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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추모하며 (1871년 ~ 1919년 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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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추모하며 (1871년 ~ 1919년 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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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며 (1871년 3월 5일 ~ 1919년 1월 15일)

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며
  • 야만의 자본주의에 살해당한 노동자 투사들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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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1월 15일 - 추운 겨울밤의 학살

     

     

      따뜻하고 포근한 안개에 둘러싸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의식세계와는 달리 1919년 1월 15일의 밤은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길이 얼음으로 꽁꽁 덮여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로자 룩셈부르크는 군용트럭의 화물칸에 거칠게 내팽개쳐졌다. 거친 폭음을 내며 어둠을 향해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 하나가 트럭 위에 올라탔다. 다시 한번 로자 룩셈부르크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그것을 통증으로 느낄 수 없을 만큼 기력은 쇠잔해져 있었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트럭에서 세찬 삭풍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중위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잔인한 눈길을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돌려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마치 그에게 아직도 생명이 붙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허술하게 만들어진 우리에서 피에 굶주린 짐승이 피를 찾아 으르렁거리며 달려들듯이 그는 피스톨의 방아쇠를 끌어당겼다.

     

      촛불은 꺼졌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산산이 부서졌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운하와 동물원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엔진 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고 있었다. 바로 옆의 운하에 멈춰서 있는 두세 명의 병사의 그림자가 물 위에 떠 있었다. 그곳으로 다가가서 급히 생각이 난 듯 차는 급정거 하였다. 병사들의 그림자가 한쪽 발에는 신발도 신지 않은 중년 부인의 그림자를 귀찮은 듯 다리 위에서 운하로 집어 던졌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어둠 속으로 하얗게 흩어졌다. 삽시간에 어둠과 정적만이 감돌았다. 임무를 다했다는 듯 트럭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여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다음날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이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의 죽음과 함께 전해졌다. 그가 선동한 군중의 광폭한 노여움에 의해 자신의 죽음을 초래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리고 시체는 무질서한 혼란의 와중에도 분실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독일의 5월은 아름답다. 시인 하이네가 노래하듯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5월, 모든 초목이 싹틀 때’ 그것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재생 시기였다. 진흙 속에 파묻힌 그의 육체가 운하 위로 떠오른 것은 5월 31일이었다. 6월 13일, 로자 룩셈부르크는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가 32명의 희생자와 함께 고이 잠들어 있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스펠데 묘지의 같은 장소에 묻혔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묘지 앞에는 생전에 좋아했던 꽃다발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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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자 룩셈부르크의 최후 -비극의 종말

     

      독일혁명의 폭풍 속에서 혁명의 패배가 분명해진 순간에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원칙과 방법을 포기하지 않고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베를린은 유지되고 있다>라는 논설에서 혁명의 와중에, 반혁명 승리의 환상 속에 있더라도 아직 혁명적 노동자는 사건에 대한 검토를 거듭하고, 경과와 결과를 역사의 척도로써 측정할 것을 요구했다.

     

      1월 이후, 로자 룩셈부르크의 심신의 피로는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고, 혁명에 대한 의욕과 의지가 간신히 그것을 지탱하고 있었다. 최종적인 승리를 눈앞에 두고 과로와 병세로 쓰러질 수도, 아니면 반혁명 군의 총검에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 순간까지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을 신뢰하고, 대중에게 미래를 걸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번 투쟁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대단히 날카로운 데 반해 혁명이 발전할 수 있는 초기 단계에 필요한 전제 조건은 모자랐습니다. 그런 모순을 안고 따로따로 맞붙은 싸움이 시작되어 결국은 패배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혁명이 가진 특수한 생명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만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질서가 베를린을 지배한다>
     
      "지도자는 대중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지도자는 대중 속에서 만들어질 수 있고, 또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최후의 결정자는 대중입니다. 대중은 혁명의 최후 승리가 쟁취되는 전장입니다. 그들은 이 패전으로 인해 국제 사회주의 사회의 과시이며 힘인 역사적 패배의 연속 일환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래서 이 패배로부터 미래의 승리가 꽃필 것입니다." <로테 파네 1919.1.14>

     

      1월 16일의 <폴베르쯔>는 리프크네히트가 도망치려고 하여 사살되었고, 로자 룩셈부르크 또한 분노하여 광폭한 대중에 의해 살해되어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그 전날 밤 9시경,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만하임 가의 은신처에서 체포되어 에덴 호텔로 연행되었다. 바프스트 대위가 두 사람을 심문했는데, 살해의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 호텔을 나서는 순간 한 명의 수병이 개머리판으로 리프크네히트를 때려 넘어뜨렸다. 정신을 잃은 그는 차에 실려 가 틸가르텐 호수 근처에서 끌어 내려져 그곳에서 학살되었다. 시체는 신원불명자로 취급하였다. 이어 로자 룩셈부르크가 호텔에서 끌려 나왔다. 그리고 그의 최후 역시 비참하게 마감되었다. 이 학살에 대해 슬픔과 격노에 찬 요기헤스는 사실 자료를 모아 공개하고 그들의 범죄를 폭로하였다. 그것 때문에 그도 역시 3월 10일 체포되어 경시청의 감방 안에서 형사에 의해 학살되었다. 기력이 다한 늙은 메링도 역시 그들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독일혁명은 비극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비극의 역사는 반복되었다. 한때 세계 최고와 최대의 사회주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국제 노동운동의 지도적 지위를 확고히 했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이었지만, 배신과 학살에 의해 독일혁명의 실패를 초래하더니, 결국 그 독일 사회민주당이 그곳에서 파시즘을 탄생시키고 육성하게 된 것이다. 그 탄생과 양육의 부모였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과거 자기들이 로자 룩셈부르크와 동지들을 학살할 때 사용했던 방법에 의해 그들이 기른 자식에게 조직 자체가 압살 되는 운명을 겪었다.

     

      1933년 나치는 자본의 지지와 원조 하에 권력을 장악하고 국회의사당을 방화하고 그 죄를 독일 사회민주당과 코뮤니스트당, 노동조합에 전가했고, 독일 사회민주당은 이 상황에서도 나치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고 공산당의 총파업 요구는 거부되었고 결국 세 곳 모두 결사금지의 탄압을 받게 된다. 이런 나치의 만행은 죽은 자의 묘를 파헤치고 일련의 사회주의 문헌과 함께 로자 룩셈부르크의 모든 저작을 불태우고야 만다. 결국, 전 인류의 불행과 파멸을 초래했던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로자 룩셈부르크의 묘지는 해방되었고, 아직도 그의 저작과 사상, 혁명을 향한 실천은 복원 중이며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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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인류에게 있어 이러한 역사적 재앙에 직면하여, 예전의 노동자당에 의한 이러한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 정신의 본보기, 지칠 줄 모르는 결연함과 장기적 관점에서 이론적-정치적 분석을 이뤄내는 역량의 한 본보기였다.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전개된 야만성과 당의 배반은 혁명가들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 그들 중의 일부는 침울함에 빠졌다. 독일의 많은 혁명가들이 수감되거나 추방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도 전쟁 기간 대부분을 감옥에 있었다. 4년 4개월간의 전쟁 기간 총 3년 4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의 결연함을 굴복시키고 침묵하게 하려는 것이 수감의 의도였다면, 수감된 후 그의 반응은 이론이라는 무기로 반격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 「자본의 축적」에 대한 비판들에 대한 대답으로 「반비판」을 썼다. 전쟁발발 전 독일사회민주당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그는 정치경제학에 관한 강의를 했었다. 수감 중에 그는 당 학교 교사로서 사용했던 초기의 그 강의 자료로 정치경제학입문을 썼다. 그리고 그는 문학과 문화 문제들도 다루었는데, 러시아 작가 코롤렌코의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그 서문을 작성했기도 했다. 그가 러시아혁명에 대한 분석, '러시아혁명에 대하여'를 작성하고 러시아에서의 혁명에서 행해진 실수들에 대한 비판을 위한 최초의 몇몇 중요 점들을 발전시킨 것도 수감 중인 상태에서였다.

     

      물론 로자 룩셈부르크는 감옥에 갇힌 상태로 고통받았지만, 이것은 결코 그의 의지를 꺾거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없었다. 그가 수감 중에 쓴 기록들이나 서신들을 읽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가 감옥 속에서 다룬 화제들의 다양성과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일련의 편지들은 길들여질 수 없는 창조적 정신을 증언한다. “나는 종종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책 읽기와 글쓰기로만 하루를 보냅니다.”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전망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스스로 가장 결연한 투쟁에 투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깊은 슬픔을 겪으면서도 용감한 정신을 유지했다. 그가 강인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론적인 노력과 다른 열정들(예를 들어 그림 그리기나 식물학)을 추구하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거대한 지원망을 통해서였다. 위장이 약해서 특별 식이요법이 필요했던 그는 감옥 밖으로부터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의 저작들은 반복적으로 감옥 밖으로 밀반출되었고, 이는 때때로 간수들의 묵인하에 이뤄졌다. 수감 중에 그는 많은 동지들과 서신 교류를 했고, 그들에게 충고를 주고 감옥에 갇혀서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원했다. 감옥을 둘러싼 그 어떤 벽도 그를 침묵시키고 그가 개인들에게, 그의 동지들에게 그리고 노동자계급 전체에게 그의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을 만큼 두껍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감옥 밖에서도 '들릴 수' 있었다. 그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날 약 천 명의 노동자들(그 대부분이 여성노동자)이 감옥 정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가 집까지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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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3월 자모치(폴란드)에서 유대인 가정의 다섯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1871년은 파리코뮨의 해였고, 제 1 인터내셔널 내에서 바쿠닌의 음모에 대항한 투쟁이 있었던 때였다. 17살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에서의 억압 때문에 스위스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취리히대학에서 몇몇 과목들(식물학, 수학, 경제학, 역사 및 법학 등등)을 수학했다. 1897년 그는 '폴란드의 산업발전'에 관한 박사 논문을 제출했다. 1890년대에 이미 그는 폴란드 출신의 다른 동지들과 함께 제 2 인터내셔널의 오래된 원칙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발달을 감지할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 2 인터내셔널의 저항에 맞서, 폴란드의 민족자결권이 더 이상 의제가 아니라고 결론지을 용기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지배적인 입장과 특히 레닌의 입장과 마찰을 일으켰다.

     

      1898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로 이주하여 독일 사회민주당에 참여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에 하나의 경향이 출현했는데 그 주요 대표자가 베른슈타인이었다. 그 경향은 자본주의가 다소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가능하다는 생각을 옹호했다. 사실상 베른슈타인은 운동의 목표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의 답변, 「혁명이냐 개량이냐」(1899)를 썼다. 그 시기 동안에 이미 그는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에 앞장섰다.

     

      1903년 그의 글 「마르크스주의의 침체와 진전」에서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죽음 이후 마르크스주의 운동에서의 침체를 비탄하며 새로운 이론적 노력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6년 옥중에서 쓴 「반비판」의 끝머리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기를, “마르크스주의는 언제나 새로운 인식을 얻으려고 애쓰는 혁명적인 세계관이다. 이는 한번 유용했던 표식에 형식적으로 되는 것을 철저히 혐오하며, 자기비판이라는 정신적인 격렬한 울림에서, 그리고 정신적인 천둥·번개에서 생명력을 가장 잘 유지한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에 뒤이어 러시아에서 최초로 대대적 파업의 큰 물결이 일어났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20세기 계급투쟁의 새로운 원동력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 중의 하나였는데, 이제는 노동자들의 주도성이 특징적인 요소가 되고 계급투쟁은 노동조합이나 당 기구에 의해 '계획' 될 수가 없다. 비록 로자 룩셈부르크가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책,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에서 그는 이러한 대중 활동을 강조했다. 계급투쟁의 이러한 새로운 원동력을 노동조합과 증가하는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 인자들은 격렬한 투쟁으로 꺾어버리려 했다. 노동조합 기구와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당 내부에서 대대적 파업에 대한 논쟁을 금지했다. 1906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대적 파업에 관한 책 출판 후 “계급 증오를 조장했다”는 선고를 받고 2개월 동안 수감되어야만 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전의 지도자로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적인 “교황”으로서 알려진, 칼 카우츠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과격한 노선에 점점 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 시기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를 “평화롭고”, “조화를 사랑하는”독일 사회민주당 안에 곤란을 유발하는 “유대인”, “외국인”, 그리고 “노처녀”라고 비방하는 캠페인과 중상모략이 강화되었다.

     

      1907년 점증하는 전쟁위협에 대응하여 조직된 제 2 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 그리고 마르코프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본주의 계급지배의 철폐를 촉진한다”는 공통된 지향을 위해 투쟁했다. 1912년 「자본의 축적」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의 저작들 속에 존재하는 한계와 모순들을 용감하게 지목했었다. 그녀의 책은 아직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고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시장들의 역할과 군국주의의 특수한 기능을 파악하는데 기본을 제공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2년 전에 쓴 그 책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들에 대한 필요불가결한 통찰을 제공한다.

     

      1914년 8월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이 있자마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 반대 투쟁에서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유니우스 팸플릿>은 그래서 1890년대 이래 새로운 조건들을 이해하려는 그의 투쟁, 제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을 설명하려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도전을 설명하려는 그녀의 투쟁과 직접적인 연장선 속에 놓여있다. 1917년 여전히 감옥 속에 있으면서 그녀는 러시아에서 그때 막 시작된 혁명의 중요성에 대해 최초의 분석을 제공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8년 11월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지배계급은 그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두려워했다.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은 노동자계급에 반대한 그 당의 투쟁의 표적을 로자 룩셈부르크로 삼았다. 1918년 12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에 그와 독일 노동자계급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 중 하나였던 칼 리프크네히트의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는데, 그 핑계는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1918년 12월 독일 코뮤니스트당(KPD)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대해 행한 연설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차원을 강조하면서 혁명이 테러로 복귀할 수 없으며 노동자계급 전체의 모든 에너지와 의식을 동원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매우 교활한 적에 대항한 재빠르고 쉬운 승리라는 당면(當面)주의적 환상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인 극소수 중의 하나였다. 결국, 그를 겨냥한 중상 비방 캠페인은 1919년 1월 그 극에 달했다. 1919년 1월 중엽 소위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진압되고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학살된 뒤 로자 룩셈부르크도 암살되었다. 지배계급은 당시 가장 용감하고 통찰력 있는 혁명가 중 하나를 일소해버리는 데 마침내 성공하고 만 것이다.

     

    <인용한 문헌>

    1. Takahashi, Shoichi <로자 룩셈부르크>

    2. ICC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사회민주당의 위기 [유니우스팸플릿]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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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9호] 칼 코르쉬 「레닌과 코민테른」

칼 코르쉬  레닌과 코민테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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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코르쉬 소개

 

칼 코르쉬는 그람시루카치와 더불어 서구 3대 맑스주의자다. 1920년대 볼셰비키 당사와 역사를 암송하는 이들에게칼 코르쉬는 불편한 인물이다코르쉬는 1920년대 독일코뮤니스트당 안에서 코뮤니스트 정치지를 중심으로 분파활동을 했는데, “자본주의는 안정화되지 않았고주체적인 혁명정치를 위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독일코뮤니스트당은 의회주의 백치’ 태도를 버리고, “노동자평의회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를 주장했다또한 코르쉬는 러시아가 자본주의로 회귀했으며새로운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었다혁명정치와 관련해서 타협을 거부하던 코르쉬와 소련이 주도하는 코민테른은 당연히 갈등관계에 있었는데아니다 다를까스탈린이 직접 나서서 1926년 7월 중앙위원회 총회 자리에서 코르쉬를 초좌파(ultra left)로 맹공을 퍼부었다예상되는 정치 수순으로(!), 코르쉬는 독일코뮤니스트당에서 축출된다그때나 지금이나 정치 소수파는 재정 문제가 중요한데코르쉬 그룹이 발간한 코뮤니스트 정치는 코르쉬가 받는 국회의원 월급으로 근근이 발간을 이어가다, 1928년에 발간을 중단한다.

