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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3부-상)
소개
「혁명적 전망」(Revolutionary Perspectives) 정기 독자들은 소소한 사항을 추가하여 ‘자본주의 쇠퇴의 경제적 토대’를 재발간해 오고 있음을 알 것이다. 1974년 처음 발간된 이 글은 1975년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의 일부가 된 혁명적 전망 그룹의 기반이 되는 문서 가운데 하나이다. 반세기 전 작성된 이 글의 핵심 전제는 세월의 시험을 견뎠고, 처음 두 부분에 대해 우리는 원본에 가벼운 수정만 가했다.
그러나, 3부에서 우리는 온갖 혼란과 변화의 지난 반세기에 진입했고,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우리는 원래 글에서 제기된 것보다 더 장기적인 관점을 자연스럽게 발전시켰다. 사실, 이미 1976년 당시에도 도래하는 위기와 그 결과에 대한 전 세계적 노동계급 저항의 부활이 ‘전쟁인가 혁명인가’라는 물음이 의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즉각적인 의미에서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의미였음을 우리는 이미 결정했었다. 1970년대의 경제적 투쟁(우리들 사이에서는 ‘재정적 전투성’으로 칭한다)은 체제를 없애야 할 필요를 인식하는 계급의식을 자동으로 출현시키지 못했다. 심지어 그 체제가 더한 모순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해도 그랬다. 우리는 위기의 원인에 관해 설명했고, 여전히 남아있지만,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만약 그 이후의 사건들을 포함하지 않거나 우리가 다룬 사건들에 대한 분석을 심화하지 않는다면, 그 설명은 의미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3부와 이 연작의 이후 부분은 처음 두 부분에 비해 더 많은 편집이 가해질 것이다. 이 3부는 원본이 작성된 시기, 전후 호황(붐)의 마지막에 끝난다. 이 시기는 노동계급이, 엄청난 규모의 인플레이션으로 시작된 자신의 생활 수준에 대한 공격에 직면하여, 전 세계적 파업과 폭동으로 반응한 시점이다. 이는 CWO와 같은 코뮤니스트좌파 조직의 탄생과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Internationalist Communist Party), 「코뮤니스트, 투사」(Battaglia Comunista)와 같은 기존 조직의 재활성화로 이어졌다. 우리의 새로운 세대는, 우리를 우리가 살아가는 물질적 현실(유물론적 실재)을 설명하는 맑스의 분석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우리가 1970년대 초반에 볼 수 없었던 것은, 축적 순환의 마지막, 그리고 그 위기에 대가를 치르게 하려고 시도한 노동계급의 저항에 대한 체제의 반응이었다. 이 연작의 다음,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우리가 지금까지 작성한 모든 글을 요약할 것이고, 그 글은 이 축적 순환 -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이 축적 순환의 핵심 문제, 자본의 대규모 평가절하의 필요성 등 - 의 끝에 대한, 이어지는 자본주의자들의 뒤틀림과 전환에 대한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우리가 해야만 했던 것 중 또 다른 하나는 ‘쇠퇴’라는 용어를 정의하는 것인데, 이 쇠퇴가 자본주의의 빠르게 붕괴할 것이라는 의미로 잘못 해석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생산양식의 등장과 몰락에는 수 세기가 걸린다. 생산양식의 모순은 그것이 마침내 붕괴하기 전까지 새로운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고, 때때로 명백하게 확장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 이후에도 경제적 모순은 그 자체로 계급 규칙을 끝내지 않는다. 우리가 「국제주의 코뮤니스트」(Internationalist Communist) 23권에 썼듯이:
“우리는 자본주의 쇠퇴기 동안 극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보이는 특정한 현상을 밝힐 수 있지만, 이 시기가 역사적으로 끝나는 시점이 언제인지는 결코 내다보지 못한다. 대안의 부재 속에서 자본주의는 여전히 그 광기의 과정을 수행해 갈 수 있다. 자본주의가 쇠퇴한다고 기계적으로 사회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자연스러운 종말과 사회주의의 도래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행동 없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은 방법론적 오류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쇠퇴의 자연적 결과가 아니라 국제주의적, 그리고 국제주의자 당의 지도를 받은 프롤레타리아트 승리의 투쟁 과실이다.”1)
따라서 쇠퇴는 자본주의가 독점, 제국주의, 그리고 국가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경향의 시대, 그러나 이윤율 하락 경향의 법칙이, 비록 모습은 다를 라도 기본적인 채찍으로 남아 축적 순환의 물질적인 추동력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모든 특성을 묘사하는 유용한 약칭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쇠퇴는 전에 없는 거대한 위협을 제기한다. 지배계급의 언론들이 이야기하는 ‘복합위기’(polycrisis), 경제적 스태그네이션, 팬데믹, 제국주의 전쟁, 환경 오염과 세계적 온난화 등의 모든 위협은 단순히 자본주의의 미래가 아닌 인류 자체의 잠재적 미래를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어떤 보장된 미래도 없다. 우리는 맑스가 「코뮤니스트 선언」에서 묘사한, ‘투쟁’(contending)의 승리, 다시 말해 노동계급의 승리 또는 우리 모두의 몰락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직면하는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은 첫걸음일 뿐이다. 혁명적 소수도, 광범위한 노동계급도 무엇이 벌어질지 팔짱을 끼고 기다릴 수 없다. 집단적, 정치적 양쪽으로 모두 조직화를 시작할 시기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 이 연작은 그 노력에 공헌하고자 한다.
