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에 관한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라픽 샤미의 <한줌의 별빛>을 보고 나서였다.

<아주르와 아스마르>를 봤을 때도 판타지라는 걸 알면서도 무척 궁금증이 생기기도 했었다.

<라피끄..>를 읽고 나니 그동안 띄엄띄엄 접해왔던 팔레스타인에 대한 장면들이 퍼즐 맞추듯 끼워 맞춰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나의 아이들> <내가 정말 미소짓고 있었을까>와 같은 다큐멘터리, 촘스키의 책에서 읽을 수 있었던 내용들... 그 때는 어디가 어디에 붙어있는 지도 모르고 그냥 읽었더랬지;

 

책이 쉽게 쓰여 있어서 어렵지 않았고 핵심적인 사안별로 챕터가 나뉘어 있어서 시대나 사건에 대한 설명은 오히려 반복적으로 나와 여러 각도에서 곱씹어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책읽기를 여러번 중단했는데 아무리 글자만 읽는거지만 내용이 좀 힘들게 느껴졌다.

말도 안되는 이스라엘의 폭력과 얄미운 미국의 행동거지를 보는 게 너무 화가났고 무엇보다 동시대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답답해져왔다.

2001년,  2005년, 2007년과 같은 숫자들을 보면 마음이 무거웠다.

 

유대인에 대한 동정적인 이미지는 나 또한 갖고 있었고 이스라엘 성지 순례에 대해 종교적이지 않은 의미로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이스라엘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군인들이 주인공이었고 결국 몇몇이 죽는데 생각해보면 상대편은 팔레스타인 사람이었을테고.... 그 장면에서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쨌든 주인공 입장에 동조하며 영화를 봤을 것 같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문제에 대해서 - 정확히 말하면 이스라엘의 문제지만; 막연하게 알고 있던 건 대게 종교적인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는데 <라피끄..>를 읽고 나니 그게 아니란 것을 알게됐다.

온전히 종교의 문제도, 온전히 민족주의의 문제도 아니고 힘에 의한 점령, 식민주의, 인종주의, 폭력성, 타인에 대한 두려움, 무관심, 오랜 세월을 지속해온 무기력함 같은 것들이 섞여

말도 안되는 상황을 계속해서 연출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무척 궁금했는데 - 숫자로 표시된 '찬성' '반대'가 아니라 실제 감정적으로 어떨지 궁금했다...

우연히 다큐멘터리 제목을 검색하다 블로그 글 을 보게 되었다. 키부츠에 머물면서 팔레스타인 공습을 거부한 이스라엘 공군에 관해 이스라엘 청년과 나눈 대화(...라기보다 이스라엘 청년의 일방적인 말걸기)였는데 '민족을 위협하는 위험한 발상' 이라는 '익숙한' 의견을 이스라엘 청년으로부터 듣게 된다.

책 서문에서도 팔레스타인과 한국의 상황은 비슷한 점이 많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남한의 모습은 이스라엘과 비슷한 면도 많을 거란 생각이 들었었다. 전쟁의 위험, 테러 운운하며 정치에 써먹는 거나 그게 뼛속 깊이 각인 되어있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

남한이 북한을 공습해도 6-70%가 찬성하는 그런 날이 올까... 올지도.. i _ i

뭐 이미 이런 저런 파병을 했기도 했고.... 

이런 식으로 '팔레스타인과 나'는 몇가지로 연결된다..우울하군;

라피끄 - 연대라는 이름을 연결된다면 더 좋겠지만

지금은 조금씩 머릿속의 퍼즐 조각들을 더 맞춰 나가는 것 부터..ㅎㅎ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4/22 21:37 2010/04/22 21:37
Tag //

책들을 월요일까지 반납해야 하니 어서 정리를 마쳐야 하는데

으으... 귀찮다 -_- ;

<코끼리를 쏘다>를 가지고 긴 포스팅을 하고 나니 좀 질리나보다 ;;

아 술땡겨..블로그 말고 음주가 하고 싶어..ㅠㅠ

요즘 한창 열올리고 있는 신데렐라 언니에 나오는 참살이 탁주도 그렇고

블로그 메인에 진달래 띄운 탁배기 사진도 날 더욱 힘들게 한다..윽.

 

암튼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조지 오웰 자전소설이라고 표지에 적혀있는데

뒷부분에 실린 서평에 보면 모든 것을 실제 있었던 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나온다...

그래서 자전 소설이라고 제목을 붙인걸까. 암튼 ..

말그대로 파리와 런던에서 밑바닥 생활을 했더 수기인데, 글을 쓰기 위해 일부러 그런 생활을 시작했다는 점은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시작한다.

파리의 어느 여인숙의 아침 풍경 - 쌍욕이 오가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구경하는 사람들, 왁자한 소란, 지저분한 풍경 같은 것들로 글은 시작한다.

그리고 비슷한 풍경의 반복이다.

파리에서는 이 여인숙에서 저 여인숙으로, 영국에서는 이 구빈원에서 저 구빈원으로 정처없이 돌면서 옷을 저당잡히거나 허드렛 일을 하거나, 가끔은 구걸 비슷하게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이야기들이다.

조지 오웰은 자기 이름을 숨기고 말투도 꾸며낸다. 물론 가끔은 신사 대접을 받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부랑자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한다.

 

지저분하고 배를 곯기 일쑤이고,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랜 실직 기간 때문에 몸과 마음이 무기력해져 한치 앞을 준비할 수 없는 사람들.. 조지 오웰 또한 불편한 잠을 자고 굶주리고 구걸하는 과정에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가 된다. 다만 그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기록해둘 따름이다. (실제로 집에 돈을 쌓아둔 부자도 아니고 타지에서 체험 글쓰기??를 하고 있으려면 진짜 돈이 없기도 했을 것이다;;)

 

파리에서 그는 영어 교습이 끊기자 접시 닦이 일을 시작하게 된다. 큰 호텔의 지하 주방에서 일하는 것과 빚쟁이 사장이 빚으로 만든 상류층을 겨냥한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것 두 가지가 나오는데

전쟁터나 다름없이 혼란스럽고 바쁘고 고된 일터에서 정신 없이 일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생활을 하는 것은 비슷하다. 그마저 일이 없으면 굶기 때문에 일을 하긴 하지만 한번도 일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가져볼 수는 없을 것 같은 상황이다.

