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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전쟁만이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2년 8개월이 넘었고,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조직적인 학살도 1년이 넘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우크라이나 민간인이 1만 명 넘게 사망했고, 양측의 군사 사상자는 50만 명을 넘어섰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으로 가자 지구에서는 사망자가 42,000명을 넘어섰고, 이 중 45%는 어린이였고, 거주자의 90%가량인 190만 명이 피란민으로 내몰렸다. 레바논에서도 이스라엘의 무차별 폭격으로 2,000명 넘게 사망하고, 1만 명 가까이 다쳤다. 이 무자비한 전쟁 폭력 속에서도 미국과 나토는 우크라이나에 계속 돈을 쏟아붓고, 러시아는 계속 공세를 유지하면서 희생자를 늘려가고 있다. 게다가 심각한 체제-정권의 위기에 빠진 한국과 북한의 통치자들이 위기 모면의 수단으로 이 전쟁에 개입하려고 하면서 제국주의 전쟁의 불길이 한반도에 옮겨붙어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일반화된 제국주의 전쟁으로 향하는 자본주의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의 전쟁은 훨씬 더 광범위한 세계적 갈등으로 가는 첫 번째 단계에 접어들었으며, 자본주의가 일반화된 전쟁으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경제 위기와 제국주의 긴장이 최고조로 달한 상황에서 벌어진 두 전쟁은 수많은 분쟁 지역 중 일부가 터졌을 뿐이며, 또 다른 분쟁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전쟁은 특히, 어느 쪽도 타협할 수 없는 수십 년에 걸친 분쟁의 산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러한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적(敵)-경쟁국의 완전한 패배로만 끝날 수 있는데, 주로 경제적 고갈로 인해 잠시 멈췄다가 언젠가 다시 발발할 뿐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제국주의 체제에서 이러한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 결과는 필연적으로 전 세계 노동계급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적 투쟁, 즉 제국주의적 쟁탈전으로 이어진다. 기존 자본과 비교해 잉여가치의 양이 감소할수록 이 쟁탈전은 더욱 폭력적으로 변해 결국 전쟁을 일으킨다. 이러한 전쟁은 지난 120년 동안 거의 끊임없이 이어졌다. 1914~1918년과 1939~1945년에는 '세계대전'이라고 불리는 제국주의 대학살 전쟁이 있었고, 그 후로도 전쟁은 거의 모든 대륙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현재에도 전 세계에서 50여 개의 무력 충돌이 벌어지고 있고, 전쟁의 평균 지속 기간도 길어졌다. 이에 따라 2023년 기준으로 분쟁에 노출된 인구수가 20억 명에 달하고 1억 800만 명이 난민으로 내몰렸다. 분쟁 지역 중 여러 곳에서 인종 청소, 공동체 사이의 폭력이 계속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분쟁은 심각한 위기에 처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이다. 60년 동안의 성장률 하락으로 인해 위기가 심화하자 세계 자본가계급은 체제 유지를 위해 지난 40년 동안 세계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를 강화해 왔고,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부채로 미래를 저당 잡히며 유지하고 있다. 그 결과 임금, 연금, 사회 서비스의 삭감을 동반한 대규모 투기가 발생했고, 극소수의 부유층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지만, 다수 인류는 가난해지는 세상이 되었다. 이에 따라 세계 자본주의는 경제, 사회, 환경, 건강까지 모든 영역에서 엄청나게 복잡한 모순이 발생하고 있고, 이 체제는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다.
여기에 자본주의 생산이 지구에 초래한 환경 재앙까지 더해지고, 세계 경제 위기로 인해 점점 더 많은 국가가 붕괴하거나 이웃 국가를 공격하는 방향으로 돌아서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공급망의 지형 변화는 생활 수준에 대한 위협과 기후 변화로 인한 환경 재앙이라는 측면에서 전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원자재 확보 경쟁은 분쟁의 핵심인데, 원자재가 중요한 이유는 세계 지배를 위한 제국주의 패권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선택지가 바닥난 국제 자본가계급은 점점 더 일반화되는 제국주의 분쟁의 각본을 쓰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경쟁국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한다. 그 결과 제국주의 경쟁, 특히 세계 주요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 사이의 제국주의 경쟁이 격화하고 있다.
자본주의 전쟁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끔찍한 잔인함을 초래한다. 그러나 최종적인 '승자'에게는 시장 경쟁자를 제거하고 그들의 영토를 차지할 수 있다는 전망이 있으며, 이는 구조적 위기에 처한 현대 경제의 생산 요구에 유용하다. 이는 원자재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의미하며, 또한 이윤율을 높이려는 시도이며, 결과적으로 자본 자산과 가치의 파괴를 통해 축적 주기를 새롭게 시작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우크라이나에서 중동과 홍해, 콩고에서 수단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무력 분쟁이 증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세계 노동계급의 고통도 커지고 있다. 쇠퇴하는 자본주의가 인류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미래는 파괴와 죽음, 전례 없는 잔인한 야만으로 가득 찬 미래다.
우리는 세계대전의 근처에 와 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가자지구, 레바논 등에서 주민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은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 주변에 어떤 일이 닥칠지 미리 보여준다. 제국주의 전쟁은 전면전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순히 양측 군대 또는 두 국가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두 제국주의 이해관계 사이의 전쟁이다. 그리고 그 이해관계는 모든 지역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이다. 자본가계급이 '국가'를 위해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국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산수단과 국가를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들이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싸우고 희생당한다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 말이다.
‘민족주의’ 기치 아래 벌어지는 전쟁, 민족(해방) 투쟁의 성격
1914년 민족주의라는 바이러스는 1차 세계대전의 학살로 이어졌다. 심지어 대부분의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도 민족주의에 감염되어 전쟁에 반대하는 모든 결의를 포기했다. 이들 모두는 노동자들을 학살에 나서게 부추기고 파업권을 포기할 구실을 찾았다. 소수의 국제주의자만이 전쟁에 반대했고 그들 대부분은 지금의 우리처럼 조롱을 받았다. “제국주의 전쟁을 계급전쟁으로 전환하라”는 레닌의 요구가 전쟁 반대 투쟁을 사회주의 투쟁으로 만들겠다는 침머발트 좌파의 결의안에 반향을 일으키기까지 거의 1년이 걸렸다.
전쟁은 자본의 위기로 인해 발생한다. 자본가계급은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 그런데 그 전쟁은 지배계급의 이념에 종속된 노동계급이 벌이는 전쟁이기도 하다. 전쟁과 관련하여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노동계급을 이용하는 이념은 ‘민주주의’, ‘국가-민족’ 방어 또는 ‘국의 수호 등 다양하게 포장되어 있다. 지금 진행 중인 두 전쟁도 민족주의 기치 아래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노동자들이 착취자를 위해 죽고, 자기 계급의 이익을 잊도록 설득하는 대표적인 거짓 이념이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자본가계급의 민족투쟁이 진보적인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코뮤니스트들이 지지했지만, 자본주의 쇠퇴기에는 이러한 민족투쟁이 자국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들이 서로를 학살하는 광범위한 제국주의 투쟁의 일부가 되었다. 오늘날 민족투쟁은 노동계급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반(反)혁명적인 것이 되었다.
그런데 이른바 ‘좌파’ 세력, 특히 ‘혁명적’이고 ‘국제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세력 상당수는 ‘반(反)제국주의’ 또는 ‘차악(次惡)’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들에게 한쪽 또는 다른 쪽을 지지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그들은 ‘억압받는 이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논리로 노동자들에게 한쪽 편을 드는 전쟁 지지를 촉구한다. 그들은 억압받는 국가(민족)의 노동계급이 지배계급 사이의 전쟁에 총알받이로 동원되어, 자국 지배계급을 위해 싸우다가 희생당하는 것을, 해방을 위한 투쟁으로 왜곡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제국주의 시대에 '억압받는 국가'든 '억압 국가'든 특정 자본주의 세력이 반(反)제국주의의 한 축을 구성할 수 없다.
제국주의는 세계 체제이며, 자본주의 세계 운영의 한 단계이므로 모든 국가는 어떤 식으로든 이 체제에 참여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제국주의 체제에 참여하는 것은 동등하지 않다. 약소국은 강대국의 하위 파트너 또는 강대국 블록의 하위 구성원으로서 참여한다. 따라서 모든 국가가 제국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약소국의 경우 이러한 야망을 사실상 실현할 수 없다. 제국주의의 근간은 잉여가치를 지배적인 제국주의 열강에 이전하는 과정이며, 이러한 이전이 모든 국가에 혜택을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과정의 주요 수혜자이자 지배자는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미국과 유럽, 일본 등의 제국주의 강대국 자본이다. 여기서 주변국(군소 강대국)의 역할은 강대국의 하수인 역할이다. 이들의 역할은 주로 노동자들의 잉여가치가 이들을 착취하는 제국주의 강대국 자본으로 원활하게 이전되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속한 지역에서 자본의 지배가 위협받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지배하는 강대국의 지배력과 그로 인한 특권은 중국, 러시아, 인도, 브라질 등 신흥 강대국으로부터 항상 위협을 받지만, 신흥 강대국의 도전이 체제 전체의 작동 방식을 바꾸지는 않는다. 20세기에 보았듯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제국주의 주도권은 바뀌었지만, 세계 체제는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진정한 반(反)제국주의 투쟁은 자본주의 전복을 향한 계급전쟁
따라서 모든 국가가 자본주의 제국주의 체제에 참여하는 시대에 ’진정한 반(反)제국주의 투쟁은 체제 자체를 전복하는 투쟁뿐이다. 물론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투쟁은 자본주의 전복을 향한 국제적인 계급투쟁이다. 이른바 '좌파'가 그토록 사랑하는 '반(反)제국주의' 투쟁은 실제로는 제국주의 사이 투쟁이다. 그들의 실제 내용은 제국주의의 협력 속에서 한 국가의 지위를 바꾸는 것이다. 아프리카, 남미, 베트남의 유명한 해방 투쟁은 실제로 여러 국가의 지위를 미 제국주의의 고객에서 러시아 제국주의의 고객으로 바꾸기 위한 투쟁이었다. 최근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국가들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방향을 바꾸려는 노력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민족(해방)투쟁은 억압받는 민족 노동계급의 임무가 아니라 경쟁하는 제국주의 국가 사이에서 지속적인 분쟁의 한 구성요소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러한 투쟁은 어떤 경우에도 제국주의를 약화하지 않는데, 제국주의의 뿌리, 즉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공격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족투쟁이 제국주의 블록 하나를 약화하면, 그와 더불어 단지 다른 하나를 강화할 뿐이다. 따라서 제국주의 전쟁에서 한쪽 편을 들어 노동계급 운동이 발전한다거나 혁명적 국제주의의 부활에 이바지한다는 것은 명백한 거짓이다. 어떤 구실이나 명분으로도 전쟁에 참여해서 전쟁에 맞설 수는 없다. 반대로 국제주의자의 첫 번째 임무는 민족 자본가계급과 국제 제국주의의 수많은 촉수로부터 노동계급을 해방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와 전쟁을 거부하고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위한 혁명적 대안을 옹호해야 한다.
한국과 북한 정권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개입에 대해서도 노동계급은 양측 모두를 거부해야 한다. 북한군 파병설과 윤석열 정권의 살상 무기 지원과 관련해 한국과 북한의 노동계급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파병-무기 지원에 대한 정당성 여부가 아니라 양측의 정권이 개입하려는 전쟁의 본질과 노동계급의 희생이다.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모든 군사동맹은 무슨 명분이든 지배계급을 위한 동맹이다. 그것은 제국주의적 질서를 위한 동맹일 뿐이며,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원리이다.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제국주의 전쟁에서 어떠한 군사개입(파병, 무기 지원)도 반대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노동계급을 대규모로 살상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북한군이 파병된다면 유럽의 전장에서 총알받이가 되거나 우크라이나 노동계급 군인을 죽이는 역할을 할 것이며, 마찬가지로 한국의 대량 살상무기는 러시아 노동계급 군인과 민간인을 학살하는 데 사용된다. 그것은 결국 제국주의 전쟁의 확장과 한반도 전쟁 위기를 고조시켜 양측의 노동계급에 큰 고통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쇠퇴기에 전쟁은 삶의 방식이 되었다. 자본주의는 잔인함과 야만성을 더 많은 영역으로 확산할 뿐 인류의 미래를 제공할 수 없다. 전쟁을 일으킨 자들에게 전쟁을 멈추라고 요구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역사는 전쟁이라는 자본가계급의 살인 기계를 끝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노동계급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독일혁명의 위험 때문에 자본가계급이 휴전 협정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지배계급은 노동계급이 계급전쟁을 벌일 위험에 처할 때만 전쟁 중단을 고려할 뿐이다. 오늘날 세계 노동계급이 대대적인 계급투쟁을 즉시 벌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계급투쟁의 확산과 발전만이 그러한 미래를 만들 수 있다. 오직 노동계급만이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를 전복함으로써 제국주의적 긴장의 물질적 기반을 파괴하고 인류에게 영구적인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평화의 시대에는 과잉 착취당하고 전쟁의 시대에는 학살당하는 노동계급은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노동계급이 무언가를 위해 일하고 때때로 희생해야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우리 계급의 적(敵)인 자본가계급의 이익이 아닌 노동계급의 이익이어야 한다. 그것은 노동계급뿐만 아니라 인류의 미래와 지구 생태를 위한 이익이다. 자본주의는 오래전에 세계 인류 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발전시키는 진보적 역할을 중단했다. 이제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전복해야 한다. 지금 세상에 필요한 것은 임금 노동, 화폐, 국가가 없는 새로운 사회, 바로 코뮤니즘이다.
한국-북한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개입 반대!
자본가 정권 타도! 제국주의 전쟁 타도!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자본주의 전복을 향한 계급전쟁만이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다!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
2024년 11월 5일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NWBCW) 한국위원회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레닌과 레닌주의
“위대한 혁명가들이 살아 있는 동안, 억압하는 계급은 끊임없이 그들을 괴롭혔고, 가장 야만적인 악, 가장 격렬하게 증오하고 가장 파렴치한 거짓말과 비방 캠페인으로 그들의 이론을 받아 들였다. 그들의 죽음 이후, 그들을 해가 없는 상징으로 바꾸고, 말하자면 신성시하고, 억압받는 계급의 ‘위로’를 위해 그리고 후자를 속이기 위한 목적으로 그들의 이름을 어느 정도 거룩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혁명 이론의 실체를 빼앗고 혁명적인 예리함을 무디게 하고 저속하게 만든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노동운동 내 기회주의자들은 맑스주의에 대한 이러한 도용에 동의하고 있다. 그들은 이 이론의 혁명적 측면, 즉 혁명적 영혼을 생략하거나 모호하게 하거나 왜곡한다. 그들은 부르주아지가 수용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고 찬양한다.” (레닌, 「국가와 혁명」, 1917년)
레닌의 시신이 방부 처리되어 모스크바에 공개 전시된 지 100년이 지났는데, 이는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레닌의 진정한 공헌을 체계적으로 왜곡하는 것과 더불어 '붉은' 부르주아지의 기괴한 제스처였다. 시대가 변하면서 러시아는 더는 레닌을 '건국의 아버지'로 여기지 않고 제국 붕괴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묻고 있으며, 구(舊)동구권의 많은 국가에서는 '탈(脫)코뮤니즘화'의 목적으로 레닌 동상이 철거되고 있다. 따라서 레닌 서거 100주년은 큰 틀에서 보면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위기와 전쟁의 세계에서 '코뮤니즘' 사상은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 지난 수십 년 중 그 어느 때보다 인기가 높은 것 같다. 따라서 자본주의 너머 세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애매모호한 기념일은 '코뮤니즘'이 라는 개념과 함께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한 사람을 다시 돌아볼 기회이다.
