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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과제

2024년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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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전망 23(시리즈 4) 사설

 

 

2024년이 시작되면서 세상은 끔찍한 곳으로 보인다물론 그 중앙 무대는 가자지구의 대학살이다.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의 잔인한 공격과 이스라엘의 대대적이고 무자비한 보복으로 인해 이 글을 쓰는 시점에 수만 명이 사망했는데팔레스타인 대 이스라엘의 사망자 비율이 20:1에 달한다가자지구에서는 7,000명 이상이 '실종'되었고, 19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으며이스라엘에서도 5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매일 새로운 끔찍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인명 피해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를 청소할 의향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가자 지구의 인구를 다른 지역으로 영구적으로 이주시키려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역사적으로 인구의 강제 이동이 잘 끝난 경우는 거의 없다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주민들은 하마스 민병대의 인종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이데올로기와 압도적 전쟁 장비를 갖춘 이스라엘 국가의 인종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악랄한 덫에 걸려 있다모든 잔혹 행위는 상대방의 야만성에 공포를 느끼고 경악하는 더 많은 적()을 만들어내고그 공포를 이용해 더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잔혹 행위를 정당화함으로써 민족주의를 부추긴다.

 

혁명적 전망」 이번 호의 첫 번째 기사는 최근 벌어진 일련의 잔혹 행위의 역사적 맥락이스라엘 국가의 건국이 지역의 여러 공동체 사이 관계의 역사지역 및 세계 강대국들이 제국주의 이익을 위해 여러 집단과 국가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설명한다.

 

전쟁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레바논시리아이란예멘이 분쟁에 개입할 위험이 있다폭탄과 로켓 공격포격공습이 이 지역 전역에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이 글을 쓰는 시점인 1월 초헤즈볼라가 레바논 남부에서 '수백 발'의 로켓을 발사했다는 뉴스 보도가 나왔다지금까지 헤즈볼라는 하마스에 대한 실질적인 군사적 지원은 거의 없이 말뿐인 지원에 만족해 왔다이 두 민병대는 서로 다른 이슬람 종파 출신으로하나는 사우디아라비아와 걸프 국가의 수니파 단체가 동맹을 맺고 지원하고다른 하나는 이란이 지원하는 시아파 민병대이다그러나 둘 다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주요 후원자인 미국에 반대하고 있다한편미국과 영국은 더 넓은 이란과 동맹을 맺은 후티 민병대가 국가를 장악하고 이를 홍해의 국제 선박과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기지로 삼고 있는 예멘에서 더 넓은 분쟁에 연루될 수 있다.

 

이번 호에는 제국주의적 긴장이 고조되는 혼돈과 관련된 모든 내용을 담지 못했다이에 관한 추가 기사는 웹사이트에 게재할 예정이니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

 

물론 자본주의가 세상에 불러일으키는 공포는 전쟁만이 아니다석유 매장량을 보호하거나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추진점점 더 악화할 것으로 보이는 물 공급 분쟁리튬과 같은 원자재 확보에 이르기까지 환경 파괴는 전쟁이 일어나도 멈추지 않고 더욱 증가할 가능성이 크며그 자체가 전쟁의 원동력 중 하나이다한편 세계의 '지도자들'은 우스꽝스러운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8) 협상에서 알 수 있듯이 온실가스 배출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효과적인 조치에도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이 연례 잼버리는 이제 화석 연료 회사의 로비스트 수천 명과 국영 석유 회사에서 선발된 국가 대표들이 참가하는 전 세계 화석 연료 산업의 선전 도구로 공공연하게 활용되고 있다.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는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효과적인 조치에 합의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정반대이다화석 연료의 사용을 제한하려는 목적과는 달리국가와 기업들은 지구의 천연자원에 대한 파괴적인 착취를 계속하기 위한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한 무역 박람회로 이 회의를 이용하면서도 자본주의가 끝없는 이윤 추구로 인해 야기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녹색 자본주의'는 환상에 불과하며자본주의는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천연자원을 약탈하고 인구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결책은 없다두 번째 기사에서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 회의와 그 즉각적인 결과를 살펴볼 뿐만 아니라우리가 시작한 진로를 바꿀 수 없는 경우 헤드라인 뒤에 숨겨진 과학적 사실과 세계가 나아갈 전망을 살펴본다.

 

자본주의는 경제 위기가 정치 위기가 되고정치 위기가 환경 위기나 군사 위기인도주의 위기가 되어 경제 위기를 더욱 부채질하는 등 위기를 양산하는 체제이다. 2차 대전의 엄청난 파괴와 고통그리고 그 여파로 냉전의 적대감이 고조된 가운데 전후 호황을 누렸던 세계 자본주의는 1971년 브레턴우즈 협정 종료와 함께 전후 경제 합의를 종료하기로 한 미국의 결정 이후 50년 이상 장기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이윤을 회복하지 못하면서 반세기 동안 경제 위기일시 모면하는 해결새로운 시작경제적 황폐화가 이어졌고기술적으로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생활 수준을 제공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 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자본주의 쇠퇴의 경제적 토대시리즈의 4부에서는 1971년 브레턴우즈 협정이 종료되고 1991년 소련 블록이 해체된 후 케인즈주의 합의가 종식되고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세계화'와 '금융화'가 시작된 시기 사이의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을 살펴본다.

 

이번 호의 마지막 기사는 레닌 사망 100주년을 맞아 레닌의 업적과 유산을 살펴보는 역사적 기사이다맑스주의자로서 우리는 역사가 '위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개념을 거부하지만그렇다고 해서 중요한 역사적 시기에 중요한 인물이 살면서 활동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100년 전세계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상징으로 새롭게 탄생한 소비에트 공화국을 중심으로 한 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레닌이 사망한 1924우리는 '맑스-레닌주의'의 망토를 두른 소련을 포함해 세계 혁명의 물결이 가라앉고 반()혁명의 긴 밤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우리는 반혁명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당시에는 그렇게 명확하지 않았지만한 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레닌을 역사적 맥락에 놓고 그의 위대한 공헌과 오류그리고 반혁명의 후계자들이 레닌의 유산을 왜곡하는 것을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오늘날 국제주의자들에게 레닌의 가장 큰 공헌은 제1차 세계대전이 제국주의 전쟁이었으며 '내전', 즉 계급전쟁으로만 끝낼 수 있고계급전쟁의 무기로서 노동계급이 국제정치 조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또 다른 세계적 분쟁의 심연에 다다른 지금이것은 혁명가들의 출발점으로 남아 있다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

 

2024년 1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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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 단결과 연대를 훼손한 건설노조 대경건설지부를 비판하며

노동계급 단결과 연대를 훼손한 건설노조 대경건설지부를 비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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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불안의 주범은 이주노동자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다!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모든 인종주의-민족주의 반대한다!!!

 

 

1. 건설노조 대경건설지부 결의대회

 

지난 2023년 12월 27건설노조 대경건설지부는 대구 출입국·외국인사무소 앞에서 '불법고용 이주노동자 단속촉구출입국관리사무소 규탄지역민 일자리 사수 건설노동자 총파업 투쟁결의대회'를 열었다그동안 건설노조 일부에서는 일자리임금노동조건을 지키겠다며 불법 이주노동자 단속을 계속 주장해 왔다이는 윤석열 정권과 건설 자본의 건설노조 탄압으로 조합원들이 일자리에서 배제되고 경기침체로 일자리 자체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배제 정서를 더욱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노동조건은 한국 자본주의 착취체제를 유지하는 한 축이다노동력이 부족한 한국에서 자본과 정권은 매년 이주노동자 도입을 더 많은 업종으로 늘려가고 있다하지만이에 따른 이주노동자 인권은 현대판 노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이주노동자 임금체불은 해마다 늘어 지난해엔 1,300억이 넘고이주노동자의 70% 이상이 비닐하우스컨테이너 등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살고 있다역대 자본가 정권에 이어 윤석열 정권은 불법체류자를 양산해 온 고용허가제의 사업장 이동의 제한에 더해지역이동마저 제한했고올해 이주노동자 도입을 16만 명으로 늘리면서도 체불임금과 산재 상담인권 상담을 담당했던 전국의 외국인노동자 지원센터 예산을 전액 삭감해 버렸다자본가들은 이러한 이주노동자의 신분상 제약을 악용해 장시간고강도 노동을 강요하고 임금도 상습 체불해 왔다.

 

그런데도 대경 건설지부는 가자 총파업불법고용 이주노동자 퇴출시키자!”라는 반()노동자 슬로건을 걸고 조합원 2,000여 명을 집결시켜 결의대회를 진행했다이렇게 이주노동자를 배척하는 방식은 정주 건설노동자의 권리를 지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본가의 분열정책에 부역하게 되어 그들의 공격에 맞설 힘마저 잃게 만든다국제주의자로서 우리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노동조합의 조직적 활동으로 더욱 확대 양산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강력히 규탄한다우리는 자본의 분할통제 정책(이용하든 이용당하든)에 따라 노동자를 불법/합법이주/정주정규직/비정규직원청/하청남성/여성 노동자로 분열시키는 계급 단결-연대의 방해 세력에 맞서 노동자 국제주의 기치 아래 싸워나갈 것이다.

 

2. 인종주의-민족주의는 자본의 노동자 통치 방식

 

자본의 노동자 지배와 통제방식의 전제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자본주의 주기적 공황과 그에 따른 차별 대우이다이것을 자본은 정의공정상대적 과잉인구인적 자본론성차별인종-민족주의로 포장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형식적으로는 차별을 정당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본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차별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람들에게 수용하도록 한다이것이 지배계급이 주장하는 공정의 전제이다정당한 차별의 대표적인 사례는 인적 자본론이다사람을 자본으로 보고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교육훈련)를 많이 할수록 인적자본(사람)이 받는 보상도 크다는 것이 인적 자본론이다이런 점에서 자본주의 경영학에서는 능력에 따른 차별을 정당한 차별로 본다이 '능력'은 자본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되는 능력이며그것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본이 원하는 방향의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가 깔려있다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소통과 연대보다 개인의 능력을 키우고 인정받으려는 경향이 강해지는데노동자 내부는 분열과 경쟁이 심해진다결국이것은 자본이 노동 전반을 통제하기 쉽게 만든다건설노동자 일부의 이주노동자 단속 주장은 바로 이러한 자본의 이데올로기와 지배계급의 시각이 여과 없이 투영된 결과이며민족주의-계급 협조주의에 기반을 둔 조합주의 병폐이다.