 

코르쉬 그룹은 노르웨이 좌파 코뮤니스트이탈리아 보르디가 그룹과 국제적 관계를 맺고레닌과 노동조합 논쟁을 벌였던 러시아 노동자 반대파 (worker’s opposition) 실리아프니코프를 지지했다트로츠키가 주도한 좌파 반대그룹(the left opposition)에는 반대했다. 1933년 나찌가 집권하자 코르쉬는 정치적 망명길에 나서는데이로써 고독한(?) 사상투쟁을 벌였던 정치조직 활동은 중단된다.

 

1920년대와 1930년대 걸쳐 좌익공산주의자로 활약하면서 코르쉬가 굳게 믿었던 맑스주의 혁명이론은 프롤레타리아 실천과 의식이었다우리가 흔히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을 통일적으로 얘기하지만코르쉬가 볼 때 최초의 계기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즉 실제 혁명운동에서 주어 진다예를 들어혁명이론은 지도부나 이론가들에 의해서 외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표현이어야 한다요컨대 노동자를 위한 혁명일지라도, ‘노동자가 나서지 않는 방법이라면 코르쉬는 거절하는데이러한 그의 고집은 노동자평의회 강조로 이어진다코르쉬에게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 안에서 직접 정립되며부르주아 사회 제도생활양식과 완전한 단절을 이루는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 투쟁을 강조한다. (남궁원, “혁명적 코뮌칼 코르쉬”, 코뮤니스트2, 2013)

 

코르쉬와 레닌주의

 

1920년대 독일코뮤니스트당에서 정치적 활동을 하는 동안코르쉬에게 소련과 레닌주의는 주요한 논점이 되었다레닌과 소련에 관한 그의 입장은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이라는 복합체의 양가성을 반영하기에 크게 모순적이다개략적으로 코르쉬의 입장은 세 단계로 분류될 수 있는데첫 번째는 레닌주의와 소련에 전심전력하여 집착하는 것으로 두드러지는 열광적인 레닌주의의 시기이다이 입장은 나중에 자신이 편집자로 있는 코뮤니스트 저널인 인터내셔널에 발표한, 1924년 코민테른 세계대회에서 코르쉬가 한 연설인 레닌과 코민테른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코르쉬는 진정한 혁명정치를 위한 토대로서 레닌주의를 전적으로 옹호하고 레닌주의가 일련의 모든 정치적이론적 과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믿는다따라서 레닌의 유산을 이론적으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상속하여 보존하고 활력을 불어넣는 것과현재 상황에 레닌의 정신을 그것의 이론과 실천 속에서 역사적 현실로서 한층 발전시키는 것은 코민테른 전체의 의무였다.

 

코르쉬는 자신의 이론적이데올로기적 기능 속에서 죽은 레닌을 살아있는 레닌주의자들의 크고 강력한 집합체로써” 대체하는 임무를 제안했다레닌주의를 전유하고 발전시키는 이 기획은 세계역사상 이러한 형태로 당 앞에 제기된 적이 결코 없는 아주 거대한 임무로 서술된다코르쉬의 레닌주의에 대한 온갖 집착의 지표로서레닌주의를 소련 내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이론으로 역사화시키려고 한 독일코뮤니스트당 이론가인 탈하이머와반면에 레닌주의와 소련의 모델이 세계혁명운동에 대한 일반적 타당성을 담지한다고 본 코르쉬의 논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코르쉬는 치고 올라오는 코뮤니스트적 수정주의의 쇄도에 맞서 방어벽을 요청하면서 결론짓고레닌주의에 대한 총체적 헌신을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방법이론전략으로서 옹호한다코르쉬의 철저한 레닌주의의 배경은작센과 튀링엔의 노동자 정부에 대한 폭력 탄압과 뒤이은 코뮤니스트당 불법화 이후 1923년 독일 연합전선의 붕괴였다코르쉬에게 이 경험은 무너져가는 독일 운동을 부흥시키기 위해서 더 성공적인 레닌주의 혁명 이론과 전략으로 전환할 필요성을 의미했다이러한 계획으로새로운 역사적 사건들이 정직하고 헌신적인 혁명가 코르쉬가 자신의 레닌주의를 근본적으로 묻도록 강제하여 결국 레닌주의와 결별하기 전까지코르쉬는 이후 몇 년 동안 헌신적인 레닌주의자가 되었다.

 

레닌 및 소련과 관계맺는 코르쉬의 두 번째 단계는 처음에는 소련과다음에는 레닌주의 자체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발전과 관련된다이 전환의 배경은 독일코뮤니스트당이 코르쉬를 제명하고 그가 좌익반대파의 선봉으로 이동한 것이다코르쉬는 혁명적 레닌주의 이론과 소련 및 독일코뮤니스트당 내 스탈린주의자들의 점증하는 반혁명적 실천 사이의 모순을 주목했다코르쉬가 표명하는 스탈린주의와 소련 비판의 입장은 코르쉬가 믿기에 순수히 레닌주의적이고 혁명적이었던 소련과 독일 운동 내 좌익반대파 세력들과의 자기 동일시였다(당시 코르쉬에게 레닌주의적임과 혁명적임은 동의어였다). 그는 레닌주의의 퇴보와 반혁명적 퇴행으로 이어지는 스탈린과 그 동맹자들 속에 구현된 기회주의개량주의 세력들의 승리를 우려했다이 입장은 소련에서의 10년의 계급투쟁이라는 소론에서 명백히 나타난다코르쉬는 양자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라는 교의에 이론적 정식화의 근거를 두는, “러시아 국가의 필요성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요성” 사이에 발전하는 모순을 보았다이것은 세계혁명운동이 소련의 이해관계에 종속되는 것과그리하여 자율적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붕괴를 의미했다(우리가 상기할 것은처음에 코르쉬는 소련의 이해관계와 세계혁명운동 사이에 어떤 모순도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좌익반대파 세력의 패배와 함께레닌주의는 더 이상 혁명적 실재가 아니라 소련코민테른독일코뮤니스트당의 반혁명적 정책을 정당화에 쓰이는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다따라서 이제 코르쉬는 레닌 자체를 비판해야할 때가 되었다고 보았다이 때 주목해야 할 것은좌익반대파 시기의 초기에도 코르쉬가스탈린주의를 레닌주의의 퇴보라고 비판한여전히 신실하게 믿는 레닌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그러나 좌익반대파의 분열 및 패배와 함께동일시할 수 있는 어떤 혁명적 레닌주의 세력도 더 이상 없었고그리하여 레닌주의와의 날카로운 결별의 필요만이 남았다.

 

다음 글은 코르쉬가 열광적인 레닌주의자였던 시기, 1924년 코민테른 세계대회에서 코르쉬가 한 연설문이다.

 

<편집자 주>

레닌과 코민테른인터내셔널, 1924.6.2. 이 선집에 로이 제임슨이 Lenin and the Comintern으로 번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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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과 코민테른

 

 

5차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세계대회 의제의 첫 번째 항목은 레닌과 코민테른레닌주의의 기본 원칙들과 선전이라고 되어 있다이것은 단지 레닌주의 정신에 대한 대회의 헌신만을그리고 진정한 레닌주의 정신 속에서 그들 앞에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참가자들의 널리 인지될 수 있는 의지의 선언만을 가리키지 않는다이것은중유럽과 서유럽의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지난해 투쟁의 초점에 관여하고 이후 의제에 등장하는 특수한 문제들이의제의 두 번째 항목을 차지하는 경제적 상황의 분석 이전에 처음부터 주의되어야 한다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는다명백하게도 중유럽서유럽 및 아메리카의 코뮤니스트들의 모든 임무들 가운데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현 발전시기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레닌이 우리에게 배정한 임무즉 노동계급의 가장 중요한 계층의 다수파를 획득하는 것이다더욱이아직 해결되지 않은 이 문제는 오직 레닌주의 정신 속에서만 진실로 해결될 수 있다다시 말해레닌이 급진주의에 관한 고전적 저술(좌익공산주의유아적 무질서)의 말미에 아주 인상적인 방식으로 러시아 볼셰비키의 역사와 유럽 당의 경험에서 그 유래를 찾았던정확히 “[몇 가지]결론의 정신 속에서다이른바 공동전선 전술이 있은 지 4년 후그 때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레닌이 4년 전에 표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1924년 오늘날 서유럽과 아메리카의 현대 코뮤니스트의 주요 임무, “대중을 현실의 결정적인마지막으로 위대한 혁명투쟁으로 이끌아직 완전히 혁명적이지 않은 척도와 방법의 구체적인 계획을 발견하고깨닫고실현하는 것이다그러나 레닌주의자들의 이 주요한 실천적 임무의 해결은 의제에 관한 모든 일련의 항목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특히 단독적인 하나의 항목이 아니며이러한 의미에서만 그 해결은 레닌주의의 기초와 선전을 말하는 이 첫 번째 항목과 더불어 다른 모든 임무에 이바지하는 것이다그 해결은 다음과 같이 귀착된다오늘날 코민테른 전체는코민테른의 위대한 창설자이자 지도자인 V. I. 레닌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 이후자신이 레닌의 유산을 이론적으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상속하여 보존하고 활력을 불어넣는 것과현재 상황에 레닌의 정신을 그것의 이론과 실천 속에서 역사적 현실 즉 레닌주의로서 한층 발전시키는 것을 기꺼이 할 수 있음을이제 처음으로 보여줄 수 있고 또 보여주어야 한다따라서 이런 방식으로 코민테른은 그의 이론적이데올로기적 기능 속에서 죽은 레닌을 살아있는 레닌주의자들의 크고 강력한 집합체로써 대체해야만 한다.

 

레닌과 코민테른을 5차 세계대회의 의제로 설정하면서집행위원회는 이 위대한 임무(세계 역사상 이러한 형태로 당 앞에 제기된 적이 결코 없는 아주 거대한 임무)의 이행을 위하여레닌의 자연적인 주요 상속자인 러시아 볼셰비키당뿐만 아니라 우리의 위대한 코뮤니스트당의 다른 모든 지부들즉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도 이론적실천적으로 함께 노력해야 한다또한 대회 자체는 이 길을 따라 첫 번째 중대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할 것이다대회의 임무는 확실하고 완전하며 상세하게, “레닌주의의 선전”(의제에서 유일하게 불확정적으로 지시된)의 슬로건을 코민테른 전체에 타당한 방식으로 정식화하는 것일 터이다또한 그들의 상황과 발전 상태에 따라 인터내셔널의 각 지부에 특히 중요한 개별 임무들을 지적하는 것과이 모든 임무들의 해결을 실행해야 할 더 큰 지도 원칙들을 결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5차 세계대회의 의제에서 첫 번째 항목의 중요성은 훨씬 더 광범위하다. “레닌주의의 선전을 구성하는 다방면의 부분적 임무에 대한 더 자세한 규정과 함께대회는 오직 (우리가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기술적 측면에 따라서 레닌주의의 물음에 관한 입장을 가질 것이다명백하게도그 물음의 이 기술적 측면 또한 너무나도 큰 중요성을 지닌다. “레닌주의의 선전은 위대한 코뮤니스트의 혁명의 조직이라는 총체적 임무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그리고 물론 이 선전의 임무를 정확히 이행하는 것은아직 국가권력을 획득한 적이 없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지부들(따라서 이미 합법화된 모든 유럽과 아메리카의 지부들이지만아마도 처음에는 불법적 조건 하에 있었을 지부들)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소련에서보다 훨씬 더 곤란한 것으로 나타난다그러므로 그러한 나라에서대체로 그 임무의 이행은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최고기관인 세계대회를 통해서 더 정확한 설명과 규정을 요구하는전적으로 서로 다른 형식들(각 나라의 특수한 상황에 정확히 일치하는)을 띠어야만 할 것이다그러나 다소 기술적인 이 물음들은 결코 문제의 핵심을 포함하지 않는다.

 

실제로 볼셰비키 이론의 방법 그 자체는 레닌과 코민테른레닌주의의 기초와 선전이라는 문제를 포함시킴으로써 그 의제에 관하여 제기된다. “레닌주의의 기본원칙들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모든 지부에서 이러한 원칙에 근거한 레닌주의적 선전 체계의 발전을 해명함으로써볼셰비즘의 이론가인 레닌이 맑스의 혁명적 방법을 복원하고 그것을 이른바 통일된 제인터내셔널 맑스주의자들의 곡해와 혼란에 맞서 대립시킨 그 형식에서 맑스의 혁명적 방법을 공통된 토대로 삼아 코민테른 전체는 이데올로기적으로 하나의 견고한 통일체로 용해되어야 한다우리의 혁명적 볼셰비키 이론의 방법만이 아니라의제의 세 번째 항목인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프로그램도 레닌주의의 문제에서 토론에 부쳐진다.

 

 

5차 세계대회가 극도로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극도로 어려운 임무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그것은 레닌주의의 방법론적 기초를 예리하고 정확하게 정식화하여 이 기초 위에 방법적이고 체계적인 레닌주의 선전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내에서 이데올로기적 통합과정은 코민테른의 모든 지부들과 집단들이 그 본질적 특징이 모두에게 동일한 하나의 이론적 방법에 헌신하게끔 하는가?

 

이 점에서 그 임무의 급진적인 해결에 거의 여지를 주지 않는 막대한 곤란들이 발생한다한편으로우리는 아직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다양한 지부들 특히 독일코뮤니스트당에서 유일하게 타당한 맑스 이론의 방법인 레닌주의에 대한 단일한 헌신을 전혀 말할 수 없다다른 한편으로하나의 방법인 레닌주의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관련하여현재 본질적인 특징들 속에 서로에게서부터 출발하는 몇 가지 시각들이 존재한다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조직에 속하고 자신의 실천적 정치학 속에서 레닌에 따라” 행동할 각오가 된 수많은 지도적인 다른 맑스 이론가들은 과학적 맑스주의가 복원된 ” 방법인 레닌의 방법의 원리를 이론에서 거부한다그들은 레닌주의적 방법을 현시기(국제적 범위와 유럽 및 아메리카의 국가적 범위에서 아직 정치적 권력의 장악 시기로 대표되지 않는 시기에!) 프롤레타리아계급투쟁의 실천적정치적 목적을 충족하는 하나의 방향설정 방법으로서 인정하지만가장 구체적이고 진정한 유물변증법의 방법으로서즉 혁명적 맑스주의가 복원된 방법으로서는 인정하지 않는다그들에게 타당한 방법은 독일코뮤니스트당의 창설자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방법이거나그게 아니라면 룩셈부르크주의적 방법뿐만 아니라 레닌주의적 방법도 편향적이라고 선언하고 오직 과학적 성숙 시기의 칼 맑스가 적용한 방법만을 진정한 맑스의 방법으로 인정하기를 원한다이 짧은 소론에서 레닌주의적 방법(하나의 방법으로서혹은 과학적 맑스주의의 ” 방법으로서)에 대한 이 무조건적 적대자들과의 제대로 된 논쟁을 시작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이 과제는 가능한 한 큰 규모의 코뮤니스트 이론계의 집단작업으로 이 저널의 다음 호에서 다루어질 것이다현재로서는 볼셰비키의 정치적 실천과 (레닌에 의하여혁명적 맑스 이론이 복원된 형태가 불가분하게 응집된 통일체를 정립한다는 관측에 만족하자그런데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위한 코뮤니스트당의 역할에 관하여어떻게 이 통일체를 제2차 세계대회의 결의에 관한 코뮤니스트적 입장인 실천적 정치가로서그러면서도 동시에 유물변증법의 룩셈부르크에 특유한 형태로 경제발전과 프롤레타리아계급투쟁 간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과학적 맑스주의자로서 간주하게 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우리에게는 레닌이 복원하여” 한 발 더 나아간인간의 감각 활동과 실천 자체를 그것의 객관화된 현실 속에서 이해하는맑스의 완전한 유물론적” 유물론의 입장에서만 당 역할의 볼셰비키판이 인정된 것으로 보인다다른 한편으로실천적 측면에서 레닌주의적 변증법만큼 거의 유물론적이지는 않은 룩셈부르크주의적 변증법의 입장에서 보면당 역할의 레닌주의적 설명에는 언제나 주관주의의 고통스러운 잔재가 있다그러나 어쨌든룩셈부르크주의적 맑스주의자와 레닌주의적 맑스주의자가(여기에는 세 번째로 룩셈부르크의 더 나아간 발전도순수하고 완전한 맑스주의로서 맑스 방법의 레닌주의적 복원도 인정하지 않는 맑스주의자들이 추가되어야 한다5차 세계대회에서 공동으로 동의할 수 있는 레닌주의의 기본원칙에 관한 해결과, “레닌주의적 선전의 체계가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전체의 동일한 이 이론가들에게 압도적 동의를 얻은 코뮤니스트적 프로그램이 불만족스러운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피하게 존속할 것이라는 점은 아주 분명해 보인다맑스 이론의 룩셈부르크주의적 방법과 레닌주의적 방법 간의 관계에 대한 완전한 해명은 레닌주의의 기본원칙과 선전의 결정에 불가결한 전제들로 구성된다.

