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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백발 사회주의자의 ‘술·학문·예술·혁명’… 고희 맞아 회고록 낸 오세철 교수

  • 분류
    잡기장
  • 등록일
    2012/11/24 12:52
  • 수정일
    2012/11/25 13:50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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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 사회주의자의 ‘술·학문·예술·혁명’… 고희 맞아 회고록 낸 오세철 교수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백발의 청년. 그는 자신을 열 살이라고 소개한다. “환갑이 한 바퀴 돌았다는 얘기니까. 그때부터 새로 시작하면 열 살이죠. 요즘 사회주의 운동 하는 세대들도 다 늙었어요. 30대도 찾기 힘들어. 길게 보면 10대와도 어떻게 운동을 할까 싶어서 나이도 열 살이라고 한 겁니다.”

지난 21일 연구실에서 만난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69·사진)는 여전히 주름살을 찾기 어려운 말간 동안에 동그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젊은이도 소화하기 힘든 분홍빛
티셔츠와 짙은 감색의 스키니진을 입은 그는 올해 고희를 맞았다. “집사람이 인터넷 쇼핑에서 만원인가 주고 사준 옷들이오. 양복은 불편해서 주례 설 때만 입어.”

 

 

 

 
 


고희를 맞은 지난 10일, 그는 서울광장 한편에서 2000일 가까이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재능교육 노조의 농성장을 찾았다. 그날 열린 문화제에서 오 교수는 자신을 “(9년 전 학교를 그만두고 나온) 예전에는 비정규직 교육노동자였고, 이제는 혁명하는 연극노동자”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간 예술은 파시즘이나 스탈린, 부르주아의 선전도구로만 쓰였는데 이젠 혁명과 예술이 진정으로 만나는 판을 만들자”고 말했다.

고희를 맞아 내놓은 회고록 <술, 학문, 예술, 혁명의 사중주>(빛나는전망)도 그런 내용이다. 80세쯤 자서전을 쓰겠다는 오 교수의 ‘중간 결산’이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인 그는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한 선전·선동단체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을 결성했다는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2심까지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럼에도 최근 그는 ‘국제꼬뮤니스트전망’이라는 ‘조직’에 다시 참여했다. “피켓 들고 시위한다고 국가보안법은 철폐되지 않습니다. 현장의 노동자들이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떳떳이 얘기하고 다 감옥에 잡혀들어갈 정도가 되어야죠. 악법은 어겨서 깨야 합니다.”

ㆍ“노동자들과 수차례 술자리를 하면, 나를 동지로 인간으로 받아준다”

“오 교수는 술자리에 한 번 딱 들어앉으면 일어나질 않습니다. 사람이 그래야 해요. 술을 먹었다 하면 일어나지 말고, 혁명을 한다 해도 일어나지 말고 그 자리에서 버텨야 합니다.”

지난 17일 연세대에서 열린 오세철 교수의 고희 출판기념회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오 교수는 “술잔을 잡으면 내려놓지도 말고, 털지도 말고, ‘카-’ 하지도 말고, 찡그리지도 말고, 떼지도 말고”라는 ‘노털카찡떼’ 원칙을 갖고 있다. 술뿐만 아니라, 예술도 학문도 혁명도 “끝까지 놓지 않는다”는 신념으로도 통한다.

“탄압이 무서우면 사회주의 운동을 왜 합니까. 골방에서 하고 말지. 마르크스주의자는 아주 공개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노동자·대중들이 자신의 사상을 깨달을 수 있어야죠. 사노련이 그런 공개 운동의 시작이었어요. 탄압을 한 번 당하면 움츠러드는데 그럴 필요 없어요. 어차피 쟤네들(공안기관)은 경향신문에서 이렇게 써 주지 않아도 우리가 뭘 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숨는 건 어차피 불가능해요. 잡아가면 또 법정싸움하고, 또 잡혀가야죠.”