 

3. 노동계급 분열에 맞선 투쟁과 노동자 국제주의

 

노동자 사이의 경쟁과 적대는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계급의 연대를 약화하는데이것은 자본가계급이 민족국가의 형태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하는 것과 부합한다그동안 자본가계급은 외국인(이주노동자혐오와 인종주의를 노동계급을 분할 지배하는 수단으로 이용해왔다……

정주 노동자의 임금을 하락시키고 부족한 노동력을 값싸게 채우는 역할불법 이주자의 지위와 존재를 이용하여 공공서비스와 복지를 하락시키고 국경의 군사화를 이루는 데 이용하고종교적 인종주의로 노동계급을 분할 지배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인종주의로 분열되고 분할지배에 순응한다면 투쟁은 약화하고 착취의 강도는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따라서 이러한 인종주의에 맞서 타협 없이 싸우는 것은 노동계급 단결을 복원하는 일이자 코뮤니스트 노동자의 시급한 과제이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이혜원, ‘인종주의와 노동계급’, 코뮤니스트」 8)

 

노동자에 대한 자본의 대표적 통제방식인 인종주의-민족주의는 철저하게 자본의 이익과 맞물려있다조합원들의 고용안정과 생존권을 이유로 정부의 미등록이주노동자에 대한 인권 유린을 정당화하고노동조합이 이주노동자에게 불법이라는 낙인을 찍고 단속하라는 집단행동을 하는 순간노동자들은 서로 분열되고 자본과 정권의 탄압에 무력해진다자본주의 쇠퇴기자본주의 위기를 노동자에 전가하며 상황을 모면하는 자본가계급에 이러한 노동계급 내부 분열은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착취체제의 생명을 연장하고착취자들에게 새로운 이윤 창출 기회를 줄 뿐이다.

 

자본주의는 일반화된 제국주의 전쟁으로 향하고 있고모든 위기는 더욱 심화하고 있다제국주의 전쟁경제위기기후위기팬데믹환경파괴에너지 위기생계비 위기위기의 폭주는 2024년에도 계속되고자본주의 체제가 지속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이 체제에서 고용불안저임금실업빈곤은 일상화되었다이주노동자를 비롯한 노동계급 일부를 배척한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는다모두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공동의 적인 자본가계급에 맞서 다수 노동계급이 단결하여 싸우는 길밖에 없다.

 

이주노동자난민을 배척하고 차별하는 모든 세력에 맞선 국제주의자의 입장은 단호하다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모든 인종주의-민족주의 반대!

 

우리는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지배계급의 정책과 그에 부역하는 세력에 맞서 비타협적으로 싸울 것이다나아가 모든 차별과 위기의 원인이자노동계급에 일방적으로 위기를 전가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연대하여 투쟁할 것을 호소한다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노동자 분열과 희생을 거부하고 자본가계급에 맞선 계급전쟁으로!

 

2024년 1월 24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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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7호] 그람시: 맑스주의와 관념론 사이

그람시맑스주의와 관념론 사이

오노라토 데이먼(ONORATO D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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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안토니오 그람시에 대한 신화는 끝이 없다가장 큰 신화는 공장점거 운동의 영웅이자 신질서( L’Ordine Nuovo)의 창시자이며, 1921년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PCd'I)의 창설자라는 것이다이 신화를 바탕으로 전후 개량주의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PCI)의 이론가들은 그람시의 이론적 개념과 범주를 사용하여 '유로 코뮤니즘'을 정당화하거나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실패한 시도로 러시아 블록에 대한 충성을 회피했다하지만이탈리아에 국한되거나 소련의 붕괴와 유로 코뮤니즘의 소멸로 사라지기는커녕그람시의 방대한 저서는 이제 전 세계 학술 연구의 기초가 되고 있다언어학에서 인류학을 거쳐 정치학사회학, '교차적 연구'에 이르기까지 그람시의 헤게모니 사상, '수동적 혁명', '현대 군주론', '진지전', '실천철학'은 객관적인 사회 현실의 존재를 부정하고 사회를 개인의 집합체로 환원시키는 탈()진리 시대에 번성하고 있다오래된 자본주의 중심지에서 산업 노동계급이 파괴된 후이 모든 생각은 노동당과 같은 이전에 계급에 기반을 둔 정치 조직의 재구성을 합리화하고 스페인의 포데모스나 그리스의 시리자 같은 자본주의 좌파의 새로운 포퓰리즘 운동에 기여하는 일에 이용되었다후자가 어떻게 차려입었는지에 관계없이그들은 대중의 노동계급 혁명이 가능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것을 전복시키지 않고 국가의 역할을 목표로 하는 대규모 시위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가 선거 지원으로 지지받는 기존의 정치 체제 내에서 일련의 운동과 동맹을 통해 점진적으로 제기될 필요가 있다는 공통된 견해를 공유한다.

 

이전 시대에-자본주의의 현재 축적 위기의 첫 번째 단계에서 노동계급이 사장의 공격에 저항하도록 자극받았을 때 자본주의의 좌파 정치 현장에서 아이콘의 무언가가 된 것은 또 하나의 그람시였다.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를 거치면서 1920년 토리노 공장점거의 대변자였던 신질서의 그람시가 공장점거와 노동자 협동조합의 급증으로 노동계급을 위한 길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자 아나키스트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열정이 불타올랐다우리가 이탈리아 좌파의 전통에 익숙해지기도 전에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과 그 전신인 혁명적 전망(1970년대 초)의 첫 번째 과제 중 하나는 노동계급이 작업장을 장악함으로써 코뮤니즘을 창조할 수 있다는 환상에 대항하고 자본가계급에 의해,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단순히 앞과 뒤로 움직이는 국가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그람시와 동시대에 살았던 오노라토 데이먼(Onorato Damen)은 자신의 언어로 "10월 혁명의 불길로 촉발된 혁명적 시기를 공유했다." 그는 그람시가 신화든 아니든 당대의 노동계급에 남긴 유산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맑스주의의 훼손과 코뮤니즘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의 모호함그리고 정치적 계급투쟁의 본질에 대해서무솔리니 정권이 무너지고 '일두체'가 1943년 말에 혼란스러운 북부 이탈리아에서 나치의 꼭두각시로 전락했을 때데이먼은 노동계급의 혁명적인 정치 조직을 재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었다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PCInt)은 국가자본주의 러시아가 자본주의의 경쟁하는 제국주의 세력의 일부임을 증명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서 설립되었다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은 수천 명의 노동자들을 미국이 지원하는 당파에 등록시켜 '민주적인 이탈리아'를 위해 '독일 나치'와 싸우는 대가로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예우를 표시했다. (그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데이먼은 톨리아티 암살단의 표적이 되었는데 그의 동지인 마리오 아쿠아비바와 파우스토 아티와는 달리 살아남았다.) 물론 이 시기에 그람시는 사망했지만, PCI가 이탈리아 국가자본주의 정치경제 구조에 대한 완전한 수용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은 주로 그의 사상과 점점 더 신화적인 인생 이야기였다. (실제로 1944년 러시아 망명지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온 톨리아티의 '살레르노 전환'은 PCI를 국가 통합,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 PCI 당파의 무장해제를 의미하는 '사회주의를 위한 무장투쟁'을 포기했다이는 노동자들이 다시 공장을 점거하고 현상 유지로의 복귀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토리노밀라노제노바에서 무장한 노동자들이 계급투쟁에 다시 참여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영미 제국주의의 입맛에 맞았다.

 

PCI가 이탈리아 자본의 정치 체제 일부로서 전후 역할에 정착함에 따라데이먼은 1921년 리보르노에서 설립된 맑스주의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과 같은 혁명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주장을 고찰하고 있었다현재의 책은 데이먼이 수년에 걸쳐서 작성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분석적이고 실제적인 맑스주의자로서 그람시의 단점에 대한 고찰의 산물이다책이 완성되기 전에 그는 사망했고 초안은 사후에야 발견되어 1982년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그 구조가 느슨하다지식인의 역할그람시의 역사관에 대한 크로체(Croce)의 영향 등과 같은 주제 중 일부는 현대 독자들에게 친숙할 것이다. "그람시의 글에서 계급역사의 비극적인 주인공그들의 경제적 이익사회적 관계의 복잡성진보와 쇠퇴의 역학관계는 단지 그림자로 표현되지만반면에 개성과 학문 그리고 개인에 관한 측면이 지배적인 부분이 될 것이다.” 그러나 데이먼의 관점은 맑스주의 이론의 진보가 단순히 영리한 개인의 추상적 비평의 산물이 아니라 계급적 신념을 변화시킨 누군가에 의해 종종 만들어진 노동계급의 경험과 지속적인 상호 관계의 일부라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있다. ("자본을  썼던  바로 그 사람이 코뮤니스트 선언과 노동자 인터내셔널 연설문도 작성했다.")