 

그러다 런던에 있는 친구에게 일자리를 부탁하고 런던으로 넘어가는데 취직이 지연되면서 구빈원을 전전하게 된다. 파리에 있을 땐 영국을 그리워했지만 영국이라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재미가 없다'는 점에서 그는 다시 파리를 살짝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의 여정은 영국에서 정신 박약아를 돌보는 일에 취직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 장의 그의 말이 많은 것들을 정리해서 이야기 해주는데, 사실 수기의 긴긴 내용 중 이런 식의 '논평'이나 느낌을 디테일하게 이야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고 그저 묘사함에 그치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 부랑자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그것도 그리 길지는 않다. 하지만 그간의 묘사된 내용들을 읽다보면 그의 이렇다 저렇다 논평이 없더라도 그와 비슷한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내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난다. 변변찮은 이야기일 뿐이고 그저 여행 일기가 주는 흥밋거리쯤은 되었기를 바랄 따름이다. 혹시 무일푼이 되면 당신에게 이런 세계가 기다린다는 것 정도만은 말할 수 있겠다. 언젠가는 그 세계를 더 철저히 탐구하고 싶다. 우연한 만남이 아닌 허물없는 사이로서 마리오, 패디, 동냥아치 빌 같은 사람들을 알고 싶다. 접시닦이, 부랑인, 강변 둑길 노숙자의 영혼 속에는 정말로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이해하고 싶다. 현재로서는 가난의 언저리까지밖에는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돈에 쪼들리면서 확실히 배워둔 한두 가지는 짚어낼 수 있다. 나는 두 번 다시 모든 부랑인이 불량배 주정꾼이라고 생각하지 않겠고, 내가 1페니를 주면 걸인이 고마워하리라 기대하지 않겠으며, 실직한 사람들이 기력이 없다고 해서 놀라지도 않겠고, 구세군에는 기부하지 않을 것이며, 옷가지를 전당 잡히지도 않겠으며, 광고 전단지를 거절하지도 않겠고, 고급 음식점의 식사를 즐기지도 않으련다. 이것이 시작이다.

 

영국의 법은 부랑자들이 한 구빈원에서 하루 이상을 머물 수 없게한다. 때문에 부랑자들은 계속 이동을 해야만 하고, 그들에게는 음식이 남아서 버릴지언정 마가린과 빵, 홍차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이 방침이다. 연장이 없어서 목수일을 하지 못해 부랑자가 된 어떤 사람처럼 조금의 실질적인 도움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루하루 배급되는 빵과 홍차로만 살아가야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도 비일비재하다.

교회나 구빈원에서 나누어주는 식권은 식당 주인이 액수만큼의 식사를 내놓지 않는 방법으로 일정 금액을 떼어먹고, 여인숙은 좁은 공간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수용함으로써 큰 돈을 번다.

구빈원이나 구세군 호스텔은 흡연이나 도박, 음주 등을 금지하는 (호텔에서는 먹히지도 않을) 규칙을 가지고 있고 교도소와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전당포에서는 실제 물건의 값보다 터무니 없는 금액을 주고 물건을 받으며 그마저 불만을 표시하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은 더 가진 게 없어진다. 

모두가 천하게 여기는 부랑자들을 모두가 뜯어 먹고 있는 구조이다. 그리고 아무도 근본적인 변화, 실질적인 도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관리하고 아무 문제 없이 다룰 것인지만이 제도에 반영되는데 

더 웃긴 것은 그렇게 몸과 마음 모두가 무기력해진 부랑자들을 손쉽게 관리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무언가를 파괴하고 거칠게 굴거라는 선입견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조지 오웰은 마지막 장에 너무도 간단 명료하게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것이다. 빈곤의 문제는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해결 가능한 여지들이 너무 너무 명확하게 보이기 때문에..

 

물론 나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그 편견을 없앴다고 볼 수는 없지만 생각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전단지...;; 서울에 있을 땐 왜 그렇게 받기가 싫었는지 -_- ;;

중학교에 다니던 무렵 욕실이 방 밖에 따로 있던 집에 살 때, 학교 갔다 와서 욕실에 불이 켜져 있길래 언니인 줄 알고 문을 벌컥 열었더니 안에 낯선 아자씨가 목욕을 하고 있던 적이 있었다.

깜짝 놀라서 방안으로 뛰어들어와 문잠그고 한참을 기다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수건이라도 문고리에 걸어 놓을걸 그랬지 ;;

나도 놀랐었지만 그 아자씨의 휘둥그레졌던 눈이 아직도 생각난다..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봤던 브라질의 가라파라는 영화 첫부분에 보면 기아에 대한 두 가지 정의가 나온다. 하나는 먹지 못해 굶어죽는 기아, 하나는 목숨은 연명하지만 만성적인 영양부족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기아....

딱 죽지 않을만큼만-이라니 너무...... -_______-

가라파는 젖 대신 아이에게 먹이는 설탕물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흑백 화면에 오지게 길었던 테이크, 무표정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러다 설탕물을 먹던 어린 딸아이가 토하자 갑자기 북받쳐 오른 젊은 엄마는 울었다.

그게 영화에서 유일하게 누군가가 울었던 장면이었던 것 같다.

 

아, 그리고 과연 조지 오웰은 어쩌자고 이런 일을 시작했을까 하는 의문은 풀리지 않았는데..

괴짜라서? 글쟁이라서? 뭘까 싶었다...

뒤에 실린 서평에 보니 이 체험을 시작하기 전 1927년의 그의 글을 단서로 내놓고 있더라.

이것 참 조금은 의외였고 조금은 수긍이가는...

 

나는 속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엄청난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이 말이 과장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에 5년 동안 종사했다면 당신도 나처럼 느꼈을 것이다....

 나는 수면 아래로 잠수해버리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로 내려가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그들의 편에 서서 폭군들에 대항하고 싶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혼자서만 생각해내야 했던 탓으로 나는 억압에 대한 증오를 비상할 만큼 키워놓았다. 그 당시 나에게는 실패가 유일한 미덕이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발전을 꾀하려 한다는 일체의 의혹이나 심지어 일 년에 몇 백 파운드를 버는 수준의 '출세' 마저도 나에게는 정신적으로 추한 일이며 일종의 괴롭힘인 듯이 보였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중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식민지 경찰로 일했던 5년이다. 뭐 좀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저런 죄의식은 좀 ... 뭘 하는데 별로 도움은 안되잖아;

저런 마음을 먹고 들어갔는데도 용케 버틸 수 있었다니 참... 엄청 독한 사람이라서 그랬거나, 아니면 들어가서 뭔가가 달라졌거나 했던 게 아니었을까..

저 상태로 그렇게 빡센 곳에서 지내는 건 좀 불가능해 보여..ㅎㅎㅎ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4/17 21:47 2010/04/17 21:47

코끼리를 쏘다

from 읽기 2010/04/11 00:35

어제 저녁, 급히 나갈 일이 있어서 나가는 길에 못빌리고 왔던 책 네 권을 빌려왔다.

최승자 시집은 일단 빼고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빌렸는데

<코끼리를 쏘다>를 금방 다 봐버릴 것 같아서.. 보고 나면 또 입맛이 다셔질 것 같아서 조지 오웰님의 책이 한 권 더 필요했다..ㅋㅋ

 

<코끼리를 쏘다>는 1/4쯤 보다 두고 나왔었는데 계속 읽고 싶어서 약간 안달했었다..

어젯밤부터 오늘까지 해서 다봤다. 밑줄을 그으면서 봤더라면 꽤 많이 그었을텐데

밑줄 그으면서 보기엔 책장을 너무 빨리 넘기고 있었다..ㅎ

문장에 군더더기가 없고 메시지가 뚜렷해서 잘 읽히는 탓도 있었고

구빈원을 전전하던 수기부터 차 끓이는 방법까지 주제도 다양해서 질리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특유의 유머가 있는 것 같았다.

산문집을 통해 보게 된 조지오웰은 오만하면서 겸허한 사람같다는 느낌이었다.

괴팍하지만 마음은 뜨거운 노인네 같달까..ㅋㅋ 노인이 되기 전에 죽었지만...흐으..

