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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8/27
    성신재단 규탄 결의대회! 동지들의 연대로 승리합시다!
    이스
  2. 2009/05/17
    5월 16일 대전, 그리고(6)
    이스
  3. 2009/02/13
    심경
    이스
  4. 2009/01/11
    수련회
    이스
  5. 2008/10/20
    절망의 공장 동희오토 - 시사 투나잇
    이스
  6. 2008/08/30
    지금 성신여대에서는 여성 노동자들이 행정관을 점거중입니다!
    이스
  7. 2008/06/19
    2008 사회운동 세미나
    이스
  8. 2008/04/21
    그 때
    이스
  9. 2007/08/16
    광복절 같은 소리 하고 있네(1)
    이스
  10. 2007/03/05
    남긴 것이 있는가?
    이스

성신재단 규탄 결의대회! 동지들의 연대로 승리합시다!

비정규직 철폐! 투쟁!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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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6일 대전, 그리고

1. 부끄러운 것 사실은 고백할 것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열사라는 말이 그렇게 이상하지 않게 느껴졌다는 것을. 학생운동부터 해서 활동을 하면서 여러 사람의 죽음을 보아왔다. 그 죽음의 당시에 내가 참석한 집회에서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질렀던 노동자도 있었고, 그 이외에도 여러 열사들이 계속 생겨났다. 처음에 정말 울기도 하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하면서 분노해서 정말 최선을 다해서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외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여 노동조합의 간부로서 일하고 있다. 우리 현장에서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활동가라고 자부하지만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보다 보니 내 스스로 무감각해진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번에 대전에서, 운수노조 화물연대의 박종태 조합원이 스스로의 목을 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사실 무덤덤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활동가로서의 의무감인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속으로 "저 대한통운 개새끼들" 이라는 생각과, 박터지게 싸워야 겠다는 생각과, 아주 이성적으로 화물연대 탄압에 맞서서 함께 연대해서 싸워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가슴이 들끓지는 않았다. 조합원들에게 이 투쟁에 가야 한다고 설득하고, 대전에 함께 할 동지를 조직하면서도 사실 그런 절박함이 들끓지는 않았다는 것을 고백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고 이제까지 활동해 왔는데, 내 자신 안에서의 실천의 진정성에 대해서 갑자기 다시 한번 생각했고, 열사 투쟁을 그저 "당연히 해야 하는 투쟁" 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럽다. 이런 식으로 사람이 죽는 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다. 열사 투쟁은 물론 "당연히 해야 하는 것" 이지만 "항상 있었던 일인 것처럼 당연한" 투쟁은 아니다. 그래서 고인의 죽음에 대해서 더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고 더 생각하고 더 열심히 함께 하기 위해서, 항상 살아있기 위해서 고민해야 한다. 2. 5월 16일 15시 대전 그렇게 조직한 조합원들과 함께 대전에 내려가서 전국노동자대회를 참가했다. 박종태 열사는 대전의 대한통운 앞에서 목을 매었고, 그래서 대전에서 열사 투쟁을 일단 진행한다. 열사의 부인인 하수진씨가 연단에 올라왔다. 박종태 열사는 가족들에게 "벚꽃이 지기 전에, 문제를 해결하고 아이들과 함께 놀러가자" 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러나 벚꽃은 지고 아카시아 꽃이 피는 지금,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열사는 차가운 시신이 되었다. 하수진 씨는 "이제 어떤 꽃이 피더라도 그 꽃이 원망스러울 것 같다" 라고 말했다. "자신의 남편이 사랑했던 여러 동지들을 믿을 수 있도록 해 달라" 라고 말했다. 마지막 말에서 눈물이 났다. 사람이 죽었는데 아직도 조용하다. 여러 동지들을 믿을 수 있으려면 이 싸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 한다. 사람을 죽여놓고 자기와는 상관없다고 뻔뻔스럽게 이야기하는 저 대한통운과 금호 자본의 자본가를 쇠창살에 처넣어야 한다. 분명히 노동자임에도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화물 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생존권이 박탈된 노동자들의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적어도 하수진 씨가 동지들을 믿으려면 이 정도는 해 줘야 한다. 그래야 죽음으로 호소한 박종태 동지에게 부끄럽지 않다. 그러나 스스로 노동자임에도 "민주노총 개새끼" 라고 떠드는 사람이 넘쳐나는 지금. 