 

그람시의 초기 신질서」 시기(1919년 5월부터 1920년 가을까지)와 그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화신으로 칭송되었던 대중 공장점거에 대한 열정에 대해서데이먼은 그람시의 환상에 대해  전형적으로 관대하면서도 그들에게  공감하지는  않는다그는 역설적으로 코뮤니스트  지오반니 파로디(이탈리아 사회당(PSI)의 기권주의 분파선거 참여에 반대)는  "국가의 구조는 그대로 남아 있고 기업가 아그넬리는 피아트의 사장으로 남아있는 동안 전무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패권적 역할을 위한 일에 해당하지 않는 부분에 주목한다그러나 동시에 기존 국가 내에서 노동자 통제의 전후 PCI의 그림과는 달리 그는 그람시가 노동계급이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기능으로 적어도 공장 위원회를 구상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1920년 11월 말 이몰라 협약이 체결될 즈음에 신질서」 그룹은 해체되었지만그는 그 흐름이 리보르노 이전의 정치 오리엔테이션 회의에 동등한 조건으로 참석했다고 관대하게 주장한다당시 정치적으로 고립된 그람시는 아마데오 보르디가가 '코뮤니스트-사회주의분파를 만들어 그들 사이에 다리를 놓은 것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최대주의'와 근본적인 단절을 촉구하는 것을 지지했다그러나 그람시는 리보르노 대회에서 거의 일주일간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옛 토리노 그룹 중 오직 테라치니(Terracini)만이 강단에서 공장 평의회가 아닌 코뮤니스트 분파에 대해서 연설했다. (타스카와 톨리아티와 같은 그룹의 다른 주요 구성원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PSI와의 분열은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1919년에 설립된 코민테른의 규율)이 이탈리아당에 얼마나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놓고 일어났다보다 근본적으로논의되고 있는 문제는 어느 조직이 혁명당을 구성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본질을 구성하는가 하는 것이었다새로운 코뮤니스트당을 위한 혁명적인 맑스주의의 틀을 만드는 것은 보르디가에게 달려 있었다그 당이 결성되었을 때고립된 볼셰비키당에 의한 코민테른의 지배는 이미 반()혁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데이먼은 왜 '리보르노 좌파가 너무 분열된것을 바로잡기 위한 도구로서 러시아가 그람시를 첫 번째로 선택하게 되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그는 1922년 제4차 코민테른 대회 이후 모스크바에 남게 되었다보르디가가 1923년 감옥에서 석방된 후 집행부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시 맡는 것을 거부한 후 결국 그람시는 1924년 5월 당의 효과적인 지도자가 되었다그는 당시 모스크바의 책략으로 직책을 맡은 4명의 신입 회원 중 한 명인 톨리아티가 집행부에 포함되었다그런데도 원래 코뮤니스트당의 '볼셰비키'로서의 그람시의 역할에 대한 질문은 특히 자신의 개인적정치적 삶이 정책의 비참한 결과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데이먼에게 중요한 관심사였다이 사건은 그람시의 약점이 노동계급 내부의 혁명 정당으로서 PCd'I의 소멸과 반()혁명의 과정을 어떻게 촉진하고 돕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오늘날의 모든 혁명가에게 매우 중요하다사실 CWO는 마테오티(Matteott)의 위기 동안 PCd'I에 대한 그람시의 지도력과 조정 위원회의 강령에 관한 두 장의 영어 번역본을 이미 출판했는데,  이는 1926년 리옹 대회를 준비하면서 그람시와 그의 모스크바 지지자들의 조작에 맞서는 전투에서 패배한 내용이었다. (설명 개요와 함께 이 팸플릿은 여전히 CWO 인터넷 주소에서 이용할 수 있다.)

 

이는 학계나 대중적인 오락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1926년 말 무솔리니의 모든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탄압 이후 그람시가 우스티카(Ustica)섬에서 그의 첫 정치적 망명 생활을 보낸 44일간의 유튜브 영화를 볼 수 있다. TV 시리즈 인스펙터 몬탈바노에서 파지오(Fazio)로 널리 알려진 페피노 마조타(Peppino Mazzotta)가 안토니오 그람시 역을 맡으면서이 영화는 '여론 형성자'로서 기획되었다망명한 동료 보르디가와 잠재적인 정치적 논의는 피하고 있다그들 중 누구보다 먼저 그곳에 있었고 빌라 데이먼(Villa Damen)으로 알려진 '사라센 타워'가 즉흥적인 잔치 학교의 장소가 된 데이먼은 언급되지 않았다이것은 사소한 하나의 보기이지만디지털 세계에서 변화하는 지적 풍토에 맞춰 그람시의 이미지가 지속해서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신호다그러나 데이먼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계급 정치 운동은 결코 일반적인 지적 풍토의 일부로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람시를 다시 읽는 것은 그의 가르침의 이름으로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것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현대의 그람시주의는 개인과 정치적 혼란을 가중하는 연쇄효과를 가진 세계적인 지적 집착이다. 21세기의 혁명가들은 거짓된 친구들을 인식하고 자본주의의 종식에 대한 열망을 국제주의 노동계급의 입장으로 전환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노동계급 내부의 정치적 흐름으로서 국제주의 코뮤니스트좌파를 존속시키고 부활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에 대한 이러한 개요가 출발점이다그리고 그 누구라도 이 책이 읽기에 쉽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2019년 7

E. 레이너(E. Ray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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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그람시의 시간

 

그가 그럴 자격이 있든 없든, 10월 혁명의 불길에 의해 촉발된 혁명의 시대를 공유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그람시의 운명을 분명히 부러워할 수 없다그의 개인적인 삶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를 받아들이고 혁명이론을 이해하고자 하는 새로운 세대의 투사들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그리고 이념적인 속임수의 수단으로 바꾼 당의 기구에 의해 이용되었다.

 

그의 삶이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에 유난히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상황 일부로 기억되지만특히 초기 전후의 경제적정치적 위기에 대한 혁명적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파시스트 자본주의와의 싸움에서 최전선에 있었던 코뮤니스트당 활동가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그람시의 희생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사리사욕을 위해서 이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정치인들이 홍보하는 그람시는 그들의 정치적 이미지와 그들에게 어떤 오래된 헛소리도 흡수할 준비가 된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 무리 사이에서 찬사를 아끼지 않는 이름과 대의명분에 대한 그들의 필요에 맞게 조정되었다혐오감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그러한 필요성은 지난 20년간 책 시장을 포화시켰던 점령된 전기 작가와 논평가역사가와 지리학자문학 비평가심지어 함께하는 시인들을 대신했다이 점진적인 그람시에 대한 재구성은 그에게 가장 해로운 이데올로기적 프로필 중의 하나를 갖게 되었지만글을 쓰게 한 정당의 이익에 부합하는 프로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람시를 아주 잘 아는 사람으로서그가 가장 큰 정치적 성숙기에 도달한 시기를 공유하고 그 이후 그의 후기 저술을 연구해 온 사람으로서우리는 오직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그람시의 작품은 그의 해석 방식이 제공하는 도구나 그 자신의 목표 측면에서 볼 때 맑스주의에 기반을 두지도 않았고 맑스주의 사상으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우발적인 문제들과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찾는 절박함이 그에게 팽배해 있었지만그런데도 그람시는 마치 자신이 앞으로 심각하고 지속적인 실천적인 방법을 찾음으로써 그의 신체적인 장애를 보충하고 싶은 것처럼 열정적인 창의력으로 이 모든 것을 이상화하는 것을 좋아했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신화에 의해 생성된 철학 사이에서그람시는 분명히 전자에 해당했지만실제로는 교육취향 및 경향 면에서 후자로 기울어졌다어쩌면 그람시의 성격과 그 불완전성그의 이론적 방법의 단점과 정치적 계획의 경험주의에 대한 이 논쟁은 기회주의가 어떻게 계속해서 자신을 정당화할 방법이 있다는 것인가어쨌든 "좌파지성주의의 해부학적 표에 있는 그람시의 이 놀라운 생체 해부는 맑스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방대한 가정과 관점들을 밝혀냈다여기서 빠르게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1차 세계대전에 직면하여 그람시는 전쟁의 진정한 본질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문제에 대한 혁명이론의 발전에 근본적인 중요성을 부여한 레닌과 룩셈부르크와 달리 계급적 관점과 혁명 전략 측면에서 제국주의의 현상을 감지하고 이해할 수 없었다.

 

1914년 10그람시는 일 그리도 델 포폴로 [인민의 외침]에 등장한 전쟁의 문제에 대한 그의 첫 번째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작성했다.

 

"...역사를 사회의 다른 능동적수동적 세력에 대한 일종의 중단 없는 공격으로 구성된 자기 의지력 창조로 생각하고마지막 단절(혁명)을 위한 가장 유리한 조건을 준비하는 혁명가들은 '절대적 중립'이라는 잠정적 공식에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이를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중립'으로 전환해야 한다."

 

무솔리니를 파시즘의 논리적 서막인 혁명전쟁 이론으로 이끈 것은 이러한 "적극적이고 효과적인중립이었지만그것은 그람시를 혁명적 패전주의 이론이나 실천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더욱이 그람시가 자유에 대한 개념뿐만 아니라 크로체의 역사주의(정신의 창조로서의 역사)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념적인 용어 외의 어떤 것으로도 맑스주의를 상상할 수 없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실제로그람시는 10월혁명(라반티!(앞으로) 1918년 7월 25)에 대한 그의 분석에서 그람시는 "역사의 발전은 모든 기존 구도를 무너뜨리는 역사의 내재적 힘"이라고 하는 자유의 리듬에 의해 지배된다"라는 글을 작성했다."

 

그와 같은 관념론적 성향으로 인해 그는 평의회가 자본주의의 줄기 위에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객관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지만혁명당 건설의 역사적 필연성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막고 있었다.

 

우리가 리보르노 및 리옹 대회에서 처음으로 알았던 사람그리고 마테오티 살해에서부터 예외적인 법에 이르기까지 당을 주도했던 후기의 그람시는 훨씬 덜 독창적이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존재였다.

 

자생주의와 개성의 역할

 

같은 과정의 순간으로서 당과 계급의 구별을 명확히 하기 위해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1902)에서 카우츠키의 사고에 대해 잘 언급한 것을 기억할 가치가 있다그는 경제주의 및 자생성 경향에 대항하는 날카로운 반론을 정당화한다카우츠키는 "사회주의 의식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직접적인 결과가 될 것이다"라는 것을 부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회주의와 계급투쟁은 서로 다른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서로 나란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전제에서 일어난다현대 사회주의 의식은 심오한 과학적 이해에 기초할 수 있을 뿐이다사실 현대 경제 과학은 현대 기술과 함께 사회주의 생산을 위한 조건 중 하나이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느 것도 만들 수 없다과학과 기술은 모두 현대의 사회적 과정에서 발생한다과학을 깍아내리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부르주아 지식인들인데비록 현대 사회주의가 이 사회 계층의 일부 구성원들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중 지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일부 구성원들에게 그것을 전달했고프롤레타리아트는 조건이 허락하는 곳이면 어디든 그것을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에 도입했다따라서 사회주의 의식은 외부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유입되는 요소이지 자생적으로 발생하는 요소가 아니다."1)

 

이는 레닌이 확인시켜 준다.

