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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8/21
    2009/08/21(1)
    이스
  2. 2008/03/23
    2008/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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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8/03/17
    2008/03/17
    이스
  4. 2007/08/14
    화려한 휴가 에 대해서 쓴 어떤 평론을 퍼오다
    이스
  5. 2007/08/04
    오월 광주를 "기념"하는 영화, 화려한 휴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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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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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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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03/22
    과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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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7/03/02
    후배의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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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9/11
    박치기?(2)
    이스

2009/08/21

한심하다.

 

나는 지금 누구와 어려움을 나누어야 한단 말인가.

 

근본적인 신뢰가 없는 지금 모두가 힘들 뿐인데 그저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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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3

개념이 없다.

 

철저하지 못하고 나약해져 있다.

 

이 문제는 순전히, 완전하게 내 탓이다.

 

이런 방식으로라면 내 운동은 시작도 해 보기 전에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힘이 나지 않는 이유를 찾기 전에 무조건 힘을 내야 할 때다.

 

그러지 못한다면 결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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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7

1. 칼 포퍼

 

칼 포퍼의 책을 읽어보라는 말을 들었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이라는 책 제목 밖에는 전혀 읽지 않았고, 그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마르크스주의를 공격하기 위해 전 생애를 다 바쳤다는 기억도 안 나는 책의 한 두 글자 뿐.

 

내가 타인의 말을 어떻게 듣고 있는 지를 되돌아 볼 수 있을 거라는군.

 

칼 포퍼의 책이 어떤 내용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내가 타인과의 소통의 문제라던가 관계를 설정함에 있어서 일단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

 

읽기도 어려운 [자본] 에 관련된 텍스트, 마르크스주의에 관련된 텍스트들을 붙잡고 있는 것보다도 지금의 나한테 더 필요한 책들은 바로 그런 관계에 관련한 책들일 지도 모른다.

 

설득의 심리를 체득하는 것.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법. 그런 것들. 그런 자기 개발서가 지금 나한테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2. 기다리는 마음

 

나에게 제일 부족한 것은 여유로움과 기다리는 마음이다.

 

여유로움과 기다리는 마음은 게으름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삶에서 그 두 가지만 충분했더라도, 나는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직화는 더 잘 됐을 지도 모르고, 더 나은 판단을 해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전제조건으로는 믿음과 확신이 깔려 있다.

 

네 멋대로 해라 라는 드라마에서 믿음에 대한 정말 확고하고도 자명한 정리를 들은 적이 있다.

 

"믿음이 뭔 지 알아? 내가 속는 줄 알면서도 믿어버리는 것 그게 진짜 믿음이다!"

 

난 그렇게 믿을 줄도 알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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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 에 대해서 쓴 어떤 평론을 퍼오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22804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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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를 후경으로 삼은 멜로드라마'라고 단정하는 것은 이번 영화제작진은 물론 이미 시간과 돈을 들여서 영화관을 찾은 500만 관객을 모욕하는 것이다." 이 말에서 유인택의 수준이 심형래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5월은 혁명의 달이다. 1980년의 광주가 있고, 1968년의 프랑스가 있다. 이 글이 담겨있을 책의 표지에는 9라는 숫자가 분명히 써있지만 당신이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가 개봉했다는 사실과 이것이 어떤 내용의 영화인지까지 알고 있다면 내가 왜 5월의 얘기를 꺼내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화려한 휴가>는, 김지미가 씨네21에서 지적한 것처럼, 신애(이요원 扮)의 목소리로 바로 그 1980년 5월의 광주를 기억하라는 부탁을 하고 있다. 그 때는 1980년이고, 지금은 2007년이다. 나를 포함하여 꽤 많은 관객의 주민등록번호가 8로 시작한다. 이 물음은 이제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아직 광주를 기억하고 있느냐는 질문으로. 이 질문에 나는 다시 되묻는다. 당신은 왜 지금 그곳에서 묻고 계십니까.
 
영화는 전형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생리대 광고에 나오는 여대생들 마냥 세상 좋다고 웃어대는 군상. (고백하자면, 나는 들이대는 연애질을 보기가 거북했다. 결코 내가 애인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폭력적인 연애가 싫어서 그랬다.)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공수놈들. 희생이 따르고 영웅은 조력자를 만나 카카로트처럼 각성해서 재난을 극복할 뻔 한다. 도청에 남느냐 마느냐를 두고 고민할 때 극장 안에 웃음이 터져 나올만큼 관객의 감정선도 잡아내지 못한다. 감독의 연기지도 수준 역시 평균을 넘지 못한다.
 
