, 혁명의 사중주』

     

    Q : 김수행 선생과 함께했던 초기부터 지금까지 10여 년 연구소 활동을 돌아보면서 가장 긍정적인 것은 무엇이었고, 가장 아쉬운 것은 무엇입니까? 같은 질문을 김수행 선생께 한다면, 어떤 대답을 하셨을까요?

     

    A : 긍정적인 것은 5~6년간의『실천』지 발간입니다. 맑스주의 관련 주요 글을 망라한 의미 있는 실험이었습니다.

    아쉬운 것은 연구소 안에 활동가 부족으로 인한 「사회적 실천」의 빈곤이었죠.

     

    김수행이 답했다면, 긍정적인 것은 연구자들의 단합과 헌신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아쉬운 것은 『사회과학대학원』의 실험에 역부족이었다는 것 아닐까요. 『자본론』수강생이 70% 이상이었고, 나머지는 사회과학과 문학이었으니까...

     

    Q : 오세철 선생께서는 친구이자 동료이자 동지인 김수행 선생과 각별한 사이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김수행 선생의 인간적인 모습, 일상에서 사람과 운동을 대하는 모습은 어떠셨습니까?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시면 소개해 주세요.

     

    A : 하나는 사노련 재판 때의 모습입니다."

     

    국가보안법으로 걸린 「사노련」재판 때에도 변호인 측 증인으로 참석해 판사와 검사에게 호통치며 일갈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법원 앞에서 열리는 기자회견과 집회에 꼭 참석하여 힘차게 발언하는 김수행의 실천은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큰 힘이 된다. 그는 서슴지 않고 “나 같은 사람도 잡아가야지” 한다.” 『술, 학문, 예술, 혁명의 사중주』

     

    두 번째는 사회실천연구소에서의 모습입니다. 연구소의 『자본론』 강의 후 자주 가는 ‘을지로 골뱅이’에서 있었던 뒤풀이 에피소드인데요. 강의에 참석한 수강자들과 남궁원, 김수행, 나 이렇게 뒤풀이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김수행은 나에게 처음으로 “나 공산주의자야” 라고 고백했어요. 그러니까 2014년경, 당시 72세의 김수행이 맑스주의자, 공산주의자(코뮤니스트)로 커밍아웃 한 것이죠.

     

     

    다시 김수행 선생을 부르다

     

    Q : 올해는 맑스 탄생 200주년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세상(코뮤니즘)을 지향하고 현실에서 투쟁하는 것은 맑스주의자로서 평생의 과제이자 삶의 동인(動因)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분이 추구하고 실천하던 맑스주의는 어디에서 만나고, 어느 점에서 다른가요?

     

    A : 맑스주의자로서의 사상이론(특히, 『자본』과 관련하여)의 기본은 둘이 같습니다.

    그리고 혁명가로서의 맑스의 삶, 즉 그와 연관된 세계 코뮤니스트운동, 노동계급의 투쟁에 대한 역사적 인식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가 공산주의자로 공언하기 전에 실천적으로는 사민주의좌파로서의 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실적 상황에 방점을 둔 것은 사실입니다.

     

    Q : 김수행 선생의 친한 벗이자 동지였던 선생께서는 그분이 쓰신 책과 논문을 대부분 보셨을 텐데, 지금 우리가 다시 되새겨야 할 것이 있다면 한 가지만 소개해 주십시오.

     

    A :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김수행, 신정완 편, 2007년, 서울대 출판부.입니다. 이 책은 정년퇴임 기념 논문집으로 김수행과 제자들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책입니다.

    「제1부 사회주의 이론」에서 제1장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김수행이 집필했고, 나머지 장과 2~4부는 제자들이 썼어요. 「제2부 사회주의의 역사와 현실」, 「제3부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제」, 「제4부 새로운 사회를 위한 초석들」

    이 책을 보면 당시의 김수행과 그 제자들이 새로운 사회, 즉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구체적 상과 그를 위한 투쟁의 역사를 소홀히 다루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Q : 김수행 선생이 못다 이루고 간 맑스주의 연구와 실천의 과제는 무엇이었고, 어떻게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A : 김수행이 세상을 떠나기 전 그와 나는 공동으로 새로운 사회의 강령을 포함한 구체적 방법론을 대담형식의 연재물로 『실천』지에 싣기로 했으나 미완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이는 앞으로 코뮤니스트의 공동의 과제로 남아있고 이를 위한 공동의 연구와 그 실현을 위한 혁명적 투쟁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전 세계 진정한 코뮤니스트들의 임무이기도 합니다.

     

    Q :  첨부한 글은 사회실천연구소의 성원이었던 남궁원 동지가 김수행 선생을 인터뷰한 글입니다. 인터뷰 내용 중 김수행 선생이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라는 책에서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였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답변이 있습니다.

     

    “내가 (소련을) 자본주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맑스가 얘기할 때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해방되는 거야, 임금노동자가 있어서는 안 되는 거야. 맑스대로 얘기하면 상품, 화폐, 임노동 관계가 소멸해야 돼. 근데 소련에서는 자꾸 경제개발 문제만 생각하는 거야.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를 계획경제로 보느냐, 아니면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로 보느냐는 가장 핵심적 쟁점이거든.”

     

    그리고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에 대해 말합니다.

     

    “맑스에 따르면, 각 공장을 공동으로 소유한 노동자들이 공장을 운영하고, 다른 공장들과 연계해서 전국적 계획을 세워야 해. 그게 인민을 중심으로 한 계획경제지. 이리하여 직접 생산자들이 자꾸 협력하게 되고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연합)을 형성하는 거야.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 새로운 사회에서는 ‘국가’라는 것이야.”

     

    김수행 선생의 답변에 동의하시는지요? 선생의 맑스주의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이 주제가 발전적이고 심화된 토론으로 이어지도록 덧붙일 말씀이 있으신지요?

     

    A :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에서 1) 상품, 화폐, 임노동, (시장)의 소멸을 말한 것, 계획경제가 사회주의가 아닌 것 이라고 한 견해에 동의합니다. 2) 그러나 계급과 국가의 소멸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부분적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3) 새로운 생산자의 연합을 국가로 등치시킨 견해에는 반대합니다. 이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개념과 혼동한 것 같습니다.

     

    <보충>『한겨레신문』에 베네수엘라 차베스주의에 대한 세 가지 견해 - 나와 김수행의 차이 : 물론 이는 전태일연구소와 사이버노동대학과의 관계이기도하지만, 민족주의에 대한 입장차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민주의에 대한 태도와 비슷하게)

     

    Q : 김수행 선생은 평소에 실천하는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마지막까지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함께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해 거침없이 호소하셨습니다. 지금 선생이 살아 계신다면, 작년의 촛불 투쟁과 지금의 미투 운동에도 함께 하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두 분이 무엇을 함께 하셨을까요?

     

    A : 그가 살아있었다면, 촛불투쟁에 분명히 함께 하고 토론하고 그 의미와 한계를 코뮤니스트 관점에서 이야기 했을 겁니다.

    미투 운동에 대해서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리 세대를 넘어선 코뮤니스트운동으로서의 의미를 논의하고, 우리세대의 가부장적, 남성우월적 문제가 우리 자신의 문제임을 진지하게 터놓고 토론했을 겁니다.

     

    2018년 5월

    오세철 사회실천연구소 회원 인터뷰

    이형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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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는 망해가고 있어!

    노동자들의 필요와 욕구를 위한, 새로운 사회로 가야 해!

     

     

    김수행 선생은 한국 맑스주의 1세대를 대표한다. 선생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맑스주의 운동과 이론의 대중화를 위해서 노력해 온 분이다. 선생과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서 골똘히 생각한 문제가 있다면,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선생의 그 ‘원칙’이 무엇인가였다. …… 인터뷰 내내 느낀 답은, 선생의 ‘맑스 원칙’과 ‘노동자 해방’이라는 굳건한 이론적 원칙이었다. 게다가 선생은 학술적인 용어보다는 대중적인 화법으로 쉽게 설명한다. 맑스의 정치경제학을 현학적인, 문헌학적 경향으로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으로 설명하려는 선생의 노력이 몸에 밴 탓이리라.

    선생의 청년 시절인 1960년대는 분명 독재 정권의 암흑시대였다. 선생의 지속된 맑스주의 ‘이론 연구 투쟁’은, 한국 사회 『자본론』 완역으로 빛났다. 런던 하이게이트 묘지의 공산주의 유령은, 그래서, 이렇게 성큼 한국에 다가올 수 있었다.

