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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장선생님 (좋은곳으로 가셨기를 바랍니다)

지난해 말, 전북 장수중학교에서 열린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오전에는 학생들과, 오후에는 학부모들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제 강의에 앞서 교장선생님이 저를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제가 오늘 퀴즈를 두 개 준비했습니다.
첫 번째 퀴즈입니다. 거북선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사람들은 당연히 “이순신”이라고 답했습니다. “나대용 장군”이라고 답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교장선생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직접 망치 두드려서 땀 흘려가며 거북선을 만들었을까요?
거북선을 직접 만든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교장선생님의 질문은 누군가 “목수요.”라고 답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거북선은 목수가 만들었습니다.
목수를 요즘 말로 하면 ‘노동자’입니다.
그러니까 거북선은 노동자가 만든 겁니다.
자, 이제 두 번째 퀴즈입니다. 프로야구 선수들은 노동자일까요? 아닐까요?”

아무도 답을 못하자 교장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노동자가 맞습니다.
바로 며칠 전 뉴스에도 프로야구선수들이 선수노조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는 기사가 나왔잖아요.
프로야구 선수들도 노동자입니다.
오늘 이러한 이야기를 저보다 훨씬 더 재미있게 해주실 분을 모셨습니다.
하종강 소장님을 소개합니다.”

세상에, 그런 교장선생님이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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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모습. (ⓒ장수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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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부모들에게 강사를 소개하고 있는 교장선생님. (ⓒ장수중학교)


강의가 끝난 뒤, 점심식사를 사주겠다고 하셔서 함께 학교 현관을 나서는데 교장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저... 차가 없습니다. 소장님 차를 좀 얻어 타도 되겠습니까?”

“아니 무슨 교장선생님이 또 차가 없어요?”

내가 힐난하듯 농담을 하자 교장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데, 정부에서 자전거 등록제인가를 시행할 예정이라고 해서, 제가 지금 군청에 장수군 1번을 배정달라고 신청해놓고 있는 중입니다. 하하...”

식당으로 가는 길에 장수가 고향인 논개의 사당 ‘의암사’가 보였습니다.
“논개 사당에 가 보셨냐?”고 해서 “아직 못 가봤다.”고 했더니, 잠깐 들리자고 해서 들렸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장수에 부임해서 보니, 친일파 화가 김은호가 그린 논개 초상화가 사당에 걸려있더랍니다.
독재정권 시대에 정부가 만든 ‘표준영정’들 중에는 친일파 화가의 작품들이 많습니다.
특히 세종대왕 표준영정은 친일파 화가가 자신의 젊은 시절 얼굴과 거의 같게 그렸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친일파의 얼굴을 우러러보고 있는 셈입니다.

교장선생님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논개 초상화를 친일파 화가가 그렸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생각으로 마을 유지들과 모임을 만들어, 논개 초상화를 바꾸는 데 또 몇 년이 걸렸답니다.
문화관광부장관과 맞서 싸워야 하는 일이어서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논개의 성인 ‘주(朱)’ 씨 집안 여성들의 체형과 얼굴 모습을 조사해 만든 새 초상화가 논개사당에 걸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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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개사당에 견학나온 청소년단체 회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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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논개 초상화와 새로 바뀐 영정. 예전의 전형적인 미인도 모습보다 새로 바뀐 초상화가 훨씬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 학교에는 ‘교장실’도 없었습니다.
맨처음 저에게 연락한 선생님은 “학교에 도착하면 우선 교장선생님을 만나라.”고 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교장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교육사랑방’이란 팻말이 달려있는 방에 교장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 방은 학교에서 가장 마음 편한 공간이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몸이 불편하다’는 등의 이유로 제 강의 중간에 나간 학생들이 그 방에 모여서 교장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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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프로그램은 학생들이 학교에 출석하지 않는 ‘놀토’에 진행됐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교육은 선택”이라는 것이 평소의 소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석을 부르지도 않았고 그날 학교에 오지 않는다고 해서 특별한 불이익을 받는 것도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해 학생들을 설득해서 ‘선택’하도록 했고, 대상 학생과 학부모들이 거의 대부분 참석했습니다.

일제고사와 체험학습을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는 이유로(언론은 일제고사를 ‘거부’했다고 표현하지만 학생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한 것이니 ‘거부’가 아니라 ‘선택’이 맞는 표현입니다) 교육당국으로부터 두 번이나 징계를 받으셨던 김인봉 교장선생님, 그 분이 지난 5월 간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고, 오늘 아침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정말 훌륭한 선생님 한 분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끔 좋은 사람들을 너무 빨리 데려가시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이지만, 솔직히 원망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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