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태 퍼즐

  • 분류
    잡기장
  • 등록일
    2010/04/26 17:36
  • 수정일
    2010/04/26 17:36
  • 글쓴이
    진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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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넷에서 올해 새롭게 시작한 내부세미나, 이번 달에는 2000년대 이 후 우리 사회를 이래저래 뒤흔들고 있는 '싸이코패스' 담론에 대해 좀 더 능동적으로 고민/활동하기 위해서, 푸코의 <비정상인들>을 읽고 있어요. 자칫 어려울 수도 있는 텍스트이지만, 텍스트에 대한 면밀한 이해보다는 우리 현실에 대해 토론해보는 것이 목표라서 큰 문제는 없는 듯. 그리고 첫 시간에는 블로거 케즘 님이 오셔서, 이래저래 이 텍스트의 맥락을 설명해주셔서 한층 더 수월했어요. 첫 시간에 나눈 고민들을 정리해봅니다. '김길태'라는 사건을 가로지르고 있는 선분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지 않을까.

 


첫번째 조각: 누가 싸이코패스라 말하는가?

<비정상인들>에서 주로 읽을 수 있는 테마이다. 미치거나 범죄자인 것이 아니라, 그래서 병원에 가거나 감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둘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장으로서 만들어진 '병적 악의', '도덕 박약', '싸이코패스', '비정상인' 등의 개념. 정신감정서는 범죄를 가능하게 했던 그의 삶을 재구성해낸다. 범죄 이전에 "무능하고 나쁜" 삶이 이미 있었다고., <비정상인들>에서는 적어도 이것은 정신의학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 한국에서는 같은 역할을 언론이 수행하고 있다. 아래와 같은 수식어와 함께.


"자아존중감 상실", "사회로부터 고립", "툭하면 거짓말을 하던 외톨이", "출생의 비밀", "입양", "양부모", "비정상", "거짓말쟁이", "자퇴", "지능검사 결과 85", "치밀하고 뻔뻔", "영악", "난폭한", "삐뚤어진", "폭행", "불안감", "공황증세", "성적은 꼴찌 체력검사는 1등급", "어두운 구석"
 

이것들은 언론들이 "베테랑 프로파일러"를 동원하여 김길태를 '원격' 정신감정 하면서 쏟아내는 말들이다. 참고로, 베테랑 프로파일러가 베테랑인 이유는 그가 강호순에 대해 위와 같은 수식어를 한 번 쏟아낸 바 있기 때문에. 그 때 그 말이 언론을 통해 우리의 신체에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그게 다다. 진실의 생산은 이렇게 베테랑스럽다.

아무튼 첫번째 조각은 '싸이코패스'라는 담론, 그 진실이 얼마나 허약하고 우스꽝스러운가를 드러내주는 것이다. 이것은 푸코의 작업이기도 하다. 아무튼 우리와의 차이는 그 역할을 언론이 사법+의학 이전에 이미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재판에서 나오는 정신감정서와 판결문을 '받아쓰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절차가 시작되기도 전에 모든 것을 규정하며 진실을 생산해낸다.

두번째 조각: 그는 왜 거기에 있었나?

만약 어떤 성추행범이 나와 같은 공간에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자 한다면 결국 질문되어야하는 것도 그의 삶일 것이다. 또 특히 우리가 그와 함께 있지 않을 때, 그러나 시대의 그물망을 통해 어쨌든 연결되어있고 우리가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할 때 질문되어야 하는 것은 그의 삶의 조건들이다. 시대에 대한 질문. 그가 어떤 문화/조건들 속에서 살아왔고, 성차와 권력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혹은 그것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는지 등등. 그를 둘러싼 사물들, 사람들, 그가 보고 자라난 드라마와 CF들, 영화들, 그가 빈 집에 살 수 밖에 없었던 이유, 그 동네의 재개발,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남을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거기로 흘러들어올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참고: 김길태와 스쾃) 또, 성상납 받는 검사가 성폭력 예방 칼럼을 쓰는 시대, 모든 곳에 스며있는 가부장제와 위계질서, 성추행이 문제가 되어도 대충 얼버무려 넘어갈 수 있는 문화 등까지. '김길태'를 가능하게 했던 많은 조건들을 드러내자!

물론, 이 모든 조건들 속에서 결국 선택은 그의 몫이겠지만, 여전히 그 선택을 가능하게 했던 그 조건들을 대해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그 조건들은 결코 '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어떤 개인의 '비정상'이 문제라서 그를 매장하고 반대편에 '정상'인 집단으로서 우리를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그가 어떻게 가능했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 이 사회의 '정상'은 무엇이고, 이 사건은 그 '정상'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김길태의 삶은 다시 방문되어야 한다. 다른 시각으로 그의 삶을 읽어내고 그의 전기를 써내려갈 필요가 있다. 그 때 필요한 것은 정신의학이 아니라 문화인류학이다.

세번째 조각: 상상 속의 네이션

좀 더 넓게 바라보면, 왜 2000년대 들어서 이러한 현상들이 표면으로 드러나고 있는가에 대해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모든 것이 '개인─원자화'되고, 자본과 FTA 앞에 국가라는 테두리마저 스스로 벗어버리는 이러한 시대에, '나' 말고는 아무 것도 없고 특히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마을도 공동체도 없는 시대에 왜 '김길태'라는 사건이 필요해지는가? 아마도 그 모든 '고독'들이 결핍하고 있는 어떤 동질감, 어떤 소속감,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즉, 가상으로나마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치안의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하여. 역설적으로 민족과 국가가 중요한 시대이다. 같은 맥락에서 스포츠 스펙타클과 또 이번주까지로 선포되었다는 천안함 애도기간 등이 있다.

물론, 누군가 이런 것들을 기획하거나 통제하거나 명령하지도 않을 것이다.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역시 자발적인 언론. 생각해보면 공동체를 결핍하고 있는 '개인─원자'들을 대상으로 가상의 공동체를 회복시켜주는 것은 꽤나 팔리는 콘텐츠일 것이다. 아주 신파적인. 결국, 언론은 오직 사회면의 기능만을 수행하고 있다. 그것이 김길태를 얘기할 때도, 천암함을 애도할 때도, 스포츠를 중계할 때도, 언론의 기능은 오직 사회면일 뿐이다. 뭐, 정치는 실종된지 오래.

누가 기획하거나 지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모두가 달려들어 자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이 운동. 이것을 하나의 '경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경향이 가능하고 필요해지는지에 대해 세심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자본/국가와 같은 거대한 줄기들에 대한 고민들에서부터, 그 속에서 존재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 그리고 그것들 사이에서 둘을 연결하고 둘을 만들어내고 있는 언론에 대한 고민까지.

 


여기까지 첫시간에 나눈 고민들. 휴, 각각의 조각들이 모두 만만치않은 조각들이네요. 모두 독립적으로 연구될만한 주제인 듯. 그렇다고, 언제까지 누가 연구해주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고, 그렇게 생산되는 지식에만 의존하는 것도 찝찝하고, 아무튼 늘 스스로 고민하고 있어야 활동도 할 수 있기에. 별로 내용은 없지만, 그냥 정리+질문의 차원에서 고민들을 올려봅니다. 맨날 고민들 -_- ㅋㅋ 언젠가는 이 고민들을 모아서 정리/생산도 하고 포럼/액숀 같은 것도 하고 좋으련만. 아무튼 고민을 나누어요. :) 위의 조각들에 보태주실 것들이 있다면 대환영! 또, 다른 조각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hellom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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