     

    Q : 2008년 자본주의 공황 이후 유럽에서도 『코뮤니스트 선언』의 판매량이 급증하는 등 맑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맑스주의 관련 서적들이 연이어 출판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맑스주의를 어떻게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습니까?

     

    A : 내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들어간 게 1961년이야. 경제학이 너무 재미가 없어요. 무슨 소리인지, 현실적인 감각이 전혀 없더라고, 방법이 없느냐 해서, 생각을 해보니까, 일본 책을 봐야겠다고 생각해서 1학년 때, 책 읽기 위해서 일본 말을 서너 달 배웠어. 그때 상과대학에 경성제국대학 시절의 책이 많이 남아있어서 일본 책으로 이론에서, 경제사에서, 경제사상사에서, 맑스와 맑스의 위치를 공부했지.

     

    독학으로 맑스주의 입문

     

    Q : 선배들 권유가 아니라, 선생님은 독학하셨네요. 그러면서 신영복 선생님하고 남산에서 고초도 당하셨죠?

     

    A : 우리 때는 권유 그런 거 없었어. 독학을 했지. 대학원에 들어가서, 석사논문으로 [금융자본에 관한 일 연구]를 썼는데, 힐퍼딩과 독점자본, 금융자본, 산업자본, 은행자본이 어떤 식으로 융합되느냐 하는 공부를 했지. 주로 일본 책 읽으면서, 석사 논문을 쓰고 나서 경제학과 조교가 됐어. 신영복 선생님과 만나는 것은, 상과대 경제학과에 동아리가 있었는데, 경우(經友)회가 있었지. 내가 들어갔는데, 6기더라고, 신 선생은 2년 선배니까 4기지. 1년에 선후배 관계로 한 두 번씩 보는데, 신 선생하고 통일혁명당 사건에 걸린 것은, 내가 종암동에 살았는데, 우리 집 가까운데 신 선생이 살았어. 그때 신 선생은 육군사관학교 교관을 하고 있었어, 내가 석사 논문을 쓰고 나서 하도 힘들어서, 재밌는 책이 없느냐고 했더니, 신 선생이 갖고 온 책이 레닌이 쓴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전』, 『꽃 파는 처녀』로 기억해, 근데 보니까 한글로 돼 있더라고.

     

    Q : 선생님 그러면, 북한판본이네요.

     

    A : 맞아, 북한에서 나온 책이야. 그때는 그런 책이 남한에서 나올 수가 없었어, 그걸 보고서, 어, “이거 어디서 난 거에요” 물었지. 그랬더니 신 선생이 육군사관학교에 많이 있다고 하더라고. 읽고 나서 돌려줬지. 근데 68년에 통일혁명당 사건이 터졌는데, 신문에 신 선생이 잡혀가고 청맥회가 거론됐지. 나는 68년 한여름에 잡혀 들어갔지. 상과대 경우회 사람들이 잡혀가고, 나한테도 올 것 같더라고. 부산에 도망가 있었는데, 내가 조교라서 학교에 전화했더니, 학교 선생님들이 “정보부 사람들이 교무실에 매일 와서 앉아 있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학교에 갔지, 바로 잡아가더라고. 근데 사건이 종결될 때가 된 거야. 나 같은 사람은 크게 가치가 없는 거야. 신 선생하고 걸린 게 별로 없어서, 나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 조사받으면서, 신 선생과 별로 관계가 없다고 그랬지. 그러다가 많이 맞았어. 정보부에서 사건을 빨리 끝내야 할 필요가 있었던지, 신 선생이 진술한 내용을 내게 던져주더라고. 근데 보니까, 책 빌린 내용밖에 없잖아. 그 사람들이 “이걸 읽어보고 인정해” 그러잖아, 그래서 인정했지. 그 당시 내가 조교를 하고 있었는데, 정보부 수사관들이 조교하고 조교수를 구분을 못 해서 신 선생이 나한테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거야. 나갈 때쯤 되니까, 정보부 수사관이 “당신은 기소 유예될 것 같다”라고 귀띔을 해주더라고. 기소유예 받은 거지. 그러고 나서 학교 조교 사표를 냈고, 은행에 들어가서 영국에 갔지. 런던대학교 버크벡(Birkbeck) 대학인데, 거기에 영국 좌파들이 다 와 있었다고. 내 지도교수는 로렌스 해리스(Laurence Harris)라는 사람이고, 심사위원은 벤 파인(Ben Fine)이었어.

     

    “구소련사회는 자본주의 사회”

     

    Q : 자연스럽게 대안 사회 문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새로운 사회를 말하려면, 1917년 러시아 혁명 경험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은 최근에 쓴 책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 6장에서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생님은 결국 소련 사회가 레닌의 정치혁명 시기나 스탈린의 공업화 시기에도 결국 자본-임금노동 관계가 지배적이었다고 보시나요?

     

    Q : 그래요. 자꾸 생각하면 할수록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 자체도 소련 경제를 어떻게 개발할 거냐 하는 문제에 집중된 것 같아. 혁명과정에서 적군이 백군을 진압한 뒤 ‘신경제정책’을 실시하거나 ‘국가자본주의’를 이야기하거나 농업 집단화나 중화학 공업화의 추진 등에서 새로운 사회의 특징인 ‘노동자의 해방’은 전혀 논의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생산력을 증강시킬 수 있는가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반성하게 되요. 내가 자본주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맑스가 얘기할 때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해방되는 거야, 임금노동자가 있어서는 안 되는 거야. 맑스대로 얘기하면 상품, 화폐, 임노동 관계가 소멸해야 돼. 근데 소련에서는 자꾸 경제개발 문제만 생각하는 거야.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를 계획경제로 보느냐, 아니면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로 보느냐는 가장 핵심적 쟁점이거든. 그런데 특히 스탈린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기본 문제라는 것이 생산의 무정부성이다, 무계획성이다, 계획적으로 운영하면, 자본주의적 공황도 없고 낭비도 없다고 생각한 거야. 그러니까 노동자가 주인이라는 개념이 빠지는 거야. 국유화의 의미가, 맑스에 따르면 생산수단을 자본가로부터 노동자에게로 소유를 이전하는 것이고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표지인데, 소련에서는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해서 노동자를 착취하여 자본을 축적해서 군수산업 등 각종 산업을 건설하는 이런 식으로 갔다고. 임금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이 인간의 탈을 쓴 게 자본가라고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소련에서는 국가, 당과 정부의 관료나 노멘클라투라가 자본가계급이라고 볼 수밖에 없어.

     

    Q : 선생님, 소련의 국영기업과 달리 예를 들면 콜호스, 소프호스는 소련의 집단 농장으로 모든 생산수단을 사회화하고 협동조합 형식에 의해서 농민이 집단 경영을 하고, 각자의 노동에 따라 수익을 분배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콜호스, 소프호스도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라고 볼 수 있나요?

     

    A : 집단농장도 모두 정부가 통제했어요, 자발적으로 했다고 볼 수 없지. 생산량 할당하고 임금도 위에서 다결정하고. 맑스에 따르면, 각 공장을 공동으로 소유한 노동자들이 공장을 운영하고, 다른 공장들과 연계해서 전국적 계획을 세워야 해. 그게 인민을 중심으로 한 계획경제지. 이리하여 직접 생산자들이 자꾸 협력하게 되고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연합)을 형성하는 거야.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 새로운 사회에서는 ‘국가’라는 것이야. 그런데 소련에서처럼 정부나 당의 관료들이 책상머리에 앉아서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계획을 세우면 노동자들이 일할 맛이 나겠어.

    소련 사회가 네프(NEP. 신경제정책)로 넘어갈 때, 레닌이 그러잖아, 경제를 움직여야 하는데, 머리가 빨갛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 없다고. 잘 모르는 사람이 공장 운영을 어떻게 해? 네프 도입은 자본주의의 시작이야.

     

    Q :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지난 1980~90년대 한국사회에서는 소련사회를 자본주의라고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맑스의 경제학 비판을 제대로 복원하려면, 스탈린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해야 된다고 봅니다. 스탈린주의 경제학은 사회주의 생산양식론이나, 자본주의 전반적 위기론, 정치적으로는 진영테제 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스탈린주의 경제학 비판을 하려면 마르크스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선생님은 과거 소련 사회 경험에서 본 것처럼, 국유화가 문제라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 일부 운동진영에서도 국유화를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A : 경쟁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 그리고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성장하다가 새로운 사회(사회주의 사회로 부르든, 공산주의 사회로 부르든)로 간다는 거야, 이거는 엥겔스 도식이야. 새로운 사회가 계획경제라는 것을 가정하고 있는 거야. 여기에 노동자가 어디에 있어? 없지. 엥겔스 도식을 스탈린이 받아들여서 계획경제의 실현을 사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지표로 제시했어. 진영테제는 이론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야.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이나 강제수용소는 맑스가 [자본론]에서 얘기한 ‘자본주의’의 시초축적이야. 옛날 소련경제를 전형으로 하는 중앙지령형 통제경제에서는 국가가 세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국가가 동원한 노동하는 개인들은, 사실상 국가에 노동력을 파는 임금노동자, 노예에 지나지 않아.

