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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생각들

#1 안 될 때는 한 번 쉬고 좀 돌아가기도 하고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인터넷으로 고스톱을 치는 일이 어머니의 작은 일상의 부분이 되어버렸다. 고스톱 포카 훌라 등 카드로 하는 놀이, 특히 사이버 머니고 나발이고 간에 돈 놓고 하는 모든 종류의 놀이에 통 관심이 없는 나 조차도 옆에서 한 두번 본 게 아니다 보니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답시고 어느 정도는 패를 보고 이건 뭐고 저건 뭐겠군 하는 얄팍한 짐작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가 시작한 이 인터넷 고스톱은 어느 새 아버지까지도 여파를 미쳐서 항상 내가 바깥에서 공부를 하건 술을 마셨건 간에 뭔가를 하고 저녁에 들어오면 거의 매일 같이 켜져 있는 컴퓨터에 고스톱 화면이 쫙 펼쳐져 있기 마련이다.

 

오늘은 보니까 판이 안 풀리는 날이다. 세 명이서 고스톱 치고 있으려니 어머니는 무슨 수를 써도 잃기만 한다. 패가 안 나온다고 아버지와 함께 신경이 날카로워지신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기서 날라가는 돈이 진짜 돈이었다면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오싹해진다. 얼마 전 타짜를 보고 나니까 괜스럽게 공포심이 더 하다. 그래서 그런지 평소 때는 하시면 하시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었는데 오늘은 뭔가 그만 하시게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타짜를 본 지가 언젠데 왜 오늘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말이냐 -

 

"도박에서는 원래 이렇게 안 될 때는 한 번 쉬어가야 된다던데요."

"맞는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그만 하시는 게 어떨까요."

"아들, 근데 그게 어렵다. 되고 안 되고는 다 때가 있는데 지금도 때를 놓쳤으니까 이러고 있지. 봐봐, 갑자기 지금 또 잘 되기 시작했다."

 

그 말대로 갑자기 패가 또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쓰리고 피박 광박 다 먹이면서 한 큐에 54만원의 사이버 머니가 굴러들어온다. 그렇게 몇 판 따자 아버지가 씨익 웃으면서 말씀하신다.

 

"도박 만이 아니라 인생사가 다 그렇다. 원래 뭐가 안 된다 싶고 어렵다 싶으면 한 번 쉬고 좀 돌아가야 돼. 물론 지금 우리야 게임이고 운이 또 돌아와서 지금 또 땄지만 인생은 그런 식으론 안 돌아간다."

 

#2 넌 나를 배신해서 죽는 게 아니라 너 자신을 배신해서 죽는 거야

 

나는 참 무협지를 좋아한다. 정말이지, 이건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그래서 그런지 솔찮게 무협지를 많이 보게 되었는데 이 무협지라는 게 말 그대로의 팝콘 문학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세상에 있는 뭐라도 배울 게 한 가지 쯤 있다는 데 남들 다 쓸데 없다 해도 나는 무협지에서 가끔은 인생의 도리도 생각해 보게 되곤 하는 것이다.

 

천뢰무한, 이라는 무협지를 보다가 주인공을 배신한 인물의 대화는 그렇게 인상이 깊었다. 무슨 글이건 간에 읽고 생각을 다시 해 볼 수 있는 거리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내가 죽는 이유? 당신을 배신했기 때문이 아니오?"

"아니, 틀렸소. 당신이 나를 배신한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소."

"그럼 무슨 이유요?"

"당신은 자기 자신을 배신했소. 그게 중요한 것이오."

"내 자신?"

"당신이 처음 강호로 나올 때의 마음을 생각해 보시오."

 

처음 강호에 출도할 때 강호 정기를 세우는 대협객이 되고자 했던 마음은 어디론가 떠나고 살다 보니 돈과 여자에만 탐닉하고 사는 꼴이야 말로 스스로를 배신한 것 아니던가, 라는 주인공의 질타에 정말이지 순순히 납득하고 죽는 배신자도 배신자 지만 - 아무리 그래도 저런 게 칼맞아 죽을 이유라니 - 어쨌든 지금의 나로서는 마음 속에 담고 갈 만한 그런 한 토막 글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3 다 이루었다.

 

요즘에는 인터넷으로 오는 뉴스 메일 따위도 꼬박 꼬박 읽어주는 편인데 웬 가을도서 추천이 날라왔다. 그냥 대부분의 책이 그다지 눈에 안 들어 오다가 갑자기 <최후의 유혹> 이라는 소설책이 눈에 띄었다. 

 

"유신 말기, 대학 교정은 전경과 사복 형사들로 그득했다. 스무 살 초입 우리의 낮은 죽음처럼 음산했다. 저녁이 오면 막걸리집과 자취방은 담배 연기와 빈 술병으로 그들먹했다. 철학을 얘기하고, 시절을 얘기하고, 농촌과 공장을 얘기했다. 그리고 각자의 결심을 얘기했다."  

 

아마도 서평 시작이 요걸로 시작해서 그럴 게다. 지금은 물론 유신 말기 같은 시대는 아니지만 이 비스무리하게 20대 초반의 시간을 보냈기에 그 서평 시작이 눈에 띄었을 게다. 알고 보니까 예수의 일생에 대한 일종의 전기 소설 같다.

 

그리고 마지막 유혹.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 위에서 내려오라”는 로마 병사의 말. 아직도 늦지 않은 서른세 살 나이. 굳이 십자가의 ‘쓴잔’을 마실 것 없이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알콩달콩 살아 고종명하는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 유혹을 이겨냈기에 “다 이루었다”는 말로 생을 마칠 수 있었다. 그 한마디에 그의 서른세 해 전 생애가 압축돼 있다. 치열하게 살았기에 할 수 있는 말.

 

예수는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논해지는 자신의 희생에 대한 일종의 카타르시스 때문에 그렇게 다 이루었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것은 얼마나 치열하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갔느냐의 문제라고 말하는 듯 해서, 갑자기 이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아들로서 인민과 의를 위해서 살아갔던 젊은이의 인생을 말이다. 물론 책 한 두권 가지고 뭘 논할 수 있겠냐만은, 그래도 읽어보고 생각해 보고 약간은 그대로 추종해 보는 것도 괜찮은 게 아닐까 싶은 것이다.

 

뭘 어떻게 살겠다고 대단한 자부심과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어찌 되었건 정말이지 치열하고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항상 다짐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한 권쯤 쓸만한 소설책을 증정해도 나쁘지는 않지 않을까.

 

#4 쓸데없이 센치해 질 필요도 없다

 

별의 별 생각을 다 하다 보니까 벌써 제대한 지도 20일 쯤 된 것 같은데, 역시 고민만 해봤자 나아질 일은 단 한 푼도 없다. 주변의 소리들에 다 신경쓰다가는 제 명에 살지도 못할 일이다. 일단은 결정내린 그대로, 정말이지 뭐든지 빡씨게 살아보는 게 능사가 아닐까. 적어도 일단 눈 앞에 닥친 일들 부터 시작해 볼 일이다.

 

자, 일단 뭐든지 잘 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격려나 한 방 때려야 겠다. 이스, 넌 지금 잘 하고 있어. 괜한 자기 최면이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정말로 잘 하고 있고 새로이 다시 시작하는 모든 일 다 잘 할 수 있다고. 정말로. 자기가 하겠다고 다짐한 것들에 의심 따위 품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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