레닌, 집단적 조직가
1870년 레닌은 오늘날 상류층 가정으로 묘사되는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Vladimir Ilyich Ulyanov)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노 출신이었지만, 대학에 진학하여 교사가 되었다. 어머니 역시 교사 자격을 갖추고 있었지만, 대부분 시간을 자녀를 양육하면서 보냈다.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그중 두 형제는 유아기에 사망했다. 자유주의적이고 보수적인 부모의 설득에도 자녀 중 다섯 명은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장남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Aleksandr Ulyanov)는 대학 재학 중 나로드나야 볼랴(Narodnaya Volya)에 가입했는데, 암살 음모 혐의로 체포되어 1887년 차르 당국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 사건이 레닌이 사회주의에 관심을 두게 된 직접적인 동기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후 2년 동안 지역 도서관을 뒤져 급진적인 서적을 찾다가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의 저작과 칼 맑스의 『자본』을 접하게 되었고, 곧 나로드냐와 맑스주의 연구 서클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은 제국 전역에 퍼져 있는 혁명 세포와 연구 서클이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었다. 레닌은 특히 게오르기 플레하노프(Georgi Plekhanov)와 베라 자술리치(Vera Zasulich) 등이 주도한 '노동해방' 그룹의 맑스주의 사상에 매료되었다. 그는 1895년 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투쟁 연맹을 설립했고, 곧 체포되었다.
감옥과 망명지에서 그는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나로드닉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 경제 문제를 연구했다(사회주의혁명당(SR)이 창당된 이후에도 계속 유지됨). 레닌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 러시아에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존재한다.
• 더 많은 수의 농민이 아닌 노동계급이 미래의 혁명에서 주도 세력이 될 것이다.
• 이 혁명은 사회주의(계급제 파괴를 목표로 한 자본가계급과의 투쟁)와 민주주의(정치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절대주의와 투쟁) 과제를 모두 결합하게 될 것이다.
•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던 혁명가들은 이후 과제에 맞서기 위해 하나의 통합된 정당으로 뭉쳐야 했다.
사회주의 운동 통일을 레닌 홀로 추진한 것은 아니었으며,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 제1차 대회가 민스크에서 열렸다. 그러나 경찰의 탄압과 내부 다툼으로 인해 새로운 RSDLP는 주로 이름만 존재했다. 레닌의 수정주의와 경제주의에 대한 비난, 이스크라를 중앙당 기관지로 만들려는 시도, 1902년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판은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당시 레닌은 러시아에서 부상하는 계급 운동에 개입할 수 있는 정치적, 조직적 일관성을 갖춘 당을 건설하기 위해 직업 혁명가들로 구성된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조직을 주장했다. 이러한 당을 만들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레닌은 동맹 중 일부와 결별하게 되었고, 1903년 제2차 RSDLP 대회에서는 당원을 구성하는 요소에 대한 사소한 정의 차이로 인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라는 두 당파가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1905년 혁명에서 드러난 실질적인 정치적 차이가 있었다.
레닌, 혁명적 국제주의자
1905년 사건은 정교회 사제에서 경찰 스파이로 변신한 가퐁 신부가 이끄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평화 시위가 차르에게 탄원서를 제출하려는 의도로 별다른 생각 없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소총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 학살 사건은 러시아 제국 전역 대중의 분노를 일으켜 시위, 파업, 봉기, 그리고 노동자 평의회(소비에트)의 창설을 촉발했다. 1905년은 노동계급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조직에 불을 지피는 시기였다.
레닌은 1905년 혁명이 발발했을 때 망명 중이었지만, 1789년, 1848년, 1871년 혁명을 연구하며 통찰력을 얻기 위해 사건을 면밀히 추적했다. 그는 러시아 제국의 거리와 공장에서 볼셰비키 동지들에게 파업을 연장하고, 노동자들이 무장할 것을, 그리고 군인들이 정부에 대항할 것을 촉구했다. 차르가 두마(의회)의 설립과 언론 및 결사의 자유를 약속하는 10월 선언을 선포한 후 레닌은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는 이제 당이 새롭게 부상하는 노동계급 요소에 개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민주적 중앙집권주의를 기반으로 당을 변화시키기 위해 싸웠으며, 모든 상급 기관이 선거를 통해 선출되고 책임을 지며 소환될 수 있도록 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같은 당이었지만, 두마 선거를 통해 분열의 깊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가 봉기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 수립을 요구했지만, 플레하노프와 파벨 악셀로드 같은 멘셰비키 지도자들은 바로 이때 입헌민주당이나 카데트(Kadets)와 같은 부르주아지의 진보적 요소와 의회 연정을 제안하고 있었다.
이 혁명적 열기의 시기에 볼셰비키는 역동적인 조직이 되었고, 1907년에는 4만 명이 넘는 당원을 확보했으며, 그중 대다수가 노동자였다. 레닌은 1902년 악명 높은 팸플릿에서 공식화한 전술이 정치적, 조직적 일관성의 토대를 마련했지만, 이제는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이야기했다. 차르가 모든 자유주의 개혁을 되돌리면서 촉발된 반(反)혁명 시기는 새로운 문제도 생겨났다. 많은 사람이 체포되어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의 세력이 약화하면서 분파주의가 더욱 심해졌다. 레닌은 다시 망명길에 올랐고, 그곳에서 당 조직(악셀로드와 멘셰비키 청산파 반대), 맑스주의 정통성(알렉산더 보그다노프와 볼셰비키 사이에서 맑스주의 영향력 반대), 민족의 자결권(폴란드, 독일, 러시아 당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그녀의 추종자 반대) 논쟁에 참여하게 된다.
러시아에서 점진적으로 부활하던 노동계급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혼란에 빠졌다. 레닌의 관심은 이제 국제무대로 옮겨져 제2 인터내셔널 붕괴와 배신의 원인을 파악하고 자본주의 제국주의 본질을 설명하고자 했다. 침머발트와 키엔탈에서 열린 회의에서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국제주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고, 혁명가들이 제3 인터내셔널로 재결집할 수 있도록 투쟁했다. 2월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러시아로 돌아와 자신의 관점을 확신하게 되었다.
레닌은 러시아 제국 전역에서 다시 생겨나고 있는 소비에트가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을 가능하게 하고, 더 발전된 서구 혁명과 연대함으로써 사회주의를 의제로 삼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봉기해야 한다는 그의 요구는 처음에는 당내 일부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볼셰비키 대중은 이를 열렬히 받아들였다. 볼셰비키는 당원 수가 급증하여 당시 약 20만 명으로 늘어났고, '소비에트에 모든 권력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점차 운동 내 주요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 10월 혁명의 발발은 전 세계에 혁명의 물결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레닌, 정부의 수반
소란스러운 절차 끝에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회의」는 권력 이양을 승인하고 새로운 중앙집행위원회(VTsIK)를 선출했으며, 중앙 집행위원회에 인민위원회(소브나르콤)를 구성하는 임무를 맡겼다. 레닌은 이 새로운 기구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볼셰비키는 러시아 코뮤니스트 당으로 재조직하고 제3 인터내셔널 창당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10월 이후 6개월 동안 소비에트 원칙은 러시아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노동자와 농민은 착취와 억압의 체제를 뒤집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례인 파리 코뮌은 72일 동안만 지속하다가 잔인하게 진압되었기 때문에 본받아야 할 청사진이 없었다. 그러나 초기의 혁명적 열정이 객관적 현실을 감출 수 없었다. 노동자들이 물려받은 러시아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수년간의 전쟁과 혁명으로 경제는 엉망이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혁명이 실패하게 되면서 제국주의의 개입이 가시화되고 있었다.
1918년 3월에 체결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은 중요한 최초의 후퇴였다. 레닌은 페트로그라드 진격을 불과 몇 주 앞둔 독일군의 진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이 결정은 당내에서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소비에트 권력을 지지하는 좌파 사회혁명당(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소비에트 권력이 채택된 후에야 모당과 분열했다)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좌파 사회혁명당은 소브나르콤에서 철수하고 독일과의 전쟁 재개를 목표로 봉기를 일으켰다. 레닌의 팸플릿 「소비에트 정부의 당면 과제」는 다음과 같이 사고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러한 끔찍한 상황에 직면하여 이제 "움직이고, 후퇴하고, 기다리고, 천천히 건설하고, 무자비하게 닦달하고, 엄격하게 규율하고, 느슨함을 분쇄"하는 것이 과제로 떠올랐다. 1918년 8월, 레닌은 공장 대회에서 연설한 후 최근 해산된 제헌의회 지지자가 쏜 총에 맞았다. 레닌이 거의 죽을 뻔한 상황에서 소브나르콤은 '백색 테러'와 '적색 테러'에 맞서기로 했다.
독일과의 평화조약으로 인해 러시아혁명의 고립이 다른 곳의 혁명으로 해소될 때까지 '숨통'을 틔워줄 것이라는 희망은 얼마 가지 못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 북부에 대한 연합군의 개입, 콜차크(Kolchak), 랑겔(Wrangel), 데니킨(Denikin)의 백군 정복은 모두 길고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이어졌다. 1920년까지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주요 내부 위협이 패배하면서 새로운 '평화 건설'에 대한 희망이 잠시 생겨났지만,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공세로 인해 또 다른 전쟁이 발발했다. 이 시기에 소비에트 러시아는 전직 차르 관리들이 이끄는 징집병으로 적군을 구성하고, 체카가 경쟁자 정치 세력을 탄압하고, 산업계에 1인 경영을 도입했으며, 농촌에 곡물 징수를 시행하는 등 포위망을 구축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한편 새로운 제3 인터내셔널은 러시아 외교의 이해관계에 의해 점점 더 지배되고 있었다. 러시아 밖에서 혁명이 실패하자 서방에서는 사회민주주의에, 동방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에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당 내부에서는 당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다양한 반대파가 등장했다(『코뮌주의자』, 민주적 중앙주의 그룹, 군부 반대파, 노동자 반대파, 노동자 그룹). 이에 대해 레닌은 혁명가는 전진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후퇴하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들의 제안 중 일부를 수용하려 했지만, 이러한 그룹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당 지도부의 일부 과잉 행동(보기: 노동의 군사화에 대한 트로츠키, 그루지야에 대한 스탈린)에도 반대했다. 결국, 엄청난 역경을 딛고 소비에트 러시아의 존립은 보장되었지만, 소비에트 성격을 점진적으로 상실하는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전쟁과 억압 상황은 노동자들의 민주주의를 약화했다. 지역 소비에트는 회의를 열지 않았고, 회의를 연다 해도 주로 위에서 내려온 결정에 고무도장을 찍는 수준이었다. 소브나르콤은 소비에트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기관이 아니라 소비에트 위에 군림하는 권력이 되었다. 1921년 크론슈타트 봉기는 이러한 부분의 증가로 인해 나타난 하나의 징후였다. 이 비극적인 진압 이후 레닌은 또 다른 필수적 후퇴로 간주하는 신경제정책(NEP)을 도입했다. 전쟁 경제를 시장에 개방하는 것은 수년간의 혼란으로 인한 경제적 혼란을 해결하고 노동계급 기반을 재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레닌의 마지막 저서에는 혁명의 진전 부족과 혁명이 만들어낸 제도의 부적절함에 대한 실망감이 담겨 있다. 그는 관료주의의 부패에 대한 대안으로 더 많은 노동자를 체제 운영에 참여시키기 위해 다양한 행정 개혁을 제안했다. 하지만 1922년 뇌졸중으로 두 차례 쓰러진 레닌은 전신이 마비되었다. 레닌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던 국가 기관의 가택 연금에 가까운 강도 높은 감시 아래서 그는 비서에게 유언을 남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923년 3월 세 번째 뇌졸중으로 활발한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1924년 1월 21일 혼수상태에 빠져 세상을 떠났다.
레닌주의
여기에 요약된 레닌의 전기는 혁명의 물결에 올라탔지만, 혁명이 무너지면서 함께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복잡한 그림을 그려낸다. 그가 어떻게 쓰러졌는지, 그리고 개인으로서 어떻게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는지는 러시아혁명이 관심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한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하다. 레닌이 사망할 무렵 소비에트 권력이 당 국가로 전환된 후, 누가 당을 이끌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전에는 '레닌주의'라는 용어가 구어체로 사용되었다면, 이제 스탈린의 『레닌주의의 기초』(1924)와 지노비예프의 『레닌주의 연구 입문』(1925) 같은 팸플릿에서 경쟁적으로 해석이 등장하면서 공식 이데올로기로 만들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미 1923년 3월에는 당 안팎에서 '레닌주의'를 홍보하기 위해 카메네프가 이끄는 레닌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스탈린-지노비예프-카메네프 3인방은 이른바 '레닌 레비'를 통해 트로츠키에 대항하는 분파 투쟁에서 조종하기 쉬운 약 50만 명의 경험이 부족한 당원들을 당에 대거 끌어들였다. 1924년 레닌이 완전히 불참하게 되는 첫 번째 대회인 제3 인터내셔널 제5차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우익의 위험"과 "극좌의 일탈"에 맞서 "맑스-레닌주의"의 정신으로 제3 인터내셔널의 "볼셰비키화"를 요구했다. 트로츠키, 룩셈부르크, 아마데오 보르디가, 헤르만 호르터, 안톤 판네쿡과 같은 인물에 대해 「코뮤니스트당의 볼셰비키 화에 관한 테제」(1925)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정치 지도자들이 레닌주의에 가까울수록 레닌주의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에서 그들의 견해는 더 위험하다." 1926년 모스크바에 레닌 학교가 설립되어 전 세계의 당 간부들에게 '볼셰비키화' 기술을 가르쳤다.