    맑스가 생각한 노동자 해방, 해방된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창의적으로 협동하는 그런 개념이 없어진 거야. 평의회나 이런 게 없어진 거야. 이런 게 문제점이라고 생각해. 혁명적 이행기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공권력을 장악한 노동자들의 연합이 공장을 접수하여 임금노동제도를 폐기하고 자본가계급을 ‘노동하는 개인들’로 전환시켜서 계급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

    결국, 해방된 노동자가 주체가 돼야 하고 중심이 되어 자본주의 잔재를 부수어야 하는데, 새로운 계급인 당이나 정부의 관료가 하니까 안 돼. 정부 관료가 “금년 목표는 이거야” 노동자들한테 “따라와” 이렇게 하니까 말로만 계획경제야. 지금 새롭게 나오는 소련 문서를 보면, 국영기업들이 이윤율을 올릴수록 경영자와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인센티브(incentive), 보너스를 받게 되었다고. 전체적인 계획경제도 안되고, 거짓말 보고만 되는 거야. 자본주의의 임금노동자와 무엇이 달라.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은 이런 특수한 소련 자본주의를 시장에 다 맡겨 경쟁적 자본주의로 전환시켜야 비리가 없는 능률적 사회가 된다는 거야. 지배계급인 당과 정부의 관료가 국유재산을 모두 헐값으로 사들여 경쟁적 자본주의의 자본가계급으로 둔갑했는데, 소련의 역사 80여 년이 이런 식으로 쭉 연결된 거야.

     

    Q : 선생님 견해에 따르면, 지금의 중국, 북한도 자본주의로 볼 수 있겠네요. 국가 주도적 자본주의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A : 자본주의에서는 경제적 권력이 자본가계급에게 있기 때문에 국가 주도가 잘 안 돼. 박정희체제를 국가 주도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재벌한테 모든 걸 맡긴 거야. 새로 탄생한 국영기업이 별로 없잖아? 정부가 재벌한테 금융혜택, 세제혜택 줬지. 외국 차관의 도입에 정부가 지급 보증을 했지. 재벌이 노동자계급을 착취하고 중소기업을 수탈하는 것을 박정희가 총칼로 보호한 거야.

    흔히들 박정희체제에서는 정치권력이 경제력을 제압했다고 보면서 ‘국가주도’를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겉으로 나타난 것을 가리킬 뿐이야. 독재적 정치권력은 권력 유지에 돈이 필요해서 증권파동을 일으킬 정도였기 때문에, 재벌에 크게 의존했고, 미국 정부가 국영기업이 아니라 민간기업 중심으로 경제를 개발하라고 지침을 주고 있는 상황에서 독재 권력은 재벌 중심으로 경제개발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어. 따라서 ‘국가 주도’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경우는 낡은 사회를 타파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고 시도하는 ‘혁명적 전환기’일 뿐이야. 실제로 해방된 노동자들이 공권력을 장악하여 공장을 접수하면서 사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끌어가야 한다고.

     

    “새로운 사회로 가려면, 상품 화폐 자본을 없애야 해.

     

    이 기본 요소들을 없애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계속 살아남게 돼 있어.”

     

    Q : 선생님이 자연스럽게 이행기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선생님은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에서 이행기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이행기 강령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행기 강령에 시장도 사라지고 화폐도 없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요. 일반 노동자들이 볼 때 쉽게 다가서지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일반적인 좌파들, 트로츠키 이행기 강령보다도 더 센 이행기 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 좀 해주세요.

     

    A : 자본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 『자본론』에서 상품부터 시작하잖아. 생산물이 상품으로 전환하면서 상품교환이 이루어지고, 상품교환에서 화폐가 생기며, 화폐를 가지고 더 많은 화폐를 얻기 위해서, 결국 임금노동자를 착취하잖아. 상품, 화폐, 자본은 결국 임금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으로 귀결하게 돼 있어. 이 기본 요소들을 없애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계속 살아남게 돼 있어.

    새로운 사회인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에서는 노동하는 개인들이 모든 노동조건들에 대해 공동으로 자기의 것으로 상대하기 때문에, 혁명적 이행기에 생산수단이든 소비수단이든 사회적 생산물을 사회의 일부 사람들이 배타적으로 처분 사용하는 것을 완전히 없애야 해. 이래야만 생산물이 상품형태를 취하거나, 가치에 따라 교환되거나 하는 것이 없어지고, 따라서 일반적 등가물인 화폐와 시장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고. 이행기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노동하고 모든 개인적 노동력을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의식적으로 지출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해. 물론 이행기의 초기에는 아직 자본주의가 지배적이니까 화폐가 있을 수 있겠지만, (공장평의회에서, 지역평의회로, 전국평의회로 가면서) 노동자들의 연합이 사회의 인적 물적 자원을 계획적으로 이용하여 주민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생산한 것을 각 가정에 ‘택배’로 배달하면 될 것이므로 생산물이 시장에서 팔릴 필요도 없고, 노동자들이 화폐를 갖고 물건을 살 필요도 없어. 화폐가 계속 사용된다면, 화폐를 많이 가진 사람들이 상품을 매점매석하여 물가를 폭등시켜 혁명을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에, 쿠바혁명에서도 체 게바라가 몇 번에 걸쳐 화폐개혁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붉은글씨』 창간호 중에서

     

    2012년 11월

    김수행 교수 인터뷰

    남궁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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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8호를 내면서

  • 코뮤니스트 8호를 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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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 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1970년 11월, 전태일)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길드장인과 직인, 한 마디로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항상 서로 대립하면서 때로는 숨겨진, 때로는 공공연한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각각의 싸움은 그때마다 대대적인 사회의 혁명적 재편 또는 경쟁하는 계급들의 공동파멸로 끝났다. (1848년 2월 , 코뮤니스트 선언)

     

     지구상의 모든 인류 가운데 오직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지금까지 자본주의의 지배를 전복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거대한 투쟁에서 성공했다. 영웅적 저항으로 그들은 국제자본이 조직한 용병군대의 집중공격을 물리쳤다. 그리고 지금 비길 데 없는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사회주의 기반위에 재건하는데 경제는 세계전쟁과 2년 넘게 지속된 내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러시아 평의회 공화국의 운명은 독일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발전에 달려있다. (1920년 5월, 독일 코뮤니스트 노동자당 강령) 

     

     우리는 오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깃발을 높이 들어 이땅에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엄숙히 선언한다. 우리 노동자가 이제까지 얼마나 긴 세월을 비인간적인 생활조건과 정치적 무권리 속에서 노예적인 삶을 강요당해 왔던가. 그러나 보라! 억압과 굴종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역사의 전면에 우뚝 일어서서 힘차게 진군하기 시작한 노동자의 전국적 대오를! (1990년 1월, 전노협 창립선언문)

     

     부르주아 사이의 경쟁이 격화되고 그 결과 상업공황이 일어나면서 노동자의 임금은 갈수록 동요하게 된다. 기계가 급속히 발전하고 끊임없이 개선되면서 노동자의 생활은 갈수록 불안정해진다. 따라서 개별 노동자와 개별 부르주아 간의 충돌은 갈수록 두 계급간의 충돌이라는 성격을 띠게 된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에 반대하는 결사체(노동조합)를 결성하기 시작하며, 임금율을 높이기 위해 한데 뭉치고, 때때로 일어날 충돌에 미리 대비하기 위해 단체를 창건한다. 여기저기에서 싸움은 폭동으로 터지게 된다. 때때로 노동자는 승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다. 싸움의 실제적 결실은 직접적인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팽창하는 노동자들의 단결에 있다. 현대산업이 만들어낸 전달 수단으로 인해 여러 지역의 노동자들이 서로 접촉할 수 있게 됨으로써 단결은 한층 확대된다. 바로 이 접촉이야말로 같은 성격을 지니는 수많은 지역적 투쟁을 계급들 간의 하나의 전국적 투쟁으로 집중시키는 데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다. 중세 시대의 시민이 옹색한 도로를 가지고 수백 년의 기간을 거쳐 달성한 그 단결을 한 대 프롤레타리아는 철도에 힘입어 수 년간 이룩한다. (1848년 2월, 코뮤니스트 선언)

