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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익, 곽재규...........그리고 김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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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떠나보내며...............

이곳을 찾아오시는 동지들중에 아시는 분들도 꽤나 있지 않나 해서 어줍잖은 글을 올려봅니다.

노동운동판에 "숲속홍길동"이라는 필명을 쓰는 이상현이라는 동지가 있습니다.  아니 있었습니다.

항상 카메라 들고 다니면서 투쟁하는 동지들 동영상으로 연대하던 동지였는데 며칠전에 죽었다네요.

발견당시 목을 맨 상태였고 거주하던 원룸에서 며칠간 안보이고 이상하니까 아마 집주인이 신고를 했던 모양입니다.

어제 발견했는데 사망한지 3~4일 정도 됐다고 합니다.

방에는 온통 소주병이 굴러다니고 ...... 아마 극심한 경제적고통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것 같습니다.

저랑 술 먹을때마다 자살하는 동지들을 많이 비판했었는데 결국 자신이 이래버리니 환장하겠습니다.

사실 자본주의 하에서 경제를 우선시하지 않고 말하자면 먹고사는데 연연하지 않고 운동하기가 거시기 합니다.

이 동지는 그저 순수한 연대활동을 했던 것이지요.

뭐 투쟁사업장 동지들 현장에 가서 영상연대하고 밥이나 얻어먹고 그래 살았는데 이래 갔습니다.

 

멀리 한진중공업에서는 공권력을 투입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고 연대해 달라고 아우성이 빗발치는데 저는 이 친구 편하게  마지막 가는 길 편하게 보내주려고 시신이 발견된 인천에서 서울로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먹고 그저 수주 한병먹고 컴앞에 앉아있는데 홍길동이랑 술먹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많이 먹었죠..........근 10년을 알고 지냈으니까요.

다투기도하고 (제가 술먹을땐 좀 직설을 하는 편이라 많이 불편해 했습니다) 또 풀어지고 .......... 2009년 용산 연대집회 갔다가 버스에 치여 큰 사고를 당했을 때도 제일 먼저 병원으로 달려와준 동지였습니다.

수술 끝나고 침대에 누워있는 그 초췌한 영상을 올려주기도 했고 2006년 이랜드 투쟁 때 상암점에서 경찰놈들한테 코를 얻어 터져서 코피가 줄줄나는 영상을 하필이면 PD수첩에 기고해서 저 아는 사람들한테 전화도 많이 받게 한 동지입니다.  

 

이 동지 홈피에 마지막 쓴 글이 바로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원이라도 이만원이라도 좋으니 제발 돈좀 보내주세요."

저야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금전적인 능력은 완전히 꽝인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이 그래도 조금 보내줬다는 그래서 급한 불 끄고 다시 운동하겠다는 문자를 받은게 엊그제 인데 도데체 왜 죽었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아 하여튼 그렇게 갔네요.

 

동지들 우울증 조심하십시오.

현장에서 죽는 사람들 죄다 우울증 때문입니다.

심정에 이상이 생기면 지체말고 병원으로 가셔야 합니다.

가뜩이나 비도와서 더 우울한데 우울하 이야기 하나 올렸습니다.

건강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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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희망의버스를 탑시다.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2차 희망의 버스’ 참여 제안서

수신 : 제 사회단체 및 개인

발신 :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2차 희망의 버스 ‘깔깔깔’ 기획단

문서번호 : 2011-6-15

연락처 : 송경동(010-8278-3097)

 

1. 우리 사회의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일하시는 귀 단체에 연대의 인사를 드립니다.

 

2. 지난 6.11일 ‘1차 희망의 버스’는 부산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157일째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 님과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 다녀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희망’들이 싹트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지난 십수년간 진행되어 온 정리해고, 구조조정, 비정규직화에 대한 사회적 저항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3. 과정에 피치못하게 탄압의 벽을 넘어야 했지만 ‘희망의 버스’ 참가단은 너무도 평화로운 시민들의 행진이었습니다.