"볼셰비키화는 ... 맑스-레닌주의(즉, 제국주의 시대와 프롤레타리아혁명 시대 맑스주의)가 마침내 이념적으로 승리했음을 의미한다 ... 레닌의 죽음은 러시아코뮤니스트당에서 그랬던 것처럼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모든 부문에서 맑스-레닌주의 이론의 선전에 큰 자극을 주어야 한다." (1924년 7월, '코민테른과 지부의 선전 활동에 관한 제5차 코민테른 대회 테제')
모스크바의 책략과 추방을 통해 제3 인터내셔널 정당들은 모스크바의 충실한 대변인으로 변모했다. 1928년 스탈린은 권력 투쟁에서 우위를 점했고, 5개년 계획 도입과 함께 그의 '일국 사회주의' 이론이 국가 정책이 되었다. 그는 1930년대 대숙청을 통해 자신의 정적과 옛 동맹들까지 물리적으로 제거하며 쿠데타를 성공시켰고, 그 중에는 옛 볼셰비키도 많았다. '맑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는 선전과 군사력을 통해 전 세계로 수출되었고, 특히 국가 통제, 집단화, 산업화가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는 저개발 지역(주로 중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 모스크바 지배계급은 공식적으로 '탈 스탈린화'와 '레닌주의로의 회귀'를 통해 면죄부를 받으려 했지만, 중국과 알바니아 같은 곳에서는 이를 '수정주의'라고 비난했다. 어느 쪽이든, 동서양에서 공식적으로, 그 이후로 다양한 '인민 공화국'과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가 어떤 식으로든 레닌의 유산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러한 해석은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스탈린주의자와 마오주의자뿐만 아니라 많은 아나키스트와 평의회주의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요소다.
그러나 레닌의 러시아와 스탈린의 러시아를 항상 구별하는 경향이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추방된 트로츠키와 그의 추종자들이지만, 이들은 스탈린주의에서 테르미도르주의적 반동만 보았을 뿐 반(反)혁명은 보지 못했다. 덜 알려졌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의 선배들이다.
우리의 '레닌주의'와 그들의 레닌주의
우리의 경향은 종종 너무 '레닌주의적'이거나 충분히 '레닌주의적이지 않다'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오늘날 우리는 명확성보다는 혼란을 일으키는 이 딱지를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다. 혁명이 고립된 상황에서 레닌이 옹호한 타협은 레닌을 비방하는 자들과 그의 선배들이 '레닌주의'라는 이름으로 가장 간절히 호소하는 타협이다. 후자는 타협이 객관적 현실에 의해 강제될 수 있다는 사실과 타협을 출발점으로 삼는 정치 강령을 혼동한다.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나고 북부 이탈리아의 공장에서 계급투쟁이 되살아나던 시기에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을 설립한 우리 선배들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다르게 보았다.
"우리를 가장 매료시키고 우리의 사고를 자극하는 중요한 인물인 레닌은, 전술가 레닌이 아니라,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이끌면서 다가올 새로운 혁명적 물결에 대한 기대 속에서 사나운 적인 부르주아 세계의 함정 사이를 능숙하게 움직였던 전술가 레닌이다. 또한, 러시아에서 여전히 살아남은 자본주의 세력과의 타협, 즉 그가 항상 고통스러운 후퇴, 혁명의 행진에서 중단을 고려했던 기발하고 매우 위험한 편법인 신경제(NEP)의 레닌도 아니다. 레닌, 우리의 레닌, 오늘날의 레닌은 4월 테제와 10월 봉기의 레닌이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그를 기억하고 싶은 것은 이론가, 정치가, 지도자로서 그의 삶에서 바로 이 순간이다." (레닌 오기(Lenin Oggi), 프로메테오(Prometeo), 1944년 2월 1일)
"우리" 레닌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것은 또한 그의 경험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토대를 구축하는 요점을 보여준다.
• 당: 레닌은 계급투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정치 조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볼셰비키는 종종 동질적이고 독단적인 정당으로 묘사해 왔지만, 이렇게 묘사된 당은 스탈린주의 신화다. 볼셰비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 상황에 항상 대응하며 발전하였다.
• 소비에트: 이미 1905년에 레닌은 당과 소비에트가 다가오는 혁명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1917년에 이 개념을 더 발전시켰다. 레닌은 최선을 다해 소비에트를 "노동자 국가"로 만든 것이 이러한 소비에트 권력의 존재라는 것을 이해했다.
• 국제주의: 레닌은 사회주의 혁명의 국제적 의미를 이해하고, 노동자 운동 내에서 쇼비니즘, 민족주의, 사회애국주의 경향에 대항했다. 그는 자본주의가 새로운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사회주의를 위한 혁명적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제국주의 전쟁에 대항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레닌은 영향력 있는 당 지도자가 되었지만, 결국 다른 사람들처럼 당의 일원이었다. 그는 비판에 직면했고, 때때로 자신이 소수임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1906년 볼셰비키에 가입한 젊은 투사 가브릴 미아스니코프(Gavril Miasnikov)는 창당부터 1921년까지 당 활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볼셰비키는 비판과 반(反)비판,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든 우상을 타도하라! 대회, 회의, 지방 또는 중앙위원회에서 비판을 허용했다. 오히려! 볼셰비키는 소수가 당 기구에 대항하여 글을 출판할 수 있는 포괄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보호할 용기가 있었다. 따라서 모든 허풍, 모든 가십과 모든 추문에서 벗어나고 분명히 하기 위해 그것을 신념을 견지하는 투쟁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배치하기 위해 투쟁을 강화하려고 했다. … 1905년과 1917년 사이에, 볼셰비키의 이러한 관행은 혹독한 세 번의 혁명 과정을 통과했다. 당의 내부 구조는 혁명에서 살아남은 세력에 제대로 계승되었고, 이것은 세계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승리로 이어졌다.” (미아스니코프, 1930년 최근의 속임수)
10월 혁명의 전제는 언제나 러시아 국경 밖에서 혁명을 비교적 빨리 확대하는 것이었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혁명 요새는 아래에서 보여주듯이 다른 곳의 노동계급에 영감을 주는 것 이상의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소비에트 권력은 관료제, 경찰, 정규 군대가 없는 새로운 유형의 국가다. ... 러시아에서는 거의 시작하지 않았고 잘못 시작되었다. ... 우리는 유럽 노동자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어떻게 지향하는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보여줘야 하며, 이를 통해 유럽 노동자들은 사회주의를 어떻게 달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러시아인들이 가치 있는 일을 시작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해야 하며, 러시아가 잘못하고 있다면 우리 유럽은 더 잘해야 한다. ... 우리는 유럽 노동자들이 그 길에 들어서면 그들을 도울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들은 우리가 하는 일을 하되 더 잘할 것이고, 무게 중심은 형식적인 관점에서 구체적인 조건으로 옮겨갈 것이다." (레닌, 1918년 3월 8일, 강령 검토 및 당명 변경에 관한 보고서)
러시아혁명의 비극은 이러한 도움이 절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코뮤니스트당, 제3 인터내셔널 그리고 소비에트 러시아는 스스로 점점 더 비상시적이고 임시방편적 성격의 정책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는 진정한 혁명 정당이 가능한 역사의 한계 내에서 기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기적을 이루어 낼 수는 없다. 세계대전으로 지친, 제국주의에 목이 졸리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에 배신당한, 고립된 땅에서 모범적이고 흠잡을 데 없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은 기적이 될 것이다. … 그런 점에서 그들의 혁명은 정치권력 정복과 사회주의 실현이라는 문제를 실질적으로 실행하면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선두에서 행진하고 끊임없이 역사적으로 공헌하였으며, 세계 전체 자본과 노동 사이의 균형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 러시아에서는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모든 곳의 미래는 "볼셰비즘"을 비껴갈 수 없다.” (룩셈부르크, 1918년 러시아혁명)
혁명 과정 퇴보의 씨앗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 1918년 3월까지 볼셰비키는 소브나르콤에서 대표되는 유일한 정당이었고, 그 다음 몇 년 동안 지역 소비에트가 공동화했지만, (때로는 선거의 게리맨더링을 통해) VTSIK에 대한 점점 더 많은 지배력을 확보했다. 사실상, 볼셰비키는 유일한 통치 정당이 되었고 점점 더 당과 국가의 구별이 사라졌다. 1922년에 레닌은 당 기구가 정부 기구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지만, 그가 제안한 개선책은 결국 실현되지 않았고 너무 늦었다. 단지 소비에트 권력 부활만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지만, 그것은 혁명 물결의 부활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정당화가 고안되었다(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계급 전체가 아니라 그 전위, 즉 당에 의해서만 행사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트로츠키는 그 후에 소비에트를 '노동자 국가'로 만든 것은 국유화된 재산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편, 내전 기간 정당 민주주의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지만, 1921년 3월 분파 금지령이 도입되었다고 해서 분파가 즉시 소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후 몇 년 동안 정치국과 당 사무국은 스스로 권력이 되어 당 대회와 중앙위원회의 권위를 약화했다. 이에 따라 권력은 본질적으로 스탈린과 그 분파의 손에 집중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미래의 인터내셔널은 기다리는 정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투쟁 과정에서 노동자평의회와 같은 집단적 권력기관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전체 노동계급이다. 인터내셔널은 더 광범위한 운동 지침이 되어야 하며, 이와 같은 의미에서 집단적 권력기관 내에서 목소리를 내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볼셰비키처럼 그 기관을 대신하거나 그 안에 녹아들 수는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 운명을 혁명적 보루에 묶어두는 것을 의미하며, 혁명적 보루가 자본주의 세력에 굴복하게 되면 세계 혁명운동의 구심점이 되는 것을 멈추게 된다.
오늘날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또 다른 논쟁은 레닌이 민족 자결권을 옹호했다는 이야기다. 이는 종종 추상적으로 민족 자결권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민족 자결권이 반동적 목적에 부합한다고 판단하면 반대했으며,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억압 민족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피억압 민족이 분리 독립권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에 대한 평등권과 국제 노동계급 연대의 인정은 사실상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한 위선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피억압 민족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피억압 민족 노동자와 억압 민족 노동자의 단결과 통합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자국 부르주아지의 동맹자가 될 것이다." (레닌,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와 민족의 자결권』, 1915)
두 번째 조건은 이른바 많은 '레닌주의자'들이 종종 잊어버리는데, 이들은 타락한 제3 인터내셔널의 '통일 전선'과 '인민 전선' 개념을 받아들여 민족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본다. 우리는 레닌 시대부터 모든 민족 전쟁이 제국주의 경쟁과 필연적으로 얽혀 있다는 것을 보아왔다. 레닌이 제국주의 시대에도 민족 전쟁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민족 전쟁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면, 자본주의 발전은 룩셈부르크와 그의 동지들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자유로운 제국주의 시대에는 더는 민족 전쟁이 있을 수 없다. 국익은 노동 대중을 속여 그들의 숙적인 제국주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작용할 뿐이다. ... 지배계급이 강대국들의 부속물이자 부속품에 불과한, 약소국들은 강대국들이 벌이는 제국주의 게임에서 졸에 불과하다. 그들도 노동 대중과 마찬가지로 전쟁 중에 도구로 악용되고 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자본주의 이익에 제물로 바쳐질 것이다." (룩셈부르크, 양자택일, 1916)
우리가 항상 반복하듯이, 러시아혁명은 모방할 모델이 아니라 배워야 할 하나의 교훈이다. 혁명이 결국 탄생시킨 당 국가는 오늘날까지 노동계급 운동이 회복하지 못한 유산을 남겼다. 그리고 반(反)혁명에 직면하여 레닌을 포함하여 혁명에 참여한 사람 중 그 진정성을 온전히 지켜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윤의 이해관계로 병든 지구에서 또다시 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 레닌이 오늘날 남긴 최고의 유산은 그가 러시아 밖의 노동자와 혁명가들에 바랬던 바와 같이 미래 세대가 "더 잘 해 내는" 것이다.
다이즈바스(Dyjbas)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2023년 12월
<출처> 「혁명적 전망」 23호, 2024년 1월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4-01-21/lenin-and-leninism
‘선택적(파트타임) 국제주의’에 대한 간략한 비판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또는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백 건의 군사 분쟁(1) 등 현재 제국주의가 초래하고 있는 공포는 국제 노동계급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지금 우리는 일반화된 전쟁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 현재의 심각한 상황은 진정한 국제주의자들의 단결을 촉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진정으로 국제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에게 질문한다.
이전 글에서 우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자본의 좌파 대응이 "제국주의 전선(나토 또는 러시아) 중 어느 한쪽을 노골적으로 지지하거나 같은 입장을 숨긴 가짜 평화주의"라고 비판했다.(2) 우리는 그러한 입장이 전쟁 없는 세상,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노동계급을 멀어지게 하는 데만 기여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우리가 자세히 다루지 않은 것은 트로츠키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진영에서 표면적으로 국제주의적 입장을 제시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이다. '혁명적 패전주의' 또는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라는 구호를 내세운 국제맑스주의경향(IMT)(3), 사회주의노동자당(SWP)(4), 그리스코뮤니스트당(KKE)(5), 진보노동당(PLP)(6) 등이 포함된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이 단체들은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제국주의 사이 전쟁이며, 따라서 자본주의 한쪽을 지지해서는 안 되고, 사회주의를 위한 노동계급 투쟁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인식한다. 여기까진 괜찮다. 이것은 침머발트 좌파와 10월혁명의 모든 혁명가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준점으로 삼고 있는 척도이다. 트로츠키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그룹은 반(反)혁명 산물임에도 계속해서 그 유산을 고수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 다른 분쟁에 대한 같은 그룹의 반응을 살펴보면 상황은 더 암담하다. 그리스코뮤니스트당(KKE)은 팔레스타인 투쟁 목표를 "외국의 이스라엘 점령을 몰아내고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는 것"으로만 보고 있으며, 심지어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제국주의 분쟁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며 일반화된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7) 한편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하마스에 대해 노골적으로 지지를 표명했는데, 이는 "사회주의적 입장을 채택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 것이 아니라 '친제국주의 붕괴로' 나아간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8) 둘 다 우리가 "선택적 국제주의"(9)라고 부를 수 있는, 즉 어떤 분쟁이 제국주의이고 어떤 분쟁에서 자본주의 세력 편을 드는 것이 허용되는지를 취사선택하는 노골적인 사례다.
적어도 중동에 관해서는 국제맑스주의경향(IMT)이 좀 더 일관된 모습을 보인다. IMT는 "두 국가 해법에 대한 지지, 팔레스타인에 대한 사회주의 계획 부재"를 이유로 KKE를 비판하는 대신 "팔레스타인 대중의 투쟁은 이 지역의 모든 반동적 자본주의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혁명적 투쟁으로만 성공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10) 그러나 IMT도 비슷한 혼란을 겪고 있다. 베네수엘라에 대해 IMT는 차베스를 "진정한 국제주의자"이자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칭송했다.(11) 물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는 러시아의 중요한 군사적, 경제적 동맹국이었으며 이란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는 오늘날 IMT가 제국주의 국가로 비난하는 것과 같은 러시아이고, IMT가 '전체주의'로 간주하는 것과 같은 그 이란 정권이다. 차베스가 '형제'인 푸틴과 아마디네자드(Ahmadinejad)에 아부했을 때 그는 '진정한 국제주의자'였을까?, 아니면 차베스가 국영 TV에서 앨런 우즈의 말을 인용한 것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의 다른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까?