     

     노동자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영구화하기 위해 노동자의 조직적 진출과 투쟁을 가로 막았던 자본가와 국가권력의 온갖 탄압과 회유를 분쇄하고, 우리는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광산에서, 거리에서 불굴의 투쟁을 전개해 왔다. 단위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투쟁 속에서 지노협과 업종협을 결성하였으며 마침내 지역과 업종을 뛰어 넘어 전노협으로 결집한 것이다. (1990년 1월, 전노협 창립선언문)

     

     부르주아 의회주의를 차치하고 노동조합은 독일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 장벽이다. 세계대전 동안 그들의 태도는 잘 알려져 있다. 옛 사민당의 주요원칙과 전술에 대한 그들의 결정적 영향은 독일 부르주아지에게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전쟁선포에 해당하는 “신성한 노조”의 선언을 하게 만들었다. 사회반역자로서의 그들의 효능은 1918년 11월 독일 혁명의 발발시기에 논리적으로 지속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사회평화를 위한 “노동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위기를 느낀 독일 산업가들과 협력함으로써 반혁명적 의도를 드러냈다. 그들은 독일 혁명의 전 과정동안, 오늘까지 반혁명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 노동계급속에 점점 깊이 뿌리 내리는 평의회 사상을 가장 폭력적으로 반대한 것은 노조의 관료주의이다. 경제영역에서의 대중행동으로부터 나오는 프롤레타리아 정치권력을 위한 모든 노력을 성공적으로 마비시키는 수단을 발견한 것은 노조이다. 노조조직의 반혁명적 성격은 악명이 드높아 독일의 수많은 지도자는 노조집단에 속한 노동자만 고용할 것이다. 이는 노조관료주의가 줄기로부터 갈라지는 자본주의체제의 유지에 적극적 부분이 된다는 것을 전 세계에 드러낸다. 이처럼 노조는 부르주아 하부구조와 함께 자본주의 국가의 주요 축 중의 하나이다. (1920년 5월, 독일 코뮤니스트 노동자당 강령)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 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를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 버린다고 해도,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코뮤니스트는 전체 프롤레타리아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코뮤니스트는 노동계급의 당들과 대립하는 별도의 당을 결성하지 않는다. 코뮤니스트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지는 이해와 별도로 분리된 이해를 가지지 않는다. 코뮤니스트는 자신만의 분파적 원칙을 세워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이 원칙에 뜯어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1848년 2월, 코뮤니스트 선언)

     

     정치조직은 당 강령의 기초위에서 노동계급의 가장 선진적인 요소와 함께할 임무가 있다. 공장조직과 당의 관계는 공장조직의 본질로부터 나온다. 이 조직 내에서 코뮤니스트 노동자당의 일은 투쟁의 기치를 밀고 나갈 뿐만 아니라 지치지 않는 선전을 하는 것이다. 공장에서 혁명 간부는 당의 움직이는 무기가 된다. 나아가 당은 항상 더욱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띠게 하고 밑으로부터의 독재에 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통하여 임무의 둘레가 더 커지지만 동시에 가장 강력한 지원이 요구된다. 달성해야 하는 것은 승리(프롤레타리아에 의한 권력 장악)가 계급독재로 끝나고 소수의 당 지도자나 정파의 독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공장조직은 이의 보증자이다. (1920년 5월, 독일 코뮤니스트 노동자당 강령)

     

     코뮤니스트는 모든 곳에서 기존의 사회, 정치적 질서를 반대하는 모든 혁명을 지지한다. 그 모든 혁명에서 코뮤니스트는 각국의 발전정도와 관계없이 소유문제를 핵심적인 문제로서 전면에 내세운다. 마지막으로 코뮤니스트는 어디서나 모든 나라 민주적 정당들의 통일과 합의를 위해 노력한다. 코뮤니스트는 자신의 견해와 목적을 감추는 것을 경멸한다. 코뮤니스트는 자신의 목적이 오직 기존의 모든 사회적 조건을 힘으로 타도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선포한다. (1848년 2월, 코뮤니스트 선언)

     

     코민테른의 정신에 충실하게 코뮤니스트 노동자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권력 정복이 부르주아지의 정치권력을 파괴한다는 의미에 따라 과학적 사회주의 창설자의 사상에 따를 것이다. 부르주아 관료의 지도 아래 있는 자본주의 군대, 그 경찰, 간수와 판사, 그 성직자와 관료와 함께하는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총체를 파괴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첫 번째 임무이다. 승리하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반혁명의 타격에 대항하여 단련되어야 한다. 이것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부과된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자비한 폭력으로 착취자의 내전을 분쇄해야 한다. 코뮤니스트 노동자당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마지막 투쟁이 국경 내에서 해결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국경 앞에서 멈추고 세계를 통한 습격에서 민족적 양심이나 그 어떤 것 때문에 물러서는 것이 적을수록, 프롤레타리아트는 민족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최면당하거나 국제적 계급연대의 기본사상을 상실할 가능성이 적을 것이다. 국제적 계급투쟁의 사상을 프롤레타리아트가 명확하게 이해할수록, 그것이 세계 프롤레타리아 정책의 원동력이 되고 해체되는 자본주의를 조각낼 세계혁명의 타격은 더욱 충동적이고 대규모적일 것이다. 모든 민족적 특수성을 넘어서서, (1920년 5월, 독일 코뮤니스트 노동자당 강령)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 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1970년 11월, 전태일)

     

     

     우리는 이제 이땅의 노동자가 진정으로 자신의 경제, 사회, 정치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자본과 권력의 탄압에 통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전국조직을 갖게 되었음을 선언한다. 전노협의 건설로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노사협조주의와 어용적, 비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을 극복하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한국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조직적 주체가 탄생하였음을 밝힌다. 우리는 또한 정권과 소수 재별의 억압과 수탁을 제거하여 4천만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제 민주세력과 힘차게 연대해 나갈 수 있는 전국노동자의 조직적 대오가 출범하였음을 만천하에 선언한다. (1990년 1월, 전노협 창립선언문)

     

    1848년, 모든 지배계급을 코뮤니스트혁명 앞에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코뮤니스트 선언)

     

    1920년, 모든 국경과 조국을 넘어서서, 영원한 봉화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비칠 것이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독일 코뮤니스트 노동자당 강령)

     

    1990년, 억압과 굴종의 세월, 어용과 비민주의 시대를 청산하고 전노협이 깃발 아래 강철 같이 단결하여 자유와 평등의 사회를 향해 힘차게 진군하자!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만세! 노동운동 만세! (전노협 창립선언문)

     

    1970년,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못다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전태일)

     

     

    그리고 2018년? 2019년?

     

    전태일 열사 정신이란 무엇인가?

    전노협(민주노조) 정신이란 무엇인가?

    코뮤니스트 정신이란 무엇인가?

    코뮤니스트 당이란 무엇인가?

    역사는 질문을 던졌는데 우리는 왜 대답하지 못하는가?

     

    코뮤니스트 8호를 이렇게 엄중한 물음으로 발행합니다.

     

    2018년 11월 10일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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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2018년 _ 8호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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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뮤니스트   2018년 _ 8호가 나왔습니다.

     

    □ 가격 : 1만원

     

    □ 구입문의 : communistleft@gmail.com  

     

    #내일(토)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코뮤니스트>를 판매합니다. 

     

    #사회실천연구소의 <실천>지도 함께 판매합니다.

     

    코뮤니스트   2018년 _ 8호

     

     

    □ 코뮤니스트 8호를 내면서 

     

    □ 특집. 맑스 탄생 200주년  

    ‣ 혁명 투사 칼 맑스  ㅣ ICC / 한동이 

    ‣ 인간의 본성과 코뮤니즘  ㅣ ICT / 편집부

     

    □ 정세 / 쟁점

    ‣ 플랜트노조 충남지부 해산 사태와 민주노조 원칙  ㅣ 구재보 

    ‣ 민주노총 「평화‧번영‧통일시대의 등장과 노동자 자주통일운동의 과제」에 대한 비판  ㅣ 조덕연 

    ‣ 인종주의와 노동자계급  ㅣ 이혜원 

    ‣ 성차별, 페미니즘 그리고 성해방  ㅣ 조덕연

     

    □ 코뮤니스트 정치

    ‣ 코뮤니스트 사회의 차별철폐와 평등에 대하여  ㅣ 이형로

    ‣ 자본의 좌파 : 사회주의와 무관한 정치세력  ㅣ 이혜원

     

    □ 문화

    ‣ 너희가 말한 모든 것은 불법이 되었다  ㅣ 임성용

    ‣ 장애인문화공간  ㅣ 라나

     

    □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 민족주의, 제국주의에 대한 국제주의자 입장  ㅣ 이형로

    ‣ 민족주의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  ㅣ ICP

     

    □ 국제정세

    ‣ 세계의 계급투쟁 : 국제주의 노동자들의 목소리  ㅣ 신디

    - 러시아의 연금 '개악'에 맞선 투쟁  

    - 그라나다 지하철 노동자 투쟁  

    - 새로운 세계의 열쇠를 쥔 노동자계급  

     

    □ 기획번역

    ‣ 혁명조직의 기능에 관한 보고서  ㅣ ICC

     

    □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

    ‣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회의를 제안하며  ㅣ 계승회의

    ‣ 코뮤니스트 혁명가 : 붉은 로빈 후드 막스 횔츠  ㅣ 이형로

     

     

    □ 코뮤니스트 조직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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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사랑의 급진성...

