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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기?

 

 

1리터의 눈물을 보다가 그만 사와지리 에리카씨에게 반해버려서 관련 영화를 찾았다. 찾아낸 영화는 전혀 의외의 영화였다. 사와지리 에리카씨, 이 영화로 2004년의 신인상을 말 그대로 싹쓸이 했다는데, 어째 제목이 좀 이상하다. 거기다가 스틸샷으로 보여지는 에리카씨의 사진도 이상하다. 아무리 내가 눈이 삐꾸라도 일본 기모노와 한복의 차이를 망각할 정도로 망가지지는 않았는데 - 더군다나 나는 양안 1.0의 그리 나쁘지 않은 시력의 보유자이다 - 에리카씨는 한복을 입고 피리를 (나중에 플룻이라는 것을 알았다) 불고 있지 아니한가.

 

영화를 틀었다. 근데 이것도 이상하다. 일본영화라고 알고 있었는데, 제목이 한글이다. 한글로 박.치.기 라고 세 글자 선명하기 그지없이 뜨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이 영화가 일본영화가 맞나, 라고 조금 의심했던 것 같다.

 

영화의 시대는 60년대다. 처음부터 어떤 가수의 공연에 기절하는 소녀들, 이런 머리가 뜬다지 라면서 버섯머리를 해 대는 주인공들, 곳곳에서 터지고 있는 시위 광경들. 영화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일본에서든 세계적으로든 남한을 제외하고 60년대는 참으로 향수가 많은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잘은 모르지만 68혁명을 팔아먹은 영화는 아마도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거기다가 68혁명을 신성화 시킨 사례 역시도 많은 것으로 안다.

 

나는 68혁명의 시기를 그린 영화라고는 고작해야 몽상가들 이라는 베르톨루치 씨의 영화 밖에는 본 것이 없다. 그러나 몽상가들을 보면서 '혁명'을 떠올리는 것은 좀 우스웠다. 어떠한 혁명 이라고 일컬어지는 사건은 명백한 정치적 사건으로서 집단적 봉기와 해방공간의 창출을 말한다. 해방공간의 창출이란 끊임없는 해방공간의 확산을 위한 노력 역시 겸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몽상가들에서, 해방공간은 그려지지 않는다. 오직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운 쌍둥이와 판타지 보수주의자 미국인의 집안싸움만이 그려진다. 박치기에서는 68혁명을 떠들지 않는다. 단지 일본에서 벌어지는 가두투쟁 속에서의 일과, 일상적인 이념 이야기와, 소수자들과 다수자들 간의 끊임없는 싸움, 각종 신종 가치관의 몰이해로 인한 행동양상의 코믹함 등등이 그려질 뿐이다. 하지만 혁명기라면 오히려 이러한 사태가 정상이 아닐지 싶다. 프리섹스의 의미가 길거리 섹스가 되었는지 뭔지 모르고, 고등학교에서 마오를 숭상하는 좌파 선생이 학생들을 선동하려 하지만 뭔가 이음새가 안 맞는, 그런 불협화음 적인 모습.

 

이 영화에서는 두 개의 집단의 대립이 극명하게 그려진다. 1929년(맞나?)의 광주학생운동을 패러디 한 것인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는 일본인들에게 분개한 재일 조선고교 청년들이 불같이 들고 일어나 일본인들을 구타하고 버스를 뒤집는 광경이 그 시작이다. 그리고 영화 내내 일본계 고등학교와 조선 고등학교는 대립한다. 우리는 물론 대체적으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으로 왔던 조선인들의 비극에 대해서 공감하고 있고, 그런 장면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받아들인다. 일본 사회 안에서 소수자는 많지만 일본국가의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형성된 수많은 소수자의 하나로 재일조선인은 분명히 존재하며, 이것은 일본 사회 내의 모순과 더불어서 역사적 문제의 하나이다. 그러한 부분을 다룬 것 만으로도 박치기를 보면서 나는 이 영화가 드물게 용기있는 영화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이 가운데에서 조선인 여학생인 경자(사와지리 에리카)에게 반한 코스케는 강개 라는 한국식의 이름을 받고, 한국어를 공부하고, 경자가 연주하던 북한의 노래인 [임진강]을 부르면서 조선인들과 가까워진다. 그 과정에서 즉각적인 민족적 적대는 드러나보이지 않는다. 코스케는 조선인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최선의 예의를 다 한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단의 일들은 코믹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다수자의 소수자에 대한 여유있는 배려 가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친구가 되기 위한 일상적인 노력이다. 가장 골이 멀어져 있는 두 개의 집단에 속해 있는 인물들 사이에서 그 누구라도 친구가 된다는 것은 보기에도 유쾌한 경험이다.  

 

그러나 그 폭력의 과정에서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코스케는 조선인들에게 일본의 역사의 무게를 책임져야 할 죄인이 된다. 이것은 친구가 되기 위해 겪어야 할 필연적인 사태이다. 화해라는 것은 과거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성립되지 않으며 그 화해를 통해서만이 친구는 친구가 될 수 있다. 영화는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일들에서 일본의 책임을 직설적으로 이야기한다. 제국주의 국가로서 일본이 저질렀던 만행에 대해서 코스케는 그 책임을 회피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 자신이 직접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그 근미래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로써의 책임이다. 임진강으로 나뉘어진 남과 북을 넘어서, 강으로 나뉘어져 있는 수많은 나눔을 만들어 낸 폭력에 대한 책임감이다.

 

바로 그 시점에서 임진강은 단지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하기 위한 노래가 아니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부르는 임진강은 세레나데 일 수도 있지만 수많은 나눔과, 폭력과, 역사적인 비극에 대한 코스케의 외침이다. 그 순간 코스케는 일본에서는 조선인이고, 남성과 여성의 비를 들자면 여성인, 비주류의 인물이 된다. (실질적으로도 코스케는 일본 사회에서 금지되어 있는 노래를 부름으로 해서 주류의 금기를 깨뜨린 비주류의 인물로 등장한다) 그리고 코스케는 다시 한 번 그 과거의 벽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조선인인 경자의 사랑을 얻고, 조선인들에 대해 화해를 요청하고, 다시 한 번 친구가 될 것을 노래하는 것이다.

 

일부러 일본인임이 분명한 배우들이 어색하나마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연기하는 것도, 단순한 리얼리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소통의 예의를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와 소통할 대 예의를 갖추는 방식은 그 상대방의 방식에 맞춰가려는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색하나마 그 노력은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싶다. 적어도 영화는 모든 것이 허상이되,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진실되기 때문이다.

 

박치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영화다. 한국인들은 일본 사회 안에서의 자기 성찰을 제대로 경험한 바가 없다. 일본 사회 내부에서의 역사적 자기 성찰과 소수자적 문제제기를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다면 맹목적인 우익적 민족주의의 열풍에 빠져서 쪽빠리들 다 죽으라는 식의 생각없는 증오를 과연 할 수 있을까. 바로 그래서, 제대하고 나서도 한 번 더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 이 영화일 듯 하고, 많은 사람들이 박치기를 보기를 원한다.

 

:::추신:::

 

나는 사와지리 에리카씨의 팬클럽에 가입할 수 있다면 가입하기로 마음을 정해버렸다. 하. 하. 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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