 

 

1. 식민지에서 보낸 날들

버마에서 식민지 경찰로 일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식민지 경찰로서 갈등하고 자조감을 느꼈다 라는 식으로 드러내놓고 이야기하거나 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맛본 권력의 단맛과 쓴맛을 솔직하게 이야기 하는데, 어떤 건 보면서 불편할 정도로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 교수형 : 자신이 동행한 사형수가 교수형을 당하러 가는 길의 구정물을 피하는 장면을 보고 그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정면으로 느낀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의 손톱은 자라고 있을 것이라는..

그러면서 그가 교수형 당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순간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과, 그의 죽음과 시신을 옆에 두고 위스키를 마시며 말도 안되는 소리에 웃어 제끼는 그런 이상한 상황에 대해서도 쓴다.

 

곧 사형될 사형수의 이런 행동은 이상했지만,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한 인간을 파괴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 사형수가 웅덩이를 피하기 위해 발걸음을 딴 데로 옮기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신비감, 다시 말해 생명이 한장 절정에 달했을 때 그 생명을 앗아가는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보았다. 이 사람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처럼 살아있는 것이다. 육체의 모든 기관은 살아 움직이고 있다. 창자는 음식물을 소화해 내고, 피부는 스스로를 재생시키고, 발톱은 자라고, 세포도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모든 것이 이 냉혹한 어리석음 속에서도 악착같이 작용하고 있다. 그가 교수대 발판에 세워지고 사형이 집행될 10분의 1초의 그 순간에도 그의 발톱은 여전히 자랄 것이다.

....

그런데 2분 후 순식간에 우리들 중 한 명이 가버릴 것이다. 한 정신이 줄어들면 그만큼 한 세상이 좁아진다.

 

- 코끼리를 쏘다 : 책 제목과 같은 글인데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던 이야기이다. 버마에서 일할 때 난동을 부리는 코끼리가 있어서 처리하러 갔다가 군중의 시선을 의식해 결국 코끼리를 쏴 죽이고 마는데, 나이든 영국인 들은 잘했다고 하고 젊은 영국인들은 인도인 몇명보다 값이 더 나가는 코끼리를 쏴 죽였다고 뭐라고 한다.  각자의 입장에서 내리는 판단의 기준이 흥미롭다. 인도인을 지배한 영국인 뿐만 아니라 많은 지배자들 또한 이런 우스운 기준에 따라 행동했음은 틀림없다. 군대, 학교, 어떤 권위 체계의 많은 사람들은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

 

나는 2천여명의 사람들이 나에게 압박을 가하는 기운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총을 든 채 공허함, 다시 말해 동양에서의 백인 지배의 무익함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총을 든 백인인 내가 무장하지 않은 원주민들의 무리 앞에 서 있다. 겉으로는 연극 한 토막의 주인공을 맡고 있지만, 사실은 내 뒤에 있는 누런 얼굴의 무리에 의해 우왕좌왕하는 어리석은 꼭두각시에 지나지 안핬다. 나는 이 순간 백인이 전제군주가 되면 파괴되는 것은 백인 자신의 자유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백인은 속이 텅 빈 채 거드름을 피우는 허수아비, 즉 샤히브라는 인습의 형상이 되어버린다. 원주민들에게 특별한 인상을 심어주면서 평생을 보내야 하고, 또 위기에 처할 때는 원주민들이 기대하는 바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 백인들이 지배하는 조건이다.

.....

영국나리는 나리답게 행동해야 한다. 단호하게 보여야 하고, 결심을 하면 확고하게 일을 수행해야 한다. 손에 총을 쥐고 2천여 군중을 이끌고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물러선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군중은 나를 비웃을 것이다. 나를 위시해 동양에 와 있는 모든 백인들의 생활은 원주민들의 비웃음을 사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었다.

 

-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죽을까 :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내가 경험한 병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는 많은 변화가 있었겠지만 느껴지는 것은 비슷한 것 같다. 싫은 냄새, 다닥다닥 붙어있는 사람들, 소리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치료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들을 수 없는 것. 의사 앞에서는 한없이 비굴해지는 느낌과 사생활 따윈 없는 구경거리가 된 느낌 등등..

 

그 조그맣고 일그러진 얼굴을 보았을 때, 나는 들것에 아무렇게나 실려 해부학 실험실의 수술대 위에 털썩 떨엊게 될 저 구역질 나는 쓰레기 조각이 영국 국교회 기도서에서 기도하는 대상 중 하나인 자연사의 전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에 우리가 있다. 저것은 바로 20년, 30년, 40년 뒤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다. 저것은 운 좋은 사람이 죽는, 다시 말해 살 만큼 다 살고 죽는 방법이다. 물론 우리는 살고 싶어한다. 실제로 죽음의 공포 때문에 살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나는 그 당시 생각했던 것 처럼 너무 늙지 않고 갑자기 죽게 되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든다.

 

- 마라케시 : 모로코에 있는 마라케시라는 도시에서 사람들을 보며 떠올리는 생각들이다. 유태인, 세네갈의 흑인과 같이 식민지의 피지배계급을 바라보는 지배계급의 시건에 관해 이야기한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뒤에 실린 서평에 보면 조지오웰이 유태인을 계속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유태인'으로 통칭하는 모습을 보이는 동시에 반유태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글을 쓴것이 모순적이라고 평하는데...글쎄 이 장만 읽어서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우연히 유태인과 친해질 기회가 없었거나 개인적으로는 안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만 반유태주의는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

 

우리는 아랍 사람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유럽 사람들한테서도 유태인의 일상적인 우울한 소문을 듣는다.

"예, 선생님. 그들은 나의 일자리를 빼앗아 한 유태인에게 주었답니다. 유태인들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그들은 이 나라의 실질적 지배자들입니다. 그들이 모든 돈을 다 긁어갑니다. 그들은 은행과 금융, 모든 것을 지배합니다."

"그렇지만 일반 유태인들은 시간당 1페니 정도밖에 못 버는 육체 노동자들 아니오?"

"아 그것은 쇼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모두 실제로 돈놀이꾼입니다. 교활한 유태인들이죠."

 

열대지방에서 우리의 눈은 인간을 제외한 모든 것에 고정된다. 바싹 마른 토양, 부채선인장, 야자수와 멀리보이는 산, 이런 것들만 쳐다볼 뿐 언제나 땅을 파는 농부들은 보지 못한다. 농부의 피부는 땅과 같은 색깔이라 전혀 쳐다볼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

우리는 이곳에서 수십 년 동안 살고 있으면서도, 척박한 토양에서 목숨만 연명할 정도의 적은 식량이라도 얻기 위해 힘겨우면서도 끝없는 투쟁을 벌이는 것이 이들 모두의 현실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모든 백인들이 옆에서 행진하는 흑인 병사들의 모습을 볼 때 생각하는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우리가 이 사람들을 얼마나 오랫동안 놀려먹을 수 있을까? 얼마나 오랜 식ㄴ이 지나야 그들은 그들의 총부리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게 될까?'

참으로 궁금하다. 저기 있는 모든 백인들은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 이런 생각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다른 구경꾼처럼, 땀흘리는 군마에 올라타 장교처럼, 대열을 맞추어 행군하는 하사관들처럼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일종의 비밀이었다.

 

  

2. 문학과 정치

 자신의 성장과정에서의 문학에 대한 태도의 변화 등을 털어놓고 지금 자신이 글을쓰는 이유와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동시대의 문학과 문학비평에 관해 몇가지 각도에서 이야기 한다.