노동자들을 초대한 적이 없다고 떠들면서 자신들의 추태를 서로 감추려고 하는 정치권같은 대학교 학생회가 꼴에 학생 대표자라고 설쳐대는 지금. 세상을 바꾸자고 하는 사람들이 당당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박종태 열사의 죽음을 알려내지도, 그것을 위해서 자기 온 몸 바쳐서 조직하고 투쟁하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지금 바로 그래서 하수진 씨가 말하는 "믿을 수 있게 해달라" 라는 말이 모든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3. 5월 16일 21시 대전 집회가 끝나고 우리는 행진을 시작했다. 화물연대의 거의 전 조합원들은 분노에 차서 대나무 막대기를 들고 최선두에 섰다. "대한 통운 앞으로 가자" 라고 외치면서 행진을 했지만 경찰들은 막아섰다. 화물연대 조합원들은 계속 앞으로 나갔고, 경찰들은 자신들과 함께 일하던 동지가 죽었다는 사실에 분노한 노동자들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21시 경, 오늘의 투쟁을 정리하고 내일 다시 싸우기 위해서 항의 집회를 마무리 할 때, 경찰의 공격이 들어왔다. 한 번 집회에 500여명이 연행되었다. 개같이 두들겨 맞으면서 사람들은 끌려갔다. 방패로 찍혀서 뼈가 부러지고, 피를 철철 흘리면서 사람들이 끌려갔다. 함께 했던 동지들이 그렇게 다치고, 빼앗기면서 끌려갔다. 나와 함께 경찰과 드잡이질 하던 동지도 그렇게 끌려갔다. 나는 다행히 운좋게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지만, 우리 공공노조와 운수노조의 조합원들은 내 눈 앞에서 그렇게 처참하게 끌려갔다. 4. 눈물 그렇게 가까스로 빠져나와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대전 중앙 병원으로 갔다. 거기에는 박종태 열사의 유서가 대자보로 붙어 있었다. 하수진 여사의 편지도 붙어 있었다. 유서를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갑자기 눈물이 나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겠다고 할 때 느꼈던 절망은 도대체 얼마나 큰 것인가. 그 사람은 얼마나 자신의 가족에게 미안했을 것인가. 얼마나 눈에 밟히는 것이, 눈에 밟히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인가. 얼마나 한이 사무쳐서 대한 통운 건물 앞에서, 똑바로 쳐다보고 그렇게 목을 매었는가. "죄인처럼 고개 숙이고 있지 말고, 일어서서 싸워달라" 라고 말했던 하수진 씨의 말이 갑자기 귀에 멍멍했지만. 그 순간은 너무 죄인같이 느껴져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박종태 열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 죽음을 만든 이들은 바로 대한통운과 금호 자본이다. 그러나 그 죽음을 만든 이들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실은 그렇게 연대하지 못한 사람들, 세상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온 사람들, 이런 빌어먹을 세상의 구조에 그저 순응하며 살아왔던 노동자와 학생들 시민들 그 모든 이들이 박종태를 죽게 만든 사람들이다. 사람이 죽고 나서야 연대의 이름으로 함께 하자고 이 자리에 선 우리를 용서해주십시오. 노동가수 지민주 씨가 박종태 열사가 즐겨 불렀다던 "민들레처럼" 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그렇게 말했다. 그 동지도 노래 부르면서 울고 있었다. 5. 약속 대학교 학생운동을 할 때에도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그런 짓을 왜 하냐고 물었다. 나는 내 자신에게 부끄럽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내가 이런 비참한 현실을 알았으면서도 그대로 방관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고 말했고, 내가 이제까지 함께 싸우자고 말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끄러워서라도 나는 운동을 그만둘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 활동을 하다가 치르게 될 대가가 무섭지 않냐고도 사람들은 물었다. 건대 쯤 나오면 최소한 중소기업이건 뭐건 취직은 할 수도 있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돈도 벌고 적당히 살수도 있지 않냐, 아니면 노력을 하면 좀 더 편하고 좀 더 인정받는 일을 하면서 살 수도 있지 않냐고 말했다. 나는 무섭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편안하게 살아보고 싶기도 하다고 이야기 했었다. 노동운동을 시작할 때에도 사실은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던, 나는 사실 그냥 소시민에 가까운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어찌 되었건 남들과는 조금은 다른, 노동운동가로서의 길을 선택했다. 내 자신에게 가장 떳떳하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 어쨌든 나는 길을 걷고 있고. 박종태 열사의 한을 푸는 투쟁 만이 아니라 운동이라는 이 길을 계속 꾸준히,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손을 맞잡고 걸어갈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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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

