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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22호] 문화 전쟁에서 모험: 비평

문화 전쟁에서 모험: 비평

 

 

사용자 삽입 이미지

 

 

노바라 미디어(Novara Media)의 객원 편집자인 애쉬 사카(Ash Sarkar)는 올해 문화 전쟁에서 모험(Adventures in the Culture Wars)”이라는 도발적인 부제를 단 첫 번째 저서 소수자의 지배Minority Rule)1)를 출간했다. 노바라 미디어는 2011년에 설립되어 학생 운동2) 이후에 자율주의적 경향의 뉴스와 정치 분석을 제공하는 매체로 두각을 나타냈다.3) 그러나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이 노동당 대표로 재임하는 동안(2015-2020) 코빈의 지도력에 열정적으로 몸을 바쳐 가장 열렬한 지지자가 되면서 이들의 인지도는 크게 상승했다. 5년 전 코빈이 사임한 이후 사카와 그녀의 노바라 동료들은 다시 당에 대해 더욱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기회주의적이던 시절의 정치적 입지를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다. 사카는 자신의 정치를 자유의지 코뮤니스트(libertarian communist)”, 자신의 분석 체계를 맑스주의자로 묘사하는데, 아마도 TV 프로그램 굿모닝 브리튼에서 짜증이 폭발하여 자신은 코뮤니스트이며 피어스 모건(Piers Morgan)바보라고 선언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4) 사카는 소수자의 지배에서, 지난 수십 년간 대중의 분노를 조장하고 표출시켜 우리 모두를 서로 대립하게 하고, 당면한 실제 문제에서 우리의 관심을 돌리는 데 있어 미디어가 수행한 역할을 분석한다. 필연적으로 좌익과 우익 모두에서 나타나는 정체성 정치는 이 역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이는 사카의 조사에서 중심 주제를 형성한다.

 

 

좌파의 정체성 정치

 

사카의 출발점은 좌파에 대한 비판으로, 그녀는 자신이 정체성 정치의 혁명적 본질이라고 제시하는 것을 좌파가 자유주의적 일탈로 왜곡하여, 최근 몇 년간 정체성 정치가 반()생산적이고 개인주의적으로 전환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사카는 좌파 환경여기서 조직화 시도는 억압 올림픽”5)에 의해 탈선되었다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경험을 회상하고, 개인적 경험과 피해 의식에 대한 집착이 집단 프로젝트에서 적극적으로 파괴적인 역할을 해온 일반적인 경향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를 콤바히 리버 콜렉티브(Combahee River Collective, CRC)와 블랙 팬서 파티(Black Panther Party, BPP) 같은 그룹과 대조한다.6) 사카는 정체성 정치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CRC 성명서(1974년 작성, 1977년 발표)로 돌아가서, 정체성 정치의 본래 의도가 집단적이고 사회주의적이며 혁명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를 오늘날 좌파의 정체성 정치와 비교하면서, 사카는 후자에 만연한 세 가지 핵심적인 해로운 사상, 생생한 경험의 우위, “환원 불가능한 차이에 대한 강조, 그리고 당연한 듯 받아들인 상충하는 이해관계라는 가정을 제시한다.(32) 우리의 이해관계가 다양한 정체성 범주에 근거하여 서로 상충하며, 우리의 차이가 노동자로서 우리가 공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은 실제로 연대에 파괴적이며, 사카가 이것을 지적하는 것은 분명히 올바른 것이다. 또한, 사카가 지적했듯이, “생생한 경험을 탁월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고통으로부터 사회자본”7)을 창출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피해 의식을 만들어낸 조건을 바꾸기보다는 피해 의식을 고수하려는 비뚤어진 동기를 창출했다.(65)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그녀가 정체성 정치의 혁명적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사카의 주장은 훨씬 더 불확실한 근거를 지니고 있다. CRC의 경우에는 이것이 그들의 의도였을 가능성이 충분한데, 그들은 가부장제뿐 아니라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정치경제 체제의 파괴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8) 그들은 인종, 계급, 성적 억압을 분리하는 데 종종 어려움을 [겪었는데]” 당시 흑인 여성들에게 이러한 억압들은 대부분 동시에 경험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페미니즘과 반()인종주의 운동의 정치적 기여에 의존하는데,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개인적 경험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을 볼 때, 이것은 꽤 명백하다. 그들은 억압의 문화적, 경험적 본질을 탐구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았고”, 따라서 이러한 경험이 그들 정치의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게다가 자칭 맑스주의자로서는 다소 당혹스럽게도, 사카는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이 노동계급을 인종도 성별도 없는 노동자로만생각했다라는 CRC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노동계급의 특정 부분이 억압받는 구체적인 방식을 다룰 필요가 있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며, 최고로 중요한 일이다. 실제로 맑스와 엥겔스 자신도 이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당대에 여성이나 이주민이 착취당하는 구체적인 방식과 더 광범위한 노동계급 내에서 이것이 지니는 역학관계를 반복적으로 지적했다.9)

 

그리고 맑스주의 안에서, 우리는 이러한 억압에 반대하는 데 있어 동시성이라는 상당히 기본적인 개념보다 훨씬 더 적합한 이론적 도구를 발견한다. 우리는 이러한 억압이 단순히 서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역사적 과정계급 사회의 발전의 산물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사카는 나중에 이 문제를 어느 정도 다루지만, 인종 개념과 관련해서만 다룰 뿐인데, 그녀는 이 인종 개념을 노예제와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특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으며 나중에는 노동계급을 분열시킬 목적으로 영속화된 기술이라고 설명한다.(237)

 

게다가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가 보아왔듯이, 소수 집단의 동화는 지배계급의 구명 세트에서 소외만큼이나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소외 경험은 누군가를 혁명적 관점을 채택하도록 이끌 수 있지만, 소수자라는 정체성 자체가 본질적으로 혁명적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보기를 들자면, 오늘날 흑인 레즈비언이면서 동시에 CEO가 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정체성에 기반을 둔 주장은 자연스럽게 개량주의적 막다른 골목(단일 쟁점 캠페인, 대표성 요구 등)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개량주의로부터 정체성 정치를 구출하려는 모든 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개인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본질적으로 부르주아적인, 정체성 정치의 발전은 정체성 정치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논리적 귀결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노동계급의 다양한 부문이 겪는 구체적인 억압과 착취에 대처하기 위한 토대는 독립적인 노동계급 정치여야만 하며, 동화와 개혁을 목표로 하는 계급 혼합적, 분파적 정치에 대한 다원주의적, 기회주의적인 양보여서는 안 된다.