  • 「사랑의 급진성」을 읽고서...

     

     

     성? 사랑의 무엇이 어떻게 급진적이란 말인가? 얼핏 자유주의적 연애관이 떠오르기도 한다. 차가운 친밀성 시대에 만남은 종종 미리 설정된 프로그램(단순한 섹스 파트너 찾는 만남)에 따라 이뤄진다. 이렇듯 섹스 파트너 시대에 사람들은 단지 섹스하는 육체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회적 현실에서 사랑이 혁명적이라고 생각하기는 더더욱 쉽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사랑의 급진성이 아닌, 사랑 없는 섹스이며 결코 급진적이지 않은 사랑의 비급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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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레츠코 호로바트(저자)는 몇 가지 전제를 제시하며 사랑은 급진적이고 혁명적이라고 주장한다. 즉, 사랑이냐 혁명이냐가 아니라 사랑과 혁명의 관계에서만 사랑의 급진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든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넘어서 사회, 정치혁명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과연 사랑은 급진적일 수 있을까? 사랑은 사람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등등

     

     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성생활 및 관련 제도를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사유재산제도와 계급이 발생하기 전에는 무리 단위로 생활을 하며 군혼을 하였다. 이 사회에서는 성 억압과 성 불평등이 없는 모계혈통 중심이었다. 지금처럼 사랑에 대한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이 없는 사회였다. 그 결과는 반사회적 성폭력, 성행동이 아니라 무리의 유대 강화와 생존으로 이어졌다.

     

    - 사랑과 섹스

     

     계급의 발생과 사유재산제도의 등장은 필연적으로 형식적이고 강제적인 일부일처제와 가부장적 가족 탄생을 낳았다. 형식적 일부일처제는 혼전 순결 등의 성도덕과 성 억압, 성차별을 권위와 가부장적 권력을 통해 강제하였다. 그 결과 여러 가지 문제가 파생되었다. 특히, 빌헬름 라이히는 이러한 성 억압을 통해 복종적이고 순종적인 인간이 재생산된다고 주장한다.

     

     라이히1)는 (남성의 경우) 발기/사정 능력은 단지 오르가즘 능력의 전제조건일 뿐이며 성기 장애가 신경증의 가장 중요한 증상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보완하였다. 사랑 없는 섹스는 오르가즘 능력이 없으며 당연히 신경증을 해소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즉, 혁명과 사랑의 이분법뿐만 아니라 사랑과 섹스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부정한다.

     

     그래서 충동의 만족을 통한 오르가즘에 이르는 길이 라이히가 생각하는 성해방의 방식이다. 하지만 성해방으로 나아가는 데는 개인 내적인 장애물과 사회적인 장애물이 있다. 라이히는 사회적 장애와 관련하여 성정치, 성혁명을 통한 성해방을 강조했다. 라이히에게서 성혁명은 정치혁명과 함께이며 다른 개념이 아니었다.

     

     성혁명과 정치혁명이 다른 개념이 아닌 근거는 신경증을 극복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과 충동의 삼중 구조이다. 신경증 증상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모습은 성 억압이 존재하는 사회의 성격 구조가 아닌 단순하고 자명하고 온당한 성격을 보인다. 이에 따라 충동의 삼중 구조를 제시하였다. 자연스러운 일차적 충동(생물학적 충동), 반사회적 이차적 충동(생물학적 충동이 억압되어서 왜곡되어 나타난 반사회적 충동), 표면적 충동이다. 이를 통해 더는 충동을 억압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회에 의한 왜곡을 풀어주어 자연스러운 충동이 펼쳐져 나가게 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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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정치, 파시즘의 대중심리 : 빌헬름 라이히>

     

    - 욕망, 다시 사랑의 급진성

     

     라이히의 작업은 사랑의 쟁취는 자본주의 사회의 억압을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욕망은 비사회적이고 금기시되어야만 하는 무엇이 아니다. 사랑의 급진성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욕망은 전체주의뿐만 아니라 서구의 자유방임주의부터 이슬람근본주의까지 적대시하고 있다. 왜? 욕망은 본질에서 혁명적이고 기존 사회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즉, 욕망은 현 사회체제에 위협적이고 전복적이기 때문에 금지해야 한다.

     

     계급사회에서 욕망 역시 철저하게 계급화되어있다. (서구사회도 마찬가지이지만)이슬람근본주의 사회의 사례를 통해 피지배계급의 욕망은 철저하게 억압당하지만, 지배계급에는 관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흥 부유층의 경우에는 상품 물신숭배와 욕망의 상품화에 따라 개인적 자유에 대한 제한에 반대하기보다는 소비의 자유를 통해 체제 위선적인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한다.

     

     1917년 10월 혁명은 욕망의 폭발이고 초반부에는 성혁명에서도 큰 변화가 생겼다. - 법적으로 열등한 여성의 지위 폐지, 이혼/ 낙태 허가, 여성들이 결혼한 후에도 재산과 수입에 대한 전적인 통제권을 가지는 것을 허용했다. 그런데 1934년에는 동성애 반대법 통과, 낙태 금지 등등으로 후퇴하였다.

     

     구소련에서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경직된 속류 맑스주의자들의) 주된 불만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개인의 사회 기여를 막는다는 것이다. 레닌에게서도 성적인 문제가 지나치게 널리 퍼지면 사람들이 혁명을 위해 애쓰는 대신 기분 좋은 것들을 말하게 될 수도 있으므로 위험한 일로 여겨졌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이네사 아르망은 코뮤니스트(공산주의) 혁명은 성/사랑 혁명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많은 혁명가는 혁명을 먼저 이루어야 사랑의 문제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10월 혁명 직후 진보적 성해방 조치가 1930년대 접어들면서 퇴보한 상황 및 1960 -70년대 독일 등지에서의 코뮌에서 성해방 실험의 실패로 저자는 사랑과 성의 이분법적 사고를 원인으로 주목했다. 하지만 사랑의 급진성의 주제인 ‘사랑과 혁명’ 모두에 어떻게 헌신해야 하는지 등의 구체적 분석과 방법을 제시하지 않은 한계도 있다. 그런데도 사랑의 급진성은 혁명의 급진성에서 발견되고 혁명의 급진성은 진정한 사랑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저자는 사랑에 빠져 사회와 혁명에 무관심한 경우와 정치혁명이 우선이며 그 이후에 성혁명을 하자라는 주장에 모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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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인생의 원천은 사랑과 노동과 지식이다.

    인생은 그 세 가지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

    - 빌헬름 라이히

     

    - 사랑의 급진성, 오늘날의 의미

     

     노동해방 없이 성해방, 여성해방은 요원할 뿐이다. 왜냐하면, 성적 불평등과 성 억압은 어느 날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계급 발생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평등, 성해방을 포함하는 성혁명은 계급타파로 가기 위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따로 일수가 없다. 이에 성적 자유와 성평등은 남녀 사이만의 문제가 결코 아니며 계급 타파와 인간해방의 주제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이슈인 미투는 남녀 사이 문제에서 더 나아가 권력 문제로까지 제기되었다. 하지만 좀 더 본질을 보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일반적 성억압(혼전 순결, 낙태 금지, 부르주아 도덕 교육, 종교 교리 등등)과 그 파생적 결과로 성적으로 파편화된 지배계급의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도덕과 혼전 순결, 낙태 금지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폭로해야 한다. 그러면서 성적 자유가 무엇인지, 실질적 일부일처제 실현을 위한 사회적 전제조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에 불거진 특정 조직의 내부 민주주의 문제 제기와 더불어 혼전 순결과 낙태 반대를 내부 규정으로 삼아왔던 것이 폭로되었다. 충격을 넘어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부르주아도 내팽개친 부르주아 도덕을 내부 규정으로 무장한 그들은 노동계급의 적일 뿐이다. 