 

"모든 국가의 역사는 노동계급이 오로지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만 노동조합 의식즉 노동조합에 결합하고 고용주와 싸우고 정부가 필요한 노동법을 통과시키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확신만을 발전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그러나 사회주의 이론은 지식인들에 의해교육받은 대표자들에 의해 정교화된 철학적역사적경제적 이론에서 비롯되었다그들의 사회적 지위의 관점에서 볼 때 현대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인 맑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 지식인 출신이었다같은 방식으로러시아에서 사회 민주주의의 이론적 원칙은 노동계급 운동의 자발적인 성장과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발생했다그것은 혁명적 사회주의 지식인들 사이의 사상 발전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로 나타났다."2)

 

분명히 그 질문은 전형적인 반론처럼 극도로 광범위하고 일방적인 방식으로 제기되었다그러나 논쟁의 영지가 있는 진리는 항상 부분적인 진리일 뿐이므로 배제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더욱 보편적인 진리의 필요성을 제기한다그들의 '궁극적인 의식'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조합주의 의식만을 정교화할 수 있는 사람들과 사회주의 의식을 전달하는 과학기술에 정통한 부르주아 지식인들 사이의 엄격한 구분으로 문제의 조건을 축소한다면 우리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이것은 결국 문제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과는 거리가 먼 근본적으로 이원적인 학문적 결론에 빠지게 될 것이다비록 그들이 서로 다른 전제로부터 생겨났지만사회주의와 계급투쟁은 여전히 하나의 과정계급의 존재-의 두 가지 얽히고설킨 순간의 결과이다.

 

과학과 기술이 사회적 과정에서 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인간의 힘이 그것에 내재하여 있지 않다면 사회적 과정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사회적 갈등과 투쟁 상황은 다양한 이해관계에 의해 추진되는 인간의 활동으로부터 비롯된다이것은 다양한 사회 범주들 사이의 분열 의식이 나타나고 결국 계급 적대감으로 결정되는 맥락이다.

 

이론적과학적 지식의 축적은 삶의 질이 점점 더 높아지는 지표로서 인간 지식의 광범위한 증가미각감수성새롭고 미지의 것에 대한 더 예민한 호기심에 대한 필요성 등의 일부이다한마디로사물의 연결고리는 인간 활동의 연결고리와 얽혀 있다사회주의는 아무리 영리한 공식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실험실 연구의 산물이 아니다그것은 단지 과학이 아니라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방법즉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등장하고 그 자체 모순의 무게로 점차 성장해 온 세상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다.

 

자본주의 자신의 경제 조직의 변증법이 사회주의적 결과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면이것은 평등과 자유에 대해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동경하는 인간의 목표이기도 하다보기를 들면맑스와 엥겔스 같은 과학자들이 자본주의 생산의 세계에 대한 비판을 심화시키고 있을 때이러한 부르주아지의 후예들은 부르주아지가 수십 년에 걸쳐 기술적 변화와 과학적 성과를 형성해 온 연구 도구를 이용했다자본주의 생산의 지원 아래 특히 동력의 엄청난 상승이 단순히 자본주의 때문으로 여겨야 하는지 아니면 부르주아 계급이 프롤레타리아트만큼 결정적인 요소가 아닌 인간 노동에 의한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지 궁금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우리가 맑스와 엥겔스의 공헌을 부르주아 출신 학자들의 작품으로 간주했다 하더라도그들의 신랄한 비판과 그들이 고찰하고 있었던 자본주의 체제의 파괴를 역사적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실패했다면우리는 극단적으로 진부한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자리매김한다'라는 것은 이러한 거장들의 중요한 업적을 과학적 측면과 더불어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으로서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계급의 대의를 자신의 것으로 여겼던 사람들의 업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보수적 순응주의에 대항하여 가장 날카로운 반론을 제기한 사람들이며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발전을 위한 존재 이유를 인식한 사람들이다그들은 현대사에서 두 기본계급 사이의 억제할 수 없는 투쟁의 자연스러운 결과로써 계급의 의의를 설명하고 혁명적 전복 이론을 발전시켰다자본을 쓴 사람이 코뮤니스트 선언과 1차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연설문도 썼다하나는 다른 것과 분리될 수 없다기본적으로 우리는 부르주아지의 이탈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부르주아 문화의 규범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중단했지만노동이 더는 인간에게 부담이 아니라 그의 인격의 자유로운 표현인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소외된 노동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맑스엥겔스그리고 후에 레닌과 함께 맑스주의와 연계된 사상가정치가지식인들로 이루어진 군대는 모두 '프롤레타리아트에 그 상황과 그 사명에 대한 의식을 도입하는임무를 갖고 있었다그러나 이러한 의식의 형성 요소들은 노동계급에 역사적 모체를 가지고 있으며이는 다시 과학적 체계화의 실험실에서와 같이 일부 개인의 의식에 반영되어 있으며따라서 이러한 지식을 계급에 반환하여 그것이 점점 더 분명하고 뚜렷한 방식으로 "목표를 의식할 수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변증법적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그것은 또한 성격의 역할을 정의하는 방법인 것 같다자본주의 내부에서 성숙한 내재한 모순의 역사적 결과로써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생산과 분배그들의 비타협적인 과학적 분석은 맑스와 엥겔스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적대적인 역할을 강조하도록 이끌었다무엇보다도그들은 혁명적으로 되기 위한 노동계급 사이에서 정치적 무장을 위한 성향을 추정하는 그들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고 그들이 규정하는 근본적인 이해관계가 계급에 충실하도록 그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일을 했다.

 

우리는 반복한다유물론의 초기 논문은 인간에 의해 역사가 만들어진다고 말한다따라서 만약 실제로 이것이 사실이라면무엇보다도 그것은 위대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이 사람들의 행동이 얼마나 정확하게 결정되는지 이해하는 것만 남게 된다이러한 부분에 관해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특정 국가에서 특정한 사람이 확실한 시기에 출현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순수한 우연이다하지만 그가 탈락한다고 하더라도 나쁜 것보다[tant bien que mal] 좋은 것이 더 많았던 것을 찾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결국그는 분명히 발견하게 될 것이다나폴레옹(이 특별한 코르시카인)이 프랑스 공화국의 소모적인 전쟁이 요구하는 군사 독재자가 되어야만 했던 것은 우연의 문제였다하지만 나폴레옹이 존재하지 않았다면다른 누군가가 그의 자리를 채웠을 것이다이것은 그러한 사람이 필요할 때마다 항상 발견되었다(시저(Caesar), 아우구스투스(Augustus), 크롬웰(Cromwell) )는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물론 맑스는 역사 유물론의 개념을 발견했지만티에리(Thierry), 미그넷(,Mignet) 귀조(Guizot) 같은 영국 역사학자들이 1850년까지 연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다그리고 모건이 같은 개념을 발견했다는 것은 그것을 발견할 시기가 무르익었다는 근거로 작용한다.

 

그래서 역사에서 다른 모든 그리고 명백한 사건들과 함께우리가 연구하는 분야가 경제에서 멀어질수록그리고 순수하고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의 영역에 가까워질수록우리는 그 발전 과정에서 오류가 더 많이 드러나고 그 곡선의 흐름이 지그재그로 진행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그러나 완만한 추세를 따라가다 보면 그리고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더 포괄적으로 취급되는 분야가 경제 발전 추세와 더 밀접하게 나란히 진행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3)

 

"정신적 또는 사회적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의 '성격'은 경제적 발전과 병행하는 인류의 지적 발전의 '평균적선을 외모가 막지 못하는 사건 중 하나로 분류될 수 있다."4)

 

이 점에서 레닌의 입장은 훨씬 더 정확한 형태와 의미를 갖는다우리는 이미 레닌이 당대의 경제주의와 자생주의에 반대하여 노동조합주의와 노동계급이 자신의 힘만으로 상사들에 대항하여 수행하는 투쟁에 내재한 근본적으로 협동조합주의적인 위험에 대해 어떻게 경고했는지그리고 어떻게 사회민주주의와 그보다 더 준비된 간부들에게 사회주의 의식을 외부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으로 유입시키는 임무를 맡겼는지를 이미 살펴보았다그리고 일방적이고 제한적인 해석즉 비()변증법적인 해석을 배제하기 위해그의 일반적인 접근법은 다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경향"이 저지르는 근본적인 오류는 자생성에 굴복하는 것과 대중의 자생성이 우리 사회민주당에 높은 수준의 의식을 요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대중의 자생성 급증과 운동의 확산이 클수록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적정치적조직적 작업에 대한 요구는 더 광범위하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퍼져나간다.

 

러시아 대중의 자발성 급증은 젊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러한 거대한 임무를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정도로 급속하게 진행되었다이러한 준비 부족은 우리의 공통된 불행모든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불행이다대중의 급증은 끊임없이 계속 진행되고 확산하였다그것은 시작된 장소에서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지역과 인구의 새로운 계층으로 퍼져나갔다 (노동계급 운동의 영향으로 청소년 학생일반적으로 지식인심지어 농민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동요가 있었다). 그러나 혁명가들은 그들의 "이론"과 활동 모두에서 이러한 급격한 증가를 따라가지 못했다그들은 전체 운동을 이끌 수 있는 꾸준하고 지속적인 조직을 설립하는 데 실패했다."5)

 

진정한 사회주의자이자 혁명적 전위대의 임무에 대한 명확한 비전속에 레닌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이론적인 레닌뿐만 아니라 과학적 인간그의 나라와 노동 대중의 현실과 접촉하고 있는 ― 침략적인 독점자본주의가 부과한 기계들의 새로운 노예화에 직면하도록 밀어붙일 필요와 본능에 의해 러시아 문명이 경제적정치적 중도주의의 마지막 흔적들과 결별하는프롤레타리아트의 원인과 동일시하고오늘날 맑스주의의 이론적 정확성의 증거를 찾고자 고군분투하는 혁명적 투사이기도 하다한마디로이는 맹목적인 직감과 비합리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투쟁에서 대중에게 뒤처지고 싶지 않은 투사이다이 경우 레닌은 집단적 열망의 구현으로서 이론강령과 구조 측면에서 그가 설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당과 하나이다무엇보다도 그들은 모두 그들이 대표하는 계급과 하나가 되어서당은 다양한 방식과 다양한 경험을 가진 노동계급이 추구하는 가장 높고 완전한 "최종 목표에 대한 의식"을 표현한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발전 수준이 어떠하든노동계급 자신에 대한 의식과 혁명적인 임무는 무엇보다도 전체 운동을 지휘할 수 있는 상설 조직의 대변인으로 인정받는 그러한 개인들에 의해 분명하게 표현된다.

