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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 에 대해서 쓴 어떤 평론을 퍼오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22804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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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를 후경으로 삼은 멜로드라마'라고 단정하는 것은 이번 영화제작진은 물론 이미 시간과 돈을 들여서 영화관을 찾은 500만 관객을 모욕하는 것이다." 이 말에서 유인택의 수준이 심형래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5월은 혁명의 달이다. 1980년의 광주가 있고, 1968년의 프랑스가 있다. 이 글이 담겨있을 책의 표지에는 9라는 숫자가 분명히 써있지만 당신이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가 개봉했다는 사실과 이것이 어떤 내용의 영화인지까지 알고 있다면 내가 왜 5월의 얘기를 꺼내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화려한 휴가>는, 김지미가 씨네21에서 지적한 것처럼, 신애(이요원 扮)의 목소리로 바로 그 1980년 5월의 광주를 기억하라는 부탁을 하고 있다. 그 때는 1980년이고, 지금은 2007년이다. 나를 포함하여 꽤 많은 관객의 주민등록번호가 8로 시작한다. 이 물음은 이제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아직 광주를 기억하고 있느냐는 질문으로. 이 질문에 나는 다시 되묻는다. 당신은 왜 지금 그곳에서 묻고 계십니까.
 
영화는 전형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생리대 광고에 나오는 여대생들 마냥 세상 좋다고 웃어대는 군상. (고백하자면, 나는 들이대는 연애질을 보기가 거북했다. 결코 내가 애인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폭력적인 연애가 싫어서 그랬다.)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공수놈들. 희생이 따르고 영웅은 조력자를 만나 카카로트처럼 각성해서 재난을 극복할 뻔 한다. 도청에 남느냐 마느냐를 두고 고민할 때 극장 안에 웃음이 터져 나올만큼 관객의 감정선도 잡아내지 못한다. 감독의 연기지도 수준 역시 평균을 넘지 못한다.
 
이 영화는 광주를 기억하라고 채근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는 감히 광주를 바로보지 못한다. 영화는 광주를 눈앞에 들이밀지만, 이것은 과연 그 해 5월의 광주인가?
 

영화평을 청탁받을 때, 쿨하고 위트있는 문체로 써달라는 부탁이 덤으로 붙었다. 하지만 <화려한 휴가>를 다루기로 결정한 순간 그 부탁은 결코 들어줄 수 없는 것이다. 우스운 일은 정작 이 영화가 나를 대신해서 부탁을 들어줬다는 거다. 우습지만 웃을 수 없는 일이다. 마치 도청에서 고향을 찾는 인봉(박철민扮)과 용대(박원상扮)를 보면서도 웃지 못하듯이.


나는 깨달았다. 영화평을 쓰면서도 막상 이 영화에 대해서 별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노력을 기울여도 무위에 그친다는 것, 이 무상함은 5월 광주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시도할 때마다 자주 맞닥뜨린다는 것, 그때마다 깨닫는 사실은 오히려 어떤 사태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경우 - 예를 들어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도 들을 수 있었던 전라도 새끼들은 전부 빨갱이라는 자신만만한 확신 - 가 기실 아무런 정보를 갖지 못한 경우라는 것, 이런 의미에서는 이 사회에 광주는 계속해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이런 의미에서 광주는 영웅설화를 넘어서 8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슬래셔무비의 전형을 따른다. 피해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살인마가 있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분명한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믿지 않는다. 결정적인 증거, 즉 살인마가 눈앞에 도래하는 순간 피해자는 비로소 그 존재를 믿는다. 물론 이미 때는 너무 늦었지만.
 
영화를 신파라 한다. 맞는 말이다. 영화의 총성이 울릴 때마다 관객의 흐느끼는 소리가 극장을 채운다. 건전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슬픔과 분노를 참을 수 없다. 문제는 이 슬픔과 분노가 무엇을 향하냐다. 전장군과 그날의 그를 있게 한 박통은 영화의 첫 부분에 보이는 서너 줄의 자막에서 찾을 수 있다. 역사는 없고 사태만이 있다. 영화는 그토록 광주를 붙잡아서 관객에게 보이려하지만, 그렇기에 광주는 눈앞에서 사라진다. 살아남으려는 시민과 살인이 천성인 듯한 공수놈의 대립에서 구체적인 역사는 사라진다. 모두가 고통 받고, 선악은 너무나 분명하다. 영화의 추상적이면서도 분명한 대립구도 속에서 가해자는 저 너머로 사라지고 그저 피해자만 눈앞에서 신음한다. 영화제작진은 지식인을 배제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구성한 그 해 5월의 광주를 그리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과물은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평범한 학살이야기일 뿐이다.
 
