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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 2010/03/28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

from 읽기 2010/03/28 00:55

世事如烟

 

세 번째로 읽은 위화의 소설..

어젯밤에 읽고 잤는데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다 ;ㅁ;  지금도 늦은 밤이라 그런지 살짝 무섭다.

 

- 그 당시 사람들은 툭하면 나에게 물었다. "왜 이런 작품을 쓰는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나에게 질문하곤 했다. "왜 이렇게 죽음과 폭력에 대해서 쓰는 것인가?"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나는 그들보다 아는 게 결코 많지 않았다. 이는 작가가 속시원히 해명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그들에게 우리 사는 곳에 이런 것들이 없는지 한번 찾아보라고 이야기 한 적은 있다.  왜 이렇게 많은 죽음과 폭력적인 상황들이 삶에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서문을 읽으며 약간 쫄긴 했으나 그 죽음이 이런 죽음인지는 몰랐지 ;

<인생>이나 <가랑비 속의 외침>에서도 어이없고 무차별적인 죽음들이 많이 나오긴 했지만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 속의 죽음은 그보다 훨씬 진하고 선명하다. 무서비..ㅠㅠ 

게다가 중편들이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 집중할 수밖에 없기도 해서 결국 울면서 다 봤다.

 

- 어떤 현실

 

산강과 산봉 형제, 그들의 아내, 그들의 어린 자식, 노모가 한 집에서 살고 있다.

산강의 아들 피피가 산봉의 아들을 안고 있다 떨어뜨려 죽이게 되고 산봉은 피피를, 산강은 산봉을 죽인다. 

결국 산강은 사형되는데 산봉의 아내가 그의 시신을 의사들에게 넘겨 그의 고환은 다른 사람 몸에 이식되어 자식을 본다. 노모는 늙어 죽는다. (여기까지 쓰는 것도 너무 힘들어 -_- )

피피는 가책이 없다.. 폭력이 즐겁다는 것을 느낀다. 산강과 산봉 형제에겐 용서가 없다. 이성적인 판단도 없다. 노모는 모든 것에 무관심하다.. 오직 버거운 자기의 몸과 죽음에만 관심이 있다.

산봉의 아내는 자의식이 없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그러나 잔인한 복수에 대해서는 행동력이 있다. 산강의 아내는 복수와 명예를 위해서라면 대범해질 수 있는 오기가 있다.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다. 어떤 현실은 이러한 것이다.

모든 것은 한 가지 우연한 사고에서 시작됐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떨어진 아기를 보고 나서도 모른척한 할머니, 뭔가 잘못됐음을 느끼지만 더이상 생각하기를 멈추는 피피, 죽은 아이에 대한 동정심 같은 건 없는 산강 부부...

어쩌면 산봉이 그 상황에서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상황을 결말짓는다는것이 더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모두들 표현은 안하지만 알고 있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애정 없음과 무한한 자기 본위의 이기심, 증오 같은 것들을 ..

 

어쨌든 산봉의 대처 방식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두려웠기 때문에 피피를 죽였고 그 때문에 또 스스로 두려워지는 악순환. 그리고 또 한명의 아이를 잃은 아버지 산강은 (굳이 교활한) 살인 계획을 세운다. 약해질대로 약해진 산봉을 개로 핥아 죽이는 -_- ; 

산강 또한 산봉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다. 살인 이후에 따라오는 죄책감과 두려움..

그들은 정신이 없고, 자기가 뭘 했는지도 잘 모르며,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왜 그래야 하는지, 그럴 수 밖에 없는건지 등등의 질문은 무의미해 보인다.

 

 

* 여기까지 쓰고 바빠서 손놓고 있다가 책도 반납해버림 .. ㅜㅜ

 

 

- 강가에서 일어난 일

 

추리소설 형식. 어느 혼자 사는 할머니가 강가에서 살해당하고 머리만 보이게 파묻혀진 것이 발견된다.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의 행보를 따라 단서와 용의자들이 드러나는데

주 용의자는 할머니가 거둬 먹여주던 미친 사람과 근처 공장의 젊은 노동자, 히끼꼬모리같은 중년의 남자 셋이다. 여기서 미친 사람은 할머니와 남녀관계였던 것으로 암시된다..(오독인가; )

결국 할머니의 재산이 도둑맞지 않았다는 사실과 용의자들의 진술, 그의 집에서 발견된 피묻은 연장 등을 종합해 형사는 미친 사람이 범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미친 사람은 잠시 끌려갔다 오지만 (당국의 사정때문에) 다시 풀려나고 몇 년의 시간차를 두고 비슷한 살인 사건이 두 번 더 발생한다. 

 

미친 사람이 범인이라는 확실한 단서는 없지만 아니라는 단서도 없다. 