이 영화는 광주를 기억하라고 채근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는 감히 광주를 바로보지 못한다. 영화는 광주를 눈앞에 들이밀지만, 이것은 과연 그 해 5월의 광주인가?
 

영화평을 청탁받을 때, 쿨하고 위트있는 문체로 써달라는 부탁이 덤으로 붙었다. 하지만 <화려한 휴가>를 다루기로 결정한 순간 그 부탁은 결코 들어줄 수 없는 것이다. 우스운 일은 정작 이 영화가 나를 대신해서 부탁을 들어줬다는 거다. 우습지만 웃을 수 없는 일이다. 마치 도청에서 고향을 찾는 인봉(박철민扮)과 용대(박원상扮)를 보면서도 웃지 못하듯이.


나는 깨달았다. 영화평을 쓰면서도 막상 이 영화에 대해서 별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노력을 기울여도 무위에 그친다는 것, 이 무상함은 5월 광주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시도할 때마다 자주 맞닥뜨린다는 것, 그때마다 깨닫는 사실은 오히려 어떤 사태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경우 - 예를 들어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도 들을 수 있었던 전라도 새끼들은 전부 빨갱이라는 자신만만한 확신 - 가 기실 아무런 정보를 갖지 못한 경우라는 것, 이런 의미에서는 이 사회에 광주는 계속해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이런 의미에서 광주는 영웅설화를 넘어서 8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슬래셔무비의 전형을 따른다. 피해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살인마가 있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분명한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믿지 않는다. 결정적인 증거, 즉 살인마가 눈앞에 도래하는 순간 피해자는 비로소 그 존재를 믿는다. 물론 이미 때는 너무 늦었지만.
 
영화를 신파라 한다. 맞는 말이다. 영화의 총성이 울릴 때마다 관객의 흐느끼는 소리가 극장을 채운다. 건전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슬픔과 분노를 참을 수 없다. 문제는 이 슬픔과 분노가 무엇을 향하냐다. 전장군과 그날의 그를 있게 한 박통은 영화의 첫 부분에 보이는 서너 줄의 자막에서 찾을 수 있다. 역사는 없고 사태만이 있다. 영화는 그토록 광주를 붙잡아서 관객에게 보이려하지만, 그렇기에 광주는 눈앞에서 사라진다. 살아남으려는 시민과 살인이 천성인 듯한 공수놈의 대립에서 구체적인 역사는 사라진다. 모두가 고통 받고, 선악은 너무나 분명하다. 영화의 추상적이면서도 분명한 대립구도 속에서 가해자는 저 너머로 사라지고 그저 피해자만 눈앞에서 신음한다. 영화제작진은 지식인을 배제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구성한 그 해 5월의 광주를 그리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과물은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평범한 학살이야기일 뿐이다.
 
전장군에게 총애를 받았던 흥수(안성기扮)는 박정희 밑에서 대령까지 달은 인간이다. 감독은 실화에 근거를 뒀다고 변명한다. 그런데 영화에서 항상 중요한 것은 왜 그것을 선택했느냐는 질문이다. 왜 그 쇼트가 그 순간에 그렇게 배열됐나. 왜 그 등장인물은 그런 행동을 취해야만 했는가. 도대체 왜 흥수인가. 왜 신애인가. 왜 민우(김상경扮)인가. 왜 진우(이준기扮)인가. 때로는 사실이 진실을 덮을 수도 있다.
 
나는 광주가 이 사회에 재현되면 아무도 나서지 않으리라는 주장에 반대한다. 그 때 그 곳에서 광주시청에 남는 쪽을 선택한 사람들이 남달리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는 민주투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러나 그 평범한 사람들을 투사로 만드는 역사적 맥락이 있다는 것, 이러한 맥락보다 그 사람들의 면면에 주목하며 영웅화하는 행위는 같은 논리로 모든 책임을 가해자 몇몇의 특수한 행위에 국한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 말을 뒤집으면 자신이 어떤 사회적 맥락에 놓였는지 감지하지 못하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발버둥만 칠뿐이라는 말이 되기도 하겠다. 광주 시민들은 공수부대가 왔을 때 희생당한 영웅이 되었지만, 그 해 5월이 되기 전부터 영웅이었다면 광주에 공수부대가 왔을까 하는 우문이기도 하겠다.
 
