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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6일 대전, 그리고

1. 부끄러운 것 사실은 고백할 것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열사라는 말이 그렇게 이상하지 않게 느껴졌다는 것을. 학생운동부터 해서 활동을 하면서 여러 사람의 죽음을 보아왔다. 그 죽음의 당시에 내가 참석한 집회에서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질렀던 노동자도 있었고, 그 이외에도 여러 열사들이 계속 생겨났다. 처음에 정말 울기도 하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하면서 분노해서 정말 최선을 다해서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외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여 노동조합의 간부로서 일하고 있다. 우리 현장에서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활동가라고 자부하지만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보다 보니 내 스스로 무감각해진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번에 대전에서, 운수노조 화물연대의 박종태 조합원이 스스로의 목을 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사실 무덤덤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활동가로서의 의무감인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속으로 "저 대한통운 개새끼들" 이라는 생각과, 박터지게 싸워야 겠다는 생각과, 아주 이성적으로 화물연대 탄압에 맞서서 함께 연대해서 싸워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가슴이 들끓지는 않았다. 조합원들에게 이 투쟁에 가야 한다고 설득하고, 대전에 함께 할 동지를 조직하면서도 사실 그런 절박함이 들끓지는 않았다는 것을 고백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고 이제까지 활동해 왔는데, 내 자신 안에서의 실천의 진정성에 대해서 갑자기 다시 한번 생각했고, 열사 투쟁을 그저 "당연히 해야 하는 투쟁" 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럽다. 이런 식으로 사람이 죽는 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다. 열사 투쟁은 물론 "당연히 해야 하는 것" 이지만 "항상 있었던 일인 것처럼 당연한" 투쟁은 아니다. 그래서 고인의 죽음에 대해서 더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고 더 생각하고 더 열심히 함께 하기 위해서, 항상 살아있기 위해서 고민해야 한다. 2. 5월 16일 15시 대전 그렇게 조직한 조합원들과 함께 대전에 내려가서 전국노동자대회를 참가했다. 박종태 열사는 대전의 대한통운 앞에서 목을 매었고, 그래서 대전에서 열사 투쟁을 일단 진행한다. 열사의 부인인 하수진씨가 연단에 올라왔다. 박종태 열사는 가족들에게 "벚꽃이 지기 전에, 문제를 해결하고 아이들과 함께 놀러가자" 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러나 벚꽃은 지고 아카시아 꽃이 피는 지금,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열사는 차가운 시신이 되었다. 하수진 씨는 "이제 어떤 꽃이 피더라도 그 꽃이 원망스러울 것 같다" 라고 말했다. "자신의 남편이 사랑했던 여러 동지들을 믿을 수 있도록 해 달라" 라고 말했다. 마지막 말에서 눈물이 났다. 사람이 죽었는데 아직도 조용하다. 여러 동지들을 믿을 수 있으려면 이 싸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 한다. 사람을 죽여놓고 자기와는 상관없다고 뻔뻔스럽게 이야기하는 저 대한통운과 금호 자본의 자본가를 쇠창살에 처넣어야 한다. 분명히 노동자임에도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화물 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생존권이 박탈된 노동자들의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적어도 하수진 씨가 동지들을 믿으려면 이 정도는 해 줘야 한다. 그래야 죽음으로 호소한 박종태 동지에게 부끄럽지 않다. 그러나 스스로 노동자임에도 "민주노총 개새끼" 라고 떠드는 사람이 넘쳐나는 지금. 노동자들을 초대한 적이 없다고 떠들면서 자신들의 추태를 서로 감추려고 하는 정치권같은 대학교 학생회가 꼴에 학생 대표자라고 설쳐대는 지금. 세상을 바꾸자고 하는 사람들이 당당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박종태 열사의 죽음을 알려내지도, 그것을 위해서 자기 온 몸 바쳐서 조직하고 투쟁하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지금 바로 그래서 하수진 씨가 말하는 "믿을 수 있게 해달라" 라는 말이 모든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3. 