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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노동당 비선/'언더' 사건이 사회운동에 던지는 의미

  • 노동당 비선/'언더' 사건이 사회운동에 던지는 의미

     

     2월 1일, 알바노조 선거 중이었다. 위원장 후보로 출마한 이가현 조합원이 SNS에 올린 폭로가 삽시간에 화제가 되었다. 알바노조, 청년좌파, 평화캠프, 노동당 등 여러 단체에 소속된 사람들이 소속된 ‘'언더'’라는 비공개 조직(이하 ‘'언더'’)이 존재하고, 이 조직의 비선을 통해 여러 단체 결정에 개입했다는 폭로였다. 비선이란 말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많은 이들이 이른바 이석기가 통솔했다는 통진당의 RO나 최순실-박근혜로 비화된 비선 게이트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으로 공개된 글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곧바로 기사화되었다. 연이어 수십 건의 폭로 글이 뒤를 이었다. '언더'의 존재를 바라보는 동료 시민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한마디로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는 비판. 동시에 진보라 하는 사회운동, 진보정당, 노동조합 어디 한군데 믿을 곳이 없고 상식적으로 운영되는 곳이 없다는 한탄이 이어졌다. 사회운동에 대한 불신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언더' 문제는 불신의 원인이라기보다는 불신의 결과로 심증을 확증으로 굳히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해당 조직 내부로 들어갔을 때 해결은 간단치 않아 보인다. 알바노조와 노동당에서는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지만 어떤 경로를 거쳐 언제, 어떻게 해결될지 미지수다. 조직을 방어하려는 내부의 논리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터져 나온다. 법적/제도적 해결 과정으로 들어가면 문제는 더 복잡해지는데 사회운동 단체의 문제해결 방식은 사법 기구와 달라 단순하게 유무죄를 결정하거나 징계수위를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람이 무수히 많은 조직 사건인 데다 형태를 파악하기 힘든 '언더'라는 조직 자체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도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난해한 제도적 해법과 무관하게 사회운동의 차원에서는 더 밀도 높은 분석과 성찰이 뒤따라야 한다. 결국, 제도적 해법으로 다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정치, 문화, 운동의 관점에서 성찰하고 바꿔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언더'와 관련된 내부고발자들의 폭로는 충격적이었다. 단지 비공개로 조직을 운영했을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 수 있는 강력한 혁명가를 기른다는 명목으로 말도 되지 않는 요구가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미행을 따돌리는 연습을 하며 비공개로 운영되는 안가에 모이면 첫 모임에서 혼전순결, 낙태금지를 포함한 문서를 읽힌다. 수시로 관련 단체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임무를 부여하고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끊임없이 비판을 받는다. 연애와 성생활을 포함한 모든 일상생활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해야 하며 일상적으로 다른 멤버들과 비교, 평가한다. 보수적이고 금욕적인 도덕관, 가부장적인 조직구조, 전체주의와 비슷한 상향 피라미드식 조직구조 속에서 토론이나 이의제기는 혁명가로서 자질이 부족한 것으로 비판받는다. 이 외에도 내부고발자들 글에 드러난 수많은 문제 제기는 읽는 이의 숨통을 조여 올 정도로 힘겨운 내용이 많다.

     

     어떤 이들은 그냥 단지 비공개 모임이었을 뿐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런 모임은 어디에나 존재하지 않느냐고. 그냥 공부 모임일 수도 있다고. 한심한 이야기다. '언더'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피상적인 정보를 통해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이미 수없이 많은 내부고발이 나온 상황에서 '언더'가 어떤 작동원리를 갖고 있었는지 아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언더'는 도대체 왜 문제인가? 이 질문에 답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회운동이 지양해야 할 지점이 보인다. 자연스럽게 지향해야 할 지점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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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미더노동당>(https://www.facebook.com/showmethelaborparty/)이란 공개 프로그램을 통해 '언더' 조직의 문제점을 차별, 반민주주의, 재정, 노동 네 가지로 요약했다.

     '언더' 조직 내에서는 일상적인 차별이 횡행했다. 조직 자체가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이었다. 일상적인 성차별과 언어 성폭력이 벌어졌고 제대로 해결되지도 않았다. 이 외에도 청소년, 장애인,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언행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심지어 어떤 내부고발 글에는 '언더' 조직이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를 회원으로 받을지 말지 심각하게 토론했다는 내용도 있다. 한마디로 혁명을 지향하는 조직에서 이들의 존재는 대단히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여성은 지나치게 감성적인 존재라 혁명가가 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인식도 보인다. 이런 심각한 반여성주의적이고 반인권적인 사고방식은 혁명을 위해 최고의 효율과 조건 없는 충성이 필요하다는 사고방식을 통해 정당화된다.

     이런 차별적인 조직에 몸담는 활동가들은 일상적인 자기분열에 시달린다. '언더'에서는 여성주의를 부정할 것을 요청받으며 동시에 공개된 공간에서는 여성주의 운동을 하니 사람이 어떻게 제정신으로 이 모순된 상황을 견뎌 나간단 말인가. 낙태금지를 요구받으며 동시에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운동에 동참한다. 이런 모순적 상황은 너무 자주 발생하고 이의제기는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활동가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질책하며 출구가 보이지 않는 숨 막히는 상황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게 된다. 내부고발자 글을 보면 정신과 치료를 포함해 일상적인 정신질환으로 파생되는 고통에 시달렸다는 내용이 거의 모든 글에 등장한다.

     

     이런 위기는 이견을 수용하지 않는 비민주적 구조 속에서 더욱 증폭된다. 그리고 '언더' 내부의 비민주적 구조는 구성원들이 활동하는 여러 사회단체로 이식된다. 오로지 지침을 관철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기 때문에 구성원들은 공개활동 영역에서도 좀처럼 토론을 하지 않는다. 이견은 방해요소로 파악한다. 건강한 조직은 점차 생명력을 잃어가고 민주주의는 형식적 다수결로 유명무실해진다.

    끝으로 노동과 재정 문제를 언급해야만 한다. 아직 내부폭로에 많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몇몇 글을 통해 '언더'의 작동원리, 그 가운데 노동과 재정 문제를 어떻게 다뤘는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차별적이고 비민주적인 구조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노동과 재정의 관점에서 이 문제가 사회운동에 미치는 해악에 대해서는 대부분 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내부고발에 따르면 '언더' 구성원들은 일상적으로 과도한 초과노동에 시달렸다. 단체활동은 직장 이전에 활동공간으로 규정되어 끊임없이 성과를 비교·평가당했기 때문에 구성원들은 자발적으로 고통의 늪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들은 내부고발 글에서조차 이는 자신이 원했던 것이기도 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계약서조차 쓰지 않는다. 돈은 현금으로 받는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돈을 받기도 한다. 때에 따라 비'언더' 구성원과 차별된 액수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소위 돈 많고 마음씨 좋은 후원자라고 알려진 '언더'의 지도부는 상근자 채용과정에도 일일이 개입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분열이 시작된다. 내부고발자 다수가 알바노조 조합원이었음을 상기해보자. 노동자의 권리를 말하면서 말도 안 되는 노동윤리 속에서 살며 자신을 갉아먹는 존재들. 이 '언더'가 아주 악질인 것은 자본주의와 맞선다면서 자본의 통제 기술을 골고루 다 써먹고 있다는 점이다.

     

     나도 한때 '언더'에 있었다. 2003년 사회당을 탈당하기 전까지 그 조직과 함께하던 구성원이었다. 물경 십 년도 더 지난 지금 당사자들의 폭로를 보는 내 마음은 복잡하기 그지없다. 너무 아프고 서글프고 화가 난다. 사회를 제대로 바꿔보겠다는 선의를 가진, 열정적인 활동가들을 소모품처럼 쓰다 버리는 조직이 혁명을 운운하니 수십 년을 살아남아 사회운동을 망치고 있다니. 노동당 당원으로서 나는 '언더'를 넘어 진보정당을 혁신해야 하는 과제를 내 문제로 온전히 받아안기로 한다. '언더'는 단지 '언더'만의 문제가 아니라 단절해야 할 과거로 상징되는 운동 내부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미래로 한 발 더 나갈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하고픈 말이다. 우리가 극복하고픈 세상에 대해. 우리 삶 자체가 우리가 만들고픈 미래 사회 그 자체를 닮아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무엇보다 각자는 모두 중요한 자기 삶의 주체가 아닌가. 누구도 함부로 소모품처럼 쓰이거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더는 이런 조직은 세상을 바꾸는데도 효율적이지 않다.

     

     끝으로 내부고발자들에게 애정 어린 연대의 마음을 담아 건네는 말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광장으로 나와야 한다. 피해자 프레임 넘어서야 한다. 이건 민주주의 상식에 관한 문제다. 이를테면 MBC 노동자들의 파업 같은 것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국민을 향해 계속 미안하다고 했다. 자신도 MBC 일부였기에 미안하고, 그래서 공영방송을 제대로 바꾸는 것으로 사죄하겠다고 했다. 제대로 바꾸기 위해 자신들을 꾸짖더라도 외면하지 말아달라 했다. 그렇게 해야 우리 모두 한 단계 나아갈 수 있다. 진정한 치유도 될 수 있다. 

     

     나는 노동당에서 싸울 것이다. 함께 노동당 안에 있을 때는 내부고발자들과 의견 차이로 대립할 때도 있었다. 그들 중 다수는 이제 탈당했다. 밖에서 함께 싸우자. 그런 한에서 우리는 그래도 동시대에 조금이라도 사회운동, 진보정당 운동의 한 걸음을 위해 함께 싸우는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노동당 내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과 발언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나는 당사자들이 꼭 이 글을 읽어주기 바란다.

     

    노동당 마포당협 사무국장 ┃ 나동혁

     

     

    <편집자 주>

    이 글은 노동당 비선/언더 사건에 대해 내부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는 동지의 기고 글로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의 입장과 다를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운동 사회에서 관심을 두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중요한 내부투쟁이기에 코뮤니스트에 실었으며, 이와 연관된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의 입장은 코뮤니스트 7호에 실린 「다시 혁명조직을 말하다」, 「노동계급과 혁명조직」을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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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노동당 진상조사위원회 보고서

    http://www.laborparty.kr/bd_member/1756873

     

    [진조위] 알바노조 내 ‘언더조직’에 대한 진상조사위원회 보고 2차

    http://alba.or.kr/xe/news/274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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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에서의 집단이성과 관료주의의 대결

  •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에서의 집단이성과 관료주의의 대결

    -충남지부 조합원들의 노동자민주주의를 지지하며-

     

    1.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 운영위원회의 관료적 결정

     

    지난 2월 24일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 충남지부(이하 충남지부) 2월 정기모임에서는 민주노조에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집단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모든 증거와 정황이 계획적인 집단테러임을 증명하고 있고, 노동조합(충남지부)의 존립 자체를 흔드는 사건이라서 신속하고 엄중한 처리가 필요했다. 이에 충남지부 조합원들은 3월 10일 비상총회를 열어 '노조파괴에 대한 전 조합원과 함께 하는 집단대응 대책의 건'을 압도적인 찬성으로(90.69%) 통과시켰다. 또한, 충남지부는 사건의 엄중함을 고려하여 민주노총 규율위원회(이하 규율위원회)에 제소했고, 규율위원회는 가해자에 다한 사전조치를 명령했다. 즉, 충남지부는 테러 피해자와 조합원, 그리고 노동조합을 2차 가해로부터 지키기 위해 민주적인 절차와 규약에 따라 "정당한 조치"를 했다.

    이러한 조치는 조합원들을 보호할 임무가 있는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이하 플랜트노조)에서 먼저 해야 한다. 하지만, 플랜트노조 운영위원회에서는 충남지부의 정당한 조치를 방어하고 더욱 엄격히 적용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오히려 조합원들의 뜻을 거스르는 결정을 했다. 운영위원회는 테러 사건이 "명백한 범죄행위", "사전에 계획된 노조파괴 행위"이었음에도 총회 결정사항 집행을 유보하라는 결정을 했다.

    민주노조운동의 상식에서 충남지부의 총회 결정사항은 조합원들의 안전하고 민주적인 노동조합 활동 보장을 위해 가해자들에게 해야 하는 필수적인 조치였다. 따라서 이러한 최소한의 조치마저도 무력화시키는 운영위원회의 결정은 충남지부 조합원들의 민주적 의사결정을 부정하는 반민주적 행위이자, 조합원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반인권적 행위로 볼 수밖에 없다.

     

    플랜트노조 운영위원회의 관료적 행태는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운영위원회는 회계부정, 집단테러 세력에게 신속하고 단호한 징계를 내리는 대신 그들에 맞서 싸우면서 노동조합을 지켜낸 충남지부장을 징계하겠다고 나섰다. 노동조합 안의 부패-폭력세력을 조합원의 힘으로 몰아내는 일은 민주노조 운동에서 존경받고 교훈으로 삼을 일이다. 더욱이 충남지부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집단이성과 노동자 민주주의"로 대응했다.

    그런데, 플랜트노조 운영위는 이러한 충남지부를 지원해주기는커녕, 사사건건 방해하면서 부패-세력을 방어하더니, 급기야 "조합원들이 직접 선출한 지부장"을 징계하겠다고 나섰다. 게다가 “부당한 징계”를 위해 노동조합규정마저 일방적으로 바꿔가면서 조합원들의 뜻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결정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조 조합원은 이 정도의 부당한 압력으로 물러서지 않는다. 지금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거리에서 농성장에서 현장에서 자본의 부당한 압력과 탄압에 맞서 싸우고 있다. 독재정권의 엄혹한 시기에도 부당한 권력과 자본에 맞서 싸워온 것이 노동자들이었고, 그것이 민주노조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한 전통을 가진 민주노조 조합원들에게 "노조 권력"을 악용해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야말로 민주노조에 대한 모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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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집단이성과 관료주의의 대결

     

    노동조합의 주인은 조합원이며, 총회는 조합원 전체로 구성되는 노동조합 최고의 의사결정기구이다. 총회는 조합원들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기구이며, 노동자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모든 조합원은 노동조합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정보에 대해 알 권리가 있으며, 총회는 노동조합 관련된 현안 보고와 정확한 정보제공, 그리고 민주적인 토론을 통해 조합원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곳이다.

    노동조합에서의 "집단이성"이란 부당한 지시나 명령에 수동적으로 따르지 않고, 특정세력의 사적 이익에 이용당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의 기준을 세워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민주적으로 토론하고, 결정에 대한 책임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집단이성이다. 이것이 노동자 민주주의의 기반이 된다. 충남지부 조합원들이 비상총회에서 결정하고 집행한 것은 바로 집단이성이자, 노동자 민주주의의 기반이었다.

     

    그런데 지금 플랜트노조에서는 집단이성과 노동자민주주의의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불순한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운영위원회의 관료적 결정이 그것이다. 그들은 충남지부 조합원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 하자, 관료적으로 굴복시키려 하고 있다. 특정세력의 사익(私益)을 위해 노동조합 조직질서를 악용해 조합원들을 분열시키고 있다. 그래서 충남지부 조합원들의 투쟁은 패권적 관료주의, 부패한 노동조합 조직질서와 전면적으로 싸우는 "노동운동 바로 세우기" 투쟁이기도 하다. 전선은 분명하고 단순하다. 집단이성 대 반민주적 관료주의 세력, 민주노조 세력 대 부패세력의 전선이 그것이다. 충남지부 통지들의 투쟁에 민주노조운동 진영이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노동자민주주의를 지지하며

     

    ‘노동자 민주주의'는 투쟁하는 노동자의, 토론하는 노동자의 발전하는 계급의식이다. 대의제-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 투쟁하는 노동자의 원칙이 존중받고 토론과 논쟁과 실천적 검증을 통해 언제든 소수가 다수가 되고, 다수와 소수 모두 왜 다수와 소수가 되었는지 인식하고 더욱 깊게 연대하고 단결하면서 투쟁을 확산하고 발전시키는 민주주의다.

    노동조합 안에서 집행부(간부)와 조합원들의 판단이 다를 때, 위로부터의 조직질서와 상층부 회의체계를 통해 조합원 위에 군림하며 통제하려는 것이 관료주의이고, 조합원들과 직접 토론하고 설득하고 자신도 설득당하면서 공개적으로 검증받고, 결정한 것을 직접 실천하면서 조합원 스스로 행동이게 하는 것이 노동자민주주의이다.

     

    조합원 다수가 이러한 민주주의에 익숙해졌을 때, 노동조합의 민주주의는 다른 조직보다 훨씬 우월한 의식수준과 조직력을 갖게 되고, 자본과의 싸움에서도 강력한 무기가 된다. 또한, 조합원들의 의식적이고 민주적인 토론 능력과 집단이성만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노동조합 내부의 오류를 스스로 교정할 수 있다. 이것은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노동조합은 반민주적 요소와 관료주의에 의해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지금 충남지부 조합원들은 관료주의에 맞서 싸우면서 집단이성을 지켜내고 있다. 어떠한 오류도 집단이성으로 교정하면서 노동자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동지들은 승리할 것이다. 누구보다 제대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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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6호] 프롤레타리아 조직 - 당과 평의회에 대한 문제의식 (남궁원, 윤웅태)

  • 프롤레타리아 조직 - 당과 평의회에 대한 문제의식

     

    <편집자 주> 코뮤니스트 운동의 역사에서 현재까지도 토론될 만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당과 평의회>에 대한 문제를 먼저 가신 남궁원, 윤웅태 동지의 운동을 평가하는 차원에서 주요 내용을 발췌하여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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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주의운동의 좌초와 평의회의 복권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와 억압의 역사를 끝내기 위해 계급해체, 인간해방을 향한 매우 힘든 투쟁을 벌여왔다. 이론적 사회주의로부터 러시아 혁명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 운동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평등한 생산양식을 창조해 나가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열망과 투쟁의 역사였다.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 혁명의 좌절 등 세계적인 계급투쟁의 패배를 딛고 선 러시아에서의 혁명의 승리, 그리고 뒤이은 중국 혁명의 승리는 사회주의운동에서 ‘광범위한 노동조합과 이를 토대로 하는 사회민주주의당’의 종말을 선언한 것에 다름없었다.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시도된 ‘노조-당’과 이후 ‘산별노조-사회민주주의당’의 형태는 오래지 않아 개량주의로 경도돼 그 역할이 급진적 개혁당 수준으로 떨어졌고 당의 관료화와 비대화는 ‘당 위기론’을 불러왔다. 바로 그때 러시아 혁명이 대안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러시아조차 곧바로 반혁명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결국 러시아 사회주의는 결과론적 국유화, 노동자민중에 대한 독재, 야만적 국가 패권주의 등을 생채기로 남긴 채 노동대중의 희망과 기대를 물거품으로 만들며 몰락해갔다. 역사적 사회주의는 전체주의와 노동자민중을 억압, 통제하는 당 권력화 문제를 여전한 숙제로 남겼다. 이제 당 위기론은 사회주의운동 내부에서 절박한 화두가 되었다. 나아가 자본주의와 역사적 사회주의 모두에게서 나타난 당의 오류는 당 무용론을 강화했다. 특히 68년으로 대표되는 좌절한 사회혁명은 당 무용론을 더욱 심화시켰다. 68혁명은 자본에 포섭된 자본주의 내의 ‘노조-사회민주주의당’과 역사적 사회주의의 ‘당 독재’로 확인된 배신에 대한 투쟁이었다. 노동자 민중은 자본주의와 역사적 사회주의 체제 모두를 반대하고 국가와 모든 권위에 대해 투쟁했으며 이후 일상으로부터 제기되는 미시 조건에 대한 집착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68년의 경험은 무정부적 자율주의 경향과 민중주의, 그리고 비판적 정치 분파로서 ‘좌파’ 개념을 강화했다.

