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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어디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유재운 씨는 겁이 없군요”“네?”“간뎅이가 부었어요”“아 네~!”(뒷머리 긁적긁적…)무슨 이야긴고 하니 며칠 전 갑자기 호흡곤란 증세가 일어났다.

급히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간과 늑막이 부어서 폐를 압박하고 있기 때문에 호흡곤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한번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불과 두 달 전에 치질수술을 받은 터라 집사람 걱정이 컸던가 보다. 노동운동 한답시고 잘 먹지도 못하는데 술은 쉬지 않고 매일 먹어대니 견디다 못한 내 몸이 파업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자라면서 여태껏 약한 몸 때문에 부모님 속 엄청 썩이고도 모자라 이제는 내 아내까지도 내 몸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나는 태어나길 여덟 달 반 만에 태어났다.

이른바 ‘팔삭동이’가 바로 나다.

너무 미숙아라서 인큐베이터에 들어갈 수조차 없는, 그러니까 들어간다 하더라도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는 상태여서 그냥 집으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단다.

그래서 윗목에 밀어 놓고 죽기만 기다리는데 몇날 며칠이 가도 겨우겨우 숨만 쉬면서 몇 달을 살아 있더란다.

1년 후 출생신고를 하는 바람에 나는 친구들보다 주민등록상으로는 한 살이 적다.그리고는 다섯 살 때 트럭이랑 누가 이기나 박치기를 하는 바람에 또 한 번 죽다 살아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한강대교에서 원효로로 빠지는 다리목에서 거꾸로 떨어졌으나(약 5미터 정도) 팔만 부러지고 살아났다.

그리고는 별 탈 없이 지냈는데 대학 1학년 때 폐결핵을 앓게 됐다.

그리고는 그 해 연말에 연탄가스를 징하게 먹어서 오른쪽 반신불수가 됐다.

그래서 군 입대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병역6급을 받았다.6급은 장애인들이 받는 급수인데 키 174cm, 폐결핵 말기에, 반신불수에, 몸무게 42kg이 나의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학교는 제적당했다. 삼수를 한답시고 다시 입시준비를 하다가 결국 피를 토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결핵요양소에서 1년 살다가 나와서 할 일 없이 빈둥빈둥 놀다가 개나 키울까 했었는데(식용으로) 어찌어찌 하다가 애니메이션을 하게 되었다.

일 하다가 피가 쏟아지면 얼른 입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가 토하고는 다시 일을 하고…. 물론 남들 모르게 말이다.

한번은 세 명이 철야를 하는데 또 피가 터졌다.

얼른 화장실로 달려가 토하고 있는데 옆방에 선배 하나가 들어와서 일을 보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술 좀 적당히 먹어라 임마.” 아마 옆방에서 누가 기침을 하면서 무언가를 토하고 있는데 자기가 생각하기에 아까 내가 입 틀어막고 뛰쳐나가는 걸 본 모양이었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남은 죽겠다고 피를 토하고 있는데 옆방에서 느긋하게 볼일을 보면서 술 좀 적당히 먹으라고 충고를 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시라. 그때는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산업이 호황기였다.

일반적으로 노동집약적 제조업은 제3세계 후진개발도상국으로 넘어오게 되어 있는 게 인건비 우위의 법칙이 아닌가?

그래서 한때 호황을 누리던 신발, 가방, 가발, 의류는 요즘 다 작살나지 않았는가!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그 때 당시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싼 담배인 ‘솔’이 500원일 때 동화 한 장당 500원을 받았다.

지금 제일 비싼 담배가 2,000원인데 동화 한 장당 750원을 받는다.

상대적 빈곤이 엄청나게 심화되었다는 이야기다. 대기업 과장들의 월급이 약 50만 원 할 때 애니메이터들이 한 달에 벌어들이는 수입이 약 200~300 정도가 되었다.

물론 잘나가는 사람들 이야기지만 아무리 못나가도 그들의 절반은 되지 않았겠는가. 그런 호황을 지금은 후발 도상국인 베트남 내지는 필리핀, 중국에서 누리고 있다.

그래서 과거의 향수를 못 잊는 우리나라 애니메이터들이 그들 나라에 파견을 나가서 우리의 노하우를 열심히 가르치고 있다.