 

4. 1차 희망의 버스 참가단들은 이런 연대의 버스 운동이 김진숙 씨를 살아 내려오게 하고,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의 올바른 사회적 해결을 위해 큰 힘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며, 2차 희망의 버스를 운행할 것을 범사회적으로 제안드립니다. 이 운동은 비단 부산과 한진중공업에 국한되지 않고, 15분이 죽어간 쌍용차 정리해고 문제 등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꿔나가는 소중한 운동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5. 이에 귀 단체에서 ‘2차 희망의 버스 185대’ 사업에 적극 함께 연대해 주실 것을 요청드립니다. 부디 우리 모두의 연대의 힘으로 조금은 더 평범한 사람들이 자유롭고 행복한 사회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 2차 희망의 버스 진행(가안) 및 요청 사항

 

1. 개요

 

○ 출발 : 2011년 7월 9일 오후 1시(부산 6시 30분 도착 기준)

○ 출발 장소 : 전국 동시 다발(서울 / 시청광장 앞 재능교육비정규직 농성장)

○ 참가비 : 30.000원(각 지역별로 다르게 잡으실 수 있습니다.)

○ 참가 및 연대 게시판 : 다음 까페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검색

http://cafe.daum.net/happylaborworld

○ 참가비 및 후원금 입금계좌 : 박래군(농협 351-0199-8560-53)

○ 문의 및 연락처 : 010-8278-3097(송경동 시인)

 

2. 구체 요청 사항

 

- 각 단체 별로 ‘2차 희망의 버스’ 참가를 조직적으로 결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지역 내 사회단체 및 양심적 개인들과 긴급히 소통해서 ‘2차 지역 희망의 버스’ 조직을 결의해 주십시오.

- 타 지역이라도 소통이 가능하신 분들께 ‘2차 희망의 버스’ 지역 조직을 부탁해 주십시오.

- 해당 사이트, 메일링, 기고 활동 등을 통해 ‘2차 희망의 버스’를 홍보해 주십시오.

- 각 단체나 커뮤니티 별로 별도로 참가자를 모아 일괄 신청해 주시면 좋습니다.

- ‘깔깔깔’ 기획단에 일꾼을 파견해 주시길 바랍니다.

- 정리된 내용을 전체 진행팀(깔깔깔 기획팀)에게 빠른 시일 내 전달해 주십시오.

 

3. 참가자 관련

 

- 1박 2일 노숙을 기본으로 하는 연대 활동입니다. 텐트 등을 준비해 주시면 좋습니다.

- 먹거리 등은 이후 연대 과정에서 자발적인 나눔과 참여 등을 통해 해결해 나갈 계획입니다.

- 각 지역 참가단은 가능한 자발적 공연단, 참여 프로그램 등을 준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각 단체 및 지역 참가단은 희망의 버스 한 대당 2분의 ‘깔깔깔’을 선정해 버스 운행과, 전체 진행요원으로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이 버스는 희망을 노래하려는 버스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별첨] ‘2차 희망의 버스’ 공개 제안문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2차 희망의 버스> ‘깔깔깔’ 기획단

 

[별첨] 공개 제안문 - 송경동 시인

 

‘2차 희망의 버스’를 타러 가요

 

 

지난 6월 11일 밤 12시 머나먼 부산 영도에서 촛불을 들었던, 가난한 우리는 다시 2차 ‘희망의 버스’를 타기로 했습니다.

한국근현대사의 아픔과 절망의 상징인 저 85호 크레인 위에 있는 한 여성노동자를 구하러 갑니다.

 

‘당신이 희망입니다’라고 적혀진 양말 하나씩을 나눠주며, 우리가 떠난 뒤 다가 올 탄압과 고요가 두려워 서럽게 울던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들의 아내들과 아이들을 구하러 갑니다.

십수년간 목 잘려나간 수백만 노동자들, 900만에 이른 이 참혹한 비정규직 시대를 구하러 갑니다. 그 아픔의 현장에서 두 어깨가 축 늘어진 우리들의 ‘소금꽃’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들을 구하러 갑니다.

다시는 누구도 함부로 잘려 생의 벼랑에 서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갑니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구하러 갑니다.

신자유주의 시대 돈만이 최고인 이 살벌한 착취와 경쟁의 시대를 넘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평화롭고 평등하며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런 세상을 우리 미래 세대에게 물려주기 위해 갑니다.