5월 16일 21시 대전 집회가 끝나고 우리는 행진을 시작했다. 화물연대의 거의 전 조합원들은 분노에 차서 대나무 막대기를 들고 최선두에 섰다. "대한 통운 앞으로 가자" 라고 외치면서 행진을 했지만 경찰들은 막아섰다. 화물연대 조합원들은 계속 앞으로 나갔고, 경찰들은 자신들과 함께 일하던 동지가 죽었다는 사실에 분노한 노동자들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21시 경, 오늘의 투쟁을 정리하고 내일 다시 싸우기 위해서 항의 집회를 마무리 할 때, 경찰의 공격이 들어왔다. 한 번 집회에 500여명이 연행되었다. 개같이 두들겨 맞으면서 사람들은 끌려갔다. 방패로 찍혀서 뼈가 부러지고, 피를 철철 흘리면서 사람들이 끌려갔다. 함께 했던 동지들이 그렇게 다치고, 빼앗기면서 끌려갔다. 나와 함께 경찰과 드잡이질 하던 동지도 그렇게 끌려갔다. 나는 다행히 운좋게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지만, 우리 공공노조와 운수노조의 조합원들은 내 눈 앞에서 그렇게 처참하게 끌려갔다. 4. 눈물 그렇게 가까스로 빠져나와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대전 중앙 병원으로 갔다. 거기에는 박종태 열사의 유서가 대자보로 붙어 있었다. 하수진 여사의 편지도 붙어 있었다. 유서를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갑자기 눈물이 나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겠다고 할 때 느꼈던 절망은 도대체 얼마나 큰 것인가. 그 사람은 얼마나 자신의 가족에게 미안했을 것인가. 얼마나 눈에 밟히는 것이, 눈에 밟히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인가. 얼마나 한이 사무쳐서 대한 통운 건물 앞에서, 똑바로 쳐다보고 그렇게 목을 매었는가. "죄인처럼 고개 숙이고 있지 말고, 일어서서 싸워달라" 라고 말했던 하수진 씨의 말이 갑자기 귀에 멍멍했지만. 그 순간은 너무 죄인같이 느껴져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박종태 열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 죽음을 만든 이들은 바로 대한통운과 금호 자본이다. 그러나 그 죽음을 만든 이들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실은 그렇게 연대하지 못한 사람들, 세상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온 사람들, 이런 빌어먹을 세상의 구조에 그저 순응하며 살아왔던 노동자와 학생들 시민들 그 모든 이들이 박종태를 죽게 만든 사람들이다. 사람이 죽고 나서야 연대의 이름으로 함께 하자고 이 자리에 선 우리를 용서해주십시오. 노동가수 지민주 씨가 박종태 열사가 즐겨 불렀다던 "민들레처럼" 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그렇게 말했다. 그 동지도 노래 부르면서 울고 있었다. 5. 약속 대학교 학생운동을 할 때에도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그런 짓을 왜 하냐고 물었다. 나는 내 자신에게 부끄럽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내가 이런 비참한 현실을 알았으면서도 그대로 방관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고 말했고, 내가 이제까지 함께 싸우자고 말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끄러워서라도 나는 운동을 그만둘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 활동을 하다가 치르게 될 대가가 무섭지 않냐고도 사람들은 물었다. 건대 쯤 나오면 최소한 중소기업이건 뭐건 취직은 할 수도 있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돈도 벌고 적당히 살수도 있지 않냐, 아니면 노력을 하면 좀 더 편하고 좀 더 인정받는 일을 하면서 살 수도 있지 않냐고 말했다. 나는 무섭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편안하게 살아보고 싶기도 하다고 이야기 했었다. 노동운동을 시작할 때에도 사실은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던, 나는 사실 그냥 소시민에 가까운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어찌 되었건 남들과는 조금은 다른, 노동운동가로서의 길을 선택했다. 내 자신에게 가장 떳떳하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 어쨌든 나는 길을 걷고 있고. 박종태 열사의 한을 푸는 투쟁 만이 아니라 운동이라는 이 길을 계속 꾸준히,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손을 맞잡고 걸어갈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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