     

     이러한 사회주의운동의 역사는 오늘날 비판적 정치 분파로서 ‘좌파’가 자본주의 체제 위기극복의 보조단위로 기능하고 있는 것을 용인하게 하였다. 이제 사회주의운동과 사회주의자는 설 곳을 잃고 비판적 정치 분파로서의 ‘좌파’만이 남게 되어 사회주의운동은 좌파운동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사회주의운동은 혁명적 사회주의니 변혁적 노동계급운동이니 하는 갖가지 수사가 붙게 되었다.

     

     이처럼 20세기 사회주의운동의 역사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하위파트너로 종속됐던 노동조합운동과 사회민주주의당, 그리고 이의 반대 관념인 무정부주의에 의해 주도됐다. 이러한 가운데 전투적 노동조합운동이 특수한 지위를 부여받아 오기는 하였으나 오늘날 자본주의의 개량적 조치와 자본의 유연화 전략으로 인해 그조차 위기를 맞고 있다. 경험한 대로 전투적 노동조합운동과 전투적 노동운동이 사회주의운동의 주체세력으로서 전화/발전되지 못하고 자본주의 내에 포섭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제기되는 ‘평의회-사회주의당 운동’의 복원은 이미 자본주의에 포섭된 노동조합운동과 사회민주주의당 파트너쉽 극복을 의미한다. 즉 노동조합의 한계를 넘어서는 노동자 평의회건설은 20세기 사회주의운동의 좌초와 분화 위에서 제기되고 있는 역사적 사회주의의 한계와 오류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사상으로 현대적으로(탈근대주의 운운의 역편향이 아니라) 복권하는 것이다.
     

    현 한국사회주의운동에 대한 부분적 비판

     

     한국사회에서 맑스주의 운동진영은 현장실천가(활동가)들, 투쟁하는 노동자민중들, 그리고 노동자민중의 뇌리에 대안 세력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세를 놓치지 않는 계급투쟁의 전위를 자임한다면 다음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먼저-, 현실적인 역량을 넘어서는 선도적 투쟁의 길을 열어감에 있어 다양한 수준의 투쟁과 조직, 나아가 운동미래에 대한 전략수립의 문제. 이어-, 현실 변혁운동단계와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민중주의와 중도주의를 근절시키고 맑스주의를 발전시키는 문제이다. 중도주의는 '급진적 민주주의 운동'이라 봐도 무방하며 그 실체는 자유주의와 스탈린주의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중도주의는 변혁전략과 이행문제, 그리고 주체형성에 있어 변혁운동의 수준 높은 발전을 현실내부로 가두려는 그야말로 당면투쟁의 급진성만으로 변혁운동의 장래를 제한하려는 경향을 띤다. 현실에서 중도주의는 대기주의, 전위적 질서와 역할의 신비화, 그리고 현실 변혁운동에서의 무기력과 자기 보존의 패권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민중주의는 노동자민중의 생존권 요구를 절대화하여 대중추수주의와 무정부성을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민중주의는 노동자민중의 투쟁과 각성을 제한하여 변혁운동의 주체적 성과를 유실시키고 노동자민중의 이익집단화를 용인하여 결국 자본가 권력에 모든 것을 갖다 바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노동자민중에 대한 그들의 따뜻한 시선과는 하등 관계없는 것이다. 여기에다 ‘사회주의’라는 개념을‘자유주의적 사회성 강화’로 사용하는 흐름이 노골화되면서 사회주의 자체가 희화화되기까지 한다. 이처럼 한국사회주의운동은 한편 과거 유물로서 자유주의와 스탈린주의의 경계, 또 한편의 경제투쟁과 무정부성의 경계에서 새로운 모색을 힘겹게 진전시키고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주의운동의 중요한 과제는 비판적 정치분파로서의 ‘좌파’의 색채를 걷고 자본주의의 하위파트너로 자리하고 있는 ‘노조-사회민주주의당’의 개량논리를 걷어치우고 사회주의운동을 다시 세워나가는 것이다. 물론 이를 돌파하기 위한 새로운 주체형성-재조직화를 위한 노력은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맑스-꼬뮤날레도 그러한 노력일 것이며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주체형성 논의도 그러한 노력의 일부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한국사회주의운동은 계급해방, 인간해방이라는 목표가 가지는 내용과 형식의 측면에서, 이행전략의 측면에서 전면적인 논의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이러한 논의를 책임있게 시작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평의회운동>>, 윤웅태,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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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레타리아 조직 - 당, 평의회 조직문제를 중심으로

     

      나는 이 글에서 레닌의 1902년「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보여준, 외부로부터 계급의식 도입을 통한 당 이론이 1905년 소비에트 투쟁 경험 속에서 변화했다고 본다. 즉 당은 계급의 일부이며, 대중의 계급투쟁 속에서 변화된 것이다. 당은 대중의 혁명적 투쟁기구로 나타난 평의회 내에 활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 이후 레닌은 당과 새로운 국가기구 사이에 관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관료화와 프롤레타리아 반혁명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국가의 위험성을 보지 못했다. 레닌은 내란의 위기가 가속화되고, 도시에서 경제가 완전히 붕괴되자, 당기구의 중앙집권화를 가속화시켰다. 아울러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정의는 노동대중에서 나온 계급적 성분보다 혁명에 대한 헌신성, 당성에 의해 내려질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혁명 이후 레닌의 당론은 결국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당의 독재로 변질됐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룩셈부르크가 지적한 대중의 자발성에 기초한 투쟁에 근거하는 당의 역할은 유의미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독일 좌익공산주의자와의 논쟁에서 드러나듯이, 혁명적 대중투쟁 기관으로서, 사회주의 사회의 재조직화 기구인 평의회에 대한 동요를 보였다. 이것은 룩셈부르크가 독일공산당내 논쟁 지형에서, 자신이 그렇게 반대했던 국민의회 개입을 선택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1905년과 1917년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쇠퇴하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시기에 자본주의 질서의 전복을 위한 새로운 조직인 노동자평의회를 창조했다. 독일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의회의 이용불가능성, 사회민주주의의 배반과 반동적 본질,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국가의 옹호자이자 제국주의 전쟁의 신병모집관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새로운 시기의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소비에트와 동일한 원칙에 근거한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들은 이후 공장안에 갇힌 노동자 투쟁을 강조함으로써, 정치조직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반면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통일전선, 민족해방 투쟁을 지지하는 코민테른 입장에 반대하고 국제주의 원칙에 입각한 투쟁을 전개했다.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 그룹은 당을 계급의식의 능동적 인자이자 동시에 계급 전체 내에서의 의식 발전의 표현으로서 파악했다.

     

    계급투쟁의 역사적 조건의 변화는 계급조직의 형태에도 상당한 변화를 초래한다. 통합된 세계자본주의 체제, 자본의 세계화에 따른 ‘위기의 세계화’는 노동계급운동을 전지구적 투쟁이라는 새로운 지평으로 끌어올리고 있고 노동계급의 국제주의 관점은 더욱 요구되고 있다. 맑스주의는 세계노동자의 혁명적 연대를 통해서 자본주의 전복을 의도한다. 따라서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독일혁명 (1918-23) 중심으로 한, 레닌과 유럽 맑스주의 내부논쟁을 되새기는 것은, 우리 사회 혁명적 맑스주의 실천운동 복원과도 연관돼 있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조합 운동은 1997년 역사적인 총파업투쟁 이후 점차 자본과 국가기구에 포섭되고 있다. 진보정당-산별노조의 낡은 구도를 벗어나 이제 노동자평의회, 혁명당 문제가 새로이 제기되어야 한다. 당과 평의회 관계는 지속해서 연구해야 할 주제다. 여기서는 앞에서의 논쟁에서 시사점을 받아 한국 사회에서의 당과 평의회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정리해본다.

     

    첫째, 부르주아당과 달리 프롤레타리아 당은 국가를 접수하거나 국가 운영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 원칙은 전체로서의 계급이 이행국가를 통하여 그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계급이 당 없이 존재한 시기도 있었지만, 계급 없는 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둘째, 모든 노동자에게 열려있는 대중조직과 정치조직인 당 사이에는 진화의 차이가 있다. 자본주의 상승기에는 당면 경제이해를 방어함으로써 영구조직인 노동조합이 존재한다. 하지만 당은 그렇지 않다. 당의 존재는 계급투쟁의 상태에 의존하는데, 상승기에는 나타나고 후퇴기에 사라진다. 자본주의 쇠퇴기에는 영구조직인 노조가 프롤레타리아 내용을 상실하고 국가기구의 부분이 된다. 그리하여 이때는 대중파업, 와일드캣 파업이 일어난다.

     

    셋째, 노동자평의회에 의한 투쟁이 절정에 이르기 전에 당은 나타난다. 왜냐하면, 당의 존재는 부상하는 계급투쟁의 시기 때문에 조건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의 역사적 진화와 함께 당 기능은 변한다.

     

    넷째, 당은 계급의식의 유일한 담지자라고 주장할 수 없다. 계급의식은 전체로서의 계급 속에 있다. 당의 활동은 계급의 방향을 제시하고 투쟁에 비료를 주는 것이지, 계급대신에 결정을 하는 지도자가 아니다. 계급에 여러 개의 일관된 혁명 경향이 존재하는 것처럼 강령 틀 내에 차이와 경향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공산당은 일괴암적 관념을 거부한다. 당은 투쟁이 제기하는 모든 문제에 구체적으로 답하는 처방을 낼 수 없다. 그것은 계급의 기술적 행정기관도 아니고 집행기관도 아니다. 당의 역할은 봉기의 “참모부”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조직 – 당, 평의회 조직문제를 중심으로>>, 남궁원,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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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68혁명 50주년 : 1960년대 학생운동의 의미와 노동계급의 부활

68혁명 50주년 : 1960년대 학생운동의 의미와 노동계급의 부활

 

 <우리는 1968년 투쟁을 '혁명'이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대적이고 급진적인 투쟁에서 노동계급이 부활했기 때문에 '미완의 혁명'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1960년대 말 무렵이 되자, 전후 호황이 사라지고,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일상생활이 동과 서를 막론하고 가난과 위선임이 밝혀지고, 두 제국주의 블록 간 대리전쟁이 베트남에서 아프리카까지 계속됨에 따라, 부모세대가 겪었던 패배와 트라우마를 경험해 보지 못한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세대는 자본주의 사회의 정상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 제기는 다른 층위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1968년 5~6월 프랑스에서 거대한 대중 파업으로 터져 나왔고, 이 운동은 반혁명의 시대가 끝을 고하는, 모든 대륙에서 노동자 투쟁의 국제적 물결을 알리는 신호였다. 68년 5월 프랑스, 그 운동의 정점에서 거리 곳곳, 학교, 대학, 그리고 작업장에서, 존 리드(John Reed)가 1917년 10월 이전 러시아에서 관찰했던 바와 똑같은 깊이 있는 정치적 토론의 신호를 관찰할 수 있었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자본주의를 새로운 사회로 대체하자는 생각이 노동자와 학생들 가운데 중요한 소수파 사이에서 심각하게 논의되었고, 이러한 정치적 동요의 가장 중요한 열매는 혁명적 정치 조직의 새로운 세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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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0년대 세계학생운동의 전개과정

 

 미국에서는 1964년부터 가장 대대적이고 가장 격렬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캘리포니아의 버클리 대학에서 학생들의 항의가 최초로 대규모 확대되었다. 학생들이 주요하게 제기한 것은 대학에서 자유로운 정치적 발언을 위한 ‘자유로운 발언 운동’의 요구였다.

미군 신병모집에 항의하는 학생들은 베트남전 반대, 인종 분리 반대를 선동했다. 처음에 당국은 학생들의 평화로운 점거에 경찰력을 동원해서 억압했고, 1965년 초 대학 측은 학교 내에 경찰의 활동을 허가했으며 그로 인해 버클리 대학은 미국 학생 저항운동의 주요중심지가 되었다. 동시에 로널드 레이건이 ‘버클리에서 무질서를 일소하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자, 운동은 강한 자극을 받았고, 그다음 해에 인종 분리 반대, 여성권리 옹호 그리고 특히 베트남전 반대 항의시위를 벌이면서 과격화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항의운동은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1967년 말 952명의 학생이 베트남 신병소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1968년 2월 8일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시민권을 위한 시위 도중 3명의 학생이 살해당했다. 운동은 1968년에 가장 강력히 확대되었다. 이러한 불만과 과격화는 4월 4일 마틴 루터 킹의 암살로 한 층 더 증폭되었는데, 이 사건은 그 나라의 흑인 게토에서 수많은 폭력충돌을 불러일으켰다. 컬럼비아대학의 점거는 미국 학생운동의 최고정점 중 하나로 다시 새로운 충돌을 불러왔다.

 

 미국 대학생들의 반란은 같은 시기에 많은 다른 나라로 퍼졌다. 아메리카 나라들 가운데서는 브라질과 멕시코 학생들이 가장 활동적이었다. 1967년 브라질에서는 브라질 정부와 미국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가 지속해서 발생했다. 당국의 엄청난 진압과 대대적인 검거에도 브라질 학생들은 1968년 10월까지 거의 날마다 시위를 벌였다.

몇 달 뒤에는 멕시코가 휩쓸렸다. 7월 말 멕시코시티에서 학생반란이 일어났다. 경찰은 탱크를 투입했다. 경찰 총수는 올림픽 대회를 명분으로 잔인한 진압을 지시했고. 9월 18일 대학캠퍼스가 경찰에 점령되었다. 마침내 10월 2일 정부는 멕시코시티의 3문화광장에서 만 명의 학생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도록 했는데, ‘틀라텔롤코의 학살’로 기억되는 이 진압에서 최소 200명이 살해당하고 500명 이상이 중상을 입었으며 2,000명 이상이 검거되었다. 그렇게 올림픽을 조용하게 치를 수 있었지만, 학생들은 올림픽이라는 강제된 휴식이 있은 뒤에도 몇 달 동안 투쟁을 계속해나갔다.

 

 당시 학생 운동 물결은 아메리카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라 모든 대륙을 휩쓸었다. 아시아는 일본에서 극적인 운동이 나타났다. 1963년 이래 미국과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폭력시위가 발생했는데, 주로 전학련(전국일본학생자치위원회연합)이 주도했다. 1968년 봄의 끝 무렵, 이 학생운동은 수많은 학교로 퍼졌고, 노동자들이 운동에 가담한 1968년 10월에는 절정에 달했다. 반봉기법이 통과되자, 80만 명이 거리에 나와 시위를 했다. 도쿄대학 점거를 경찰이 진압하자,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했다. 하지만 1969년 1월 중순 학생운동의 마지막 요새였던 도쿄대학이 무너졌다.

 

 아프리카에서는 세네갈과 튀니지에서 학생들의 투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렇게 모든 대륙을 휩쓸었던 운동은 유럽에서 가장 거대하고 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영국에서는 이미 1966년 말에 런던경제학교(LSE, 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시작하여 점거 운동이 퍼져나갔고, 1967년 3월에는 5일간의 점거가 있었는데, 미국의 예를 따라 ‘자유대학’이 만들어졌다. 가장 극적인 시위는 베트남전에 반대하여 1967년 3월과 10월, 1968년 3월과 10월에 일어났는데, 모두 경찰과의 폭력적인 충돌이 있었다. 벨기에에서는 학생들이 베트남전에 반대하고 교육부문의 개선을 요구하기 위해 1968년 4월부터 수차례 거리로 나섰다. 5월 22일에는 브뤼셀 자유대학을 점거하여 ‘민중을 위해 열린 대학교’라고 선언했다.

이탈리아에서는 1967년부터 여러 대학을 점거했고, 경찰과 학생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프랑코 지배하의 스페인에서는 1966년부터 노동자 파업과 대학 점거의 물결이 전개되었다. 1967년에 그 운동은 더욱 강하게 성장했고 1968년까지 지속되었다. 학생과 노동자는 서로 연대를 표시했다.

당시 유럽의 모든 나라 중에서 독일의 학생운동이 가장 강력했다. 독일에서는 1966년 말, 사회민주당이 정권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반응으로 ‘의회 외부의 반대파(APO)’가 출현했다. APO는 특히 학생들의 총회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그 회의에서는 저항의 수단과 방법에 관한 열띤 논쟁이 이루어졌다. 많은 대학에서 미국의 모범을 따라 토론그룹이 만들어졌고, 기성의 부르주아적인 것에 대한 반대로 ‘비판적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시기에 논쟁의 오랜 전통, 즉 공개적인 총회에서의 토론 전통이 일부 부활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극적인 행동에 대한 충동에 이끌리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래도 이론과 혁명운동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출현했고, 더불어 자본주의 극복을 생각할 용기도 다시 나타났다. 독일의 저항운동은 국제적으로 ‘가장 이론적이며, 토론에 있어서 가장 깊게 파고들었고, 가장 정치적이었던’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토론에 병행하여 수많은 항의시위가 있었다. 베트남전 문제는 확실히, 미국의 군사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정부가 있는 나라와 2차 대전의 영향이 계속 남아 있던 나라에서 주요 원동력이 되었다. 1968년 2월 17일과 18일 서베를린에서 국제 베트남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그에 뒤이어 12,000명이 참가한 시위가 있었다. 1965년 이후 시위는 모두 ‘비상사태법령’의 제정을 반대했는데, 이 법령은 독일의 내부적인 군국주의화와 진압에 대한 강화된 권리를 국가가 갖는 것이었다. 1966년 대연정에 참가한 사회민주당(SPD)은 이러한 법령을 주장하면서, 그들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유혈진압을 지휘했던 1918~1919년과 같은 자신들의 오랜 전통을 이어갔다.