제국주의와 국가 자본주의의 시대
자본주의 쇠퇴의 시대
1914년 세계대전의 발발은 자본주의가 쇠퇴하는 생산양식임을 결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윤율 하락이, 그것이 자본주의 상승기든 쇠퇴기든 그 모두에서 자본 축적의 기본적인 추동력임을 이미 설명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단정적으로 세계 자본주의가, 심지어 축적을 어떻게든 해나가고 있었고, 생산력이 ‘확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쇠퇴하는 사회적 체제이고 그것은 1914년쯤부터라는 주장을 할 수 있었겠는가? 먼저, 우리가 자본주의의 쇠퇴의 시작 시기를 ‘1914년쯤’이라고 했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겠다. 생산양식은 어느 날 하룻밤 만에 갑자기 쇠퇴기에 접어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세계 경제를 만들어 내고, 코뮤니즘의 물질적 토대를 건설하는 그 역사적 책무를 모두 수행한 것이 1914년 이전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독점 자본과 세계 경제의 발전과 함께, 축적 순환상의 경제적 위기만으로는 축적 과정을 다시 활성화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 자본의 중앙집중화는 이미 선행되었고, 이제는 몰락할 것이라고는 주변부의, 너무 소규모, 생산성이 낮은 자본밖에 남지 않았다. 전 세계적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한 파괴의 결과로써 자본의 평가절하만이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다.
이 연구의 이전 부분에서, 일단 자본이 세계의 지배적인 생산양식으로 확립되어 버리면, 이윤율 하락의 역(逆) 경향이 헛된 것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제국주의, 종국에는 세계전쟁으로 나아갈 뿐인지를 보았다. 세계 자본의 등장은 자유방임주의 또는 고전학파 자유주의의 종말을 의미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자본 축적은 오직 각 지역 경제(national economy)에서의 지속적이고 증가하는 자본의 개입과 국가의 시민 사회의 점진적 흡수 – 전 세계적인 국가 자본주의로의 경향의 존재 - 라는 기반 위에서만 가능했다. 국가 소유(자산)의 증가와 생산수단 통제의 증가, 경제를 통제하려는 재정 정책을 제외하고서도, 이는 불모 생산(waste production. 즉, 세계 자본의 관점에서 자본 축적에 기여할 수 없는 생산)의 자극을 포함하는데, 무기 생산이 불모 생산의 가장 명시적인 표현이다. 고전적인 경쟁이 이제 제국주의 강국 사이의 영속적인 경쟁 상황에 포함되면서, 경기의 호황과 불황은 그 자신이 세계 경제 위기를 표현하는 것이 되었다. 세계 경제 위기는 종종 무기 생산의 증가와 새로운 자본 축적의 순환을 가능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자본의 대규모 평가절하를 동반했는데, 이 위기는 오직 전쟁으로만 해소될 수 있는데, 전쟁은 그 자체로 새로운 재건(reconstrucion)기의 전주가 된다. 20세기의 시작에서부터 자본주의의 역사는 위기-전쟁-재건 순환의 역사였다.