 

- 나는 왜 쓰는가 :

① 순전한 이기심... 똑똑해 보이고, 남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죽은 후에도 기억되고, 어린 시절 자기를 놀렸던 사람들에게 보복하려는 욕망이다. ........

 미학적 열정.... 괜찮은 산문의 견고함이나 좋은 이야기의 리듬을 아는 즐거움 등이 이에 해당한다. 값지다고 느껴 놓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어떤 경험을 공유해보고자 하는 욕망, 미학적 동기는 많은 작가들에게 주된 것은 아니지만 팸플릿 지은이나 교과서 집필자 조차도 공리적 목적을 넘어 자신들이 좋아하는 단어와 관용어법을 가질 수 있다. 혹은 활자체, 여백의 폭등에 관해서도 큰 관심을 보일 수 있다.

 역사적 충동.... 사물을 그대로 보고자 하는 욕망, 진실한 사실을 발견해서 후손들을 위해 그것들을 보존하려는 욕망이다.

④ 정치적 목적... 가능한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세계를 특정방향으로 몰고 가고자 하는 욕망, 다시 말해 성취하려고 노력해야만 하는 그런 종류의 사회를 위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보려는 욕망이다.

 

 이 글의 마지막 한두 페이지를 다시 살펴보니 내 글쓰기의 동기가 마치 투철한 공공심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처럼 비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이 글의 마지막 인상으로 남기고 싶지는 않다. 모든 작가들은 헛되고, 이기적이고, 게으르며, 도기의 밑바닥엔 어떤 신비가 흐른다

....

그러나 만약 작가가 지신의 개성을 없애버리려는 투쟁을 끊임없이 하지 않는다면 남들이 읽어줄 만한 어떤 글도 쓸 수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글을 쓰는 동기 중 어떤 것이 나에게 가장 강하게 작용했는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이들 중 어떤 것을 추구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다. 그리고 나의 작품들을 돌이켜보건대, 정치적 목적이 결여된 곳에서 내가 한결같이 화려한 문체, 의미 없는 문장, 쓸모없는 장식적 형용사 등에 유혹당한 생명없는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 소설의 옹호 : 밥벌이가 달린 상황에서 소설 서평은 끝없는 찬사로 밖에 이어질 수 없고, 지나치게 과장된 소설 서평 (광고)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사람들이 소설을 무시하는 경향이 생긴다고, 서평을 쓸 때는 각각 다른 기준에서 서평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좋으면서도 나쁜 소설'이라는 주제로 이어지는데 좋으면서도 나쁜 소설의 기준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관심이 가는 라이트 노벨을 연상하면 대충 이해가 간다. 오독일까 i - i

또한 괜찮은 서평을 실을 수 있는 신문이 있다면 진지한 작가들의 작업이 지속될 수 있을것이라는 제안도 한다. (지금 시대에서는 어쩐지 영화를 대입해 생각해 보게 되는데, 저런 제안을 볼 때는 '키노'가 생각나기도 했다..ㅎㅎ)

 

- 문학과 전체주의 :

 유럽이든 동양이든 간에 전체주의와 과거의 모든 정통성 사이에는 몇 가지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의 정통성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혹은 적어도 급속히 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중세 유럽에서 교회는 우리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강요했지만, 적어도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같은 신념을 가지도록 해주었다. 월요일에는 이것, 화요일에는 저것을 믿도록 하지는 않았다.

....전체주의는 이것과 정바대이다. 전체주의 국가의 특수성은 비록 그 국가가 사고를 제한하더라도 그것을 고정시키지는 않는다. 전체주의 국가는 명백한 도그마를 여러개 설정해 날마다 서로 바꿔치기하다. 전체주의 국가는 국민들로부터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런 도그마가 필요하지만, 힘의 정치에 필수적인 변화를 외면할 수는 없다. 전체주의 국가는 스스로를 완전무결한 것으로 선전하며 동시에 객관적인 진실의 개념을 공격한다.

....

이런 것들이 문학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글쓰기는 넓게 말해 외부로부터 항상 통제받지 않는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정통성에 대해 말로는 동의할 수 있지만 어떤 결과에 대한 글쓰기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진실을 늒ㄹ 때에만 가능하다. 이것 업시 창조적 퉁동은 고갈될 뿐이다.

 

 - 문학비용 : 1946년 호라이즌지에서 실행한 설문조사에 답변한 것이다. 전업 작가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다 해볼만한 질문....어쩐지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대목들이 몇 있다. ㅋㅋ

 

③ 작가가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부업은?

.... 남을 가르치거나 방송일을 하거나 혹은 영국문화진흐회같은 단체에서 홍보활동을 하는 어느정도 장조적인 이에 정력을 낭비하는 그런 직업은 좀 어렵지 않을까요?

 

④ 작가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에너지를 문학외의 다른 일에 쏟아붓는다면 문학이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작가의 모든 시간과 정력이 낭비되지 않는 한 그것은 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는 평범한 세상과 이런 저런 종류의 관계를 지속적으로맺어야 하니까요.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작가가 무엇에 대해 글을 쓸 수 있겠습니까?

 

⑤ 국가나 다른 기관이 작가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국가가 유용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공공 도서관에 도서 구입비를 더 많이 보조해주는 것입니다. ,,,,,, 어떤 종류의 조직화돈 후원과 연결되는 한 불변의 관계가 있지요.

.... 강요가 적으면서도 가장 훌륭한 후워는 바로 큰 대중입니다.

 

- 좋으면서 나쁜 책 : 역시 기준을 잘 모르겠긴 한데.. 톰아저씨의 오두막집과 셜록홈즈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좋으면서 나쁜 책'의 가장 휼륭한 예는 아마 <톰아저씨의 오두막집>일 것이다. 이 책은 터무니없이 멜로드라마적인 사건들로 가득 찬 작품으로, 은연중에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또한 본질적으로 사실적이며, 우리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이 소설의 특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실제 세계를 다루려는 진지한 노력을 하고 있다. 공포와 '가벼운'유머 제공자들인 현실도피 문학가들은 어떤가? <셜록홈즈>......와 같은 작품은 어떤가? 이런 모든 작품들은 결단코 형편없는 책들로서 우리가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비웃을 수 있는 것이고, 이런 종류의 소설을 쓰는 작가들에 의해서조차도 거의 진지하게 간주될 수 없는 성질의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설들은 살아남았으ㅕ, 또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문명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때때로 기분전환이 필요할 것이며 가벼운 문학이 그 자리를 굳게 차지할 것이다. 또한 박식함이나 지적인 힘보다 더 오래 생존할 가치가 있는 완벽한 기술이나 천부적 우아함과 같은 것도 있다. 시선집에 들어있는 대부분의 시보다 더 나은 뮤직홀의 노래도 있다.

 

 

3. 파리와 런던의 뒷골목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의 뒷부분부터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파리에서 런던으로 넘어와 런던의 구빈원을 돌아다닌 이야기, 교도소에 들어가볼 목적으로 술취한 척한 이야기, 홉 농장에서 일하던 이야기가 나와있다.

 

이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정리할 때 자세히........