 

제국주의

 

개량주의로 향하는 이러한 내재적 경향을 고려할 때, 정체성 정치의 논리적 종착점은 자본가계급이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것을 채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며, 비록 (곧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한 사카의 분석은 부족하지만, 그녀가 여기서 자본가의 위선을 지적한 것은 올바르다. 그녀는 특히 코카콜라와 CIA가 교육과 마케팅에서 교차성을 수용한 사례를 언급하며, 코카콜라가 미시간주 플린트의 지속적인 식수 부족을 인정하면서도 동일한 문제를 겪고 있는 멕시코 치아파스주에서 이득을 취하는 아이러니를 지적한다. 또한, CIA가 자신을 반()차별주의자라고 광고하면서도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지정학적 적대국들에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투하하는 아이러니를 지적한다. 사카는 이 문제를 제국주의라고 명명했고, 그녀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카, 또는 적어도 이 책의 제국주의에 대한 이해는 영국, 미국, 그리고 그 동맹국들의 제국주의 정책에 국한되어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단지 한 국가나 국가 블록의 정책이 아니다. 제국주의는 모든 국가가 한 세기 넘게 그 안에서 운영되어야 했던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한 국면이며, 모든 국가의 외교 정책을 좌우하는 어쩔 수 없는 원동력이다. 학생운동 이후 좌파의 베테랑이자 자신을 맑스주의자라고 칭하는 사카가 맑스와 엥겔스가 정교화하고 이후 부하린과 레닌이 제국주의 이론으로 발전시킨 방법론을 알지 못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고도 적잖이 거만한 짓일 것이다.10)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소수자의 지배의 제국주의 비판에서 그것들이 빠진 것은 더욱 실망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그녀가 지적하는 많은 문제를 훨씬 더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기를 들어, 생산과 분배 수단이 점점 더 적은 수의, 점점 더 큰 조직(아마존, 구글, 메타 등)의 수중에 집적되고 집중되고 있는 현재의 경향은 사유화가 [아닌] 인클로져로 나아가는 (바루파키스의 표현으로)11)봉건제적 전환으로 설명된다.(258-60) 그러나 금융화·투기·국가개입이 증가함과 더불어 독점적 소유로 나아가는 이러한 경향은 맑스주의자들에게는 모호한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한 세기 넘게 자본주의 제국주의 시대를 규정해 온 바로 그것이다.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교조주의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노동계급을 빈곤하게 만들고 억압하는 세력이 어떻게 세계 전쟁을 부추기는 세력과 동일한지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이러한 더욱 완전한 정의는, 이러한 경제적 발전이 생산양식 측면에서 퇴보가 아니라 더욱 깊은 심연이 체제가 우리를 이곳으로 몰아넣고 있다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임을 보여준다.

 

우파의 정체성 정치

 

그러나 좌파에 대한 비판이  소수자의 지배의 끝이 아니며,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내용도 아니다. 대신에 사카는 언론의 문화 전쟁에 대한 좌파의 부적절한 대응을 다룬 후, 이 문제를 추적하여 자본의 우파가 전통 매체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애초에 그것들을 어떻게 조작하는지를 되짚어본다. 여기서 그녀는 다양한 우파의 주장에 내재해 있는 환상과 오류를 분석하고, 왜 그것들이 일반 대중에게 그토록 큰 지지를 얻었는지에 대한 논의로 이어간다. 마케팅 방식사카의 통제력이 명백히 제한된 부분과는 달리, 이 부분은 실제로 소수자의 지배본문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첫 번째 장이 없었다면 (사카가 자주 사용하는 소셜 미디어 담론의 언어와 유머는 다소 불쾌감을 줄 수 있지만) 분석과 메시지 측면에서 훨씬 더 광범위한 타당성을 지녔을 것이다. 여러 직장으로 확대되며 점점 더 복잡한 내용을 담고 있는 다양성과 포용성 교육 외에도, 사르카르가 능숙하게 보여주듯이, 대부분 노동계급은 교차성을 둘러싼 토론을 접하기보다는 우리의 의식 속에 끊임없이 흘러넘치는 우익의 논지를 더 많이 접하게 된다.

 

사카의 두 번째 핵심 논지는 다음과 같다. 문화 전쟁은 자본가 계급, 특히 우익이 조종하는 미디어의 산물이며, 우리의 불만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문제는 자신과 그들의 체제가 아니라 서로에게 있다고 우리를 설득하기 위한 것이다. 그녀가 다양한 홍보 영상과 인터뷰에서 지적했듯이, 우리는 소수 엘리트 집단우리가 들어왔던 그런 집단이 아니다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사카는 지난 40여 년간 영국 노동계급이 겪은 경험계급투쟁 물결의 붕괴, 영국 중공업과 복지국가의 해체, 소규모 재산·사업체 소유로 점진적 전환 등을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자본가들, 특히 자본의 우익과 언론(이 시기 대부분 동안 권력을 누려온 것은 맞지만, 여기서 그녀는 자본의 좌파가 수행한 역할을 축소하여 언급한다)이 어떻게 이러한 과정을 자신들의 경제적, 정치적 이익에 맞춰 조종했는지를 보여준다. 이에 따라 노동계급은 기하급수적으로 분열해 서로에 대한 적대감과 의심을 품게 되었다.

 

사카가 보여주듯이, 자본가 계급은 노동계급의 연대를 체계적으로 약화함으로써 혼란의 씨앗을 뿌렸는데, 오늘날 그들은 우파와 좌파의 정체성 정치 사이의 문화 전쟁이라는 형태 속에서 그 풍성한 열매를 수확하고 있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사카는 이주와 성 정체성과 같은 문제들에 대한 최근의 도덕적 공황을 하나하나 조금씩 살펴본다. 또한, 그녀는 주류 언론의 변화한때 맹목적인 유행 추종자들로 조롱받고 무시당했던 영국 노동계급이 이제는 조작된 위협(이주민, 트랜스젠더)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백인 노동계급으로 변모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카는 장막을 걷어내고 환상 기계의 다중 레버를 맹렬히 잡아당기고 있는 사기꾼들을 폭로함으로써, 노동계급 전체이러한 도덕적 공황이라는 허구의 분열 양쪽에 나뉘어 있다가 서로 분열하여 더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점을 정확하게 강조한다.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과 조건에 대한 공격은 나중에 백인 영국 노동자들에게도 확산한다. 그리고 젠더 이념에 맞서 싸우는 것처럼 포장된 의료 서비스에 대한 공격은 필연적으로 시스젠더(cis: 생물학적 성과 성체성이 일치하는 사람옮긴이)와 트랜스젠더 모두의 의료 서비스에 영향을 미친다.