진보노동당(PLP)은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례다. PLP는 자본주의를 종식하기 위한 민족해방 투쟁의 실패로 인해 이전의 입장을 재고하게 되었다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20세기 내내 반(反)식민지 투쟁은 정착민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서 민족을 해방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 전략은 자본주의와 착취를 종식하는 데 실패했다. PLP는 이러한 많은 투쟁을 지켜보고 참여했지만, 이 전투에서 얻은 이익이 역전되는 것을 목격했다.”(12)
드물게 인정하는 경우다. 그러나 이것이 스탈린주의와 마오주의 과거와의 단절로 해석할 수는 없다. PLP는 현재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 반(反)제국주의 축이 없다고 보지만, 소련(1950년대까지)과 중국(1970년대까지)은 여전히 이러한 축을 구성했다고 간주한다(중국코뮤니스트당에 따르면 소련과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문제 핵심은 국제주의 문제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회주의를 돈, 국경, 계급, 국가가 없는 전 세계적으로 자유롭게 연합하는 코뮤니즘과 동의어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소련(혁명 물결의 확산 실패로 탄생한 국가자본주의 체제)과 중국(애초에 노동계급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이 기존 강대국의 제국주의 경쟁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반(反)혁명의 유산
이러한 사례가 전부는 아니지만, 자본의 좌파 우여곡절을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된다. 트로츠키주의자든, 스탈린주의자든, 마오주의자든 이 모든 그룹은 타락한 제3 인터내셔널에서 물려받은 일련의 전술적 편법을 받아들인다. 사회민주주의 정당 입당, 좌파 정부 참여 또는 지지, 소련이나 중국이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적'이라는 믿음, 통일 전선 또는 인민 전선 옹호, 또는 단순히 민족해방에 대한 지지 등을 통해 '선택적 국제주의'에 도달하든 도달하지 않든, 다음 질문에 대해 그들은 항상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제국주의 시대에 '피억압국'이든 '억압국'이든 특정 자본주의 세력이 반(反)제국주의의 한 축을 구성할 수 있을까?
우리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이 질문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레닌은 제국주의 시대에도 민족해방 전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물론 제국주의 전쟁으로 변질할 수 있다는 점도 이해했다). 제3 인터내셔널은 터키와 중국 같은 곳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민족해방 투쟁을 지원했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 세력(국가 또는 비국가) 사이의 모든 갈등이 레닌 시대보다 훨씬 더 발전한 제국주의 체제에 얽혀 있음을 알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단체들의 표면상 국제주의 입장이 일시적인 정치적 편의주의이든(상황이 바뀌면 버려질), 진정으로 새로운 방향이든, 자본의 좌파 조직은 오래전에 루비콘강을 건넜다. 그들은 과거의 교훈을 배우지 못했고, 결국 그들이 모집한 노동자와 자신을 자본주의 사각지대로 이끌 수 있는 공식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
전쟁으로 향하는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군사적 충돌이 고립된 현상이 아니라는 인식 아래,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ICT)은 다양한 경향의 진정한 국제주의자들과 함께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 위원회를 부활시키는 데 기여했다.(13) 아래 다섯 가지 사항은 공동 활동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 자본주의, 제국주의 및 모든 민족주의에 반대한다. 어떤 국가 자본, '덜 악한' 국가, 국가가 형성되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다.
• 국가, 임금 노동, 사유 재산, 화폐, 이윤을 위한 생산이 자유롭게 연합한 생산자들의 세계로 대체되는 사회를 지향한다.
• 현재 전쟁과 앞으로 일어날 전쟁이 노동계급에 가할 경제적, 정치적 공격에 맞서기 위해.
• 노동계급의 자기 조직화한 투쟁, 독립적인 파업 위원회, 대중 집회, 노동자 평의회의 결성을 위해.
• 억압과 착취에 반대하고, 노동계급 단결과 진정한 국제주의자들의 단결을 위해.
장기간의 어려운 작업이지만, '선택적 국제주의'가 아닌 일관되고 명확한 국제주의 메시지를 이미 벌어지고 있는 계급투쟁과 앞으로 벌어질 투쟁에 전파해야 한다.
다이즈바스(Dyjbas)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2024년 1월 22일
<주>
(1) https://geneva-academy.ch/galleries/today-s-armed-conflicts
(2)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3-07-05/the-no-war-but-the-class-war-initiative
(3) https://socialistrevolution.org/no-war-but-the-class-war/
(4) https://socialistworker.co.uk/features/ukraine-year-one-of-a-terrifying-imperialist-war/
(5) https://inter.kke.gr/en/articles/No-to-imperialist-war-Greeces-involvement-must-stop/
(6) plp.org
(8) https://socialistworker.co.uk/features/free-palestine-why-we-say-by-any-means-necessary/
(9) 이탈리아의 동지들이 SI 코바스 기지노조 내에서 나온 팔레스타인 관련 성명을 비판할 때 사용한 용어를 빌려온 것이다.
(11) https://www.marxist.com/a-tribute-to-hugo-chavez.htm
(12) plp.org
(13)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3-07-05/the-no-war-but-the-class-war-initiative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4-01-24/a-brief-critique-of-part-time-internationalism
아마데오 보르디가의 옥중 선언
소개
아마데오 보르디가가 1923년 대부분(2월 3일~10월 26일)을 로마에 있는 감옥에서 자신과 30여 명의 동료 피고인들의 변론을 준비하는 한편, 창립 2년밖에 안 된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이 직면한 위기에 대한 정치적 선언을 작성하고 전체 당원들이 토론했다는 사실은 이른바 '코뮤니스트좌파' 진영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보르디가의 체포 이후 당원에 대한 체포와 탄압이 잇따르면서1) 조직이 약화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는 보르디가가 우려했던 위기가 아니었다. 그가 선언문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더 심각한 위기는 이탈리아 당의 ‘원칙적인 전체의 틀’과 그가 정중하게 ‘인터내셔널과 그 집행 조직의 다수파’라고 부르는 러시아 코뮤니스트당, 즉 점점 더 반(反)혁명적인 소련의 외교 정책이라는 목표를 위해 구성 정당들을 관료적인 '예스맨'으로 만들려는 인터내셔널 내에서 권위적 입장을 꾸준히 행사하고 있는 러시아 코뮤니스트당 사이에 균열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것은 100년이 지난 후에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당시 보르디가는 1921년 1월 이탈리아당이 사회민주주의에서 이탈한 이후 인터내셔널이 채택한 전술과 이탈리아당이 채택한 정치적 틀과 정책 사이에 불협화음이 커지고 있는 것에 대해 인터내셔널과 이탈리아당 내부에서 완전히 공개적인 토론을 요구했을 뿐이다.
논쟁의 주요 쟁점은 a) 리보르노 분할이 너무 좌파에 치우쳤다는 모스크바의 원래 불만과 이탈리아 사회당(PSI) '다수파'와의 융합을 통해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b) 1922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인터내셔널 집행부가 처음으로 공식화했고 보르디가가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즉, 코뮤니스트가 다른 정당과의 정치적 거래로 정책을 타협할 수 있는 기초가 아니라 집단적 노동자 행동을 위한)으로 이해하기로 한 '통일전선' 정책을 해석하는 방법. c) 이로부터 전쟁 직후 피우메(Fiume)를 점령했던 다눈치오(d'Annunzio)의 전(前)파시스트 부대를 모방한 반(反)파시스트 저항투사 인민군대(Arditi del Popolo)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d) 보르디가가 주로 초안을 작성하고 제2차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 대회에서 다수결로 승인한 로마 테제를 코민테른 집행부가 단지 권고문으로 축소했다.2)
이러한 문제 중 그 어느 것도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에서 보르디가의 입지를 심각하게 훼손하지 않았으며, 비록 인터내셔널의 나머지 이탈리아 대표들이 제4차 세계대회(1922년 11월/12월)에서 PSI와 원칙적으로 융합하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설득'되었음에도 그 자신이 당 지도부에서 사임하겠다고 위협했지만, 아무도 그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다. 1922년 10월, 투라티(Turati)의 개혁파가 국제코뮤니스트당 대회에서 축출되자 러시아가 원하던 정치적 융합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이 정책은 코민테른 의장 지노비예프(Zinoviev)가 추진하였으며, 그는 이 정책을 통해 투라티 당에 대항하는 통일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보르디가를 제외한 '융합'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가 하던 지도부 역할은 지난 6월 '이탈리아 문제'에 관한 확대집행위원회(ECCI) 회의 이후 러시아에 머물고 있던 그람시가 대신하게 되었다.
1923년 4월 이탈리아 사회당(PSI) 총회에서 그 정책을 부결시켰다.3) 어느 정도 상설화된 인터내셔널의 확대집행위원회(ECCI) 회의에서 통일전선을 준수하도록 러시아에서 끊임없이 괴롭혔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책략에 대한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의 정치적 탄력성에 유일하게 균열이 생긴 시기는 1921년 5월이었다. 이는 인민군대에 대한 「신질서」(L’Ordine Nuovo)에 실린 기사에서 그람시의 열정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다른 정치조직에 가입하는 것은 당 규약과 양립할 수 없다는 당의 결의문을 발표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4) 당시 인터내셔널은 부하린의 방식으로 개입했는데, 그 방식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이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를 저지르고 있다고 선언하여 불화를 더욱 부추겼다.5)
어쨌든 점점 더 러시아가 지배하게 되고 주로 러시아가 자금을 지원하지만, 국제적인 정치조직이 이탈리아당이 통일전선 정책을 계속해서 준수하지 않아도 용인할 수 있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리고 보르디가가 더 순응하지 않는다면 ... 그람시는 무솔리니의 손이 닿지 않는 러시아에서 치료 기간을 연장하고 코민테른의 확대집행위원회(ECCI) 회의에 항상 참석하여 이탈리아 문제 (현재 우리가 재판을 받는 보르디가의 문제로 점점 더 인식되고 있는 문제)를 고려할 수 있었다.
전체의 재판 과정은 긴 여정이었다. 보르디가와 그의 공동 피고인 31명은 국가 전복 음모 및 공모 혐의로 기소되었다. 적어도 1924년 로마의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이 만든 기록에 의하면 보르디가의 경우에는 장시간의 예비 심리가 있었다. 보르디가는 당이 지하 본부를 세우려던 프라티나(Frattina)의 한 아파트 블록 밖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3,000리라, 약 3,000파운드(1923년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한 액수)를 소지하고 있었다. 보르디가는 3,000파운드가 크라신(Krasin)이라는 '러시아 담당자'에 의해 송금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외국 국가의 돈을 받고 있지 않다는 점, 즉 외국의 음모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곤혹스러워했다.
“판사 : 모스크바 집행위원회는 러시아 정부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까?
보르디가 : 아니오. 그 정부와 혼동해서는 곤란하며, 이제 이 두 기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설명하겠습니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는 다른 국가에 상주할 수도 있습니다. 보기를 들어, 로마의 비아 프라티나(Via Frattina)에 있는 우리 본부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된 경찰이 없었다면 집행부의 본부를 이곳으로 옮기는 것에 반대했을 것입니다. 기존 인터내셔널은 브뤼셀, 제네바 등에 본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제3 인터내셔널은 모스크바에 본부를 두고 있습니다. 인터내셔널에는 가장 중요한 정당 중 하나이자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정당인 러시아 코뮤니스트당이 포함되어 있고,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고려할 때 가장 경외심을 갖고 있으며 또한 가장 부러워하는 정당입니다.
러시아 정부, 러시아 코뮤니스트당과 제3 인터내셔널은 완전히 별개의 조직입니다. 자금 송금은 여러 국가의 동지들로 구성된 제3 인터내셔널 예산위원회에서 이루어졌으며, 우연하게도 이 위원회의 의장은 이탈리아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금액을 보내기로 한 사람은 실제로 이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러시아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일 수도 있지만, 이는 우리에겐 모두 똑같았습니다. 인터내셔널과 러시아 정부 사이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전 세계 코뮤니스트당이 가입된 제3 인터내셔널에 소속된 코뮤니스트당입니다. 러시아에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다른 나라와는 다른 상황에 처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부의 조직이 아니라 정부가 인터내셔널의 조직이라는 의미에서, 또는 적어도 인터내셔널이 정부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 국가가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에 종속되는 관계가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 러시아 정부와 여러 조직은 인터내셔널 코뮤니스트 운동 문제에서 행동할 권한이 없으며, 오직 인터내셔널만이 이를 수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코뮤니스트당 대회와 지도 조직의 지시를 받는 러시아 정부의 정책은 인터내셔널에 의해 논의되고 수정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러시아 정부의 대외 대표에 불과한 크라신과 어떤 교류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내가 감사하고 존중하는 나의 동지이지만, 우리와 러시아 국가의 다른 대외 대표 사이에 어떤 관계도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와 아무런 조직적 관계도 없는 사람입니다.6)”
부르주아 법정에서 열린 재판에서 보르디가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러시아 국가 사이의 분리를 강조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것을 얼마나 깊이 믿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그의 선언문은 '이탈리아 문제'뿐만 아니라 ‘우익으로의 일탈에 맞서 싸우는 인터내셔널 강령, 조직 및 전술적 문제’에 관한 공개 토론이 여전히 진행될 수 있다고 생각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1923년에 일어난 사건은 완전히 반대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제3차 대회 이후 러시아는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해 '올바른' 결정, 즉 자본주의 세계에서 러시아 국가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리한 결정이 나오게끔 관료적 변화를 강요해 왔다. 우리는 1922년 말 인터내셔널 코뮤니스트당과 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위원회에서 그람시가 보르디가를 대신해 단순히 교체된 것을 보았지만, 더 일반적으로는 러시아가 통제하는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 위원들이 총회 사이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사전에 각 정당의 성원이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총회 현장에서 '선출'했다.7) 또한, 대회 사이에 보르디가가 선언문을 작성할 무렵이었던 1923년 중반부터 1년에 두 번씩 확대집행위원회(ECCI) 회의를 개최하는 패턴이 확립되었는데, 여기에는 선출직 위원도 포함되었다. 러시아에서 반(反)혁명이 일어나면서 '레닌의 당'의 근본적인 목표는 새로 출범한 소비에트 및 지금의 소련 코뮤니스트당(CPSU)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러시아 국가의 고립을 깨기 위해 혁명적 봉기, 특히 1923년 불가리아 사태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독일 10월혁명을 기획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역 협정을 체결하여 자본주의 열강과 화해를 시도하는 등 결과적으로 초래된 불규칙한 외교 정책은 언급할 수 없다. 코민테른 당원들의 충성심이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에 매우 중요해졌을 뿐만 아니라, 코민테른 내부에서는 소련 코뮤니스트당(CPSU)의 지도력을 둘러싼 주도권 다툼이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었다. 이탈리아 법정에서 보르디가가 묘사한 러시아는 이보다 더 선명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러시아 정부, 러시아 코뮤니스트당, 제3 인터내셔널은 완전히 별개의 조직이다.”