 

룩셈부르크주의자와 레닌주의자 사이의 갈등과 상관없이오늘날 이론적 방법으로서 레닌주의의 본질 문제에 관한 일반적 동의는 부재하거나더 강하게 말하면 오늘날 이 동의는 이전보다 훨씬 덜 존재한다그리고 맑스주의 코뮤니스트당의 방법론적 의식이 당의 실천 외부에혹은 그 어떤 의미에서도 그 상부에 있지 않고오히려 이 혁명적 실천 자체의 중요한 요소를 구성하기 때문에격렬한 위기의 결과로서 볼셰비키 실천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이 쓰라린 분파적 논란의 대상이 되어버렸을 때레닌주의의 이론적 방법 문제도 투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가야만 한 것도 전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그러므로 우리가 다시금 레닌주의적 변증법의 방법의 결정에 있어 현재 착수된 시도(다양한 측면에서 착수된속에서오늘날 실제로도 코민테른 내부의 전술 및 다른 실천적정치적 문제에 관한 투쟁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는 모든 분파들을 발견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새로운 코뮤니스트 저널 노동자문헌(Arbeiterliteratur)의 1/2권에 나온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일부 문제들에 대한 레닌의 유물변증법 적용에 관하여라는 탈하이머 동지의 소론은 이 점에서 특히 흥미롭다.

 

 

탈하이머 동지는 레닌이 맑스와 동일한 대담성과 통찰 및 엄밀성과 더불어 적용한자신에 의하면 동일한 유물변증법의 맑스주의적 방법일 뿐인 레닌주의적 방법을 해명하고자 한다그는 세 가지 구체적인 물음들즉 프롤레타리아독재 문제농업 문제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전쟁 문제의 전개를 통해 이것을 할 것이다프롤레타리아독재 문제에 관한 절은 레닌이 국가의 소비에트적 형태를 노동계급 독재의 마침내 발견된 정치적 형태로서가 아니라오히려 국가의 새로운 유형”, 그러니까 일탈하는 이 유형의 변종형태의 가능성이 포함되는 국가의 유형으로서만 특징지었다는 언급으로 맺는다농업 문제에 관한 절은 레닌이 이 문제를 다룸으로써 유물변증법적 방법의 각별히 교훈적이고 엄밀한 적용을 부여했다. (탈하이머의 묘사에 따르면이 적용은 레닌이 프롤레타리아혁명 문제의 핵심즉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권력의 이전을 수호하고자이전 볼셰비키적 농업 프로그램의 경직된 모든 요구들을 기각하도록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생활의 과정 속에서 실례(example)의 힘의 결과 즉 실천적 고려의 결과로서, “저절로” 될 것이라는 것을 신뢰하도록 용인했다는 사실에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절에서 탈하이머 동지는 레닌이 민족 문제를 취급한 것을 구체적 변증법적 분석의 진정한 모델로서 특징짓는다레닌은 한편으로는 사회적 애국주의의 허위를 비판적으로 무효화시켰고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전쟁 중인 유럽에서일지라도 특정한 조건하에서 제국주의 전쟁으로부터 민족주의 전쟁으로의 전화는 확실히 개연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았음” 또한 강조하였다.

 

우리는 탈하이머 동지가 이 중요하고 어려운 세 문제들에 대한 레닌의 해결책을 평가할 때의 흠모로부터 한 치라도 뒤로 물러서고자 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즉 레닌이 탈하이머 동지가 묘사한 이 문제를 취급하면서 맑스주의 유물론적 방법 적용의 그토록 각별히” 교훈적이고 엄밀한 실례들을 어느 정도로 부여했는가라는 이 문제를 아주 신중하게 제기해야 한다예컨대농업문제에 대한 레닌주의적 접근에서 유물변증법적 방법의 각별히 교훈적이고 엄밀한 사용은 무엇에 있는가주지하다시피 칼 맑스는그들이 스스로 즉시 그들에게 고유한 상황 속에서 그들의 혁명적 활동의 내용과 소재(material)를 발견하는 데까지즉 적을 때려눕히고전쟁 요구에 의해 주어진 수단을 장악하고그들만의 행위 결과를 진척시키는 데까지 상승하게 되자마자 혁명적 계급의 역량을 인정하였다그들은 자신에게 고유한 임무의 상위에 있는 이론적 작업에 착수하지 않는다.”(프랑스에서의 내전디츠 판, 31러시아 혁명의 이론가들과 실천가들은 투쟁의 한복판에서, “그 자체로부터” 생활 속에 그리고 이 생활의 일부인 혁명적 계급투쟁 속에 보급되는 동일한 권리를 지니고서내재적무의식적그리고 자연적인 변증법에 의지할 수 있었다그러나 레닌은 변증법적 방법을 여기에정확하게는 그가 (맑스와 말하기 위해) “이론 작업의 착수를 거부하는” 데에 적용하는가레닌은 그것에 의하여 각별히 교훈적이고 각별히 엄밀한” 형식으로 변증법을 적용하는가?

 

오히려 우리가 제안하는 것은그와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혁명이라는 역사적 과정의 견지에 따라 온전히 파악되어야 하는 고도로 발전한 유물변증법이그 물질적 생활 현실의 구체적인 역사적 과정이 확실히 변증법적으로 진행하지만 그 진행 과정의 특정 지점에서 변증법론자에 의해 파악될 수 없는그 한계에 다다르는 상태에 정확히 도달하였다는 것이다그것은 이 한계의 존재를 무시하지 않기 위한 맑스주의 방법의 엄밀한 이론의 요구조건에 속한다하지만 이 속에서 맑스와 레닌의 유물변증법의 현실적 핵심을 정확히 알고자 할 때 그것은 이미 과도하다마찬가지로또 다른 방식으로탈하이머 동지가 레닌의 맑스주의적 방법 적용의 두 다른 선택된 실례를 분명히 진정한 유물론에 속하지만 결코 형이상학적 방법론에 속하지 않는 방식으로 구성한다하더라도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가장 내적인 본질즉 일반적으로 맑스주의와 레닌주의의 유물론의 주요 특징과 핵심을 구성하지는 않는다또한 그가 세 가지 실례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한 맑스 레닌주의적 방법의 본질 왜곡 외에도탈하이머 동지는 더 나아가 그의 소론의 서문 및 산발적인 언급에서 똑같이 왜곡된이 방법의 본질에 관한 일반 이론을 추가한다그는 맑스뿐만 아니라 레닌의 유물변증법적 사유의 결과들이그 사유가 유래하고 그 사유에 대해 결정되는 순간적인 경험영역의 범위를 넘어설 때전혀결코어떤 형태로도 일반적으로 타당할 수 없다는 캐리커처[풍자적 모방속에서진리는 항상 구체적이라는 맑스의 기본 원칙을 과장한다마치 맑스(예컨대미하일로프스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와 레닌(예컨대, “어떤 형식으로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 중요성을 언급할 수 있는가?”라는 부제의 급진주의에 대한 소개

에서)이 그들의 유물변증법 연구의 결과들을 그러한 일반적 중요성을 지닌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아주 엄밀하게 구별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그렇다면 어떤 의미로 이미 알려진 현재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 도달하려는 것만을 부여하는 유물변증법적” 방법의 가치는 무엇인가혹은 더 나아가탈하이머가 표현하는 것처럼한편으로 이론적 반성(!), 즉 특수한 시대의 분석이자다른 한편으로 특수한 시대일 때와 마찬가지로”, 단지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을 위한 지침들일 뿐인역사적 결과들만이 초래되는가?

 

사실 탈하이머 동지가 만들고 맑스 레닌주의 유물변증법으로부터 변형된이 새로운 방법은 유물변증법과 더 이상 아무 관계도 없다맑스와 레닌의 변증법적 방법론을 순수한 경험과 실천의 역사과학의 방법으로서 아주 물질적으로” 파악하려는 그의 노력에서탈하이머 동지는 이미 유물변증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넘어서버렸고완전히 비변증법적인 역사주의실증주의실용주의를 달성했다앞에서 지적한 것처럼로자 룩셈부르크가인간 실천에 관한 그녀의 견해에서 온전히 유물론적으로 되지 못하여이 점에서 헤겔 변증법론자로 남게 된 반면에이에 반해 탈하이머 동지는 헤겔 변증법의 잔재와 함께 동시에 맑스주의 과학의 방법론의 모든 변증법적인 것을 축출해버렸다탈하이머의 입장에 따르면본질적으로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역사적 과정과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역사적 행동으로서 구체적으로 함축하는맑스의 유물변증법적 방법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른 고립된 역사적 사실성의 순전히 수동적이데올로기적인 반영으로 변형된다.

 

실제로 이러한 맑스 레닌주의적 변증법의 본질에 대한 이론적 곡해는 맑스엥겔스레닌 및 다른 이들이 얻은 모든 성과를 이러한 방법에 의하여 평가절하하는 것으로 귀결된다그리고 맑스 레닌주의적 연구 방법의 성과를 평가절하하는 이러한 경향이 어디서 유래하고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아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탈하이머가 수백 번 반복한 예로 들자면소련 국가는 가능한 종과 변종이 있는 단지 하나의 유형으로서 레닌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오직 이러한 성과들로부터 스스로 벗어나고자 할 때만맑스 레닌주의적 방법론의 성과들을 이토록 평가절하할 수 있다소비에트 국가를 가능한 형태들의 다수성이 있는단지 하나의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유형으로 보는 견해는 레닌주의의 이론가들이 평의회 독재의 엄격한” 형태(레닌에 따르면한층 더 발전할 수 있지만그렇다고 해도 민주주의의 ” 사회주의적 형태의 ” 시초인)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고예컨대 작센 노동자정부처럼이 유형의 다양하고 가능한 변종” 및 퇴화에 이르도록 만든다또한 다른 모든 맑스주의와 레닌주의 이론의 성과도 마찬가지다그 성과들이 모두 특유한 역사적 전제에 구속되고단지 특수한 시간과 장소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는 순수한 역사의 산물이라면새로운 관계 하에서새로운 경험과 변화된 정치적 요구에 반해서이전의 맑스주의의 성과이 타당성을 상실할 것이고그 성과이제 이 새로운 상태가 유물변증법의 레닌주의적” 적용을 위하여 그 속에 반영된”, 새로운 지식과 지침에 의해서 대체될 수 있거나 대체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맑스와 레닌의 혁명적 변증법적 유물론을더 이상 변증법적이지 않으므로 더 이상 혁명적이지 않은(역으로도더 이상 혁명적이지 않으므로 더 이상 변증법적이 않은), 순수하게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과학과 실천으로 변형시키면서탈하이머 동지는 실제로 경향 상 혁명적 맑스주의의 방법 대신에 기회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방법을 매력적인 레닌주의의 외피 아래 둔다.

 

 

우리가 이처럼 상세한 설명으로써 레닌주의적 방법에 관한 탈하이머의 견해를 다룬 것은단지 탈하이머 동지가 제5차 대회의 프로그램의 문제에 관한 두 번째 연설자로서 지명되어서그로 인해 대회에서 그가 방법론으로서 레닌주의의 본질 문제에 있어서 특별히 주목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그보다 중요하게, “레닌주의의 기본원칙을 결정하려는 시도특히 제5차 세계대회에서 레닌주의적 방법의 본질의 고정하려는 시도가 단지 현재의 거대한 난관에만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이를 넘어서 어떤 위험에도 구속된다는 것을자세하고 명확하게 전형적인 실례로써 제시하는 것이 긴요하다이 위험은 그것이 정확히 외관상 순수하게 이 이론적인 영역에서 여전히 전혀 인정되지 않고관찰되지 않는 한에서그리고 분파들의 실천적 투쟁으로부터 아주 거리가 먼 한에서는 오히려 더 큰 것이다최근 존경 받는 레닌주의의 혁명적 깃발 아래 다양한 수정주의적개량주의적기회주의적청산주의적 금제품을 혁명적 코뮤니스트의 이론과 실천에 밀수해 들어오려는 시도들이 있다가장 내적인 토대에서 탈하이머가 지금 정식화한 레닌주의적 방법의 이론은 단지 그릇된 정치적 실천의 그릇된 이론을 의미할 뿐이다기회주의와 개량주의의 공동전선 전술이 라이프치히 당대회 이후 독일에서 적용된선동과 대중동원의 혁명적 방법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탈하이머와 그의 가까운 동지들의 레닌주의적” 방법도 혁명적 레닌주의의 순수한 방법과즉 레닌이 복원하고 완성한 혁명적 맑스주의의 변증법적 방법과 관계가 있다이 입장의 근본을 해명하는 데서5차 세계대회는 코뮤니스트 정치의 다른 모든 즉각 실천적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레닌주의의 기본원칙 문제와 프로그램의 문제에서 치고 올라오는 코뮤니스트적 수정주의의 쇄도에 맞서 특별한 방어벽을 세워야 할 것이다이 부정적 기능의 이행에 의하여이 대회는 그 본질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혁명적 행동의 이론적 의식에 다름 아닌레닌이 복원한 혁명적 맑스주의 과학의 완성된 방법의 위협적인 붕괴를 강력하게 저지할 수 있다코민테른 발전의 현국면에 있어서방법으로서 레닌주의의 본질을 긍정적[실정적]으로 고정하는 것은코뮤니스트 정치의 전시기에 타당한최종적인(궁극적인코뮤니스트 프로그램의 고정하는 것만큼이나 적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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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9호] 국제코뮤니스트 오세아니아 소개

국제코뮤니스트 오세아니아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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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국제코뮤니스트 오세아니아는 계급 사회와 사유 재산 폐지라는 장기 목표를 가진좌익 공산주의자들의 재편성 활동입니다다시 말해인류의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 젊은 세대의 생애에 코뮤니스트 사회를 이루기를 우리는 원합니다현시대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말이 들어맞았고 절박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당면한 목표는 오세아니아 지역에서 맑스주의 입장을 가진 조직의 감소로 코뮤니스트 운동을 단념한 동지들을 재편성하는 것입니다이미 우리와 같은 입장을 가진 동지들을 재편성하는 것뿐만 아니라새롭게 또는 맑스주의를 잘못 이해한 코뮤니스트를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또한 맑스주의 교육을 위해 접근 가능한 온라인 공간을 만들려고 합니다.

 

국제코뮤니스트 오세아니아 조직에 참여하려면아래의 정치 입장을 읽고우리와 연락할 것을 제안합니다우리의 입장과 조직에 대한 어떤 질문에도 우리는 기꺼이 답할 것입니다.

 

 

정치 입장

 

 

1. 우리는 코뮤니스트로서 코뮤니즘이 인류 생존을 위해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본다.