 

 

4. 일상에 스민 정치성

 

- 복수는 괴로운 것 : 억압당한 사람들이 욕망하는 복수라는 것은 실제 그것이 가능하게 된 시점에서는 어떤 면에서 무의미해진다는 이야기. 나치당원들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유태인, 무솔리니의 시체에 총을 쏜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예를 들어 이야기 하는데, 맞는 말이고 냉정해져야 할 필요가 있으며 복수이건 처벌이건 실은 아무 목적도 계획도 없이 그저 저질러 버리는 건 어리석다고 생각하지만...그게 그렇기 때문에 복수인 것 같기도 하고.. 말처럼 어디 그게 쉬울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복수는 괴로운 것'이라는 제목처럼 무의미하기 때문에 모두 그만둬- 라는 취지로 이야기 하는 게 아니란 건 알겠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할 지 폭넓게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고 그것이 오히려 마음의 평안과 위안을 가져다 줄 수도 있을 거란 것도 알겠지만...

역시 ...복수는 말 그대로 복수니까 ; 좀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물론 경계하는 자세는 필요하지만...ㅎ  

 

그의 모든 가족은 살해당했다. 한 죄수에게 무자비하게 한 대 갈기는 것쯤은 히틀러 정권이 자행한 잔학함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장면뿐만 아니라 내가 독일에서 목격했던 다른 많은 장면들을 통해 나는 '복수'와 '처벌'이라는 전반적 개념이 어린애 장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절히 표현하자면 복수같은 것은 없다. 복수는 우리가 힘이 없을 때, 그리고 힘이 없기 때문에 행하기를 원하는 행동인 것이다. 무력감이 사라지면 그런 욕망또한 없어지게 된다.

1940년이라면 나치의 장교들이 얻어맞고 굴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 날뛰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가능해질 때 그것은 단지 측은하고 역겨운 것이 되어버린다.

 

그 죽은 독일 병사 옆을 지나갈 때 벨기에인은 얼굴을 돌렸다. 우리가 다리위로 올라서자 그는 죽은 사람을 처음으로 보았노라고 나에게 발했다. 그는 서른 다섯살 쯤 되었고 4년동안 라디오 방송에서 전쟁 선전활동을 해오고 있었다. 이런 일을 겪은 후 며칠동안 그의 태도는 이전과는 아주 달라졌다. 그는 폭격으로 붓진 도시와 독일인들이 겪고 있는 굴욕을 안타깝게 지켜보았으며, 심지어 독일인들에게 가하는 약탈 행위를 예방하는 일에 관여하기도 했다.

..... 이것은 전쟁의 의미를 그에게 절실하게 자각시킨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다른길로 그 도시에 들어갔더라면 그는 전쟁이 빚은 2백만명의 희생자 중에서 한 구의 시체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공원에서의 자유 : 공원에서 좌익 신문을 팔던 다섯명의 사람이 체포된 사건을 가지고 표현의 자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공원에서 신문을 파는 것은 불법이지만 좌익 신문을 파는 사람들을 체포한 것은 경찰의 자의적인 선택이었다고 지적한다. 이어지는 내용은 폭넓은 이야기라 배경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잘 이해가 안가는 부분도 있지만 조지오웰의 기본적인 태도는 읽을 수 있다. 전후 여러가지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입을 열기 주저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면 조지오웰의 이런 글은 사람들에게 꽤 자극적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의도 같다는 생각도..

마지막 부분은 촘스키의 인터뷰 중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프리송인가 하는 반유태주의자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해달라는 편지에 서명을 한 것으로 반유태주의자로 몰렸던 경험에 관한 인터뷰...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정부가 바뀔 때 행정부 직원들도 바뀌느냐 하는 점이다. '사회주의'라는 용어가 법을 위배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찰관은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서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나? 경찰관은 어떠한 당과도 동맹관계를 맺지 않고 이어지는 정부에 충성을 해야 하며 자신의 정치적 소신 때문에 희생을 당해서도 안된다는 것이 그들의 확고한 원칙이다.

....

문제는 우리가 향유하는 상대적 자유가 여론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법은 보호책이 되지 못한다. 정부가 법을 만들지만 정부가 그 법을 집행하느냐 하지 않느냐, 그리고 경찰이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그 나라의 일반적 기질에 달려 있는 것이다. 만약 많은 사람들이 어론의 자유에 관심을 보인다면, 법이 그것을 금지하더라도 언론의 자유는 존재하게 될 것이다. 만약 여론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비록 법이 보호를 해준다고 하더라도 성가시게 여겨지는 소수들은 박해를 받을 것이다.

....

그들은 민주적 반대와 공개적 반역을 구벼하지 못함으로써 이 문제를 혼동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나라의 도갲와 불의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심지어 스스로를 자유의견의 옹호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도 억압받는 자들이 자신의 적일 때에는 대체로 그런 주장을 거두어 들인다.

 

 

- 두꺼비에 대한 단상 : 봄을 충만하게 느끼는 조지 오웰이 무척 귀여워 보인다. 한편 이렇게 봄을 느긋하게 즐기는 순간에 조차 날카로운 이성을 놓지 못하는? 않는? 것을 보면 약간 안쓰럽기도 하지만;;; 반대로 보면 그 시절에도 봄을 만끽하는 그에게 훌륭하다고 박수쳐줄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 몇 번의 겨울철을 견디고 난 뒤 우리에게 찾아온 봄이란 기적처럼 보인다. 나는 1940년부터 매년 2월이 될 때마다 줄곧 이번에는 봄이 찾아오지 않고 겨울이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생각을해왔다. 그러나 페르세포네는 두꺼비처럼 같은 시간에 죽음에서 어김없이 일어난다.

....

나는 전에 자연에 대해 우호적으로 썼던 어떤 수필 때문에 비난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그런 편지들은 주로 감상에 젖어 있었는데, 자연에 관한 두 개의 관점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살아가면서 실제 느끼는 모든 즐거움은 일종의 정치적 무사 안일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이 사상이 그러하듯 사람들은 불만족해야 하며, 따라서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즐거움만을 증가시킬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증대시키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는 것이다.

.....

확실히 우리는 불만족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나쁜 일을 이용하는 방법을 찾아서는 안된다. 만약 우리가 살아가면서 시레 느끼는 모든 즐거움을 없애버린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위해 어떤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겠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찾아오는 봄을 즐길 수 없다면, 왜 그는 노동을 절약하는 유토피아에서 행복해야만 하는가? 그는 기계가 제공해 주는 여가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원자 폭탄이 공장에 쌓이고, 경찰이 도시를 서성거리고, 거짓말이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지고 있지만, 지구는 여전히 태양 주위를 돌고 있으며, 어떠한 독재자나 관료주의자라도 우리가 봄을 즐기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대를 할 수는 있을지언정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 스포츠 정신 : 오늘날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은... 특히나 영국이라; 어쨌든 캐공감하고.. 마지막 부분이 재밌는 발상이다.ㅎㅎ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가 상호 비방의 증오로 연결된다는 사실(예를들어 1936년 올림픽 경기)을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일반 원칙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거의모든 스포츠는 경쟁이다. 이기기 위해 시합을 하며,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시합은 별 의미가 없다. 

.....

국제 수준의 시합은 솔직히 말해 하나의 모의 전쟁이다. 그러나 주요한 것은 선수들의 행동이 아니고 관중의 태도이다. 나아가 이 어리석은 경쟁에 분노하고, 또 달리고 점프하고 공을 차는 것이 국가적 미덕의 실험이라고 믿는 관중들의 뒤에 자리잡고 있는 국가의 태도도 그렇다.