두 번의 세계대전은 자본의 평가절하의 수단으로 작동했고, 제국주의 강대국들2)의 재편성을 가능하게 했지만, 이후 선진국가의 제국주의 사이 경쟁의 책략 속에서 단순히 졸병 역할을 했던 중진국(less advanced states)의 상대적인 지위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른바 ‘개발도상’은 제국주의 강대국들과 독립적으로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에서 국제적,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존재는 세계혁명과 더 높은 수준의 생산양식으로서의 코뮤니스트 제도의 물질적 가능성의 존재를 의미했다. 1917-21년 세계혁명의 물결은 그 패배에도 불구하고 코뮤니즘이 더는 유토피아적 이상이 아니라 실질적 가능성임을 증명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제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지속적 존재가 생산력 발전의 ‘족쇄’임을, 그리고 사회가 야만으로 침몰하지 않으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코뮤니스트 제도가 필연적임을 증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도중, 그리고 이후의 국가 주도 경제화
우리는 제국주의에 대한 논쟁 가운데, 1870년쯤부터 계속, 선진국에서 총 국민 소득에 비례하여 국가 지출이 증가한 것을 보았다.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국가 지출의 가장 거대한 단일 항목은 국방비지만, 교육 및 공공사업(높은 기술적 구성이 요구되는 가스, 상수도 등의 서비스) 또한 중요한 항목이었다. 1909년, 영국 정부는 쇠퇴하는 자본주의가 국가에 의해 유지되기 위해 얼마나 필요한지를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ritish Petroleum)을 결성하고, 정부의 통제 지분을 확보함으로써 보여주었다.
그러나 연구의 이전 부분3)에서 지적한 ‘도금의 시대’(Gilded Age) 독점 경향이 독점 가격을 통해 새로운 자본의 발전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과정을 왜곡할 것이라 위협하는 일은 미국에서 발생했다. 조직된 노동의 저항에 대한 반응으로, ‘농민 운동’(Granger Movement)의 농민들은 반(反)-독점당을 설립하고, 1890년 첫 번째 독과점 금지법, 셔먼 조례(Sherman Act)를 통과시켰다. 맥킨레이(McKinlay) 대통령 정권의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그리고 사회적 다윈주의) 아래, 그 법은 대개 이용되지 않았다. 그가 암살된 이후, 후임자인 아메리카 제국(American Empire)의 열정적인 지지자, 테오도르 루스벨트 시기가 되어서야 JP 모건과 록펠러가 의지할 만한 것들을 이루기 위해 그 법을 적용했다. ‘경쟁을 보호하기 위해’ 정보가 개입해야 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 자본주의자의 주장에 따르면 경쟁은 시스템에 의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심지어 오늘날의 시장마저도 규제되고 나아가 국가에 의해 시장이 ‘만들어지는’4) 과정의 출발점이었을 뿐이다. 루스벨트는 실제 산업을 국유화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았지만, 정부 계약이 국가 계획과 자본의 주요 원천이 되는 지점에서 산업들과 관계를 구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군산복합체’(military – industrial – Congressional – complex)의 씨앗은 뿌려졌고, 그 무렵, 전후 붐 시기, 산업의 지도자들은 정부 서비스에 막힘없이 드나들었다.5)
1914년, 전쟁의 발발은 전쟁 목적 생산에 대한 다소간의 직접적 통제권을 중앙 정부가 갖고 있던 선두 자본주의 강국들 모두의 내부에서 국가 주도 경제화의 진행이 가속했다. 1916년 이후, 독일 제국에서는 라테나우(Rathenau)의 경제 통제가 너무 강력하여, “국가 사회주의”로 회자하였으며, 그를 도와 군수품 부서(Ministry of Munitions)를 운영하던 로이드 조지(Lloyd George)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 ‘모든 생산, 분배, 그리고 교환의 모든 수단’이 총체적으로 그들의 마음대로였다”6)
이 국가 개입의 특정 측면들은 다수 전후에 폐지되었으나 나머지는 유지되었고, 국가 자본주의는 모든 자본의 경향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경제의 국가 주도화 경향은 단순히 전쟁으로 인한 군사적 요구에 맞추기 위해 조정한, 민족 국가 내부에서의 생산 필요성의 결과 – 비록 그 필요가 경향을 가속하고 강화했지만, - 가 아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기형적으로 높은 수준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초래한 만성적 잉여가치의 부족으로 추적할 수 있다. 