 

이 버스는 모든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에 반대하고, 그 누구의 삶이던 조금은 더 안전한 사회를 우리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만들자는 연대의 버스, 실천의 버스입니다. 왜 모두가 연대해서 생산하는 사회적 가치가 소수 자본가들의 금고로만 들어가야 하는지를 질문하고자 하는 버스입니다. 그래서 이 버스는 한국 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염원하는 희망의 버스이기도 합니다. 누가 얼굴 내밀자고 가는 버스도 아니고, 누굴 또 시대는 변하지 않은 채 영웅으로 만들자고 가는 버스가 아닙니다. 모두가 평등하고 평화로워야 한다는 가장 단순한 진실들이 맑고 투명해지기를 바라는 버스입니다. 너무나 평화로운 버스이고, 너무나 소박한 버스이고, 너무나 아름다운 버스입니다.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2차 희망의 버스 185대가 전국 각지에서 아이들의 손을 잡고, 연인의 손을 잡고, 친구의 손을 잡고, 동지의 손을 잡고 출발하는 2011년 7월 9일은, 아마도 한국사회 운동의 역사상 중요한 날로, 우리가 잊지 못할 가장 아름다운 역사의 한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날은 80년 광주의 5.18과 87년 6월과 7,8,9를 잇는, 2008년 촛불광장을 잇는 소중한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그런 희망으로 다시 2차 희망의 버스 185대의 출발을 전 사회적으로 제안합니다. 6.11일 그 눈물겹고도 신나던 밤을 함께 했던 모든 날라리들께 제안합니다. 모든 지역의 숨은 양심들께 제안합니다. 광주에서, 순천에서, 전주에서, 수원에서, 평택에서, 하남에서 또 어디에서 1차 희망의 버스를 타주신 소중한 분들의 마음을 모아 제안합니다. 다른 세상으로 이제 우리 출발합시다. 이제 한진중공업의 저 소통부재의 낮은 담이 아니라, 행복에 겨운 소수들을 위해 평범한 다수가 고통의 바다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이 잘못된 장벽을 넘읍시다.

 

이번엔 185대입니다. 그날만 가는 것이 아닙니다. 7월 9일을 두고, 우리 모두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합시다. 벌써 누구는 일주일마다 희망의 봉고, 희망의 자전거를 타고 가겠다고 합니다. 그날 김치 한 조각이 없어 맨밥을 먹던 설움을 없애고자 한 차 분량의 쌀과 김치를 보내겠다는 촛불 시민들이 계십니다. 사진가들은 부산 지역 작가들과 함께 한 달 동안 한진의 절망을 카메라에 담겠다고 합니다. 백기완 선생님과 박창수 열사 아버님 등 유가협 어르신들이 맨 첫 차를 타시겠다고 합니다. 이런 연대의 마음들이, 공동체의 마음들이 잡혀 갈 일이라면 1번으로 자신들을 내세워주시라고 합니다.

 

7월 9일 전까지 우리 모든 귀를 열고, 눈을 열고, 손을 내고, 발을 냅시다. 7월 9일 전에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가 해결되고, 저 눈물겨운 여성노동자 김진숙이 살아 내려올 수 있게 합시다. 매일 계단을 내려가는 훈련을 한다는 저 눈에 피눈물이 아니라 환한 웃음을 돌려줍시다.

 

그가 정말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열사의 떠도는 혼들을 고이 안고 이 안전한 평지로 내려 올 수 있게 합시다. 6월 12일 우리를 배웅해주며 그 누구랄 것도 없이 펑펑 울던 그 가족들과 아이들의 눈물을 딱아 줍시다.

그렇게 모두가 눈물바람을 하며 떠나온 뒷날, 김진숙 선배가 트위터에 썼더군요.

 

“희망의 버스 한번만 더 와주면 저도 살아 내려 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울지 맙시다. 더 이상 우리만 피눈물을 흘리지 맙시다. 더 이상 절망하지 맙시다.

그 시간에 조직합시다. 그 시간에 단 한 대의 버스라도 더 만듭시다. 누가 말을 걸어 올 거라고 기다리지 말고, 김진숙이 열 여덟 시절 했던 화진여객 버스 안내양처럼 내가 이 희망의 버스의 안내원이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주십시오.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아름다운 소풍을 가는 길이라고 말해 주시고, 저들의 모든 비방과 왜곡을 넘어 진정한 평화마음의 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시오.

 

간곡히 호소합니다.

이 어두운 시대 절망의 벽을 넘으려면 내 마음을, 우리의 마음을 먼저 열어야 합니다. 그 열린 마음들이 전혀 다른 열린 세계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라 믿어 봅니다.