     

     욕망과 도덕은 그 사회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영향을 받는다. 욕망과 도덕은 사회적이며 시대와 계급에 따라 다르다. 대중의 계급의식은 그들의 구체적인 생활과 연계되었다. 대중의 다양한 구체적 관심들을 끌어내고 해결해 가면서 어떻게 커다란 문제와 연결해 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대중에게 향하는 것을 넘어서 대중의 욕망에 귀 기울여 갈 것을 주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자신과도 담을 쌓고 대중과도 담을 쌓고 깃발만 꽂으면 대중이 따라나선다는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찬 이들에게는 허위와 기만부터 버려야 할 것이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조덕연

     

     

    <주>

     

    1)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1887-1957) :

     1897년 갈리시아(폴란드 남부 지방)의 도브르치니카에서 태어났다. 1918년 비엔나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했으며, 1920년에 비엔나 정신 분석학 협회에 들어갔다.

     이후 1930년 베를린으로 가서 정신분석상담소와 맑스주의 노동자 대학에서 강의했다. 라이히는 한편으로 코민테른, 오스트리아 맑스주의, 독일 공산당과, 다른 한편으로는 프로이트 학파와 대결한 뒤에 1934년 공산당에서, 그리고 국제 정신 분석 협회에서 추방당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1939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오르곤 에너지'를 발견하였고, 1957년에 죽을 때까지 오르곤 에너지 연구에 몰두하였다. 라이히는 뉴욕주와 메인주에 연구소를 설립했고, 1947년 식품의약 관리부의 조사대상이 되었고, 1954년 법정의 금지명령을 요청하는 고소장이 발부되었다. 라이히는 기초자연 연구에 관해 '피고'로 재판받는 것을 거부했는데, 법정모욕죄로 2년 형을 선고받았다. 1957년 11월 3일 한 연방교도소 안에서 사망했다.

     주요 저작으로는 『강제적 성 도덕의 출현』(1932), 『문화적 투쟁에서의 성』(1936), 『성 혁명』(1966), 『파시즘의 대중 심리』(1933), 『성격 분석』(1933)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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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사회(이행기)의 평등과 차별철폐에 대해

  • 코뮤니스트 사회(이행기)의 평등과 차별철폐에 대해

     

    이번 주말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평등행진'이 있다. 그동안 이 사회는 인권과 기본권에서 형식적으로도 평등은커녕 철저하게 소수자를 배제하고 혐오세력을 양성해왔기에, 너무나 당연한 권리를 위해 사람들이 '평등'이라는 거창한 구호를 들고 나서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행진을 지지하고 참여하면서, 실질적 평등과 차별철폐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할 것이다.

    이 글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미래의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근본적인 문제의식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기에 '혁명'을 이야기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기본전제

     

    자본주의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전 세계에 걸쳐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해야 하는데, 그것은 전 세계에 걸쳐 자본주의 국가기구들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코뮤니스트 사회는 새로운 노동자권력의 계급적인 목적을 정치적으로 공공연하게 선언하는 체제이며, 경제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착취계급의 소유권을 몰수하고 사회화를 점진적으로 전체 생산으로 넓혀 나가는 사회이다. 노동자권력의 형식은 역사적으로 노동자평의회와 프롤레타리아 총회의 연합으로 나타났다. 노동자평의회는 노동자계급 전체를 망라하여 조직될 것이고, 계급 속에서 선출되고 언제나 소환 가능한 직접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평의회 체제로 중앙화(집중)될 것이다.

     

    코뮤니스트 혁명 과정에서 혁명당은 평의회 내부에서 활동하지만, 노동자계급 전체의 조직인 평의회를 대신할 수 없다. 혁명당은 평의회 안에서 코뮤니스트 강령을 위해 활동하고 투쟁해야 하며, 평의회 체제는 프롤레타리아계급에 대한 혁명당의 명령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동자평의회, 프롤레타리아 총회로 구성된 전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계급만이 정치권력을 가진다.

     

    코뮤니스트 사회는 자유로운 사고를 억압하는 종교와 이데올로기, 낡은 전통과 윤리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다. 계급과 계급 적대가 사라지면 국가는 필요 없게 된다.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국가는 소멸한다. 코뮤니스트 사회는 국가 없는 사회다. 사회의 행정적 업무는 모든 구성원의 협력, 합의, 집단적 의사 결정에 의해 처리될 것이다. 따라서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진정한 이상이 처음으로 실현된다.

     

    코뮤니스트 사회와 기본권(평등, 차별철폐)

     

    그렇다면 코뮤니스트 혁명과 함께 시작될 사회에서는 평등과 차별철폐가 어느 정도 이루어질 것인가? 현재 시점에서 즉각적인 목표로 삼은 코뮤니스트 강령 일부를 소개한다.

    이 강령은 이른바 '사회주의'를 참칭하는 국가(구소련, 중국, 북한, 베트남, 쿠바 등)의 지배계급과 그들을 '노동자국가'라면서 방어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하나,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가장 넓고 평등한 자유와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받는다.

     

    모든 사람은 신체와 정신에 있어 어떠한 침해를 받아서는 안 되며, 사회에서 보편적인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물품을 얻고 생계를 유지할 권리를 갖는다.

    모든 사람은 노동할 권리와 직업 선택의 자유를 갖는다. 사회는 모든 노동자에게 차별 없는 일자리를 보장하고, 노동에 필요한 교육과 평등한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사회에서 이용 가능한 모든 교육 자원을 누릴 권리를 갖는다. 모든 교육기관은 무상교육을 하고, 모든 사람은 평생교육의 권리를 갖는다.

    모든 사람에게 의료와 건강권은 무상으로 제공하며, 거주 장소를 선택할 권리와 주택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하나,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 사상, 신념, 표현, 결사, 집회, 파업에 대한 ‘완전한 자유’를 보장받는다.

     

    반혁명적 정치 활동을 제외한 모든 정당 활동과 노동자 조직, 비정부 조직에서의 정치 활동을 완전히 보장하며,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언론, 집회, 결사, 파업에 대한 완전한 자유를 갖는다.

    모든 사람은 사회에서 모든 영역에 대한 진실을 조사하고 알 권리를 가지며, 사회의 모든 정치·문화·윤리·이데올로기적 측면에 대해 제한 없이 비판할 권리를 갖는다.

     

    하나, 코뮤니스트 사회의 기본원리인 ‘인간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성, 직업, 국적, 종교, 인종, 신념, 지위, 신체조건, 학력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어떤 차별도 없이 정치, 경제, 사회적 권리와 기회를 평등하게 보장한다.

     

    코뮤니스트 혁명과 함께 완전하고 조건 없는 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 사회, 경제의 모든 영역, 모든 노동에서의 성평등을 위한 즉각적인 조치를 한다. 결혼과 가족에 대한 모든 제한을 철폐하며, 법적인 통제 없이 부부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의 요구만으로도 이혼을 보장한다.

     

    하나,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건강하고 안전한 환경을 누릴 권리와 자연과 환경의 파괴를 막을 의무를 동시에 갖는다.

     

    모든 인류가 누릴 건강하고 안전한 환경을 위해 평의회와 기업과 사회구성원들의 활동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감시하고 통제할 권리를 모두가 갖고 실천한다. 자연을 보전하고 환경파괴를 막기 위해 사회는 자원 수탈과 대량소비에 의존한 생활양식의 근본적인 전환을 추진한다.

     

    공약과 강령(형식과 실현)의 차이

     

    부르주아 정치와 선거에서의 공약은 소수 지배계급(정치세력)의 다수 대중에 대한 지키지 못할 약속이거나 명령이지만, 코뮤니스트 강령-프롤레타리아 혁명 강령은 다수 계급이 혁명과 자기 권력을 통해 직접 실현할 목표이자 실천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차별철폐를 위한 법 제정 투쟁은 한계가 있지만, 모든 차별과 혐오에 맞서 투쟁하는 것은 소수자, 사회적 약자, 억압받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생존조건이기에 더욱 확산되어야 하고 근본적인 투쟁이 되어야 한다. ‘국가가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게 만드는 투쟁’은 평등하지 않은 사회가 존재하는 한 지속될 것이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이 될 것이다.