1. 학교비정규직 한 조합원이 해고의 위협에 놓였다. 문제는 그 해고가 부당해고가 아니라 그 동지의 과실이 입증되었기 때문에 정당한 해고 사유를 갖는 해고라는 것이다. 물론 그 해고 사유라는 것도 사실을 알면 좀 기가 막히기는 하다. 그 동지의 과실이라는 것은 판결만 보면 엄청나게 커 보이지만 그 과정에는 그 동지의 고의라거나, 내지는 그 동지의 사정 상 불가분하게 발생한 부분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행법의 집행은 노동자의 편이 아니다. 그리고 노동자의 사정에 대한 정상참작을 입증할 만한 증거는 너무도 부족했다. 그래서 실제 그 동지는 해고를 당할 수 있다는 불안에 떨고 있다. 대책을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이 조합원의 생존권을 지킬 수 있을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과 이야기 해도 답답하기만 했다. 아무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냉정한 결론만 나올 뿐이었다. 속이 터졌다. 노동운동가라는 내가 우리 조합원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갑자기 막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조합원에게 너무 미안해서. 이것밖에 안 되는 내가 싫어서. 막 눈물을 참았는데 계속 눈물이 나와서 당황했다. 아침부터 갑갑한 하루였다. 2. 전략조직화 이제 곧 사업계획안을 끝내야 한다. 그리고 지금 계획안을 세우면서 진행하고 있는 여러 사업들을 본격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노동운동 경험이라고는 고작해야 8개월 활동 경험 밖에 없는 내가 전략조직화 사업의 담당자로서 계획과 예산을 짜고 집행을 책임지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물론 혼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하기 싫은 것도 아니다. 활동가로서 어찌 보면 영광인 것이다. 그러나 미조직 사업을 진행함에 있어서 상황은 다양하게 발생할 것이다. 그리고 이 사업계획 안에는 조직의 확대와 강화가 동시에 들어 있다. 모든 조직은 확대하면서도, 동시에 내용적으로 강화되어야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적어도 노동조합에서 그러하지 않다면 그 노조는 껍데기만 남게 될 것이다. 조합원 숫자가 늘어나서 조합비 재정만 늘릴 뿐, 실제로 노동자 운동의 전망이란 요원하기만 할 것이다. 노동자 운동이 바뀌어야 한다고 늘 이야기 해 왔다. 노동자 운동은 중소영세/여성/저임금/간접고용 등등 모든 문제를 포괄하는, 노동자 계급의 진정한 계급적 단결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것을 위해서 지역 중심의 노동자 운동을 건설하고, 모든 민중운동이 공동의 전선으로 모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 조직화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따라서 또 한 번의 전진과 실패가 있을 것이다. 노동자 운동의 혁신이란 밖에서 비평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비평하지 않기 위해서 노동자 운동을 하겠다는 지금, 너무나 막중한 책임감 때문에 숨이 막힐 것만 같다. 누구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도 없다. 흔들리지 않고 가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3. 근황 그래서 요즘 많이 외로운 것 같다. 나는 원래 그렇게 강한 인간은 아니다. 내가 봐도 나는 마음이 여리고,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긴 하지만 상처주는 것도 싫어한다. 그리고 과중하다고 느낄 때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책임감과 사명감이 있을 때는 버텨낸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와 무언가를 나누는 방식을 잘 모른다. 나는 개인적인 관계를 잘 맺는 방식을 잘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 새로운 관계가 필요할 때, 나는 정말로 공적인 명분이 없다면 그 사람과 만나겠다는 약속 하나 잡는 것도 힘들어 한다. 막상 그래서 일이 개입되지 않은 관계가 형성됐을 때, 그 관계에서 내 감정이나 내 고민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 지 몰라서 항상 많은 실수를 저질러 왔다. 그런데 요즘은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이 없다. 그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데 사람이 없다. 내가 싫어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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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회