 

2. 자본은 자본가계급과 임금노동 프롤레타리아트 사이 역사적 사회적 관계다우리는 자본을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의 산물이라고 규탄한다따라서 정부의 외형적인 형태와 관계없이 자본주의를 반대한다.

 

3.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수행하는 국제적 혁명을 코뮤니즘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본다이것은 자본과 계급 자체를 파괴해야만 달성할 수 있다.

 

4.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당이거나 그것의 유일한 중핵이라고 믿지 않지만계급의 중추적 역할을 할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 당 설립을 지지한다다시 말해 우리는 당이 아니라 당을 위해 존재한다.

 

5.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조국이 없는 이주민의 계급이라고 이해한다현재 자본주의 쇠퇴시대에 우리는 민족-국가가 어떠한 유용한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고 본다모든 민족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자기조직화와 국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달려 있다.

 

6. 우리는 모든 실제로 존재(자임)하는 사회주의를 국가-자본주의로 간주한다우리는 그들의 활동과 정당(국제기구를 포함)을 부르주아 계급의 도구로 본다.

 

7. 우리는 모든 계급주의 이론을 낮은 계급의식 표현으로 프롤레타리아트 이해관계와 계급 단결에 어긋나는 것으로 본다이러한 반응은 자본주의 사회의 골칫거리인 사회적 적대 앞에 서면 이해할 수 있다우리는 계급 사회에서 비롯된 모든 형태의 억압을 폐지할 것이다.

 

8. 우리는 노동조합이 프롤레타리아트 저항을 억제하고우리가 정복하거나 혁명적인 기구로 전환시킬 수 없는 자본주의 국가 기관이라고 이해한다우리는 개별적인 평조합원 가입에 반대하지 않는다그러나 계급투쟁이 격화되면 노동조합은 반혁명 세력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우리는 동료 노동자들에게 직접 혁명 기관을 만들라고 요구한다.

 

9. 인간의 필요와 풍요가 이윤보다 우선시되는 세상을 보고 싶다면인간은 자본의 존재에서 벗어나야 한다개인의 발전과 인류의 성공을 촉진시키기 위해 현 자본주의 체제를 폐지해야 한다.

 

 

국제코뮤니스트 오세아니아 (Internationalist Communists Oce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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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9호] 칼 리프크네히트 기억하기

칼 리프크네히트 기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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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는 위대한 이론가가 아니었다로자 룩셈부르크와 달리 그의 이름과 영원히 연결될만한 주장 글이나 정치 경제에 관한 주요 논문을 그는 쓰지 않았다.(심지어 노동가치설에 대해 의심하기까지 했다.)(1) 그는 능숙한 정치가도 아니었다전쟁 전에는 맑스의 동료이자 독일사회민주당(SPD) 공동창립자의 아들로 유명했는데(2) 전쟁 후 그는 사회민주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매우 꺼렸다.

 

그러나 리프크네히트는 원칙적인 사람이었다유명한 자유주의 역사학자 세바스찬 하프너(Sebastian Haffner)는 그를 "독일이 배출한 가장 용감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묘사했다.(3) 그는 자신이 어느 날 갑작스러운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증명했으며그중 일부는 다음의 단편에서 읽을 수 있다리프크네히트는 1918년 4월에 루카우(Luckau) 감옥에서 이 글을 썼다때로는 장황하고 급하게 쓰기도 했지만내부와 외부 변증법주제와 대상의식과 조건 같은 중요한 주제를 다뤘다따라서 그것은 오늘날에도 관련이 있다.

 

리프크네히트가 여기서 확인하기를 바라는 것은 트로츠키가 몇 년 후 "적절한 순간"으로특히 실패한 독일 혁명과 관련하여, 1917년 10월의 교훈을 되새기며 이론화하려고 시도한 것이다.(4) 게오르크 루카치(Georg Lukács)는 이 문제를 아우겐블릭(Augenblick : 순간이라는 다소 철학적인 용어로 표현했다계급의식이 있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객관적인 사건 과정에 주관적으로 개입하여 자본주의를 총체적으로 교란할 수 있는 순간 또는 눈 깜박할 사이로 표현했다종종 이것은 조건의 "성숙"으로 논의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거의 엉망진창으로 죽었다.”고 폴 매틱은 나중에 회상했다.(5) 사실그들의 마지막 글에는 이미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것처럼불길한 예감이 감돌고 있었다오늘날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하고 지도자들을 살해한 지 100년이 지난 지금이 살해당한 혁명가들이 남긴 작품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Walt Auerbach

 

칼 리프크네히트의 사회주의 외교 정책」 읽기  ▶  코뮤니스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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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922년 사후에 출판된 그의 맑스의 비판의 주요 특징(Grundzüge einer Marxkritik)을 참조 바란다.

 

 

(2) 빌헬름 리프크네히트(Wilhelm Liebknecht)와 룩셈부르크는 때때로 리프크네히트가 당에서 "태어났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1914년 8월 이전에 그는 독일사회민주당(SPD)의 청소년 부문을 보강하기 위해 대부분의 노력을 기울였다전쟁 채권에 반대표를 던지기로 한 그의 결정은 그를 반대파의 유일한 주창자로 만들었고결국 1915년에 재판을 받고 1918년 11월까지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3) 세바스찬 하프너(Sebastian Haffner), 독일 혁명의 실패, 1918-1919게오르그 랍(Georg Rapp) 번역. (The Library Press. New York, NY: 1973). 140

 

(4) 어쨌든이것은 보르디가가 가장 좋아하는 트로츠키 팸플릿이었다. (테러리즘과 코뮤니즘을 제외하고) “적절한 순간을 잃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반란에 가장 유리한 조건은 분명히 힘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최대 변화가 일어났을 때이다우리는 물론 의식 영역에서의 힘의 관계즉 정치적 상부 구조의 영역에서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으며혁명적인 시대 전체에 걸쳐 다소 변하지 않은 것으로 가정 할 수 있는 경제 토대의 영역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하나와 같은 경제 토대에서사회의 계급 분열과 함께힘의 관계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분위기에 따라 변하는데그들의 환상이 깨지고 정치적 경험이 커지는 정도국가 권력에서 중간 계급과 집단의 신뢰가 깨지는 정도그리고 마지막으로 후자가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는 정도에 따라 변화한다혁명 기간 이러한 모든 과정은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모든 전술상의 기술은 이것으로 이루어진다. : 여러 사정이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레온 트로츠키10월의 교훈나오미 알렌(Naomi Allen) 번역좌익반대파의 도전, 1923-1925. (Pathfinder Press, New York, NY : 1975). 232

 

(5) 폴 매틱(Paul Mattick). -볼셰비키 코뮤니즘. (Merlin Press. Monmouth: 1978). 95

 

<출처비타협(INTRANSIGENCE)」 4

https://intransigence.org/2019/03/26/remembering-karl-liebknec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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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9호]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의 분파-당 문제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의 분파-당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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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소개할 문서는 1971년 처음 작성되었고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의 전통에 대한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ommunist Workers’ Organisation)의 내부 토론에 사용될 목적으로 수기로 작성된 형태로 1981년 번역되었다그리고 최근 온라인 저널 비타협(https://intransigence.org/2018/11/02/fraction-and-party/)에 출간되었으나여기서는 서문을 대폭 추가하여 소개한다.

 

원문은 국제코뮤니스트당(Internationalist Communist Party, PCInt)이 소집한 코뮤니스트좌파의 국제대회 시기에 작성되었다이 글은 저널 빌랑(Bilan)을 중심으로 한 국제 코뮤니스트좌파의 이탈리아 분파가 이탈리아좌파의 최고 표현(highest expression)이라는 국제코뮤니스트흐름(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의 주장에 대한 부분적인 응답이었다프랑스와 벨기에에서 망명한 동지들로 이뤄진 분파(Fraction)는 전체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의 일부(이러한 사실은 오직 보르디가주의에 감화된 다양한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정당들만이 거부한다)이긴 하지만최고의 표현은 아니다그 구성원의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이탈리아에 돌아가 국제코뮤니스트당(PCInt)에 가입하였으나 그때까지도 많은 문제들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한때는 프롤레타리아 조직이었던 소련의 코뮤니스트당(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CPSU)이 반()혁명의 앞잡이가 되어버린 상황에서그 상황을 이해하고 교훈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CPSU는 러시아에서 노동계급에 맞서는 국가자본주의 괴물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코민테른(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을 점점 더 제국주의 이익에 복무하는 도구로 만들어버렸으나분파는 많은 문제들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보기를 들어 그들은 소련의 계급 본질에 대한 분석을 하지 않았다이 문제는 오직 국제코뮤니스트당을 세운 동지들만이 분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앞으로 소개할 문서는 빌랑(Bilan)의 대차대조표(bilan)에 관한 것이 아니다이 문서의 목적은 훨씬 정확하다해외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좌파의 이탈리아 분파의 경험을 특정한 역사적 국면의 맥락그러니까 좌파의 많은 투사들이 외국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이탈리아 파시즘의 맥락에서 설명한다분파(Frazione)라는 단어는 1928년 사용되었고이는 과거 사회주의당이 나뉘기 전코뮤니스트들이 그 안에서 분파를 형성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과거 “1921년의 당과의 정치적 연속성과 통합을 가리키는 의도였다좌파의 투사들은 (전체 명칭으로 표현하자면인터내셔널 지부인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Communist Party of Italy, Section of the Third International)을 건설했고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으나 여전히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의 정치적이고 조직적인 연속성을 주장했다그러므로 이것이 그들 스스로를 국제주의자 분파라고 부르는 이유이다그들은 코민테른과 그람시(Gramsci)와 톨리야티(Togliatti) 아래의 이탈리아 당이 반()혁명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던 것도 알았지만완전히 반()혁명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들은 중도파로 불렸고그들의 이름이 이야기해 주듯이분파의 주요한 노력은 혁명적 정치로 돌아가려는 그들의 시도들을 가로막도록 이용되었다.

 

1935소련의 타락이 명백해지면서 코민테른과 그 모든 당들은 결국 그들을 계급의 적들의 손에 넘겨버렸고분파는 새로운 딜레마에 직면했다계급에게 의미 없어진 당의 분파로 더 이상 남아있을 수도 없었지만어떤 지점에서 새로운 당을 출범해야 하는지도 결정하지 못했다특히베르세시(Vercesi)는 대중정당이 다시 생길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아래의 글이 보여주듯이분파의 많은 구성원들이 그렇게 주장했다그러므로 분파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부터 마비되었고결국 해산되었다전후 잠재적 혁명 계급투쟁을 부활시킨 정치적경제적 혼란이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는 1943년이 되어서야전쟁이 완전히 끝나기 전 국제코뮤니스트당의 탄생하면서 당의 문제가 분석되었다.

 

간단히 말하자면문서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분파의 경험이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독특하다는 것이다오늘날 분파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의 분파?”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과거의 당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과거의 전투에서는 다루었었고그들의 시기의 문제들을 둘러싼 사항들은 결정되었다오늘날 우리는 똑같은 입장에 있지 않다프롤레타리아의 과거 경험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받아들이지만그것은 미래의 인터내셔널을 건설하기 위해서이다맑스가 브뤼메르 18에서 지적했듯이심지어는 혁명가들 사이에서도 너무 과거에 기대하는 경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우리는 오랜-과거의 정치적인 경험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 혁명적 위기의 시대전례 없는 것을 일으키려 한 우리들이 등장한 시점에유서 깊은 위장과 빌려온 언어로 새로운 역사적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우리는 안절부절못하고 과거의 정신그들의 이름그들의 전장에서의 함성그들의 복장을 소환했다.

 

오늘날 우리는 오래전에 죽어버린 당의 분파가 아니라미래 당의 핵심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소그룹들과 함께 새로운 길을 걸어가려 하고 있다.

 

이것은 베르세시(이탈리아 좌파의 해외 주대변인)가 노동계급이 움직일 때까지 당 건설은 기다려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인정하지 않았던소위 역사적 과정의 문제에 대해서도 진실이다그러나 역사적 과정이란 아이디어는 특히 마크 치릭(Marc Chirik, 미래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설립자)과 같은 이들에 의해 선전되었다그의 관점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관점 에서는 역사적 과정이 반혁명으로 향하고 있는 오늘날 계급 정치를 만들려는 어떠한 시도도 실패하게 되어있다베르세시와 같이그 주장은 계급 역학의 실제 균형은 계급 정당의 건설에서 결정적인 요소라는 것이다치릭은 역사적 과정이 전쟁과 반혁명으로 향하고 있으며따라서 분파의 나머지 대부분과 다르게 국제코뮤니스트당에의 합류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그것은 보르디가가 국제코뮤니스트당(Internationalist Communist Party, 1943년 창설설립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몇 년 후, 1948-52년 취했던 초기의 입장과 매우 유사하다국제코뮤니스트당은 각지에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동요의 신호와 함께 북부 이탈리아에서 대중파업의 물결이 있었던 시기1차 세계대전 말과 같이 전후 혁명 물결의 전조처럼 보이는 시기에 설립되었다그러나 1948년 즈음에는 자본주의가 그 폭풍을 잠재운 것이 명백해졌다보르디가는 이제 당을 건설할 시점이 아니라고 주장했고심지어 국제코뮤니스트당(PCInt)이 처음부터 해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 시기는 이탈리아에서만 4천 명이 넘는 구성원이 있었을 때였다!

 

역사적 과정의 옹호자들에게 반혁명은 끝나지 않았고따라서 당의 문제는 그 시점에서 제기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냉전이 노동계급에게 새로운 위협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마크 치릭 뿐만이 아니었지만그는 그 결과가 핵 재앙이 될 수 있고한국 전쟁 발발 당시 베네주엘라를 위해 유럽을 포기하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3차 세계대전은 발발하지 않았다. 1952년 보르디가주의자들과 결별한 국제코뮤니스트당(PCInt)은 숫자가 감소함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 내에서 제국주의 세력에 반대하는 끈질긴 싸움을 계속했다그들에게 역사적 과정이란 혁명적 조직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책무를 포기하는 변명에 불과한 지적 개념에 불과했다.

 

마크 치릭과 그 동료들은 당의 문제는 객관적인 조건이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한 1930년대의 분파와 동일한 방법을 공유했다이는 분파 내의 기다립시다”라는 경향과 역사적 과정에 대한 옹호자들의 입장을 보여준다여기서 오류는 당이 오직 대중 정당이 될 즉각적인 가능성이 있을 때만 만들어진다고 가정하는 것이다이것은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본질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적(그리고 코민테른의개념에 대한 동의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태어난 개념도 아니다.

 

러시아 노동계급 가운데 작은 소수(8000)였음에도 불구하고, 1912년 멘셰비키로부터 분리한 후 볼셰비키는 이미 존재했었고그리고 1917년 소비에트 권력을 방어하는 조직된 세력임을 명백히 보여주고 계급으로부터 승인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알려졌다이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조직으로서 뚜렷하게 만들어지지도 못했고 중도주의 USPD(독일 독립사회민주당내부의 분파로서 집어 삼켜졌던 독일의 스파르타쿠스단과 명백하게 대비된다. 1918년 11프롤레타리아 저항이 발발한 이후에야 그들은 실질적으로 코뮤니스트당 건설을 고려했고곧 기회주의에 굴복하여 혁명적 정책과 보수적 정책 사이에서 찢어졌다.