     

    하지만, 국가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실현할 수 없는 목표가 있다면, 형식을 과감히 넘어서야 한다. 평등을 위한 투쟁과 스스로 결정한 직접행동이 ‘공약’이나 ‘국가 의탁’을 넘어 소수자를 포함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자기 권력으로 사회를 직접 통제함으로써 진정한 평등과 차별철폐를 실현할 수 있음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근본적인 평등을 주장하고 행동해야 그곳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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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1&document_srl=336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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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투쟁] 자회사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대안이 될 수 없다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8/10/07 20:47
  • 수정일
    2018/10/07 20:47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 자회사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대안이 될 수 없다

    SKB비정규직지부 농성 현장을 찾아서

    - 임성용

     

     

    1. SK그룹 본사 농성 77일째

     

    지난 9월 14일 저녁, 종각역 6번 출구에 있는 SK그룹 본사 앞에서 희망연대노조 산하 ‘SKB비정규직지부 투쟁 승리를 위한 금요연대문화제’가 열렸다. 77일째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문화일꾼들이 참여해 진행해온 연대문화제다.

    SK브로드밴드(SKB)는 거대 통신사인 SK텔레콤의 자회사로, 인터넷, IPTV, 전화를 설치하고 유지 관리하는 업무를 주로 하고 있다. 전국에 103개 센터를 운영하고 있는데, 각 지역센터는 SK텔레콤과 위, 수탁 계약을 맺은 별도 법인 형태이며 노동자들은 전원 간접고용형태다.

    문화제는 노동조합 정책실장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전남동부센터에서 상경한 조합원의 투쟁발언, 섹소폰 연주, 비보이 춤꾼의 신나는 춤, 시낭송, 노동가수 김성만 씨의 노래가 곁들여졌다. 참석자는 50여명,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요즘 분위기로는 적은 숫자도 아니다.

    부분파업 중인 조합원들이 문화제 때마다 각 지역에서 교대로 단체 상경하고 있었다. 이날 순천에서 버스를 대절해 올라온 조합원은 활달하고 의지가 넘쳤다. 순천센터에는 30명 정도의 조합원이 있고, 순천과 여수 등 도시지역뿐 아니라 인근의 군ㆍ 읍면까지 전남 동부일대의 서비스를 담당한단다.

     

    “노동시간 단축, 안정된 임금 보장도 중요하지만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은 자회사 전환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우리는 비정규직 노조를 만들고 파업을 하면서 애초부터 ‘진짜 사장이 책임질 것을 요구’하고 투쟁을 벌여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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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경 조합원의 말에는 문제의 핵심이 담겨 있다. 여기서 SKB비정규직지부의 역사를 살펴보자.

     

    2. 자회사 만들기 꼼수

     

    SKB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한 것은 4년 전인 2014년 3월 30일이었다. 상부노조로는 ‘희망연대노동조합’에 가입했다.

    ‘희망연대노동조합’은 통신노동자, 콜센터, 물류 등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또한 노조 가입이 힘든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과 서비스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권리보장 사업을 하고 있으며, 지역이나 기업과 관계없이 개인도 가입할 수 있는 초기업노조이다. 노동조합이 지향하는 활동이나 신조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철폐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목표로 한다. 2009년 12월에 창립되었다.

    SKB에 노조가 생기고 각 현장에 지회가 결성되자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노동자들이 센터의 부당한 처우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수당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야간근무, 휴일 근무를 거부하기도 했다. 노조의 교섭 공문을 부착하지 않은 센터들은 조합원들의 거센 항의를 받아야 했다.

    2014년 11월, SKB지부는 다단계 하도급 근절, 고용 보장, 노동시간 단축 등을 요구하며 첫 전면파업에 나섰다. 이 시기에 현장지회장들이 자발적인 모임을 결성하여 즉각적인 파업에 나설 것을 노동조합에 촉구하기도 했다. 현장지회장들의 행동은 조합원들의 압력을 반영한 것이었기에 매우 의미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SK의 태도는 변화가 없었다. 이에 노동조합은 파업 50일 만인 2015년 1월 6일 SK그룹 본사 건물에 대한 점거투쟁에 돌입했다. 이날, 200여 조합원이 종로구 SK그룹 본사에서 점거 농성을 벌이다 전원 경찰에 연행되어 크게 보도가 되었다.

    한 달 후인 2월 6일에는 SKB와 LG유플러스 비정규 노동자 두 명이 장기파업사태 해결을 촉구하며 서울중앙우체국 앞 15미터 높이의 전광판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장연의, 강세웅 두 노동자는 고공농성에 돌입하면서 “원청인 통신대기업들이 사용자로서 책임을 갖고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나설 때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통신노동자들의 광고탑 농성은 80일 동안이나 이어졌다.

    이런 투쟁에 힘입은 희망연대노조는 이듬해 3월 초, 중재인이 참여한 가운데 회사 측과 교섭을 벌인 끝에 그 결과를 전체 조합원 찬반투표에 붙여 통과 시키고, 4월17일 조인식을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시작이었다. 임단협이 체결되었으나 각 현장은 이를 적용하는 문제로 센터 측과 승강이를 벌여야 했고, 센터의 탄압은 노골화되었다.

    게다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요구가 계속되자 SK는 교묘한 수법을 택한다. ‘홈엔서비스’라는 자회사를 만들어서 기존의 비정규직들을 이 회사에 정규직으로 고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는 SKB에 직접 정규직으로 고용하라는 요구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간접고용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 무늬만 정규직인 전형적인 꼼수를 부린 것이다. 현재 투쟁 중인 노동조합의 이름은 ‘SKB 비정규직 지부’인데, 그 사용자 주체가 ‘홈앤서비스’로 바뀌었을 뿐이다.

    회사 측이 노동자의 여망을 자회사를 통한 하청화로 교묘히 왜곡시킴으로서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복수노조가 만들어져 노동조합이 분리되고, 노동자들은 전환과 미전환으로 이간질되었다. 홈엔서비스가 만들어지면서 일부 노동자가 홈엔서비스 쪽 노조에 가입, 사측 입장에 동조해 투쟁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다행히 그 숫자는 훨씬 적어서 SKB비정규직지부는 2017년 8월, 창구단일화 절차를 통해서 교섭대표노조의 지위를 획득한다. 2018년 현재 홈엔서비스 조합원은 760명으로, SKB비정규직지부의 1,600명보다 훨씬 적다. 또한 홈엔서비스 조합원 중에도 200명은 이번 파업에 찬성했고 극히 일부지만 파업에 동참하기도 한다.

    회사가 자회사를 택한 이유는 당연히 직접고용을 회피하기 위함이다. 실제로 노동조건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임금도 변한 게 없고, 오히려 근로환경은 더 악화된다. 자회사는 노동자에 대한 통제를 쉽게 하는 수단임이 입증되었을 뿐이다.

    결국 올해 2018년 6월 29일, SKB비정규직지부는 다시 파업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3. 파업의 의미와 문재인 정부

     

    SKB비정규직지부 파업의 의의는 정치적으로도 크다.

    공공부분을 비롯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사항이었다. 그러나 일부 공공부문에서 무기계약직 전환을 했을뿐,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이었다. 오히려 여러 공기업들의 정규직을 가장한 기만적인 자회사 꼼수는 더 심했다.

    민간부문의 비정규직 문제도 다를 바 없는 문제였다. 문재인 정부는 재벌 중에서 특히 현대, SK와 손발을 맞춰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정책을 발표하자 민간 기업에서는 최초로 SK가 비정규직 직고용을 발표했다.

    문제는 그 직고용이라는 것이 한낱 자회사 설립이었다. SK 투쟁에서 보듯이,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정책은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실상 ‘정규직화 제로’이다. 따라서 SKB비정규직지부의 파업은 문재인 정부를 정조준하는 셈이다.

    이번에 쌍용자동차 해고자 전원 복직 합의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쌍용차 해고자 119명 전원복직 합의에 매우 기쁘고 감회가 깊다”고 했다. “걱정이 많으셨을 국민께 희망의 소식이 되었기를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편으로 “긴 고통의 시간이 통증으로 남는다.”고도 했다.

    대통령이 진심으로 고통을 느꼈다면, 여전히 고통 받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마음속으로만 희망이니 기쁨을 생각할 게 아니라, 실제로 희망을 주는 정책을 실행하고, 비정규직에게 기쁨을 주고, 노동자 모두에게 위로를 주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

    언제부터인지 노동, 사회에서 만연한 사회적 합의주의는 이젠 몇몇 개인이나 특정 노조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전 노동자적인 단결과 계급투쟁의 전망이 실종되면서 사업장도 변하고, 현장도 변하고, 노동자도 변하고, 노조도 변했다. 변하지 않는 것은 한가지다. 연대하여 투쟁해야 한다는 점이다.

    SKB비정규직지부 노동자들이 아직은 자기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싸우고 있지만, 상급노조와 노동자조직에서는 이 중대한 투쟁의 불씨를 전국적으로 상승시켜야 한다.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싸우고 있는 SKB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모든 노동자들이 지지와 연대를 보내야 할 것이다.