어쨌든 소설에서 이런 상황을 그리는 경우 대부분 미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죄를 뒤집어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는 끝까지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단서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아무튼 세번째 살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의 희생자는 할머니의 시체를 가장 먼저 발견했던 소년이었다.

당시 소년과 몇 번 만나고 대화를 나눴던 형사는 소년의 죽음을 본 후 미친 사람을 쏘아 죽인다.

담담하게, 아무런 가책을 발견할 수 없는 미친 사람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보이며..

형사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법으로는 그를 어쩔 수 없었다고 상사에게 보고한다.

여기서 반전에 가까운 마지막 장면이 등장하는데, 형사의 상사와 부인은 그를 정신병자로 가장시켜 형을 줄이려고 한다.

형사도 처음엔 거부하지만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의사 앞에서 헛소리를 몇 마디 지껄인 그 순간 의사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형사를 정신병자로 진단한다. 오마이갓.

뭔가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첫페이지로 돌아가 할머니가 죽던 날의 정황을 살펴봤다. 그 부분은 작가가 독자에게만 알려주는 팩트-이니까...

분명히 세 명의 용의자 중에 다른 두 명은 아니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죽은 소년 같은 경우는 공장의 젊은 노동자를 증언했으므로 그에게 원한을 샀다고 볼 수도 있다. 형사가 무심코 소년의 아버지가 사건 이후 소년을 강가에 못가도록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강가에 갔다가 우연히 아무 목적도 계획도 없이 미친 사람의 눈에 띄어서 살해당했다고 보기는 이상한데.. 게다가 그날 할머니의 거위들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강가에 나와 있었다. 계획적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하지만 다른 두 명의 용의자의 진술과 첫 페이지의 팩트는 다 맞아 떨어진다.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봤고, 시체를 보고 놀랐다는 것.

 

그렇다면 미친 사람이 계획적으로 살인을 했다, 혹은 모든 것이 우연의 일치로 계획적인 것 처럼 보이지만 그저 미친 사람의 우발적인 살인이었다 둘 중의 하나라는 것인지..

뭘 믿고 뭘 의심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결론을 알려주지 않는 추리소설... 신뢰가 가지 않는 형사... 이건 뭐 -_- ;; 찜찜해..

실컷 추리소설의 컨벤션을 따라서 단서를 풀어가는 성취감을 주다가 막판에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아 답답해 ;;

오호..그럼 이것이 의도한 바요? 위화 양반 -_- ;;

간만에 글을 읽고..."대체 이건 왜 쓴거야 ;ㅁ; "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 옛 사랑 이야기

 

어렸을 때 좋아하던 구운몽, 금오신화 류의 이야기..

구운몽은 양소유가(이름도 기억나;;) 인생무상을 깨닫는 결말 말고, 이러쿵 저러쿵해서 팔선녀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는 그 과정을 즐겁게 봤던 것 같다..

금오신화는 귀신과의 하룻밤이라는 오싹한 에로에로가 즐거웠던걸까;

아무튼 두 가지를 대충 섞은 듯한 이야기였는데..

지지리 가난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머물게 된 마을에서 예쁜 부잣집 아가씨를 만나게 되고 하룻밤 비를 그으며 눈이 맞는다.

이후 과거에는 떨어지고 돌아와 보니 부잣집은 허물어져있고 아가씨는 간데 없다.

두번째 과거를 보러 가는 길, 영화롭던 마을은 기근으로 초토화되어있고 시체가 즐비, 인육을 파는 모습까지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보고싶어하던 아가씨는 인육 장사치들한테 한쪽 다리를 잘린채 모습을 드러내고

선비는 직접 가슴에 칼을 꽂아 아가씨의 숨을 끊고 묻어준다.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에 고향으로 돌아와 무덤지기나 하며 늙어가던 선비는 어느 명절, 아가씨의 무덤을 찾고 그 옆에 집을 지으며 살 작정을 한다...

그날 밤 선비에게 나타난 아가씨는 귀신이라기엔 너무 생생하게 하룻밤을 보내고 사라지는데

"아가씨가 부활하려나보다" 하는 생각에 무덤을 열어본 선비는 산 사람처럼 생기 있는 육신을 보고 기대에 부풀지만, 밤이 되어 다시 찾아온 아가씨는

"환생하려고 했는데 네가 열어봐서 다 망했다"며 영영 귀신이 되어 떠나버린다.

끝은 늘 그렇듯이 "그 후로 그 선비를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더라..." 류의 엔딩이었던 것 같다.