 

 프랑스의 학생반란은 1968년 3월 22일 파리 서편 근교인 낭트에서 시작되었다. 그날의 사건은 그 자체로는 특별한 게 아니었다. 파리에서 베트남전에 반대해 많은 폭력적인 시위가 벌어졌던 시기에 낭트 대학 소속 극좌파 학생 한 명의 검거에 대항해 그의 동료 학생들이 대학위원회 건물을 점거하기로 결정했다. 대학위원회 건물을 점거한 142명은 건물을 떠나기 전에, 3월 22일 운동(M22)의 성립을 결정했다. 그것은 트로츠키주의 성향의 혁명적 공산주의 연맹(LCR)과 아나키스트들이 초기에 속해있던 비공식적 운동의 하나였다. 4월 말에는 맑스-레닌주의 공산주의 청년연합(UCJML)의 마오주의자들이 가담했다. 그에 뒤이어 대략 1,200명의 학생이 참여했다. 대학교 벽면에는 점점 더 많은 현수막과 낙서가 등장했다. ‘교수들, 너희는 낡았고 너희의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삶을 살자’, ‘너희의 꿈을 실현하라’ 등. 3월 22일 운동(M22)은 3월 29일을 ‘비판적인 대학교’의 날로 선언하면서 독일 학생운동의 전철을 밟는다.

낭트 캠퍼스에서는 극좌파 학생들과 ‘볼셰비키들을 혼내주기 위해서’ 파리에서 원정을 온 옥시당(Gruppe Occident) 그룹 소속 파시스트들 사이에 점점 더 자주 충돌이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총장은 학교를 다시 폐쇄하기로 결정했고, 경찰이 학교를 봉쇄한다. 낭트 학생들은 대학 폐쇄에 반대하고 M22 구성원에 대한 대학위원회의 징계에 항의하기 위해 다음날 소르본 대학 광장에서 집회를 갖기로 한다. 그 집회에는 300명만이 참가했지만, 학생 시위가 끝나기를 바라던 정부는 경찰에 라탱지구(파리의 대학가)를 점령하고 소르본을 포위하도록 명령했다. 경찰이 수백 년 이래 처음으로 소르본 대학에 난입했다. 자유로운 귀가를 약속했던 경찰은 남학생들을 연행했다. 이에 분노한 수백 명의 학생들이 소르본 광장에 모여 경찰과 충돌했다. 경찰의 진압이 강압적일수록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그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충돌은 그날 저녁 4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그다음 날 경찰은 소르본 일대를 완전히 봉쇄했다. 하지만 정부의 단호한 진압은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 시위를 끝내기는커녕 점점 더 대대적으로 확산되어갔다. 4만5천 명의 학생이 ‘소르본은 학생들의 것이다’, ‘경찰은 라탱지구에서 물러나라’, ‘우리의 동지를 석방하라’라는 투쟁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참여했다. 시위대에 점점 더 많은 학생, 선생, 노동자, 실업자가 동참했다.

5월 7일 시위행렬은 센강을 건너 샹젤리제를 따라 이동했고 대통령궁 근처까지 나아갔다. 평소에 라 마르세예즈나 장례의 조종이 들리던 개선문 아래에서는 인터내셔널가가 불리기 시작했다. 몇몇 지방 도시에서도 시위가 번져나갔다. 정부는 자신들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 5월 10일 낭트 대학을 개방했지만, 그날 저녁 만 명의 시위대는 라탱지구에 모여 소르본을 봉쇄했던 경찰과 대치했다. 몇몇 시위대가 바리케이트를 치기 시작했고, 새벽 2시에 CRS(경찰기동대)는 최루탄을 발사하며 바리케이트를 향해 돌격했다. 그 충돌은 매우 폭력적이어서 양측에서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시위대 중 5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라탱지구에서는 많은 주민이 학생들에게 호의적이어서 경찰의 공격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집으로 피신하게 하거나 거리에 물을 뿌려주었다. 이 모든 사건들, 특히 진압세력의 잔인성에 관한 보도는 사람들을 자극했다. 5월 11일 파리와 프랑스 전역에서 분노가 거세졌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이러한 시위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다양한 직업의 수십만의 시위자들, 특히 젊은 노동자와 학부모가 참여했다. 지방에서도 많은 대학을 점거했고, 곳곳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사람들은 토론하기 시작했고 진압세력의 만행을 비난했다.

 

 시위의 전개는 이제 극좌파 학생들을 비난했었던 CGT를 포함한 노동조합 중앙조직과 몇몇 경찰노동조합까지 강경 진압과 정부 정책에 항의하기 위한 5월 13일의 파업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5월 13일 전국의 모든 도시에서 2차 세계대전 이래 최대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노동계급은 학생들 곁에서 대대적으로 참가했다. 가장 널리 확산된 구호 중 하나가, ‘10년(드골이 권력을 잡은 기간),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었다. 시위의 결과는 거의 모든 대학을 학생뿐만 아니라 수많은 젊은 노동자들이 점거한 것이었다.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발언을 했고, 토론은 대학 관련 문제나 진압에 관한 것에 한정되지 않았다. 노동조건, 착취, 사회의 미래 등 가능한 모든 사회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토론은 많은 직장에서 계속 진행되었고 노동자들은 자발적인 파업에 들어갔고 작업장을 점거하기로 했다. 특히 젊은 노동자들이 운동을 추진했다. 드디어 노동계급이 다시 계급투쟁의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2. 1960년대 학생운동의 의미

 

 1960년대 학생운동의 특징은 전반적으로 베트남전쟁 반대에 있었다. 이 운동은 1950년대 초 한국전쟁 동안의 반전운동처럼 소련-스탈린주의 당과 연계된 운동이 주도권을 쥘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들은 사실상 어떤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고, 오히려 자주 그 운동과 대립했다. 이것이 1960년대 말 학생운동의 특징 중의 하나였다.

 

 베트남전에 반대한 미국에서의 저항이 서방 세계 모든 나라에서 가장 중요하고 널리 확산된 동인이었다면, 학생반란이 주요한 나라들에서 일어난 건 확실히 우연이 아니었다. 미국의 젊은 세대는 징집으로 인해 전쟁문제와 직접 대면했다. 베트남전에서 미국의 젊은이들은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만 명이 부상당해 돌아왔으며, 수백만 명은 그곳에서 겪은 경험으로 평생 후유증을 앓았다. 그들이 현지에서 경험한 공포를 제외하더라도, 많은 이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했다. 우리가 베트남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가? 공식적으로 그들은 ‘민주주의’, ‘자유 세계’ 그리고 ‘문명’을 수호하기 위해 그곳에 파견되었지만, 그들이 현지에서 경험한 건 공식적인 것과 완전히 모순되었다. 그들이 이른바 방어해야 할 정권, 즉 사이공의 정부는 민주적이지도 문명적이지도 않았다. 그 정권은 군사독재로서 부정부패가 극에 달해 있었다. 현지에서 병사들은, 비무장의 가난한 농민, 여성 그리고 아이와 노인에게까지 폭력을 가하고 살해하도록 요구하는 현실에서, 자신들이 ‘문명’을 수호한다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국 정부가 제시하는 ‘문명과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공식적인 말과 베트남에서 실제 행동 사이의 엄청난 모순은 미국 부르주아지의 권위와 전통적인 가치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킨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이러한 반란은 처음에는 히피 운동과 함께 비폭력적이고 평화주의 운동의 하나였다. 그러나 1968년 프랑스에서와같이 버클리에서의 진압은 그 운동이 과격화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비폭력운동에 잠시 함께했던 제리 루빈(Jerry Rubin)이 국제청년당(Youth International Party)을 창립한 이후, 반란운동은 자본주의에 대항한 일종의 혁명적인 전망을 스스로 부여했다. 이제 운동의 새로운 영웅들은 더 이상 밥 딜런이나 조안 배스가 아니라, 체 게바라와 같은 사람이었다. 이 운동의 이데올로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이었다. 여기에는(자유 숭배, 특히 섹스의 자유나 마약 소비의 자유와 같은) 아나키스트적인 면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쿠바와 알바니아를 모범으로 찬양하는) 스탈린주의적인 면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1960년대 미국에서 확산된 저항운동의 주요 특징은 베트남전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인종차별에도 반대했으며, 성차별에도 반대하고, 미국의 전통적인 도덕과 가치에 반대했다. 이 운동은 결코 노동계급의 운동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에 대항한 혁명적 세력은 노동계급이 아니라 다른 사회계층, 즉 인종차별의 희생자인 흑인, 제3 세계의 농민, 반항하는 지식인이었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1960년대 학생운동은 유사한 모습을 보였다. 미국이 베트남에 관여하는 것에 대한 비난, 권위(특히 대학의 권위)에 대한 거부, 권위주의 일반에 대한 거부, 전통적인 도덕(특히 성도덕)에 대한 반란 등이 그것이다. 이것이 바로 권위주의의 상징이었던 스탈린주의 당들이 비록 미국의 베트남 개입을 강력히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자들 사이에서 전혀 반향을 얻을 수 없었던 이유였다. 하지만, 1960년대의 반란자들은 호치민(오랜 당원이었지만 훨씬 더 모범적이었고 영웅적인 것처럼 보였던)의 포스터를 걸어놓기를 더 좋아했고, 체 게바라(마찬가지로 스탈린주의 당의 당원이었지만 이국적으로 여겨졌다)나 안젤라 데이비스(미국 스탈린주의 당의 당원이었지만 흑인 여성이라는 이미지와 체 게바라와 같이 낭만적인 외모로 인해)의 낭만적인 사진을 걸어두기를 가장 좋아했다.

베트남전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자유스러워 보이는 이러한 현상은 독일에도 나타났다. 1965년 이래 독일의 대학에서 전개된 토론 과정에서 ‘반권위주의적인 진정한 맑스주의’에 대한 모색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당시 평의회주의 운동의 많은 글이 다시 회람되었다.

프랑스에서 1968년 전개된 학생운동의 주제와 요구도 근본적으로는 동일했다. 그 과정에서 베트남전에 반대했던 저항은 상황주의적이거나 아나키스트적인 일련의 슬로건에 밀리게 되었다.

 

 특히 아나키스트적인 영감은 아래와 같은 슬로건으로 표현되었다.

“금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자유는 모든 범죄를 포함하는 범죄이다“

“선거는 어리석은 자들을 위한 함정이다“

“불손하고 파렴치하다는 것은 새로운 혁명 무기이다“

 

 상황주의의 영향은 이렇게 반영되었다.

“소비사회 타도”

“볼거리의 상품사회 타도“

“소외를 타도하자“

“절대로 일하지 말라“

“지루함은 반혁명적이다“

“현실적으로 되자, 비현실적인 것을 요구하자“

 

 다른 세대에 대한 표현은 이러했다.

“달려라 동지, 낡은 세계가 네 뒤에 있다“

“젊은이들은 섹스를 하고, 늙은이들은 음란한 몸짓을 한다“

 

 바리케이트가 세워졌던 68년 5월 프랑스에서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이 나왔다.

“바리케이트는 거리를 차단하지만 길을 연다“

“모든 생각의 결론은 경찰의 주둥이에 짱돌을 처넣는 것이다”

 

 이시기의 가장 큰 혼란은, 다음의 두 가지 슬로건으로 표현되었다.

“혁명적인 사고란 없다. 오직 혁명적인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할 말이 있지만, 그것이 무언지 모른다“

 

 이러한 슬로건이 다른 나라에서 유포된 대부분의 슬로건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보여주는 건 1960년대 학생운동은 비록 여러 나라에서 노동자 투쟁으로의 가교를 만들려는 의지가 있었을지라도, 노동계급의 본질을 반영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접근방식은 잘 못 이해한 맑스주의 고전 문서에서 영웅이었던 육체노동자에 대한 매혹과 뒤섞여 노동계급에 대한 오만을 반영했다.

1960년대 학생운동의 성격은 쁘띠부르주아적 이었다. 아나키스트적인 표현 이외에 가장 분명한 것은 삶을 즉시 변혁하려는 의지였다. 이러한 조급함과 ‘모든 것을 지금 당장’이라는 주장은 쁘띠부르주아의 계급적 특징이다. 이 운동 지도부의 혁명적인 과격주의 그리고 운동 일부의 폭력 미화는 쁘띠부르주아적인 본질을 반영한 것이었다. 1968년 학생들의 혁명적 관심사는 의심의 여지 없이 옳았지만, 운동은 혁명을 일으키는 노동계급 운동의 실질적인 발전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혁명에 관한 낭만적인 관점만을 갖고 있었다. 스스로 혁명적이라고 여겼던 프랑스의 학생들은 68년 5월 운동이 이미 혁명이었다고 믿었고, 날마다 세웠던 바리케이트를 1848년과 1871년 코뮨의(바리케이트) 유산으로 묘사했다.

 

 1960년대 말 학생운동의 특징 중 또 하나는 세대 간의 갈등 즉 새로운 세대와 그들이 비난하는 부모세대 사이에 존재한 아주 큰 간극이었다. 특히 부모세대는 제1차 세계대전이 초래한 가난과 굶주림을 극복하기 위해 힘들게 일해야 했다는 이유로 오로지 물질적인 번영에만 신경을 썼다고 비난받았다. 그래서 소비사회에 관한 환상과 ‘절대로 일하지 말라’와 같은 슬로건이 성공을 거두었다. 반혁명을 철저히 경험한 세대의 자녀들로서 1960년대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부모가 자본주의의 요구에 무릎을 꿇고 순응했다고 비난했다. 반면 많은 부모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것보다는 더 나은 경제적 조건을 자녀에게 안겨주려고 치를 수밖에 없었던 희생에 대해 자녀들이 경멸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기도 힘들어했다.

 

 하지만, 1960년대 학생반란에는 진정한 경제적인 요인이 있었다. 오늘날의 상황과 비교할 때, 당시에는 대학 졸업 후 실업으로 인한 또는 불안정한 노동조건으로 인한 큰 위협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대학생들의 주요한 근심은, 자신들이 그 이전 세대의 대학졸업자와 같이 동일한 사회적인 지위 상승을 더는 이룰 수 없을 거라는 점이었다. 1968년 세대는 이른바 ‘사무관리직 인력의 프롤레타리아화’ 현상에 직면한 최초의 세대였다. 이 현상은 학생 수가 현저히 늘어나자마자 위기가 공공연하게 시작했다. 이러한 증가는 경제의 필요에 부응한 것이긴 했지만, 또한 그 부모들이 자신의 경우보다는 더 나은 경제적 사회적 처지를 자녀들에게 부여하려는 의지와 능력에도 부합했다. 특히 학생 수의 대규모 증가는 불편의 증대를 초래했다. 이는 대학의 구조와 관행이 단지 엘리트들만이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강한 권위주의적 구조가 지배했던 시대의 소산으로서 그대로 존속했기 때문이었다.

 

 1964년에 시작된 학생운동이 자본주의의 번영 시대에 전개되었던 반면, 경제적 상황이 벌써 매우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그래서 학생들의 불편도 더 커졌던 1967년의 상황은 이미 달라 보였다. 이것이 바로, 그 운동이 1968년에 그 절정을 경험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왜 1968년 5월에 노동계급이 무대 위에 등장하여 운동을 이끌어나가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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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68년 5월 노동계급의 부활

 

 낭트에서는 학생 또래의 노동자들이 운동에 동참했다. 그들의 논거는 단순하면서도 명료했다. ‘학생들이 결코 파업을 통해서 압력을 가할 수 없음에도 정부를 강제하여 승복하도록 할 힘을 가지고 있다면, 노동자들도 정부를 승복하게 만들 수 있다.’ 낭트의 학생들도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선언하고, 노동자들의 파업에 연대했다.

5월 14일 저녁 총 3,100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했다. 5월 15일에는 노르망디의 클레옹에 있는 르노 작업장과 다른 작업장으로 운동이 확산되어 총파업과 무기한 공장점거가 이루어졌고 공장 정문에는 붉은 깃발이 내걸렸다. 저녁 무렵에는 파업노동자가 11,000명에 달했다. 5월 17일에는 총 215,000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파업 물결은 이제 프랑스 전역, 특히 프로방스에 도달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생적인 운동이었고 노조들은 그 꽁무니를 뒤따랐다. 모든 지역에서 젊은 노동자들이 선두에 섰다. 빈번하게 학생들과 젊은 노동자들이 연대했다. 젊은 노동자들은 학생들이 점거한 대학교로 가서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공장 구내식당에 식사하러 오라고 권했다.

5월 18일 정오에 CGT의 파업호소가 알려지기 전에 이미 100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 날 저녁에는 200만 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5월 20일에는 6백만 명이, 5월 21일에는 6백50만 명이 작업을 멈추었다. 5월 22일에는 8백만 명이 무기한 파업에 참여했다. 그것은 국제 노동운동 사상 최대의 파업이었다. 이 파업에는 모든 부문이 포함되었다. 산업, 운송 및 교통, 에너지, 우편 및 텔레커뮤니케이션, 교육, 행정(정부의 여러 기관들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언론매체(국영 텔레비전이 파업을 했고, 종사자들은 특히, 강요된 검열을 비판했다), 연구소 등등. 그리고 장례사업장마저도 파업을 했고, 심지어는 프로 스포츠 선수도 그 운동에 동참했다. 프랑스 축구협회 건물에 붉은 깃발이 나부꼈다. 예술가도 참여해서 칸 영화제가 감독들의 권유로 중단되었다.

 

 이 시기에, 점거된 대학은(파리의 오데옹극장과 같은 다른 공공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정치적 논쟁 공간이 되었다. 많은 노동자들, 특히 젊은 노동자들이 이러한 토론에 참여했다. 노동자들은 혁명의 필요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점거한 공장을 방문해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 달라고 요청했다. 마찬가지로 거리에서도 보도에서도 많은 토론이 이루어졌다. (68년 5월에는 날씨마저 매우 좋았다). 토론은 매우 즉흥적으로 생겨났다.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서로 대화를 나눈다’ 가 슬로건이었다. 곳곳에서 축제 분위기가 지배했지만, 예외적으로 부유층 구역에서는 공포와 증오가 쌓여갔다. 프랑스 전역에서 도시구역에서, 몇몇 큰 작업장이나 인근 구역에서 행동위원회가 출현했다. 그곳에서는 어떻게 투쟁해야 할지, 혁명적 전망이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지에 대해 토론했다.