산업의 침체기(불변자본을 더 증가시키기에는 너무 낮은 잉여가치)를 맞아, 경제 붕괴를 피하고자 국가는 지금까지는 시장의 기능이었던 정책을 채택해야만 했는데, 그것은 전체 경제에서 잉여가치를 재분배함으로써 평균 이윤율 형성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자본의 집중 과정에서 더 큰 잉여가치는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의 대기업들 사이에서 나눠지고, 이는 시장이 그 자신의 몇몇 기능을 잃어가는 과정이다. 시장 메커니즘이 자본의 확장 과정에서 수요와 공급을 ‘맞추기’를 멈춰버리면, 이윤율의 평균을 형성하는 문제는 복잡해진다. 개별 산업의 개별적 이윤율에도 불구하고, 모든 필수적인 산업의 동시적인 이윤율의 존재를 감안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윤율의 평균은, ... 잉여가치를 ‘통합(pooling)’함으로써, 스스로 사회적 수요의 수단이라 주장하는 사회적 생산의 물리적 필요를 만족시키려는 것을 암시한다. 자본의 지체(stagnation)는 그것이 문제가 있는 수요로 표현되는데, 잉여가치의 사회적 ‘통합’에 참여하는 자본 주체(entities)를 증가시키는 데 걸림돌이 된다. 잉여가치의 통제는 자본주의의 안전에 필수적인 것이 되고, 이윤의 분배는 정부의 관심사가 된다.”7)
이런 이유로, 은행, 금융 등에 대한 국가 통제가 뚜렷하게 증가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1929년 위기의 시작과 더불어, 정보 보조금, 많은 기간 산업의 노골적인 국유화가 이뤄졌다. 따라서, 보기를 들면, 프랑스 정부는 그들의 거의 모든 해운 회사, 민간 항공 회사, 부채를 지불할 수 없는 은행과 국유화된 철도회사에 자금을 빌려주었다. 영국 정부는:
“... 철도의 통합을 달성(1921), 전력 공급의 부분적 국유화(1926), 정부가 지원하는 철강(1932) 독점, 그리고 국가적 석탄 카르텔(1936)을 만들어 집중화를 이루었다...”8)
나치의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볼셰비즘에 반대해 불평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경제 통제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자본주의자들은 “통산·산업의 영지”(Estate of Trade and Industry)로, 노동자들은 노동 전선(Labour Front)으로 조직화하였는데, 그러는 동안 1938년 2월, 괴링(Goering)은 ‘4년 계획’(Four Year Plan)을 실현하기 위해 경제적 독재를 실시했다.
“이 소개된 방법들은 ... 경제에 대한 특정 나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들은 일종의, 마지못해 채택된 계획이며, 1930년대 현재 많은 국가에서 ‘케인즈주의’라는 용어로 요약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도입된 ‘전쟁 사회주의’에 일부 기반을 두고 있다.”9)
이탈리아에서는 1933년, 파시스트 정부가 산업재건기관(the Institute for Industrial Reconstruction, IRI)을 세웠다:
“... 정부의 경제 자립 정책과 재무장 정책을 돕기 위한 영속적인 산업 지주 회사로서, 민간 기업이 충분한 자금을 투자할 의지가 있는 산업과 서비스에서만 활동하도록 계속해서 그 활동에 한계를 두었다.”10)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모두, 경제적 회복은 무기 생산과 노동계급에 대한 야만적인 착취에 기반을 두었다. 그런데도 1929년에서 1938년 사이, 두 나라의 총 사회적 생산은 감소했다.11) 우리는 아래에서 쇠퇴하는 자본주의 아래 이 메커니즘에 어떻게 축적을 ‘돕는지’ 알아볼 것이다. 그러나, 국가 주도 경제화(산업의 국가 소유라는 의미에서)는, 한 편에서 잉여가치의 재분배를 지원하고, 경제 지원을 돕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사적 영역의 이윤율 하락을 심화시킨다. 왜냐하면, 주로 사적 영역의 잉여가치를 지휘함으로써, 국가가 이 기업들의 자금을 댈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국가자본주의화 된 경제(이른바 ‘코뮤니스트’ 국가)에서 작동하는, 높은 잉여가치율의 산업(제2 영역에 속하게 될 것)과 낮은 잉여가치율의 산업(제1영역에 속하게 될 것) 사이에서 이윤율을 국가가 평등화하려는 시도에서, 똑같은 과정이 발생하는데, 한 산업에서 다른 산업으로 자금을 이전시키는 것이 여기서는 더 쉽다. 왜냐하면, 국가가 하나의 거대 기업가로 행동하면서, 총 국가 자본을 직접 통제하기 때문이다. 모든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서 수익이 나지 않는 부문을 국가가 관리하는데, 이는 전체 경제의 관점에서 생산 비용의 증가에 해당하고, 따라서 이윤율의 하락을 심화시킨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과학적 관리법’, ‘노동절약’ 기구, 성과급 시스템의 도입 등의 수단을 통해 생산을 ‘합리화’하려는 노력에 속도가 붙었는데, 이러한 노력은 여전히 이윤을 내는 산업에서 착취를 강화함으로써 떨어지는 이윤율을 상쇄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였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 하락은 실질임금이 세기 초 수준 아래로 떨어졌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명백했다. 그동안 독일에서는 ‘국가 경제에서 임금의 비율이 1932년 64%(이것마저도 1928년 수준에서 심각하게 떨어진 것)에서 1938년 57%로 떨어졌다.’12)
