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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에 반대하는 반(反)파시즘

들어가며
1918년 11월은 독일혁명이 시작된 해이다.1) 독일 수병들이 시작한 계급투쟁은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을 종식했다. 이것은 이 시점에서 우리가 반드시 인식해야 할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민주당과 같은) 부르주아지의 자유주의 세력과의 동맹이 아니라 계급투쟁만이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유일한 프롤레타리아의 대응이다. 반(反)파시즘은 자본가계급의 자유주의 세력과의 동맹이며, 이것이 바로 파시즘이 노동계급의 이익에 치명적이라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독일혁명 이후 106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전쟁, 중국에 대한 전쟁 위협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흔히 '파시스트'로 불리는 독재 정권이 오히려 '독재'에 맞선 '민주주의'를 근거로 정당화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한국에서 윤석열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했고) 바이든은 '민주주의' 수호를 우크라이나 무장의 정당성으로 삼았고, 푸틴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격을 '반(反)파시스트' 군사 작전으로 묘사했다. 이스라엘은 종종 ‘파시스트’로 묘사되는 이슬람 ‘독재’와 싸우는 중동에서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로 자처한다. 실제로 이 모든 전쟁은 제국주의 전쟁이며, 자신의 적을 ‘파시스트’로 묘사하는 것은 적나라한 제국주의 분쟁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위장이다.
영국에서는 최근 포퓰리즘 정당인 '개혁당(Reform)'이 부상하고 있는데, 이 역시 '파시스트'로 불리고 있다. 좌파는 2024년의 폭동2)이 파시즘이 실제로 활동하는 사례이므로 파시즘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폭동의 진짜 원인은 무엇인가?
국민 소득에서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30년 넘게 감소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의료 서비스, 학교, 사회 복지, 연금 등에 지불하는 사회적 임금은 모두 감소하고 있으며, 공공 서비스 회사는 노동계급의 돈을 국제 시장에서 투기하는 데 사용하고, 강과 해안이 하수로 오염되는 동안 노동자들은 더 높은 요금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러한 위기는 소부르주아 계급의 일부를 망가뜨리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을 이민자와 망명 신청자 탓으로 돌리는 영국독립당(UKIP)이나 개혁당 같은 정당을 지지하도록 만들고 있다. (한국의 극우는 중국과 북한-종북좌파 탓으로 돌림)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원인은 분명히 우리에게 빈곤과 엄청난 불평등, 야만적인 전쟁을 가져온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위기이다. 이 모든 것을 이민자와 난민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는 실제 상황을 위장하는 수단이고, 둘째는 노동계급이 진짜 적(敵)인 자본가계급과 싸우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주의를 돌리는 것이다. 따라서 (극우) 폭동은 자본가계급에 도움이 된다.3)
자본가계급은 한편으로는 임금을 낮추기 위해 값싼 노동력으로 이민자를 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진짜 적이 아닌 노동자끼리 서로 싸우게 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위기의 책임을 이민자에게 돌리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자본주의 정치 기구인 좌파의 반응은 어떠한가?
노동조합, 스탈린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자본가계급의 우익과 토미 로빈슨(Tommy Robinson) 여단의 돌격대에 대항하는 행진과 집회를 통해 반파시즘을 기반으로 그들의 세력을 동원했다.
그러나 자본가계급의 한 분파, 즉 파시스트에 맞선 동원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지지를 의미한다. 그 이론적 정당성은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 정치 세력 중 덜 나쁜 세력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좌파의 정치적 조상들은 1920년대 초부터 파시즘이 노동계급을 분쇄하기 위한 또 다른 전략이며, '민주주의'와 '파시즘'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와 '파시즘'의 관계는 공생 관계이다. 둘 다 동등하게 싸워야 한다.