 

지난 21일 연세대 교정에서 만난 오 교수는 “술 마시고 늦게 들어가는 일이 잦아서 집사람에게 가장 미안하다”며 “집사람은 교회를 다니는데 지난번 내가 구속됐을 때 집회에 나와 ‘이명박이 믿는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은 다르다’고 할 정도로 나와 생각이 통하기 때문에 그래도 많이 참아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 청탁불문 등 술자리 다섯가지 원칙
학문·예술·혁명에도 똑같이 적용


▲ “주책없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빗속을 뚫고 새벽까지 뛰어다녀”


▲ 민주노총은 자연스럽게 해체될 것
비정규직 중심으로 다시 재편되야


책의 제목도 그렇지만 ‘술’을 빼놓고 오 교수를 얘기할 수 없다. “제목 첫 번째로 술이 들어가니까 나를 술꾼인 줄만 알고, 김수행 교수도 밤낮 술 얘기 좀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술은 학문·예술·혁명을 엮어주는 동력이라고 생각해요. 술 얘기를 아직 하는 건 여전히 건강하단 소리고, 사람과의 관계와 운동을 계속 한다는 얘깁니다.”

 

오 교수는 책에서 자신의 학문·예술·혁명, 그 속에서 술과 함께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러고는 언급한 사람들에게 ‘오세철을 말한다’는 제목으로 원고를 청탁해 실었다. 찬양일색의 의례적인 글이 실린 건 아니다. 털어놓은 속내를 거르지 않고 모두 담았다. 역사학자 최규진은 노골적으로 흉을 본다. “오 선생님은 주사가 있다. 물론 하찮은 개인사를 늘어놓으며 시간을 축내는 일은 없다. 우리네 삶과 조직을 이야기하시는 것을 무척 좋아하신다. 그래도 그분은 술자리에서 너무 자주 질퍽거리신다. 못내 헤어지기 싫어 사람들을 붙잡고 늘어지기도 하신다.”

술을 마셨다 하면 새벽은 기본이다. 연세대 재학시절부터 학교 농구선수였던 신동파, 하의건 등 대주가와 어깨를 겨뤘다. 한 번에 보통 막걸리 한 말 정도를 마셨다고 한다. 주변에선 오 교수를 ‘알코올중독자’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는 매일 마시고, 혼자 마시고, 안주를 안 먹는 알코올중독의 요건에 자신은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주변에서 ‘술병이 났다’는 소문이 돌면 100일이든 6개월이든 술을 끊는다. 술만을 위한 술자리도 절대로 만들지 않는다. 강내희 중앙대 교수는 “오 선생의 건배(원 샷) 제안은 악명이 높지만 그의 과음은 경계를 벗어난 술 마시기”라며 “오 선생의 잦은 과음, 그리고 술자리에 동석한 사람들을 향한 그의 ‘원 샷’ 제안은 함께 혁명하자는 외침이 아닐까 싶다”고 말한다.

오 교수는 책에서 “술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었을까”라고 말한다. “오래전부터 나는 마르크스주의자, 사회주의자를 자임했고, 자연스럽게 투쟁과 혁명의 주체인 노동자들과 만나게 됐다. 만일 내가 술도 못 먹고 거칠고 질펀한 뒤풀이 자리도 못하고 노동자들과의 관계가 이어지지 못했다면 나는 평범한 ‘진보적’인 학자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이 아닌 수차례에 걸친 뒤풀이와 술자리를 같이 하고 더 진솔하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 동지들은 먹물의 벽을 깨고 나를 인간으로, 동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우리는 물질인 술로 만나 선입견과 편견, 하찮은 지식과 굴절된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바로 그것이 술의 힘이다.”

오 교수는 술을 마시는데 다섯 가지 원칙이 있다. 맑은 술과 탁한 술, 사람과 안주를 구분하지 않고(청탁불문), 거리와 주제의 멀고 가까움을 묻지 않고(원근불문), 밤낮을 가리지 않고(주야불문), 지위와 위치를 가리지 않으며(고저불문), 삶과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생사불문). 그 원칙은 똑같이 학문·예술·혁명에도 적용된다. 예컨대 학문에 청탁불문의 원칙을 적용해 보자. 그에게 순수·응용 등의 학문분과는 의미가 없다. 오 교수가 경영학과 교수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자본주의의 핵심적 도구학문인 경영학 속에서 내 뜻을 펼쳐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사회심리학과 조직행동론 과목에서 그는 “제대로 된 경영학 이론은 역사·사회·인간에 대한 깊은 인식이 밑바탕이 돼야 한다”고 가르쳤다.