그런데도, 상대적, 절대적 잉여가치를 증가시키려는 시도들은 모든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확대되던 실업 증가에 기여했고, 중앙 정부는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한번 개입하여 국유화, 사회 보장 제도, 그리고 공공사업을 심화했다. 미국 F.D.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은 이러한 정부 개입 가운데 가장 거창한 것이었다. 뉴딜 정책의 수단들은 그 정치선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축적의 실제 ‘마중물’이 된 적이 없고, 그저 대공황을 거치는 동안 사회적으로 체제를 단결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이다. 1937년쯤에 이르러서는 국가 지출 단독으로는 이를 끝내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이미 명백했다. 그 대신, 경제위기 시기 고조된 제국주의 긴장이 관세 장벽 강화에 따라 근린궁핍화정책(“beggar my neighbour”)과 ‘경제자립 정책’을 불러오거나, 또는 ‘특혜 관세’(imperial preference)가 국가적 필요에 의한 것으로 주장되었다. 이러한 긴장 아래의 재무장은 군수 산업의 이윤율은 높였을는지도 모르나, 1939년과 1941년 제국주의 전쟁의 전면전에 추동을 더했을 뿐이었다. (이 제국주의 전쟁은) 궁극적으로 엄청난 양의 자본 가치를 파괴함으로써 축적의 새로운 출발, 그리고 1945년 이후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긴 세속적 호황기의 신호가 될 것이었다.
소련에서는 단일 국가에서 고립되어 발생한 1917년 혁명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 자본주의의 다른 종을 낳았다. 세계혁명의 전망이 미래로 멀어지자, 1921년 신경제정책(NEP)이 채택되었다. 레닌은 너무도 솔직하게 이것이 ‘국가 자본주의로’의 후퇴라 했으나, 그는 항상 국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가는 중간 단계의 무언가를 제공할 것이라는 환상을 버리지 못했다. 심지어 러시아의 좌익 코뮤니스트들은 러시아에서의 서유럽 방식 국가자본주의(이후 ‘혼합경제’로 불림)를 구축하려는 어떤 시도들도 맹비난해 왔는데, 이들조차 생산력의 완전한 국가 소유가 사회주의와 같은 것이 아님(엥겔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을 알 수 없었다. 1920년대 계속된 소련 내 논쟁은 자본 축적을 받아들이는 방향이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NEP를 지속하는 옹호자로서 부하린이 등장하는 동안(그리고 농민에 대한 양보로 농업을 성장시키면서), 그의 이전 좌익 코뮤니스트 동료였던 프레오브라젠스키(Preobrazhensky)는 산업화를 더욱 가속할 것을 요구했다(트로츠키가 이 정책을 지지했다). 좌익 반대파 가운데 이 ‘초-산업화 지지자들’(super-industrialisers)은 스탈린이 당 조직을 장악하면서 패배했는데, 1928년 스탈린이 그들의 정책을 훔치는 것도 막지 않았다. 스탈린주의자들이나 대부분의 트로츠키주의자는 그 이후 이것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추동의 시작이라고 주장해 왔는데, 사실은 이는 그것이 아니라 다른 국가 자본주의 모델의 시작이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주의의 굴레 아래 있으면서, 그들의 이전 제국주의 주인들의 자본 투자에 의존하지 않고 축적할 방법을 찾던 국가에 이 초-산업화는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스탈린은 5개년 계획(Five Year Plan)의 동기는 러시아 노동자의 더 나은 삶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그들을 착취하는 것이 이 계획에 잉여가치를 제공할 것이었다), 서유럽 열강들의 공격 – 스탈린은, 1928년에도 그들이 소련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 에 저항할 수 있는 군수 기계를 만드는 데 있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나치가 조금 이후에 말할 것처럼, 그것은 ‘버터가 아니라 총’(guns not butter)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동안, 월가의 충격 이후 대규모 실업이 서유럽 경제를 황폐화했을 때, 5개년 계획은 완전히 계획된 명령 경제(소련에서는 ‘사회주의’로, 그리고 서유럽에서는 ‘코뮤니즘’으로 잘못 불렸다)가 전통적인 자본주의 경제보다 우월하다는 인상을 주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에 이르는 기간 두 주요한 열강 사이의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경쟁이 고조됨에 따라, 이것은 전쟁 직후의 파업 물결, 주택 점유와 나란히 이른바 ‘자유 세계’에서 복지와 사회 보장 제도의 도입에 일정 역할을 했다.