 

사카는 또한 최근 몇 년 동안 소셜 미디어의 새로운 기술 발전이, 우리의 주의와 사고를 전례 없는 수준으로 독점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과정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에 주목한다. 맑스와 엥겔스가 모든 시대에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다라고 지적한 이래, 우리의 사고 자체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지속적인 지배의 본질은 상당히 변화했다. 맑스와 엥겔스 시대에, 이러한 지배는 빈곤층과 노동계급의 기초 문해력이 비교적 최근에야 나타난 현상이고 그 이상의 교육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는 사실에 상당 부분 기인한다. 지난 180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문해율이 상승했고, 처음에는 신디케이트 저널리즘의 형태로 그다음에는 소셜 미디어의 형태로 대중 매체가 급격히 늘어났다. 사카는 소셜 미디어가 부분적으로, 그러나 극적으로 공적 영역을 민주화했으며, 그 효과는 놀랍고도 매우 우울했다고 말한다.(83) 그러나 이러한 민주화가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데, 모든 자본주의적 민주화와 마찬가지로, 사회 영역에서 평등한 참여라는 약속은 자본의 이해관계가 다양한 참여자들의 영향력을 끊임없이 조작하는 방식의 현실과 상충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위기

 

그러나 사카의 설명에는 자본주의의 작동에 내재한 위기의 본질은 빠져 있는데, 이는 이러한[정부의] 정책과 전술이 연이은 우익과 중도 정부의 악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라는 인상을 우리에게 심어준다.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의 운동 법칙과 일맥상통한다. 다시 말해, 이윤율이 하락함에 따라 자본가 계급은 이러한 경향을 상쇄하는 동시에 경제적 그리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측면에서 가능한 한 큰 비용을 노동계급에 전가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노동계급의 실업, 빈곤, 비참함을 수반하는 주기적인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의 존재에 있어 불가피한 부분이다. 자본주의의 제국주의 단계에서, 새로운 축적 사이클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자본 인프라의 대대적인 파괴는 결국 전쟁, 즉 세계대전을 초래했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의 세 번째 세계적 축적 사이클의 끝자락에 살고 있다. 따라서 중공업은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해체되어 임금 노동이 더 저렴한(그리고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더 낮은) 주변부로 이전되었다. 따라서 모든 곳에서 인플레이션 대비 임금이 하락 압력을 받고 있으며, 그에 따라 임금이 감소하고 일자리가 사라지는 동시에 노동계급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축소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정부들의 정책과 전술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표현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서론에서 사카는 단 한 번, 자본주의가 위기로 향하는 경향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이러한 경향을 새로운 시장에 대한 끝없는 욕구라고 설명한다.(7) 그러나 새로운 시장에 대한 이러한 욕구분명 자본주의에 내재한 위기의 특징는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동력이 아니다. 맑스와 엥겔스가 「자본론3권에서 아주 분명하게 밝혔듯이, 이 동력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이며, 자본의 끊임없는 새로운 시장추구는 이윤율의 저하와 동의어가 아니라 그 증상이다. 이 말이 다소 현학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 결과는 자본주의 체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이 위기의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보기를 들어, 사카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시기, 즉 영국 사회민주주의의 전성기에 대한 향수를 해로운 환상으로 정확하게 규정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그녀는 부자와 빈자 사이의 계급 불평등문제를 해결하기는 매우 간단하다고 묘사하고 난 후, 그 시대를 정의했던 케인스주의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 제안을 줄줄이 늘어놓는다(“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복지와 공공 서비스에 자금을 지원하고, 이윤을 쥐어짜고, 임금을 끌어올릴 의향이 있다면”, 198). 일회성 발언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는 실상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이것이 사카가 말하는 코뮤니즘”(우리는 그것이 코뮤니즘이 아니라고 가정한다)가 이런 의미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양보적 개혁이 어떻게 그리고 왜 도입되는지, 그리고 애초에 그러한 개혁을 약속하는 좌익 정당들이 어떻게 그리고 왜 집권하는지에 대한 본말이 전도된 오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코빈주의(Corbynism: 코빈은 영국 노동당 내 좌파로 당대표를 지냈다옮긴이)의 실패는 이러한 이유로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며, 스타머의 노동당 정부와 그 이전의 블레어 정부에 대한 그녀의 비판은 상당히 강경했지만, 코빈 운동의 종말에 대한 사카의 분석은 대체로 전략상의 오류와 다른 정치 세력의 반대를 극복할 수 없었다는 점에 국한되어 있다. 사카는 자신과 노바라 동료들이 이 시기에 근본적으로 기회주의적인 전략을 추구했다는 점을 인정하는 편이지만, 이 시기에 대한 자신의 평가가 순진했고 궁극적으로 실패했다는 사실에 국한되어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좌파의 혼란과 환상을 심화시키는 데 있어 사카와 노바라가 수행해 왔고 지금도 계속 수행하고 있는 역할에 대해, 그들에게 정직한 심판을 기대하는 것은 우리 견해에서도 똑같이 순진해 보일 것이다.

 

그래서 소수자의 지배가 좌파주의, 즉 개량주의에서 벗어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카는 이 책 (그리고 그녀의 경력) 전반에 걸쳐 여러 차례 자신을 코뮤니스트라고 표현했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은 그녀가 지적한 실제 문제들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은 거의 제시하지 않는다. 사카는 소수자의 지배에서 문제를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것으로 제시하는 듯 보이지만, 그녀의 주장이 담고 있는 실제 정치적 내용은 필연적으로 개혁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후퇴하고 만다. 우리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 삶의 조건을 방어하고 개선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이러한 투쟁을 통해서 노동계급은 자신의 집단적 힘을 다시 배우고 재발견해야 하는데, 이는 자본가의 공격에 맞서 자신을 방어함으로써 계급으로서 자신의 공동 이익을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하여, 그리고 궁극적으로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먼 과거부터 최근까지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자본가 계급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러한 개혁을 허용한 것만큼이나 쉽게 철회할 것이다. 오늘날 그들의 이해관계는 임금과 복지보다 군비 지출이 우선이라는 것을 점점 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투쟁의 경험을 통해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와 이 독특한 위치가 부여하는 역사적 사명, 즉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무덤을 파는 자의 사명을 이해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자본 좌파의 환상을 고려할 때, 사카가 정치가 관중 스포츠가 되었다”(12)라고 불평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사실 자본주의 체제의 범위 안에서 모든 민주주의는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적절하게 표현한 것처럼 소수를 위한, 유산계급만을 위한, 부자만을 위한 민주주의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노동계급이 우리의 권력을 어떤 사람들과 단체들에 위임하는 것을 수반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과 단체는 우리를 대표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착취하는 계급,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려면, 부르주아 팬터마임과 공통점이 없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대해 명확하고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이것은 노동계급이 역사적으로 자기 조직화한 대중 계급투쟁의 경험 속에서 발견한, 자신의 독립적인 계급 통치 기관대중 집회, 파업위원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노동자평의회(또는 소비에트)을 통해 능동적이고 직접적으로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현대 미디어에서 날조된 분노에 대한 간략한 역사로서,  소수자의 지배의 핵심에는 동의하지 못할 부분이 거의 없다. 우파가 유리한 곳에서 우파를 이기기 위해 문화 전쟁에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논지를 거부하고 우리 공동의 이해관계에 기초한 우리만의 의제를 설정하고 분열을 더 큰 분열이 아닌 연대로 극복하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그녀의 주장도 마찬가지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의 장점은 그 약점과 분리될 수 없는데, 이 책의 요점은 좌파의 정치와 전략이기 때문이다. 코뮤니스트로서 우리는 좌파의 일부가 아니라 노동계급 일부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와 그것을 지배하는 계급을 혁명적으로 전복하고, 그 대신 계급, 국가, 화폐가 없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할 필요성을 이해하게 된 소수의 계급 일부이다. 우리가 코뮤니즘이라고 부르는 이 사회는 소련과 중국의 국가자본주의 괴물들이나,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노동계급의 피와 땀 위에 세워진 다른 어떤 민족 국가와도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혁명적 수단에 의해 초래된 이 사회는 궁극적으로 전 세계를 아우르지 않으면 실패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 혁명은 노동계급이 이끌어야 하고, 우리 자신의 주도하에 우리만의 독립적인 영역에서 조직되어야 하며, 우리를 서로 싸우게 만들기 위해 착취자들이 그어놓은 자의적인 차이의 선들인종, 성별, 성적 지향, 종교, 그리고 그들이 생각해 낸 다른 모든 것을 넘어 단결해야 한다.