오 교수는 “고희가 된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오 교수를 보는 사람들이야말로 그 사실을 좀처럼 믿지 못한다. “주책없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다음날 아침까지 술을 마시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새벽까지 시청과 동대문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2009년 용산 참사 당시에는 혹한의 설날에 2박3일 동안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철야농성을 했고, 유난히 더웠던 평택 쌍용자동차 점거 파업 현장에 함께하기도 했다. 그 일로 폐렴을 앓아 입원을 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눈빛은 형형하다. 글자를 볼 때도 돋보기를 쓰지 않고, 가는귀가 먹는 일도 없었다. 특별히 하는 운동도 없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오 선배야말로 ‘나이를 먹는다’는 한국말 그대로 나이를 한 살씩 먹어치워 점점 젊어짐이 확실하다”며 “남들이 좌파라고 부르는 나 같은 사람은 극우파로 보일 만큼 발본적 입장에서 실천해 온 열혈전사”라고 말한다.

최근에 오 교수는 연극배우로 데뷔하기도 했다. 백혈병으로 숨진 삼성전자 여성노동자 등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 <반도체 소녀>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문제 등을 다룬 <시계1>에 출연한 것이다. 그는 영문학자이자 희곡번역가였던 오화섭 연세대 교수(1979년 작고)와 극단 ‘여인소극장’의 대표이자 배우였던 박노경 이화여대 교수(1950년 작고)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은 진보적 연극운동의 동지이기도 했다. 그는 어머니의 극단이 공연한 입센의 <인형의 집>에 아역으로 출연하기도 했고, 고교 3학년 때는 <제17포로수용소>를 학교 무대에 올려 세프튼 역을 맡기도 했다. 오 교수는 “1년 뒤면 명예교수로 학교 강단에 서는 것도 끝나는데 이젠 ‘비정규직 배우노동자’로 남을 것”이라고 말한다.

오 교수는 건강 비결의 하나로 ‘붉은 혁명의 비타민C’를 소개한다. 본래 약을 먹어본 적이 없지만 어느 날 서울대 이왕재 교수가 “비타민C는 위와 장에 좋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술꾼으로서 “무릎을 쳤다”고 한다. 오 교수는 늘 주머니에 빨간색의 비타민C 알약을 갖고 다닌다. 하루 세 끼 여섯 알은 기본이고, 술을 먹는 날은 차수에 따라 두 알씩 추가해서 먹는다. 3차까지 가면 12알을 먹는 셈이다. ‘동지’들의 건강을 우려해 백 명이 넘는 수련회를 가더라도 인원수만큼의 비타민C를 준비해 나눠준다. 의심이 많은 운동권들은 처음에 비타민C를 권하는 오 교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나 10년 넘게 비타민C의 ‘생체실험’ 대상이 된 오 교수의 건강상태를 보고는 상당수가 복용 대열에 들어섰다. “사람을 좋아하니까, 술을 먹어도 늘 즐겁게 먹으니 독이 안 돼요. 운동하는 사람들도 너무 스트레스 받으면 건강을 해쳐요. 나는 늘 ‘혁명의 무기를 제대로 간수하라’고 하죠.”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가 말하는 ‘혁명’을 공상주의자의 치기쯤으로 흘려 듣는다. 또 다른 쪽에서는 그를 ‘분열주의자’라 비난하기도 한다. 최규진은 그런 비난들을 소개한다. “타협도 없고 유연성도 없다. 입에 달고 사느니 혁명이고, 노동자 투쟁이고, 노동자 혁명당이다. 말하느니 ‘자본주의 붕괴론’이다. 그는 자본주의를 그럴싸하게 고쳐보면 좀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오 교수는 그런 말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이라고 말한다. 그의 신념은 ‘공상’이 아니라 ‘역사’에서 온다. 고희 기념으로 함께 내놓은 <비판적 교양인을 위한 오세철 강의>(빛나는전망)의 2부에서 그는 소련, 중국, 북한을 비롯해 남미의 좌파 정권까지 모두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진단한다. “지금까지 있었던 사회주의를 평가하고 뒤집고 정리하지 않으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하자는 얘기를 꺼낼 수 없습니다. 보통사람들은 여전히 그런 나라들을 사회주의라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노동계급을 억압착취하는 자본주의 혹은 국가자본주의였죠. 자칭 사회주의자라는 사람들을 보면 여전히 스탈린주의에 빠져서 소련이나 북한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생각이 다른데 실천이 같아질 수는 없다”는 측면에서 “무엇을 실천할 것인지를 제대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국제꼬뮤니스트전망’에 참여하면서 계간지 ‘꼬뮤니스트’ 발간 등에 나서는 것도 그런 이유다.