 

<>

1)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참조

2) 앞에서 언급함

3) 엥겔스사회주의 학자, 1895

4) 플레하노프맑스주의의 근본 문제

5) 레닌앞의 책. (영어판 53: 9프로그래스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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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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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파괴하는 것 외에 더욱 긴급한 일은 없습니다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조건 아래서 더는 살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를 실현하지 못하면 소멸한다는 위협을 받아왔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3월 자모치(폴란드)에서 유대인 가정의 다섯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1871년은 파리코뮨의 해였고인터내셔널 내에서 바쿠닌의 음모에 대항한 투쟁이 있었던 때였다. 17살 룩셈부르크는 폴란드에서의 억압 때문에 스위스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취리히대학에서 몇몇 과목들(식물학수학경제학역사 및 법학 등등)을 수학했다. 1897년 그는 '폴란드의 산업발전'에 관한 박사 논문을 제출했다. 1890년대에 이미 그는 폴란드 출신의 다른 동지들과 함께 제인터내셔널의 오래된 원칙들에 의문을 제기했다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발달을 감지할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인터내셔널의 저항에 맞서폴란드의 민족자결권이 더는 의제가 아니라고 결론지을 용기를 갖고 있었다.

 

1898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로 이주하여 독일사회민주당(SPD)에 참여했다독일사회민주당 내부에 하나의 경향이 출현했는데 그 주요 대표자가 베른슈타인이었다그 경향은 자본주의가 다소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가능하다는 생각을 옹호했다사실상 베른슈타인은 운동의 목표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룩셈부르크는 그의 답변혁명이냐 개량이냐(1899)를 썼다그 시기 동안에 이미 그는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에 앞장섰다.

 

1903년 맑스주의의 침체와 진전이라는 글에서 그는 맑스와 엥겔스의 죽음 이후 맑스주의 운동에서의 침체를 비탄하며 새로운 이론적 노력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맑스주의 자체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룩셈부르크는 1916년 옥중에서 쓴 ()비판의 끝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맑스주의는 언제나 새로운 인식을 얻으려고 애쓰는 혁명적인 세계관이다이는 한번 유용했던 표식에 형식적으로 되는 것을 철저히 혐오하며자기비판이라는 정신적인 격렬한 울림에서그리고 정신적인 천둥·번개에서 생명력을 가장 잘 유지한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에 뒤이어 러시아에서 최초로 대대적 파업의 큰 물결이 일어났다룩셈부르크는 20세기 계급투쟁의 새로운 원동력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 중의 하나였는데이제는 노동자들의 주도성이 특징적인 요소가 되고 계급투쟁은 노동조합이나 당 기구에 의해 계획” 될 수가 없다비록 룩셈부르크가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는 않았지만대대적 파업당 그리고 노동조합이라는 책에서 그는 이러한 대중 활동을 강조했다계급투쟁의 이러한 새로운 원동력을 노동조합과 증가하는 독일사회민주당 내부 인자들은 격렬한 투쟁으로 꺾어버리려 했다노동조합 기구와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당 내부에서 대대적 파업에 대한 논쟁을 금지했다. 1906년 룩셈부르크는 대대적 파업에 관한 책 출판 후 계급 증오를 조장했다는 선고를 받고 2개월 동안 수감 되어야 했다독일사회민주당의 이전의 지도자로 맑스주의의 정통적인 교황으로서 알려진칼 카우츠키는 룩셈부르크의 과격한 노선에 점점 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이 시기 동안 룩셈부르크를 평화롭고”, “조화를 사랑하는” 독일사회민주당 안에 곤란을 유발하는 유대인”, “외국인”, 그리고 노처녀라고 비방하는 캠페인과 중상모략이 강화되었다.

 

1907년 점증하는 전쟁위협에 대응하여 조직된 제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레닌 그리고 마르코프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본주의 계급지배의 철폐를 촉진한다는 공통된 지향을 위해 투쟁했다. 1912년 자본의 축적에서 룩셈부르크는 맑스의 저작 속에 존재하는 한계와 모순을 용감하게 지목했었다그의 책은 아직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고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시장의 역할과 군국주의의 특수한 기능을 파악하는데 기본을 제공한다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2년 전에 쓴 그 책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에 대한 필요불가결한 통찰을 제공한다.

 

1914년 8월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이 있자마자 룩셈부르크는 전쟁 반대 투쟁에서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유니우스 팸플릿은 그래서 1890년대 이래 새로운 조건을 이해하려는 그의 투쟁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된 정치적사회적 경제적 조건을 설명하고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도전을 설명하려는 그의 투쟁과 직접적인 연장선 속에 놓여있다. 1917년 여전히 감옥 속에 있으면서 러시아에서 그때 막 시작된 혁명의 중요성에 대해 최초의 분석을 제공했다.

 

룩셈부르크는 유니우스 팸플릿에서 1차 세계대전의 서곡이 되는 과정과 개량주의의 한계를 매우 훌륭하게 서술한다

 

"오늘날 전쟁 탄생의 역사는 1914년 7월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자연법칙의 필연성으로 한 가닥 한 가닥 짜인 제국주의 세계정치의 촘촘한 그물망이 5대륙을 감싸게 되는 몇십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이 그물망은 경제발달의 지각 심층에 뿌리를 두고 있는외부 가지들이 희미하게 동터오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손짓하는 현상들의 엄청난 복합체이자광대함에 비해보면 죄과와 원죄의 개념방어와 공격의 개념이 공허하게 퇴색해버리는 그러한 현상들의 엄청난 복합체이다."

 

"사회민주주의 여성 운동의 지도자들은 병역을 위해 자본주의 여성 운동과 동맹을 맺었고 민족적 사마리아 작업을 위한 동원 이후 남아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배치했다사회주의 여성 운동은 당을 위한 선동 활동 대신 무료 급식소와 자문위원회에서 일했다()사회주의법 아래서 당에 반대를 표명했던 계엄 상태와 사회주의 언론에 대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당은 선동을 확산하기 위해 의회선거를 활용했고대중에 대한 확고한 세력을 유지했다이 위기에독일의회와 주의회 선거 동안사회민주주의 운동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위한 모든 선전과 교육을 자발적으로 포기했다.”

 

룩셈부르크가 1918년 11월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지배계급은 그를 어느 때보다도 더 두려워했다특히 독일사회민주당은 노동계급에 반대한 그 당의 투쟁 표적을 룩셈부르크로 삼았다. 1918년 12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에 그와 독일 노동계급의 가장 유명한 혁명가 중 하나였던 칼 리프크네히트의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는데핑계는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1918년 12월 독일코뮤니스트당(KPD)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관해 행한 연설에서 룩셈부르크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역사적 차원을 강조하면서 혁명이 테러로 복귀할 수 없으며 노동계급 전체의 모든 에너지와 의식을 동원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그는 매우 교활한 적()에 대항한 재빠르고 쉬운 승리라는 당면(當面)주의적 환상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인 극소수 중의 하나였다결국그를 겨냥한 중상 비방 캠페인은 1919년 1월 그 극에 달했다. 1919년 1월 중엽 이른바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진압되고 수천 명의 노동자가 학살된 뒤 룩셈부르크도 암살되었다지배계급은 당시 가장 용감하고 통찰력 있는 혁명가 중 하나를 일소해버리는 데 마침내 성공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제동지들우리는 우리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습니다우리는 맑스로 되돌아왔으며그의 깃발 아래로 다시 돌아왔습니다오늘날우리는 우리의 강령에서 선언합니다프롤레타리아에게 사회주의를 진실로사실로 만들며자본주의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파괴하는 것 외에 더욱 긴급한 일은 없습니다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조건 아래서 더는 살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프롤레타리아트가 그 계급적 의무를 수행하지 않거나 사회주의를 실현하지 못하면 소멸한다는 위협을 받아왔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우리의 강령과 정치적 상황독일코뮤니스트당(KPD) 창립대회, 1918)

 

로자 룩셈부르크와 민족문제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인터내셔널 좌파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그는 민족문제에서 레닌보다 더욱 명확했다그는 사회주의를 통해서만 민족자결권이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자본주의 쇠퇴민족주의제국주의 등에 대한 그의 교훈은 여전히 혁명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다그에게 자본주의 쇠퇴기의 민족전쟁은 더는 가능하지 않다그는 민족의 이익은 단지 대중을 오도하고그들의 숙적인 제국주의에 도움이 되도록 유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국제사회주의는 동등한 권리와 더불어 자유롭고 독립적인 민족의 권리를 인정한다그러나 사회주의 자체로도 그러한 민족을 창출할 수 있고 민족의 민족자결권을 가져올 수 있다이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은 다른 모든 슬로건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조건에 대한 사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혁신적적극적인 정책을 위한 이정표와 원동력과 같다자본주의 국가가 존재하는 한제국주의 세계정치가 민족의 삶의 안팎을 결정하고 규제하는 한전시든 평시든 민족자결권은 있을 수 없다현 제국주의 환경에서 민족방어전쟁은 있을 수 없다이러한 결정적 역사적 환경에 의존하고전 세계적 소용돌이 속에서 한 국가의 관점에서 결정되는 모든 사회주의 정책은 사상누각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유니우스 팸플릿)

 

민족문제에 대한 룩셈부르크 교훈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어떤 억압받는 민족도 제국주의 또는 전쟁의 결과로써 주어진 국가에 의해 자유와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지배계급이 권력 집단에서 그들의 지배적인 동료들과 한통속이 된 약소국은 강대국의 제국주의 게임에서 한낱 말에 불과하며그들을 위한 도구로서 전쟁에서 혹사당한그리고 전후에 버려지고 자본주의 이해관계로 인도된 프롤레타리아트와 마찬가지이다." (로자 룩셈부르크국제사회민주주의의 과업에 관한 지침)

 

자유로운 국가와 민족은 자본주의 쇠퇴기에 존재할 수 없다그 자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흡수되어야 하며 세계시장에 참가해야 한다이것은 민족운동에서 발생한 신생국은 그 크기 또는 경제력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제국주의가 되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발전의 가장 높은 단계의 표현이자 자본주의 존립의 최후 국면의 표현인자본주의의 팽창주의적 제국주의는 경제적 흐름을 야기한다전 세계를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탈바꿈시킨다모든 구시대적이고 전(자본주의적 생산형태와 사회는 일소된다그것은 전 세계의 모든 부와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그리고 전 세계의 노동대중을 임금 노예로 전환한다."