좌파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의 다수를 차지했다 하더라도 러시아가 지배하는 코민테른이 보르디가, 그리고 필요하다면 당 지도부 전체를 편들기 시작하는 것은 시간의 문제였다. 러시아 정당의 정치적 방향과 미래 지도력을 둘러싼 내분이 심화하면서 이탈리아 문제는 이러한 책략에 얽히게 되었다. 보르디가의 구속으로 인하여 확대집행위원회(ECCI)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6월에 그람시는 스코치마로(Scoccimarro), 타스카(Tasca), 테라치니(Terracini), 포르티차리(Fortichiari), 보타(Vota)와 함께 확대집행위원회(ECCI) 회의에 참석하여 ‘이탈리아 문제’에 대해 연설했다. 그 결과 우익의 소수파 대표들이 포함된 새로운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 '혼합' 집행위원회가 임명되었고, 포르티차리는 이 위원회에 합류하기를 거부했다. 이 새로운 집행부는 그동안 중앙위원회에 속해 있지 않았던 톨리아티, 스코치마로, 타스카, 보타, 겐나리(Gennari)(포티차리 대신)로 구성되었다. 8월, 감옥에 갇혀 있던 보르디가와 그리에코(Grieco)는 새로운 집행부의 소식을 듣고 물러났다.
이제 보르디가는 이탈리아 당 내부와 외부에서 자기 선언문에 대해 최대한 폭넓은 지지를 얻는 데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놀랍게도 감옥에 갇혀 있어도 간단한 암호와 협조적인 교도관을 통해 외부 세계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데 지장이 없었다. 후자는 주로 톨리아티에게 메시지를 전달했고, 톨리아티는 이탈리아의 다른 당원들, 지노비예프와 부하린을 포함한 코민테른, 그리고 보르디가는 잘 몰랐겠지만, 그람시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확대집행위원회(ECCI)의 내용을 충실히 따르는 지도부, 이탈리아 당을 위한 새로운 지도부, 즉 타스카로 대표되는 우파에 너무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보르디가와 구(舊)집행부보다는 '온건'한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이미 갖고 있던 그람시였다. 그람시가 보르디가를 약화하려는 첫 번째 움직임이 그람시 자신의 표현대로 ‘파시즘의 승리에 대한 책임은 당신들(즉, PCd'I 전체)에게 있다’는 지노비예프의 확대집행위원회(ECCI) 선언에 의해 타격을 입었다면, 그는 ‘장어처럼 미끄러지는’ 방법, 즉, 보르디가와 달리 당의 어떤 권위 있는 자리에서도 물러날 이유가 없는 직책을 지키는 전쟁에서 교묘하게 움직이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한편 보르디가는 분파 작업을 하는 것은 모스크바의 지시에 대해 공개적으로 대놓고 반대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당의 대표 자리에서는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가 감옥에서 석방된 후 1923년 말, 확대집행위원회(ECCI)의 최고 간부 회의(Praesidium)는 다시 한번 보르디가에게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 집행위 위원으로 합류할 것을 요청했다. 보르디가는 어떤 경우에도 전 이탈리아 집행부 전체를 복직시켜야 하는데, 그들은 그럴 권한이 없으며,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코민테른 집행부가 승인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고 응수했다. 그러나 그 무렵 보르디가는 ‘미끄러지는’ 방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에 의해 완전히 조종당했다. 그람시는 처음부터 보르디가의 선언문에 서명하기를 거부했고, 톨리아티가 수정하여 제출했음에도 계속해서 서명하지 않았다. 보르디가가 석방될 무렵에는 다른 게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러시아를 모방하여 당을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이미 9월에 그람시는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노동자 일간지를 발행하기로 한 코민테른의 결정을 이탈리아 당 집행위원회에 알렸다. 이는 1924년 2월에 정식으로 창간하여 1926년 제3차 당 대회를 앞두고 좌파에 대항하는 코민테른의 볼셰비키화 캠페인의 수단이 되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로 돌아온 직후에 열린 1924년 5월의 특이한 코모(Como) 대회에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리옹에서 열린 연정을 위한 일종의 사전에 진행된 리허설에서 좌파(투표권이 없는 유일한 좌파 대표 보르디가), 중도( 톨리아티), 우파(타스카)를 대표하는 세 가지 논제가 발표되었다.
“총 65표 다음과 같이(중앙위원회 14표, 연방 및 지역 간부, 청년 연맹, 당 언론 및 선전 기관 대표 49표 중 41표가 보르디가 후보, 10표가 우파 후보에게 그리고 중도 후보가 11표를 얻었다) 투표가 이루어졌다. 두 명은 기권하였고 한 명의 표는 분실된 것으로 간주 되었다. 대회에서 선출된 집행부의 일원이었던 보르디가, 포르티차리(Fortichiari), 레포시(Repossi), 그리에코(Grieco)는 사임했다 하여 투표권이 인정되지 않았고, 중앙위원회에 불참한 세 명의 위원(겐나리, 라베라, 레오네티)이 중앙에 찬성표를 던진 것이 개표에서 확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좌파 논리가 다수의 표를 얻었다. 이러한 절차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결과는 45 대 8로 좌파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8)”
위 그람시에 친화적인 저술가조차 인정했듯이, "당 전체가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보르디가 방식을 그대로 유지한 것은 분명했다. 이는 그람시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르게 시작된 것이었다."
‘장어처럼 미끄러지는 법’을 배운 사람에게는 할 일이 더 많았다. 인테사(Intesa) 위원회와 그람시에 대한 팸플릿을 참조하라.9) 여기서 인터내셔널의 퇴행에 대한 보르디가의 적극적인 정치적 저항은 1930년 무렵에 줄어들고 중단되었지만,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좌파의 투쟁은 그가 없는 상태에서도 계속되었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는 많이 가려져 있지만 중요한 역사적 에피소드에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번에는 전 세계 노동자들이 최소한 혁명적 인터내셔널을 위한 강력한 틀을 이미 갖추고 있다면 훨씬 더 나은 위치에 설 수 있을 것이다, 둘 이상의 국가에 기반을 두고, 개별적인 유대를 기반으로 성원 자격이 부여되므로 어느 한 부문의 통제를 받기 쉽지 않은 구조의 조직이다.
E. 레이너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주>
1)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PCInt) 소개에서 노트 NO. 1,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들의 재판, 1923, 5쪽:
움베르토 테라치니(Umberto Terracini)는 1923년 2월 13일에 제3 인터내셔널 집행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다.
"일주일 만에 경찰은 5,000명이 넘는 동지들을 체포했다. ... 당원의 1/4이 체포되고, 지부가 해산되었으며, 지도자 보르디가 동지를 빼앗겼고, 당원들이 죽음과 고문의 위협을 받고 있지만,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은 이미 당의 작업과 활동을 재개했다.“
아마데오 보르디가를 비롯한 거의 모든 집행위원이 체포되었고(테라치니 외에 브루노 포르티차리, 안토니오 그람시는 수배된 상태였다), 반란 선동, 탈영, 국가 권력 전복 음모 및 계급 증오 선동 등의 범죄 혐의로 로마 형사재판소에 기소되었다. 재판은 1923년 10월 18일부터 26일까지 열렸으며 증거 불충분으로 피고인들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2)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PCd'I및 코민테른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1925년 인테사 위원회의 강령, 1925년 팸플릿 소개를 참조하라.
3) 세라티는 추방된 후 수천 명의 성원과 함께 단일한 코뮤니스트 분파를 결성했고, 1924년에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에 합류했다. 그는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는 1926년 코뮤니스트당 비밀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5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4) 1921년 7월 31일 「신질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코뮤니스트들은 인민군(Arditi del Popolo) 운동에 반대하는가? 그와는 정반대로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무장시켜 부르주아지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가 창출한 새로운 생산력의 조직과 발전을 감독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군대를 창설하기를 열망합니다.” (우리의 번역)
의심할 여지 없는 반(反)파시스트 동기를 가지고 있고(조직적으로는 원래의 파시스트 아르디티를 모방했지만) 아나키즘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이 공동 당원은커녕 공식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에 회의적이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반면에 파르마의 올트레토렌테(Oltretorrente)와 같은 노동계급 지역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 및 아르디티 성원들은 종종 무솔리니의 갱단에 대항하여 함께 투쟁했다.
5) 그리에코의 답장에는 부하린이 "... 세컨다리가 이런 반(反)맑스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동안 코뮤니스트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라고 반문했던 무솔리니의 로마 진격 직후 파시스트들의 공격으로부터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아나키스트이자 인민군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아르고 세컨다리(Argo Secondari)에 대한 비판이 포함되어 있었다.
6) 1923년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 Il Processo,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 로마 1924) 79~82쪽에서 번역.
7) 이는 1921년 6월 22일부터 7월 1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3차 대회에서 결정된 사항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러시아가 정당 규모에 따라 확대집행위원회(ECCI) 대의원 수를 결정하도록 하여 러시아가 과반수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한 부분이다. 어쨌든 다른 모든 정당은 위원회에서 수적인 열세로 자문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러시아 당만이 다수였기 때문에 결정하는 투표를 할 수 있었다.
(8) Luciano Beolchi, Dal Partito di Bordiga al Partito di Gramsci, 248쪽
(9) 1925년 인테사 위원회와 오노라토 데이먼의 강령, 「맑스주의와 관념론 사이의 그람시」에 대해서는 모두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주소와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마데오 보르디가의 옥중 선언문 (1923)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당의 모든 동지에게
확실한 신념과 오랜 숙고 끝에 우리는 동지들에게 현재의 성명을 발표하여 코뮤니스트로서의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은 전체 당원의 참여가 있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종류의 위기를 겪고 있다. 우리는 이탈리아에서 반(反)프롤레타리아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효율성과 조직의 위기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 위기도 충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또 다른 위기가 없었다면 당의 주요 기구가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쟁점은 불행하게도 첫 번째 위기의 결과를 더 악화하는 또 다른 위기, 즉 당의 전반적인 방향에 대한 내부 위기가 개별 전술적 문제에서 이제는 원칙과 당의 정치적 틀 전체 위기로 확대되었다.
이 위기는 내부의 불일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당과 현재의 다수파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및 집행 기관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정확히 지금의 위기는 절대적으로 비정상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동지들에게 충분히 정보를 제공하고 기본적인 문제를 토론하고, 우리 당의 사상과 행동 강령이 무엇인지에 대해 최종적으로 결정적인 판단을 하기 위해 (전체) 당 앞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당 활동이 마비되고 무력화될 수 있다. 공개적으로 당 회의를 개최할 수 없고 자유로운 언론이 없는 상황에서도 이 문서에서 그러한 작업의 시작을 제안하고자 한다.
리보르노 대회에서 우리 당이 설립되면서 만들어진 강령은 동지들이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은 이는 특히 전후 몇 년 동안 사회당의 본질적인 잘못에 대한 당 내부의 비판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다.
리보르노 직후 당의 지도부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당의 상황과 과제를 어떻게 보았을까? 당의 이론은 러시아 혁명과 제3 인터내셔널의 창립으로 부각된 혁명적이고 맑스주의적인 기초 위에서 분명하게 확립되었다. 국제적 연계의 힘으로 구별되는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투쟁 조직은 구(舊)당에 치명적이었던 전통적으로 피상적, 무질서, 개인 분파를 피하는 방식으로 점진적으로 발전해야만 했다. 진지함을 기반으로 냉철하게 성찰하는 새로운 기준이 공동의 대의를 위한 모든 개별 성원의 무한한 헌신과 결합하였다. 따라서 우리 활동의 가장 큰 문제는 코뮤니스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이탈리아의 상황에 구체적으로 적용해야 할 전술이다.
1921년 초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사회당의 결함으로 인해 우리와 같은 소수 정당이 혁명적 공세를 펼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타협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의 활동은 부르주아지의 공세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트가 최대한의 저항을 끌어내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투쟁력을 당의 기치, 즉 재건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가진 당을 중심으로 최상의 상태로 집중한다는 측면에서 구상할 수 있었고, 또 그래야만 했다.
코뮤니스트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즉 어떻게 하면 산업주의자들의 공세에 맞서 프롤레타리아를 방어하는 단결을 최대한 보장하고, 동시에 이미 이탈리아 대중의 슬픈 경험이었던 모순된 지침으로 인한 안타까운 융합을 통해 대중이 겉으로 보이는 단결의 망상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우리는 반동과 파시즘에 대항하여 코뮤니스트가 노동자 조직의 통일전선을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역사를 여기서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추종자를 가진 다른 정당의 행동 때문에 시도는 실패했지만, 적어도 사실에 근거하여 이러한 실패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전투적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코뮤니스트당에 모이는 경향이 증가함으로써 우리가 이득을 취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선전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분명하게 코뮤니스트의 지도를 받아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침묵한 적이 없으며, 이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코뮤니스트가 다른 정당의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할 것을 제안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에 이루어진 이러한 실험의 결과는 당과 인터내셔널이 논의하여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고 대차대조표를 정확하게 작성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 위험은 "당의 전술이 잘못되어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를 초래했다"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질문이 사라진다! 여기서 핵심은 다른 정당의 누구도 선의와 다른 자질을 부인하지 않는 한 개인의 활동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것, 즉 전체 경험의 중요한 부분, 맑스주의 정당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고 이탈리아 역사의 현 단계에서 국제적 의미에 의해서만 더 중요해진 부분에 관한 판단이다. 이는 또한, 이러한 실험의 결과가 나온 후 당이 그 구성 기반을 검토하고 수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난 1년 간 이탈리아 정치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명백한 사실, 즉 코뮤니스트당이 되돌리기에는 너무 깊고 오랜 원인에서 비롯된 사건의 진행을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을 언급한 후, 우리가 리보르노에서 수립한 노선은 잠시만 따를 수 있었다는 점을 즉시 지적해야 한다. 여기서는 깊이 있는 토론이 필요함을 동지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질문의 개요를 제시하고자 한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 ‘인터내셔널’ 코뮤니스트 전술에 대한 이탈리아 당의 입장은 인터내셔널의 입장과는 다르다.
· 이탈리아 상황에 대한 견해 차이는 ‘전술’의 한계를 넘어 당 조직의 토대를 훼손하기 때문에 훨씬 더 심각한 문제이다.
· 인터내셔널은 전술에 관한 정책을 수정했고, 지금도 수정하는 과정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강령과 기본적인 조직 규범도 수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요점은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 이는 로마에서 열린 당 대회(1922년 3월) 토론을 통해 잘 알려져 있으며, 당 대회에서 승인된 전술에 관한 논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두 번째 요점은 당원들이 이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프롤레타리아 운동 내에서 이탈리아에 적용될 전술 문제의 차이점은 최근에 그리고 매우 느리게 나타났다. 제 3차 대회에 참가한 이탈리아 대표단은 인터내셔널의 전술에 이미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었지만, 당시와 그 이후까지 당의 구체적인 활동은 여전히 인정되고 찬사를 받았다.