항상 때늦은 후회만 해야 한다면 우리는 굳이 영화를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영화의 의미가 감독이 지겹게 말하는 그 해 광주에 대해서 이 시대에 사는 한국인이 널리 알고, 그리하여 역사를 다양한 관점에서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그친다면 광주에 대해서 누구나 떠들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셈이고, 이것이 확장되면 가해자는 사라지고 피해자만 남는 전형적인 오류만 범할 뿐이다. 이것은 정말 개 같은 짓이다. 요는 이 사회에서의 광주의 재현 앞에서 우리 역시 때늦은 후회를 언제까지 계속해야만 하느냐 여부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된 인질 23명 중 2명이 죽었다. 21명의 소식은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남북정상회담에 밀려났다. 마치 그 자신이 이명박의 숨겨진 재산과 박근혜의 숨겨진 자식을 밀어냈듯이. 소말리아와 나이지리아에서 납치된 한국인들이 잊혀가듯이. 언론의 절대권력. 잊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 내가 일하는 곳에서 걸음으로 10분 거리에 뉴코아 강남점이 있다. 그리고 내 앞에는 뉴코아의 우유가 썩을까 걱정하면서 파업하는 년들 자식까지 평생 굶어죽도록 취직시키지 못하게 만들어야 된다는 인간이 널렸다. 이것들의 자식은 강남점에서 다시 10분 거리에 있는 잔디가 깔린 학교에서 운동하며 자란다.

 

"죄의식의 소비." 130억 원의 제작비. 배급사는 CJ엔터테이먼트. 이 악다구니 속에서. "다시 '5월'과 '광주'가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유인택의 말이다. 부활한 5월의 광주는 그저 좀비인가. 답은 유인택이 하고 있다. " <꽃잎>... 결과는 관객으로부터 외면받았고 투자자는 큰 손실을 입었으며, 특히 광주는 실망했다." 이 영화를 통해 단언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실. 이제 광주마저 상품으로 내놓아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자본의 자신감. 분명 이 영화는 여전히 봐야만하는 영화지만,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이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옷을 사고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이 자본의 자신감을 다시 한 번 굳게 지지한다면, 이 영화는 모욕받아야만 한다.
 
내 어머니는 광주가 고향이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 손을 꽉 잡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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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광주를 &quot;기념&quot;하는 영화, 화려한 휴가

광주는 기념되어야 할 것인가, 기억되어야 할 것인가?

 

이런 질문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누군가가 물을 지도 모르겠다. 기념이 의미하는 것과 기억이 의미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어쩌면 그다지 중요한 질문이 아닐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전적인 의미를 일단 찾아보자.

 

기념 : 어떤 뜻 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함.

기억 :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

 

글 시작부터 말하건대 화려한 휴가가 광주를 재연해 냈다는 것은 솔직하게 말해서 "완전한" 거짓말에 다름 아니다. 일단 들불야학과 윤상원으로 표상되는 광주의 마지막 혁명 전사들을 왜곡 했고, 이로써 수습위원회와 투쟁위원회의 완전한 단절 과정을 없애버렸다. 화려한 휴가에서 보여주는 것은 광주 시민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당했는지에 대한 시각효과 뿐이다. 이요원이 분한 신애라는 간호사의 선문방송의 마지막 대사는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마세요" 이다. 잊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거기에서 멈춘다면 기념이라는 사전적 의미에 완전히 부합하는 대사이다.

 

 

하지만 영화 어디에서도 광주를 다시 떠올릴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감독은 그것을 본인의 몫으로 돌리는 것으로 마무리 함으로써 그 자신이 말하고자 했던 것들을 한계짓고 있는 듯 하다. 마지막 사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요원 홀로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살아남은 이들의 고통을 의미한다. 하지만 영화는 거기에서 멈춘다. 화려한 휴가는 광주라는 거대한 역사적 진실을 가지고 사람들의 신파를 자극하고, 광주를 잊지 말자고 이야기하는 것에서 이 영화의 의미를 마무리짓는다.

 

그래, 거기까지다.

 

하지만 80년 오월 광주가 거기에서 끝난 것이었을까?