 

"제국주의는 국가의 어느 하나 또는 몇몇 국가의 창조물이 아니다제국주의는 전 세계적인 자본의 발전에서 성숙이라는 특정 단계의 산물이며국내에서도 국제적인 현상이자 그 모든 상호관계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고그로부터 어떤 국가도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나눌 수 없는 전체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유니우스 팸플릿)

 

"전 세계 노동자에게는 자본주의 정치적 세계지배의 가장 특색 있는 발현이자 자본주의 최종 단계에서 발생하는 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숙적이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국제사회민주주의의 과업에 관한 지침)

 

"처음으로 엄밀한 과학적 사상의 목표가 프롤레타리아트와 해방을 위한 길을 밝혀 주었다종파학파유토피아 및 다양한 국가에서 고립된 실험 대신에밧줄을 묶는 것과 같이 국가들을 단결시키는 한결같은 국제적인 이론적 기초가 발달하기 시작했다맑스주의 이론은 전 세계의 노동계급에 매일 발생하는 엄청난 양의 사건을 이해할 수 있는 그리고 확고한 목표이자 최종 목표로의 정도를 항상 나타낼 수 있는 나침반을 제공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유니우스 팸플릿)

 

인터내셔널의 반역 이후룩셈부르크는 전 세계 노동계급 투쟁을 이끌기 위한 새로운 인터내셔널 창설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노동계급의 목표와 이익에 대해 그릇된 일을 저질렀던 가장 중요한 국가들의 사회주의당 지도부의 반역 이후그리고 그들이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책에서 부르주아 제국주의로 이동했던 퇴행 이후전 세계 제국주의에 맞서 혁명적 투쟁 행동을 이끌고 조직할 과업을 가진 새로운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창설은 사회주의에 가장 중요하다." (로자 룩셈부르크국제사회민주주의의 과업에 관한 지침)

 

전쟁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인류에 있어 이러한 역사적 재앙에 직면하여예전의 노동자당에 의한 이러한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 정신의 본보기지칠 줄 모르는 결연함과 장기적 관점에서 이론적-정치적 분석을 이뤄내는 역량의 한 본보기였다.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전개된 야만성과 당의 배반은 혁명가들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그들 중의 일부는 침울함에 빠졌다독일의 많은 혁명가들이 수감되거나 추방되었다룩셈부르크도 전쟁 기간 대부분을 감옥에 있었다. 4년 4개월간의 전쟁 기간 총 3년 4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그러나 그의 결연함을 굴복시키고 침묵하게 하려는 것이 수감의 의도였다면수감 된 후 그의 반응은 이론이라는 무기로 반격하는 것이었다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책자본의 축적에 대한 비판들에 대한 대답으로 반비판을 썼다그는 전쟁발발 전 독일사회민주당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정치경제학에 관한 강의를 했었다수감 중에 당 학교 교사로서 사용했던 초기의 강의 자료로 정치경제학입문을 썼다그리고 문학과 문화 문제도 다루었는데러시아 작가 코롤렌코의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서문을 작성했기도 했다그가 러시아혁명에 대한 분석러시아혁명에 관하여를 작성하고 러시아혁명에서 행해진 실수들에 대한 비판을 위한 최초의 몇몇 중요한 점을 발전시킨 것도 수감 중인 상태에서였다.

 

물론 룩셈부르크는 감옥에 갇힌 상태로 고통받았지만이것은 결코 그의 의지를 꺾거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없었다그가 수감 중에 쓴 기록들이나 서신들을 읽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그가 감옥 속에서 다룬 화제의 다양성과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일련의 편지는 길들여질 수 없는 창조적 정신을 증언한다.

 

나는 종종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책 읽기와 글쓰기로만 하루를 보냅니다.”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전망에 직면하여 룩셈부르크는 스스로 가장 결연한 투쟁에 투신했을 뿐만 아니라그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깊은 슬픔을 겪으면서도 용감한 정신을 유지했다그가 강인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론적인 노력과 다른 열정들(보기를 들어 그림 그리기나 식물학)을 추구하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거대한 지원망을 통해서였다위장이 약해서 특별 식이요법이 필요했던 그는 감옥 밖으로부터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그의 저작들은 반복적으로 감옥 밖으로 밀반출했고이는 때때로 간수들의 묵인하에 이뤄졌다수감 중에 룩셈부르크는 많은 동지들과 서신 교류를 했고그들에게 충고를 주고 감옥에 갇혀서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원했다감옥을 둘러싼 어떤 벽도 그를 침묵시키고 그가 개인에게동지들에게 그리고 노동계급 전체에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을 만큼 두껍지 않았다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감옥 밖에서도 '들릴 수있었다룩셈부르크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날 약 천 명의 노동자들(대부분이 여성노동자)이 감옥 정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가 집까지 동행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죽여라

 

1919년 1월 15두 명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구스타프 노스케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했다그 이전 룩셈부르크는 1916년 재투옥되었으며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감옥에 있었다룩셈부르크는 독일혁명이 시작했을 때 여전히 감옥에 있었다전후 1918년 11월 8룩셈부르크는 석방되자마자 독일혁명의 심장부베를린으로 달려갔다. 1918년 11독일 부르주아지는 노동자평의회를 해체하고 노동자와 병사의 투쟁을 피로 물든 군화발로 짓밟았다. 1918년 12스파르타쿠스 동맹의 구성원들이 독일코뮤니스트당(KPD)을 창설했다집요한 추적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들을 사냥하고 있었다노동자 탄압 시기유럽 심장부에서 수백 명의 노동자를 살해했다룩셈부르크는 적기 신문사 사무실에 있었는데떠나고 싶지 않았지만결국 동지들에 의해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뒤이어 범죄자들이 군중들을 설득하여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가두고 베를린 벽보에 그들을 죽이라고 요구했다벽보의 주제는 섬뜩했다.

 

평화일자리빵을 원한다면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죽여라.”

 

결국그들의 은신처는 발각되었다. 1919년 1월 15일 밤베를린의 부촌 빌머스도르프 거리의 무장한 부르주아 자경단 위원회 구성원 5명은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납치했다범죄자들은 인질을 경찰에 넘기지 않고기병 수비대 소총 사단이 최근 새 본부로 삼은 호화스러운 에덴 호텔로 데려갔다범죄자들은 혁명가들을 극도로 두려워했다재판이 열리지 못하도록프롤레타리아트 혁명가들은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범죄자들은 리프크네히트가 도망치려는 와중에 총에 맞았다고 했으나구타당한 뒤 총살되었다룩셈부르크 또한 총으로 구타하고 머리에 총을 쏜 다음 수로에 시체를 버렸다.

 

1919년 1월 15추운 겨울밤의 학살

 

따뜻하고 포근한 안개에 둘러싸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의식세계와는 달리 1919년 1월 15일의 밤은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길이 얼음으로 꽁꽁 덮여 있었다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룩셈부르크는 군용트럭의 화물칸에 거칠게 내팽개쳐졌다거친 폭음을 내며 어둠을 향해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병사 하나가 트럭 위에 올라탔다다시 한번 그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그것을 통증으로 느낄 수 없을 만큼 룩셈부르크의 기력은 쇠잔해져 있었다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트럭에서 세찬 삭풍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중위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잔인한 눈길을 룩셈부르크에게 돌려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마치 그에게 아직도 생명이 붙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허술하게 만들어진 우리에서 피에 굶주린 짐승이 피를 찾아 으르렁거리며 달려들듯이 중위는 피스톨의 방아쇠를 끌어당겼다.

 

촛불은 꺼졌다로자 룩셈부르크는 산산이 부서졌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운하와 동물원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엔진 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고 있었다바로 옆의 운하에 멈춰서 있는 두세 명의 병사의 그림자가 물 위에 떠 있었다그곳으로 다가가서 급히 생각이 난 듯 차는 급정거 하였다병사들의 그림자가 한쪽 발에는 신발도 신지 않은 중년 여성의 그림자를 귀찮은 듯 다리 위에서 운하로 집어 던졌다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어둠 속으로 하얗게 흩어졌다삽시간에 어둠과 정적만이 감돌았다임무를 다했다는 듯 트럭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여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다음날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이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의 죽음과 함께 전해졌다그가 선동한 군중의 광폭한 노여움에 의해 자기 죽음을 초래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그리고 시체는 무질서한 혼란의 와중에도 분실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당시 부르주아 언론은 리프크네히트가 도주하던 중 총에 맞아 숨졌으며룩셈부르크는 폭도 중 한 명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썼다.

 

노스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암살에 연루된 공무원들의 무죄방면에 사적으로 사인했다기병대 사단의 우두머리로 살해를 명령한 발데마르 파브스트는 후에 나치 정권독일연방공화국에 봉사했다몇 년 후그는 자신이 저지른 독일혁명을 진압한 일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으며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구원했다고 이야기했다그리고 오히려 독일 국민을 비난했다.

 

이 독일 멍청이들은 무릎을 꿇고 노스케와 나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거리와 광장은 모두 우리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1919년 1월 15일의 살인은 시작일 뿐이었다이후 몇 달 동안 노스케 치하의 수천 건의 살인의 시작이자 히틀러 시대의 수십 년 동안 수백만 건의 살인의 시작이었다그것은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신호였다.