.....

그들은 속임수를 이용하거나 관중의 개입으로 얻은 승리는 의미가 없다는 사실도 망각하고 있다. 관중이 물리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때조차도 그들은 자신의 팀에게 환호를 보내고 상대 팀에게 야유와 모욕을 퍼부어 경기에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

.....

분명히 모든 스포츠는 민족주의의 발생과 관계가 깊다. 다시 말해 스스로를 큰 동력장치로 규정하고 모든 것을 경쟁의식의 관점으로 보는 현대인들의 광적인 습관과 관계가 있다. 또한 조직화된 경기는 보통 사람들이 주로 앉아서 생활하는, 다시 말해 제한되어 있는 삶의 방식 때문에 창조적 노동을 할 기회가 많지 않은 도시지역에 더 많이 분포되어있다.

.....

그러므로 우리는 다이너모 팀의 방문에 대한 답방으로 영국 대표팀을 소련으로 보내지 말기를 바란다. 굳이 그렇게 해야 한다면 영국을 대표하지 않는, 확실히질 수 있는 이류 팀을 보내도록 하자. 갈등의 실제 원인은 이미 충분히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젊은이들이 분노에 찬 관중의 함성 속에서 서로 부딪히고 정강이를 차도록 부추기는 일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서점의 추억 : 서점 직원으로 일하던 시절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책을 구매하는 사람들의 패턴을 이야기하는데 좀 시각이 너무 편협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서점을 이용하는 온갖 진상들과 싸구려 잡지나 사러 오는 손님들 또한 각자의 취향과 필요가 있을 것인데...흐흐.... '진정으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적다'라는 평가는 좀 글쎄다 싶다. 물론 나도 넘쳐나는 자기계발서들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릴 때도 있지만 점점 더 그럴듯해지는 선전과 포장기술을 보다 보면 뭐가 정말 괜찮은 - 혹은 자기한테 필요한 책인지 구분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구매자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되어버리는 것 같기도 하다. 

 

- 영국 요리에 대한 옹호 :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맛이 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이런 저런 소설이나 동화속에서 읽었을 법한 음식 이름이 나열되어 있어서 밤에 읽느라 고생했던 부분이다;;

 

우선 키퍼, 요크셔 푸딩, 데번셔 크림, 머핀, 크럼핏 등을 들 수 있다. 모두 나열하자면 푸딩 종류만 해도 수없이 많지만 그 중 크리스마스 푸딩, 트리클 타트, 애플 덤플링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케이크 종류도 푸딩만큼이나 많다. 예를 들면 다크 플럼 케이크, 쇼트 브레드, 사프란 번 등이 있다. 또한 비스킷 종류도 엄청나게 많다. 물론 비스킷은 세계 어디에나 많이 있지만 영국의 비스킷이 더 파삭파삭하며 맛도 월등하다.

......

그러나 외국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불편한 점이 있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괜찮은 영국 요리는 가정 밖에서는 잘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어쩌라규...i _ i )

 

- 한 잔의 차 : 부랑자 생활을 견디게 해준 것은 음식과 잠자리가 아닌 한 잔의 차였다고 이야기하는 조지오웰. 어쩐지 공감이 가는 이유는 뭔가 ...;; 한끼도 안먹은 채 커피만 마시던 d가 생각나기도 하고... 나도 지금 꽤나 차에 의존하고 있는 터라...ㅎㅎ

 

네번째, 차는 강해야 한다. 한 잔의 강한 차는 스무 잔의 연한 차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캐공감;;)

.....

다섯번째, 찻주전자에 차를 그대로 넣어야 한다. 여과기나 천 주머니 혹은 다른 도구들을 주전자에 넣으면 안된다. ..... 만야 찻잎이 주전자에서 불려져 커지지 않았다면 맛이 충분히 우러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

여섯번째, 찻주전자를 물을 끓이는 주전자 주둥이 쪽으로 가져가야 한다. 그 반대는 안된다. 물은 찻주전자에 붓는 순간에도 끓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물주전자를 불위에 계속 올려놓은 채 끓는 물으 찻주전자에 부어야 한다.

....

여덟번째, 조반용컵 (머그컵인듯....) 으로 마셔야 한다. 조반용 컵은 많이 담을 수 있으나 다른 종류의 컵에 부으면 마시기도 전에 반쯤 식어버린다.

 

 

 

 

5. 유럽 문학에 대한 단상들

- 책값 대 담배값, 톨스토이와 셰익스피어, 마크 트웨인 : 세상이 인정하는 이야기꾼, 한 편의 시가 주는 의미, 유럽의 재발견 이라는 제목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부분은 배경지식 부족으로 (윽..;) 읽기는 읽었으나 딱히 와닿지 않아서 

사실 정리하기가 슬슬 귀찮아서 넘어가야겠다. 

 

 

 

 

 

 

 

 

 

나중에 구입을 해도 좋을 책이지만 그런 책들이 요새 꽤 많기 때문에 언제 또 펼쳐보게 될 지 알수 없으므로.... 이렇게 긴 포스팅을..ㅠㅠ

아무튼 재밌는 구절도 많고 생각해볼 거리들도 많이 던져주는 책이었다.

아쉬웠던 점은 여성에 대한 비하?? 편견을 종종 볼 수 있었다는 것... 서점에 오는 아줌마들에 대한 무시...스포츠를 관람하는 여성들이 이성을 잃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복싱 경기를 구경할 수 없게 한다는 규칙에 대한 설명과 같은 것들..

그 밖에도 여성에 관한 근접한 거리에서의 관찰은 거의 보기 힘들고 부정적인 면들을 묘사하는 것이훨씬 많은 것 처럼 보인다; 여성에 대한 언급 자체가 적기도 한 것 같고...

헐... 아쉬버라 -_____-   왜일까.. 그냥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 뭔가..

암튼 여기까지....ㅎㅎ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4/11 00:35 2010/04/11 00:35

3월 말에 읽었던 것인데 정리도 못하고 책을 반납해서 잘 기억이 안난다..

잠시 메모해두었던 것으로...

 

- 마음에 들었던 말들.

 

여행을 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지도를 그린다.

 

우연을 긍정하는 정신이 새로움을 창조한다.

 

정확한 문구는 기억나지 않지만...

양철북의 오스카가 리듬의 변주로 군대의 행진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것에 대한 이야기도 마음에 들었다.

변주하기.. 정해진 규칙을 벗어나 새로운 판을 짜는 것.

 

- 궁금했던 것.

중세라고 하면 '암흑기'라는 이름으로 배웠던 기독교적 금욕주의나 몸에 대한 무관심 같은 것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중세에서 놀이가 중요했다고 하니 헷갈리다.

가톨릭 -> 금욕과 절제의 청교도 정신으로 넘어가면서 풍부했던 놀이문화가 사라졌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중세 가톨릭 시절에는 안그랬었던 것인지..

 

스콜라의 어원을 skhole _otium 으로 들며 무언가를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라고 했는데

교육학에서는 '여가'로 번역하면서 부유층의 여가를 이야기한다.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 더 알아보고 싶은 것.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의 관계?

(철학 성향 테스트에서 질문이 나왔을 때 나는 당연히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다보니 뭔가 관계가 있는 것 같기도...)

 

- 아차 싶었던 것.

공장법에 대한 설명.. 8~13세 어린 아이들과 부녀자가 16시간 이상 노동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던가..