 

 이러한 상황에 지배계급은 방황하게 되었고, 이는 혼란스럽고 효과적이지 않은 발의를 통해 나타났다. 우파가 지배하는 의회는 좌파가 2주 전에 제시한 검열안을 토론한 후 거부했다. 프랑스 공화국의 공식적인 제도권들은 딴 세상에 사는 것처럼 보였다. 정부도 마찬가지여서 같은 날, 독일로 출국했던 다니엘 콘벤디트의 재입국을 금지하기로 했다. 이 결정은 한층 더 불만을 들끓게 했다. 5월 24일 이에 항의하기 위해 더 많은 시위가 있었고, 많은 젊은 노동자들이 시위에 합류했다. 이날 저녁 드골 대통령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는 국민투표를 제안했다. 상황을 그보다 더 잘못 파악할 수는 없었다. 이 담화문은 소귀에 경 읽기였고, 정부와 부르주아지의 전반적인 혼란스러움을 나타냈다.

거리에서 시위대는 담화문을 라디오를 통해서 들었고, 즉시 분노가 더 고조되었다. 파리 시내 전체에 그리고 몇몇 지방 도시에서 폭력적인 충돌이 일어났고 바리케이트가 세워졌다. 수많은 쇼윈도가 깨졌고 자동차가 불탔다. 이 때문에 여론의 일부가 학생들에게 등을 돌렸는데, 이들은 이제 폭도로 비춰졌다. 시위대 중에 드골주의 민병대원이나 경찰이 섞여 있었으나, 많은 학생들은 바리케이트를 세우거나 소비사회의 상징인 자동차를 불태움으로써 자신들이 혁명을 만들 거라고 믿었던 것은 분명했다. 이러한 행위는 특히, 역사상 최대의 파업 물결에 대한 당국의 한심스럽고 도발적인 반응에 대해 시위대, 학생들, 젊은 노동자들이 갖는 분노를 드러냈다. 체제에 대한 이러한 분노의 표현으로 자본주의의 상징인 파리 주식거래소가 화염에 휩싸였다.

 

 결국 부르주아지는 그다음 날에야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했다. 토요일인 5월 25일에 노동부에서 노동조합, 고용주들 그리고 정부 사이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고용주들은 노동조합이 기대했던 것 이상을 제공할 용의가 있었다. 부르주아지가 겁에 질려 있는 건 명백했다. 5월 26일 밤 그르넬협정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협정은 이 운동의 강력함에 비해 한참 미치지 못하는 도발에 지나지 않았다. 5월 27일 총회는 그르넬협정을 만장일치로 거부했다. 이 협정을 거부한 가장 좋은 증거는 5월 27일 파업자 수가 9백만으로 증가한 것이었다.

 

 5월 28일은 좌파당의 작전과 조치가 있는 날이었다. 아침에 ‘좌파 민주주의자 및 사회주의자 연합’(사회당, 과격당 그리고 서로 다른 작은 좌파그룹을 대표하는)의 총수 프랑스와 미테랑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가 보기에 권력의 진공상태가 존재하며, 그래서 자신이 공화국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오후에는 CPF의 지도자 발덱-로쉐는 공산주의자들의 참여를 포함하는 정부를 제안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혼자서 그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는 것을 막는 것이 관건이었다. 5월 29일에 큰 시위가 있었는데, CGT가 그것을 주관하고 국민정부를 요구했다. 우파들은 즉시 공산주의의 음모에 대해 경고했다.

 

 이날 드골 장군이 사라졌다. 그가 퇴위할 거라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사실 그는 독일로 날아가서 그곳 프랑스 점령군을 지휘하고 있던 마수(Massus) 장군의 지지와 군대의 충성을 확실히 하려 했다. 5월 30일은 부르주아지가 상황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려는 시도에서 결정적인 날이었다. 드골은 다시 담화문을 발표했다. ‘지금 상황에서 나는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 나는 오늘 국회를 해산한다. ……’

 

 동시에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에서 드골을 지지하는 엄청난 규모의 시위가 있었다. 부유층 구역에서, 잘 사는 교외 지역에서, 그리고 시골에서 군용트럭으로 ‘국민’이 운송되어 왔다. 겁먹은 자들과 가진 자들, 서민들, 부유층 자제들을 위한 지역 학교 대리자들, 자신들의 우월함을 의식하고 있는 지도층들, 쇼윈도가 파괴될까 조바심내는 작은 상점 주인들이 모두 한곳에 모였다. 국기에 대한 공격 때문에 격노한 참전용사들, 은폐물 아래서 지하 세계와 더불어 잠복하는 비밀경찰들 그리고 알제리 정착민들, 파시스트적인 옥시당 그룹의 젊은 회원들인 OAS와 비시(Vichy)에 향수를 느끼는 늙은 추종자들이(이 모두는 드골을 경멸하지만) 함께 모였다. 이 모든 사람들이 노동계급에 대한 자신들의 증오와 ‘질서 사랑’을 알리기 위해서 모여들었다.

 

 그 목요일부터 조업이 재개되긴 했지만, 이것은 느리게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6월 6일에도 여전히 약 6백만 명이 파업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업은 매우 분산적으로 재개되었다. 6월 10일 플랭스의 르노 작업장을 경찰이 점령했다. 경찰에게 폭행을 당한 고등학생 중의 한 명이 센강에 추락해서 익사했다. 6월 11일에는 소쇼의 푸조 작업장에 CRS가 개입해 2명의 노동자가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 전역에 다시 한번 엄청난 시위가 발생했다. ‘그들이 우리 동지들을 살해했다’며 노동자들의 결연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CRS는 소쇼 작업장을 정리했다. 하지만 조업은 그 후 10일이 지나서야 재개되었다.

 

 그러한 분노가 다시 파업의 부활(아직 3백만이 여전히 파업 중이었다)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CGT를 그 선두로 한 노동조합과 CPF를 선두로 한 좌파정당은 선거가 실시될 수 있고, 노동계급의 승리를 위해서 조업이 재개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노동조합에 의해 5월 20일에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파업 호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은 운동을 통제해서 덜 전투적인 부분에서 조업 재개를 손쉽게 이뤄낼 수 있도록 했고, 다른 부문으로 그러한 사기저하를 확산시킬 수 있도록 만들길 원했다’ 발덱-로쉐는 선거운동 동안 자신의 연설에서, ‘공산당은 질서의 당’이라고 선언했다. 사실상 부르주아적인 질서가 서서히 회복되었다. 6월 30일 결선투표에서는 우파의 역사적인 승리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라디오 및 TV 방송국이 7월 12일에 업무를 재개했다. 업무가 재개된 후 많은 이들이 해고당했다. 곳곳에서 질서가 다시 회복되었고, 특히 국민을 설득하는데 중요한 언론매체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역사상 가장 큰 파업은 CGT와 CPF의 주장과는 반대로 패배로 끝났다. 그 심각한 패배는 그 운동 동안 분노와 경멸을 샀던 당과 권위의 복귀로 확실히 증명되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패배와는 상관없이 1968년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서도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반혁명의 시대, 기나긴 암흑의 침체기를 거쳐 1968년 드디어 노동계급이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원문 ㅣ국제코뮤니스트흐름

정리 ㅣ국제코뮤니스트전망

 

<원문 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nternational-review/201804/15127/fifty-years-ago-may-68

 

*68 투쟁 50주년을 맞아 ICC(국제코뮤니스트흐름)에서는 팸플릿을 발행했다. 「코뮤니스트」에서는 토론과 함께 다음 호에 한국어 번역본을 실을 예정이다. 이 글은 토론의 연속성을 위해 ICC의 문제의식을 담은 글을 재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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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를 내면서

  • 코뮤니스트 7호를 내면서

     

     

    촛불 투쟁이 만든 정권교체 이후 대중 투쟁은 급격하게 후퇴하고 있다. 이에 대한 분석과 위험성은 지난 호에 실었다. 이제는 대중 투쟁과 무관하게 외부에서 몰아치는 정세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급변하는 정세는 주도권을 쥔 세력이 이끌고 있다.

    지배계급이 주도하는 정세를 따라가기에도 바쁜 운동세력은 조급함과 무기력한 대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운동 사회 내부를 돌아보려는 노력도 존재한다. 이미 무너져버린 운동은 반성과 성찰보다는 구태의 반복과 자기합리화로 소수를 더욱 고립시키고 있다. 반면, 미투 운동과 같이 오랜 기간 억눌렸던 사람들의 ‘용기’와 ‘연대’는 사회 전체를 흔들어 놓고 있다.

     

    지금 정세의 배경에는 장기간 깊어지고 있는 세계자본주의 체제 위기와 급증하는 제국주의 대립 격화가 자리 잡고 있다. 한반도-동북아에서는 더욱 심각한 위기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에서 제국주의 충돌, 전쟁위기 고조라는 최악의 결과와 평화적(정치, 경제, 군사적 거래를 통한) 해결책이 늘 공존했다. 김정은의 남북, 북미 정상 회담이라는 파격적인 카드 뒤에는 체제 안전보장과 비핵화라는 불안정한 거래가 전제되어 있다. 이것과 상호보완적인 것이 경제적 거래이고, 한반도 평화로 포장된 제국주의 자본의 북한 진출(개방)이 가장 큰 거래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지배계급이 주도하는 정세에서 극우 보수세력뿐 아니라 평화를 주장하는 자유주의, 민족주의 세력과도 계급적인 입장으로 맞서야 한다. 평화협정을 추진하면서도 사드를 철거하지 않은 문재인 정부의 위선에 맞서 싸워야 하고, 종전과 한반도 평화를 주장하면서 미군 철수를 주장하지 않는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하고, 국가보안법 폐지와 정치사상의 자유, 집회 시위, 파업의 자유를 위해 계급으로 투쟁해야 한다. 노조할 권리를 넘어 자본가계급, 자본가국가와 투쟁해야 한다. 지배계급이 주도하는 종전과 평화 다음은 자본주의적 통일이 아니라 계급전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혁명을 통해 평화로!’가 노동계급이 가져야 할 슬로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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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뮤니스트』 7호에서는 현실 운동의 쟁점을 가장 우선으로 다루었다. 우리가 바로 ‘운동 사회 내부를 돌아보려는 노력’에 앞장서 왔기 때문이다.

     

    □ 쟁점 1. 에는 삼성에 맞서 싸우고 있는 반올림 활동가와 삼성전자 서비스지회 조합원의 인터뷰를 실었다. 최근 박근혜와 이재용 재판 결과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최고 권력-삼성공화국의 실체와 노조파괴 등 삼성의 범죄 행위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다.

     

    □ 쟁점 2. 에는 노동당 비선/언더 사건에 대해 내부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는 동지의 기고 글과 관료주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플랜트노조 충남지부 조합원들의 노동자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글을 실었다. 두 사건 모두 운동 사회에서 관심을 두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중요한 내부투쟁이다.

     

    □ 코뮤니스트 정치에서는 128주년 메이데이를 맞아 퇴색해가는 메이데이 정신과 민주노총의 책임을 촉구하면서 노동자 국제주의를 강조했다. ‘정권교체 쇼, 적폐청산 쇼, 헌법개정 쇼, 노동존중 쇼, 평화통일 쇼... 쇼는 화려하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자리에 서 있다. 더는 노동자들의 눈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

     

    □ 혁명 특집에서는 68혁명 50주년을 맞아 코뮤니스트 좌파의 관점에서 작성한 팸플릿 발행(ICC 작성, 본지에서 한국어로 출간예정)을 앞두고, 토론의 연속성을 위해 ICC(국제코뮤니스트흐름)의 과거 글을 재구성해서 실었다. 또한, 작년에 이어 러시아혁명 100주년의 교훈을 찾는 글과 독일혁명 100주년(1918~1923)을 맞아 독일혁명에서 코뮤니스트 좌파의 역할을 서술했던 남궁원 동지의 글을 보완하여 다시 실었다. 아직도 혁명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동지들은 세 개의 미완의 혁명에서 반드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코뮤니스트 좌파와 계급투쟁 100년에서는 코뮤니스트 좌파 경향의 양대 국제조직인 ICC와 ICT의 논쟁적인 문건을 번역하여 실었다. 두 주제 모두 국제코뮤니스트전망과 코뮤니스트 지지 동지들이 계속 토론해 왔던 내용이고, 5월 중에는 같은 주제로 집담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우리는 현재의 비관적인 상황과 우리의 능력을 과대하게 포장하거나 반대로 축소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의 현실을 직시하고, 언제까지나 혁명조직의 책무를 다해 나갈 것이다.

    “오늘날 코뮤니스트 좌파는 극단적으로 감소했고, 분산되어 있으며 정치적 명확성을 찾는 광범위한 요인들은 거대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오늘날 작은 혁명운동에서 미래의 대중 계급 운동의 진정한 전위로 행동할 역량을 갖추는 것까지 나아가는 데에는 갈 길이 매우 먼 것이 명백하다.

    시간은 더는 노동계급의 편이 아니다. 그러나 그 그림자를 뛰어넘을 수도 없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1917년 이후뿐만 아니라 1968년~89년의 투쟁에서 잃어버렸던 많은 것을 되찾아야만 한다.

    오늘날 혁명적 조직의 책무는, 1930년대 코뮤니스트 좌파인 이탈리아 분파가 가장 명쾌하게 정교화한, 코뮤니스트 분파의 책무와 유사하다.”

     

    □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에서는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회의> 소개와 조선공산당 창건 93주년 기념행사와 코뮤니스트 계승 운동의 의미를 담은 글을 실었다.

     

    이 외에도 코뮤니스트의 정치와 일상을 담은 글을 여러 편 실었다. 이번 호는 현실 쟁점에 좀 더 구체적으로 다가가고 운동 내부의 모순까지 깊게 들여다보고자 하였으나, 우리의 역량만큼 책이 만들어졌다. 다음 호에는 더욱 운동에 이바지하는, 실천을 끌어내는, 토론을 심화시키는, 코뮤니스트를 발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맑스 탄생 200주년

    메이데이 128주년

    독일혁명 100주년

    68혁명 50주년

    그리고 끊임없는 계급투쟁!

     

    혁명을 통해 평화를!!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세상, 코뮤니스트 평화 세상 쟁취하자!!!

     

    2018년 4월 30일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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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통해 평화를!!! 코뮤니스트 7호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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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을 통해 평화를!!! 코뮤니스트 7호가 나왔습니다.

     

     

    [코뮤니스트] 2018년 _7호

     

    - 목차

     

    코뮤니스트 7호를 내면서   

     

    □ 쟁점 1. 삼성공화국-최고 권력과 싸우는 투사들

    ‣ 반올림 활동가 인터뷰 

    ‣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조합원 인터뷰

     

    □ 쟁점 2. 우리안의 권력과 민주주의

    ‣ 노동당 비선/'언더' 사건이 사회운동에 던지는 의미 

    ‣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에서의 집단이성과 관료주의의 대결

      -충남지부 조합원들의 노동자민주주의를 지지하며- 

     

    □ 코뮤니스트 정치

    ‣ 128주년 메이데이, 노동을 새로 쓰기 전에 노동자 투쟁부터 제대로 하자!

    ‣ 세월호 참사 4년과 국가의 책임  

    ‣ 민중당은 민주노총 조합원과 조직에 위해(危害)를 가한 당원을 즉시 징계하라!!! 

     

    □ 국제 정세 

    ‣ 시리아 : 미국 폭격의 진정한 의미

     

    □ 혁명 특집 

    ‣ 68혁명 : 1960년대 학생운동의 의미와 노동계급의 부활  

    ‣ 독일 혁명과 코뮤니스트좌파  

    ‣ 러시아혁명 : 러시아혁명의 교훈과 혁명적 소수의 복원   

     

     

    □ 코뮤니스트 정치 원칙 해설

    ‣ 다시 혁명조직을 말하다.    

    ‣ 노동계급과 혁명조직  

     

    □ 코뮤니스트 좌파와 계급투쟁 100년

    ‣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 혁명당과 노동계급   

     

    □ 문화예술 

    ‣ ‘사랑의 급진성’을 읽고서    

    ‣ 장애인문화공간과 함께하는 2018년  

     

    □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

    ‣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 회의로 전환하며   

    ‣ 조선공산당 창건 93주년에 부쳐    

     

     

    - 가격 : 1만원

     

    - 구입문의 : communistleft@gmail.com (메이데이 집회에서 판매)

     

    - 홈페이지 : http://communistleft.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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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6호] 독일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계급투쟁 방해 활동 - 로자 룩셈부르크

  • 독일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계급투쟁 방해 활동

     

     

    <편집자 주> 노동조합의 역사적 역할에 대해 참고할만한 글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보여주었던 <독일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계급투쟁 방해 활동>울 소개한다. 이 글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작인 <<독일사회민주당의 위기 [유니우스 팸플릿]>>에 실려 있다.

     

    사회민주당이 보여준 태도의 또 다른 한 측면은 당쟁중지, 즉 전쟁 기간 계급투쟁의 중지를 받아들인 점이다. 8월 4일 제국의회에 제시된 원내분파의 선언 그 자체는 이미 계급투쟁을 포기하는 최초의 행위였다. 그 선언의 내부적인 표현 수위는 제국 정부와 부르주아 정당 대표자들과 사전에 합의되어 있었다. 8월 4일의 엄숙한 행위는 이미 비밀리에 준비된, 국민들과 외국에 내보인 애국주의적 연극이었다. 그 안에서 사회민주당은 이미 자신이 맡은 역할을 다른 참가자들 곁에서 연기했다.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원내분파는 전쟁차관을 승인함으로써 노동자운동의 모든 주요 요구들에 구호를 제공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당장 모든 임금투쟁을 중지하였고 이를 당쟁중지라는 애국적 의무와 분명하게 관련지으며 기업가들에게 공식적으로 전했다. 자본주의의 착취에 대항한 투쟁을 전쟁 기간 스스로 포기했다. 바로 그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도시노동자들을 농민들에게 보내 이들이 방해받지 않고 추수 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사회민주당 여성운동 지도부는 공동의 ‘국민여성봉사’를 위해 부르주아 여성들과 동맹을 선언하여, 동원령 이래 국내에 남겨진 당 작업 역량이 사회민주당의 선동 대신 수프 배급과 상담 등의 국민구호 임무를 하도록 지휘했다. 사회주의자법i)이 있던 그 당시에 우리 당은 의회선거를 최대로 활용해서 사회민주당 언론에 대한 그 모든 탄압과 계엄 상태에도 자신의 견해를 널리 알리며 계몽하고 주장했었다. 지금 사회민주당은 제국의회 보궐선거, 주의회와 지방의회선거에서 공식적으로 모든 선거운동, 말하자면 의회주의 계급투쟁의 의미에서 모든 선동과 계몽을 포기하고 선거를 단순한 부르주아적 내용, 즉 의석의 확보로 축소했고, 이 점에서 부르주아 정당들과 평화롭게 협력했다. 프로이센과 알자스-로렌 주의회를 제외한 모든 주의회와 지방의회들에서 사회민주당 의원들이 당쟁중지를 엄숙히 환기하며 예산안에 동의한 점은 전쟁 발발 이전 관행과 엄격한 단절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기껏 몇몇 예외를 제하면 사회민주당 신문들은 국민단결원칙을 거창하게 독일민족 사활이 걸린 이해관계로 만들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곧 그 당 언론은 은행에서 저금을 되찾는 것에 대해 경고했고, 그럼으로써 온 힘을 다해 국내 경제생활의 불안정화를 막고 저축금을 전쟁차관으로 손쉽게 끌어들일 수 있었다. 당 언론은 프롤레타리아 부녀자들과 자녀들의 곤궁에 대해 그리고 국가의 불충분한 배급에 대해 전쟁터의 남편들에게 전하지 말도록 경고했고, 전사들에게 사랑스러운 가족의 행복을 서술하고 ‘지금까지 보장된 원조를 우호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안정적이고 고무적인 영향을 끼치도록’ 권했다.1) 그 당 언론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고전적인 예에서 현대 노동자운동의 교육 사업을 전쟁 수행의 탁월한 보조수단이라 칭송했다.