 

이러한 잔학행위의 90주년을 맞아 독일자유당은 베를린에 노스케 기념비를 세우는 것을 제안했다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친애하는 기민당 사무총장 포팔라는 노스케의 행동을 공화국의 용기 있는 방어라고 극찬했다. (2009년 1월 11일 베를린 신문 Tagesspiegel에서 인용)

 

로자 룩셈부르크의 최후

 

독일혁명의 폭풍 속에서 혁명의 패배가 분명해진 순간에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원칙과 방법을 포기하지 않고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베를린은 유지되고 있다라는 논설에서 혁명의 와중에()혁명 승리의 환상 속에 있더라도 아직 혁명적 노동자는 사건에 대한 검토를 거듭하고경과와 결과를 역사의 척도로써 측정할 것을 요구했다.

 

1월 이후룩셈부르크의 심신의 피로는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고혁명에 대한 의욕과 의지가 간신히 그것을 지탱하고 있었다최종적인 승리를 눈앞에 두고 과로와 병세로 쓰러질 수도아니면 반혁명 군의 총검에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그 순간까지도 룩셈부르크는 대중을 신뢰하고대중에게 미래를 걸었다그리고 이렇게 썼다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번 투쟁은해결해야 할 문제는 대단히 날카로운 데 반해 혁명이 발전할 수 있는 초기 단계에 필요한 전제 조건은 모자랐습니다그런 모순을 안고 따로따로 맞붙은 싸움이 시작되어 결국은 패배로 끝났습니다그러나 혁명이 가진 특수한 생명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만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질서가 베를린을 지배한다)

 

"지도자는 대중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하지만 새로운 지도자는 대중 속에서 만들어질 수 있고또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최후의 결정자는 대중입니다대중은 혁명의 최후 승리가 쟁취되는 전장입니다그들은 이 패전으로 인해 국제 사회주의 사회의 과시이며 힘인 역사적 패배의 연속 일환이 되었습니다바로 그래서 이 패배로부터 미래의 승리가 꽃필 것입니다." (로테 파네, 1919.1.14.)

 

1월 16일의 폴베르쯔는 칼 리프크네히트가 도망치려고 하여 사살되었고로자 룩셈부르크 또한 분노하여 광폭한 대중에 의해 살해되어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이 학살에 대해 슬픔과 격노에 찬 요기헤스는 사실 자료를 모아 공개하고 그들의 범죄를 폭로하였다그것 때문에 그도 역시 3월 10일 체포되어 경시청의 감방 안에서 형사에 의해 학살되었다기력이 다한 늙은 메링도 역시 그들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그렇게 독일혁명은 비극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비극의 역사는 반복되었다한때 세계 최고와 최대의 사회주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국제 노동운동의 지도적 지위를 확고히 했었던 독일사회민주당(SPD)이었지만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배신과 학살로 독일혁명의 실패를 초래하더니결국 그들이 그곳에서 나치즘을 탄생시키고 육성한 것이다나치즘의 탄생과 양육의 부모였던 독일사회민주당은 과거 자신이 룩셈부르크와 동지들을 학살할 때 사용했던 방법으로 그들이 기른 자식에게 조직 자체가 압살 되는 운명을 겪었다.

 

1933년 나치는 자본의 지지와 원조 하에 권력을 장악하고 국회의사당을 방화하고 그 죄를 독일사회민주당(SPD)과 독일코뮤니스트당(KPD), 노동조합에 전가했고독일사회민주당은 이 상황에서도 나치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고독일코뮤니스트당의 총파업 요구는 거부되었고결국 세 곳 모두 결사 금지의 탄압을 받게 된다이런 나치의 만행은 죽은 자의 묘를 파헤치고 일련의 사회주의 문헌과 함께 룩셈부르크의 모든 저작을 불태우고 만다결국전 인류의 불행과 파멸을 초래했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룩셈부르크의 묘지는 해방되었고아직도 그의 저작과 사상혁명을 향한 실천은 복원 중이며 현재 진행형이다.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하고 나서 불과 몇 달 후부르주아지와 노동자 운동의 기회주의자들은 그를 신성시하고그의 혁명적인 내용을 제거하고비하하고그리고 이 날카로운 혁명가를 무디게 하려고 그를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무엇보다도 그들을 위해서 룩셈부르크는 원래 모습이었던 전투적이고 모범적인 혁명가로 남아있어서는 안 되었다룩셈부르크는 일종의 평화주의자 그리고 페미니스트 민주주의자로 잘못 전해져두 번 살해되어야만 했다.

 

이 가증스러운 민주주의 선전은 스파르타쿠스 기관지 설립자인 르네 르페브레와 같은 인물들을 거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작을 한다나중에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 저작집에서 완전히 이데올로기적인 머리말을 썼는데그것의 1946년 제목(로자 룩셈부르크는 절대 그 제목을 쓰지 않았다)인 독재에 반대하는 맑시즘은 혁명을 위한 투사를 볼셰비즘에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라고 묘사했는데역겨운 거짓말에 불과하다저작집」 서문에서 르페브르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모든 위대한 맑스주의의 저명한 이론가들칼 카우츠키에밀 반데벨드루돌프 힐퍼딩칼 레너조지 플레하노프는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레닌의 전체주의적 교조가 맑스주의의 원칙에 완전히 반대된다고 비판했다.”

 

스탈린은 레닌을 박제화했으며 그의 사상을 끔찍한 교리로 왜곡했다. "피의로자 룩셈부르크는 일종의 민주주의의 성인(聖人)이 되었다스탈린주의 반()혁명은 빠르게 두 개의 새로운 타락하고 상호 보완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성시켰다한쪽은 매력적인 룩셈부르크주의(민주주의)” 그리고 다른 쪽은 혐오스러운 "맑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 정말 동전의 양면 또는 오히려 같은 결과를 가져올 함정으로 향하는 두 입구다. "피에 굶주린볼셰비키를 거부하고 "평화주의자 로자로 묘사되는 인물을 존경하는 것은 철창 안의 사자를 존경하는 것과 같다.

 

동유럽의 붕괴와 소련이 사라진 후이 광대한 이데올로기적 캠페인은 다시 발굴되었고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부르주아지가 열광적으로 선언한 이른바 코뮤니즘의 죽음을 부양하기 위해 확대되었다여기에서 공식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가장 큰 거짓말로코뮤니즘과 스탈린주의를 같은 것으로 여기는 사기를 목표로 했다그리고 룩셈부르크를 평화주의자,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 "스탈린의 정신적 아버지"인 레닌의 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이 비열한 선전에서 가장 악질적인 부분 중 하나이다그들이 그것을 의식하든 안 하든이 가짜 싸움에 참여하는 사람은 노동계급에 반대하여 싸우는 것이다.

 

이후 유럽 전역과 세계 도처에 걸쳐 서점 및 가판대와 블로그포럼에서는 전투적인 룩셈부르크의 이미지를 다시 왜곡시키기 위해 새로운 가증스러운 선전이 유행했다. TV 프로그램에서부터 룩셈부르크는 다시 "여성"과 "평화"의 특성만을 가진 사람으로 등장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맑스주의자-평화주의자” “맑스주의자와 평화주의자라는 단어의 결합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지배계급에 대항한 진정한 맑스주의자가 봉기와 자본주의의 전복을 포기하고 계급전쟁으로부터 이탈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아동문학을 비롯하여 수많은 책이 룩셈부르크를 볼셰비키와 독재자” 레닌의 완고한 적()으로 묘사하면서 출판되었다.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그를 변환시키기 위한 룩셈부르크의 재조명은 거대한 이데올로기 중독 사업이다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는 세계적인 코뮤니스트 사회가 아니라 더욱더 "민주적인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주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오늘날 부르주아지를 위한 이해관계는 민주적인 부르주아지를 방어하는 것 외에 다른 미래가 없다는 논리로 가장 비판적이고 반항적인 구성원을 설득하는 것이다그러나 이 왜곡의 배후에는 코뮤니즘에 대한 불신과 혁명조직을 악마화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위대한 혁명가들은 살아생전에는 억압계급의 끊임없는 탄압을 받았고그들의 이론은 허위와 중상모략에 가득 찬 가장 야만적인 적의와 가장 표독스러운 증오 그리고 가장 파렴치한 구호로 대접을 받았다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죽은 이후에는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변질되어 신성시되거나 결국에는 대부분 그들의 명성이 피억압계급을 회유하는 데 쓰이는 "위안"으로또는 후세에 기만하는 수단으로 숭배되는 등음모의 대상이 된다그와 동시에 그들의 혁명적 이론은 그 혁명적 본질을 빼앗기고혁명적 이론이 지니는 무기로서의 예리함은 무디어지고 통속화되고 만다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노동운동 내의 기회주의자들은 위와 같은 맑스주의의 변조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레닌국가와 혁명, 1917)

 

지배계급의 중상모략에도 불구하고 로자 룩셈부르크는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였다비록 문명화된 야만인들스스로 민주주의자라 칭하는 이들이 유럽의 심장에서 룩셈부르크를 살해했다고 할지라도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열망의 원천그리고 특히 자본주의의 발전제국주의 개념국가에 대한 질문 등에 대한 가르침은 여전히 생동하고 있다프롤레타리아 혁명가들을 죽인 살인자들이 바라는 것과는 반대로 룩셈부르크는 여전히 계급전쟁에서 살아 있다혁명가들이 살해된 지 104년이 지난 지금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더욱더 강화되고 있지만룩셈부르크의 정신은 여전히 우리에게 살아나고 있다.

 

탄압받는 상황에서 자본의 질서에 관하여 쓴 마지막 글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베를린은 질서를 되찾았다!” 비겁한 아첨꾼들아너희들의 질서는 모래성 위에 세워져 있을 뿐이다내일혁명은 다시 일어나무기를 들고 싸울 것이고불타오르는 트럼펫 소리가 너희를 공포에 떨게 하며 증명할 것이다.