나중에 '통일전선'과 '노동자 정부'라는 슬로건에 직면 한 우리 당의 노선은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두 가지 근본적인 초석의 사실에 근거하여 전술적 방법과 선전의 본질 사이의 충돌을 피하는 기준을 근거로 수립했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코뮤니스트당과 그 지도부의 정책을 지지함으로써만 부르주아지를 이길 수 있다"는 것과 ‘프롤레타리아 권력은 혁명적 독재에 의해서만 건설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인터내셔널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했을지는 결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노동조합 통일전선선'에 참여하고 기회주의의 그늘에 맞서 공개적으로 캠페인을 벌였다.
인터내셔널은 때때로 구체적인 비판을 하기도 했고, 심지어 1922년 6월에는 당이 '노동자 정부'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이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가명'으로 규정할 정도로 비판했지만, 이후에 실제로 그것은 장관과 의회 참여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노동조합과 파시즘에 대한 문제에 대해 인터내셔널이 우리에게 대신 무엇을 하라고 요구했을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최대 강령주의 정당과의 융합 문제로 인해 이견은 더욱 깊어졌고, 상당히 중요한 분야로 확대되었다. 우리는 당의 '계보'가 리보르노에서 당이 설립되었을 때 역사적으로 확립되었다고 보았고, 당의 주요 목표인 다른 프롤레타리아 요소의 유입은 다른 운동에서 그들을 끌어내어 우리의 정치적 틀에 편입해야 한다고 항상 주장했지만, 다른 정당과 대중적으로 융합하려는 어떤 생각에도 반대했다. 또는 우리 대열에 합류하게 하는 대신 그 안에서 지지자들을 일부 만들려는 시도(즉, 우리는 '침투'나 세포 건설에 반대했다), 즉, 오늘날 인터내셔널은 리보르노를 일시적인 해결책으로 간주하고 사회당의 다른 '일부 조직'을 대중적으로 결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것에 따르면, 최대 강령주의자들은 개량주의자들과 분리되기를 주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와 분리되었다. 우리가 보기에 최대 강령주의는 개량주의만큼이나 위험한 기회주의의 한 형태이며, 그 전통과 주도 세력에 비춰볼 때 결코 혁명적이지 않고 무능과 관성 상태를 가장한 기만적인 말로 대중을 계속 잘못된 길로 인도할 것이다. 인터내셔널은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입지를 잃고 당원 수가 줄어드는 것을 보고 최대 강령주의를 인정함으로써 상황을 바꾸고 국제적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이를 (측근들의 비열한 지도자들에 의한) 패배주의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전투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불가피한 후퇴에도 불구하고 다른 정당의 청산으로 강화된 코뮤니스트당의 우위를 유지하고 싶었다.
이러한 사실은 최대 강령주의자가 조직을 혁명적 기반 위에 올려놓고 인터내셔널과의 유착을 충직하게 받아들인 것에 대한 정치적 저항을 보여준다. 예전에는 이것이 세라티 (일반적인 코뮤니스트 경향의 출현을 막음)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세라티 자신이 당에 의해 또는 오히려 최대 강령주의라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하는 수십 명의 지도자에 의해 제거되는 것을 보았지만, 후자는 그들이 잡혀 있는 그물을 찢어야만 이길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 코뮤니스트들이 융합을 막았다고 말한다 !!!
인터내셔널의 이러한 입장이 이탈리아에서 어떤 결과를 불러왔을까? 통일전선으로 인하여 당의 전술적 작업이 방해받게 되어 그들이 우리 전술에 얽매여 있던 상황에서 벗어날 기회를 다른 당에 제공했다. 그들은 코뮤니스트들의 제안에 따라 행동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감추기 위해 '정치적' 연합을 제안했다. 노동총동맹과 노동동맹 내부에서 최대 강령주의자들은 모스크바가 이들에게 그러한 정책의 고수를 권유한 덕분에 오랫동안 지속해 온 치명적인 실수를 이어가면서 개량주의 게임을 하고 마지막까지 노동자들을 속일 수 있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1922년 8월의 운동을 매우 다른 지반 위에서 재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1922년 7월 제노바에서 열린 (노동) 연맹 회의에서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곳에서 개량주의자들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다수파들은 의회 협력에 반대하는 선언을 하는 대가로 그들의 자리를 유지하게 되었는데, 이는 ‘프롤레타리아 행동도 협동도 안 된다’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공식만큼이나 해로운 것이었다. 분명히 세라티와 다른 사람들은 투쟁에 대한 오래된 혐오감 외에도 인터내셔널에 다시 가입하는 대가로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조금씩 교환하면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합류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 남아있도록 초대받은 제3 국제주의 분파의 형성은 기본적으로 모호성을 영속화하는 데 기여했다. 결론적으로, 개량주의로부터 분열 이후 사라졌어야 할 최대 강령주의 정당은 인터내셔널과 반복되는 제안을 조롱하면서도 아무런 약속도 이행하지 않고 안일한 기회주의로 상황을 악용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어려운 시기에 노동자들의 관성적 경향을 악용하여 몇 가지 혁명적 문구를 통해 수동적이며 가식적인 충실함의 기치를 내걸고 어느 정도 노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그것은 상황이 변하든 변하지 않든, 최악의 무력감 속에서 스스로 소진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세력이다.
그리고 비록 통합에 이르지 못했더라도 더 심각한 이유로 당원 수가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노동자들이 코뮤니스트당에 호감을 갖는 경향을 보이는 특정 상황에서도 인터내셔널의 정책으로 인해 코뮤니스트당이 이점을 얻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8월 파업 이후 인터내셔널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여전히 사회주의 분열의 가능성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파시즘의 출현과 우리 당에 반대하는 반동적 행동이 일어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대신 우리 당은 심각한 구조적 변화를 겪고 있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모든 가능성과 모순되는 위화감이 커지고 있으며 활동하지 않는 비정상적인 의회 체제에 종속되어 있다. 더욱이 인터내셔널과의 차이로 인해 이른바 '소수파'라는 흐름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정통 코뮤니스트로 위장했지만, 실제로는 리보르노 이후 낡은 사회주의 방식에 다소 집착하고 (새로운) 서투른 작업과 책임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아 고상하고 근거 있는 주장이 아니라 난폭하고 때로는 조용한 험담으로 인터내셔널의 테제를 지지해 왔다.
이 모든 결과로 당은 고통을 겪고 있으며 이러한 부분에 대한 해결책이 필요하다. 이러한 ‘융합주의’접근 방식의 결과는 리보르노에서 발생하여 명예롭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2년 넘게 투쟁해 온 당을 ‘청산’의 위협에 빠뜨리고 있다. 이는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트를 가장 사악한 최대강령주의적 '중도주의'의 늪으로 다시 빠뜨릴 것이며, 이탈리아 노동계급은 이러한 시련의 과정에서 미래에 필요한 경험조차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좀 더 일찍 경고음이 울렸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술적 문제에 대해 앞에서 말했듯이 실제로는 이견을 좁히기 어려웠다. 인터내셔널의 방식은 어떠한 구호를 한 번에 하나씩 제시하는 것이었지만, 우리는 더 넓은 범위에서 정의하는 표어를 사용하고자 했다. 융합과 연속적으로 이어진 사회주의 대회에서 제시된 다양한 대안과 관련하여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보기를 들어, 1921년 이후에는 더는 융합을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제3 인터내셔널 분파와의 관계조차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 공식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1922년 말에 이르러서야 이 분열이 심각하게 드러났고, 이후 사건들을 통해 당이 거의 인식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최근에는 길고 고통스러운 협상과 개인적 성격에 지나지 않는 편법을 통해 도출된 미봉책이 아닌, 인터내셔널 내에서 폭넓고 진정한 토론을 통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졌다.
최소한 우리가 검토하기 위해 제안한 일반적인 사항을 언급하고자 한다. 제3차 대회 이후 등장한 인터내셔널의 새로운 전술적 구호(제 4차 대회에서는 전술적 테제를 논의할 시간이 없었다)의 의미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는 강령과 원칙에 대한 변화의 위험, 1924년 강령과 규약의 문제가 반복적으로 연기된 것에서 분명한 위험성을 수반한다. 동시에, 조직 규율의 심각한 문제는 많은 정당과 중앙과의 관계에서 불쾌한 내부 위기를 초래하는 무미건조하고 때때로 불연속적인 절차가 되었다.
이는 매우 심각해질 수 있는 위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아마도 인터내셔널 진영에서 위기의 전야를 맞이하고 있으며, 우리 이탈리아 당은 위기에 깊이 빠져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조건은 중앙 기관이 수행하는 규율을 잠시도 중단하지 않고 모든 성원 앞에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진지한 사항을 고려하여 가능한 한 더 자세히 밝힐 것을 약속하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정 사항에 대한 동지들의 지지를 모으려고 한다.
•현재 상황에 보이는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당을 위한 투쟁 경험의 가치와 당의 강령적 및 전술적 초점에 대해 당 내에서 광범위한 토론과 협의를 끌어내기 위해.
•인터내셔널의 강령, 조직 및 전술적 행동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고, 우파의 수정에 맞서 싸우며, 무엇보다도 지침을 결정할 때 최대한의 분명함을 확보하기 위해.
•이러한 토론을 통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공동의 평가를 수행하여 당의 활동을 안내할 완전하고 분명한 계획이 작성되도록 한다. 이를 바탕으로 모든 성원이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모든 역량을 가장 합리적으로 투입하여 이전의 심각하게 불안정한 상태가 된 이유와 원인을 극복함으로써 당의 업무와 효율성을 강화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시작될 것이다.
이 토론이 공동의 원칙에 기초한 일련의 결정에 대한 실질적인 합의를 끌어내지 못한다면, 인터내셔널 대다수의 의지에 따라 코뮤니스트 성원으로서 우리의 입장을 유지하면서, 우리는 당의 주요 조직이 그들이 적용하도록 요구되는 지침(즉, 이러한 지침은 일관된 방식으로 그리고 적용해야 할 지침에 대해 완벽하게 확신하는 동지들에 의해 작성되어야 한다)에 따라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당의 주요 조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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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기인들
1923년 여름, 감옥에서 작성
「혁명적 전망」 22호
2023년 8월 14일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3-08-14/amadeo-bordiga-s-prison-manifesto
의식의 문제 : 당 계급 토론을 위한 기초
프랑스 코뮤니스트 사이 일련의 토론 부분을 담은 글이다. 특별히 이 글은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내부 분파로 부르는 동지들이 제출한 문서에 대한 답변이다. 그 분파가 ICC에서 탈퇴한 지 몇 년이 지났다. 글 끝에 실린 인용문은 그 내부 분파의 문서에서 발췌한 것이다.
의식의 문제는 폭넓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 문서는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만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1차 세계대전 후의 혁명들의 실패, 특히 러시아혁명의 실패라는 불행한 유산 중의 하나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에 맞서는 강령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이끈 당에 대한 모든 생각이 신뢰를 잃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볼셰비키(나중에 코뮤니스트)당이 자본주의 반(反)혁명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은 1917년 지주, 자본가, 그리고 사회민주주의 협력자들의 임시정부를 전복하기 전과 전복 과정에서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명료한 표현으로서 수행한 역할을 흐려버렸기 때문에 사실이다. 당이 점차 계급의 기반을 대체한 러시아 내전(1918-21)에서 벌어진 일들은 당이 사회주의를 위한 선전을 확산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에 맞서는 반란으로 이끄는데 계급의 가장 의식적이고, 선진적이며, 명료한 부분이라는 전반적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거부하게 만들었다. 당이 봉기를 이끌고 당의 임무를 시작하기 위해, 강령으로 계급에 되돌아간 인간의 대대적인 변혁만이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 이는 말 그대로 노동계급의 절대 다수의 작업일 수 있고 또한 말 그대로 사상의 생산의 주인(자본가계급)이 극복되는 시작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의 확장은 「혁명적 전망」(21-30쪽)에 게재된 ‘계급의식’에 대한 연재물에 실려 있다. 이는 수정되어 소책자로 재출간될 것이며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에서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 중에 있다.
의식의 문제는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 분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 관계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방법론적 정식화의 실질적 차이를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기 때문에 그 차이가 존재한다면 몇 가지 기본적인 개념을 여기서 다시 서술하는데 논의를 한정하려고 한다.
첫째, 혁명, 혹은 코뮤니스트 의식의 개념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개념은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서 ‘즉자적’ 계급의 의미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착취당하고 있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깨달음과 그 착취를 끝장내기 위한 투쟁의 필요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코뮤니스트 의식은 자본주의 생산과 분배의 관계가 부과한 예속의 조건을 실질적으로 극복하는데 필요한 시간의 길이, 수단, 투쟁의 형식, 전술, 전략과 정치 강령에 대해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 인식을 하고 있음을 뜻한다. 또한 코뮤니스트 의식은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주고 있는 정치적 형식을 극복하는 것을 뜻한다. 맑스의 말을 빌리면 프롤레타리아트가 즉자적 계급에서 대자적 계급으로 나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계급투쟁의 역사는 객관적 조건에 의해 떠밀린 프롤레타리아트가 당면한 이해를 방어하는 기반 위에서 싸울 수 있고 또한 반드시 싸워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그 역사는 또한 투쟁의 도구를 줄 수 있고 계급투쟁의 궁극적 결과인 봉기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데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총체로서 완전한 계급의식에 도달할 수는 없다. 다른 말로 그것은 전술적이고 전략적인 문제를 풀 수 없고 혁명당이 그 안에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완전한 정치 강령에 도달하기도 어렵다.
올바른 유물론적, 변증법적 해석으로부터 관념적, 기계적, 평의회적, 경제주의적 입장을 구별해 내는 것이야말로 의식의 문제이고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 문제이다. 본질적인 문제는 특정한 수준에서 정치적이 될 수 있고, 스스로 피할 수 없는 의식의 성숙으로 이끄는, 경제적 요구 투쟁의 발전을 통하여, 의식이 계급의 내부로부터 생겨나는지를 아는 것이 아니다. 또는 계급 외부로부터 의식이 들어온다면, 그것은 계급의 바깥에서 당이 만들어지고 혁명적 정치의식의 위로부터 주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러한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당이 계급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당면한 경제적인 계급의 모든 요구를 종합하고 역사적 과업에 속하는 요구를 종합하는 것은 더 진전된 논의의 부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만이 그 의식은 “외부에” 존재한다. 사회학적 구성으로 볼 때 프롤레타리아든, 소부르주아든, 부르주아지에서 나온 지식인이든 간에, 당은 계급 안에서 태어난다. 당은 조그만 경제적 요구로부터 완전한 정치 강령에 이르게 하는 보다 보편적인 전략적 요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급투쟁의 요구를 스스로 만든다. 당의 정치 지식은 다양한 계급 경험의 역사적 종합의 결과이다. 그것은 승리의 원인을 맨 앞에 내세우듯이 패배의 원인으로부터도 배운다. 그것은 매일 계급투쟁의 뒤틀림과 반전으로부터 때로는 숨겨져 있거나 본능적이고 부문적인 계급투쟁으로부터 나오는 충동 뒤에서 이끌어낸다. 당은 전 계급에게 정치적 전술과 전략을 통해 이 계급투쟁의 경험을 되돌려준다. 이처럼 그 관계는 계급과 그로부터 분리되고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와 더 앞서는 사려 깊은 부분 속에서, 계급 스스로 내부에서 형성되는 관계다. 이러한 앞선 부분은 아래로부터, 노동자로부터 충동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치적 전략으로 만들어 다시 그들에게 되돌려주는 부분으로서의 당이다.