하여간 교육학 책에서 보면 공장법의 제정은 당시 노동에 혹사당하고 교육의 기회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제도적 시도였다고 나오는데

책을 읽다 보니 2시간은 공부하고 나머지는 일하게 하는 제도라는 것, 더욱이 근대 학교에서의 공부라는 것은 노동인력을 생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취지와 의의를 긍정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오 잘했군' 하고 넘어가지는 말았어야 했다.

 

아... 그리고 저자가 중학교 선생님이라는데 정말 중학생들과 같이 읽어도 좋을만큼

재미있고 친절한 설명들이 참 좋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4/10 23:53 2010/04/10 23:53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

from 읽기 2010/03/28 00:55

世事如烟

 

세 번째로 읽은 위화의 소설..

어젯밤에 읽고 잤는데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다 ;ㅁ;  지금도 늦은 밤이라 그런지 살짝 무섭다.

 

- 그 당시 사람들은 툭하면 나에게 물었다. "왜 이런 작품을 쓰는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나에게 질문하곤 했다. "왜 이렇게 죽음과 폭력에 대해서 쓰는 것인가?"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나는 그들보다 아는 게 결코 많지 않았다. 이는 작가가 속시원히 해명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그들에게 우리 사는 곳에 이런 것들이 없는지 한번 찾아보라고 이야기 한 적은 있다.  왜 이렇게 많은 죽음과 폭력적인 상황들이 삶에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서문을 읽으며 약간 쫄긴 했으나 그 죽음이 이런 죽음인지는 몰랐지 ;

<인생>이나 <가랑비 속의 외침>에서도 어이없고 무차별적인 죽음들이 많이 나오긴 했지만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 속의 죽음은 그보다 훨씬 진하고 선명하다. 무서비..ㅠㅠ 

게다가 중편들이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 집중할 수밖에 없기도 해서 결국 울면서 다 봤다.

 

- 어떤 현실

 

산강과 산봉 형제, 그들의 아내, 그들의 어린 자식, 노모가 한 집에서 살고 있다.

산강의 아들 피피가 산봉의 아들을 안고 있다 떨어뜨려 죽이게 되고 산봉은 피피를, 산강은 산봉을 죽인다. 

결국 산강은 사형되는데 산봉의 아내가 그의 시신을 의사들에게 넘겨 그의 고환은 다른 사람 몸에 이식되어 자식을 본다. 노모는 늙어 죽는다. (여기까지 쓰는 것도 너무 힘들어 -_- )

피피는 가책이 없다.. 폭력이 즐겁다는 것을 느낀다. 산강과 산봉 형제에겐 용서가 없다. 이성적인 판단도 없다. 노모는 모든 것에 무관심하다.. 오직 버거운 자기의 몸과 죽음에만 관심이 있다.

산봉의 아내는 자의식이 없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그러나 잔인한 복수에 대해서는 행동력이 있다. 산강의 아내는 복수와 명예를 위해서라면 대범해질 수 있는 오기가 있다.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다. 어떤 현실은 이러한 것이다.

모든 것은 한 가지 우연한 사고에서 시작됐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떨어진 아기를 보고 나서도 모른척한 할머니, 뭔가 잘못됐음을 느끼지만 더이상 생각하기를 멈추는 피피, 죽은 아이에 대한 동정심 같은 건 없는 산강 부부...

어쩌면 산봉이 그 상황에서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상황을 결말짓는다는것이 더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모두들 표현은 안하지만 알고 있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애정 없음과 무한한 자기 본위의 이기심, 증오 같은 것들을 ..

 

어쨌든 산봉의 대처 방식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두려웠기 때문에 피피를 죽였고 그 때문에 또 스스로 두려워지는 악순환. 그리고 또 한명의 아이를 잃은 아버지 산강은 (굳이 교활한) 살인 계획을 세운다. 약해질대로 약해진 산봉을 개로 핥아 죽이는 -_- ; 

산강 또한 산봉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다. 살인 이후에 따라오는 죄책감과 두려움..

그들은 정신이 없고, 자기가 뭘 했는지도 잘 모르며,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왜 그래야 하는지, 그럴 수 밖에 없는건지 등등의 질문은 무의미해 보인다.

 

 

* 여기까지 쓰고 바빠서 손놓고 있다가 책도 반납해버림 .. ㅜㅜ

 

 

- 강가에서 일어난 일

 

추리소설 형식. 어느 혼자 사는 할머니가 강가에서 살해당하고 머리만 보이게 파묻혀진 것이 발견된다.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의 행보를 따라 단서와 용의자들이 드러나는데

주 용의자는 할머니가 거둬 먹여주던 미친 사람과 근처 공장의 젊은 노동자, 히끼꼬모리같은 중년의 남자 셋이다. 여기서 미친 사람은 할머니와 남녀관계였던 것으로 암시된다..(오독인가; )

결국 할머니의 재산이 도둑맞지 않았다는 사실과 용의자들의 진술, 그의 집에서 발견된 피묻은 연장 등을 종합해 형사는 미친 사람이 범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미친 사람은 잠시 끌려갔다 오지만 (당국의 사정때문에) 다시 풀려나고 몇 년의 시간차를 두고 비슷한 살인 사건이 두 번 더 발생한다. 

 

미친 사람이 범인이라는 확실한 단서는 없지만 아니라는 단서도 없다. 

어쨌든 소설에서 이런 상황을 그리는 경우 대부분 미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죄를 뒤집어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는 끝까지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단서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아무튼 세번째 살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의 희생자는 할머니의 시체를 가장 먼저 발견했던 소년이었다.

당시 소년과 몇 번 만나고 대화를 나눴던 형사는 소년의 죽음을 본 후 미친 사람을 쏘아 죽인다.

담담하게, 아무런 가책을 발견할 수 없는 미친 사람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보이며..

형사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법으로는 그를 어쩔 수 없었다고 상사에게 보고한다.

여기서 반전에 가까운 마지막 장면이 등장하는데, 형사의 상사와 부인은 그를 정신병자로 가장시켜 형을 줄이려고 한다.

형사도 처음엔 거부하지만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의사 앞에서 헛소리를 몇 마디 지껄인 그 순간 의사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형사를 정신병자로 진단한다. 오마이갓.

뭔가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첫페이지로 돌아가 할머니가 죽던 날의 정황을 살펴봤다. 그 부분은 작가가 독자에게만 알려주는 팩트-이니까...

분명히 세 명의 용의자 중에 다른 두 명은 아니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죽은 소년 같은 경우는 공장의 젊은 노동자를 증언했으므로 그에게 원한을 샀다고 볼 수도 있다. 형사가 무심코 소년의 아버지가 사건 이후 소년을 강가에 못가도록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강가에 갔다가 우연히 아무 목적도 계획도 없이 미친 사람의 눈에 띄어서 살해당했다고 보기는 이상한데.. 게다가 그날 할머니의 거위들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강가에 나와 있었다. 계획적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하지만 다른 두 명의 용의자의 진술과 첫 페이지의 팩트는 다 맞아 떨어진다.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봤고, 시체를 보고 놀랐다는 것.

 

그렇다면 미친 사람이 계획적으로 살인을 했다, 혹은 모든 것이 우연의 일치로 계획적인 것 처럼 보이지만 그저 미친 사람의 우발적인 살인이었다 둘 중의 하나라는 것인지..