 

나는 그래왔고지금도 그러하며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2024년 1월 15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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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8호] 맑스주의와 섹슈얼리티

맑스주의와 섹슈얼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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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핵심에 있는 모순들이 상부구조 차원의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친다현대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이데올로기·문화·언어·조직의 형태들은 우리 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조로부터 독립적이지 않으며이전 생산양식으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인간 활동의 다른 영역들과 마찬가지로 섹슈얼리티도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특히 자본주의적 모순이 격렬해지는 위기의 시기에섹슈얼리티는 공개적인 정치적 싸움터가 된다멀리서 확인할 필요도 없다. 4세대 페미니즘여성 파업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급진적 여성주의자들(TERFs), 비자발적 금욕주의자들(incels) 같은 현상과 정체성성노동대리모가정 폭력성폭력성소수자 관련 분쟁들에서 대립과 적대가 명백하게 부각되고 있다부득이하게 많은 혁명가가 이 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데특히 개인적 차원에서 그렇게 될 것이다그렇다면 맑스주의자가 그 모든 지저분한 차원에서 섹슈얼리티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질문하는 것은 단지 추상적인 피해망상이 아니다우리가 만족스러운 답을 제공하지 않으면 노동자들은 다른 곳을 찾을 것이고자본의 우파 또는 좌파(둘 다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의 영향력 아래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그래서 우리는 기본을 다시 강조하는 것이다.

 

충돌하는 권리들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정당이 국가적 억압에 항의하고 저항해야 하는 의무는 어떤 특별한 국가의 권리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데이것은 이를테면 남녀의 사회적·정치적 평등을 위한 투쟁이 부르주아 해방주의자들의 운동이 말하는 특별한 여성의 권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이 의무는 계급 체제와 모든 형태의 사회적 불평등과 사회적 지배에 대한 일반적인 반대한마디로 사회주의의 기본 입장으로부터만 발생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민족 문제, 1909)

 

우파의 것이든 좌파의 것이든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충돌하는 권리라는 측면에서 사회적 적대관계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여성의 권리 대 트랜스젠더의 권리세속적 권리 대 종교적 권리재산권 대 노동자의 권리 등 그 어떤 것이든 원칙은 동일하다즉 한쪽의 권리는 다른 한쪽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하며이 도덕적·법적인 체계 안에서 우리는 합리적인 균형을 찾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자유주의보수주의민족주의개혁주의 또는 그들의 파생물들과 같은 부르주아 사고의 다양한 가닥은 합리적인 것이 무엇인지극단적인 경우그것은 사회의 이 부분 또는 저 부분의 근절을 시도하는 것을 의미했다에 대해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질 것이다하지만 인권즉 원래는 인간(남성)의 권리(rights of man)’라고 알져진 것은 17~19세기에는 쇠퇴하는 봉건 질서에 맞서는 가장 혁명적인 개념이었다그러나 이는 국가와 산업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특정 계급인 부르주아지의 부상과 맞물려 있었다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점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자유에 대한 인간의 권리는 인간과 인간의 결합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분리에 기초한다이러한 분리의 권리자기 안으로 침잠하는 제한된 개인이 권리가 바로 자유권이다자유에 대한 인간의 권리를 실제로 적용한 것이 사유재산에 대한 인간의 권리이다.” (칼 맑스,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1844)

 

맑스주자들로서 우리의 체계는 다르다우리는 상충하는 권리라는 것을 믿지 않으며합리적인 균형을 추구하지도 않는다맑스주의자에게 코뮤니즘은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사회를 의미한다자본주의 사회에서 이해되는 권리는 이러한 비전을 실현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권리의 세계는 국가군대경찰법률 시스템의 세계로 이 모든 것은 권리를 집행하는 데 필요한 제도들이다이 모든 제도는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분리를 표현한다정의상 권리는 계급 사회를 의미하며계급 사회는 우리가 현대의 억압과 불행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유물론적 관념

 

인권이 실제로 인간들 사이의 인위적인 적대관계를 강화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고이제 우리는 역사적 또는 변증법적 유물론적 체계가 섹슈얼리티에 대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우선성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는 생물학적 결정론(보기를 들어 많은 스탈린주의자가 젠더 문제를 다룰 때 보여준 것처럼)과 동일하지 않다오히려 우리는 섹슈얼리티가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진화하는 인간 활동으로 간주한다.

 

최근의 추정에 따르면 호모 속()은 최대 300만 년 전에 출현했고우리 종()인 호모 사피엔스는 약 30만 년 전에 출현했다최초의 원시적 성 분업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일부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후기 구석기 시대(4만 년 전)로 거슬러 올라간다수렵 채집 사회는 협력과 상호성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이 분업 자체가 아직은 남녀 간의 불평등한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았다이것이 신석기 시대(12,000년 전무렵 식량 채집에서 식량 생산으로다시 말해 농업의 발달로 전환되면서 바뀌었다정착지가 발달하고 노동 생산성이 증대하고 잉여가 전유됨과 동시에사유 재산이 생겨나면서 최초의 계급 사회가 탄생한다평등주의는 점차 남녀 간의 위계와 불평등한 관계로 대체된다.

 

인류 사회의 천년 역사를 통해 사랑은 단순한 생물학적 본능최상위 생물부터 최하등 생물까지 모든 생물에 내재된 번식 충동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지적·정서적 측면을 획득하는 가장 복잡한 감정으로 발전해 왔다…… 역사 발전의 모든 단계에서 사회는 사랑이 언제 어떤 조건에서 합법적인지(주어진 사회 집단의 이익에 부합하는지)를 정의하는 규범을 확립했다…… 부족 단계에서 사랑은 혈연적 애착(자매들과 형제들 사이의 사랑부모에 대한 사랑)으로 간주되었다기독교 이전 시대의 고대 문화는 무엇보다도 사랑-우정을 제일로 쳤다봉건 세계는 결혼하지 않은 이성 간의 플라토닉한 궁정의 사랑을 이상화했다부르주아지는 일부일처제의 부부애를 이상적인 것으로 여겼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날개 달린 에로스를 위한 길, 1923)

 

분업과 재산 관계는 수천 년 동안 아시아적고대적봉건적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거치면서 크게 발전해 왔다이러한 생산양식은 (국가와 종교 단체 또는 사회 자체에 의해종종 잔인한 방식으로 자체적인 성 관련 법과 도덕을 강요했다당연히 이것은 의식적으로나 잠재의식적으로나 현대 섹슈얼리티의 모든 측면에 상처를 남겼다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성섹슈얼리티 또는 젠더에 기초한 차별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자본주의는 가부장제우리는 이것을 재산을 소유하기 위해 사회를 부계 권력 아래의 가족 단위로 조직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를 약화시켰지만가부장제를 완전히 종식하지는 못했다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사유재산과 분업이 폐지된 사회만이 그 과제를 완수할 수 있다이것은 맑스주의자가 오늘날 성적 억압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미래 사회의 옹호자로서 우리는 입에 발린 말만 할 것이 아니라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정치적으로 우리는 당대의 성적 적대관계의 사례들을 더 광범위한 자본주의 위기의 상황과 연결해야 한다.

 

혁명운동은 …… 자본주의의 경제적 해체가 초래한 가부장적 가족의 쇠퇴 과정을 완성할 것이다…… 정치적 반동 세력이 반동의 요인으로서 성적 억압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이 억압을 확고히 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면혁명 정당은 성적 반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교회와 자본에 대한 이 반란을 지지해야 한다.” (빌헬름 라이히,성도덕의 출현」(The Imposition of Sexual Morality), 1932)

 

 

재무장한 에로스

 

자본의 좌파와 우파는 계급 사회를 어떻게 관리할지 따라서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그러나 그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땜질하면서 문제의 근원이 실제 놓여있는 기존의 사회적 관계를 보존하려고 할 따름이다페미니즘과 그 이데올로기적 자손들이 여성과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곤경을 가장 잘 다룰 수 있다고들 한다그러나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는 자본주의를 훼손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으며사회주의 페미니스트조차도 페미니즘을 우리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다시 말해 임금 노동화폐국가의 폐지가 아니라 부의 재분배와 복지 국가를 의미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인류 전체가 나아갈 유일한 길은 착취당하는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 국가의 족쇄를 벗어던지는 국제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적 이윤 욕구의 낡아빠진 압박에서 생산을 해방시키고 사회적 필요를 위한 생산에 전념하는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을 창조하는 것이다생산수단을 공동 소유로 이전하는 것은 일부일처제 가족이 더는 사회의 경제적 단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페미니스트의 최후의 수단은 코뮤니즘이 가부장적 태도를 사회에서 자동으로 제거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인데이에 우리는 동의할 것이지만요점은 코뮤니스트 혁명 없이는 태도의 진정한 변화를 위한 어떠한 근거도 마련할 수 없다는 것이다.” (CWO,여성과 코뮤니즘」, 1986)

 

새로운 사회의 청사진을 만드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지만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계급이 폐지되면 우리가 섹슈얼리티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동료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라는 점이다더는 상충하는 권리와 정체성의 체제에 얽매이지 않고이윤을 위한 경쟁 충동에도 얽매이지 않게 됨으로써미래 사회는 사람에 대한 통치를 사물에 대한 관리로 대체할 것이다상품 교환이나 편견이나 폭력보다는 사랑-동지애와 내적 연대가 성 관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곧 다가올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복 이후에 성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정돈될지 지금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주로 부정적인 특성을 띠며 대부분은 사라질 것에 한정되어 있다하지만 새로운 것은 무엇일까그것은 새로운 세대가 성장했을 때 대답이 나올 것이다…… 이 사람들이 출현하면그들은 오늘날은 누구나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거의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그리고 그들은 모든 사람의 개인적 관행에 대해 자신만의 관행을 따르고 그에 상응하는 여론을 형성할 것이다오직 그것뿐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족의 기원, 1884)

 

혁명가들의 임무는 에로스를 사회생활에서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구성체에 따라 그를 재무장시키고동지적 연대라는 위대한 새로운 심리적 힘의 정신으로 성 관계를 교육하는 것이다.(콜론타이우리가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수천 년의 역사가 하루아침에 뒤집어지지는 않을 것이다혁명 과정이 끝나면 평등주의와 협력 노선을 따라 노동계급이 사회를 개조하는 과도기가 시작될 것이며더는 물질적 근거가 없는 가부장적 태도는 코뮤니즘이 현실화되면서 세월의 찌꺼기와 함께 휩쓸려갈 것이다.

 

다이즈바스(Dyjbas)

 

2020년 5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ommunist Workers’ Organisation)

 

 옮긴이ㅣ김종원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0-05-09/marxism-and-sexu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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