 

 

* 이 공개 제안문은, 6월 15일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전체회의(민주노총, 인권단체, 종교단체, 문화단체, 사회단체, 학술단체 등 50여개 사회단체 참여) 결정과, 당일 오후 2시 기자회견 시 백기완 선생님을 비롯한 사회원로 선생님들, 그리고, 6.11일 함께 해주었던 서울과 지역의 희망버스 참가자 분들의 마음을 모아 작성되었습니다.




신유아 SHIN YOUA
문화연대 조직운영센터
82-2-773-7707/010-9270-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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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 법! (하종강의 노동과 꿈에서 "산하"글 펌)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는가? 라는 질문을 종종 하고 듣게 된다.
나는 이 말에서 두 가지를 읽는다.
하나는 귀신도 관(官)을 무서워했듯, 우리 조상들 이하 우리는 무법천지보다는 촘촘하고도 세밀한 법의 다스림에 더 익숙했다는 것 하나, 그리고 그 법이란 사람을 납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골탕 먹이고 짜내고 뒤통수 때리는 데에 더 수완을 발휘해 왔다는 것. 오죽하면 말도 나오지 않을 만큼 어이가 없는 상황에서 '법'을 갖다 대겠는가.

 "짐이 국가다."라기보다는 "법이 짐이다."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전통을 가진 나라에서 그 법이 아둔한 혼군이 되었을 때, 또는 사악한 폭군이 되었을 때 죽어나는 것은 결국 백성들일 수 밖에 없고 법은 호랑이보다도 무서울 수 밖에 없다.
 
하물며 나랏님 말끝마다 묻어나는 것이 공정한 사회요, 경찰서 현관마다 붙어 있는 것이 준법의 질서인 나라다.
법을 배우지 않고는 출세의 대열에 끼는 것이 낙타가 바늘 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우며, 몇 회 졸업생 아무개 사법고시 패스했다면 모교 담장이 축 합격 플래카드로 가려지는 땅이다.
이런 곳에서 어찌 법이 감히 어두울 수 있으며 설마 간교할 수 있으랴. 행여나 그렇다면 그 위에서 살아가는 별 볼 일 없는 이들은 죽었다고 복창하는 것 외에는 수가 없을 것이다.
두 팔을 벌리고 물기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를 되뇌는 것 말고는 외나무다릿길도 없을 것이다.

 5월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4부(이창형 부장판사)는 장례식장 주변에서 피켓을 들고 행진을 한 혐의로 기소된 사회단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회원 김모씨 등 4명에게 1심과 마찬가지로 벌금 70만원을, 이모 씨 등 2명에게 벌금 50만원을 각각 선고했다.
재판부는 "김씨 등이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일렬로 장례식장 앞에서 병원 정문까지 함께 걸어간 것은 여러 사람이 같은 목적을 갖고 일반인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는 장소에서 행진해 불특정 다수의 의견에 영향을 주는 행위이므로 집시법이 정한 시위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재판부에 따르면 “집시법상 신고의무가 면제되는 것은 학문, 예술, 체육, 종교, 의식, 친목, 오락, 관혼상제, 국경행사에 관한 `집회'이지 `시위'가 아니"라고 한다.
 
멀쩡히 한 회사를 다니던 젊은이들 수십 명이 백혈병으로 떼죽음을 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는데, 회사 측은 전혀 책임이 없다고 우기는 판에, "다른 사람들은 멀쩡한데 왜 그 사람들만 그러냐?"는 어이없는 질문만 무성한 터에, 꽃에 비유하기도 아까운 나이에 죽어간 사람의 장례식에서 울부짖으며 누구를 욕한 것도 아니고, 그 관짝을 끌고 이태원의 회장네에 쳐들어간 것도 아니고, '장례식장에서 병원 정문'까지 아무 소리 않고 걸어가기만 했는데 '신고 의무'를 다하지 않았으니 유죄라는 것이다.

그래도 법은 법이다.
법이 그렇다면 그렇다고 치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억울하고 아파도 그 법의 서슬은 나 뿐 아니라 모두에게 공통으로 푸르리라는 믿음이라도 있어야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법이지만 감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날 한 나라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야윌 대로 야위고 허할 대로 허한 법에 대한 신뢰의 허리를 꺾는다.
 