 

실제로 80년 이후 매년 오월 마다 금남로청은 전쟁터로 돌변한다. 80년 오월 광주에 있었던 참극 이후, 광주는 죽음과도 같은 도시, 당시 새로 부임한 전남대 총장이 말했듯이 "우리의 역할은 살아남는 것 뿐" 이라는 것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이 당시 철저하게 버려졌던 광주의 진실은 전국적으로 펼쳐지는 학생운동의 대중화, 민중운동의 활성화로 살아나고, 광주 내부에서도 치열한 격전이 매년마다 벌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때 전남대의 오월대, 조선대의 녹두대라는 "광주 시민군의 후예"를 자칭하는 이들이 학생운동의 "전설" 로 등장하는 것이다. 변혁운동사에서 이들 만큼 투쟁을 주도하다가, 자신의 대중들을 마지막까지 사수하면서 지켜낼 수 있었던 체계적인 전투역량을 가진 자위대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들 하지 않는가?


오월 광주의 비극성은 광주의 실례와, 이후 치열하게 전개되는 학생운동에서 증명되듯이 그것을 단지 기념시키는 역할로 마무리지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억되면서 언제나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다시 살아나 싸움으로 이끄는 역할을 했다. 비극성의 진실한 가치는 관객을 배우로 만들고, 구경꾼을 행위자로 변모시키는 데 있다 하지 않는가? 이것이 80년대 대중운동의 시작으로서의 광주의 역사적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대중들에게 단지 "기념" 으로 끝나지 않은 "기억" 으로서의 오월 광주의 의미이다. 하지만 화려한 휴가라는 거창한 대중영화의 내용과, 지금의 정세가 맞물렸을 때, 이는 참으로 묘한 효과를 드러내는 것이다.

 

90년대 중반, 광주 사태는 "광주 민주화 운동" 으로 다시 재규정된다. (지배계급 바로 그들에 의해서!) 그리고 광주에 대한 보상을 말하는 가운데에서, 광주에 있었던 민중들의 목소리는 다시금 탈각되는 과정을 겪는다. 마치 그것으로 광주가 끝난 것인 양, 그렇게 말해지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수습위원회와 투쟁위원회에 얽힌 역사적 진실을 다시 들춰보아야 할 것이다.

 

영화에 "수습" 이라고 적힌 옷(?)을 걸친 목사나 지식인들이 "협상" 을 말하며 계엄군 철수를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실제 역사 속에서 등장하는 2가지 세력,.  ‘시민수습대책위원회’와   ‘민주시민투쟁위원회’ 중 전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은 해산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계엄군들의 협박에 굴종하고, 투쟁을 정리하려 노력했던 이들이다. 그리고 전남도청에서 마지막에 "조용히" 사라지는 이들이다.

 

하지만 노동 야학이었던 들불야학의 활동가들과 하층에 있던 노동자 계급들 바로 그들은 마지막까지 시민군으로서 도청을 사수하며 죽음을 맞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들은 죽음을 스스로 "선택" 했던 것이었을까?

 

그저 광주 시민들을 자위함으로써 지켜내기 위한, 그리고 감정적으로 들고 일어선 시민군들이었다면 그들은 죽음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이 광주의 투쟁 과정은 물론 계엄군들의 비상식적인 살인행위와 진압으로 일관되어 있지만 그것에만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그 투쟁 과정에서 민중들이 실천했던 과정들을  한 번 제대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광주의 투쟁 과정에서 "투사회보" 가 발간된 것(이는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저 유명한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들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라는 이요원의 방송 과정 역시도 역사적 사실이다. 이러한 투쟁을 조직하고 주도했던 분파가 바로 "민주시민투쟁위원회" 였고 그 핵심에 들불야학과 윤상원이라는 전사가 있었다. 이들이 시민군으로 남아 마지막까지 싸웠을 때 자신들은 죽음을 맞게 되리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 그들은 오히려 "저승에서 만납시다" 라는 마지막 인사를 남긴 채 최후의 전투를 준비했던 이들이다.