전후 호황(The Post-War Boom)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1차 세계대전 이후와 마찬가지로 경제에 대한 전시 통제가 완화되는 일은 없었다. 사실 국가 자본주의 경향은 갈수록 확실해졌다. GNP 대비 국가 지출 비율은 극적으로 증가했다. (아래의 국가 지출 및 공공 부채 표를 보라). 소련에서는 1946년 제4차 5개년 계획 개시가 선언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모네’(Monnet) 계획을 채택하고, 르노, 석탄, 가스, 전기, 프랑스 은행, 대규모 시중 은행, 에어 프랑스, 그리고 최대 규모의 보험 회사들을 국유화했다. 영국이 국유화한 대상들도 그에 못지않았다. 우리가 이전에 지적한 것처럼, 미국의 국가 자본주의가 정부의 국방 관련 계약의 형태를 취하는 동안, 전후 재건기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의 회복은 미국의 마샬 원조(Marshall Aid)에 의해 시작되었고, 전쟁 이전 국가 통제를 이용해 유지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IRI(위의 내용을 보라)가 거대한 규모로 성장, 국가 철강의 60%를 생산했으며, 알파 로메오(Alfa Romeo)사를 소유, 20만 명의 공학 노동자를 고용했으며, 그 외에도 대부분의 공공시설과 사업을 통제했다; 그동안 독일에서는
“이 시기 부르주아지는 자본 축적을 강제하도록 국가 기관과 통화, 재정 체계를 다른 어떤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보다 더 많이 이용했다.”13)
이러한 국가 자본주의의 성장은 아마도 서유럽의 민간 산업에서조차, 공공 영역이 이제 보편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고용주로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래의 공공 영역 종업원 표를 보라). 정부의 직접 통제는 주로 기간 산업들에서 이뤄졌는데, 이 산업은 자본의 갱신과 축적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이윤이 필요하다는 점은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국가가 그들을 장악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이윤율의 동등화 경향이 무너지는, 역사적 위기의 지표이다. 이것은 1970년대 초, 전후 호황이 끝났을 때 국유화를 향하는 경향들이 처음에 더욱 강화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국가가 통제하는 UCS와 롤스 로이스(Rolls Royce), 그리고 국민 기업 위원회(National Enterprise Board) 형태의 국가 주도 경제화의 심화, 그리고 브리티시 레일랜드(British Leyland), 당장의 선박제조 산업들의 국유화와 함께, 영국은 이러한 방식의 보편적 발전을 이끌었다.
공공 영역 종업원의 숫자 – 노동력 대비 비율(%)
국가
|
총 일반
정부 부문
|
공기업
|
총 공공 영역
|
영국
|
11.9
|
10.1
|
22.0
|
캐나다
|
9.9
|
2.0
|
12.0
|
미국
|
16.7
|
0.04
|
16.7
|
베네수엘라
|
12.4
|
1.2
|
13.6
|
칠레
|
10.1
|
N.A.
|
10.2
|
아르헨티나
|
11.5
|
3.5
|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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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퇴하는 자본주의의 영속적 특징인 인플레이션
경제 부문에서 국가 주도 경제화를 동반하는 국가 지출의 많은 부분은 사실 비(非)생산적 부문이다 – 그것은, 자본 축적을 심화시키지 않는 지출이라는 것이다. 무기 생산뿐만 아니라 전체 제3의 영역(사회적 서비스 등)은 비생산적 지출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포함될 수 있다. 그런데도, 비생산적 지출의 증가는 그 자체로 인플레이션(다시 말해, 가격의 상승)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전체 경제 수준에서 보았을 때 총가격은 총가치에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총 사회적 자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러한 비용이 잉여가치의 ‘못’(pool)에 있는 배수관을 상징하고, 따라서 이윤율 하락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하는 것임은 명확하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은, 연관된 가치 생산의 양적 증가 없는 화폐 공급 확장의 결과이다.