 

20256

틴코트카(Tinkotka)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혁명적 전망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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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옮긴이 주) 현대 민주주의의 원리인 다수 지배에 대립하는 소수 엘리트의 지배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인종이나 젠더 같은 영역의 소수자가 서구 사회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선전하는 언론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역설적인 제목이다.

2. (옮긴이 주) ‘학생운동1960년대와 1970년대 학생들이 주도한 좌파 운동(이후 신좌파)을 언급하는 말로 보인다. 이 운동은 민주주의, 시민권, (대학)개혁 같은 문제를 중요시했는데, 노바라 미디어는 그 전통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3. ‘노바라라는 명칭은 엘리오 페트리(Elio Petri) 감독의 1971년 영화 「천국으로 가는 노동계급(The Working Class Goes to Heaven)의 배경이 된 이탈리아 피에몬테(Piedmont) 지역의 도시 이름에서 유래했다.

4. “코뮤니즘의 의미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우리는 후자의 주장에는 동의한다.

5. (옮긴이 주) 어떤 집단이 가장 억압받고 있는지 경쟁적으로 따져보는 것.

6. 아사드 하이더(Asad Haider)2018년에 출간한 책 「잘못된 정체성: 트럼프 시대의 인종과 계급(Mistaken Identity: Race and Class in the Age of Trump)에서 비슷한 주장을 펼쳤는데, 당시 우리는 이 책을 리뷰하면서 CRCBPP에 깃든 스탈린주의의 유산을 비판했다. leftcom.org.

7. (옮긴이 주) 사회자본이란 사람들 사이의 연계와 네트워크가 중요한 자산이 된다는 개념이다.

8. CRC 성명서는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americanstudies.yale.edu.

9. 보기를 들어, 맑스의「자본론과 엥겔스의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에서 흑인 노예제와 아일랜드 이주민에 대한 논평을 볼 것. 여성 억압의 역사적 뿌리에 대한 분석은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을 참고할 것.

 

10. 부하린의「제국주의와 세계 경제 그리고 레닌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를 볼 것.

11. (옮긴이 주) à la Varoufakis: 그리스 경제학자 야니스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는 오늘날을 테크노 봉건주의사회로 묘사한다. 거대 기술 기업이 세계를 자신들의 봉건적 영토로 만들고 있다는 주장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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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선거 쟁점과 코뮤니스트 대안

부르주아 선거 쟁점과 코뮤니스트 대안
 
 
이번 선거에서(선거 때마다) 쟁점이 된 “부동산·자산 투표”, “정의·공정”에 대한 코뮤니스트 대안

"선거에 진 것은 노동계급이 아니라 부르주아 분파(여, 야)이며, 이긴 것은 자본주의 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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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정책
 
한국의 주택보급률은 이미 100%를 넘었고, 수도권도 100%에 가까운 상황이다. 주거 문제는 공급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자본이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토지와 건물, 주택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매매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렇기에 아무리 주택을 많이 공급해도 무주택자가 아닌 자본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이런 현실을 감추기 위해서 더 현실성 없는 고위정책 관료층과 국회의원에게 1가구 1주택의 퍼포먼스까지 진행하겠는가?
 
자본주의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서 부르주아 정부의 저금리정책은 필연적으로 유동성을 증가시켰고, 그 대부분은 대자본 중심으로 집중되고 있다. 자본에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 투자는 관심 밖이다. 이윤이든 지대든 자본에는 부가가치 증가만이 목적이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배경은 부동산 같은 자산 가격을 폭등시켰다. 이처럼 부동산 가격 폭등의 배후에 작동하는 힘은 자본주의 경제 위기와 이것이 유발하는 초저금리와 천문학적인 유동성 증가이다. 부동산 가격 폭등은 그 결과 중 하나일 뿐이다.
 
부르주아 정부는 집값을 억제할 생각이 없을 뿐 아니라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인한 정권의 몰락도 피하고 싶을 것이다. 겉으로는 ‘갈지(之)’자 행보처럼 보이지만, 일관되게 자본의 이익을 추구한 부르주아 정부는 심화하는 위기 때문에 더욱 노골적으로 노동자의 목을 죄어 올 것이다. 이윤율 하락,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체제에서 발생하는 거대한 경제 위기라는 배경에서 부르주아의 계급적 선택은 노동자에게 더 많은 착취와 고통을 요구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부동산 대책은 집값 안정을 결코 해결할 수 없지만, 집값 안정이라는 문제는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를 전제로 하고 그 바탕 위에 있다. 자본주의 소유 관계를 그대로 둔 채로는 어떠한 정책을 내놓아도 주거 문제는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자본주의 소유 관계는 토지와 주택에 대한 사적 소유와 매매와 임대를 통해 소유주가 이득을 취하는 것을 보장한다. 또한, 부동산 가공을 통해 증가한 부가가치까지도 보장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동산 관련 세금을 올리고 공급을 확대해도 더 비싼 집값의 형태로,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노동자에게 전가될 뿐이다. 결국, 노동계급은 주택 가격 안정이 아니라 토지와 주택에 대한 자본주의 소유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토지와 주택에 대한 자본주의 소유 관계를 그대로 둔 채 어떠한 정책을 내놓더라도 노동자인민에게는 1가구 1주택과 주거환경 개선은 현실화할 수 없다. 자본주의 소유 관계를 그냥 둔 채 주택 투기와 개발 이익에 대한 사적 취득을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가 환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가가 이를 환수하여 양과 질을 담보로 한 공공임대주택을 마련하는 것 또한, 공상에 불과하다. 자본주의에서 국가는 자본의 총체로서 전자본의 이익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인민에게 양질의 공공주택을 공급하는 것은 토지와 주택에 대한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가 폐지된 사회, 즉 인민의 필요에 따라 생산하는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토지와 주택을 비롯하여 사유재산과 착취, 계급 분열에 기초한 자본주의 생산은 가치법칙 및 시장과 화폐를 통한 분배와 소비에 종속됨으로써 경쟁과 무정부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는 가치법칙이 사라지며, 생산은 평의회 체제에 의해 사회화된다. 모든 토지와 (거주 목적 이외의) 주택도 생산수단과 마찬가지로 몰수하여 평의회의 통제 아래 사회화시킨다. 이때 비로소 모든 사람에게 거주 장소를 선택할 권리와 주택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제공된다. 코뮤니스트 사회는 노동자인민에게 공공임대주택을 저렴하게 제공하는 자본주의적 복지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인간답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주거 공간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평등한 사회이다. 주택뿐 아니라 의료와 건강권, 교육권을 무상으로 제공하여 개인의 행복 추구권이 처음으로 실현되는 사회이다. 코뮤니스트는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해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 폐지와 무상 주거권 쟁취를 내걸고 근본적으로 투쟁할 것이다.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 폐지만이 주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코뮤니스트 혁명만이 주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모두에게 거주 장소를 선택할 권리와 주택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전문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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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공정
 