반파시즘의 논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수호함으로써 파시즘에 저항하는 것이다.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면 이탈리아의 민주적 부르주아지가 무솔리니의 길을 닦았고, 독일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 노스케와 샤이데만이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가는 피의 길을 닦았으며, 바이마르 부르주아지가 나치를 집권하게 했다. 착취당하는 계급에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와 파시즘은 크게 다르지 않다.
부르주아지의 어떤 분파를 지지하기 위한 동원은 단지 잘못된 전략이 아니라 치명적이고 반(反)혁명적인 전략이다. 스탈린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타락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하 코민테른)이 1930년대에 지지했고, 오늘날 다시 지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전략이다. 역사는 이 전략이 어떻게 수십만 명의 프롤레타리아를 죽음에 이르게 하면서도 자본가계급의 권력은 굳건히 유지하게 했는지 보여준다. 가장 노골적인 보기는 스페인 내전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수천만 명의 사망자를 낸 제2차 세계대전의 동원 호소가 반파시즘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혁명적 패전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제국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이다. 제국주의 전쟁에서 반파시즘을 기반으로 하는 동원은 혁명적 패전주의와는 정반대이다.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앞서 언급했듯이 코뮤니스트좌파는 노동계급에 관한 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파시즘' 사이의 잘못된 정치적 구분을 명백히 거부한다. 두 가지 모두 자본가계급이 상황에 따라 노동계급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이다. 민주적 방법이 더는 통하지 않을 때 그들은 파시즘을 사용할 것이다.
파시즘은 부르주아지 자신이 부르주아 강령을 수행하기 위해 권력을 잡은 소부르주아지 운동이다.
이에 대한 가장 명확한 보기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찾을 수 있다. 두 나라 모두 제국주의적 목표가 1차 세계대전 후의 합의로 좌절되었고 전쟁 후 위기로 인해 소부르주아지가 파멸했다고 생각한 국가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대표하던 지올리티(Giolitti)가 파시스트 부대에 자유로운 통치를 허용하여 전후 노동계급을 공격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은 1922년 이른바 '로마 행진' 이전에 일어났다. 로마 행진 이후 이탈리아 자본가계급은 무솔리니 정부를 지지했다. 피아트의 아그넬리(Agnelli), 피렐리(Pirelli), 베니(Benni), 안살도(Ansaldo) 등. 무솔리니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지지한 자본가들의 이름은 마치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유명 인사들처럼 나열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10년 후 히틀러는 민주적 바이마르 정부의 힌덴부르크(Hindenburg) 수상으로부터 정부를 구성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탈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나치는 보글러(Vogler,), 티센(Thyssen), 스틴스(Stinnes), 펑크(Funk), 크루프(Krupp) 등과 같은 독일 부르주아지 핵심 부분의 자금과 지원을 받았다.
일단 권력을 잡은 파시즘은 부르주아지와 동맹을 맺고 민주주의적 제약을 제거하는 강력한 국가를 통해 운영한다. 법령으로 통치하고, 노동자의 정치 및 산업 조직을 분쇄하며, 이탈리아 유격대, 나치 돌격대(SA) 또는 이후의 친위대(SS)와 같은 준군사 조직을 이용해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착취에 복종하도록 강요한다. 동원 구호는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의 구호이며, 자본주의의 모든 문제점은 부당한 조약, 유대인, 이민자, 다른 인종 등 자본주의 자체 외부의 요인에 대한 비난으로 돌린다.
이탈리아에서 반파시즘을 정당화한 자는 그람시였다.