 

윤상원은 "이대로 투쟁을 멈춘다면 우리는 역사 앞에 죄인이 됩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라고 마지막 발언을 한다. 그들은 광주라는 거대한 비극성을 신파로 격하시키지 않고 오히려 민중과 민주주의에 대한 투쟁으로서, 진실을 남겨두기 위함으로써 그 죽음을 선택한 것이었다. 태백산맥에서 등장하는 "역사투쟁" 이라는 언어를 이럴 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투쟁에 기꺼이 동참했던 빈민과 노동자들, 최후의 시민군들은 또한 무엇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었던가.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수사를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닌 그 내용에 있다. 적어도 그 당시 광주는 시민들의 토론과 논쟁의 장이었으며, 누구 하나 상호 간의 억압이 아닌 우애로 맺어진 공동체의 역할을 했다. 한국 같이 지식인 엘리트주의가 심화되고, "실질적인 신분의 차이" 가 극심한 공간에서 투쟁으로 며칠이나마 존재했던 광주의 그 코뮨은 가난하고 못 가진 채 피억압자로 살아가던 그들에게는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하다면 광주의 이 투쟁을 단지 "계엄군들의 총칼에 의한 시민들의 비참한 죽음" 에 대한 "신파극" 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전혀 역사에 진지한 자세가 아니다. 광주의 이 투쟁은 "역사 투쟁" 이었으며 살 만한 이들이나 살아남아 "시민의 민주주의와 목숨" 을 지켜내는 투쟁이 아니라 "민중의 민주주의" 를 건설하고, 지켜내고자 했던 투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전혀 오지 않은 "민중의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운동의 시작으로서 "오월 광주" 가 존재하는 것이다.

 

한데 90년대 중반 "광주 민주화 운동" 이 되면서 지금의 노무현이나 열린우리당 따위의 "386을 중심으로 한 개혁운동" 이라는 치들이 전면에 부상한다.(앞에서 말한 "수습위원회"의 부류들이라고 보아야 마땅한 이들) 이들은 자신들이 "광주의 후계자" 라는 식으로 광주의 혁명을 "그들의 성과" 로 치장하면서 겉으로 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고자 하는 허구적 수사를 내세우고, 역사 바로 세우기 따위의 기만을 행한다. 하지만 그들의 정치의 실제 내용으로서는 민중의 민주주의 따위는 어디론가 사라진 채 오직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의 기본을 말살하고 더욱 관료화된 체계를 완성하며 노동자 민중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한미 FTA와 비정규직 개악안을 통과시킨다.

 

죽어간 광주의 전사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적어도 이런 기만이 넘치는 거짓 민주주의 정치와, 죽어가는 노동자 민중의 삶이 아니었을 진대, 이들은 "광주의 비극은 이미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남김으로써 마땅히 기념되어야 할 것" 으로 정리해 버린 채 아직 끝나지 않은 광주로 시작한 "민중의 민주주의" 에 대한 투쟁을 "불법" 으로 간주하는 전형적인 "지배계급" 으로서의 압제자의 모습만을 드러낼 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개혁 세력이라 통칭되는 이들의 "기만" 에 민중들이 반응한다는 것일 것이다. 민중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80년대에 운동에 참여했던 "진보적 엘리트들" 이며, 나쁜 의미로 말한다면 "빨갱이" 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정확히 말해서 윤상원과 들불야학으로 표상되는 민주시민투쟁위원회가 아니라 오히려 전남도청에서 마지막에 조용히 사라진 "수습위원회" 와 같은 부류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이 바라는 세상은 엘리트 시민의 상식이 모독받지 않는 사회였으며, 실질적인 가난과 불평등에 삶을 괴로움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던 민중들이 평등하고 자유로워지는 사회가 아니었다.

 

한데 영화 화려한 휴가는 이러한 민중들의 평등과 자유를 위한 투쟁과 수습위원회의 타협과 굴종을 그리지 않으며 윤상원의 비극을 묻어버린다. 묻혀져서는 안 될 것을 묻어버린 채 화려한 휴가 답게 진실로 화려하게 "광주의 신파를 잊지 말자" 라고 외치면서 영화를 정리해 버린다. 이 영화가 실로 기대받는 대중영화라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영화를 본 이들은 "광주로 시작되었던 민중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기에, 광주는 여전히 "기억" 되어야 한다" 라는 말을 머리에 남기지 못한 채 "남한의 역사에서 저런 비극도 있었구나" 라는 스쳐가는 하나의 생각으로 마무리할 뿐이다.