뭘 믿고 뭘 의심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결론을 알려주지 않는 추리소설... 신뢰가 가지 않는 형사... 이건 뭐 -_- ;; 찜찜해..

실컷 추리소설의 컨벤션을 따라서 단서를 풀어가는 성취감을 주다가 막판에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아 답답해 ;;

오호..그럼 이것이 의도한 바요? 위화 양반 -_- ;;

간만에 글을 읽고..."대체 이건 왜 쓴거야 ;ㅁ; "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 옛 사랑 이야기

 

어렸을 때 좋아하던 구운몽, 금오신화 류의 이야기..

구운몽은 양소유가(이름도 기억나;;) 인생무상을 깨닫는 결말 말고, 이러쿵 저러쿵해서 팔선녀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는 그 과정을 즐겁게 봤던 것 같다..

금오신화는 귀신과의 하룻밤이라는 오싹한 에로에로가 즐거웠던걸까;

아무튼 두 가지를 대충 섞은 듯한 이야기였는데..

지지리 가난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머물게 된 마을에서 예쁜 부잣집 아가씨를 만나게 되고 하룻밤 비를 그으며 눈이 맞는다.

이후 과거에는 떨어지고 돌아와 보니 부잣집은 허물어져있고 아가씨는 간데 없다.

두번째 과거를 보러 가는 길, 영화롭던 마을은 기근으로 초토화되어있고 시체가 즐비, 인육을 파는 모습까지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보고싶어하던 아가씨는 인육 장사치들한테 한쪽 다리를 잘린채 모습을 드러내고

선비는 직접 가슴에 칼을 꽂아 아가씨의 숨을 끊고 묻어준다.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에 고향으로 돌아와 무덤지기나 하며 늙어가던 선비는 어느 명절, 아가씨의 무덤을 찾고 그 옆에 집을 지으며 살 작정을 한다...

그날 밤 선비에게 나타난 아가씨는 귀신이라기엔 너무 생생하게 하룻밤을 보내고 사라지는데

"아가씨가 부활하려나보다" 하는 생각에 무덤을 열어본 선비는 산 사람처럼 생기 있는 육신을 보고 기대에 부풀지만, 밤이 되어 다시 찾아온 아가씨는

"환생하려고 했는데 네가 열어봐서 다 망했다"며 영영 귀신이 되어 떠나버린다.

끝은 늘 그렇듯이 "그 후로 그 선비를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더라..." 류의 엔딩이었던 것 같다.

 

기근이 든 마을의 역겨운 묘사와 선비의 기억속의 아름다웠던 마을의 모습과 로맨스가 뒤섞여 토하고 싶은 느낌과 아련한 느낌을 번갈아가면서 느낄 수 있다.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던 것은 인육 시장에서의 장면인데, 인육 장사치들이 사람을 죽이지 않고 팔 다리를 끊는 것은 고기의 신선함을 위해서이다.

굶어죽는 마당에 인육을 사고 팔고 먹는다지만 그 순간에도 신선함을 따지는 역겨움..

"딸을 먼저 죽여주세요"라고 주문한 아낙의 비정한 한마디가 실은 먼저 죽을 수 있게 해주고 싶었던 마음이라는 것, 맨정신에 팔이 잘려나가는 아이의 가슴에 칼을 꽂는 극한 상황에서의 모성..

아내와 딸을 장사치들에게 넘기는 뻔뻔한 아버지와 죽을 줄 알면서도 아무 반항도 못하고 따라온 모녀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웩.. 쓰다보니 또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쨌든 책 뒷부분에 실린 작가와의 인터뷰에는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자기에게 큰 화두라는 식의 말이 나왔던 것 같다. 확실히 폭이 넓긴 하다. 심하게.. 그리고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응시하게 되긴 한다.

위화의 소설을 보다보면 내 인생은 굴곡도 없었다는 생각도 든다....크헐.....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소설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이쪽이 훨씬..더 쎈 거 같다;

 

 

-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

 

보고 나서 며칠간 나를 공포에 떨게 한 이야기.. 밤에 혼자 잘 땐 어찌나 생각나던지 ;ㅁ;

어느 마을에서 일어난 몇가지 사건들을 조망한다. 1,2,3,4,5,6,7 등의 인물과 점쟁이 가족, 장님, 회색옷을 입은 여자, 산파, 트럭 기사와 같은 사람들이 나오고,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으로 이야기가 옮겨간다.

옮겨갈 때는 대부분 죽음으로 그 사람의 이야기가 마무리지어진다.

조그만 동네 - 작은지 큰지 알 수는 없지만- 에서 몇 사람이 죽어나가고, 사람들은 행여나 싶어 점쟁이를 찾아가지만, 사실 그렇게 동네에 귀신이 꼬이고 사람들 혼이 빠지는 것은 탐욕스런 점쟁이의 탓도 크다.

자신의 젊음을 위해서 어린 소녀들을 꼬박꼬박 죽여나갔으니 그 시체 냄새가 안날리가 없다.

물론 점쟁이만 탐욕스러운 것은 아니다. 죽음에 대처하는 산 사람들의 모습은 그저 이기적일 뿐이다.

 

제일 무서웠던 건 6인가가 낚시터에서 발이 없는 귀신을 보는 장면이었고

제일 소름끼쳤던 건 산파가 한밤중 애를 받으러 갔다가 국수를 얻어먹는데 실은 공동묘지에 가서 경단을 주워먹었던 것..

제일 어이가 없었던 건 교활한 점쟁이에게 딸의 몸을 맡긴 4의 아버지..

자신의 수명을 아버지에게 빼앗기고 일찍 죽은 점쟁이의 아들이나, 사모하는 4를 따라 강물로 빠져드는 장님이나... 약한 사람들은 쉽게 다치고 죽는다.

 

작가 인터뷰에 보면 질문하는 사람이 마르케스의 환상적 리얼리즘 이야기를 한다.. 비슷하다고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이었던 것 같은데, 위화의 대답은 "무한한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을 자기의 임무라고 생각한다나 뭐 그런 대답이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가랑비 속의 외침>을 보면서 <백년동안의 고독>을 연상하기도 했었다. 한 집안의 이야기를 시공을 넘나들며 풀어나가는데다가 인물들의 삶이 간결하지만 너무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작가 인터뷰의 저 부분을 읽으면서는 영화 <마지막 밥상>이 떠오르기도 했다.  뭔가 만들어진 것 같은 시공간적 배경 때문이기도 하고, 주인공 각각의 이야기가 딴 나라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는 한 마을, 한 가족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점.. 서로는 그것을 모른다는 점 같은 것들이 비슷하다. 무당이 나오는 음산한 분위기도 ;;;

 

아무튼 위화 소설은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른 것 같다. 물론 잔혹함이나 인간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 들어가 있지만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는 정말 읽기 힘든 편이었다.

저 세편의 책이 쓰여진 순서는 내가 읽은 순서와 반대라는 것이 어쩐지 이해가 간다..

한 살이라도 더 먹을수록 힘든 책을 살짝 피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ㅎㅎ 지금의 나는 <가랑비 속의 외침>정도가 적당한 것 같다..

그래도 자꾸 찾게되는 것은 딱지를 자꾸 긁고 싶은 그런 욕망?? ㅋㅋㅋㅋ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3/28 00:55 2010/03/28 0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