보르디가가 이끌던 시기에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은 위에서 설명한 정치적 입장을 지지했다. 파시즘은 부르주아지 전체가 노동계급을 패배시키기 위해 채택한 무기로 간주했다. 이러한 입장의 결과는 어떤 상황에서도 부르주아지의 민주적 부문을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분파들 사이에는 덜 나쁜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당은 계급에 기반을 두지 않고 민주주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반(反)파시스트 여단인 '인민 자경대(Arditi del Popolo)'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계급이나 프롤레타리아 정당에 대한 파시즘의 공격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노동자와 그들의 정치 및 산업 조직에 대한 노동계급의 조직적인 방어를 지지한다. 실제로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 당원들은 파시스트 부대에 대한 보호를 조직했다. 보기를 들어, 파시스트가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PCInt)을 설립하는 데 이바지한 동지 중 한 명인 오노라토 데이먼(Onorato Damen)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전투가 벌어져 파시스트 중 한 명이 사망했다.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에는 브루노 포르티차리(Bruno Fortichiari) 같은 좌파 전사들이 조직한 독립적인 전투 그룹과 지하 조직이 있었다. 이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이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닌 반(反)자본주의에 기초하여 파시스트 부대에 맞서 자신을 방어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파시즘에 대한 정치적 입장은 1923년 코민테른이 설치하고 그람시가 이끄는 새로운 지도부에 의해 바뀌었다. 그람시는 파시즘은 남부의 부르주아 이전 봉건 질서가 북부의 부르주아지 반동 세력과 결합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부르주아 혁명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보적 부르주아 세력과 노동자 정치 조직 사이의 동맹이 가능했다. 이는 코민테른이 1923년 독일에서 재앙을 초래한 '노동자 정부'와 '통일전선'을 지지한 정책의 연장선이었다. 이 모든 혼란은 무솔리니 독재 정권의 공고화로 이어졌다. 이를 촉발한 실제 사건도 언급할 가치가 있다. 1924년 마테오티(Matteotti) 사회당 부대변인이 파시스트 부대에 납치되어 살해된 사건이다.4)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자, 파시스트들은 위기를 느꼈다. 또한, 노동계급 사이에서 불만이 끓어오르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람시는 대대적 파업의 형태로 계급투쟁을 촉구하는 대신 의회 내 부르주아 야당과 연합하여 이른바 '아벤티노 분리'5)를 통해 연합 야당을 의회 밖으로 이끌었다. 의회 보이콧은 6개월 동안 지속되었고, 무솔리니 독재 정권은 공고화되었다. 2년 후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은 금지되었고, 모든 주요 멤버가 투옥되었다.
스페인에서 반파시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르주아 정부에 합류했다.
스페인 내전은 반파시즘이 노동계급에 어떤 재앙을 가져오는지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했다.6) 노동자 정당인 스페인 아나키스트, 스탈린주의자, 맑스주의통합노동자당(POUM)은 자본가계급의 반파시즘 분파만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정부에 들어가 민주적 부르주아지와 함께 자본주의 국가를 운영했다.
1936년 2월 인민전선 정부가 선출되었다.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킨 2월부터 7월까지 113건의 총파업과 228건의 지역 파업이 발생했다. 노동계급은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된 상태였다.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노동자들은 대대적 파업을 벌여 쿠데타를 무산시켰다. 쿠데타의 초기 실패 이후 혼란의 시기가 있었고 국가 권력은 무너졌다. 이 중요한 시점에 국가 권력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어야 했다. 계급투쟁은 계속되어야 했고 프랑코 군대에 있던 징집병들과의 친교가 이루어져야 했다. 노동자평의회가 건설되고 국가를 전복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어야 했다. 대신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은 카탈루냐 지방 정부의 대통령인 제너럴리타트(Generalitat)에게 가서 이야기를 나누며 허풍을 떨었고, 그들은 회원들에게 파시즘의 패배를 바라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찾지 말라며, 총파업을 철회했다. 이후 아나키스트들과 POUM은 카탈루냐 정부에 합류했다. 카탈루냐의 부르주아 권력은 반파시즘이라는 대의명분으로 구원받은 셈이었다. 카탈루냐 정부에 합류한 지 두 달 후 아나키스트들은 마드리드 정부에 합류했다.