 

아래의 글이 언급하듯이정당은 하룻밤 만에 건설될 수 없다이론적 작업뿐만 아니라 정치적 메시지(강령)와 작동 방식 – 구성원들이 모두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혁명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준비하는 데에도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당은 방정식의 주체적인 부분이고자유의 도구이며그것은 혁명 발발 이전 투쟁의 과정에서 벼려질 것이었다오노라토 데이먼(Onorato Damen)이 언급했듯이노동계급은 즉각적인 희망과 조건이 어떻든 당을 영구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으며분파는 역사적인 배신이 불러온 심각한 혼란의 시기독특한 역사적 막간극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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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활성화된 경기가 끝나가는 첫 번째 신호가 명백해지자 1960년대 후반마크 치릭은역사적 과정이 이제 역전되어 유럽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전제로부터 작업하고 있었다이윤율의 하락에 의한 경제적 위기의 재래는 자본가들이 노동의 조건과 임금에 대한 그들의 공격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노동자들은 저항했으나 이는 대게 노동조합이 통제하고 있는 기업별 투쟁에 기반하고 있었다국제적으로는 이러한 틀을 넘어서고자 하는 가시적인 시도들이 있었으나 예외적이었다그러나 마크 치릭에 있어서는 반혁명이 끝났고이제 새로운 혁명적 조직(기존의 것은 경화되었으니”)을 건설할 때라고 주장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과거 평의회주의 그룹들 몇몇은 (그들 중 다수는 근래에 건설되었는데) 1975년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에 합류했고그것이 혁명가들의 재편성의 축이라고 주장했다이제 반혁명은 끝났으며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노동계급은 이미 혁명적이며, “역사적 과정이 이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향하고 있으니 탈신비화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노동조합이 이제 노동계급에 반대하고 있다고 노동자들이 듣기만 한다면그들의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혁명으로 향한 길이 열릴 것이었다놀라울 것도 없이 역사적 과정은 훨씬 더 복잡한 것으로 나타났다. 1940년대와 같이, 1970년대는 계급투쟁이 부활하는 시기였는데그것이 노동계급 안의 폭넓은 대중 가운데에서 혁명적 의식으로 자연스럽게 변화되지는 않았다투쟁의 새로운 물결은 반혁명의 끝을 나타내는 신호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새로운 위기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앞으로 25년 동안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방향을 잃은 자들이라고 비난받을 것이었다. “역사적 과정의 확실성으로 무장한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그들이 남은 코뮤니스트들이 다시 모여야 하는 재편성의 축이라 확신했다.

 

1980년대가 시작되면서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점증하는 계급 적대에 따라 진실의 시대를 선언했다이것은 위기가 가져온 구조조정이 중국과 같은 저임금 경제로 생산이 옮겨감에 따라(그 당시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인정하지 않았지만과거의 산업 중심지 자본의 대손상각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어떤 면에서는 진실이었다노동자들은 수세에도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자본가들이 이미 고정 자본을 없앨 준비가 된 상황에서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파업은 결코 편한 입장인 것은 아니었다사기 저하가 나타나기 시작했고계급은 후퇴하기 시작했다그러나 역사적 과정이 심화된 계급 대결로 향하고 있다는 사상의 지지자들은 이를 보지 않았고그들이 이론을 재평가할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은 소련과 그 블록이 붕괴한 이후가 되어서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과정이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잘못되었다는 주장은 없었다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에는 노동계급도 자본가도 서로의 안건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1979년 이후 노동자의 생활 수준이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는 사실구조조정이 전체 공동체를 무너뜨렸다는 사실이 그들의 대차대조표 계산 속에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대신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포스트모던 대열에 합류하여 혼돈과 해체” 등 그들 자신만의 개념에 도달한다자본주의는 이제 해체(은유로서, “쇠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으로 이제는 진짜진짜 쇠퇴를 의미한다)되고 있는 것이다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에게 혼돈과 해체는 역사적 과정이 혁명으로 향하고 있다는 그들의 관점이 무너지는 것을 가려주는 미봉책 이론이었다우리는 자본주의의 하락의 점증하는 신호가 있다는 것은 거부하지 않지만이것은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이 무시하고 있는 물질적인 요인들(그들에게 자본주의의 위기란 영속적인 것이다때문이다또한 자본주의 위기는 사라진 적도 없고자본주의가 연장되면 될수록 강화된다.

 

자본주의는 수십 년이 넘도록 위기를 관리하려 하거나 또는 이윤율을 높이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었다그러나 1971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남아있는 한 요소는 자본의 과잉 축적이다과잉축적이란 생산 주기의 새로운 부활이 자본의 평가절하를 통해서만 가능함을 의미한다오늘날에는 만연한 전쟁의 대량 파괴 또는 여러 차례의 전쟁만이 이를 달성할 수 있다이 사실은 제국주의 시대가 시작되던 시기부터 가졌던 우리의 관점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전쟁이냐 혁명이냐는 이 체제의 점증하는 대립의 유일한 해결책이다상황이 아직 급박하지 않고 코뮤니스트좌파의 경험에 근거하여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 당을 위한 작업을 시작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춤추는 자들은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우리는 본다.

 

여기에는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도 포함될 수도 있다우리가 그럴 수도 있다고 한 이유는 그들의 최근 답변이 너무 혼란스러워 그들의 현재 입장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14년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일종의 내부 위기를 경험하였으나결국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그들의 동조자들에게서도 명확해진 적이 없다그 대신 그들은 2016년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40이란 제목으로 국제평론(International Review) 156권에 실린 대차대조표를 생산했다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과거 입장의 몇 가지를 비판한다우리는 일부만을 여기 요약할 수 있다아래는 그들의 언어로 표현된 것 중 일부이다

 

계급 사이의 세력 균형 분석프롤레타리아가 지속적으로 공격적으로 되어가는 경향

. “대 재앙적” 비전

경제적 위기와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이 필연적으로기계적인 방식으로 투쟁의 물결을 촉발시킬 것이라는, 1970-90년대에 동일한 인물이 발전시킨 동일한 모델 환상을 보유하는 경향.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이 수년 동안 오류를 저지른 유일한 조직은 아니지만(일반적으로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이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 이러한 오류들은 역사적 과정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그들의 주장의 결과이다이러한 재검토는 환영받을 일이지만(그들의 문제에 대한 실제 원인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같은 호의 분파로서의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역할에 대한 보고서라는 이름의 글이 인용된 글 다음에 이어졌다이것은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포럼에서 몇몇 논쟁을 불러일으킨 매우 혼란스러운 글이다. 2017년 발간된 세계 혁명(World Revolution)」 376호에서 한 동조자링크(Link)는 그 글에 대해 질문했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이제 분파로서의 역할을 채택한 것으로 보이지만나는 그 이유와 가능한 결과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이 역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며이러한 변화의 정치적인 정당화는 어떻게 될까요다시 말해 이 결론에 이르는 현재 상황에 대한 분석이 무엇일까요?

 

나는 이전이 포럼에서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이 재편성의 축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했고 어떤 비판이나 반대도 없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단순히 그 방향을 설명하거나 명확히 하길 피해왔습니다이 새로운 분파로서의 역할이란 것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입니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그 대답으로 오직 더욱 큰 혼란만 가져왔으며역사에 대해 조금 다른 말로 서술했을 뿐링크(Link)가 제기한 핵심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어떤 직접적인 대답은 없다그들은 이제 스스로를 분파라고(그렇다면 무엇의 분파?) 여기는 것일까그들의 활동에서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링크(Link)가 왜 그들이 자신의 비판에 응답하지 않느냐고 질문할 때그들은 코뮤니스트좌파 진영의 나머지에 대한 비판으로 돌린다.

 

좌익공산주의 진영의 보편적인 낮은 사기는 40년 동안 자기-비판이 없었던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이 대답이 없는 배경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이 그토록 오랫동안 방향을 잃고” 헤매었지만여전히 선하다고 확신할 수 있다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명백한 현재의 사기 저하를 남들에게 투영해서는 안 된다우리는 자신의 활동을 정의하기 위한 역사적 과정이란 변하지 않는 비전은 갖고 있지 않다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내재적 위기이지만 그 최종 결과는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그것은 맑스가 코뮤니스트 선언에서 사회의 혁명적 재편성이거나 대립하는 계급들 모두의 파괴라고 공표한 것또는 이후에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전쟁이냐 혁명이냐의 형식으로 표현된 것과 여전히 동일한 것이다.

 

혁명가들은 예언가의 수정 구슬 따위는 갖고 있지 않으며헤겔주의 목적론적 역사와는 다르게 언제나 하나 이상의 가능성을 제공한다최근우리는 계급으로서 계급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으나 앞으로 계속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투기 거품의 폭발은 과거에는 자본주의가 호황이라는 거짓된 이념을 유지시켜 주었지만그 이후 세상은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다코뮤니스트들은 이제 공개적으로 비웃음당하지 않고 자본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고자본에 대해 질문하는 새로운 대중운동이 비록 계급의 기반이 없기 때문에(Indignados - 2011-2014년 스페인 시위 -에서 노란 조끼 운동까지스스로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더라도체제의 실패를 보여주고 있으며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조차도 알아차렸듯이, 1970년대 초 이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젊은 세대의 혁명가들이 코뮤니스트좌파로 모여들고 있다이 모든 것이 우리가 혁명적인 국제주의 진영을 확대하는데 단호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있고동시에 우리가 언제나 해 왔던 것을 하고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을 직면하게 하고 있다.

 

미래 당 건설을 위한 근본적인 조건은 물론 계급투쟁 그 자체이다그러나 당 건설은 또한 진정으로 오늘날 계급투쟁에서 혁명가들의 적극적인 활동에도 달려있다혁명적 소수를 역사라는 수동적인 범주에 가두는 것은 능동적인 두 기둥 사이의 복잡한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진정한 이해의 가능성을 닫는 일이다그것은 역사가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것이고인간 존재가 역사를 만든다는 진실을 잃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그것은 수동적인 관찰로 후퇴한다는 것이다동시에 자본주의 위기가 개선되기보다 더욱 심화되는 것처럼 보일 때자본주의가 자신만의 해결책” 준비를 개발하고 있을 때지구의 생태적 오염이 일상적인 자본주의의 위협으로 우리 존재에 대한 위협을 보여줄 때그리고 많은 젊은 세대들이 해답을 갈구할 때우리가 해야 할 마지막 일이 기다려 봐라라는 것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ommunist Workers’ Organisation)

 

<원문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8-12-22/the-fraction-party-question-in-the-italian-left

 

번역 ㅣ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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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8호] 자본의 좌파 : 사회주의와 무관한 정치세력

자본의 좌파 : 사회주의와 무관한 정치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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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바 ‘사회민주주주의’ 정당들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 "민족(조국)의 수호"를 외치면서 프롤레타리아계급으로부터 이탈했다. 사회민주주의는 1918년과 1923년 사이에 혁명적인 노동자 봉기를 분쇄하고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포함하여 수천 명의 코뮤니스트를 살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사회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강력한 계급투쟁의 시기에는 ‘노동자당’을 표방하면서 자본주의의 방어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고, 계급평화의 시기에는 노동자들에게 의회주의, 선거주의 환상을 확산시킨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버팀목으로 현실에서는 개량이 없는 개량주의의 옹호자로 행동한다.

 

 이러한 제2 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와 단절하면서 출발한 ‘코뮤니스트’ 정당들은 코민테른의 타락과 스탈린주의 반혁명으로 국제주의를 포기함으로써 다시 자본주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코뮤니스트 정당의 ‘일국사회주의’ 이론 수용은 부르주아의 재무장화에 참여, 인민전선에 참여, 그리고 전후 국가재건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결국 민족자본의 진정한 협력자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사회주의자’ 또는 ‘코뮤니스트’를 자임하며, 노동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수많은 그룹과 조직이 있다. 그들의 오류는 대부분 앞서 말한 ‘사회민주주의’를 재창조하려 하거나 ‘스탈린주의’를 부활시키려는 희극적인 시도라서 더욱 문제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맑스주의’의 아름으로 계급운동 전반에 끼진 악영향과 혼란은 운동의 퇴보에 막대한 역할을 했다. 이들 대부분은 사회주의를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동일시하면서 해괴한 강령까지 만들어 내걸고 있는데, 이것은 혁명적 맑스주의와 무관하다. 그리고 이것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이미 맹렬히 비난했던 반동적인 입장일 뿐이다.

 

“근대 국가는, 그 형태가 무엇이든,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의 기구이다; 그것은 자본가, 모든 자본가의 이상적인 공동 기구이다. 그것이 생산력을 장악할수록, 자본가의 진정한 공동 기구가 될수록, 점점 더 시민을 착취한다. 노동자들은 임노동자, 프롤레타리아로 남게 된다. 자본주의 관계는 폐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극단으로 더욱 밀어붙인다.”

 

 중국, 베트남, 북한, 쿠바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단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들 국가에서 노동자계급이 주도한 사회적 변혁은 한 번도 없었으며,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정치·경제적 권력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도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착취체제를 ‘진보적’이거나, ‘반자본주의적’이거나, 심지어 ‘사회주의적’ 성격으로 규정하는 '가짜 사회주의 세력'과 진정한 우리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진영'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노동자계급을 지속해서 공격하고 혁명적 코뮤니스트를 살해한 스탈린주의야말로 진정한 반코뮤니즘(반공주의)이다. 또한 마오주의자와 게바라주의자들도 스탈린주의자들과 같은 이데올로기(인민전선, 단계론, 국가 미화, 민족주의 등)를 방어하기에 반()코뮤니즘 경향에 속한다.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사회를 코뮤니즘으로 바꾸는 혁명은 경제의 '자주 관리'나 '국유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코뮤니즘은 노동자계급에 의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 즉 임노동, 상품생산, 국가의 의식적인 폐지가 필수적이다. 이는 코뮤니스트 혁명이 인간 필요의 충분한 만족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세계 공동체 건설의 과정임을 의미한다. 이와 무관한 일국사회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모든 형태는 반코뮤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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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이나 중국을 노동자 국가로 규정하는 세력과 더불어 이른바 ‘입당주의’ 노선을 옹호하는 세력 또한 스탈린주의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협력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부정했다. 그들은 제국주의와 이른바 ‘민족자결권’ 문제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 여러 지역에서 제국주의적 충돌 (스페인 내전, 아비시니아, 중일전쟁)을 지지했고 결정적으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조국의 방어자로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이에 대한 반성과 교정 없이 국제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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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다양한 스탈린주의, 정통 트로츠키주의 자임세력, 그리고 마오주의 경향은 서로 대립하면서 일치하지 않는 정치세력이지만, 우리는 이들 모두를 자본주의의 좌파라 부른다. 역사적으로 그들의 잘못된 강령, 전술 또는 운동 개념은 수없이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타락시키고 붕괴시켜왔다. 여전히 ‘좌파통합’ 또는 ‘좌파 공동전선’을 내세우며 반성과 교정 없이 낡은 것들을 지속시키려는 시도는 그들의 전통이자 전부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세력에 맞선 오늘날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는 오직 국경과 지역을 넘어, 국가와 민족을 넘어, 세계 계급투쟁과 세계혁명을 향한 전망을 함께 세우고 국제적 코뮤니스트 강령에 따라 단결하고 투쟁하는 세력이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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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9호] 침머발트에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설까지 : 좌파의 투쟁

침머발트에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설까지 좌파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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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사건

 

100년 전인 1919년 3월 2일부터 6일까지 러시아 밖의 여러 나라에서 40개가 넘는 정치단체 소속 52명의 대표가 모스크바에 모였다. 5일 동안의 대회는 코민테른(Comintern)으로 약칭되고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이라고도 알려진 제3인터내셔널의 첫 번째 총회가 되었다그 사건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조직의 발전에 핵심점이 되었다.

 

총회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가장 큰 도전을 한 역사적 순간에 열렸다레닌은 총회 이후 3월 말에 녹음한 축음기 음성을 통해 혁명적 낙관주의로 제3인터내셔널의 전망을 밝혔다.