노조 활동을 시작하면서 느낀 것은 정말 수련회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 어느 방 하나에서 회의만 줄창 하다가 열두시간짜리 마라톤회의 끝나고 술을 먹기 시작한다. 연속으로 두 번의 수련회를 소화해냈다. 비정규활동수련회, 그리고 학교비정규직 수련회. 비정규활동수련회는 사실 별로 머리에 남는 게 없다. 그냥 노조 미비실 활동가들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고, 반면에 또 지역지부가 도대체 무엇을 하란 말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비정규직들은 투쟁 조차 하기 힘들다는 것 정도? 그러나 어차피 그 자리에 온 사람들은 선수들이고, 비정규 활동에 대해서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활동가들이다. 전략조직화 사업이 중요하다고 다들 말한다. 토대를 만들기 위해서 발로 뛰어야 하고, 사람도 더 필요하고, 투쟁이 더 필요하기도 하고 그렇다. 무엇보다 턱없이 부족한 조직률이다. 공공노조의 미조직 대상자는 400만에 육박하고 있고, 지금 조직률은 1%나 되는 지 알 수 없다. 지부 역시도, 지금보다 더욱 확대되면서 더욱 강화되지 못한다면. 근본적으로 자기 혁신을 만들어 낼 수 없다면, 그렇다면 지부 역시도 조금씩 사멸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단 한 칼에 조직이 뭉개질 수도 있다. 턱없이 부족한 경험으로, 너무나 중요한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부담스럽지만 어쨌든 그 부족함 채우면서 계속 갈 수 밖에 없다. 비정규활동총화 수련회에서 내가 처음 들어왔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고, 예전보다 확실히 고민이 조금은 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약간은 성장했다는 뜻일까.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학교비정규직수련회는 다르다. 한 학교에서 한 명밖에는 조합원이 없는, 그래서 교섭을 하고 싸움을 하자고 하면 도대체가 답이 안 보이는 노동자들. 거기에 대고 회의할 때 지부장은 지금 시점에서는 교섭을 중단하고 내부 조직을 강화시킬 때라고 말한다. 동의한다. 이 모양으로 되지도 않을 교섭을 밀어붙이는 것은 앞으로 선례만 더 나쁘게 만들고, 거기에 회의 시간이 투여되고, 그러다 보면 무언가를 하기는 점점 요원해질 것이다. 조합원들은 교섭을 원하고, 싸움을 원하지만, 현장 노동자가 아닌 외부 활동가의 시선으로 보면 지금은 이루어지지도 않는 교섭을 해서 힘을 소진시킬 때는 아니다 싶은 것이지만. 그러나 과연 그게 옳은 것일지도 많은 고민이 든다. 그나마 조합원들이 활동할 수 있는 유인이 교섭이라면- 어쨌든 그것을 무시하고 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교섭이 현장투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이다. 다만 그 현장투쟁이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학교비정규분회라는 조직에 가입된 조합원들은 각자 다른 현장에 뿔뿔이 흩어져 있다. 함께 하면서 자기 현장을 뛰어넘지 못하면 학비분회라는 조직은 결코 하나의 노동조합으로서 단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조직인 것이다. 그런데 현장투쟁이 오히려 그 조합원을 그 학교에 갇히는 역할을 하게 만든다면? 연대투쟁을 결의하고, 자기 현장을 넘어서는 수준의 조합원이 이토록 부족하고, 이토록 힘겹게 다들 자기 일자리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그 조합원은 자기 힘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절감하고, 그나마 전임자와 상급단체 활동가만을 찾게 된다. 그것도 안 되면 이제는 법률로 돌파하고자 한다. 한 학교에서 자기 혼자 싸우는 것이 사실 큰 타격을 입힐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주변의 다른 동료들을 설득해서 싸우기도 힘들다는 것도 아는 것이다. 유일하게 정직한 대답은 어쨌든 학교비정규직분회의 조합원들이 그 투쟁에 함께하는 것만이 정답이다. 그러나 그게 안 되는 것이다. 조직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무리한 조건이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실망한 조합원은 법률로 가던 어찌 되었건 사실 이제 조합원으로서, 노동조합으로서 단결하자는 생각을 만들기는 힘들게 되었따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직을 해야 한다. 다른 업종과 같이 조직하는 방식이 힘들다면 그에 맞는 방식을 찾아내서 조직을 해야 한다. 자기 현장을 넘어서 함께 투쟁할 수 있는 조합원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 투쟁이 없이 그런 것이 만들어지지는 않지만, 그렇다면 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투쟁의 양식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조건에서 한계는 너무나 명확하고, 다들 지쳐 있다. 무엇을 하나 한계는 있다. 한데 어떻게 그 한계를 넘어설 것인가? 어떻게 그런 투쟁을 만들고, 조직하면서 다시 시작할 것인가? 그것은 나의 고민이다. 학비 조합원 동지들은 벌써 몇 년을 버텨왔다. 이미 힘든 과정을 많이 겪었고, 싸움도 많이 했고, 이골이 날 만큼 나 있는 동지들이다. 나에게 말한다. 왜 우리 담당자인데, 지부의 입장에서만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냐고. 현장 노동자들은 힘들어 죽을 거 같고, 교섭이라도 해서 행정실장이라도 치지 않으면 너무 힘들다고. 현장투쟁이 일어나지 않는데 조합원들이 움직이겠냐고,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나는 말한다. 지부의 입장과 학비의 입장이라고 분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게 맞고, 나은 방향인가가 중요한 것이라고. 지부의 활동가들은 학비에게 가장 나은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지부장님 역시 마찬가지라고. 그러나 내가 말하면서도 사실 내 말이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학비 현장 조합원이었다면 어떻게 말했을까? 나는 똑같은 말이나, 똑같은 고민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 것이었을까? 내 말은 현장 조합원들의 힘을 빼는 말이 된 것은 아닐까? 이번 수련회, 이제까지 쌓여왔던 고민들. 어찌되었건 포기할 수는 없고, 단시간에 무언가가 이루어지는것도 아니다. 힘을 내고 칼을 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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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공장 동희오토 - 시사 투나잇