전장군에게 총애를 받았던 흥수(안성기扮)는 박정희 밑에서 대령까지 달은 인간이다. 감독은 실화에 근거를 뒀다고 변명한다. 그런데 영화에서 항상 중요한 것은 왜 그것을 선택했느냐는 질문이다. 왜 그 쇼트가 그 순간에 그렇게 배열됐나. 왜 그 등장인물은 그런 행동을 취해야만 했는가. 도대체 왜 흥수인가. 왜 신애인가. 왜 민우(김상경扮)인가. 왜 진우(이준기扮)인가. 때로는 사실이 진실을 덮을 수도 있다.
 
나는 광주가 이 사회에 재현되면 아무도 나서지 않으리라는 주장에 반대한다. 그 때 그 곳에서 광주시청에 남는 쪽을 선택한 사람들이 남달리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는 민주투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러나 그 평범한 사람들을 투사로 만드는 역사적 맥락이 있다는 것, 이러한 맥락보다 그 사람들의 면면에 주목하며 영웅화하는 행위는 같은 논리로 모든 책임을 가해자 몇몇의 특수한 행위에 국한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 말을 뒤집으면 자신이 어떤 사회적 맥락에 놓였는지 감지하지 못하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발버둥만 칠뿐이라는 말이 되기도 하겠다. 광주 시민들은 공수부대가 왔을 때 희생당한 영웅이 되었지만, 그 해 5월이 되기 전부터 영웅이었다면 광주에 공수부대가 왔을까 하는 우문이기도 하겠다.
 
항상 때늦은 후회만 해야 한다면 우리는 굳이 영화를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영화의 의미가 감독이 지겹게 말하는 그 해 광주에 대해서 이 시대에 사는 한국인이 널리 알고, 그리하여 역사를 다양한 관점에서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그친다면 광주에 대해서 누구나 떠들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셈이고, 이것이 확장되면 가해자는 사라지고 피해자만 남는 전형적인 오류만 범할 뿐이다. 이것은 정말 개 같은 짓이다. 요는 이 사회에서의 광주의 재현 앞에서 우리 역시 때늦은 후회를 언제까지 계속해야만 하느냐 여부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된 인질 23명 중 2명이 죽었다. 21명의 소식은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남북정상회담에 밀려났다. 마치 그 자신이 이명박의 숨겨진 재산과 박근혜의 숨겨진 자식을 밀어냈듯이. 소말리아와 나이지리아에서 납치된 한국인들이 잊혀가듯이. 언론의 절대권력. 잊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 내가 일하는 곳에서 걸음으로 10분 거리에 뉴코아 강남점이 있다. 그리고 내 앞에는 뉴코아의 우유가 썩을까 걱정하면서 파업하는 년들 자식까지 평생 굶어죽도록 취직시키지 못하게 만들어야 된다는 인간이 널렸다. 이것들의 자식은 강남점에서 다시 10분 거리에 있는 잔디가 깔린 학교에서 운동하며 자란다.

 

"죄의식의 소비." 130억 원의 제작비. 배급사는 CJ엔터테이먼트. 이 악다구니 속에서. "다시 '5월'과 '광주'가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유인택의 말이다. 부활한 5월의 광주는 그저 좀비인가. 답은 유인택이 하고 있다. " <꽃잎>... 결과는 관객으로부터 외면받았고 투자자는 큰 손실을 입었으며, 특히 광주는 실망했다." 이 영화를 통해 단언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실. 이제 광주마저 상품으로 내놓아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자본의 자신감. 분명 이 영화는 여전히 봐야만하는 영화지만,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이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옷을 사고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이 자본의 자신감을 다시 한 번 굳게 지지한다면, 이 영화는 모욕받아야만 한다.
 
내 어머니는 광주가 고향이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 손을 꽉 잡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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