 

"오늘날 자본의 멍에를 벗어던지는 대의에 충실한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코뮤니스트'라고 부릅니다. ... 곧 우리는 전 세계에서 코뮤니즘의 승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우리는 세계소비에트연방공화국의 기초를 보게 될 것입니다." (3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레닌, <FTCI, p.316>), *FTCI :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립 1차 총회 회의록과 문서: 1919년 3(Anchor Foundation, 1987)

 

이어 4월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세계사의 새 시대가 열렸습니다인류는 자본주의 또는 임금 노예라는 마지막 형태의 노예 제도를 폐기할 것입니다노예 제도에서 스스로 해방됨으로써 인간은 처음으로 진정한 자유로 나아갈 것입니다." (인터내셔널과 역사의 장소레닌, <같은책 p.33>

 

이처럼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설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에 대한 자신감과 세계혁명에 대한 희망을 표현했다하지만 전체 자본가계급과 하수인들에게는 불쾌한 기억이었다특히 1차 세계대전 말 혁명적 물결은 그들에게 공포와 악몽이었다. 1917년 10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참호에서의 반란독일에서 빌헬름 황제의 퇴위와 노동자계급의 반란과 폭동에 직면한 휴전 서명그리고 독일 노동자 봉기러시아 노선에 따른 바이에른(Bayerische Räterepublik)과 헝가리에서의 노동자평의회 공화국 건설영국과 이탈리아에서 노동자 대중의 파업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개입을 거부한 몇몇 영국 군대뿐만 아니라 프랑스 함대와 군대의 반란 등이 그것이다.

 

벌써 100년 전의 일이지만코민테른 창설은 1917년으로부터 적어도 1923년 말까지유럽으로부터 아시아로 그리고 북아메리카로부터 라틴아메리카에 이르는 전 세계의 혁명 물결에서 정점이었다이러한 혁명 물결은 세계를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분할로 이끈 1차 세계대전, 4년간의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응답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계급투쟁의 역사에는 프롤레타리아 운동 내부의 커다란 분열과 전환점이 있었다바로 세계대전 시기 제국주의 전쟁을 대하는 사회주의자들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와 그에 따른 결과이다. 1914년 제국주의 전쟁과 1917년 러시아혁명은 자본주의가 불가피하게 사회혁명의 세기에 돌입할 것이라는 맑스주의의 전망을 확인했고프롤레타리아운동 내부에서 근본적인 분열을 촉진했다당시 제2인터내셔널의 주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이전 맑스의 저술까지 환기시키면서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했고러시아는 여전히 부르주아 발전시기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0월 혁명을 비난했다결국 그들은 그렇게 부르주아의 진영으로 들어갔고, 1914년 제국주의 전쟁을 위한 신병모집과 1918년 반혁명의 경찰견이 되었다맑스와 엥겔스로부터 시작한 사회주의 조직들이 처음으로 적대적인 편에 서게 된 것이다.

 

이것은 계급과 혁명에 대한 충실성이 위선적인 선언이나 정당의 간판에 의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실천으로 입증된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었다제국주의 대학살 동안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깃발을 홀로 나부끼게 한 것도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수호로 다시 모인 것도전쟁 시 수많은 나라에서 발생했던 파업과 봉기를 주도한 것도 모두 제2인터내셔널 내부의 좌파 흐름이었다그리고 1919년 창설된 새로운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핵심을 제공한 것도 같은 흐름이었다.

 

 

2인터내셔널의 배반과 좌파

 

2인터내셔널 내에서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는 20세기 초에 발생한 자본주의 시기 변화를 먼저 인식할 수 있었다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정점에 다다랐으며 전 지구를 지배하게 되었다이제 레닌이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가장 높은 단계인 제국주의’ 시기가 시작되었다이 시기에 다가올 유럽전쟁은 식민지 분할과 그 영향력을 둘러싼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제국주의 세계 전쟁일 것이었다날이 갈수록 프롤레타리아 투쟁 원칙을 저버렸던 기회주의 진영에 맞서인터내셔널과 프롤레타리아트를 전투로 이끈 것은 제인터내셔널의 좌파였다이 투쟁의 중대한 순간에 1905년 러시아의 대대적파업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낸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국주의 전쟁을 대대적파업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연결시켰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인터내셔널 대회가 있었다좌파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레닌이 제출한 대회의 중대한 수정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래도 전쟁이 일어난다면사회주의자들은 가능한 한 빨리 그 전쟁을 끝내고 전쟁이 촉발한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인민에게 일깨우고그럼으로써 자본주의 지배의 몰락을 서두를 의무가 있다.” (코민테른 1차 대회에서 채택한 사회주의 경향과 그들의 베른대회에 대한 결의문에서 인용)

 

 

1912년 제2인터내셔널 바젤 대회는 유럽에서 점증하는 제국주의 전쟁 위협에 맞서는 이와 같은 입장을 다시 확인했다.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이 코뮨의 혁명적 반란을 탄생시켰고러일전쟁이 러시아에서 혁명세력을 움직였다는 것을 부르주아 정부들이 잊지 않게 하자노동자계급의 눈으로 볼 때자본가의 이익왕조의 경쟁그리고 외교 협정의 남발을 위해 노동자계급이 자신을 학살하는 것은 범죄다.” (같은 글)

 

1914년 8월 4일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2인터내셔널의 주요 당들은 (특히 누구보다 기회주의자 수중에 있었던 프랑스와 독일 사회민주당과 영국의 노동당은) ‘조국방어와 외세침략에 맞서기 위한 부르주아지와의 신성한 동맹을 요구하며 전쟁채권에 찬성표를 던졌다프랑스에서는 계급투쟁을 포기하면서 장관직을 보상으로 받기까지 했다그들은 '맑스주의의 황제'라고 불렸던 카우츠키가 계급투쟁은 '평화 시기'에만 가능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면서 전쟁과 계급투쟁을 구분했을 때, '중도주의'(인터내셔널의 좌파와 우파 사이의 중간)로부터 이론적 지원을 받았다결국 제2인터내셔널은 기회주의 때문에 균열이 시작되고 애국주의 홍수와 전쟁광풍에 휩쓸려 깨어져 부끄럽게 수명을 다했다.

 

계급의식이 있는 노동자들은 인터내셔널 붕괴에 대해 슈투트가르트와 바젤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대회의 발언과 결의문 속에 담긴 가장 거룩한 선언그리고 그들의 신념을 공식 사회민주당의 다수가 명백하게 배신한 것으로 이해한다.” (2인터내셔널의 몰락레닌)

 

이러한 폭풍 속에서 소수만이 우뚝 섰다특히 이탈리아세르비아불가리아 그리고 러시아의 당이 그랬다다른 곳에서는 고립된 혁명가들과 혁명 그룹이 있었다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호르터와 판네쿡 주위의 네덜란드 '트리뷴(The Tribune) 그룹'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에 충실했고 재조직화를 시도했다.

 

2인터내셔널의 죽음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심대한 패배였다이는 그들이 참호 속에서 피를 흘리게 했다수많은 혁명적 노동자들이 살육당했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는 그들의 국제 조직을 잃어버렸다그것은 당연히 재건해야 했다.

 

2인터내셔널은 기회주의에 패배해 죽었다기회주의자를 타도하자변절자뿐 아니라 기회주의로부터 해방된 제3인터내셔널 만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정세와 임무레닌, 1914.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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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머발트 좌파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위한 레닌의 투쟁

 

1915년 9월 5일에서 8일까지 중립국 스위스 침머발트에서 40여 명의 반전 사회주의자들이 모인 국제대회가 열렸다침머발트에서 대립하던 정치노선 사이의 논쟁에서 중요한 문제는 이후 몇 년간 유럽 전역에 반향을 일으켰다그리고 여전히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영향을 주고 있다.

 

2인터내셔널의 주요 정당이 각자의 조국에 대한 호전적인 제국주의 전쟁 목표를 지지하는 데 동참함으로써 제2인터내셔널이 사상누각처럼 붕괴된 것은 그로부터 1년 이상이 흐른 뒤였다전쟁 전에 대다수가 수정주의에 맞서 투쟁했던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세계 제국주의 전쟁은 사회주의의 객관적 조건이 현실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전환점으로 인식했다노동자에게 조국은 없고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이끌 맑스의 원칙을 확고히 지지하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필요성에 대해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전쟁 직후에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관해 글을 썼던 트로츠키로부터 판네쿡롤랜드 홀스트호르터의 네덜란드 트리뷴 그룹은 제국주의세계대전사회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이 전쟁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태어날 용광로라고 강조했다보르차르트의 리히트스트랄렌(Borchardt’s Lichtstrahlen) 그룹으로부터 분리한 독일 좌파요한 니프(Johan Knief) 주변의 브레멘 좌파와 폴 프롤리히(Paul Frolich) 그리고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사회민주당(또한 로자 룩셈부르크와 요기세스(Jogisches)의 당)은 전쟁이 발발하자 "프롤레타리아는 정부압제자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다!"면서 혁명적 패배주의를 기초로 하여 전쟁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조직하려 했다.

 

이 흐름 중 일부는 사회민주당의 배신을 공개적으로 확인할 새로운 인터내셔널 설립의 시급성에 대해 다른 사회주의자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보기를 들어 헤르만 호르터는 중요한 2년간 정치 활동을 중단했다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다른 이들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전쟁 이후 – 또는 오히려 노동자계급 투쟁이 끝난 후에 건설될 것으로 예상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 설립을 원하는 이들은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발언할 권리에 도전할 뿐 아니라 국제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어떻게 사회주의를 위한 혁명적 투쟁으로 통일될 수 있는지 정치적 방향을 제시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심지어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제국주의)전쟁과의 전쟁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평화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뜻인지아니면 레닌이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처럼전쟁의 끔찍한 희생에 맞서 싸우는데 있어 먼저 노동자들이 자신의 정부를 전복하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면서사회주의 혁명의 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다는 것인지에 대한 혼란이 있었다.

 

그는 파리 코뮨과 1905년 러시아 혁명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국주의 세계대전 자체가 혁명적인 상황을 만들어 낼 가능성을 주장했다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고자 한다면 스스로 권력을 장악해서 사회주의를 위한 세계적인 투쟁을 시작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계속해서 사회주의자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 프롤레타리아트가 평화적인 방법으로 목적을 달성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유토피아적이기 때문에 그곳에 가서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해야 한다. ... " (Golos 37/38, 1914년 10)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현재의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는 것은 유일하게 올바른 프롤레타리아 슬로건이다코뮨의 경험으로 알 수 있고 바젤 결의안(1912)에 의해서 윤곽을 드러냈고고도로 발달된 국가 사이의 제국주의 전쟁의 모든 조건으로부터 나온다내전으로의 전환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사회주의자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일단 전쟁이 현실화되고 나면 그 방향으로 체계적이고끈기 있고단호하게 준비해나갈 것이다.

 

이 길만이 프롤레타리아가 배외주의 부르주아지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그리고 곧 어떤 형태로든진정한 자유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길에 결정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다.

 

모든 나라의 부르주아 배외주의와 애국심에 맞서 단결한 노동자의 국제적인 우애여 영원하라!

 

기회주의로부터 벗어난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이여 영원하라." (전쟁과 러시아 사회 민주주의, 1914년 10월 작성, 1914년 11월 출판)

 

스위스 망명 중에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관점을 획득하기 위해 여러 투쟁을 했다무엇보다 먼저 해외 망명 중인 볼셰비키 중 일부는 (한때 러시아 맑스주의의 주류로 여겨졌던 플레하노프가 지지하는 입장프랑스군에 자원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1915년 초 해외 사회민주노동당(RSDLP) 그룹 베른 회의에서 프랑스 볼셰비키 그룹은 평화를 위한 투쟁에 찬성하여 혁명적 패배주의에 대한 그의 요구를 반대했다.

 

인터내셔널 전선에서 임무는 본질적으로 같았다전쟁 기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주장에 맞서는 것(특히 인터내셔널은 평화 시기에 무기지만전쟁 후에는 예전처럼 부활할 것이라는 카우츠키의 말), 사회 평화를 파괴하고 노동자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투쟁할 세력을 결집하는 것즉 그는 노동자가 기존의 정부에 충성을 다하지 않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는 것을 기초 노선으로 새로운 국제행동의 기반을 준비하고 있었다.

 

1915년이 되자 전쟁의 피로감이 가중되고 있다는 징후가 입증되었다독일에서는 계엄령을 무시하면서 생활비에 대한 거리 시위가 벌어졌다. 4월부터 러시아의 파업은 증가했고 더 정치적으로 되었다. 7월에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는 전쟁 산업 위원회의 보이콧을 주도했는데이 위원회는 노동자들을 전쟁에 참여시키기 위해 정부가 설립했다.

 

심지어 구 인터내셔널의 수명이 다한 국제 사회주의 서기국도 '평화회의를 승인하는 쪽으로 끌려들어 갔다. 1월에 중립국의 사회민주당원들은 코펜하겐에서 만나 교전국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전쟁을 중단시키기 위한 행동을 호소했다. 2월에 영국 독립노동당(ILP)은 키어하디(Keir Hardie)가 주재한 연합국의 '사회주의자대회를 개최하여 볼셰비키인 리트비노프(Litvinov)의 국제주의 선언 낭독을 막았다.

 

이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안은 전쟁이 자본주의 사회제국주의와 식민지 경쟁이 만들어 낸 대립의 결과물로서 모든 나라의 공동 책임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승리한다면 자유국가 독립그리고 조약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전쟁을 계속할 필요가 있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고 명시했다.

 

연합국의 노동자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인민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독일과 오스트리아 정부에 맞서 방어전을 벌이고 있으며이것을 정복 전쟁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에 저항해야 한다결의안은 특히 벨기에의 복원폴란드의 자치나 독립그리고 민족자결을 바탕으로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에서 발칸에 이르는 유럽의 모든 국가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4월에는 동맹국 사회주의자들이 사회민주당원 모임과 비슷한 만남을 비엔나에서 가졌고전쟁 후 관계를 주로 다루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스위스 사회 민주당이 전쟁에서그들 나라'의 역할에 관계없이 노동자 단체의 반전 회의를 제안하자국제사회주의서기국(ISB)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그들은 어쨌든 밀고 나가기로 하고 계급투쟁의 기본을 고수하며 동시 행동을 통해 즉각적인 평화를 위해 투쟁할 수 있는 모든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자 단체의 대회를 소집하기로 했다조직적인 의미에서 침머발트는 썩은 제2인터내셔널의 임무를 벗어났다하지만정치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훼손할 의도는 없었다지노비에프가 다가오는 대회의 목적에 대해 명확한 혁명노선을 중심으로 조직하여 구 인터내셔널과의 분명한 단절을 준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별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그럼에도 레닌은 혁명가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하고 영향력을 확대하여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세력을 통합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인식했다대회에 이르기까지 몇 달 동안 프롤레타리아트와 전쟁에 관한 공동 성명서에 포함시켜야할 핵심 주제에 대한 좌파 사이의 집중적인 서신 교환과 토론이 있었다라덱과 레닌둘 다 결의안 초안을 작성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스웨덴과 노르웨이 좌파 사회주의자의 참여를 조직했다네덜란드의 트리뷴 주변의 맑스주의 그룹이 연락을 취해왔다.

볼셰비키는 대표들에게 배포하기 위한 독일어 팸플릿을 발행했다 ... 팸플릿에는 레닌과 지노비에프의 사회주의와 전쟁뿐만 아니라 중앙위원회와 베른대회 결의안 등이 들어있었다또한 러시아의 혁명가들이 많은 좌파 동맹국들과 이견을 갖고 있던 민족 문제에 관한 볼셰비키의 1913년 결의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위한 레닌의 투쟁, John Riddell, Monad Press)

 

이 마지막 주제(민족 문제)는 제3인터내셔널이 결성되기 전까지는 결코 해결되지 않던 논쟁거리였다그러나 침머발트 대회를 앞두고 레닌은 다수에 양보해야 했다좌파가 제시할 성명서의 문구를 둘러싼 사전회의 토론에서 8명의 대표단 중 대다수는 레닌보다는 라덱의 초안을 선호했다최종본은 피억압억압 민족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이 정도는 혁명적 패배주의의 무늬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다수에게 걸림돌이 아니었다좌파의 결의안은 거부되었다역사적으로 전해져 내려온 침머발트 선언은 주로 트로츠키가 초안을 작성한 타협의 결과였다그럼에도 좌파는 문제시되는 조항을 추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명했다. 1915년 9레닌은 침머발트를 '첫 번째 단계'라고 묘사했다.