     

    4. 승리를 위하여 연대를!

     

    이번 파업을 이끌고 있는 정범채 지부장은 이날 문화제 마지막 발언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화수목, 교섭을 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사측에서 우리 조합원들을 징계하고 고소고발하고,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이 어떻게 교섭이란 걸 할 수 있겠습니까? 저들도 사람이라면 우리 민족의 명절인 추석도 앞두고 있는데, 이렇게 탄압일변도로 나올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교섭장에 나간 겁니다. 저들에게 얘기했습니다. 교섭 이틀 전에 대표에게도 얘기했습니다. 진짜 추석이라 좋게 마무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대체인력부터 빼고, 징계와 고소고발도 무효로 해라! 저들은 이야기합니다. 대체인력은 고객서비스 때문에 뺄 수 없고 징계라든가 고소고발은 법과 원칙에 따라서 하겠다고 합니다. 교섭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일 쟁대위를 통해서 앞으로 투쟁방향을 동지들과 함께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저는 투쟁에 있어서 동지들이 정말 가열차게 잘 싸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측은 이렇게 잘 싸우는, 특히나 가열차게 선봉에선 부대들을, 대표적인 조합원들을 징계하고 고소고발하고, 그것으로 우리 노동조합의 예봉을 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내일 쟁대위를 통해서 앞으로 우리 투쟁기조가 진짜 생활임금이고 뭐고 다 좋은데, 그런 생활에 필요한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 소중한 동지들에 대한 징계와 고소고발을 기필코 막아낼 수 있는, 그러한 강력한 투쟁계획을 같이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현재 저들이 벌이고 있는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의 작태들, 저런 기세를 우리가 꺾지 못한다면, 교섭도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교섭위원들에게 많은 좋은 말씀을 해주십니다. 근데, 교섭자리에선 그런 게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강하게 저들을 압박할 때, 저들은 꼬리를 내리는 것이지,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교섭에서 물론 최선을 다하겠지만, 정말 우리 노동자들의 이 절박한 마음 하나하나가 묶여서 투쟁심으로 똘똘 뭉치지 않는 이상 교섭은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소중한 동지들, 정말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교섭이고 투쟁이고 정말 나를 지키고 내 앞에 동지를 지킨다는, 내 가족을 지킨다는 그러한 각오와 투지로 싸워나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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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여름, 그 무더운 폭염을 이겨내고 농성장을 지켜온 정범채 지부장은 6월 말에 보았을 때보다 얼굴이 많이 거칠어져 있었다. 지친만큼이나 목소리도 차분했다. 그러나 그가 외치는 “질긴 놈이 승리한다 끝까지 투쟁하자!”는 구호 한마디에는 절박함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SK그룹 본사가 있는 서린빌딩 기둥을 등지고 세워진 농성천막, 빌딩 앞 도로변에 묶인 많은 현수막들, 가로수를 이은 줄에 매달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와 결의가 적힌 빨간 리본들 너머로 수많은 행인들이 무심하게 또는 궁금한 듯 바라보며 지나간다.

    저 펄럭이는 것들, 나부끼는 것들을 깨끗이 걷어내고 SKB비정규직지부 노동자들이 투쟁의 승리를 만끽하며 활짝 웃는 날은 언제일까?

    문재인 정부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외면하고 기업에게만 맡겨둔 채 방관하고 있는 한, 그런 날은 요원해 보인다. 우리가 비정규직 투쟁을 개별사업장 문제로 보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다면 역시 좌절의 시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보다 많은 관심과 격려, 그리고 문재인 정부에 대한 압박이 필요하다. 자회사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대안이 될 수 없다!

     

     

    *필자 : 임성용. 운수노동자, 시인. 시집으로 <하늘공장> <풀타임> 산문집 <뜨거운 휴식>이 있다.

    *월간 '시대' / 201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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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소개 3 : 노동계급과 혁명조직

    •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소개 3

    • 노동계급과 혁명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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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계급이 자신을 계급으로 조직하는 것, 즉 ‘계급으로서의 자기 조직화’와 ‘혁명적 계급의식’은 서로 연결되어 분리될 수 없으며, 노동계급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다. 노동계급은 사회 전체를 떠맡아야 할 사명이 있지만, 이전 계급들과는 달리, 현존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는 미래 사회를 지배할 권력의 어떠한 경제적 토대도 갖고 있지 않은 유일한 계급이다. 노동계급이 가진 유일한 물질적 힘은 그 조직화이다. 그래서 노동계급에 조직화는 다른 계급보다 훨씬 더 그들 투쟁의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조건을 이룬다.

     

     노동자들이 가진 유일한 사회적 힘은 조직상의 절대 우세이다. 그러나 그 힘은 단결하지 않으면 분쇄 당한다. 노동자들의 분열과 경쟁을 극복하고 자본주의에 대항해 최종적으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공통된 이해를 위해 조직하여 함께 투쟁하는 길밖에 없다. 노동계급은 생산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인해 단결과 연대에 기반을 두어 계급으로 조직을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자기 조직화는 가공할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조직화와 연대만으로는 자본주의 사회를 붕괴시킬 수 없다. 노동계급의 ‘자기 조직화’는 반드시 전투적 의지와 집단적인 의식으로서의 ‘혁명적 계급의식’과 결합해야만 계급투쟁과 계급의식을 더욱 강고하게 발전시킬 수 있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혁명적 투쟁을 벌일 수 있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과업이다. 노동계급의 한 부분인 혁명조직(당)은 전체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혁명 강령을 실현하기 위해 조직된 계급의 가장 의식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혁명조직은 계급을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하지 않는다. 모든 권력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장악하고 행사한다. 

    혁명조직은 계급의식의 발전과 조직의 성장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혁명조직은 대중들이 혁명 강령으로 향할 수 있도록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 투쟁에 앞장서서 싸우며,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철폐하는 길에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자본주의 아래 노동자들이 일상적 투쟁의 과정에서 얻게 된 계급의식은 혁명 의식으로 진전될 수도 있지만, 투쟁의 시기가 지나면 다시 돌아가 버리기 때문에, 노동계급에는 계급의 모든 역사·이론적인 성과들을 온전히 담아내는 강령을 가진 혁명조직이 필요하다. 따라서 혁명 강령 없는 혁명조직은 존재할 수 없으며, 혁명조직은 투쟁하는 노동계급과 조직적으로 함께해야만 혁명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코뮤니스트들과 혁명조직은 항상 적대하는 계급과의 투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 속에서 노동계급의 요구와 자기 조직화를 방어하고, 계급의 민주주의와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항상 계급투쟁에 복무해야 한다.

     

     혁명조직은 계급투쟁을 확산시키고 강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원해야 한다. 노동계급이 자본에 대해 독립적으로 자신을 조직하려는 모든 경향들(비공인 파업 투쟁, 직접행동, 파업위원회, 대중총회, 노동자평의회 등)의 출현과 확산을 촉진해야 한다. 혁명조직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총회, 점거 투쟁에서의 대중총회와 같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토론의 장, 프롤레타리아 정치 광장을 통해 계급의 민주주의와 토론문화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노동자들의 토론능력(문화)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실현이 계급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으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맞선 계급의 무기가 될 것이다.

     

     혁명조직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노동조합(주의)의 한계에 막혔을 때 과감히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직접행동, 노동자 공동행동, 비공인 파업, 대중(대대적)파업을 촉진해야 한다. 비공인 파업 투쟁의 형태는 역사적으로 노동계급의 자기 조직화를 가장 급진적으로 실현했다. 혁명 시기가 오기 전까지 혁명조직은 모든 계급투쟁 속에서, 자본에 맞선 경제적 요구들과 정부에 대항한 낮은 차원의 정치적 요구들을 부르주아 국가권력의 타도를 위한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키려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들이 상시화, 전면화되고 정치적으로 상승할 때 혁명조직은 구체적으로 파업위원회들과 노동자총회, 대중총회 조직들을 정치적으로 집중시키고, 노동자평의회 건설로 나아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국제적이다. 세계혁명은 세계혁명당(인터내셔널)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 당은 노동계급 사이에서 혁명 강령을 위한 투쟁을 만들어 내려고 서로 조직한 가장 계급 의식적인 노동자의 구체적인 정치표현이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당을 만들려는 시도는  너무 늦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었다. 따라서 세계혁명당이 만들어지기 전에 혁명 강령의 명확한 세부 내용이 잠재적인 구성 부분 사이의 토론과 논쟁을 통하여 관련된 모든 면에서 명료화해야 한다.

     

    •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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