스탈린주의자들에게 부르주아 인민전선 정부에 대한 참여는 소련 제국주의의 핵심이 되었다. 이는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세계 대회에서 공식화되었다. 그 이면에는 제국주의 독일의 위협에 맞서 영국, 프랑스 등 제국주의 열강과 동맹을 맺으려는 소련의 시도가 있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대의가 프롤레타리아혁명보다 우선시되었다.
군사 전선은 스페인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자로 판명되었다. 그들은 노동자에 대한 자본주의 전쟁의 최전선을 대표했다. 스페인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공화주의자들과 반파시스트 전선을 형성하는 대신, 혁명적 패전주의 입장을 채택하고 계급에 기반을 둔 우애를 선언하고 공화주의자들과 프랑코 세력 모두에 반대해야 했다.
스페인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은 훨씬 더 파괴적인 2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을 위한 예행연습이었다. 스페인 전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모병의 구호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민주주의였다. 스탈린주의자들과 트로츠키주의 지지자들은 어느 제국주의 진영을 지지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파시즘에 반대하는 민주적 부르주아 세력인 인민전선 지지자들을 결집했다. 전쟁의 결과는 최전선의 노동자뿐만 아니라 민간인까지 대규모 학살, 점령지에서의 대량 학살,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규모의 도시와 기반 시설 파괴였다. 계급을 기반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유일한 정치 세력은 1943년에 결성된 이탈리아의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PCInt)이었으며, 이 당은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과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ICT)의 정치적 조상이기도 하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은 전쟁을 양측 모두의 제국주의적 전쟁으로 비난하고, 반대편 병사들 사이의 탈영과 우애, 즉 혁명적 패전주의 정책을 촉구했다.7) 이들은 반파시스트 투쟁도 마찬가지로 비난했다. 그 결과 스탈린주의자들은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을 게슈타포의 대리인으로 비난하고 사형수 명단에 올렸으며 실제로 일부 동지들을 암살했다.8) 이것은 반파시즘이 부르주아지가 반파시즘의 이름으로 노동계급을 공격하는 악랄함을 은폐하는 또 다른 보기이다.
영국에서는 초기 파시스트 운동이 발생하고 사라졌다가 다른 이름으로 부활했다. 이들의 힘은 자본주의의 위기와 관련이 있다. 1960년대 후반, 1930년대 영국 파시스트 연합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었던 국민전선은 아마도 가장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영국 국민당이나 영국 운동(British Movement)과 같은 다른 단체들은 인종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최근에는 토미 로빈슨 여단이 특히 반(反)이슬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자본주의 좌파는 반파시즘이라는 대의를 중심으로 트로츠키주의자, 노동조합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들로 구성된 인민전선을 형성하여 이러한 운동에 대항했다. 1970년대 후반의 반(反)나치연맹이 아마도 가장 성공적인 사례일 것이다. 오늘날 '파시즘에 맞서 단결하라'와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자'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이러한 운동은 주로 좌파 애니메이터를 위한 모집 전선이다. 사실 영국 부르주아지들은 노동계급 착취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잘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는 파시즘이 필요하지 않다. 이러한 운동은 현 시기에는 부르주아 정치의 주변부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파시즘은 논리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반파시즘 조직은 경제 위기가 심화하여 파시스트 정치 세력이 집권에 가까워질 경우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노동자를 모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민전선을 대표한다.