 

모든 모순과 소심함에 대해 ... 그것에 파열구를 낼 수 있는 기회주의에 맞선 진정한 투쟁.” (레닌 저작집제 21)

 

두 번째 침머발트 대회(키엔탈)는 의심할 여지없이 한 걸음 진전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우리는 우리의 결의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제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침머발트와 키엔탈 대회는 우리의 길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노비예프, 1916. 10. 6)

 

이 사건에서 가장 큰 진전은 대부분의 국제주의자들이 함께 모여서 독립적인 좌파를 조직했다는 것이다침머발트를 떠나기 전에 그들은 레닌지노비에프와 라덱으로 구성된 침버발트 좌파 서기국을 설립했다. 1916년 전쟁으로 인한 위기와 레닌이 예측한 위기는 유럽 전역에서 첨예화되었다사회민주당으로부터 완전히 단절하지 않는 침머발트 다수와 좌파 사이의 큰 차이는 균열이 되었다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난 후 레닌은 침머발트의 늪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으며’ 지금 필요한 것은 좌파로만 구성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을 즉시 건설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917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유럽 전역에 혁명적 물결을 열어젖혔다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위협은 제국주의 대학살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을 국제 부르주아지에게 확인시켰다레닌의 슬로건은 현실이 되었다러시아 그리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켰다이처럼 프롤레타리아트는 유명한 슈투트가르트 결의를 적용함으로써 제2인터내셔널 좌파의 명예를 드높였다.

 

1차 세계대전은 사회민주당의 의회주의적 우파를 부르주아지 진영으로 결정적으로 몰아넣었다혁명적 물결은 중도주의 평화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에 맞서 싸우도록 했지만그들의 다수특히 카우츠키 같은 지도자들은 부르주아지 진영으로 뛰어들었다더 이상 인터내셔널은 존재하지 않았다사회민주주의로부터 분리된 좌파들이 만든 새로운 당은 '코뮤니스트'당 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혁명적 물결은 고무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당3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요구했다. 1919년은 전후 혁명 물결의 최고정점이었고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설 총회의 입장은 프롤레타리아운동의 가장 진보된 입장을 표현했다사회-애국주의적 반역자들과의 완전한 단절자본주의 쇠퇴의 새로운 시기에 의해 요구되는 대중행동의 방법자본주의 국가의 파괴 및 노동자 소비에트의 국제적인 독재이러한 강령적 명확성은 혁명물결의 거대한 기세를 반영했지만그것은 낡은 제2인터내셔널 정당 내부 좌파혁명가들의 정치적 이론적 노력과 투쟁으로 미리 준비되어 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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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며

 

침머발트 좌파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인터내셔널 창설을 향한 발걸음이었다는 점이다그리고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설의 의의는 그것이 국제코뮤니스트당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침머발트 좌파에서 새로운 인터내셔널로 가기까지 너무 늦었다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1917년 10월 혁명 1년여 뒤그리고 베를린 프롤레타리아트가 겪은 첫 번째 패배로부터 두 달 뒤에 창설되었다그 뒤를 이은 여러 해 동안 국제 혁명의 물결은 패배하고 쇠퇴했으며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점점 고립되었다이러한 고립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의 퇴행이 결정적 요인이었다이러한 사태 때문에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기회주의의 확산을 막을 수 없었고 퇴행을 거듭하던 끝에 사망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혁명가들에게 침머발트의 진정한 의의는 무엇인가그것은 여전히 국제 노동자계급에게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같은 국제혁명당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919년과 비교하면 현재의 노동자계급은 쇠퇴하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심각한 경제적 고통에 짓눌리고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에 직면해 있으면서도자본주의의 참상에 맞선 투쟁은 산발적이고 고립되어 있다계급 역관계의 커다란 불균형 상태는 100년 전보다 오히려 더욱 계급투쟁에서 정치적조직적 역할을 할 혁명당을 필요로 한다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자본가계급뿐 아니라 (2인터내셔널과 마찬가지로한때 노동자계급의 조직이었던 노동자/좌파 정당과 노동조합 기구를 통해서 노동자계급에 스며들기 때문이다이들은 시시때때로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지만항시적으로는 자본가계급이 노동자들의 투쟁을 억누르는데 실질적 도움을 주고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이들이 전취해간 계급의 혁명 의식을 되찾고다가올 자본가계급과의 전면전을 위해서는 명확한 강령과 국제주의적 행동일치 능력을 가진 국제혁명당이 반드시 필요하다.

 

계급투쟁의 가장 의식적인 부분이자혁명적 소수인 코뮤니스트들은 자본주의 쇠퇴와 제국제주의 전쟁그로 인한 자본주의 참상과 노동자계급의 현실 앞에서 수동적 관찰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레닌은 계급 전쟁에서 휴전은 없다고 했다.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라는 슬로건은 오늘날 제국주의 전쟁에 직면한 혁명가들에게 모든 상황에서 과거의 공식을 단순히 반복하라는 것이 아니다하지만일상에서조차 노동자계급에게 국가 방위나 전쟁 준비에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이 코뮤니스트의 기본 원칙이다우리는 노동자들에게 조국이 없고 싸울 가치가 있는 유일한 전쟁은 계급 전쟁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면서노동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투쟁하도록 해야 한다.

 

세계의 국제주의자 코뮤니스트들은 100년 전 침머발트 좌파가 했던 것처럼 미래의 국제혁명당 건설을 위해 인내심을 갖고 혁명세력을 재편성해야 한다제국주의 전쟁에 맞서 국제주의 원칙을 사수하며 전쟁을 내전(계급전쟁)으로 전환하는 공동행동과 국제적 연대에 나서야 한다.

 

우리는 당이 아니지만당을 위해 존재한다우리와 같은 원칙을 가진 동지들은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을 위해코뮤니스트당-국제혁명당 건설을 위해 함께 투쟁할 것을 호소한다우리는 침머발트 좌파와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립총회의 정신을 계승한다.

 

미래의 인터내셔널 건설을 위해 투쟁하자!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을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라!

 

2019년 5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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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9호] 스탈린주의 비판 – 코뮤니즘 원칙을 세우며

스탈린주의 비판 – 코뮤니즘 원칙을 세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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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주의 등장 배경

 

1915년 침머발트 대회에서 국제사회주의자들은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식했다평화주의에 맞서 레닌은 혁명적 행동이 없는 평화 투쟁은 공허하고 기만적이며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자는 슬로건으로 중도주의를 반대했다. 1917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유럽 전역에 혁명적 물결을 열어젖혔다이러한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은 국제 부르주아에게 제국주의 대학살에 마침표를 찍게 했다레닌의 슬로건(전쟁을 내전으로)은 현실이 되었다이처럼 프롤레타리아는 침머발트 좌파의 결의를 적용함으로써 그들의 원칙이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이 글은 전쟁과 온갖 억압에도 코뮤니즘 원칙을 지키고 건설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하 코민테른) 100주년을 맞이하여 코뮤니즘 원칙에서 이탈하고 코뮤니즘 참칭으로 인한 스탈린주의 폐해의 심각성을 다루고자 한다.

 

1917년 러시아혁명을 통해 탄생한 소련은 혁명적 법과 제도적 조처를 한다하지만 주요 유럽 국가들에서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물결이 패배하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고립되면서 사회주의로의 혁명은 퇴행하게 된다. 1918년 봄 테일러주의의 재도입과 1인 경영 강제그리고 혁명의 성과를 방어하려는 임시조치들즉 정치반대 세력 분쇄차르 관료의 재고용자본주의 생산방식과 인센티브 부과는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실질적 권력을 깨뜨리고 노동자정부와 노동자 사이 틈새를 벌려놓았다이 과정은 3년간의 내전 동안 혁명적 노동자계급의 죽음으로 더욱 굳어졌다당이 곧 계급이라는 잘못된 판단 속에 당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고당이 노동자계급을 대신하는 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일국사회주의

 

1924년은 일국사회주의 교의가 태어난 해이다스탈린은 그 교의의 레닌주의 기원을 끊임없이 강조했다세계혁명이 역사적으로 불가피하다는 레닌의 가정에서 시작한 스탈린에게혁명적 봉기의 조류가 일시적으로 빠져나갔고 혁명을 성공시킨 유일한 국가인 소련은그 자체로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보루였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제국주의의 탐욕스러운 공격에서 보호되어야만 했다이러한 환경에서 코민테른과 각국 코뮤니스트당(공산당)의 주된 과업은 혁명적 봉기를 조급하게 추진하는 게 아니라 소련을 방어하는 것이다이것은 코민테른과 각국 코뮤니스트당의 혁명적 사명이 소비에트 국가와 이익에 종속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1)

 

세계혁명의 명백한 침체에 힘입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선언은 국제주의와의 공개적 단절이었으며 세계 제국주의 권력으로 러시아를 건설하는 약속이었다이것은 사회주의가 승리한 세계혁명의 열매임을 주장한 1917년의 볼셰비즘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었다결국 일국사회주의는 세계적 규모에서만 사회주의가 건설 가능하다는사회주의의 고립된 섬은 불가능하다는 맑스주의의 근본적인 이념을 포기함을 의미했다.

부르주아 정치인과 국가에 일국 사회주의’ 정책은 스탈린이 더는 세계 혁명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이해했다실제로 1941년 스탈린주의 소련은 나치 독일과의 일시적 협정에 따라 위대한 애국 전쟁의 깃발을 들었으며 그 끝에서 제국주의자들이 지구를 분할해 차지하는 데 참여하였다.

 

스탈린주의의 코뮤니즘 참칭으로 인한 문제점

 

1917년 10월 혁명에 대하여 국제 부르주아지는 혁명이 모든 것을 악화시킨다고 주장한다러시아혁명은 스탈린주의 강제수용소로 끝났으며 뿐만 아니라 대중 테러재판 쇼역사 위조다른 의견 억압거대한 군사적 병기창을 대량 생산할 수 있었지만품위 있는 소비자 상품을 제공할 역량이 없었던 경제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1953년 동독, 1956년 헝가리그리고 1981년 폴란드에서처럼 프롤레타리아 반란을 분쇄하는 탱크를 사용했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설립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혁명으로 등장한 국가 내부에서 반혁명이 성장했고거의 국가와 구별할 수 없을 지경이 된 볼셰비키 당이 관계되어 있어서 스탈린주의 정권은 10월 혁명의 연속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이러한 거짓된 동일시는 러시아 외부의 스탈린주의 정당들에 급진적이라는 광택을 내게 해 주었다또한 자본주의와 각각 자신의 국가와 민족적 이해에 대한 완전한 헌신을 붉은 10월로 포장할 수 있었다볼셰비키 당이 권력을 붙들고 있는 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여전해 존재한다는 생각은 국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일시하는 또는 사회주의로 가는 단계라고 여기는 비극적이고 재앙적인 결과로 돌아왔다혁명의 진정한 패배,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반혁명의 승리는 내부에서부터 10월의 연장선이라는 거짓 탈을 뒤집어쓴 채 일어났고전 세계 노동자계급 내에서 가장 파괴적인 혼란을 낳았다이것이 스탈린주의가 코뮤니즘과 같다는 거대한 거짓말의 객관적인 밑바탕이었다그렇기에 서방 지배계급의 주요 파벌들에게 스탈린주의 정권은 코뮤니즘과 같다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거짓말을 공표할 자격을 줄 수 있었다이러한 경향들은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연대와 자본주의 사회의 진정한 과정을 깨닫는 데 필요한 국제적 역사적 사고방식의 발전에 심각한 방해물이었다.  

 

서구의 많은 이에게는 스탈린주의 정권을 특징짓는 비참함결핍그리고 억압이 자본주의를 더욱더 높은 형태의 사회로 바꿀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보여주었다자본주의 경쟁제한 없는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이런 것들이 인간 본성의 본질이라는 것으로 정당화되었다동유럽 정권이 80년대 말 몰락했을 때맑스주의 그리고 코뮤니즘 실패의 최종적 증거라는 거짓말이 전 세계로 증폭되었고지금까지도 국제 부르주아지는 스탈린주의를 코뮤니스트로 묘사하는 것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이러한 선전은 노동자계급 일반에 심각한 혼란과 무질서를 가져왔으며노동자계급은 1980년대에 이미 더 높은좀 더 통일된 수준으로의 즉각적인 투쟁을 할 수 있는 전망역사적 프로젝트를 발전시키기 어려움을 깨달았다현재 사회를 넘어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널리 알려진 편견은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투쟁을 정치화하고 자본주의 체제 전체에 맞설 수 있는 역량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코뮤니즘의 죽음에 대한 선전은 지배계급이 체제의 착취를 당하는 계급의 의식에 맞서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능력 중 하나이다전제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그들의 중심 테마는 민주주의’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그리고 지배계급이 열심히 유지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신비화의 근거이기도 하다.

 

스탈린주의 국가 대 코뮤니즘 사회

 

스탈린주의는 맑스와 엥겔스 시절부터 노동자 운동 속에서 방어해 왔던 코뮤니즘과 비교했을 때 실체를 가늠할 수 있다코뮤니즘이란 인간 소외인류 스스로 만들어낸 창조물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적대 세력이 되는 어떠한 사회적 질서도 극복하는 것을 의미했다정치 수준에서 코뮤니즘은 국가가 없는 사회를 의미한다왜냐하면 국가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한 지배의 명확한 표현이며광범위한 대중이 아무런 통제력을 갖지 못하는 정치적 기관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스탈린주의 정권은 개인사회무엇보다 노동자계급에 대한 국가의 완전한 지배의 전형이었다경제적 수준에서 코뮤니즘은 인류가 비인간적인 경제적 법칙과 이윤과 시장의 냉혹한 요구에 더는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리고 이것은 코뮤니즘에서는 돈시장또는 임노동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러나 생산성 전쟁이 전체 경제 체제를 지배하는 스탈린주의 국가 권력은 임금노동자 계급에서 추출한 잉여가치 위에 세워져 있었다자본은 본질에서 사회적 관계이지 단순히 법적 소유의 형태가 아니다임금노동자들에게는 노동력이 사적 기업가에게 팔리든 국가 관료에게 팔리든 차이가 없다자본주의 착취의 본질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그리고 코뮤니즘이 인류를 여러 민족으로 분리를 끝내고국경 철폐를 의미하는 한 스탈린주의 정권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광신적 조달자이며그들의 국경의 방어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세계라는 투기장에서 그들의 민족적제국주의적 이해를 추구한다.

 

스탈린주의 교훈

 

소련의 경험은 첫째일국사회주의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고립된 프롤레타리아 권력은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계에 직면하여 오래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프롤레타리아가 한 국가에서 권력을 쟁취하였을 때그 모든 정치적 경제적 정책은 반드시 혁명을 전 세계로 확대하는 긴박한 필요에 종속되어야만 한다한 국가 또는 지역에 제한되면 혁명은 불가피하게 외부의 공격이나 내부의 타락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그리고 국가의 이름으로 자본을 축적함으로써 소련에서의 국가는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가 폐지되고 부르주아지가 축출되었다는 환상을 만들어냈다일국 사회주의 가능성에 대한 스탈린주의 이론 및 소위 사회주의 국가들이나 노동자 국가에 대한 환상은 이러한 은폐에 모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둘째명령경제는 사회주의가 아니며사적 소유 철폐와 국가 소유로의 전환만이 아니라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국가 권력이 노동자계급의 지배 아래 존재하는 노동자평의회 체제이어야 한다셋째러시아 혁명의 교훈은 국가기구가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이며이행기에 계급과 국가 사이의 관계 문제의 복잡성과 난해성을 명료하게 보여주었다앞으로도 프롤레타리아와 혁명가들은 이 문제를 우회할 수 없으며이것을 해결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넷째어떠한 노동자혁명도사회주의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중국북한 같은 착취체제는 부르주아 체제와 똑같이 노동자혁명에 의해 타도해야 할 체제일 뿐이다.