동희오토 비정규직 해복투 - 시사투나잇

 

 

이가 뿌득뿌득 갈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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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성신여대에서는 여성 노동자들이 행정관을 점거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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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사회운동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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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우연히 오래 전 동지가 국가보안법으로 끌려갔던 그 시절 다른 동지가 만든 플래시를 보았다.

 

잊고 살았던 그 때의 삶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 때는 운동을 한다는 게 힘이 나면서도 한없이 서러웠던 것 같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되도 않는 법을 내세워 우릴 잡아가고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두들겨 패서 남의 다리를 망가뜨리고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노동자들은 무슨 잘못을 했길래, 나가는 집회마다 악다구니에 받쳐서 피튀기는 몸싸움을 하고 욕을 해 댈 수 밖에 없는지. 장애인들은 왜 휠체어가 뒤집혀야 하고, 철거민들은 제 집이 깡패 손에 부서지는 걸 제 눈으로 봐야 하는지.

 

그저 지식욕이 있을 뿐이었던 그냥 지식인이 되고 싶었던 20대 초반의 청년은 그 시간 동안 참 많이 울었던 것 같다.

 

그 심장의 분노가 혁명이라는 것을 속에 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심장의 분노를 되살려내야 한다.

 

더 많이 결의하고 더 많이 괴로워해야 한다.

 

힘겹고 처절해야 한다.

 

그 분노를 되살리지 못한다면, 어느 샌가 나는 운동을 먹고 살기 위해서만 하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순간 운동은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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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1945년의 8월 15일은 일본 제국주의가 미국과의 전쟁에서 전면적으로 패배하였던 날이며, 따라서 해당 시기 한반도에서의 철수를 강요당할 수 밖에 없었던 날이다. 바로 이 시점을 한반도의 민중들은 해방이라고 불렀으며, 억압의 직접적 기제였던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을 토대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들을 시작할 수"는" 있었다.


따라서 이 날을 광복절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여러 과정들을 거쳐서 속칭 “민주주의 공화국” 인 남한이 건국되었다. 이 과정에서의 역사적 비극들은 문제가 있으나, 새롭게 건설된 나라는 여하튼 말 뿐이긴 하지만 “민주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나라였다. 민주주의란 말 그대로 민중들이 자기 스스로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광복이란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과 더불어서 민주주의를 전면화 하는 새로운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진 것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한다. 한데 2007년의 광복절, 8월 15일은 이러한 광복의 의미가 충만했던 날이 되었는가?


바로 오늘인 8월 15일, 이랜드 홈에버의 노동자들은 회사 측의 불성실한 협상과 정권의 탄압 등의 여러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인간답게 살기 위한 투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절박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랜드 면목점에 모인 홈에버의 여성 노동자들은 갑작스럽게 떨어지는 폭우와 용역들의 폭력, 경찰력의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투쟁을 전개해 나아갔다.