     

    “진정한 친구가 누구인지는 곤란에 처했을 때 알아볼 수 있다. 이 오랜 격언은 이 순간 진실이 된다. 억눌리고 학대받고 난폭하게 취급당했던 사회민주당원들은 일사불란하게 향토방위에 나섰고, 프로이센-독일에서 종종 괴롭힘 당하던 독일 노동조합 중앙은 그들의 가장 좋은 재목들이 나라를 위해 함께 투쟁하고 있음을 한목소리로 보고하고 있다. 일반 신문부류의 기업가 신문들도 이 사실을 보도하며 덧붙여, 이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책임을 완수할 것임을 확신한다고 그리고 아마도 가장 치열한 격전지에서 이들이 싸우고 있을 것을 확신한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우리의 단련된 노동조합원들이 ‘내려치기’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음을 우리는 확신한다. 현대의 군대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장군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거의 3천 미터까지, 정확히는 2천 미터까지 ‘적중’시킬 수 있는 현대의 포탄 사격 때문에, 군대 병력을 가지런히 늘어선 행진 대열로 전진시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이전에 ‘분산’시켜야 하고, 이러한 분산은 다시 훨씬 더 많은 수의 정찰병과 대단한 규율과 시야의 명료함을 부대뿐만 아니라 개개인에게도 요구한다. 그래서 노동조합이 얼마나 교육적으로 작용했는지를 이 전쟁에서 진정으로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어려운 시기에 이러한 훈육이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냉철하고 침착하게 숙고해 보면, 러시아와 프랑스의 군인들이 기적적인 용맹을 떨칠지언정 독일 노동조합원들이 그들보다 한 수 위에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조직된 사람들은 국경 지역을 마치 자기 바지 주머니 속처럼 잘 알고 있으며, 어떤 노조 간부는 외국어 능력도 갖추고 있다. 1866년 프로이센 군대의 전진이 선생들의 승리였다면, 이번에는 노동조합 간부들의 승리라 말할 수 있다.”(1914년 8월 18일 자 프랑크푸르트의『민중의 소리』)

     

    당의 이론지『새 시대』(1914년 9월 25일 자, 제32호)의 설명에 따르면,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가 중요한 이상, 모든 다른 문제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된다. 심지어 전쟁의 목적조차도. 그러니 군대 내에서 그리고 국민 내에서 모든 정당들, 계급들, 민족들의 차이도 당연히 부차적으로 된다.”ii) [강조 – 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바로 그 이론지는 1914년 11월 27일 자 제8호의『인터내셔널의 한계』라는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계대전으로 사회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진영으로, 특히 서로 다른 민족진영으로 분열된다. 인터내셔널은 이것을 막을 수 없다. [강조 – 로자 룩셈부르크] 즉, 그것은 전쟁에서 효과적인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평화기구이다.”iii) 그 ‘위대한 역사적 임무’는 ‘평화를 위한 투쟁, 평화 시의 계급투쟁’이라고 한다.

     

    계급투쟁은 그렇게 사회민주당에 의해 1914년 8월 4일에, 그리고 미래에 있을 평화체결까지는 없다고 선언되었다. 크룹사의 대포가 벨기에에 첫 번째 천둥을 내리침과 더불어 독일은 계급연대와 사회조화의 기적의 나라로 둔갑해버렸다.

     

    어떻게 이 기적을 상상해야 할까? 알려져 있듯이, 계급투쟁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라는 시기에 마음대로 그냥 특정 시기 동안에 중지시킬 수 있도록 사회민주당이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은 사회민주당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계급사회의 기본적 산물로서 그것은 유럽에 자본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이미 부상했다. 사회민주당이 현대 프롤레타리아트를 계급투쟁으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 자체가 계급투쟁의 여러 서로 다른 공간적 시간적 파편들 속에서 목적의식과 단결을 이루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통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전쟁 발발과 함께 그 점에서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설마 사유재산, 자본주의적 착취, 계급지배가 없어졌단 말인가? 설마 가진 자들이 애국주의의 도취 속에서, 이제 전쟁을 앞에 놓고 그 기간 생산수단, 토지, 공장, 작업장을 공공의 소유로 내주고 상품의 단독 사용과 이익을 포기하며 모든 정치적 특권을 폐지하고 조국이 위험에 처해 있는 동안은 그 모든 것을 조국의 제단 앞에 희생하겠노라고 선언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러한 가정은 극히 씁쓸한 동화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노동계급이 계급투쟁을 중지한다고 뒤이어 선언할 수 있을 논리적으로 유일한 조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 어떤 일도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다. 그 반대로 모든 사적 소유 관계, 착취, 계급지배, 그리고 다양한 프로이센-독일식의 정치적 권리 박탈도 그대로 유지된 채 있다. 독일의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구조에서 벨기에와 동프로이센에서의 대포의 천둥이 변화시킨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계급투쟁의 폐지는 그래서 완전히 일방적 조처였다. 노동계급의 ‘내부의 적’인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지도자들인,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은 애국적인 아량으로 노동계급을 이러한 적에게 전쟁 기간 투쟁 없이 내어주었다. 지배계급이 그들의 소유권과 지배권으로 완전무장한 채 있는 동안,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민주당으로부터 ‘무장’해제를 명령받았다.

     

    현대 부르주아 사회에서 모든 계급의 형제 결의의 기적, 계급조화의 기적은 이미 한번 경험되었다. 그것은 1848년 프랑스에서였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 다음과 같이 썼다.

     

    “재정 귀족과 부르주아지를 도대체 혼동하는 프롤레타리아들의 생각 속에는, 계급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거나 기껏해야 입헌군주제의 결과 정도로 생각하는 공화주의적인 우직한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는, 그리고 지금까지 지배자들 편을 들었던 부르주아 분파들의 위선적인 문구들 속에서는 부르주아의 지배는 공화국의 도입과 더불어 폐지되었다. 모든 왕당파는 그때 공화파로 둔갑했고, 파리의 모든 백만장자는 노동자로 둔갑했다. 이렇게 상상된 계급 관계의 폐지에 해당하는 문구는 박애iv), 즉 일반적인 형제결연과 의형제였다. 계급적대를 이렇게 기분 좋게 추상해서 없애버리는 것, 서로 모순되는 계급 이해관계들을 감상적으로 상쇄해버리는 것, 계급투쟁 위로 꿈꾸듯이 날아올라 버리는 것, 박애, 이것이 2월 혁명의 원래 구호였다.…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런 관대한 박애에 흠뻑 취해 있었다.… 공화국을 자신의 창조물로 여긴 파리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들이 부르주아사회 안에서 더 손쉽게 제자리를 잡도록 만들어주는 임시정부의 모든 행위에 당연히 갈채를 보냈다. 파리의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코시디에르는 경찰 임무에 그들을 기꺼이 활용할 수 있었고, 루이 블랑은 일반 노동자와 장인 사이의 임금 격차도 없앨 수 있었다. 유럽의 눈앞에 공화국의 부르주아적 명예를 고이 유지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명예의 문제로 여겨졌다.”v)

     

    1848년 2월 그렇게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순진한 환상 속에서 계급투쟁을 중단했지만, 자신들의 혁명 행동을 통해 7월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강제한 뒤 그랬다는 점을 잘 기억해야 한다. 1914년 8월은 거꾸로 된 2월 혁명이었다. 즉, 공화국이 아니라 군사 왕정 아래에서, 반동에 대한 민중의 승리가 아니라 민중에 대한 반동의 승리 후에, 자유와 평등과 박애가 아니라 계엄령과 언론자유의 질식 그리고 헌법철폐를 공포하면서 계급대립이 폐지된 것이다! 정부는 당쟁중지를 엄숙하게 선언했고 모든 정당으로부터 이를 성실히 지킬 것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정부는 노련한 정치가로서 그 약속을 그대로 믿지 않고 명백한 군사독재의 수단을 통해서 이 ‘당쟁중지’를 확고히 했다. 사회민주당 원내분파는 이것마저도 아무런 항의와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8월 4일 그리고 12월 2일에 있었던 원내분파의 제국의회 선언은 계엄령이라는 따귀에 반대하는 그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사회민주당은 당쟁중지와 전쟁차관과 더불어 계엄령도 잠자코 승인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조국 방어를 위해서 계엄령이, 민중에게 재갈을 물리는 것이, 군사독재가 필요함을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사회민주당 쪽에서만 저항, 곤란 및 전쟁에 대항한 항의 행동이 기대될 수 있었던 점으로 보아, 계엄령은 바로 그 사회민주당을 겨냥한 것이었다. 사회민주당의 동의하에 당쟁중지, 계급 적대의 폐지가 선언됨과 동시에 그 자체, 즉 사회민주당이 계엄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고, 노동자계급에 대한 투쟁이 그 가장 첨예한 형태, 즉 군사독재의 형태로 선언되었다. 결연히 저항하다 패배한 최악의 상황에 맞았을 것, 즉 계엄령을 사회민주당은 스스로 항복의 결과로 받은 것이다! 사회민주당의 제국의회 원내분파의 엄숙한 선언은 차관승인의 근거로 민족자결권vi)이라는 사회주의 원칙을 거론한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독일민족의 “자결”의 첫 단계가 사회민주당에게 입힌 계엄령이라는 결박 조끼였다! 한 당에 이보다 더 큰 자기기만은 역사상 거의 전례가 없었다.

     

    당쟁중지를 받아들임으로써 사회민주당은 전쟁 기간 계급투쟁을 부정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사회민주당은 그 자체의 존재 기반을, 그 자체의 정치 기반을 부정했다. 이 당을 숨 쉬게 하는 것이 계급투쟁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자기 삶의 원칙인 계급투쟁을 희생한 뒤 이제 전쟁 동안 그 당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계급투쟁을 부인함으로써 사회민주당은 전쟁 기간 스스로 활동적인 정치 당으로서, 노동자 정치의 대리인으로서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또한 그 가장 중요한 무기, 즉 특히 노동계급의 입장에 서서 이 전쟁을 비판하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그것은 “조국 방어”를 지배계급에 내맡기고 노동계급을 지배계급의 휘하에 제공하며 계엄령 아래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 즉 노동계급에 대한 경찰 역할을 하는 데 만족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은 또한 그의 태도를 통해, 원내분파의 선언에 따르면 지금 크룹의 대포가 그 유지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독일의 자유 문제를 지금 이 전쟁의 지속기간보다 훨씬 더 장기적으로 가장 심각하게 위험 속에 빠뜨렸다. 사회민주당의 지도부는 전쟁 이후 노동자계급의 자유가 의미 있게 확대될 것이고, 전쟁 중에 노동계급이 보인 조국 사랑의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 부르주아적인 평등권이 제공되리라 전망했고, 많은 주장의 바탕에는 이러한 전망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역사상 지금까지 정치적 권리들이 피지배계급에, 지배계급의 마음에 드는 태도를 보였다고 해서 결코 팁으로 주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전쟁발발 전에 엄숙하게 했던 약속마저도 지배계급이 그 뒤에 거만하게 깨어버린 예들이 역사에는 널려 있다. 사실, 사회민주당은 그것이 취한 태도를 통해 독일에서 장래의 정치 권리를 확보한 것이 아니라 전쟁 전에 가졌던 권리들을 뒤흔들어 놓았다. 독일에서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그리고 공공 생활의 폐지가 계엄 상태와 마찬가지로 몇 달 동안 그 어떤 투쟁도 없이, 심지어 부분적으로는 바로 그 사회민주당의 갈채2)를 받으며 용인된 방식은 현대사회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다. 영국에서는 전적으로 언론의 자유가 지배하고, 프랑스에서도 언론은 독일에서처럼 그렇게 완전히 재갈 물리지 않았다. 그 어느 나라에서도 독일에서와 같이 여론이 그렇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단순히 ‘거의 공식적이나 다름없는 견해’에 의해, 정부의 명령으로 대체되지 않았다. 러시아에서도 반대파의 의견을 지워버리는 혐오스러운 검열의 붉은 펜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와 달리, 반대파 언론들이 정부가 제공한 완결된 기사들을 찍어내야 하고 어떤 기사들에서는 정부 당국이 ‘언론과 비밀리에 상의하여’ 불러주고 지시하는 특정한 견해들을 대변해야 하는 것과 같은 제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독일 자체에서도 1870년의 전쟁 동안에 언론이 지금 상태와 비슷한 그 어떤 것도 경험하지 않았다. 그 당시 언론은 아무 제한 없이 자유를 즐겼었다. 비스마르크가 왕성한 불평을 늘어놓을 정도로 언론은 그 전쟁 사안을 주시하면서 부분적으로 날카롭게 비판하며 특히 전쟁목적과 합병문제 그리고 헌법 문제 등등에 대해서도 활기차게 의견투쟁을 했었다. 그리고 요한 야코비가 체포되자, 분노의 폭풍이 독일 전역을 휩쓸었고, 비스마르크 자신도 반동 세력의 그 뻔뻔스러운 범행을 하나의 중대한 실책으로 여기며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며 자신 옹호했다. 이것이 바로, 리프크네히트와 베벨이 독일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지배적인 맹목적 애국자들과의 그 어떤 연합도 일절 거부한 뒤 독일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 4백 2십 5만 명의 유권자를 거느린 애국적인 사회민주당, 당쟁중지라는 화합의 축제, 그리고 사회민주당 원내분파의 전쟁차관 동의, 이 모든 것이 있고 난 뒤, 성년의 그 어떤 한 민족이 지금까지 경험한 것 중에서 가장 극심한 군사독재가 시행되었다. 그와 같은 일이 오늘날 독일에서 가능하게 된 것은, 즉 부르주아 언론뿐만 아니라 꽤 발전하고 영향력이 큰 사회민주당 언론의 아무런 투쟁도 없이 그럴듯한 저항의 시도조차 없이 감수된다는 이 사실은 독일의 자유 운명에 불운한 의미가 있다. 이는 그렇게 쉽게 아무런 저항 없이 정치적 자유의 부재를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 독일 사회가 자체 내부에 정치적 자유를 위한 어떤 기반도 갖고 있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전쟁 전 독일제국 내에 존재했던 하찮을 정도의 정치 권리들은, 거대하고 반복된 혁명투쟁의 결과로서 그런 권리들이 그러한 투쟁 전통을 통해 민족의 삶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프랑스나 영국에서와는 달리, 20여 년 동안 승승장구하던 반혁명 이후 비스마르크 정책의 선물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독일 헌법은 혁명의 펜대 안에서 성숙한 것이 아니라, 프로이센 군사 왕정의 외교적인 게임 안에서, 이 왕정이 오늘날의 독일제국으로 증축되는 데 도움을 준 시멘트로서 였다. 그래서 ‘독일에서 자유가 발전’하는 데 있어 위험은 제국의회 원내분파가 말하는 것처럼 러시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일 자체에 있다. 특히 그런 위험은 독일 헌법의 반혁명적인 기원에 있다. 제국창립 이래 그 보잘것없는 ‘독일의 자유’에 대항해 끊임없이 조용한 전쟁을 치러 온 독일 사회의 반동적 권력 분파들에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바로, 엘베강 동쪽의 융커체제, 대산업적 모함자들, 철저히 반동적인 중앙파, 독일 자유주의의 타락, 사적인 통치 그리고 이 모든 요소로부터 유래한 군사지배, 전쟁 직전에 독일에서 승리를 거둔 군사적 강경노선 등이다. 이것들이 바로 독일의 문화와 ‘자유의 발전’에 대한 진정한 위험들이다. 그리고 이 모든 요소의 각각을 지금 전쟁이 강화하고 있다. 계엄령, 그리고 사회민주당의 태도가 가장 극심하게 강화하고 있다. 오늘날 독일이 교회의 묘지처럼 조용한 점에 대해 진짜 자유주의적인 핑계가 있긴 하다. 즉, 이는 단지 전쟁 진행 기간만 ‘잠정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정치적으로 성숙한 국민은 살아있는 사람이 숨쉬기를 포기할 수 없듯이 정치 권리와 공공의 삶을 ‘잠정적으로’라도 포기할 수 없다.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 전쟁 기간은 계엄령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그런 국민은 그럼으로써, 정치 권리가 전혀 없어도 되는 그런 것이라고 인정하는 셈이다. 사회민주당이 오늘날 계엄 상태를 감내하며 동의한 것은, 무조건 전쟁차관을 승인하고 당쟁중지를 받아들인 것과 함께, 지배계급 반동들, 즉 헌법의 적들에게 강력하게 고무적 영향을 미친 그만큼 독일 헌법의 유일한 지주인 민중들의 기상을 약화하는 효과를 가져왔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계급투쟁을 포기함으로써 우리 당은 그와 동시에 전쟁 지속과 관련하여 그리고 평화체결과 관련하여 효과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중단했다. 여기에서 그 자체의 공식적 해명을 내팽개친 셈이다. 제국주의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그 전쟁이 유리하게 진행되는 한 불가피한 논리적 귀결이기 마련인 모든 합병에 엄숙히 반대한 바로 그 당이 동시에 당쟁중지를 수용했다. 그럼으로써, 당 자체의 의지에 따라 민중과 여론을 동원할, 이를 통해 효과적으로 압력을 행사할, 그래서 전쟁을 통제하고 평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모든 수단과 무기를 내어주었다. 당쟁중지를 통해 오히려 사회민주당은 군국주의의 배후 안정을 보장해 줌으로써 그 군국주의가 지배계급의 이해관계 이외의 어떤 다른 이해관계에도 구애됨이 없이 제 갈 길을 가도록 허용했다, 바로 합병을 모색하고 또 합병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억제되지 않은 내부의 제국주의적 경향을 해방시켰다. 다시 말해, 사회민주당은 당쟁중지를 수용하고 노동자계급을 정치적으로 무장을 해제함으로써 결국 모든 합병에 대한 그것의 엄숙한 반대가 무력한 문구로 남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다른 하나, 즉 전쟁의 연장이 이뤄졌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익숙히 잘 알려진 도그마 안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책에 있어 얼마나 위험한 함정이 놓여 있는지를 자명하게 보여준다. 즉, 전쟁에 반대한 우리의 저항은 우선 전쟁의 위험이 존재하는 동안만 요구되는 것이지,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사회민주당의 정치적 역할은 끝나고, 이때는 오직 승리냐 패배냐만 문제라는, 즉 계급투쟁은 전쟁 기간 중지된다는 그 도그마 안에. 하지만 사실은 사회민주당의 정치에서 가장 큰 과업은 전쟁발발 뒤에 시작된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 인터내셔널대회vii)에서 독일당 대표자들과 노조 대표자들이 만장일치로 승인하고 1912년 바젤회의에서 다시 한 번 더 확인된 결정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신속한 종결을 위해 노력하는 것, 총력을 기울여 노력하는 것이 사회민주당의 책무이다. 전쟁이 초래한 경제적 정치적 위기를 민중을 일깨우는데 활용하고 이로써 자본주의의 계급지배의 철폐를 가속하는 것이 책무이다.”viii[강조 –R.L.]