다른 말로, 가격의 상승은, 대량의 통화는 반드시 특정한 어떤 상품으로 교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화폐 공급의 확장으로 인한 자신의 실제 가치를 재정립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통화의 가치 하락을 반영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연관된 가치 생산의 증가 없는 화폐 공급 증가의 결과는 부르주아 고전 경제학 이론의 용어로, MV = PT로 표현할 수 있다. 이때 M은 화폐의 양, V는 순환 속도, P는 가격, T는 산출물이다. 명백히, M의 증가는 그에 동등한 T의 증가 없이는 P(다시 말해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진다. 비생산적 지출은 그렇게 방정식에 삽입된다.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중요한 요인은, 새로운 가치(또는 고전 경제학 용어로 ‘산출물’)의 생산 증가보다 빠른 화폐 공급의 확장이다. 따라서, 비생산적 자본이 어떻든 관계없이, 화폐 공급의 확장 없이는 인플레이션도 없다. 그러나, 실업이라는 매우 큰 위기가 있을 것이다.
전후 시기 국가는 화폐 공급의 확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더욱 몰리고 있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임금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회피하고, 실질 구매력을 약화하는 간접적인 공격을 하기 위해서였다. 직접적인 공격이,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지만, 정부 수입의 중요한 원천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국가 책임 증가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수입 전체를 공급할 수는 없다. 적자 재정(다시 말해 국가가 세금으로 거두어들이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지출하는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1930년대 초 금본위제가 폐기된 이후 모든 ‘혼합’ 경제 국가들의 공통 특징이었다.
국가가 화폐 공급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각 국가 경제가 금속(주화) 교환 기준의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필수적이다. 19세기 전체에 걸쳐 국가 경제에서의 화폐 공급은 국가 경계 내에서 보유하고 있는 실제 금(괘) 또는 은(괘)의 양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발행된 지폐는 법적으로 주화로 교환될 수 있었고, 지폐 발행의 양은 은행이 보유한 주화로, 일정 법적 고정 비율로 교환해 줘야 하는 의무에 의해 제한되었다. 따라서 화폐의 공급은 각 국가 내의 은행이 보유한 금은괴 보유량에 의해 제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적대국이 화폐를 찍어냄으로써 엄청난 재정 비용을 감당하면서 국제 금본위제의 포기를 맞이했다. 따라서 1918년에 이르렀을 때, 독일의 지폐 발행 증가는 1914년 수치의 5배였고, 영국은 전 이전 수치의 4.5배, 프랑스는 1914년 합계의 거의 4배였다. 이러한 화폐의 증가는 전쟁으로 인한 폐기물 생산에 돈을 대는 것이었고, 이는 새로운 자본의 생산으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격은 독일에서 245%, 영국에서 230%,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353% 급증했다.14) 여러 국가에서의 금본위제 폐지를 동반한 화폐의 평가절하는 세계 시장에서 판매되는 평가절하된 국가의 상품들의 단기적 경쟁력을 향상했으나, 다른 국가들로부터의 상품과 비교했을 때 가격은 낮아졌다. 그러한 효과는 오직 일시적인 것이 될 수 있었는데, 경쟁하는 국가들이 금본위제를 폐기하고 그들의 화폐를 평가절하하도록 부추겼기 때문이다. 1936년쯤에는 이전에는 금본위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이 ‘황금 연합’(gold bloc)의 국가들은 이제 금본위제를 폐기하고 자신의 화폐를 평가절하했다.
1930년대에는, 제1차 세계대전 중과 꼭 마찬가지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중앙 정부는 금본위제를 포기함으로써 화폐 공급을 증가시키고, 경제에 대한 그들의 개입을 확대할 수 있었다. 아래에서 볼 것처럼, 정부 지출의 최대규모 증가는 무기 생산의 대규모 증가 때문이었는데, 대규모 실업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에 대한 공포는 국가가 기존의 복지 서비스를 확대하고 공공사업의 건설에 개입하도록 했다.
국가별 총 국가 지출 및 공공 부채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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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국가 지출
(각 국가 통화 기준. 현재가치 000,000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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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 부채
(국가 수입에 대한 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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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 or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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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or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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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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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or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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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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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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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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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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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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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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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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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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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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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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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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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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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4
|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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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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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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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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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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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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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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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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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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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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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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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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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공개 기명 어음의 양에 대한 정보 원천: 클라우 & 콜(Clough and Cole), “유럽의 경제 역사”(Economic History of Europe), 8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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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적자 재정으로 자금을 확보했던 폐기물 생산의 큰 증가는 오직 인플레이션을 확대하고 공공 부채를 증가시킬 수 있었을 뿐이었고, 이는 위의 표로 증명된다.