 
한국 사회는 선거 때마다 공정 담론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공정에 대한 논의의 핵심은 능력주의를 전제로 진행되고 있다. 공정한? 경쟁을 통해 능력을 갖춘 사람을 사회의 모든 요소에 선발하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능력은 자본주의 물적 토대인 생산관계를 반영하지 못한다. 개인의 능력은 사회·경제·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다. 게다가 가족을 경제단위로 하는 자본주의에서는 가족 배경이 능력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 또한, 노동력이 상품으로 되는 자본주의에서는 어떤 능력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자본의 이해관계와 관점에 따라 좌우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순수한 개인의 능력은 환상에 불과하고, 이러한 능력주의를 전제로 한 공정은 계급지배의 통치 수단이다.
 
공정의 핵심 전제인 능력주의는 봉건귀족에 대항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였다. 또한, 무산자계급에 대한 차별과 배제,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원시적 자본 축적기부터 자본주의가 세계적 지배 질서가 된 이후에도 자본은 능력주의를 통해 노동계급의 연대와 단결을 막고 분열을 획책했다. 이에 포섭된 노동계급 일부는 능력주의 신분 상승 대열에 개별적으로 합류하는 데서 전망을 찾으면서 불평등 사회를 인정했다. 한국의 주류 노동조합운동도 능력주의에 편승하면서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했다. 그러면서 노노 갈등은 증가하였다. 그 흐름은 노동운동의 역할을 계급의 해방이 아니라 당면 생존권에 대한 협소한 방어로 제한했다.
 
노동계급 일부의 능력주의로의 편승은 노동자 자기해방에 대한 전망 부재를 스스로 폭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미래 노동계급에 능력 중심의 불평등 사회를 지양하기보다는 더욱더 능력과 공정에 집착하도록 하였다. 전망의 부재는 한편으로는 불평등 완화를 부르주아 정부에 대한 기대로 나타나기도 했고, 한편에서는 공정성 시비로 적법한 노동권마저도 빼앗고 있다. 이렇게 능력주의에 갇히는 순간 노동운동의 전망을 잃어버리고 체제를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본과 지배계급의 이익에 복무하게 된다. 즉, 노동운동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는 사라지고 형식적 공정성과 실질적 불평등을 인정하고 노동계급의 투쟁을 탄압하는 자본주의 신봉자가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능력주의는 노동계급에 초등학교부터 취업 이후까지 학업/취업/임금인상/승진 경쟁을 요구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본이 요구하는 능력에 부합하도록 노동자를 재창조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능력주의에서 패자에게는 결과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사회 부적응자로서 온갖 차별에 노출되고 적법한 요구마저도 무시된다. 그래서 능력주의는 인종주의, 엘리트주의, 평가주의, 성과주의 등 차별의 여러 형태와 같은 패러다임을 가진다. 하지만 부르주아에게 요구되는 능력이란 부와 권력에 대한 세습이 가장 중요할 뿐, 실수로 거액을 날려도 그들의 태생적인 능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능력주의는 계급마다 다르게 적용되며 계급적 성격을 갖는다. 자본가계급에는 공정을 초월한 정의이지만, 노동계급에는 억압적이고 차별적이다.
 
지금까지 능력주의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은 공정에 기준을 두고 조건, 과정에 대한 평가였다. 또한 능력주의가 차별과 불평등을 정당화하며, 능력이 세습되는 시대에는 능력주의 자체가 불공정을 내포하고 있다는 비판까지 등장한다. 하지만 차별과 불평등의 원인을 공정의 기준, 능력주의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공정 담론과 능력주의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무시한 결과이다. 그래서 비판의 결론은 불평등과 차별의 원인인 능력주의를 다시 계급 상승의 수단으로 기능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계급사회에서 정의, 공정, 능력주의는 언제나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자본이 요구하는 능력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은 노동계급의 단결과 연대의 힘이다. 계급 단결로 노동력이 상품이 되지 않는 사회, 생산수단이 사회화된 사회, 가치법칙이 더는 작동하지 않는 코뮤니즘 사회로 나아가야 비로소 노동계급의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 즉, 정의, 공정, 능력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더는 필요 없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의 사유화는 자원 희소성, 자원의 불평등 분배의 원인이었다. 자본주의 고유의 모순을 감추고 노동계급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서 공정 담론,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유포시켰다. 하지만 노동계급에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는 결코 자본주의에서는 불가능하다. 오로지 계급의 단결과 연대로 불평등과 차별의 원인인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해야 억압과 모순을 뿌리 뽑을 수 있다.
 
노동계급의 가장 큰 능력은 야만과 착취의 낡은 사회를 혁명적으로 전복하고 집단으로 자기 권력을 행사하며 스스로 해방할 수 있는 능력이다. 반대로 지배계급의 능력주의와 공정 담론은 노동계급의 삶을 피폐화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단결과 연대라는 진정한 능력을 빼앗아가는 반동 이데올로기이다. 
 
<전문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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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 다시 투쟁으로! 항로는 희망행으로!

 

 

다시 투쟁으로! 항로는 희망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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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을 위한 투쟁 속에서 
당연히 온갖 오류를 다 범하게 돼 있다.

 

그러나 
자신 한 몸의 영달을 위해 사는 것보다 
더 무서운 오류는 없으니 
그래도 투쟁하는 게 더 낫다.