     

    이 전쟁에서 사회민주당은 무엇을 했는가? 사회민주당은 슈투트가르트 대회와 바젤회의의 계명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즉, 당은 차관을 승인하고 당쟁중지를 준수함으로써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경제적 정치적 위기를 막는, 그 전쟁으로 인해 대중이 동요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했다. 전쟁이 가져온 무질서로부터 자본주의 사회를 구하는데 ‘총력을 기울여 노력’했고, 그럼으로써 전쟁이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지속하도록, 전쟁의 희생자 수가 더 늘어나도록 했다. 제국의회 의원들이 종종 하는 말에 따르자면, 사회민주당 분파가 전쟁차관을 승인하든 그렇지 않든 전장에서 병사가 한 명이라도 덜 죽어가지는 않았을 거라고 한다. 아니, 그런데 우리 당의 신문들이 전반적으로 대변한 견해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 이 전쟁의 처참한 희생자들의 수를 줄일 수 있는 한 줄이기 위해 우리는 바로 이 ‘조국 방어’에 동참하고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실행된 정책이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 온 것이다. 사회민주당의 ‘애국적’ 태도를 통해서야 비로소, 배후에서의 당쟁중지 덕분에야 비로소 이 제국주의 전쟁은 거리낌 없이 광포함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내부적인 동요에 대한 두려움 궁핍 속의 민중 분노에 대한 두려움이 항시적인 악몽이었고 그렇게 해서 지배계급의 전쟁야욕을 묶어놓는 효과적인 고삐였다. 지금은 사회민주당이 두려워서 그 어떤 전쟁이라도 되도록 미루려 애쓴다고 한 뷜로프의 말은 유명하다. 로어바흐가 그의『전쟁과 독일정치』의 7쪽에서 쓴 것에 따르면, “근본적인 재앙이 발생하지 않는 한, 독일에 평화를 강요할 유일한 것은 가난한 자들의 굶주림이다.” 그는 분명히, 징후를 보이고 점점 더 뚜렷해져서 마침내 지배계급이 이를 참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그러한 굶주림에 대해 생각했다. 결국, 전쟁의 탁월한 군인이자 이론가인 폰 베른하아디 장군이 하는 말을 듣게 된다. 그는『지금의 전쟁에 대하여』라는 그의 대작 속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렇게 현대의 대규모 군대는 여러모로 전쟁 수행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이 밖에도 그 자체도 과소평가돼서는 안 될 위험 동인이다.

     

    그러한 종류의 군대의 메커니즘은 매우 위력적이고 복잡해서, 톱니바퀴들 전체가 대체로 충실하게 움직이고 강한 내적 동요가 더 넓은 범위에서 방지될 때만 작동하고 조정할 수 있게 유지된다. 그런데 변화가 많은 전쟁에서 그러한 종류의 현상들이 완전히 제거될 수 있을 거라고는, 전투가 명백하게 승리하는 것만큼이나 기대하기 힘들다. 이러한 현상들이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영향력을 갖는다면 극복될 수 있다. 그러나 거대하게 결집한 대중이 일단 지휘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된 곳에서는, 그들이 공포 상태에 빠진 곳에서는, 더 큰 범위에서 보급이 실패하고 부대 내에 불복종 정신이 지배적인 곳에서는 그러한 대중은 적에 저항하기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군율의 끈을 끊어버리고 작전 진행을 제 맘대로 교란함으로써 그리고 지도부에게 해결할 수 없는 과제를 부과함으로써 그들 자체가 스스로 그리고 군 지도부에게 위험이 되어버린다.

    대규모 군대로 치르는 현대의 전쟁은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그 국가의 인력과 재력을 극도로 요구하는 위험한 게임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일단 발발하면, 그 전쟁을 신속히 종결지을 수 있고 전체 국민의 동원으로 인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그 엄청난 긴장을 재빨리 해소할 수 있을 지시들이 곳곳에서 내려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강조 – 로자 룩셈부르크]

     

    이렇게 부르주아 정치가들과 군 권위자들은 대규모 군대로 치르는 현대의 전쟁을 일종의 ‘위험한 게임’으로 보았고, 이 점이 오늘날의 권력자들이 전쟁을 책모하지 못하도록 막고 또 전쟁이 발발한 경우에는 재빠른 종결을 생각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동인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어느 모로 보아도 “엄청난 긴장”을 억누르는 작용을 한 사회민주당의 행태는 그러한 걱정거리를 없애버렸고 군사주의의 억제되지 않은 폭풍에 대항해 서 있던 유일한 댐을 부숴버렸다. 그래, 베른하아디나 그 어떤 부르주아 정치가도 꿈속에서도 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었던 그 어떤 것이 등장해야만 했다. 즉, 사회민주당 진영으로부터 인류학살 “감내하기”, 즉 계속하기라는 구호가 울려 퍼진 것이다. 그리고 몇 달 전 이래 전장을 뒤덮는 수천의 희생자들이 그래서 우리의 양심에 호소하고 있다.

     

     

    <주>

     

    1) 1914년 10월 6일『함부르크의 메아리』에 재수록 된 뉘넨베르크 당 기관지의 기사를 참조

     

    2) 캠니츠의『민중의 목소리』는 1914년 10월 21일 자에 다음과 같이 썼다. : “어쨌든 독일의 군사검열은 전반적으로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더 점잖은 편이다. 종종 그 배후에 전쟁에 대한 확고한 입장의 부족을 숨기고 있는, 검열에 반대한 아우성은 독일의 적들이 하는 거짓말, 즉 독일이 제2의 러시아라는 거짓말이 유포되는 것을 도울 뿐이다. 지금의 군사검열 아래에서 마음대로 쓸 수 없다고 진정으로 믿는 자는 펜대를 놓고 침묵하라.”

    --------------------------------------

    i) Sozialistengesetz, 독일제국에서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제국 수상 비스마르크에 의해 입안되어 1878년부터 1890년까지 시행되었다. 이 법에 따라 노동조합, 노동자단체 및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 등이 불법화되었다. 사회민주주의적 정치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제국의회나 주의회 등에 선출될 수는 있었다.

     

    ii) K. Kautsky, “Wirkungen des Krieges”, in: Die Neue Zeit, 32. Jg.1913/14, Zweiter Band, S.975

     

    iii) K. Kautsky, “Die Internationalität und der Krieg,” in : Die Neue Zeit, 33.Jg.1914/15, Erster Band, S.248

     

    iv) fraternité

     

    v) Karl Marx, “Die Klassenkämpfe in Frankreich 1848 bis 1850,” in : Karl Marx u. Friedrich Engels, Werks. Bd. 7, S.21/22.

     

    vi) Das Selbstbestimmungsrecht der Nationen

     

    vii) 1907년 8월 18일부터 24일까지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사회주의자 인터내셔널대회(Der Internationale Sozialistenkongress)가 열렸다.

     

    viii) Erste Beilage zum Periodischen Bulletin des Internationalen Sozialistischen Bureaus, Brüssel 1912, S.7

     

    번역 ┃ 국제코뮤니스트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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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6호] 노동조합주의 - 안톤 판네쿡

  • 안톤 판네쿡

    노동조합주의

     

     

    생산을 수중에 장악하고 생산을 조직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임무가 먼저 다루어져야 한다. 투쟁하기 위해서는 목표를 분명하게 보고, 우리 앞에 놓인 노선을 뚜렷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생산에 대한 권력의 장악하기 위한 투쟁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노동자 평의회는 이러한 투쟁을 거치며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해방을 위한 노동자 투쟁의 미래 형태들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사회적 조건들에 달려있고 노동계급의 힘이 증대함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힘을 증대시키기 위해 어떻게 투쟁해왔고, 변화하는 환경에 대항하여 어떤 행동 양식을 적응시켰었는지를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오로지 우리의 선행자들의 경험으로부터 배우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헤아려봄으로써만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 시대의 요구에 맞는 방식으로 전유할 수 있다.

     

    지배계급에 의한 노동계급 착취에 의존하고 있는 모든 사회에서는 전체 노동 생산물의 분배, 다른 말로 하면, 착취의 정도를 둘러싼 지속적인 투쟁이 존재한다. 따라서 중세시대뿐만 아니라 그 후의 세기는 지주들과 농민들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과 격렬한 투쟁으로 가득 찼다. 동시에 우리는 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얻기 위해 신흥 시민계급이 귀족과 군주에 대항해 투쟁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기술, 산업, 상업의 발전으로부터 인한 새로운 생산체제의 발흥과 연관된 다른 계급투쟁이었다. 이는 토지의 주인들과 자본의 주인들, 즉 몰락하는 봉건체제와 부상하는 자본주의 체제 사이에서 수행되었다. 일련의 사회변동, 정치혁명과 전쟁 속에서 영국, 프랑스 및 여타의 나라들에서 자본가 계급은 지속해서 사회에 대한 완벽한 지배를 획득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계급은 자본에 대항하여 두 가지 종류의 투쟁을 수행해야 했다. 노동계급은 가혹한 착취와 억압을 완화하고, 임금을 인상하고, 전체 생산량 중에서 그들의 몫을 확대하려는 지속적인 투쟁을 유지해야 한다. 그 외에 노동계급의 힘이 증가함에 따라 노동계급은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새로운 생산 체제를 세우기 위한 사회적 주도권을 획득해야 했다.

     

    처음으로 방적기계, 나중에 직조기계들이 도입된 영국에서의 산업혁명 초기에, 우리는 기계들을 파괴하기 위해 봉기한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노동자, 즉 임금취득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전에는 독립적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저가로 상품을 생산하는 기계의 경쟁 때문에 굶주리게 되자, 자신들의 궁핍의 원인을 제거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던 영세 장인들이었다. 훗날 그들이나 그들의 자녀들이 임금노동자가 되어 그들 스스로 기계를 다루게 되었을 때, 그들의 위치는 그전과는 다른 것이 되었다. 산업의 성장이 이루어졌던 19세기 내내 좋은 임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에 도시에 몰려든 많은 시골 출신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현대에는 더욱 많은 노동자의 후손들이 공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들 모두에게 더욱 좋은 노동조건을 위한 투쟁이 가장 시급한 것이었다. 고용주들은 경쟁의 압박 하에서 그들의 이윤을 늘리기 위해 임금은 내리고, 가능한 한 노동시간은 늘리려 했다. 처음에 노동자들은 굶주림의 압박에 무력하게 묵묵히 순응해야만 했다. 그 후 유일하게 가능한 저항 형태인 노동 거부 즉, 파업의 형태로 저항이 폭발했다. 파업을 통해 노동자들은 처음으로 그들의 힘을 발견했고, 파업에서 그들의 투쟁력을 높여갈 수 있었다. 파업으로부터 공장, 해당 산업 부문, 나라 전체의 모든 노동자의 결속이 발생하였다. 파업으로부터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의 연대와 협동심, 전체 계급의 통일성의 꽃이 활짝 피어났다. 벽두의 여명이 새로운 사회를 밝게 비추는 태양으로 발전한 것이다. 처음에는 자생적이고 우연적인 모금 활동의 상호 협조는 곧 노동조합의 지속적인 형태를 취하였다.

     

    노동조합의 순조로운 발전을 위해서는 일정한 조건들이 필요했다. 대부분 자본주의 이전 시기에서 물려받은 거친 무법, 경찰들의 독단과 금지의 토대들은 견고한 건축물이 세워지기 이전에 제거해야 했다. 보통은 노동자들 스스로 이러한 조건들을 확보해내야 했다. 영국에서 이는 차티즘의 혁명적인 캠페인이었다. 반면 반세기 후에 독일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사회적 승인을 얻어내기 위한 사회민주주의 투쟁이 노동조합의 성장을 위한 기초를 닦았다.

    오늘날에는 전국의 같은 직종을 가진 노동자들을 포괄하고, 다른 직종과 연계를 이루며, 전 세계의 노동조합들을 아우르는 국제적인 노동조합이 될 정도로 강력한 조직들이 설립되었다. 정기적으로 납부되는 높은 조합비는 파업 시, 파업을 꺼리는 자본가들이 노동조건을 크게 낮췄을 때, 이로부터 파업자들을 버텨줄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양의 자금을 제공하였다. 때때로 이전 투쟁에 대한 적의 분노의 희생물이 되었던 동료 중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은 노동자들의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대변자들로서 자본가 고용주들과 협상할 수 있는 봉급을 받는 관료들로 임명되었다. 파업의 적절한 시기에, 노동조합의 모든 힘의 지원을 받은 협상은 더 향상된 획일화된 임금을 얻어내고 또한 법으로 정해진 것이 아닌 한 더욱 공정한 노동시간을 얻어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더는 굶주림 때문에 어떤 가격으로든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무력한 개인들이 아니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노동조합, 자신들의 연대와 협력 때문에 보호받고 있다. 모든 구성원은 동료를 위해 자신 수입의 일부를 내놓을 뿐만 아니라 조직과 공동체를 방어하기 위해 직업을 잃을 각오도 되어있다. 그 때문에 고용자들의 권력과 노동자들의 권력 사이에 어느 정도의 균형상태가 이루어졌다. 노동조건은 이제는 전능한 자본가들의 이해에 따라 규제되지 않는다. 노동조합들은 점차 노동자들의 이해 대표들로서 인정받아갔다. 비록 계속 투쟁을 해야 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권력이 되어갔다. 물론 모든 곳에 노동조합이 존재했던 것도 아니고, 단번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보통은 숙련공들이 처음으로 자신들의 노동조합을 설립하였다. 더욱 강력한 고용주들에게 대항하여야 했던 대공장에 있는 비숙련 대중은 대체로 뒤늦게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대공장에서 비숙련 노동자 노동조합들은 종종 갑작스러운 커다란 투쟁을 거치면서 출범하곤 했다. 그리고 거대 기업의 독점적 소유자에 대항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이러한 막강한 자본가들은 절대적인 주인이 되기를 원했고, 비굴한 어용노조 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과는 별도로, 심지어 노동조합주의가 완벽하게 발전하여 모든 산업을 통제하더라도 이는 착취가 폐지되었음을, 즉 자본주의가 억압받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억압받은 것은 다만 개별 자본가들의 독단성일 뿐이고, 폐지된 것은 최악의 착취의 남용일 뿐이다. 그리고 불공정 경쟁에 대항해 그들을 보호했던 것은 동료 자본가의 이해,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의 이해 안에서였다. 노동조합의 권력에 의해 자본주의는 정상화되었다. 즉 특정한 착취의 규준이 보편적으로 제정되었다. 노동자들이 계속해서 굶주림으로 인한 봉기를 일으키지 않도록 가장 적당한 생활을 허용하는 임금 수준이 방해받지 않는 생산을 위하여 필요하였다. 비록 노동시간의 감축은 대체로 노동 속도의 가속화와 노동 강도의 강화를 통해 중화되기는 하지만, 자본주의 미래의 착취 토대로서 이용 가능한 노동계급의 보전하기 위하여, 노동계급의 생동성을 완전히 고갈시키지 않도록 노동시간의 규준을 정하는 것은, 자본주의 그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그들의 탐욕의 편협성에 대항해 표준적인 자본주의의 조건들을 제정하도록 싸운 것은 노동계급이었다. 그리고 노동계급은 이 불확실한 균형 상태를 보존하기 위해 계속해서 싸워야 했다. 이러한 투쟁에서 노동조합은 그 수단이었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에 필수불가결한 기능을 했다. 편협한 고용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더 멀리 볼 수 있는 그들의 정치 지도자들은 노동조합이 자본주의를 위한 기본적인 요소라는 점을, 즉 정상화하는 기능을 하는 권력으로써 노동조합이 없었다면 자본주의는 완벽해질 수 없을 것을 잘 알았다. 비록 노동자들의 고통과 노력으로 유지된 투쟁의 산물인 노동조합은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의 기관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상황들은 점차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어갔다. 대자본은 성장했고, 권력을 느끼고, 편안한 주인이 되기를 원했다. 자본가는 단결력을 이해하고 배웠다. 즉 그들은 고용주 연합을 조직하였다. 그래서 힘의 균형 대신에 자본의 새로운 우세가 발흥하였다. 파업은 노동조합의 기금이 고갈되도록 봉쇄되었다. 노동자들의 자금력은 자본가들의 자금력에 맞설 수 없었다. 임금 및 노동조건에 대한 협상에서 노동조합은 그들의 적립금을 고갈시키고, 이로 인해 조직 및 그 관료들의 존재 보장을 위협할 수 있는 대투쟁들을 두려워했고 그것들을 회피하려고 노력해야 했기에, 이전보다 더욱 연약한 협상 당사자가 되었다. 협상 과정에서 노동조합 관료들은 종종 투쟁을 피하고자 노동조건이 하락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들에게 이는 불가피했고 자명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변화된 조건들에 따라 그들 조직의 투쟁력이 상대적으로 감소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는 자신들이 더 어려운 노동 조건과 생활 조건을 말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투쟁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관점의 충돌이 발생했다. 관료들은 공통된 감각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즉 그들은 조합이 불리한 상황이며, 투쟁은 패배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대투쟁의 저력들은 아직 사용할 방법을 몰라서 그렇지 아직도 대중들 속에 숨어 있다는 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 양보한다면 그들의 처지는 더 나빠질 것이며, 오로지 투쟁을 통해서만 막을 수 있다는 점을 올바르게 깨닫고 있다. 따라서 노동조합 내부의 관료들과 조합원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조합원들은 고용주들에게만 이로울 뿐인 새로운 임금(배상금)에 대해 저항했다. 반면 조합 관료들은 오랜 시간이 걸려 어렵게 타협에 이른 이 협상안을 옹호했고, 비준하려 했다. 이렇듯 그들은 종종 노동자들의 이익에 대항해 자본의 이익의 대변자처럼 행동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노동조합들의 영향력 있는 지배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노동조합 역시 모든 권력과 권위를 내던지고 자본의 기관으로 변해갔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성장, 노동자들의 수적인 증가, 연합의 시급한 필요성은 노동조합을 더욱 많은 관료과 지도자들을 필요로 하는 거대한 조직들로 만들었다. 모든 권력 요소가 관료들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모든 사업을 관리하고 모든 조합원을 지배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전문가로서 관료들은 모든 일을 준비하고 관리했다. 예컨대 그들은 재정 및 다양한 목적을 위한 자금 지출을 관리했고, 노동조합 신문의 편집자였기 때문에 조합원들에게 자신들의 관점과 생각을 주입할 수 있었다. 형식적 민주주의는 널리 유포되었다. 마치 국민이 의회와 국가에서 정치를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합원들은 회합을 통해 의회에 나가 의사를 결정해야 할 대표자들을 선출했다. 하지만 오히려 의회와 정부가 국민의 주인이 되었듯이, 이와 똑같은 일이 노동자 의회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그들은 전문 관료들로 이루어진 관료제를 일종의 노동조합 정부로 변형시켰고, 조합원들은 그들의 일상적 활동과 보살핌에 의해 흡수되었다. 프롤레타리아의 덕목인 연대가 아니라, 규율, 결정에 대한 복종이 그들에게 요구되었다. 따라서 관점의 차이,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대립하는 의견들이 발생했다. 이는 생활조건의 차이에 의해 강화되었다. 즉, 노동조합 일들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관료들에게는 안전이 보장되었던 반면 노동자들의 직업의 불안정은 실업과 경기침체로 항상 위협받았다.