물론 그들은 그들 나라에서 귀족처럼 살고 있다고 들었다. 매국노가 달리 있는 게 아니다.

IMF 때 늘어난 환차익으로 강남 일대에 큰 건물을 사들인 회사도 여럿 있다.

원래 OEM(주문자 상표 제작 부착방식)이라는 게 먼저 선 계약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 환율이 낮을 때 한 계약이 환율이 올라가 버리니 떼돈을 벌 수밖에…. 현장 노동자에게 오히려 고통분담 차원이라며 단가를 깎는 파렴치범도 있었다. 그렇게 살다가 노태우의 재입학 조치로 복학을 했다.

그리곤 애니메이션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서 졸업을 했다.

재입학하기 전 1987년도에 애니메이션노조 건설 시도를 했었다.

물론 그때는 말단 애니메이터였고 다른 애니메이터들도 그리 불편함이 없었으니 당연히 실패했다.

그래서 감독이 되기 전까진 노조에 노자도 꺼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애니메이션 처음 하던 그때 애니메이터는 의료보험과 산재보험이 됐었다.

그리고 야근하면 야근비, 철야하면 철야비, 철야 시 주변 여관을 잡아주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았다.

물론 초과수당과 보너스도 지급되었다.

지금은 보험은 온 데 간 데 없고 야근과 철야는 알아서 기고, 잠은 회사 바닥에 신문지 깔고 잔다.

초과수당과 보너스는 무슨 말인지 모른다. 세월은 흘러 나의 실력을 인정받고 나서 내 밑에 후배들이 많이 생긴 다음 1999년 7월 31일에 노조를 건설했다.

그 이름하야 ‘전국 애니메이션 노동조합’!

왜 전국 조직을 만들게 됐느냐 하면 단사조직을 만들려는 시도는 몇 번 있어 왔는데 만들려고 시도하면 일거리와 사람들을 옆 회사로 전부 옮겨버리니 노조 건설을 시도한 사람들만 병신이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전국조직을 만들게 된 것이다. 만들고 나서 한 일은 별로 없다.

단지 이전에는 부당노동행위가 발생하면 벙어리 냉가슴만 앓다가 포기하는 예도 있었고 하다못해 체불이 발생해도 근로자인정을 못 받으니 민사로 해결하게 되는데 질질 끄는 민사에 질려버려서 포기해 버리는 예가 빈번했다.

그러나 이제는 형사고발이 먼저 들어가게 되니까 사용자들도 약간은 겁을 먹는 것 같다. 가장 큰 효자라고나 할까?

애니메이터에게 퇴직금을 발생시킨 사건이다.(무려 5년 동안 법정투쟁을 통해서 승리한 일대 사건이다) 그 전에는 부당노동행위가 발생하면 내가 지방노동사무소에 가서 싸워서야 민원접수가 됐었는데 이제는 그냥 된다.현재 노조는 큰 싸움을 준비 중이다.

그 싸움은 아직 밝히지 못하겠다.

기분 나쁜 독자는 우리 애니메이션 노조 사이트에 부지런히 들어오시라!

언젠가는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 꽤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일단 민주노총 공공연맹 문화예술 노조 애니메이션 노조 지부장을 하고 있고 민주노총 서울본부 남동지구 협의회 의장도 한다. 그리고 결합하는 단위로는 서울본부 비정규 특위, 민주노총 특수고용 대책회의, 전국 비정규 대표자 연대회의와 남동지구 미조직 비정규 특위장을 겸임하고 있다. 자랑이 아닌 우리의 열악한 현실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도대체 한 인간이 이 많은 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비정규직 동지들은 나보다도 더 많은 일들을 혼자서 해내고 있다.

불쌍하지 않은가? 혹은 대견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동지들의 힘이 절대 필요하다. 그래야만 노동자는 하나가 될 수 있고 노동해방 세상도 앞당길 수 있다. 항상 먼저 가신 열사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항상 불만이다. 이렇게밖에 안 되는가 하는 자책으로 밤을 지새운다. 그러나 한 술 밥에 배부르랴! 이렇게 걸어가라고… 그저 묵묵히 걸어가라고 과학이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그리 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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