 

(「한 혁명가의 회고록」, 빅토르 세르주)

 

 


항로는 희망 행으로!

 

 

 

리가에서 죽임을 당한 앙드레
에스파냐에서 죽임을 당한 다리오
내가 붕대로 상처를 싸매준 보리스

 

내가 눈을 감겨준 보리스
프랑스의 어느 조용한 과수원에서
스무 살 된 심장에 총알 여섯 발이 박혀
영문도 모른 채 죽은
나의 이층 침대 친구 다비드

 

이미 흙이 다 되었을 때
내가 손톱을 보고 알아낸 카를
너, 높은 지성과 숭고한 사상을 가진 너를,
죽음이 너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검고 거친 인간 넝쿨

 

북쪽, 물결, 바다가
배를 뒤집고, 이제는 핏기가 사라진 네 사람이
고뇌를 깊이 들이켠다,
파리여, 잘 있거라, 너희 모두 다 잘 있거라,
삶이여, 잘 있거라, 제기랄!

 

바실리, 우리가 잠 못 이루던 한밤 내내
너에게는 상하이에서 온 투사의 넋이 있었다
그리고 아르마비에르의 옥수수 밭에 있는 
너의 무덤이 바람에 씻겨 지워진다.

 

홍콩에 불이 들어오고, 때는 고층 빌딩의 시대,
종려나무 잎은 아랍의 반달칼을 닮았고
광장은 묘지를 닮았고,
저녁은 무더운데, 감옥 침대에서
응우옌, 너는 죽어가는구나

 

그리고 너희, 목 잘린 나의 형제여,
길 잃은 자, 용서받지 못한 자
학살당한 자, 르네와 레이몽
유죄이지만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오, 어둠 속에서 내리는 별들의 비,
죽은 형제들의 별자리!

 

나는 너희에게 나의 가장 암울한 침묵,
나의 결의, 나의 탐닉을 빚지고 있다.
텅 비어 보이는 이날을 생각하면,
그리고 내게 남은 긍지는 그 무엇이든지
사막에서 이는 불길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러나 이물을 장식하는 이 숭고한 조상에
정적이 있으라!
맹렬한 항해는 계속되고,
항로는 희망행이다

 

언제 네 차례가 될까? 내 차례는 언제일까?
항로는 희망행이다

 

(「죽은 형제들의 별자리」, 빅토르 세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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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선거의 본질과 노동계급의 대안 2

거부: 자본주의 선거에 대한 계급적 대응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부르주아 선거의 본질과 노동계급의 대안”을 밝힌 「국제주의노동자그룹」(IWG) 동지들의 과거 기사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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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언론 매체가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거부’ 요구를 검열하는 데 앞장서고 있으므로[1], 우리는 선거에서 거부할 것을 촉구하는 임무를 스스로 맡는다. 오늘날 어느 국가에서든 진정한 의사결정 과정은 국민 대표자들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 진정한 권력은 의회나 백악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 기관 배후에 있는 기구에 있다.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그 배후에 있는 자본주의 이념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레닌의 "혁명적 의회주의"조차도 본래 목적은 차르 두마(하원)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것이었다. 집권당의 지지를 얻기 위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급진적 개혁주의자들의 활동은 그들이 지지하는 반동적 자본주의 분파에 정당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 활동에 끌려 들어간 사람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부르주아지는 누가 후보 명단에 오르고, 누가 선거에 출마할지 집단으로 결정한다. 그리고 나서는 모든 유권자에게 자신의 조건에 맞는 정당에 투표하라고 요구한다. 반면 시민들은 후보 명단에서 가장 덜 악한 거짓말쟁이로 보이는 사람을 기준으로 투표한다. 지배계급의 정치적 쇼(선거)를 거부하라는 요구는 결국 일부 자본가들에게 위협이 된다. 실제로 한 주요 소셜 미디어 기업이 그러한 정치적 발언을 금지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응의 원인은 미국 정권을 이끄는 두 분파(민주당, 공화당) 사이의 정치적 경쟁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경쟁은 너무나 심해서 지배계급이 더 강력한 검열을 해야 한다는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파리 코뮌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 이르기까지 노동자 민주주의의 사례들이 있다. 이는 소수 지배층이 장악한 자본주의 정치 체제에서 단순히 자리를 차지하는 정치적 꼭두각시가 아니라, 위임받은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선출자가 소환할 수 있는 대의원(대표)을 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였다. 이러한 노동자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지를 권력에서 체계적으로 배제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독재"라고 할 수 있다. 자본가들에게 자신들이 배제된 모든 형태의 사회 조직은 독재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정치 기구인 정당의 등장은 19세기 경찰 조직의 형성과 민족주의의 부상과 함께 나타났다. 계몽주의 혁명의 시대에 ‘당파적인 사람(당원)’이란 민중의 이익보다 자기 정치 분파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을 의미했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이는 옛 귀족 계급의 한 분파에 가담하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 혁명 직후 휘그당과 공화민주당과 같은 느슨한 정치 세력은 19세기 후반에 명확하게 확립된 경직된 정치 구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자본의 좌파 일부는 누구나 부르주아 공화국의 가장 오래된 정치적 득표 획득 기구에 들어가 대중 정당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해당 기구로부터 정치적 자율성을 유지하는 모든 정치 세력을 이념적으로 압박한다. 이 과정에서 진정한 종파주의자들은 정치적 자율성을 표출하는 모든 행위를 종파주의라고 비난을 퍼붓는다.

 

노동자들이 투표를 거부하는 것은 혁명가들이 자본주의 선거라는 부르주아 정치쇼 참여에 반대하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개인적인 정치적 성향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고, 선거 과정 자체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외는 무관심과 불만으로 나타난다. 이는 강렬한 이념적 공격을 받는 노동자들의 방어기제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거부를 촉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사회적 영역에서, 계급의 방식으로 지배계급에 맞서 투쟁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인터넷이라는 주류 매체에서 표현의 자유를 검열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노동계급의 정치적 표현을 부르주아 양당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투표소에 가두어, 누구나 부르주아 전쟁광들에게 투표하게 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표현의 제한은 누군가가 금지된 ‘거부’ 주장을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이러한 주장이 용인되고 무시되곤 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의 위기는 이러한 정치적 각본에 대한 통제력 상실을 초래했다. 부르주아지는 끝없는 축적의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집단적 행동에 대한 반응으로 스스로 반대되는 현상을 만들고 있다.

 

미국에서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외국인 혐오 캠페인이 자행되고 있다. 이 캠페인은 모든 반대 의견과 사회적 저항을 경쟁 관계에 있는 제국주의 세력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몰아 공격한다. 이는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만, 부르주아지가 역사적으로 제국주의 전쟁을 향해 나아가면서 사용해 온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한 것이다. 이는 국외에서 전쟁의 명분을 쌓는 동시에 국내에서는 정치적 검열과 탄압을 강화하는 것이다. 지난 10여 년간 발생한 모든 사회 운동은 제국주의 세계 무대에서 특정 적대 세력이 조장한 분열의 산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경찰의 총격에 시달리는 것이 싫다면 "X"라는 나라에 속았기 때문이고, 전쟁에 지쳤다면 "Y"라는 나라 탓이라는 식이다.