 

기근이 든 마을의 역겨운 묘사와 선비의 기억속의 아름다웠던 마을의 모습과 로맨스가 뒤섞여 토하고 싶은 느낌과 아련한 느낌을 번갈아가면서 느낄 수 있다.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던 것은 인육 시장에서의 장면인데, 인육 장사치들이 사람을 죽이지 않고 팔 다리를 끊는 것은 고기의 신선함을 위해서이다.

굶어죽는 마당에 인육을 사고 팔고 먹는다지만 그 순간에도 신선함을 따지는 역겨움..

"딸을 먼저 죽여주세요"라고 주문한 아낙의 비정한 한마디가 실은 먼저 죽을 수 있게 해주고 싶었던 마음이라는 것, 맨정신에 팔이 잘려나가는 아이의 가슴에 칼을 꽂는 극한 상황에서의 모성..

아내와 딸을 장사치들에게 넘기는 뻔뻔한 아버지와 죽을 줄 알면서도 아무 반항도 못하고 따라온 모녀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웩.. 쓰다보니 또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쨌든 책 뒷부분에 실린 작가와의 인터뷰에는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자기에게 큰 화두라는 식의 말이 나왔던 것 같다. 확실히 폭이 넓긴 하다. 심하게.. 그리고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응시하게 되긴 한다.

위화의 소설을 보다보면 내 인생은 굴곡도 없었다는 생각도 든다....크헐.....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소설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이쪽이 훨씬..더 쎈 거 같다;

 

 

-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

 

보고 나서 며칠간 나를 공포에 떨게 한 이야기.. 밤에 혼자 잘 땐 어찌나 생각나던지 ;ㅁ;

어느 마을에서 일어난 몇가지 사건들을 조망한다. 1,2,3,4,5,6,7 등의 인물과 점쟁이 가족, 장님, 회색옷을 입은 여자, 산파, 트럭 기사와 같은 사람들이 나오고,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으로 이야기가 옮겨간다.

옮겨갈 때는 대부분 죽음으로 그 사람의 이야기가 마무리지어진다.

조그만 동네 - 작은지 큰지 알 수는 없지만- 에서 몇 사람이 죽어나가고, 사람들은 행여나 싶어 점쟁이를 찾아가지만, 사실 그렇게 동네에 귀신이 꼬이고 사람들 혼이 빠지는 것은 탐욕스런 점쟁이의 탓도 크다.

자신의 젊음을 위해서 어린 소녀들을 꼬박꼬박 죽여나갔으니 그 시체 냄새가 안날리가 없다.

물론 점쟁이만 탐욕스러운 것은 아니다. 죽음에 대처하는 산 사람들의 모습은 그저 이기적일 뿐이다.

 

제일 무서웠던 건 6인가가 낚시터에서 발이 없는 귀신을 보는 장면이었고

제일 소름끼쳤던 건 산파가 한밤중 애를 받으러 갔다가 국수를 얻어먹는데 실은 공동묘지에 가서 경단을 주워먹었던 것..

제일 어이가 없었던 건 교활한 점쟁이에게 딸의 몸을 맡긴 4의 아버지..

자신의 수명을 아버지에게 빼앗기고 일찍 죽은 점쟁이의 아들이나, 사모하는 4를 따라 강물로 빠져드는 장님이나... 약한 사람들은 쉽게 다치고 죽는다.

 

작가 인터뷰에 보면 질문하는 사람이 마르케스의 환상적 리얼리즘 이야기를 한다.. 비슷하다고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이었던 것 같은데, 위화의 대답은 "무한한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을 자기의 임무라고 생각한다나 뭐 그런 대답이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가랑비 속의 외침>을 보면서 <백년동안의 고독>을 연상하기도 했었다. 한 집안의 이야기를 시공을 넘나들며 풀어나가는데다가 인물들의 삶이 간결하지만 너무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작가 인터뷰의 저 부분을 읽으면서는 영화 <마지막 밥상>이 떠오르기도 했다.  뭔가 만들어진 것 같은 시공간적 배경 때문이기도 하고, 주인공 각각의 이야기가 딴 나라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는 한 마을, 한 가족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점.. 서로는 그것을 모른다는 점 같은 것들이 비슷하다. 무당이 나오는 음산한 분위기도 ;;;

 

아무튼 위화 소설은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른 것 같다. 물론 잔혹함이나 인간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 들어가 있지만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는 정말 읽기 힘든 편이었다.

저 세편의 책이 쓰여진 순서는 내가 읽은 순서와 반대라는 것이 어쩐지 이해가 간다..

한 살이라도 더 먹을수록 힘든 책을 살짝 피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ㅎㅎ 지금의 나는 <가랑비 속의 외침>정도가 적당한 것 같다..

그래도 자꾸 찾게되는 것은 딱지를 자꾸 긁고 싶은 그런 욕망??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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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8 00:55 2010/03/28 0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