오 교수는 오늘날의 위기는 ‘경제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위기’라고 본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하는데,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를 점진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해 온 수정주의와 개량주의는 유럽의 지난 100년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 모두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그가 말하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란 바로 “혁명적 방법의 자본주의 철폐”를 의미한다. “사실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혁명적인데 따로 ‘혁명적’이란 말을 붙일 필요는 없죠. 다만 지금까지 여러 다양한 변종 사회주의가 존재했기에 구분하는 겁니다.”

오 교수는 ‘마르크스주의자’와 ‘마르크스연구자’를 구분한다. ‘주의자’는 이론과 실천이 하나되는 사람이다. 그 또한 본래 ‘강단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말을 들었다. 1977년 그의 제자 3명이 대강당의 유리창을 깨고 ‘유신철폐’를 외치다 체포된 모습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낀 그는 비로소 학내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그는 6월 항쟁에서 제자였던 이한열의 죽음을 목도하고 완전히 변모한다. 그는 “87년부터 25년의 세월은 나에게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2003년 그는 ‘혁명’에 좀 더 매진하기 위해 정년 5년을 앞두고 교수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주변에선 “퇴직금으로 빚을 갚았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오 교수는 미국·유럽 등에서 국제적으로 벌어지는 반자본주의 흐름에 주목한다. “자본주의는 전 세계의 생산을 하나로 편입시킨 체제이므로 한 나라 차원에서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세계적 흐름에 호응하기에 우리나라는 아직도 바닥을 치지 못했습니다. 제 역할을 못하는 민주노총은 자연스레 해체될 거예요. 과거 전노협(민주노총의 전신)이 싸우면서 만들어졌듯 비정규직 노동자 중심으로 다시 조직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는 대선과정에서도 투쟁을 통해 ‘현장’을 넓게 만들어가면서 대선판 자체를 조롱하는 판을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투표율이 30~40% 나오면 뭘 가지고 그들이 정당성을 얻겠어요? 누가 뽑히든 우리는 계속 싸운다는 장기적 전망을 줘야 합니다.”

물론 그의 생각과 인생 자체를 모두 “실패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앞서 나가는 게 실패는 아닙니다. 조금 뒤에서 보면 모험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왜 앞서 나가는지를 보면 그건 실패가 아니죠. 저는 조금 더 차근차근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충고로 받아들입니다. 사실 책에 등장하는 60여 명의 사람들도 고립돼 있다는 생각을 하겠지요. 그들이 이 책을 보면서 ‘아직도 이런 동지들이 함께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격려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는 늘 겸손하고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 알았던 노동운동가 고 이일재를 “공산주의자가 진정한 민주주의자임을 몸으로 보여줬다”고 평했지만 그야말로 어쨌건 ‘진정한 민주주의자’임은 분명해 보인다. 연극배우 오주환은 ‘막내배우’ 오세철을 이렇게 기억한다. “소극장의 분장실은 두세 명이 앉아 있어도 비좁은 공간이다. 내 기억에 선생님께서는 분장실에 단 한 번도 앉지 않으셨던 것 같다. 어두운 무대 뒤 구석 의자에 그저 묵묵히 앉아계셨다. 행여 다른 배우에게 방해라도 될까봐 작은 자세로 벽에 붙어서 앉아계셨다. 어둡고 좁고 답답한 그 공간에서, 선생님은 늘 특유의 인자하고 밝은 표정으로 앉아계셨다. 그게 내가 아는 오세철 선생님, 바로 그분의 모습이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1232233445&code=9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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