 

우리는 이러한 계급 분열이 항상 존재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국가, 모든 민족 집단, 모든 정체성은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 부르주아 이념가들은 이러한 계급 구분을 감추려 하지만, 결국 계급 분열은 그들의 정체성 정치로도 지울 수 없을 만큼 뿌리 깊다. 미국의 두 주요 부르주아 집단인 민주당과 공화당은 모두 시민들의 신뢰에 대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그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똑같이 반동적이다. 달라진 점은, 거대한 소셜 미디어 기구를 장악한 일부 사람들이 선거 거부를 촉구하는 모든 목소리를 금지된 표현으로 규정해 버렸다는 것이다.

 

미국 선거에서 어떤 투표도 제국주의 전쟁 기계를 정당화하는 행위이다. 이는 부르주아 행정부의 양 진영 모두 해외에서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확장하고 유지하는 데 전적으로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결국 핵심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충돌로 이어질 영구적인 전쟁 상황에 몰두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민주적 선택이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이 체제의 실체를 폭로할 것을 촉구한다. 그것은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집행위원회를 누가 운영할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2]

 

부르주아 정치에 대한 거부는 지배적인 자본주의 세력의 이념적 통제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한다. 계급이 스스로 '자신을 위한 계급'으로 자각하기 위해서는 [3] 정치적 단절이 첫걸음이다. 유진 V. 뎁스(Eugene V. Debs)는 민주당에 입당해서 정치적으로 ‘주목받는’ 인물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을 탈당해서 그러했다. 실제로 그는 특히 풀먼(Pullman) 파업의 유혈 사태 이후 민주당 초기 활동을 개인적인 수치의 원천으로 여겼다. 초기 볼셰비키들도 차르의 경찰국가를 개혁하겠다는 목적으로 두마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지위를 이용해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지지를 규탄했고, 의회 연단을 통해 부르주아 정권을 비난했다. 냉전 시대의 유물과도 같은 이름을 가진, 제국주의 전쟁 지지가 명백히 드러난 우리의 "미국 민주사회주의자(DSA)"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자본주의 정당 앞에 우리 모두를 무릎 꿇게 하려고 한다. DSA는 미국 사회민주주의가 최종적으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전쟁 정당으로 전락하여 붕괴한 결과물이다. 그들은 열린 무덤을 응시하며 그것이 요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부르주아 선거 정치를 거부하고 노동계급 자신의 혁명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집권당에 대한 불만으로 나타나는 부르주아 지배의 정치적 위기를 활용하여 우리의 정치 세력을 구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노동자들에게 선거란 착취자들이 자행하는 의례적인 굴욕 행위에 불과하다. 자유주의자들이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표하지 않는다고 외칠 때, 우리는 자본주의 선거에서는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할 방법이 전혀 없다고 지적한다.

 

부르주아 선거를 거부하자!

 

2019년 9월 6일

ASm

국제주의노동자그룹(IWG)

 

<주>

 

[1] 클라이모어(Clymore), A. “페이스북, 미국 유권자들에게 투표하지 말라고 권유하는 광고 금지할 예정”. 로이터. 2019년 6월 30일.

https://www.reuters.com/article/us-usa-election-facebook/facebook-will-ban-ads-that-tell-people-in-u-s-not-to-vote-idUSKCN1TV0Y8/

[2] 『코뮤니스트 선언』 제1장, “현대 국가의 행정부는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동 업무를 관리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 (맑스)

[3] 『철학의 빈곤』, “따라서 이러한 대중은 이미 자본에 대항하는 계급이지만, 아직 자신을 위한 계급은 아니다.” (맑스)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19-09-06/abstention-a-class-response-to-capitalist-e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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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선거의 본질과 노동계급의 대안 1

모든 투표는 자본주의에 대한 찬성표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부르주아 선거의 본질과 노동계급의 대안”을 밝힌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동지들의 과거 기사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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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조건이 악화하는 가운데 또 하나의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후보”에 투표할 “민주적 권리”를 행사하게 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선거에서 누가 승리하든 노동계급이 맞이할 결과는 모든 분야에서 삭감과 위기뿐이다

 

자본주의 투표는 노동계급에 무의미한 것 이상으로 해롭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이다. 설령 노동자 정당이나 이른바 사회주의 정당에 투표한다 해도, 결국 현 체제를 정당할 뿐이다. 우리가 투표에 더 많이 참여할수록 그들은 자신들이 통치할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더 커진다. 국민(유권자)의 뜻이라는 것이다! 사실, 1974년 이후 영국 선지(The Sun)의 지지 없이 당선된 정부는 없었으니, 국민의 뜻이 아니라 머독 언론이 대변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이처럼 생산 수단을 장악한 자들은 사상의 재생산 수단도 장악하고 있으며, 매일같이 자신들의 언론매체로 우리를 압도하고 있다.

 

진정한 권력은 의회에 있지 않다

 

어떤 이들은 우리 조상들이 참정권을 위해 싸웠으니 “투표권을 행사해야 한다”라고 여전히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더는 차티스트 운동(참정권 요구)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진보적인 역할을 상실했다. 노동계급이 투표함에 종이 한 장을 넣는다고 해서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 체제의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다. 19세기에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승리했던 것은 지금과는 사정이 다르다. 당시 자본주의 언론은 노동계급에 접근할 수 없었고 국가는 다른 매체를 활용할 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이 자본주의 지배계급에 공포감을 심어주고, “대중” 언론이 이미 확립된 후에야 비로소 모든 노동자에게 투표권이 부여된(1918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보편적 참정권이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을 위한 발판이 되기는커녕, '민주주의 수호'가 자본의 실질적인 지배를 감추는 의회주의라는 허울에 노동자들이 충성하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에서 일부(생산 수단의 소유자와 지배자들)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유롭다. 그리고 만약 1923년처럼 자본이 결과에 만족하지 못했다면, 1년 뒤 데일리 메일(Daily Mai)에 실린 가짜 지노비예프 편지(1)처럼, 거짓 정보를 퍼뜨려 결과를 뒤집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노동당을 걱정할 필요조차 없었다. 노동당은 오래전부터 의회 정치에만 관심이 있었고 영국 자본의 이익에 반할 의도는 전혀 없었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니 노동자들이 왜 선거에 무관심한지 의아해할 만도 하다!