 

코뮤니즘은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으로 아래로부터의 노동자평의회 권력의 창출과 강화를 통해 가능하다코뮤니스트 혁명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당의 역할은 필수적이다하지만 당이 노동자평의회를 대신할 수 없으며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권력을 당이 가질 수 없다따라서 코뮤니즘 사회 건설은 혁명의 시작과 함께 사회의 모든 권력을 노동자계급이 집단적으로 행사하는 노동자평의회 권력을 수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노동자평의회가 모든 정치와 경제와 산업을 장악하고 노동자평의회가 전 사회에 걸쳐 모든 권력을 행사해야한다코뮤니즘 생산관계는 생산수단의 국유화사적소유의 철폐를 넘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이며생산수단의 사회화는 노동자평의회의 전 사회적 권력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자신의 노동자 평의회를 통해 프롤레타리아는 이행기 국가에 대한 독재를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2019년 4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윤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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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일에서 1923년 10월이 대실패로 끝나고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당내 투쟁이 강화되면서 자본주의가 안정화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코민테른을 위기로 빠뜨렸다이러한 상황에서 코민테른의 볼세비키화가 진행된다볼세비키화란소비에트 러시아가 코민테른과 그 회원국 코뮤니스트당을 지배하려는 경향이며특수하게는 ECCI(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에 있는 소비에트 러시아 코뮤니스트당 대표의 손아귀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이다. 1920년대 말 스탈린은 코민테른과 외국 코뮤니스트들의 가장 중요한 과업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요새를 방어하는 것이라고 결정하였다이에 따라 점점 소비에트 국가 이익은 코민테른의 기본 사명인 세계혁명보다 우선하였다유럽 혁명운동의 패배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의 반혁명의 과정은 코민테른을 구성하는 당에게 소비에트 러시아 국가를 방어할 필요성을 부과하고동시에 그 당들이 사회민주주의 전략과 전술로 후퇴하도록 하면서 코민테른에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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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9호] 코뮤니즘(공산주의)이란 무엇인가? Ⅱ

  • 코뮤니즘(공산주의)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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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뮤니스트 혁명

     

    “부르주아 혁명, 즉 18세기의 혁명은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여 맹렬히 돌진한다. 그 극적 효과들은 서로 자신을 내세우며, 사람과 사물은 불꽃의 찬란함에 묻힌 것처럼 보인다. 황홀경이 그 날 그 날의 정신이다 ; 그러나 이것은 수명이 짧다. 이것은 얼마 안 가서 그 정점에 도달한다. 사회는 이 질풍노도의 시기의 결과를 냉정하게 자기 것으로 하기까지 기나긴 회한의 시기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반대로 프롤레타리아 혁명, 즉 19세기의 혁명은 항상 자기비판을 행하고, 진행 도중에 반복해서 걸음을 멈춘다. 그 임무를 다시 수행하기 위해서, 완수된 것처럼 보이는 것들로도 다시 되돌아온다. 처음 시도된 것의 불완전함, 허약함, 빈약함을 가차 없이 철저하게 비웃는다. 또한 이 혁명은 마치 자신의 상대를 땅에다 메다꽂아, 그 상대가 땅에서 새로운 힘을 흡수하여 더욱 거대해져서 자신에게 대항하도록 만드는 듯하다. 이 혁명은 언제나, 자신의 목표가 너무나 거대하다는 것에 놀라 거듭 뒤로 물러난다. 그러다가 마침내 어떠한 반전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이 창출되어 관계 자체가 다음과 같이 외치게 되면 이러한 물러섬은 끝나게 된다 :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여기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 춰라! (맑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1852)

     

    이러한 끊임없는 운동과 지속적인 자기비판이라는 기초 위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코뮤니즘을 향한 험난한 길을 걸어간다. 사실상, 코뮤니스트 혁명은 하나의 경제적 과정에서 그 최절정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적 사회적 변혁을 위한 정치적 수준에서의 전제조건이다. 또한 코뮤니스트 혁명은 옛 사회를 변혁하는 모든 과정을 위한 출발점이다. 과거에는, 계급의 경제적 권력과 그 계급이 사회관계의 새로운 시스템을 강제하는 능력은 실질적으로 같은 의미였다. 사회적 진보의 체화로서, 설득이나 힘에 의해 사회에 부과되는 새로운 사회구조는, 그 혁명 계급의 특정한 경제적 이해관계 속에서 그 정당성을 찾았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중세 봉건 사회가 부르주아지에 의해 파괴되었는지를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15세기부터 16세기까지, 거대한 부르주아 가문들은, 특히 남부 유럽에서, 무역과 상업의 명백한 주인이었다. 대지와 바다를 넘나드는 무역로를 따라서 금속과 직물, 향신료의 끊임없는 파도가 흘러들어왔다. … 황금이 새로운 무역의 중심지를 연결하는 무역로에 그리고 많은 도시에 흘러넘쳤다. 미술, 과학, 문학, 그리고 지식이 번영했다. 과학과 기술의 발견이 산업 도시처럼 증가했다. 머지않아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했다. 인간의 이해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의 진보도 일어났다. 어디든 속도와 정확성이 필요하다는 점이 명확했고, 산업 생산과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금융과 상업 문제에 있어서도 특히 그러했다. 한 사회 계급이 사회를 지배하고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에 있었다. 이를 위해, 이 계급은 하나의 본질적인 힘, 즉 금융과 돈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중세 귀족정치의 수중에 남아있던 정치권력에 직접적으로 도전하지 않고서도 그들 자신의 법을 사회에 강제했다.

     

    “중세 귀족세력에 대항한 부르주아지의 투쟁은 농촌에 대한 도시의 투쟁이었으며, 토지 재산에 대한 산업 재산의 투쟁이었으며, 자연경제에 대한 화폐경제의 투쟁이었다. 이 투쟁에서 부르주아지의 결정적인 무기는 그들의 경제적 권력이었고, 이것은 산업의 발전 - 첫 번째로 수공업, 그 다음 단계로 증가하는 메뉴팩쳐, 그리고 상업의 확장을 통해 - 과 더불어 끊임없이 증가해 온 것이었다. 이 모든 투쟁 동안, 정치적인 힘은 귀족세력의 편에 있었다.” (엥겔스,『반뒤링론』)

     

    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을 위해서, 모든 착취 형태의 파괴를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런 종류의 경제적 권력을 갖지 않는다. 투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돈, 재산, 또는 산업 권력을 갖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권력을 해체하고, 코뮤니즘으로 점차적으로 이행해 갈 수 있는 어떤 경제적 권력도 없다. 자본주의의 사회관계가 지배하는 일반적인 틀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노동의 도구, 기계, 또는 심지어 공장 전체를 소유함으로써 대체 어떤 물질적 권력을 얻을 수 있는가? 자본주의적 틀 안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생산 수단이나 그 결실을 부분적으로라도 소유한다는 발상은 객관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이며, 덫이며, 신비화이다. 오직 폭력적이고 세계적인 혁명만이 생산수단과 그 결실의 집단적 전유를 위한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떤 특정한 경제적 이해관계나 소유형식에 기반 하지 않는 만큼, 새로운 종류의 착취 사회를 만드는 것 따위를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착취 받는 계급으로서, “잃을 것이라고는 오직 그 족쇄뿐”인 바로 그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객관적으로 착취가 없는 사회, 계급이 없는 사회의 건설로 나아갈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 후에도, 정치적 권력을 쟁취한 후에도 착취 받는 계급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러한 권력 쟁취 -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현 - 와 코뮤니즘 사이에서는 일종의 이행기가 필요할 것이다. 이 시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전 사회를 통해 다른 사회 계급을 생산적 노동에 통합함으로써 자신의 조건을 일반화시켜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회 변혁 없이, 계급의 이러한 점진적인 해체 없이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심지어 세계적으로 정치적 혁명이 일어난 이후에도 여전히 ‘착취받는’ 계급 (다른 사회 계층들의 기생적 소비를 위한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매우 자주 다음과 같은 질문이 코뮤니스트 혁명과 관련하여 제기된다 : “일단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잡으면 (복수를 위해) 또 다른 사회 계급을 착취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을 보라!” … 또는 “아무리 최선의 의도를 지녔다 해도 권력은 부패 한다” 등등. 이러한 질문이 제기되는 그 방식은 그들의 잘못된 추론을 드러낸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착취 받는 계급이자 혁명적인 계급이라는 본질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 그들은 다음을 설명할 수 없다 :

     

    · 계급 억압을 할 수 있는 유일한 토대인 경제적 권력을 위한 어떤 물질적 토대도 노동자계급에게는 없다는 점

    · 생산력의 계속적인 발전의 유일한 기초로서 계급 없는 사회가 이뤄질 필요성과 객관적 가능성

     

    이러한 것들을 볼 수 없는 이들은 매우 쉽게 그러한 진부한 의문에 빠지는데, 그것은 사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유지를 위한 변명과 자기합리화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서 특징적인 이러한 근시안은, 혁명이 일어난 후 노동자계급의 일부분이 나머지를 착취하기 시작한다면 (모든 노동자계급이 그 자신을 착취한다는 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우스꽝스런 일이 될 것이다), 이는 혁명의 후퇴를 의미하고 자본주의의 재등장을 의미할 뿐임을 보지 못한다. “착취하는 노동자”는 실제적이고 객관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계급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대리인으로 되어버린 것에 불과할 터이다. 혁명과 자본주의의 파괴는 오직 지연될 뿐이다.

     

    그러므로 세계적 코뮤니스트 혁명의 승리는 그 자체로 결정론적이지도 않으며, 코뮤니즘의 승리를 절대적으로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 이행기 동안, 자본주의 사회로의 후퇴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한 후퇴 가능성에 대항하여 투쟁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엄청난 노력을 다해 그 자신의 의식과 연대를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기 때문에, 이 투쟁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제한된 수의 무기만이 유용하다.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옛 부르주아 권력의 어떤 잔재도 용인할 수 없음은 명확하다. 오히려 옛 부르주아 권력의 잔재들은 이행기동안 점진적으로 분해되고 파괴되어 사라져야 할 것이다. 과거에는 이렇게 과거의 제도와 기구를 깨끗하게 철폐시키는 것이 필수적이진 않았다.

     

    부르주아 혁명은 많은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 구조들 뿐만 아니라, 사고와 행동의 방식들 …의 전복을 포함했다. 그러나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이 착취를 강제하는 기구라는,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근본적 토대까지는 아니었다. 이단 심문의 도끼는 길로틴의 ‘민주적’ 칼날로 대체되었다. 중세의 노예 상태로부터 미래에 착취당할 계급을 ‘해방시킨’ 우리의 새로운 주인은 구체제의 ‘덜 공격적인’ 측면, 중세 국가의 억압적인 기구와 같은 것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간단히 이 기구를 근대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적용했다. 경찰, 공무원, 검찰 … 들은 그들의 제복을 바꿔 입었다. 사색가, 선생, 철학자 등은 그들의 학설을 바꿨다. 특정 경우에는, 20세기가 시작했을 때의 독일과 러시아처럼, 부르주아의 경제적 권력은 귀족, 귀공자, 제국의 장교와 행정 관료, 귀족, 왕자와 황제 등의 토지와 공존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억압적 사회가 다른 억압적 사회로 바뀐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이전의 억압적인 중세적 권력 구조를 이용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것은 부르주아 경제적 권력을 유지하는데 정말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종류 중 어떤 것도 프롤레타리아트에겐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오직 부르주아 국가의 모든 측면을 사전에 파괴한 그 기반 위에서만 지배적인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리코뮨의 경험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단순히 현존하는 국가를 전복시켜서만은 안 되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파괴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러므로 반드시 코뮤니스트 사회의 본질에 어울리는 투쟁과 사회 변혁의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 혁명 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 양식은, 사회 혁명의 본질에 조응해야 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주도할 사회의 새로운 형식의 본질에 조응해야 한다.

     

    “이러한 전유는 더욱이 그것이 달성되어야 하는 방식에 의해서 결정된다. 전유는,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성격상 그 자체가 다시 하나의 보편적인 연합일 수밖에 없는 일종의 연합에 의해 그리고 혁명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혁명 속에서 한편으로 지금까지의 생산 및 교류에서, 그리고 사회적 편제에 있어서 이전의 양식의 권력이 전복되고, 다른 한편으로 그 속에서 혁명 완수에 불가결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보편적 성격과 에너지가 발전한다. 더욱이 그러한 혁명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사회적 지위로 인해 아직 그에게 남아 있던 모든 것을 벗어 던지게 된다. ”(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조직화, 계급연대, 혁명적 의식의 성장, 명확한 전망과 지칠 줄 모르는 행동, 눈앞에 놓인 거대한 의무에 대해 전체 노동자계급의 창조적인 참여 … 이 모든 것은 혁명, 권력 장악, 그리고 코뮤니즘의 비옥한 토양이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은, 집단적이며 폭력적인 과정이라는 점 외에도, 무엇보다도 계급의식의 발전에 달려있다.

     

    과거에는 객관적인 조건이, 인간의 의지와 의식보다 훨씬 큰 역할을 했다. 다른 생산 양식의 계승은 어느 정도 인간과 사회 계급의 ‘머리 위에서’ 발생했다. 생산력의 불충분한 발전으로 인해, 혁명 계급은 자동적이고, 신비스러우며, 변치 않는 것 같은 현실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의 원동력은 자연적 힘으로서 나타났고, 그 힘은 보이지 않으며, 폭력적이고, 제멋대로이며, 제어되지 않는 그러한 것처럼 보였다.

     

    “코뮤니즘은, 그것이 지금까지의 모든 생산 관계 및 교류 관계를 변혁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모든 운동과 구별된다. 또한 그것은 최초로 의식적으로 모든 자연적인 전제를 지금까지 존재하는 인간의 창조물로서 간주하고, 그 전제에서 자연적이라는 성격을 벗겨내며, 그 전제들을 연합된 개인들의 힘에 복속시킨다.”(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그러므로 코뮤니즘과 코뮤니즘을 향한 진행은, 다시 말해, 혁명은 같은 과정의 일부이며,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이 운동의 각각의 특정한 단계는(그 단계는, 각각 다른 단계와 고립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이미 최종적 목표의 특징적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만약 코뮤니즘이 인간 필요를 위한 생산을 의식적으로 조직함을 의미한다면, 코뮤니즘에 앞선 사회 변혁과 혁명은, 그 스스로 의식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러므로 반드시 편견 없이 현실을 이해하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최초의 계급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혁명적 계급은 그 이전의 사회 질서에 비해 진보적인 사회 질서를 위해 투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질서는 새로운 착취의 형식에 기반하고 있었다. 투쟁을 통해 얻어진 이 계급의 의식은 그들의 착취를 정당화하거나 은폐해야 했기 때문에 그저 신비화된 의식일 뿐이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새로운 형태의 착취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모든 착취의 형식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의식은 진정으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사회 현실을 파악할 수 있는 최초의 의식이다.

     

    확실히, 노동자계급 의식의 발전은 완결된 과정이 아니다. 노동자계급의 최초의 투쟁의 ‘자생적’ 성과는 말할 것도 없이 더 미완적이다. 그 계급의식은 물질적 환경의 압력, 계급의 역사적 경험 아래에서 차츰 발전하며, 성장과 풍부화의 지속적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비록 계급의식의 발전이 ‘완전한’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맞다 하더라도, 이는 혁명적 계급의식 없이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자생주의나 자발주의, 그 어느 것도 혁명의 토대가 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쟁취는 그 계급이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완전히 의식하고 있을 것을 요구한다. 요구되는 의식의 수준을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뮤니즘과 혁명의 필요에 상응해야만 한다. 더욱이, 계급의식의 발전은 집단적인 과정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발전은 계급의 객관적인 조건과 주체적인 능력, 이 두 가지로부터 비롯되는 상이한 요소들이 결합한 산물이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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