이는 투쟁하는 동안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이 일정 정도의 정치의식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특히 오늘날 같이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적 지배 아래에서 경제적 요구의 부분적 측면과 계급투쟁의 최종목표에 대한 세계적 전망의 결여가 당의 존재를 요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당은 세계적 계급의식을 제공하고 있으며, 전위로서 당 내부부터 그 의식을 만들 수 없다면 계급의 적에 맞서는 투쟁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의식을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의식은 하늘로부터 떨어지듯이 외부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은 계급 밖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은 변증법적으로 연관된 두 가지의 분리할 수 없는 계기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우리에게는 계급의 정치적 도구로서의 당이 항상 존재해야 하고, 계급투쟁의 매 순간에 정치적 준거가 되도록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혁명을 향한 계급투쟁의 정치적 진화가 당 없이 일어날 수 있다거나 당이 단순히 조직자이며 전 계급이 독립적으로 정치 강령과 그를 실행할 수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처럼 투쟁을 일반화할 뿐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우리는 또한 당을 기껏 대부분의 반혁명 시기에 연구센터로 여기면서 오직 혁명 시기에만 그 필요성을 설파하는 논지를 위험하다고 본다. 이는 객관적 조건이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프롤레타리아트를 투쟁으로 강제한 후 주요 경제위기가 당을 만드는 시점과 두 실체 사이의 모든 연결고리를 기계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그 투쟁의 과정에서 정치적 지도력의 부재, 또는 너무 늦게 만들어진 당 때문에 정치적으로 유린되었고, 유혈적으로 억압되었는지를, 그리고 하루에 날조될 수 없는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는데 심각하게 지체함으로써 계급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역사는 가르치고 있다.
객관적 조건은 계급투쟁을 작동하게 할 수 있다. 그 조건들은 계급과 당 사이의 관계를 편하게 하고 강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조건들은 무에서 만들어질 수 없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어쨌든 너무 늦은 것이다. 아주 한참. 당은 봉기 단계 전에 역사적 시기에 이미 존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당은 계급 자체와의 관계를 작고, 사소하지만 효과적으로 세우는 데 성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건들, 위기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 의지는 이른바 당에 의해 쥐어질 수 없다. 그래서 그 모든 결과로 또 다른 정치적 패배로의 길을 닦을 것이다. 이는 계급투쟁의 앞으로의 소생을 어렵게 만든다. 왜냐하면 당이 계급의 부분, 즉 계급투쟁의 일시적 도구가 아닌 영속적 도구이기 때문이다. 당이 계급과 함께 성장하고 정치적 지도력을 줌으로써 계급과 함께 진화하지 않으면 불가피하게 패배의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당이 오로지 계급투쟁이 시작된 후에만 만들어지고 그 투쟁과 함께한다는 이론을 지닌다면 패배는 더욱 확실해 질 것이다. 계급투쟁이 사라지거나 낮은 수준의 투쟁만이 있는 시기에 그늘과 같은 후퇴가 있더라도.
이는 당이 당 주위의 사회적 맥락과 독립적인 자율적인 삶을 살 수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엄청난 반혁명 시기에 당과 계급을 통일하는 박약한 관계는 깨어지고 프롤레타리아트는 계급의 적에 의해 패퇴되어 당은 말 그대로 지워져버린다. 그러나 이는 그 상황에 따른 최소한의 정치적, 조직적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수행하는데 더욱 진전된 요소들을 막아낼 수 없다. 당은 개입되거나, 생성하고 사라지는 조건들을 선택할 수 없다. 반대로 경제적, 사회적 조건들은 계급투쟁의 리듬과 당의 개입 가능성의 정도를 규정한다. 그 수위가 어떠하든 계급투쟁을 위한 준거가 되려는 시도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투쟁의 요구를 궁극적 요구로 만드는 것 외에 경제투쟁에서 당의 주요 임무는 투쟁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상 투쟁이나 방어적인 경제 투쟁은 경제적, 노동조합주의적 투쟁을 정치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피할 수 없는 필요조건이다. 경제 투쟁은 요구수준에서 만들 수 있는 것을 일으키고 정치적 적을 떠나지 않으면서 쇠퇴한다. 계급의식의 더 높은 수준에서 다음 투쟁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정치적 지식으로 어떠한 경제투쟁도, 승리하든 패배하든 간에, 변혁시키는 임무가 있는 혁명당의 개입이 없는 한 그렇다는 뜻이다.
보다 명확하게 말하면, 당의 우선성은 당면 요구라는 자연스러운 영역으로부터 계급투쟁을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투쟁이 착취의 의식과 계급의 적에 대한 투쟁의 필요성으로 볼 때, 조직적 측면이나 정치적 수준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 투쟁을 유발시킨 경제적 상황을 넘어서 나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요구투쟁의 틀 안에 머무르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당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그와 더불어 혁명적 습격으로 이끌고 코뮤니스트 강령을 정교화하는 전략적 준거의 틀로서 당의 역할을 요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정식화가 가능하다.
“노동계급이 당면한 경제적 이해를 방어하는 투쟁을 하게 될 때, 그것은 객관적으로 계급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의식의 문제를 결정한다.”는 정식화는 의식의 문제에 관한 당과 계급 사이의 이 관계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계급의 경제적 요구는 스스로 전술, 전략, 그리고 코뮤니스트 강령으로 구성되는 역사적 역할에 대한 의식을 기계적으로 결정할 만큼 충분하다. 그렇다면 당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이 계급의 운동과 그 역사적 역할의 독립적 성숙에 위임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는 그 반대가 진실이다. 경제적 수준으로부터 정치적 수준으로 투쟁을 연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질적인 도약을 수행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 부분인 계급 전위, 곧 당이기 때문이다.
위와 똑같이 다음의 정식화도 허약한 주장이다.
“경제적 요구투쟁은 계급과 그 투쟁의 역사를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표현, 다시 말해 일정한 발전의 수준에서 계급정당이 되는 정치적 표현으로 나타나는, 계급의 경험을 종합하고 이론화하기 위한, 그리고 일정한 수의 노동자를 지배이데올로기의 혼돈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의식을 위한 객관적 조건이다.”
이 경우 당의 역할은 우선적으로 계급에 맡겨지고 그래서 당은 계급 스스로의 정치의식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이미 결정된 역사적 단계에서만 만들어진다. 당은 계급 투쟁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그리고 전술과 전략이 된 것도 그것이 갇혀 있는 경제적 우리를 부수면서 계급을 혁명적 길로 되돌리는 일련의 경제투쟁, 그리고 그것의 종합과 정교화의 역사적 성과가 된다. 그러나 당은 전체로서 계급이 의식을 획득하는 과정을 독립적으로 끝내고 난 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당은 계급투쟁이 매번 반복되는 동안 이미 결정된 진화적 과정을 논리적으로 끝내고 나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당-계급관계는 학문적인 문제가 아니다. 반대로 코뮤니즘 이론과 실천의 기본에 대한 근본적 동의와 명료성은 우리가 열정적으로 바라는 어떤 것, 모든 일관된 혁명적인 힘이 함께 오는 과정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Bilan & Perspectives No. 6 (2005년 12월)
번역 ㅣ 오세철
<원문 출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23호,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ICT), 2005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05-06-01/the-question-of-consciousness-a-basis-for-discu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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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퇴기 자본주의 위기는 최종적으로 제국주의 국가 간 전쟁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3부-하)
제국주의와 저개발
케인즈에게 제2차 세계대전은 어떤 경제 체제도 원하기만 한다면 완전 고용을 이룰 수 있음을 증명했는데, 그는 종전이 1930년대 규모의 실업을 다시 불러올 뿐이라 예측하고 공포에 질렸다. 그러나, 직후의 사건을 고려하면, 그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대규모 생산력의 파괴는 경제적 회복의 새로운 기반을 제공했다.
“유럽 철도 노선 전체 곳곳의 철도 조차장, 그리고 항만 시설들이 폐허로 남겨졌다. 기계는 끊임없이 사용하고 수리하면서 낡아 소모되었다. 광산은 무자비하게 착취되어 전쟁 이전 효율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초인적 노력이 필요했다. 농업은 토지 착취로 수확은 형편없었다. 대부분 나라의 노동력은 상당한 손실을 겪었다.”(16)
독일, 일본, 그리고 이탈리아가 전쟁으로 황폐해지는 동안, 대부분 “승리한” 열강들의 경제적 기반 또한 그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은 1천2백만 명의 군인과 8백만 명 이상의 시민을, 영국은 1,180만 톤의 선박 운송품, 프랑스는 전체 국부의 45%를 잃었다. 예외는 미국이었는데, 전쟁은 생산을 엄청나게 부양했으면서도 산업 기반은 훼손하지 않았다. 비록 전쟁이 그동안 축적할 수 없었던 미국의 불변자본(constant capital)을 대규모로 평가절하했으나, 생산 수단이 물리적으로 파괴되지는 않았다. 이것이 미국에 전후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경제적 형태를 멋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을 주었다. 그것은 상당히 불균등한 두 제국주의 블록으로 나누어진 세계가 되었다 : 소련과 동유럽 위성 국가들이 한 편에 있고, 미국과 그 유럽 동맹국들이, 결국은 당연하게도, 그들의 식민지들을 빼앗아 다른 한 편에 있었다. 심지어 루스벨트 이전에도, 처칠과 스탈린은 1945년 2월, 세계를 나누기 위해 얄타(Yalta)에서 만났고, 미국은 (뉴 햄프셔) 브레튼우즈에서 다른 서유럽 국가들을 중무장시키고, 달러를 국제 무역의 새로운 기준으로 받아들이게끔 했다.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구성원 국가들은 자신들의 통화를 미국 달러를 기준으로 고정했고, 양 세계대전 사이 동안 근린궁핍화정책(“beggar-my-neighbour”)의 통화 평가절하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 확신시키기 위해, 미국은 1온스당 35달러 가격으로 달러를 금에 고정했다. 조약의 요점은 세계은행(World Bank)이 설정했고, 세계은행은 IMF의 채권자로서 필연적으로 달러로 거래했다.
소련은 1947년 최종 협정을 비준하지 않았고, UN 총회에서 러시아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Andrei Gromyko)는 브레튼우즈 체제를 “월 스트리트 분점”이며, 세계은행을 “하나의 거대한 강대국의 도구가 되는 정치적 목표에 종속되었다”라고 비난했다. 소련과 그 위성 국가들이 이제 대부분의 유럽과 아시아 커다란 부분을 포함한 영토를 통제했지만, 그것은 전쟁으로 부상한 약한 제국주의였다. 미국 달러의 헤게모니로부터 탈출할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차지한 영토의 통화를 교환 불가능한 것으로 남도록 보장했다.
소련이 해체되어 그들이 동독으로부터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불변 자본을 러시아로 수송하는 동안, 미국은 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생산 기반이 온전한 유일한 강대국으로 미국 문제는, 동맹들이 자신들의 경제가 회복되지 않으면 더는 미국의 상품을 구매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경기 후퇴 위협과 그 모든 결과도 나타났다. 1945년 11월부터, 1946년을 거쳐, 빠른 인플레이션과 대부분이 노동조합이 속하지 않은 5백만 이상의 노동자들이 연료가 되어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파업의 물결이 일어났다. 미국 지역 경제와 동맹국 경제를 모두 부활시킴으로써 노동계급의 상황을 개선할 방법을 찾는 힘겨운 과제가 미국 자본에 주어졌다. 따라서 미국은 1947년 유럽의 동맹들을 위한 마샬 계획(Marchall Plan)을 시행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이탈리아나 프랑스와 같이 소련에 충성하는 코뮤니스트당의 숫자가 증가하는 국가들에 대한 재정적 원조를 의미했는데, 심지어 그렇지 않은 지역인 영국은 큰 코뮤니스트당은 없었음에도(1945년 영국 코뮤니스트당(CPGB)에는 국회의원이 1명 밖에 없었다), 영국 제국의 전쟁 빚 일부를 상환하기 위해 노동당 정부가 마샬 원조를 수락했다. 이제 뉴욕은 세계 금융의 중심으로서 런던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했다. 달러 지배로부터 탈출하고자 한 소련은, 전적으로 사심이 없진 않았던 원조를 거부했고, 그 위성 국가들의 마샬 지원 수락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동유럽 국가들이 마샬 플랜에 참여하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그리고 그 외 서유럽 국가들이 부과한 무역 거부 조치에 대응하기 위해, 1949년 경제상호원조회의(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 Comecon)을 설립했다.
이는 양극단에 있는 세계의 제국주의 분파를 위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긴 세속적 호황”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호황의 조건을 만들어 낸 것은 단기적인 마샬 계획의 지원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가 가져온 자본의 대규모 평가절하였다. 전체 세계는, 특히 미국, 소련, 그리고 서유럽과 동아시아 국가들은 유별나게 높고 지속된 성장을 경험했고, 이 모든 것과 함께, 이전에는 성취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 사실상 완전 고용(no unemployment)을 맞이했다. 이것은 1930년대와 극적인 대조를 이뤘으며, 그 계속되는 호황에 직면하여, 그들이 경험한 “아우성치는 20세기”(Roaring Twenties)의 문제, 그 역사를 특징짓는 호황과 불황의 순환으로부터 자본주의가 탈출한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게 했다.
그러나 재건은 그 한계가 있었다. 1970년대 무렵,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다시 위기를 가져왔는데, 그 위기가 19세기의 사업 불경기의 형태는 아니었다.