 

학살자의 후계자 "한나라당" 과 도청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민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투쟁의 기억을 민중에게서 삭제시키는 "열린우리당" 따위의 부류들이 의회정치 내부에서 권력투쟁을 벌이다가도 매년 5.18이 되면 광주로 와서 망월동 묘역을 참배하고는 오월 광주를 "기념일" 로 격하시켜 버리면서 "자기네들이 광주의 정신을 진실로 "기념" 하는 후계자다" 라고 떠들고 있는 현실 속에서, 대중들이 오월 광주가 제기했던 "인민의 민주주의" 에 대한 기억을 잊어가는 현실 속에서, 아마도 이 화려한 휴가의 역할은 비참했던 광주의 역사를 "팔아넘겨서" 저 지배계급들의 "광주 기념 이데올로기"에 그대로 복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민중이 진실로 해방된 세계는 여전히도 건설되지 않았는데,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87년 체제와 신자유주의 독재의 관철로 점점 암울해져 가는 지금의 한국 사회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 볼 때, 광주를 그저 신파극으로 "기념" 하는 이 화려한 휴가는 다이하드 따위의 폭력적인 오락영화보다도 훨씬 심란하고, 마음이 무거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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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30

이 시간에 피시방에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새롭기 그지 없지만, 여하튼 피시방에 와 있다. 그리고 양 옆에서 각자 즐거이 게임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랜드 파업에 연대하고 있는 동지들은 지금쯤 찬바람(사실 더운 바람이겠지만)에 노숙을 결의하고, 실천하고 있겠지. 물론 투쟁 하나, 실천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태도가 그다지 올바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지금, 좀 부끄럽긴 하다는 이야기이다.

 

논다. 논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놀이라는 것은 그것으로 즐거움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즐거움 그 자체로 정신이 정화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일명 카타르시스라는 것이 그것 아니던가? 그리고 카타르시스의 정체는, 다름 아닌 무아다. 자기 자신을 잊는 것이다. 그 자신을 잊고 대상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치에 몰입하면서 자신의 욕망의 형태를 정화시켜나가는 것을 카타르시스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지금 질문에 부딪힌다. 나는 도대체 무엇으로 그 카타르시스, 진짜 즐거움을 찾고 있는가?

 

양 옆에 있는 사람들은 게임으로 카타르시스를 찾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렇다, 이것은 게임에 몰두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아닌 진이라는 메카닉이 되고 짐이 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서 탈각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서 탈각한 결과 그 열정이 그대로 투사되고, 그 효과로 그 자신에게 남아 있는 욕망의 찌꺼기들을 카타르시스 시켜내는 결과를 낳는 것일까? 과거 5~6년 전 게임을 열심히 해 본 적이 있었지만, 아마도 그렇게까지 카타르시스를 경험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 나에게 논다는 것이 무엇일까? 술을 마시건, 노래를 부르건, 무엇을 하건 간에 논다는 것은 사실 나 자신에게 비생산적인 행위로 간주되어 왔다. 그 비생산적인 행위라는 것은 스스로를 변화발전 시키는 가치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오지 않은 미래와 이데아를 설정하는 식의 관념을 실천한다는 것은 궤변이겠지만, 적어도 어떠한 지향점은 가지고 그 자신의 변혁과 세계의 변혁을 고민할 터이다. 속칭 지금의 나에게 논다는 어떠한 행위들 자체는 혁명가로서의 나 자신을 만드는 것이 아닌 것이기에 나에게 그다지 커다란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것일게다.

 

반면, 작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점점 작아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나 역시도 하나의 대중일 터이고, 지금 옆에 앉아서 게임을 즐기는 이들 역시 한 명의 대중일 터이다. 하다면 이 대중들의 작은 취향 하나 마저 나는 맞추지 못하고 있는 꼴이 된다. 이게 대중활동가의 자세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럴까?

 

이래저래 복잡하기 짝없는 인증절차에 신경질이 난 나머지 게임을 해 보려다가도 때려쳤지만, 그래도 그런 건 참고 했어야 할까?

 

여하튼 난 지금 이렇게 재미없는 글이나 적고 있는 것이고, 딱히 몰입하고 있는 형세는 아니어 보인다.

 

조만간 접고 나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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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가슴에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얼마나 값싼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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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

발표수업을 무조건 지정으로 하는 요즘의 고약한 학제의 유행 덕분에 팔자에 없다고 믿었던 발표를 하게 되고 말았다. 조원들을 보니 다들 하나같이 삼삼하기 그지없는 고학번들인데 어쨌든 나보다는 학번이 아래가 된다. (어느새 대학에서 그렇게 되고 말았다)

 

수업의 전출을 위해서 노력하는 졸업대비 학생활동가라는 게 참으로 고약하기 그지없지만 어쨌든 나름대로 힘겨운 하루 하루가 지속되고 있다.