 

결국, 의회는 자본주의 지배를 가리는 허울에 불과하다. 의회 자체가 국가는 아니다. 진정한 권력은 배후에서 지배계급의 의제를 설정하는 네트워크에 있다. 국회의원들은 로비스트들을 앞세워 실질적인 의제를 좌우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독점 자본가들에 비하면 무력하다. 언론이 '질문 대가로 금품을 수수한 스캔들'과 같은 의회 부패 사건을 집중 조명할 때, 폭로되는 것은 주로 국회의원들이다. 그러나 로비스트에게 뇌물을 주고 부패를 조장하는 기업들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의회는 서커스와 같고, 투표는 누가 당선되든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가리는 연막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노동계급이 의회를 통해 권력을 잡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는 우리 투쟁에 필요한 것과 정반대이다.

 

좌파 민족주의의 환상

 

1970년대 초, 전후 호황이 끝나고 오래된 자본주의 경기 순환 위기가 다시 찾아왔을 때,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1950년에는 영국 유권자의 85%가 투표에 참여했지만, 1970년부터 이 수치는 꾸준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2001년에는 59.3%만이 투표했고, 온갖 매체를 동원해 투표를 독려했던 2010년에도 65%에 그쳤다. 언론은 체제의 정당성 하락을 우려하는 지도자들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물론, 특별한 지역적, 정치적 쟁점이 있을 경우는 예외적으로 투표율이 놓을 수도 있다. 어느 지역에서 좌파 세력에 대한 지지가 높아질 수도 있고, 설령 그들이 가치 있는 정책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전 세계적인 문제이다. 지역이든 영국 전체든, 국가적인 해결책은 없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저항(좌파) 정당에 투표하는 데서 쾌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그것은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다.

 

대안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은 없다. 노동계급이 깨어나 자본주의 공격이 절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급전쟁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현재 우리는 패배하고 있다. 비록 반(反)자본주의 사상이 고조되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 저항은 산발적이고 단편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이러한 사상들은 아직 반(反)자본주의 운동으로 구체화하지 못하고 있다.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대안이 명백히 부재하다는 점이다. ‘코뮤니즘’이라는 단어는 신뢰를 잃었으며, 자본주의 야만성을 대신해 문명화된 미래의 열쇠를 노동계급이 쥐고 있다는 생각은 언론에서 절대 다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전 세계의 전쟁과 경제 위기 소식에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느끼기보다는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라고 위안 삼으며, 위기가 곧 사라져 긴축 정책이 과거의 일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심지어 가장 큰 피해자들조차 투쟁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어떤 이들은 다른 누군가가 앞장서 주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긴축 정책에 저항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 투쟁을 하는 사람들과 저 투쟁을 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있다. 사실 모두 같은 투쟁이지만, 대다수는 아직 큰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영원히 지속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극심해지고 있다. 결국, 노동자들이 더는 예전처럼 살아갈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주장에 동의해 온 사람들은 그 순간을 대비해야 한다.

 

집단으로 조직하자

 

따라서 우리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들은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호소한다. 투표를 거부하자! 이 부르주아 사기극을 거부하자! 하지만 이것은 수동적이거나 체념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악화하는 자신들의 처지에 맞서 싸워야 한다. 하지만 조합비로 급여를 받으며 투쟁을 점점 더 협소한 법적 테두리 안에서만 유지하도록 감시하는, 어쩌면 얼굴도 자주 볼 수 없는 노조 대표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 강제 퇴거에 맞서 싸우든, 의료 혜택 삭감에 맞서 싸우든, 악화하는 노동 조건에 맞서 싸우든, 우리는 파업위원회·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직장과 지역 사회에서 모임·총회를 개최하여 우리만의 조직 형태를 마련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발언권을 갖고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자본주의 대의제보다 훨씬 더 민주적인 우리만의 직접 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한다. 이는 모든 대의원(대표)을 선출한 사람들이 즉시 소환할 수 있는(4년·5년에 한 번이 아닌) 민주주의다. 유급 관료나 자칭 ‘대표자’들이 밀실에서 결정을 내리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파업을 벌일 때는 몇 시간이나 하루이틀 정도 피켓을 들고 하는 형식적인 시위가 아니라,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표로 투쟁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조직하자

 

사실 생활 수준 저하에 맞선 투쟁은, 이를 일으키는 체제에 대한 단호한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아무리 전투적인 투쟁이라 할지라도 자본가들은 신속하게 재정비하여 양보했던 것들을 되돌려 놓기 때문에, 단기적인 성공만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는 이들은 투쟁의 핵심 목표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취해야 할 구체적인 단계를 설명할 정치적 의무가 있다. 이는 계급투쟁의 부활과 분리된 진공 상태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투쟁 또한, 자체적인 정치 조직이나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명확한 강령 없이는, 궁극적으로 현 자본주의 국가 체제를 전복한다는 정치적 목표를 이룰 수 없다.

 

날이 갈수록 가혹해지는 자본주의 야만성을 피하려면,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변혁이 필요하다. 이는 의회 선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코뮤니스트의 목표는 노동하는 사람들이 생존 수단을 집단으로 장악하고 이를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운영하여 인류의 건강과 복지, 그리고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는 과거 노동당이 추진했던 산업 국유화 계획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직 이러한 방식만이 소수 엘리트의 이윤 창출을 최우선으로 삼고 인간의 필요는 부차적으로만 다루는 자본주의 생산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야만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를 끝장낼 수 있다. 이러한 변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존 제도를 전복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인류에게 코뮤니스트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혁명은 소련, 중국, 쿠바 등의 국가자본주의 체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사회주의는 착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사람들이 아래로부터 건설할 때만 가능하다.

 

노동계급은 쟁취해야 할 세상이 있다.

 

2015년 5월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역자 주>

1. '지노비예프 편지(Zinoviev Letter)'는 1924년 10월 영국 총선을 불과 4일 앞두고 일간지 데일리 메일(Daily Mail)이 특종으로 대서특필한 조작 문서이다. 이 편지는 코민테른 의장과 지노비예프가 영국 공산당에 보낸 것으로 위조된 문서이다. 편지의 내용은 영국 노동당을 통해 영국 내 적색혁명을 일으키고 군대 내 반란을 선동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편지는 러시아 반공주의 망명객들이 위조하여 영국의 정보기관 요원들과 보수당 측에 전달한 가짜 문서였다. 우익 성향이 강했던 데일리 메일은 이 편지의 출처가 의심스러움을 인지하고도 총선 직전이라는 절묘한 타이밍에 이를 폭로했다. 편지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당시 영국 사회에 만연했던 '적색 공포(Red Scare)'를 자극하여 많은 유권자의 반발을 샀고, 이는 보수당이 압승하고 노동당이 선거에서 패배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훗날 진상 조사와 문서 검토를 통해 이 편지는 소련을 악마화하고 노동당을 실각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100% 위조 편지로 판명 났다. (위키피디아)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15-04-28/every-vote-is-a-yes-for-capit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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