     

    그들의 결합하고 통합된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을 무력한 비참함에서 나아지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정받는 지위를 얻어내는 것이 노동조합주의 임무이자 기능이었다. 그것은 자본의 더욱 증가한 착취에 대항해서 노동자들을 보호해야 했다. 이제 대자본은 은행과 산업 콘체른(재벌)의 독점력으로 이전보다 더욱 통합되어가고 있으므로, 노동조합주의의 이러한 이전의 기능은 끝이 났다. 자본의 엄청난 권력에 비할 때, 노동조합의 힘은 불충분하게 되었다. 노동조합은 이제 사회에서 그 지위가 인정되는 거대 조직이 되었다. 그것들의 위상은 법에 따라서 규제되며, 그들의 임금협정은 전체 산업에 구속력을 가진다.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은 산업 조건을 지배하는 권력의 한 부분이 되고자 열망하고 있다. 그들은 독점 자본이 그들을 통해 전체 노동계급에 자신들의 조건을 부과하는 하나의 장치이다. 이처럼 막강한 자본은 독재의 발가벗은 야만성을 다 드러내기보다는 보통은 자신들의 지배를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형태들로 위장하기를 더욱 선호한다. 노동자들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노동조건은 거만하게 부과된 명령의 형태보다는, 노동조합과 합의한 형태를 취할 때보다 쉽게 받아들이고 굴복시킬 수 있다. 첫째, 노동자에게는 자신이 자신 이해의 주인이라는 환상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 스스로가 투쟁하고, 희생해가면서 만들어낸 것이 노동조합이라는 사실이 오늘날에는 그 주인들에게 굽실대는 노동조합에 대해 애정을 갖도록 하고, 노동조합이 자신들을 위한 조직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대의 상황에서 노동조합은 이 전 어느 때보다 노동계급을 지배하기 위한 독점 자본의 기관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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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판네쿡의 저서 <<노동자평의회>> 중 오늘날 더욱 중요해진‘ 노동조합주의’를 소개한다.

     

     <출처> https://www.marxists.org/archive/pannekoe/1947/workers-councils.htm#h13

              <<노동자평의회>>, 빛나는 전망,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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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6호]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으로 나아가자.

  •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으로 나아가자.

     

     

     1. 문재인 정부와 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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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소한의 기계적 중립도 무시한 채 노골적으로 자본가 계급 편에서 노동운동을 탄압하던 박근혜 정권이 몰락하고,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내건 문재인 정권이 들어섰다. 정권이 바뀌고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노조 운동 상층부와 노동운동가 출신 명망가 시각으로는 많은 게 변했을지 모르지만, 대다수 노동자의 현실에서 본다면 그 어느 것 하나 바뀌지 않았다.

    10월 24일 문 대통령은 민주노총이 불참한 가운데 노동계를 청와대로 초청해 “노동계를 국정 파트너로 삼는 노정관계로 복원하는 게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이명박-박근혜 정권과의 차별을 내세우며 “지난 10년간 노동은 소외되고 배제됐으며 국정 파트너로 인정받지 못했다”라며 “노동정책이 정부에 의해 일방 추진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로 인해 노조 조직률이 떨어지고 노동자의 삶이 나빠졌으며 경제 불평등이 심해졌다”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9월 25일, 고용노동부는 박근혜 정부의 노동적폐라는 ‘2대 지침’을 폐기했다. 또한, 특수고용노동자 노동기본권 보호 관련 인권위 권고도 수용한다고 했다.

     

    민주노총은 이와 관련해 "2대 지침 폐기는 환영하지만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라고 요구하는 건 지나치다"라고 선을 그었고, 특수고용노동자 노동기본권 보호 관련 인권위 권고 수용은 환영한다고 했다. 민주노총은 ‘노조 할 권리와 노동법 전면 제·개정을 위한 대정부 5대 우선요구’를 선포했다. 노조법 2조 개정 등 ‘5대 우선 요구’는 노동 적폐 청산, 노조 할 권리 보장, 노동법 전면 제·개정을 위한 수많은 요구 가운데 가장 절박하고 핵심인 현장 노동자의 요구라고 했다.

     

    이러한 일련의 소식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건 지난 정권에서 부정적 이미지였던 ‘노동’이라는 용어가 정권이 바뀌면서 이 사회에서 중요한 부분 즉, 정부 파트너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동계에서도 말뿐인 노동 존중이 아니라 실질적인 권리와 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대통령이 직접 ‘노조 조직률’ 하락을 우려하고 노동조합에서는 ‘노조 할 권리’를 요구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정부와 노동계의 이해관계(노동정책-대정부 요구)는 시간과 절차의 차이는 있어도 같은 방향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아니다.

     

    첫째, 자본주의 국가는 행정부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므로 문재인보다 더 친노동 인사가 권력의 수장이 된다 해도 사회 시스템(체제)이 변하지 않으면 ‘노동’은 존중받지 못한다. 수많은 노동자와 프롤레타리아가 참여한 촛불 투쟁을 발판으로 등장한 문재인 정권도 계급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고 관리하기 위해 선출된 자본가 정부일 뿐이다. 그가 관리하는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주의 체제의 수호자로서 정부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가기구와 사적인 자본의 권력과 폭력으로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가치법칙이 작동하는데, 이것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을 동시에 존중하는 계급적 중립은 불가능하다. 현 정부의 노동존중은 생산현장과 노동자의 일상에서 불평등하고 야만스런 착취체제를 그대로 놔둔 채 단지 국정 파트너로 들러리를 세우겠다는 의미이다. 이것도 노동계급 고유의 투쟁과 저항 대신 자본주의적 ‘타협’과 ‘양보(상생)’만을 허용하는 테이블에서의 ‘대접’ 또는 ‘존중’으로 다수 노동자를 대표하라는 의미이다.

     

    둘째, 노조 조직률이 떨어지고 노동자의 삶이 나빠진 게 일방적인 정책 추진 때문이라는 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낮은 노조 조직률과 비정규직 양산 그리고 실업으로 노동자의 삶이 어려워진 건 그 뿌리가 노무현 정부 그리고 더 이전 정부에서부터였다는 걸 상기해야 한다. 또한, 수십 년째 변하지 않는 자본가계급과 사법기관의 반(反)노동자적 태도 그리고 그에 맞선 노동조합 투쟁의 실패와 후퇴에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변하지 않는 자본의 거대한 세력에 맞서 노동조합이 가장 크게 후퇴한 건 힘이 없어 패배한 게 아니라 타협과 배신으로 자본과 정부에 투항한 일이다. 이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처럼 노동조합이 국가에 통합되지는 않았지만, 노동조합의 실제 역할이 노동자 투쟁을 통제하고 전체 노동자의 이익이 아닌 부분 노동자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걸로 자리 잡게 해 결과적으로 자본가계급에 도움을 주는 역할로 바뀌었다는 의미이다. 다음 단계는 자본주의 위기관리에 노동조합이 참여해 노동자에게 희생을 강요하는데 완충 역할을 하고, 투쟁 회피를 넘어 노골적으로 투쟁을 방해할 수도 있다. (이미 일부 정규직 노동조합의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에 대한 개입은 회피를 넘어 방해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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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 노조 할 권리가 보장되어 노조하기 좋은 나라가 된다면 노동자에게는 당연히 좋은 일이다. 침체된 노동자 운동에도 활력소가 되고, 새로운 주체 탄생도 기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본가 정부인 문재인 정부에는 노동조합이 어떠한 도움이 되기에 대통령이 나서서 낮은 노조 가입률을 걱정하는가? 우선은 현 정부의 탄생 배경인 반(反)박근혜 촛불 투쟁에 수많은 노동자가 나섰고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며, 정부에서 추진하는 주요정책에도 그들의 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노동자 대표로서 적당히 정부를 비판하면서 노동자 투쟁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는 노동조합이 많아지고, 조직률이 높아진다면 정부로서는 큰 우군을 얻게 되는 셈이다. 잘 조직되어 통제되는 노동자 세력이야말로 자신의 정책에 대한 지지뿐 아니라 자본주의 위기 상황을 모면하는데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10월 25일 정부가 밝힌 ‘2020년까지 중앙정부·지방자치단체·공공기관·지방공기업·국공립 교육기관 853곳에 속한 비정규직 20만5천 명 정규직 전환’ 약속은 규모에서 절반인 14만 명이 전환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내용으로도 그동안의 사례를 보면 실질적인 정규직화가 아니라서 양대 노총이 모두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노동자들은 현상 문제에 대한 비판에 머무르면 안 되고 본질을 봐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논리에는 ‘희생과 양보’라는 칼날이 숨어있기 때문에, 그 뒤에는 사회적 대화 참여와 정규직 노조의 양보, 그리고 더 큰 위기극복을 위한 희생 강요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이미 노동운동 내 노사협조주의-조합주의 세력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부의 방향대로 움직이고 있다. ‘노조하기 좋은 나라’란 이들이 노동자를 조직하고 노동조합을 장악하여 공식적인 정부의 파트너로 정부에 포섭, 통합되어 ‘노동자를 통제하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다. 앞으로 개별 자본가와의 싸움도 타협과 양보라는 투쟁 회피 세력의 ‘노동개혁’ 논리가 지배하고, 총자본-대정부 투쟁 또한 ‘노동 적폐 청산’이라는 개량화 한 요구를 넘어서지 못할 수 있다. 원칙적이고 타협 없는 투쟁, 급진적이고 계급적인 요구는 다수를 차지하게 될 내부 협조자와 노동조합 조직 질서에 의해 차단당하고 고립될 수 있다. 민주노총의 새로운 집행부는 당선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문대통령 면담을 진행했고 결국 1월 13일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참석했다.

     

    2017년은 87년 대투쟁 30주년,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는 해였지만, 반성과 성찰 그리고 반격을 준비하기 보다는 정권교체 환상에 이어 ‘노조하기 좋은 나라’ 환상에 갇혀 버렸다. 이것이 한국 노동자 운동의 현실이자 노동계급 위기의 본질이다. 이에 우리는 노동조합에 대한 본질을 밝히고 태도를 분명히 하는 정치원칙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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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노동조합, 노동조합주의 역사와 역할 변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해당하는 노동조합주의는 오늘날 새로운 게 아니라 노동조합 초기부터 존재했다. 노동조합주의는 자본주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노동자 활동이다. 그것의 목표는 자본주의를 다른 생산 양식으로 교체하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 내에서 좋은 생활 조건을 보장하려는 데에 있다. 그래서 노동조합주의의 특징은 혁명성이 아니라 ‘보수성’이다.

     

     

    노동조합주의는 처음에 산업 자본주의가 최초로 발전한 영국에서 등장했다. 이것이 다른 나라로 널리 퍼진 후에, 자본주의 산업에 자연스럽게 경쟁자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현재 거의 모든 노동조합을 지배하고 있는 노동조합주의는 초기에는 프롤레타리아의 가치, 곧 조직된 투쟁 정신인 노동자 연대를 배우는 최초의 학교였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조직된 힘의 최초 형태를 구현했다. 하지만 초기 영국과 미국 노동조합에서 이런 가치는 종종 잘못 적용되어, 결국 진정한 자본주의 정신인 협소한 동업조합으로 전락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노동조합주의의 형태는 자본주의 발달 차이에 따라, 국가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그것은 모든 국가에서 같은 양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노동자의 투쟁 정신은 때때로 그것을 변형시키거나, 새로운 조합주의 형식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이기 때문이며, 새로운 계급의식과 불안정 노동계급이 증가할수록 그들은 새로운 형태의 조합주의를 만들었고, 더욱 발전된 자본주의에 적응해 나갔다.

     

     

    노동조합 형식은 자본주의 상승기인 19세기의 구조적 조건뿐만 아니라 국가-계급-노동조합 관계에서도 노동계급 투쟁의 실제 표현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초 노동조합은 그러한 형태의 특성을 상실했는데, 이러저러한 노동조합 지도자의 실수 혹은 배신 때문만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본질 때문에 ‘제도화된 노동조합’이 되었다.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 분할을 위해 제국주의 강대국이 일으킨 제1차 세계대전이다. 일부를 제외한 사회주의당, 사회민주주의자, 개량주의자 모두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전쟁에 끌어들이는 데 도움을 주면서 민족 부르주아지를 지원하기 위해 줄을 섰다. 사회민주당에 의해 지도되었던 노동조합은 ‘자신의’ 민족 부르주아지를 지지했다. 이것은 ‘민족국가 체제’를 지키기 위한 상황에 있는 노동조합 최초의 분명한 사례였다. 노동조합은 부르주아 국가인 조국의 방어자 역할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착취 구조 안에서 효과적인 부역자 역할을 하게 된다. (편집자 주 - 로자 룩셈부르크의 <<유니우스 팸플릿>> 참고)

     

     

    1914년 이후 노동조합은 수적 증가와 함께 사회적 힘도 계속 커졌다. 전쟁으로 노동조합이 줄어든 나라에서조차 노동조합의 중요성은 점차 커졌다. 1914년 노동조합이 조국방어라는 명분으로 전쟁에 찬성한 제국주의 전쟁의 참사는 노동조합이 자신의 본질로 돌아가게 한 사건이었다. 그 전까지 자본가계급은 노동조합의 파괴적인 힘을 두려워했고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국가에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제국주의 전쟁에 협력한 1차 세계대전 이후 공장에서 ‘노동조합의 노동자 통제’ 경험은 자본가들을 만족시켰다. ‘노동조합의 노동자 통제’는 자본에 대한 노동자의 투쟁을 약화해왔고, 공장의 공정을 단축하고, 무엇보다도 생산량을 증가시켰다. 이제 노동조합은 조국의 방어자로서 뿐만 아니라 착취의 구조 안에서 효과적인 부역자로서 눈에 띄게 된다.

     

     

    그 후 지금까지 노동조합은 노동계급의 투쟁이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타협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노동조합은 이제 자본주의 착취 경제를 합리화하고, 노동력 판매를 조정하며 착취를 강화하려는 자본주의 국가의 노력에 협력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노동계급 내부에서 투쟁을 방해하고 계급투쟁이 자주적으로 발전하고 급진화 하는 걸 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노동조합은 자신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노동계급이 다시 장악할 수 없고, 혁명적인 소수가 혁명적인 활동을 할 영역을 제공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1950년대 이후 많은 나라에서 노동자가 점점 부르주아 국가의 구성 요소가 되어버린 노동조합 활동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생존 조건의 위기에 몰린 노동자 투쟁은 노동조합 외부 또는 노동조합에 대항한 와일드캣 파업(비공인 파업)을 지향했다. 그것은 노동조합 대신 항상 투쟁하는 노동자의 총회에서 선출되어 언제나 소환되며 총회에 책임을 지는 파업 위원회(총회) 형식으로 나타났다. 와일드캣 파업 투쟁과 파업위원회 속에서 노동자평의회의 조직 기초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투쟁만이 노동조합의 한계와 작업장, 업종 울타리를 넘어 자본주의 국가와 정면 대치까지 이를 수 있다.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노동자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가고 있고, 노동조합은 이제 노동계급의 기본생활 방어도 포기하고 있다. 자본의 공격은 노동조합 존재 여부, 인정 여부와 관계없이 철저한 계급 분리 속에서 노동계급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희생시키면서 시작하기 때문에, 공격과 희생을 전체 노동계급의 단결 없이는 막아낼 수 없다. 계급의 분업과 분리를 용인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유지하는 노동조합을 통해서는 계급 전체의 단결을 유지할 수 없다. 우리 시대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주의는 노동계급을 분리하고 눈을 가림으로써 무장 해제시킨다. 노동계급은 그 힘과 의식을 노동조합 안팎에서 노동조합주의와 때로는 노동조합 자체와 맞서 싸우지 않고서는 발전시킬 수 없다.

     

     

    이미 한국 노동조합 운동은 급속도로 체제 안으로 통합되고 관료화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점진적 개량과 의회주의에 몰입된 노동운동 상층 관료는 노동자 대중의 계급의식을 왜곡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조합운동을 넘어선 대안은 무엇인가?

     

     

    3.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대하여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은 출범선언문에서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강조했다.