면목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입구는 덩치 큰 용역깡패들에 의해서 길이 가로막혀 있었고, 직원도 아닌 이들이 도대체 왜 이 입구를 막고 있느냐고 질문하는 여러 시민들에게 용역들은 “너 이리 와봐” "이 새끼 죽고 싶냐“ 등의 언사와 함께 물리적인 폭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용역들의 폭력적인 행위 그 자체도 이미 상식적으로 폭력에 관련한 여러 법률에 관해서는 분명히 위반이다.


한데 파업 중인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이 집회를 벌일 때 이러한 집회가 집회 시위에 관한 법률과 무관하며 따라서 처벌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적인 것이다. 즉 이랜드 자본은 노동자들의 파업을 불법으로 매도하지만 이러한 파업은 지극히 합법적으로 상식적인 것이며, 따라서 오히려 자신들의 돈을 이용해서 용역을 동원하여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비상식적인 불법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민중이 주인이 되는 나라가 아니라 돈을 이용해서 온갖 위법, 각종 노동 착취와 부당 노동행위 등의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노동법 위반에도 불구하고 경찰력에게 단 하나의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오히려 보호받고 있는 이랜드 자본과 박성수가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 나라, 이 대한민국. 이 나라가 과연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호칭 할 수 있는가?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각종 폭력을 조장하고 각종 경제위기를 노동자 민중에 대한 책임 전가를 통해서 민중들의 주인됨을 박탈하는 대한민국은 이미 광복의 의미를 상실한 국가이다.


이랜드 그룹의 박성수는 이미 주식 배당금으로 부인과 함께 183억의 돈을 벌어들였다. 동시에 교회에는 130억의 십일조를 내면서 노동자들은 79만원으로 부려먹는다. 노동자들의 노동력이 저임금으로 장시간 착취를 받을 수록, 그리고 노동력이 점점 유연해짐으로써 사측의 비용이 절감된다는 것은 주식 가치의 상승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식 가치의 상승이라는 일견 화려해 보이는 금융화의 과정 뒤에는 노동자들에게 점점 전가되는 희생과 삶의 위기, 그리고 극단적인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2007년 8월 15일 8시 경, 갑작스레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전경들과, 그리고 용역들과 대치했다. 방패로 밀어붙이는 그들에게 “우리 어머니 같은 사람들이 깔려죽는다” 라고 절규하며 나는,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외쳤다. 비에 젖고 땀에 젖어 온 몸이 엉망이 되었을 때, 잠시 극단적인 폭력적 상황이 중단되었을 때, 이미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연행된 이후의 상황에서, 눈물을 훔치는 아주머니를 볼 수 있었다. 아주머니는 이제껏 함께 해 왔던 내 얼굴을 안다고 했고, 학생들이 무슨 고생이냐고 눈시울을 붉혔다. 나 역시 순간 감상적이 되었는지, 잠시 노동자들의 그간의 고생과 서러움이 내 가슴에 그대로 전달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얼굴 모를 깡패들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전혀 서럽지 않았는데,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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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긴 것이 있는가?

제대하고 거의 반년, 사실 제대한 기간과 활동 기간은 거의 비슷하게 맞아 떨어진다.

 

3월. 대학생으로 돌아오고 나서 대학 사회를 보는 기분은 이래저래 남다르다. 특히 우리가 속한 공간을 보는 기분이 남다르다. 이래저래 씁쓸한 기분으로 새학기를 맞이하고 있다.

 

아직 활동할 시간이 남았지만 벌써부터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고 있다. 동기들을 마지막으로 내 후배들 중에서 활동을 '결의' 하고 있는 후배가 없다는 점 때문이다. 아무도 결의하고 있지 않다. 정말, 아무도. 그리고 결의했다고 하더라도, 경험도 이론도 모든 것이 미약하다. 홀로 남겨두기 전에 단련시킬 수 밖에 없는데, 그 후배는 외로움이라는 숙명을 안고 가야 한다.

 

물론 이 공간에서 운동을 고민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외로움을 수반한다. 동지를 만들려고 그렇게 노력하는 이유는 그래도 외롭게 운동하지는 않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녀석은 외롭고, 그렇게 외롭게 운동했을 때 놈은 지금 선배들에 비해서 두 배, 세 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그 힘든 과정을 버텨낼 환경을 준다는 것은 선배로서 참으로 미안한 일인 것이다.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 지를 잘 모르겠다. 만나야 할 대중이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나는 참 못난 선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떠나갔을 때, 녀석이 외롭게 운동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은데.

 

참, 반년 간 해놓은 게 없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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