 

강의는 '복지행정론' . 교수는 전형적인 개혁 우파에서 조금은 왼쪽으로 나간 사람이라고 보이는데, 한 때 노무현의 지지자였고 지금은 노무현에 대해서 안타까움과 동시에 화끈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사람이다. 강의를 듣다가 교수가 말하는 복지행정과 노무현 정부가 분배를 중요하게 생각하던 정부였지만 물적 토대가 없어서 실패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저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니, 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지만 강의 시간에 굳이 질문을 해 가면서 교수랑 싸우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아마 행정학과에 있는 교수들 중에서는 가장 진보적인 관점에 '가까운'(단지 상대적으로 아주 약간 가깝다는?) 사람임에는 확실 - 3.8 여성의 날에 나름 기고도 하고 신자유주의에 대해 문제의식은 갖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 하지만 여하튼 저 진보에 '가까운' 관점이 학생들을 호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심히 아프기 그지없었다.

 

어쨌든 발표수업은 4대보험에 관련된 것인데, 우리 조에서 나는 산재보험법 개악에 대해서 말해보자고 할 생각이다. 이왕이면 신자유주의 까지 나가서 지극히 충실한 개혁주의자인 교수와 한 판 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 싶지만 발표 구성원들하고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 지 모르겠다.

 

P.S

 

요즘에 인터넷을 통 할 시간이 없다 보니 이렇게 한꺼번에 몰아서 할 일이 생기면 블로그에 애정을 갖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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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의 명언

가끔씩 녀석은 내 심금을 울리는 말을 할 때가 있다.

 

"답답하면 차라리 다행이죠. 허무해지면 끝장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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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기?

 

 

1리터의 눈물을 보다가 그만 사와지리 에리카씨에게 반해버려서 관련 영화를 찾았다. 찾아낸 영화는 전혀 의외의 영화였다. 사와지리 에리카씨, 이 영화로 2004년의 신인상을 말 그대로 싹쓸이 했다는데, 어째 제목이 좀 이상하다. 거기다가 스틸샷으로 보여지는 에리카씨의 사진도 이상하다. 아무리 내가 눈이 삐꾸라도 일본 기모노와 한복의 차이를 망각할 정도로 망가지지는 않았는데 - 더군다나 나는 양안 1.0의 그리 나쁘지 않은 시력의 보유자이다 - 에리카씨는 한복을 입고 피리를 (나중에 플룻이라는 것을 알았다) 불고 있지 아니한가.

 

영화를 틀었다. 근데 이것도 이상하다. 일본영화라고 알고 있었는데, 제목이 한글이다. 한글로 박.치.기 라고 세 글자 선명하기 그지없이 뜨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이 영화가 일본영화가 맞나, 라고 조금 의심했던 것 같다.

 

영화의 시대는 60년대다. 처음부터 어떤 가수의 공연에 기절하는 소녀들, 이런 머리가 뜬다지 라면서 버섯머리를 해 대는 주인공들, 곳곳에서 터지고 있는 시위 광경들. 영화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일본에서든 세계적으로든 남한을 제외하고 60년대는 참으로 향수가 많은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잘은 모르지만 68혁명을 팔아먹은 영화는 아마도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거기다가 68혁명을 신성화 시킨 사례 역시도 많은 것으로 안다.

 

나는 68혁명의 시기를 그린 영화라고는 고작해야 몽상가들 이라는 베르톨루치 씨의 영화 밖에는 본 것이 없다. 그러나 몽상가들을 보면서 '혁명'을 떠올리는 것은 좀 우스웠다. 어떠한 혁명 이라고 일컬어지는 사건은 명백한 정치적 사건으로서 집단적 봉기와 해방공간의 창출을 말한다. 해방공간의 창출이란 끊임없는 해방공간의 확산을 위한 노력 역시 겸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몽상가들에서, 해방공간은 그려지지 않는다. 오직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운 쌍둥이와 판타지 보수주의자 미국인의 집안싸움만이 그려진다. 박치기에서는 68혁명을 떠들지 않는다. 단지 일본에서 벌어지는 가두투쟁 속에서의 일과, 일상적인 이념 이야기와, 소수자들과 다수자들 간의 끊임없는 싸움, 각종 신종 가치관의 몰이해로 인한 행동양상의 코믹함 등등이 그려질 뿐이다. 하지만 혁명기라면 오히려 이러한 사태가 정상이 아닐지 싶다. 프리섹스의 의미가 길거리 섹스가 되었는지 뭔지 모르고, 고등학교에서 마오를 숭상하는 좌파 선생이 학생들을 선동하려 하지만 뭔가 이음새가 안 맞는, 그런 불협화음 적인 모습.