노동계급의 역사는 반파시즘이 노동계급에 반대하는 세력이며, 오늘날에도 이러한 목적을 위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독재와 파시즘에 반대하는 전 세계적 규모의 동원은 미래의 세계대전에서 싸울 노동계급을 모집하는 데 사용될 이념적 전선이 그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토론
누군가가 파시즘이 소부르주아지에 어필하는 이유를 물었다. 이에 관한 토론에서 우리는 경제 위기로 인해 이들이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할까 봐 두려워한 결과라고 말했다. 이 주제에 대한 몇 가지 의견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담당자가 있었고, 그는 이것이 현재의 ‘해체' 단계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현재와 1920~30년대의 유사성에 대한 질문에 관해 ICC는 오늘날의 노동계급은 1920년대의 패배를 겪지 않았기 때문에 파시즘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으므로 현재 상황은 유사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노동계급이 계급의식이 낮은 시기에 있고 현재는 파시즘이 필요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파시즘의 가능성은 남아있다고 지적했다. 부르주아지는 계급투쟁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파시즘을 다시 사용할 수 있다. 최근의 폭동과 이에 맞선 시위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인종주의적 공격에 대한 반대가 (정치적으로 제한적이지만) 연대의 긍정적인 표현이며, 노동계급의 모습에 대한 제한된 프레임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참가자 중 한 명은 노동계급이 자기 역할에 관한 의식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 질문했다. 이 질문은 계급의식에 대한 확장된 토론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 질문을 어떻게 제기했는지 설명하고 동지들에게 이 주제에 관한 팸플릿을 소개했다. 우리는 아직 소수이기 때문에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사건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계급투쟁이 되살아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다른 국제주의자들과 연합하여 노동계급 투쟁에 영향을 미치고 노동계급이 겪고 있는 긴축을 제국주의 전쟁 추진과 연결하려는 조치로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NWBCW)」 위원회를 구성한 것을 알렸다.
<주>
* 괄호( )는 역자
1. 100년 후: 독일혁명의 교훈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18-11-09/a-hundred-years-on-lessons-of-the-german-revolution
2. (역자 주) 2024년 영국 폭동은 2024년 7월 30일부터 8월 5일까지 영국에서 전개된 극우 반(反)이민 시위 폭동이다. 이는 7월 29일 중서부 도시 사우스포트에서 세 명의 어린이가 살해된 사건의 가해자가 무슬림이자 망명 신청자라는 거짓 주장이 유포되어 촉발되었다. 이 사건은 2011년 폭동 이후 영국에서 발생한 가장 큰 사회적 불안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9월 1일 기준 폭동 관련자 1,280명이 체포되었고 약 800건이 기소되었다.
3. 영국 폭동: 자본주의에 봉사하는 인종주의적 권리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4-08-11/uk-riots-racist-right-in-the-service-of-capitalism
4. 자코모 마테오티(Giacomo Matteotti) 살인 사건: 100년 후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4-08-29/the-murder-of-giacomo-matteotti-100-years-on
5. (역자 주) 아벤티노 분리는 1924년 6월 10일 파시스트에 의해 의원 자코모 마테오티가 살해된 후, 주로 이탈리아 사회당, 이탈리아 자유당, 이탈리아 인민당,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으로 구성된 의회 야당이 1924~25년에 하원에서 탈퇴한 사건이다. 이 분리주의는 고대 로마의 아벤티노(Aventine) 분리주의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 항의 행위는 베니토 무솔리니와 그의 국가 파시스트당이 전권을 장악하고 이탈리아에 일당 독재 정권을 수립하는 것을 예고했다. 국가 파시스트당에 반대하는 데 실패했고, 2년 후 하원은 123명의 아벤티노 의원이 직위를 상실했다고 판결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많은 ‘아벤티노’ 의원이 추방되거나 투옥되었다.
6. 스페인 1934-39: 노동계급 투쟁에서 제국주의 전쟁까지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11-09-01/spain-1934-39-from-working-class-struggle-to-imperialist-war
7. 1944년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좌파 선언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16-03-01/the-1944-manifesto-of-the-internationalist-communist-left
8. 파우스토 아띠(Fausto Atti)와 마리오 아쿠아비바(Mario Acquaviva) 살인 사건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0-07-28/the-murders-of-fausto-atti-and-mario-acquaviva
2024년 12월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2024년 11월 9일,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은 런던에서 반(反)파시즘을 주제로 공개회의를 개최했다. 발제와 토론에서 나온 내용을 여기에 게시한다.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4-12-13/anti-fascism-against-the-working-c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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