     

    “지난 수십 년간 사민주의(의회주의), 민족주의, 조합주의 등 노동자계급 내부의 걸림돌은 노동계급 고유의 무기인 단결력과 전투성, 그리고 계급투쟁에서의 창발성을 무력화시켰다. 자본의 공격은 강화되는 반면 노동계급의 저항과 투쟁은 부르주아 국가기구와 자본가, 그리고 계급 내부의 적들에 의해 여전히 여러 장벽에 막혀있다. 우리는 낡은 조합주의, 의회주의 세력 운동의 쇠락 속에서도 새롭게 소생하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전망하면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새로운 분출을 촉진하는 아래로부터 실천을 제안한다."

     

    1) 제도권 노조운동을 넘어서는 자립적 노동자운동이 현실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기존의 노조/현장운동을 넘어서는 새로운 노동자운동일 수밖에 없다. 자본이 만들어내고 관료화된 노조운동을 넘어서야 한다. 정규직. 비정규직, 조합원. 비조합원을 구분치 않고, 투쟁하는 노동자 모두를 평의회적으로 포괄하는 ‘수평적 노동자 직접행동’, 노동자투쟁과 실업자, 빈민, 청년, 소수자들의 직접행동이 결합하는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행동(연대)’을 제안한다.

     

    2)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조직형식은 내용과 형식이 통일되는 노동자 민주주의와 직접행동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이것은 투쟁하는 주체들에 의해 직접 선출/소환 가능한 대중총회, 파업/투쟁위원회, 노동자평의회의 형식과 같아야 하며, 노동자 민주주의의 완전한 실현과 노동자 국제주의에 기반을 둔 직접행동만이 계급투쟁의 확산과 자기 조직화를 보장해줄 수 있다.

     

    3) 현재의 자본주의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분출하는 새로운 노동자운동은 운동의 주체와 최종목표가 불분명한 반자본주의 운동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자기해방의 최종목표를 분명히 밝혀주는 코뮤니즘(공산주의)을 전망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노동자투쟁과 계급의식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사민주의, 조합주의, 중도주의 정치세력들이 아닌, 계급투쟁의 최종목표를 전망하는 코뮤니스트 정치와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직접행동이 만나야 한다.

     

    코뮤니스트 정치조직과 계급조직(노동자평의회)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코뮤니스트 직접 정치운동을 실천하자!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제안하며>>, 코뮤니스트 정치조직을 출범하면서, (국제코뮤니스트전망, 2012년 10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핵심은 낡은 노동조합운동과 사민주의(의회주의) 정치를 넘어서는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과 코뮤니스트(공산주의) 정치가 직접 만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그동안 여러 경로와 주장을 통해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운동과 실천을 주장해왔다.

     

    먼저 가신 남궁원 동지는 이른바 ‘좌파 노조’를 비판하면서 노동자평의회 정신을 추구하자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역사적인 대공황과 쇠퇴의 정세 조건은 노동자 임금. 생활조건의 악화, 자본의 구조조정으로 나타나고 있다. 노동계급의 자연스러운 투쟁과 대중의 자기조직화는 파업위원회나 행동위원회로 등장한다. 이러한 흐름은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되는 ‘공식적 노조운동’에 대한 대중적 거부다. 전체 운동의 계급투쟁 효과로서 나타나는 노동조합의 전투성은 오직 노동자 대중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데, 좌파정당이나 좌파 노동조합 리더십에서 강화될 수 없다.

    좌파노총이 아니라, 노동자가 생산과 분배를 통제하는 노동자평의회 정신을 추구할 때다. 노동자 권력의 조직적 구조의 맹아적 형태는 여기서 시작한다.

    <<우파에 대항하는 ‘좋은 노조’, 좌파노총 건설? [새로운 시대의 총연맹, 좌파노총] 비판>>, 붉은글씨, (남궁원, 2012년)

     

    오늘날 아래로부터의 노동자평의회 운동은 대공장 사업장 노동조합(현장조직)이 아니라 비정규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불안정노동 계급의 직접행동과 지역 연대투쟁으로 현실화될 수 있다. 대공장 조직노동자가 계급성과 연대를 회복하려면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평의회 체계 속에서 새로운 주체와 만나 기존 노동조합 운동을 압박하고 포위해나가야 한다. 노동조합을 버리거나 이용한다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어느 곳에서든 새로운 노동자 투쟁과 평의회 조직형태를 결합해야 한다. 앞으로 노동자평의회 운동은 혁명시기 노동자 권력을 지향하는데 한정되지 않고, 일상에서 새로운 주체형성, 새로운 계급투쟁 창출, 계급의식 발전에 이바지하는 운동으로 확대하여야 한다. 새로운 계급투쟁 창출은 현장에서 어용세력과의 비타협 투쟁뿐 아니라 그들이 장악한 노동조합 조직 질서 자체를 넘어서려는 급진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노조 집행부를 장악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자본과 협력-상생해가는 조합주의 한계를 넘어 계급적으로 투쟁하는 ‘직접행동’을 제안하고, 실제 ‘노동자 행동그룹’이 출현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코뮤니스트 노동자는 노조와 대중운동의 배후정치가 아니라 대중 ‘운동’과 만나 직접 코뮤니스트 정치를 펼쳐 나가야 한다. 코뮤니스트 혁명을 염원하고 그 운동을 지지하는 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작업장, 정규직-비정규직, 조합원-비조합원을 뛰어넘어 기존 현장조직과는 질이 다른 코뮤니스트 노동자 그룹을 형성해야 한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계급의 뿌리에서 자라난 노조운동은 풍성한 가지를 번창하며 민주노조운동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하지만 열매가 채 익기도 전에 관료주의, 노사협조주의, 노동조합주의라는 병에 걸렸고, 대부분 열매는 의회주의, 민족주의, 사민주의 세력이 가져갔다. 노동자에게 해로운 세력은 여전히 건강한 가지를 훼손하고 몇 개 남지 않은 열매마저 자신이 취하려 이전투구 중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몇 개 남지 않은 열매를 잘 보호해 결실을 얻을 것인가? 썩은 가지 쳐내고 쓸만한 가지만을 되살릴 것인가? 아니면 뿌리부터 튼튼히 하여 새싹을 틔울 것인가?

     

     

    아직도 노동조합이 계급 단결과 연대 투쟁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제는 노동조합운동을 과감히 뛰어넘어 노동계급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운동으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정규직-비정규직, 조합원-비조합원, 실업자, 퇴직자, 모든 장벽을 없애고 노동계급으로 재탄생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직접행동, 그리고 노동자평의회와 코뮤니스트 노동자 운동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들고 계급투쟁의 새로운 세대를 맞이하자!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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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2017 승리와 실패의 교훈 그리고 혁명적 소수의 복원 2

  • 1917~2017 승리와 실패의 교훈 그리고 혁명적 소수의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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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반혁명

     

     1917년 러시아 혁명에 대한 단호한 지지, 그리고 혁명 패배의 교훈과 이로부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의 조건을 찾아내는 것은 혁명적 소수의 필수임무이다. 1917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탄생한 소비에트 국가는 노동자권력 아래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스탈린주의 반혁명 이후에는 노동계급에게 더는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러시아 혁명 이후 몇 달 안에 이루어진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의 제도적 성과를 높이 평가한다. 1917년 신분제 폐지, 철도노동자 노동시간 1일 8시간 실시, 군대 계급 폐지, 1,886개 전략산업부문 회사 몰수, 종교의식을 하지 않는 결혼제도 시행, 낙태법 제정, 모자보호 연구소 개소, 1918년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공화국 선포, 사회주의 적군의 창설을 위한 법령 선포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혁명적 조치에도 소련의 노동계급은 생산과 권력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1차 대전 패배와 내전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러시아는 일부 자본주의적 이행 형식을 들여온다. 1918년 봄 테일러주의의 재도입과 1인 경영의 강제 그리고 혁명의 성과를 방어하려는 임시조치들, 즉 정치반대의 분쇄, 차르 관료의 재고용, 자본주의 생산방식과 인센티브 제도는 노동계급의 실질적 권력을 깨뜨리고 ‘노동자정부’와 노동자 사이의 틈새를 벌려놓았다. 이러한 틈새의 가장 비극적인 표현은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볼셰비키당에 의한 진압이었다.

    그것은 3년간의 내전 동안 혁명적 노동계급의 죽음으로 더욱 굳어졌고, 세계혁명 물결의 연이은 실패는 볼셰비키를 고립시켰고, 이러한 조건은 후진적인 저개발 경제의 책임으로 돌려졌다. 이를 이어받은 스탈린은 5개년 계획 도입과 농업 집산화로 소련이 사회주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발표했지만, 노동자 권력이 아닌 당 독재의 강화를 가져왔다. 당이 곧 계급이라는 잘못된 결정에 당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고, 당이 노동계급을 대신하는 사회가 시작되었다.

    1917년~1920년은 러시아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봉기가 일어나는 시기였고, 러시아혁명은 세계혁명의 첫 단추였다. 하지만 독일 등 주요 유럽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물결이 패배하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고립되면서 좌절된다. 레닌의 죽음과 세계혁명의 명백한 침체에 힘입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선언은 국제주의와의 공개적 단절이었으며 세계 제국주의 권력으로 러시아를 건설하는 약속이었다. 이것은 사회주의가 세계혁명의 열매임을 주장한 1917년의 볼셰비즘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었다.

     

     소련의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의 필요를 생산하기 위해 일하지 않았고 임금을 위한 교환을 위해 일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자신의 노동을 소외시켰고 자본을 생산했다. 자본주의 사기업의 형식으로 자본에 노동력을 파는 대신, 소련 노동계급은 단순히 국유화 기업의 형식으로 자본에 그들의 노동력을 팔았다. 소련의 이러한 현실은, 생산수단 및 생존수단이 국가 소유로 되었다고 해서 자본과 임노동의 사회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소련의 지배적인 사회관계는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자본과 임노동의 관계에 기초했다. 결국, 국가와 그 관료조직에 의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집중화와 계획화는 소유의 폐지를 향한 한 걸음 진전이 아니라, 단지 착취 강화를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따라서 공산주의(코뮤니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양립할 수 없지만, 사적 소유의 부재가 (공산주의 경제 창조를 위한 필요 불가결한 전제조건임에도) 곧 공산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억압과 착취에 맞선 계급투쟁의 역사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지만, 매번 성공하지는 못했다. 제1 인터내셔널은 상승하는 자본주의의 능력 때문에, 제2 인터내셔널은 혁명주의의 포기와 민족주의 때문에, 그리고 제3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은 사회주의 혁명을 포기한 스탈린주의의 반혁명 때문에 실패했다.

    1차 제국주의 전쟁의 과정과 결과는 러시아와 유럽에서 혁명의 물결을 넓혀나갔고, 세계 노동계급에 자본주의의 타도라는 역사적 과제를 최초로 시도하는 흐름을 형성하게 했다. 이는 1차 세계대전의 유혈과 폐허에서 나온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에서 극적으로 입증되었다. 또한, 이 시기의 경험은 제국주의 전쟁에서 자신의 국민국가를 지지해서 노동계급 간의 상호 살육을 묵인, 방조함으로써 사회배외주의로 전락한 사회민주주의의 본질을 명확히 폭로했다. 이것으로 제2 인터내셔널 다수당들은 파산을 맞이했고, 새로운 유형의 혁명 정당, 코뮤니스트 정당의 시기가 열렸다.

     

     1919년은 세계적으로 혁명 물결의 정점이었고, 코민테른 창립총회의 입장은 당시 프롤레타리아 운동에서 가장 혁명적인 것이었다. 사회-애국주의 반역자와의 단호한 단절, 자본주의 쇠퇴의 새로운 시기에 요구되는 대중행동 방법, 자본주의 국가의 파괴 및 노동자 소비에트의 국제적인 독재 등 강령의 명확성은 거대한 혁명 물결을 반영했다. 또한, 그것은 낡은 사회민주주의 정당 내부 혁명적 좌파(이후 코뮤니스트 좌파로 자리매김했다.)의 투쟁과 공헌으로 준비된 결과였다.

    하지만 러시아혁명의 고립과 관료주의 반혁명의 공세, 이에 맞선 코뮤니스트 좌파의 패배, 중국 상하이 및 관동에서의 노동자 봉기의 잔인한 진압으로 마무리되는 1927년의 혁명적 물결의 비극적 패배는, 전 세계에 걸친 노동계급의 장기간의 일련의 혁명과 패배의 시대를 종결했다. 코민테른의 혁명적 원칙은 반혁명 과정에서 변질되는데, 코민테른은 소속 당에 러시아 국가 방어를 요구했고, 사회민주주의 전략과 전술로 후퇴하도록 한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코민테른은 결국 코뮤니스트 좌파, 혁명운동 세력을 배제하고, 국제주의를 포기한다. 타락해가는 코민테른에 맞서 코뮤니스트 좌파들은 투쟁했으나 분리해 나왔고3), 독일 이탈리아에서 파시즘 등장과 함께 반혁명의 시기가 열린다.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반혁명의 무게에 눌려 결국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는 패배한다. 반혁명 과정에서 수많은 코뮤니스트와 프롤레타리아트를 학살한 스탈린주의 범죄는 사실은 세계 부르주아계급과의 공범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4)

     

     러시아에서의 반혁명은 국가가 주도하고 명령하는 특수한 형식을 취했고, 이것은 10월 혁명의 이행과 사회주의의 건설이라는 핑계로 민족경제의 재조직화로 나타났다. 이 과정은 그 후 중국, 동유럽, 쿠바, 북한 등에서 추진되었고, 이들 모든 국가는 사회주의적인 요소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계급적인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다. 사회주의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회를 참칭하며 자본과 관료의 독재가 가장 쇠퇴한 형식으로 지배하고 있다. 현재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이들의 이데올로기 모두는 자국 자본의 이익을 위해 프롤레타리아를 희생시키면서, 오히려 그들을 탄압하는 것에 사용되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세계적인 혁명 물결이 패배한 후, 이른바 사회주의, 코뮤니즘(공산주의), 그리고 맑스주의라는 용어만큼 더 왜곡되고 남용된 사례는 없다. 과거 동유럽 스탈린주의 체제, 그리고 현재 중국, 쿠바, 북한과 같은 나라가 사회주의, 코뮤니즘과 연관되어 있다는 건 역사상 가장 큰 ‘거짓말’이다. 거짓의 핵심은 스탈린주의 국가가 ‘10월 혁명의 연속선상’ 에 있다는 것과 자신들의 체제가 코뮤니즘으로 이행하는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이데올로기로 정당화되어 거짓이 진실인 듯 오랫동안 유지된다. 또한, 스탈린주의 정권이 아무리 타락하고 변질되었더라도 그것이 노동자 국가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노동자 국가론자들도 거짓을 응원했다.

     

    스탈린주의 정권은 실제로 자본주의였지만, 왜곡된 형태의 자본주의였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다른 사회를 대표하는 거로 보였다. 스탈린주의 정권을 특징짓는 비참함, 결핍, 그리고 억압이 자본주의를 더욱 높은 형태의 사회로 바꿀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자본주의 경쟁, 제한 없는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 이런 것이 인간 본성의 본질이라는 걸로 정당화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련과 동유럽 정권이 몰락했을 때 그 정권의 실패가 맑스주의 또는 코뮤니즘의 실패였다는 ‘거짓말’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코뮤니즘에 대한 오해와 반감(증오)은 더욱 커졌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거짓 선전은 노동계급 일반에 심각한 혼란과 무질서를 가져왔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설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라는 의식은 노동계급이 자신의 투쟁을 정치화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맞설 수 있는 역량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계속>

  • <주>

     

    3)  코민테른 내에서 “코뮤니스트 좌파”의 전투는 특히 노동자 운동의 가장 끔찍한 시기, 1920년대 말에 시작한 역사 속에서 가장 길고 가장 끔찍한 반혁명의 시기 동안 싸웠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러한 반혁명의 상황 속에서, 노동자 운동의 강력한 쇠퇴기 속에서 코민테른의 좌파 혁명가는 잊지 못할 투쟁을 수행했다. 당과 코민테른을 바로 세우는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었지만, 그들도 스탈린주의의 철권으로부터 그를 구하려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이 투쟁은 기껏해야 최소화되고, 처음의 의견 불일치로 조직을 떠나거나 “상처뿐인 영광” 때문에 떠난 인자들에 의해 완전히 잊혀졌다. 이러한 태도는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이며 때로는 생명을 희생한 노동자와 혁명가 세대의 어려운 투쟁에 대한 소부르주아의 경멸을 나타내고 있다. <<인터내셔널의 퇴행에 직면한 혁명가의 책임 >>, ICC (International Review, 1997, 4th Quarter)

  • 4) 혁명의 실패 이후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제도는 자본주의의 한 가지 변형일 뿐이었고 반혁명의 첨병이었다. 그 제도가 불과 몇 년 전 소비에트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맹렬히 싸운 세계 여러 나라의 부르주아계급으로부터 열렬한 지원을 받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1934년에는 실제로 이와 같은 부르주아계급이 레닌이 설립 당시 ‘도적들의 소굴’로 묘사했던 국제연맹에 소련이 가입하는 것에 동의한다. 그것은 1917년의 볼셰비키를‘야만인'으로 보았던 세계 여러 나라의 지배계급이 스탈린을 ‘존경할만한’ 인물로 인정한 상징적인 일이 되었다.

     

    제국주의자들이 스탈린을 자신들 동료의 일원으로서 인정한 것이다. 그 후로 전 세계의 부르주아계급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사람은 바로 스탈린주의에 반대했던 수많은 코뮤니스트와 혁명가들이었다. 그것은 1917년 혁명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트로츠키를 전 세계에서 추방자 신세로 만들었고, 수많은 코뮤니스트를 살해위협에 시달리게 했다. 트로츠키는 1929년 소련에서 추방되어 상시적인 경찰의 감시 아래 여러 나라로 쫓겨 다녔는데, 스탈린주의자들이 실행하고, 유럽과 미국의 부르주아계급이 은근히 즐겼던, 혁명가에 대한 가장 비열한 중상모략 캠페인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스탈린은 1936년부터 비열한 ‘모스크바 재판’을 계획했고, 고문에 의해 처참히 무너진 레닌의 옛 동료들은 가장 경멸할만한 수많은 범죄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그 본보기로 가혹한 징벌을 스스로 요구했을 때, 부르주아계급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느냐’며 스탈린을 지지했다. 그리고 스탈린이 비인간적인 각종 범죄를 저지르며 강제 수용소에서 10만 명 이상의 코뮤니스트와 천만 명 이상의 노동자와 농민을 처형한 것은, 이와 같은 세계 부르주아계급과의 공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파산한 제도이다.>>, 이형로, (코뮤니스트 4호, 2014.4)

  • 2017.11

     

    국제코뮤니스트전망 ㅣ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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