 

이 영화에서는 두 개의 집단의 대립이 극명하게 그려진다. 1929년(맞나?)의 광주학생운동을 패러디 한 것인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는 일본인들에게 분개한 재일 조선고교 청년들이 불같이 들고 일어나 일본인들을 구타하고 버스를 뒤집는 광경이 그 시작이다. 그리고 영화 내내 일본계 고등학교와 조선 고등학교는 대립한다. 우리는 물론 대체적으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으로 왔던 조선인들의 비극에 대해서 공감하고 있고, 그런 장면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받아들인다. 일본 사회 안에서 소수자는 많지만 일본국가의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형성된 수많은 소수자의 하나로 재일조선인은 분명히 존재하며, 이것은 일본 사회 내의 모순과 더불어서 역사적 문제의 하나이다. 그러한 부분을 다룬 것 만으로도 박치기를 보면서 나는 이 영화가 드물게 용기있는 영화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이 가운데에서 조선인 여학생인 경자(사와지리 에리카)에게 반한 코스케는 강개 라는 한국식의 이름을 받고, 한국어를 공부하고, 경자가 연주하던 북한의 노래인 [임진강]을 부르면서 조선인들과 가까워진다. 그 과정에서 즉각적인 민족적 적대는 드러나보이지 않는다. 코스케는 조선인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최선의 예의를 다 한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단의 일들은 코믹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다수자의 소수자에 대한 여유있는 배려 가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친구가 되기 위한 일상적인 노력이다. 가장 골이 멀어져 있는 두 개의 집단에 속해 있는 인물들 사이에서 그 누구라도 친구가 된다는 것은 보기에도 유쾌한 경험이다.  

 

그러나 그 폭력의 과정에서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코스케는 조선인들에게 일본의 역사의 무게를 책임져야 할 죄인이 된다. 이것은 친구가 되기 위해 겪어야 할 필연적인 사태이다. 화해라는 것은 과거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성립되지 않으며 그 화해를 통해서만이 친구는 친구가 될 수 있다. 영화는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일들에서 일본의 책임을 직설적으로 이야기한다. 제국주의 국가로서 일본이 저질렀던 만행에 대해서 코스케는 그 책임을 회피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 자신이 직접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그 근미래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로써의 책임이다. 임진강으로 나뉘어진 남과 북을 넘어서, 강으로 나뉘어져 있는 수많은 나눔을 만들어 낸 폭력에 대한 책임감이다.

 

바로 그 시점에서 임진강은 단지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하기 위한 노래가 아니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부르는 임진강은 세레나데 일 수도 있지만 수많은 나눔과, 폭력과, 역사적인 비극에 대한 코스케의 외침이다. 그 순간 코스케는 일본에서는 조선인이고, 남성과 여성의 비를 들자면 여성인, 비주류의 인물이 된다. (실질적으로도 코스케는 일본 사회에서 금지되어 있는 노래를 부름으로 해서 주류의 금기를 깨뜨린 비주류의 인물로 등장한다) 그리고 코스케는 다시 한 번 그 과거의 벽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조선인인 경자의 사랑을 얻고, 조선인들에 대해 화해를 요청하고, 다시 한 번 친구가 될 것을 노래하는 것이다.

 

일부러 일본인임이 분명한 배우들이 어색하나마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연기하는 것도, 단순한 리얼리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소통의 예의를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와 소통할 대 예의를 갖추는 방식은 그 상대방의 방식에 맞춰가려는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색하나마 그 노력은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싶다. 적어도 영화는 모든 것이 허상이되,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진실되기 때문이다.

 

박치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영화다. 한국인들은 일본 사회 안에서의 자기 성찰을 제대로 경험한 바가 없다. 일본 사회 내부에서의 역사적 자기 성찰과 소수자적 문제제기를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다면 맹목적인 우익적 민족주의의 열풍에 빠져서 쪽빠리들 다 죽으라는 식의 생각없는 증오를 과연 할 수 있을까. 바로 그래서, 제대하고 나서도 한 번 더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 이 영화일 듯 하고, 많은 사람들이 박치기를 보기를 원한다.

 

:::추신:::

 

나는 사와지리 에리카씨의 팬클럽에 가입할 수 있다면 가입하기로 마음을 정해버렸다. 하. 하. 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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