“축적 수단으로서 경기 순환은 명백히 끝났다; 아니 경기 순환은 세계 전쟁의 ”순환“이 되었다. 자본주의에서 전쟁은 독특한 것이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 전쟁이 싸워 쟁취하고자 하는 목표들이 그러하다. 다른 모든 가설적인 이유를 제쳐 두고, 주요한 목표는, 승전 열강들의 전매특허인 정책들로, 경쟁국이나 경쟁 블록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전쟁은 이제 국제적인 경쟁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것은 ‘경제 외적’ 수단에 의한 경쟁의 문제라기보다 사람들 사이 유혈 낭자하고 원시적인 투쟁을 위한 가식을 벗은 경제적 경쟁일 것이다.”(17)
이것이 쇠퇴기 자본주의에서 축적을 재건하는 수단이 왜 파괴 도구 생산의 증가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는지를 설명한다. 아래의 표는 영국과 미국에서 군비 증가를 보여주는데 1962년에 이르게 되면 430억 파운드가 군 예산과 무기 비용으로 매년 지출되고, 이는 “전 세계 총자본 형성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몫이다.”(18) 무기 생산은 폐기물 생산으로, 총 사회적 자본에 어떤 새로운 가치도 더하지 않는 생산이다. 진실로, 한 국가의 자본은 무기를 다른 나라에 판매함으로써 경제적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 그러나 거래에 사용된 돈은 그 나라 노동자들 노동으로 생산된 결정화된 가치 형태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 무기를 갖게 되면 그것으로 대체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
영국과 미국의 공공 지출, 1913-1969
연도 |
GNP 대비 국방비 비율(%) |
GNP 대비 전체 국가 지출 비율(%) |
||
|
UK |
USA |
UK |
USA |
1913 |
3.0 |
/ |
13.5 |
10.5 |
1923 |
4.7 |
/ |
27.5 |
11.0 |
1933 |
3.8 |
/ |
30.0 |
16.5 |
1938 |
4.9 |
1.5 |
31.2 |
19.5 |
1948 |
7.4 |
8.0 |
37.0 |
24.0 |
1953 |
8.9 |
13.2 |
35.0 |
27.5 |
1958 |
6.4 |
10.1 |
31.5 |
29.0 |
1960 |
6.2 |
9.0 |
32.5 |
28.0 |
1965 |
5.8 |
7.5 |
34.0 |
28.5 |
1969 |
5.3 |
9.0 |
39.0 |
32.0 |
출처: M. Barratt Brown, “The Economics of Imperialism”, 216쪽. |
정교한 핵무기 구매는 단순히 사냥을 위해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목적은 파괴를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 말은, 무기 생산은 가치의 창출에 연결되기보다 가치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윤율 하락에 대한 가상의 “역(逆) 경향”은 세계 자본을 위한 해결책이 아니며, 종국에는 오직 더 심각한 위기, 쇠퇴기 자본주의 아래에서 궁극적으로 전쟁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주요 특징들을 개괄했다. 자본주의 경쟁은 이제 개별 기업 간 경쟁이라기보다 제국주의 블록에 속한 국가 간 경쟁이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성장기 개별 기업들이 순수한 경제적 경쟁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제국주의 시기 국가 수준에서의 경제적 집중은 그 과정을 자본주의 아래 궁극적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제국주의는 지구의 가능한 상당 부분을 원자재, 투자, 시장의 원천으로써, 또는 그 이득을 더 잘 지키기 위한 전략적 기반으로써, 분할 하려는 각 자본주의 국가 내부 투쟁이었다. 제국주의 군비 경쟁은 모든 외교 전술, 무역 전쟁, 제재와 호의적 국가 협정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순수한 군사력이 뒷받침될 때 의미가 있었다. 쇠퇴기 자본주의의 위기는 최종적으로 제국주의 국가 간 전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왜 자본주의가 “버터보다 총을!”(guns not butter) 선호하는지, 교육, 주택과 같은 사회적 편익보다 일종의 폐기물 생산으로서 군비 지출을 선호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19)
1914년 이래, 제국주의 전쟁은 거의 중단되지 않은 사슬처럼 확장되었다. 물론 가장 충격적인 예시는 명백히 제2차 세계대전이었는데, 이 전쟁은 30년대 초반의 위기가 연장되는 것을 막기 위한 대규모 군비 지출에 뒤이은 것이었다. 영국, 프랑스와 소련을 각각 보면, 군비 지출은 1937년과 1939년 사이 각각 144%, 142%, 그리고 103% 상승했다.(20) 제1차 세계대전이 가장 지배적인 세계 제국주의로서 영국 자본주의의 파괴를 완성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명백히 미국을 세계에서 선도하는 자본주의 국가로 확립시켰다. 비록 전후 복구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유럽 산업과 영토 대부분을 장악한 소련이라는 점점 더 위험해지는 라이벌과 직면했지만 말이다.
전후 세계의 역사는 주요 제국주의 국가 둘이 모두 해외로부터 대량의 이윤을 유입함으로써 이윤율 하락 경향을 상쇄시키는 시도 속에서, 세계에 대한 더 큰 통제력을 확보하려 시도하는 역사였다. 따라서 냉전 속에서 제국주의적 갈등은 한국 전쟁부터 베트남 전쟁, 아프리카에서의 전쟁들, 그리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따른 다양한 중동 위기와 같은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불편한 “평화”를 산산조각 내는 대리전쟁의 형태를 취했다. 제국주의는 소수의 높은 유기적 구성을 한 선진 자본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의 산물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이것이 영토의 물리적인 지배 - 식민주의 - 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 당시 지배적인 강대국들은 그들이 그 무엇이 되었든 영토에서 뽑아낼 수 있는 가치를 추출하기 위해 직접적인 통제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레닌은 정확하게도, 자본의 수출이 제국주의의 주요한 추동력이라고 생각했음에도 식민지에서 초-이윤(super-profit)을 얻지 못하도록 반(反)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이 제국주의 열강을 막고, 따라서 자본주의에 상당한 한 방을 날릴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는 두 가지 점에서 틀렸다. 첫째, 반(反)맑스주의 역사가들(21)이 분명히 보여주었던 것처럼, 인도라는 명시적인 예외를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식민지들은 제국주의의 입장에서 그리 수익성이 크지 않았다. 그 당시 그들이 주목하지 못한 것은, 아프리카를 비롯한 땅을 점령하는 다른 동기들은 종종 부정적인 것 - 라이벌로 하여금 특정 영토를 이용할 수 없도록 하려는 것 - 이었던 반면, 식민지가 곧 수익이 날 것이라는 기대했다는 점이다. 둘째, 식민지의 개발 및 군비 때문이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들을 지배한다는, 더욱 교묘하고 훨씬 더 수익성이 큰 방법(곧 “신-식민주의”로 불리게 된다)을 개발하였다. 비록 정치적 의미에서 명목상 독립했지만, ‘새로운’ “개발도상국” “제3 세계” 국가인 구 식민지들은 세계 시장을 유의미하게 무너뜨리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선두의 제국주의 열강과 “개발도상국” 나라들의 격차는 확대되었다. 1952-1954년, 미국의 1인당 생산량은 1,870달러는 인도의 60달러, 이집트의 120달러였다. 1969년, 이 수치는 미국이 4,240달러였는데, 인도는 110달러, 그리고 이집트는 160달러가 되었다.(22) 2022년, 이 수치는 미국 70,246.6달러, 인도 2,256.6달러, 그리고 이집트 3,698.8달러였다.(23)
앞선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로를 “벗어날” 수 없었던 개발도상국 세계의 실패는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관계와 분리할 수 없다. 자기 노동력만으로는 충분한 잉여가치를 추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국주의 열강은 잉여가치를 저개발 지역으로부터 추출하려고 시도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제국주의 열강은) 저개발 국가들의 자본 축적을 통한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것)를 막았고, 따라서 이 지역에서 자본 재생산 기반을 파괴했다. 따라서, 제국주의자들은 아래와 같은 딜레마에 직면한다.
“낙후된 지역을 계속 착취하는 것은 서서히 개발 가능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나 착취하지 않는 것은 자본의 이미 불충분한 이윤을 더 감소시킨다는 의미이다.”(24)
이러한 상황을 바꾸려는 시도로서의 선진 국가의 “지원”은, 가치 법칙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었다. 무조건적인 “원조”는 없는 것이 당연했고, 그것은 자본이므로, 따라서 자본으로 작동하므로, 즉, (원조는) 이윤과 이자라는 이름의 기대 수익을 대가로 빌리는 것이 되었다. 이전 원조에 대한 이자와 빚을 지불하면, 1965년에는 (쿠바를 제외한) 모든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은 8억 8천3백만 달러의 순손해가 발생한다는 계산이 나왔다.(25) 이 당시 쿠바는 제국주의에 의존하던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상황이 좋았는데, 소련으로부터의 30억 달러 “원조”의 수혜자가 되었다. 비록 더 나은 조건이었음에도 쿠바의 경제는 계속 침체했다. 소련은 주요 제국주의 열강들 가운데 약자였기 때문에, “원조”에서 경쟁자를 약화하기 위해 낮은 이윤율과 장기의 대출을 제안했다. 이는 결코 관대한 것이 아니었다. 쿠바와 다른 노동자들의 잉여가치는 이미 알고 있는 그들 나랏빚과 이자를 갚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전후 제국주의 게임에서 소련의 다른 약점은 무기를 공급함으로써 민족해방 투쟁을 지원할 수는 있었지만, 베트남 전쟁의 운명이 명백히 보여주었던 것처럼, 독립을 쟁취한 이후 경제적 지원은 거의 할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저개발 경제가 견고한 산업 기반을 확립하기 어려운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는 고도의 유기적 구성을 한 자본이 세계 시장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서 설명한 것처럼, 각 자본은 경쟁으로 인해 대략 유사한 가격으로 판매할 수밖에 없으므로, 낮은 유기적 구성을 한 자본으로부터 고도의 유기적 구성을 한 자본으로 지속적인 가치의 유출이 발생한다. 더욱이, 이윤율은 균등화(equalisation) 경향이 있으므로, 낮은 유기적 구성을 한 국가들은 새로운 축적을 위한 충분한 규모의 이윤이 없음을 알게 된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의 「사회 개혁인가 혁명인가」(Social Reform or Revolution)에서 상당히 명확하게 본 것처럼.
“생산성과 교환 사이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노동 생산성 그 자체의 성장에서 비롯된, 이윤율의 지속적인 하락 위협이다. 그것은 어떤 새로운 중소 규모 자본의 기업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극도로 위험한 경향이다. 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자본) 형성, 그러므로 자본 배치의 확장도 제한한다.”(26)
그러므로, 저개발 국가가 그들이 생산할 수 없는 자본을 대출하여 무거운 빚더미 위에 앉게 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1960년대 개발도상국의 공공 대외 재무는 매년 14%씩 상승했다. 1968년 6월, 빚은 475억 달러에 달한 것으로 기록되었다.”(27)
어떤 이들은 저개발 국가의 계획 경제 정권이 해당 지역 잉여가치 생산 부족의 만성적 영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안적 국가 자본주의 해결책으로 소련을 모델로 삼은 것을 지적했다.(28) 그러나, 쿠바와 극찬받던 중국 사례가 대표하듯이, 그런 지역에서 계획 경제의 적용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 된 것이 아니라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국외 자본”이 실패하자, 지역 부르주아지는 축적을 위한 충분한 잉여가치를 집중시키기 위해 집중화된 국가 권력에 고삐를 채우고자 했다. 따라서 그들은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민족해방”을 달성하길 희망했다. 쿠바는 우리가 이미 언급했다. 그러나 중국은 많은 인구와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1960년대 핵폭탄을 개발하고 위성을 쏘아 올렸다. 그러나 중국에 호의적인 이들조차도 아래와 같은 것은 인정했다.
“이례적인 진보에도 중국은 여전히 결정적인 경제적 도약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통계적 계산이 보여주는바, 1인당 곡물 공급이 여전히 국민당의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 때 달성한 것과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29)
가치 법칙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똑같이 작동했다. 계획 경제의 집중화도 독립적인 자본주의의 발전에 충분한 잉여가치를 불어넣지 못했다. 전후 호황이 1970년대 초반 “자유세계”의 종말에 도달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지표들은 소련과 그 위성 국가들도 하락세에 직면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우리도 당시 이 경제들의 이윤율을 계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성장률을 보아 모든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었다. 1951-5년 시기, 코메콘(동구 경제상호원조회의)의 전반에서 성장률은 1960년대 성장률에 비해 2배였고, 5개년 계획(1971-5년)의 주요 목표 달성은 모조리 실패했다.(30) 냉전의 양측 모두에게 “멈춤쇠(détente)”는 평화를 향한 진정한 단계를 밟는 데서 온 것이 아니라 군비 경쟁을 완화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베트남 전쟁의 비용이 1973년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에 이바지했다면, 코메콘의 무기 생산은 GDP 성장 둔화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점차 지속 불가능한 것이 되고 있었다. 이것이 부패, 낮은 노동 생산성, 알콜 중독자 비율의 증가, 그리고 소비재의 부족이 만연했던 브레즈네프(Brezhnev) 시절이었다. 방향을 바꾸려는 시도는 1982년 그가 죽은 이후에서야 있었고, 이 시기에 소련은 1979년 필사적인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자신만의 베트남 전쟁에 휘말려 있었다.
그동안, 중국과 미국 모두 경제적 문제로 인해, 1971년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그들의 화해를 향한 첫 단계를 밟았다. 새로운 접근은 1958년 대약진 정책과 같은 중국의 주체적인 발전 시도의 실패, 그리고 1960년대 중반 소련과의 관계가 무너진 이후 뒤이은 스태그네이션 결과였다. 그러나, 1970년대 말(마오쩌둥은 1976년 사망), 그리고 1980년대 초반, 중국 코뮤니스트당, 서유럽의 지도자들과 기업인들은 모두 그들 각자의 문제를 다루는데 상호 이득이 되는 방법을 우연케도 발견했다. 서유럽 자본에 있어서는 스스로 해결책은 만들지 못한 채, 1970년대 위기 비용을 노동자에게 지불하도록 하려는 시도에 완고하게 저항하는 노동자를 패배시키는 방법을 제공했다. 서유럽의 산업 구조조정(즉각적인 자본의 단순한 형태를 취하곤 했다.)은 일본, 한국, 그리고 중국 내 서유럽 금융 자본(그리고 멕시코와 같은 보다 작은 장소들)의 대규모 투자를 동반했다. 이곳은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매우 낮은 임금으로 일하게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것은 규제가 사라진 통화, 금융화, 세계화의 경제적 결과이며, 이에 더해, 우리가 다음 장에서 다룰 소련 붕괴의 결과이기도 하다.
-ER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주>
(16) 클로프와 콜(Clough and Cole), 앞의 책. 851쪽
(17) 매틱(Mattick), 앞의 책. 135쪽
(18) M. Kidron, Western Capitalism Since the War, 쪽
(19) 적어도 세계부르주아지의 부분적 실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을 행복하게 함으로써 확보할 수 있는 명백한 정치적 강점.
(20) 수치는 클로프와 콜(Clough and Cole), 앞의 책. 818쪽.
(21) 고전적인 예시는 D.K. Fieldhouse, The Theory of Capitalist Imperialism (Longman 1967)
(22) Key Issues in Applied Economics, 1947-1997 Economist Intelligence Unit
(23) data.worldbank.org
(24) 매틱(Mattick), 앞의 책. 262쪽
(25) T. Hayter, Aid as Imperialism, 1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