제2차 세계대전에 투입된 엄청난 비용은 다시 국채나 재무부 단기 채권을 담보로 한 은행으로부터의 중앙 정부 대출로 충당되었고, 결국 화폐 공급을 확대했다. 아래의 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지폐 순환의 증가를 명백히 보여준다. 전쟁 자금을 위한 화폐 공급의 엄청난 증가는 가격을 고정하는 수단들이 무용해지면서 전쟁이 끝날 무렵과 그 직후, 모든 적대국에서의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자 도입된 정책들은 다시 한번 문제에 대한 일시적인 해결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폐 순환의 증가
(1939년 7월 ~ 1944년 12월)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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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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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가 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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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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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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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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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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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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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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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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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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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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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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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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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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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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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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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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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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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2월
|
160
|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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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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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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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클라우 & 콜 “유럽의 경제 역사”, 847쪽
서유럽에서의 케인즈주의 조치의 도입은 다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들이 강제적으로 도입한 정책들의 다소 의식적인 확장으로 보였다. 케인즈는 자본주의의 주기적 위기를 투자를 촉진하는 이윤율을 조작함으로써, 그리고 불황기 고용을 유지하기 위한 적자 재정과 공공사업으로 피할 수 있고, 결과적인 국가 부채의 증가는 ‘호황’기에 상환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실제 일어난 일은 모든 선진국가에서의 국가 부채의 영속적인 증가였고, 인플레이션은 쇠퇴기 자본주의의 영속적 특징임이 증명되었다. 보기를 들어,
“서유럽의 물가는 1947년에서 1957년 사이 66% 증가했다. 이것은 매년 5% 증가한 결과인데, 이 비율은 국채 수익(세전)과 거의 같은 정도이다.”15)
케인즈주의 이론에 따르면, 점진적인 인플레이션은 국가 경제의 건전하지 못한 특징보다 오히려 건전한 것이며, 왜냐하면 이것은 사업가들이 투자하도록 하고, 세계 시장에서 수출물의 경쟁력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애초에 인플레이션의 존재 이유를 기억한다면(생산으로 인한 새로운 가치의 증가보다 화폐 공급의 확대가 빠른 것), 인플레이션은, 만약 화폐 공급의 팽창 비율이 계속 가치 생산의 비율을 계속해서 앞지른다면, ‘점진적’ 과정을 넘어선 무언가임이 명백하다. 앞으로 우리가 살펴볼 것처럼, 이것은 프랑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칭한 “30년간의 영광스러운 세월”이라는 장기 호황의 끝을 가져온 세계적 규모의 “경기 후퇴”의 진행과 함께 1970년대 일어났던 일이다. (계속)
ER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2023년 9월 8일
<주>
1) 쇠퇴의 개념 구체화 참고
2) 보기를 들어, 미국 경제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에 대한 표는 다음과 같다.
3)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2부) 참조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4018
4) 이러한 미국 정부의 조치 변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팀 우(Tim Wu)의 '거대함의 저주 - 새로운 황금시대의 반독점'을 참조
5) 가장 유명한 인물은 1953년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입성한 제너럴 모터스의 사장 찰스 윌슨이다. 그는 상원 청문회에서 제너럴 모터스의 막대한 지분과 미국 제국주의의 이익 사이에 이해 상충이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언론인들은 이를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다’라는 유명한 문구로 축약했다. 결국, 윌슨은 자신의 주식을 팔아 이를 확인받았다.
6) 로이드 조지(Lloyd George)의 전쟁 기억 1권, 147쪽
7) 폴 매틱(Mattick), 맑스와 케인즈, 115-6쪽
8) E. 홉스봄(Hobsbawm), 산업과 제국, 242쪽
9) D. 차일즈(Childs), 1918년 이후 독일, 59쪽
10) E. 탄넨바움(Tannenbaum), 이탈리아의 파시즘, 112쪽
11) 클로프와 콜(Clough and Cole), 유럽 경제사, 764쪽
12) ‘제국주의 본국의 분석에 관하여: 서독의 사례’, 사회주의 경제학자 회의 회보, 1974년 봄, 6쪽. 동유럽과 소련이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독일의 '경제 기적'에 대한 유용한 설명이다.
13) 위의 책, 19쪽
14) 클로프와 콜(Clough and Cole), op.cit. 734쪽에서 발췌한 수치이다.
15) 매틱 op.cit. 147쪽에서 인용. J. O. 코포크(Coppock), 유럽의 필요와 자원에서 인용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3-09-08/capitalism-s-economic-foundations-part-iii
<이전 글>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1부)
https://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3645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2부)
https://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4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