19일 새벽. 회사의 직장 폐쇄에 항의하던 유성기업 노조원들에게 회사측 용역이 몰던 차가 돌진했다.
술 취해서 횡단보도를 건너던 사람을 친 게 아니다.
아차 주의를 놓쳐 갑자기 튀어나온 누군가를 들이받은 게 아니다.
회사가 부른 용역이 대포차를 가지고 노조원들의 대열을 덮쳤다. 다친 사람만 13명이다.
이건 한 곳에 몰려 있는 사람들에게 차량이 돌진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고의적이고 의도적으로 뼈와 살로 이뤄진, 그리고 목청 돋워 뭔가를 외치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쇳덩이를 맹렬하게 갖다 부딪친 사실을 액면 그대로 전달할 뿐이다.
명동 길거리를 막고 물어 보자. 요즘 외국인도 많던데 상관없이 물어 보자. 이 상황이 '교통 사고'인가. 외국인이라면 그 나라에서는 이걸 교통사고라고 치는가.
 
 사측은 용역 한 명을 자수시켰다.
대치 중에 차량을 돌진시켜 사람을 깔아뭉갠 혐의에 경찰은 놀랍게도 '교통사고 특례법'을 적용하여 '뺑소니'로 처리한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문제의 용역의 죄는 정상적인 주행 중에 전방 주시 태만으로 13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차로 치고는 피해 보상과 피해자 구완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그냥 집에 가 버린 것 뿐이다.
이게 법인가. 이걸 우리는 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 법이 다스린다는 미명으로 우리는 이 나라를 법치국가라 칭할 수 있는가.
 

 이렇게 해 놓고도 회사측은 '불법파업'을 이유로 빨리 공권력을 동원하라고 아우성이며, 전경련은 '현대자동차가 멈추고 있다."며 어서 밟아 달라고 안달을 하고 있다.
쌍용 자동차 진압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긴다는 경찰청장 휘하의 기동대는 이미 공장 밖에 진을 치고 있다.
그들은 합법인가. 정히 그렇다면, 헌법이 보장하고 노동법에 명기된 파업의 권리를 행사하는 노동자는 어떻게 불법인가. 현대자동차를 멈추게 하면 불법인가.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경제에 손실을 끼칠 수 없다는 법이라도 있는가.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는가.
 

 사람이면 다 사람이 아니고 사람 같아야 사람이듯이, 법도 법 같아야 법인 법이다.
이런 판국에 법을 가르치는 것은 강한 자에게는 오만을, 약한 자에게는 굴욕을 깨우치는 격일 뿐이다.
이런 형국에 그래도 법을 지켜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따르지 않으면 죽음 뿐이라는 폭군의 경고에 지나지 않는다.
다리가 돌아가고 얼굴이 터지고 귀가 찢어진 채 아스팔트에 내팽개쳐진 '산업역군'들이 묻는다. 파업 후 시간당 손실이 엄청나다는데, 그만큼 돈을 벌어 주던 유능한 일꾼들이 악을 쓰며 질문한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그에 대답할 의무가 있다. 대답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img src="http://www.hadream.com/zb40pl3/data/free/30167515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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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강풀의 26년 영화화를 막는가!

31년 전, 그러니까 1980년 5월에 몇 줄씩 검은 띠로 문장이 지워진 채 발행되곤 하던 신문이나 사회안전과 국가안전을 보장하겠다는 국보위의 노고를 치하하는 방송에서 광주의 소요는 고정간첩과 거기에 휘둘리는 폭도들의 소행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그리고 군이 성공적으로 간첩과 폭도를 소탕했다는 뉴스가 이어졌다.
우리는 그때 그곳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흉흉한 소문을 듣게 되었고, 광주의 소요를 성공적으로 진압해서 사회안전과 국가안보를 지킨 공을 내세워 그해 가을,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그해 5월,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도시에 흐른 피를 제물삼은 권력의 실체가 무엇인지 밝히는 싸움이 길고도 험하게 이어진 것이. 처음에는 소문이었다.
간첩도, 폭도도 아니라더라, 일반 시민들이었다더라, 만삭의 임산부를 어찌 했다더라, 어린 학생도 무참히 당했다더라, 총만 쏜 것이 아니라더라, 대검으로 막 쑤셔댔다더라...

외국기자의 비디오에 의해 밝혀진 5월 광주의 진실

 그러다 은밀히 외국 기자가 촬영한 비디오가 돌았고, 사진전이 열렸다.
처음에는 지하공간에서, 나중에는 학교며 교회, 성당, 시민모임같이 사람들이 모이는 여러 곳에서. 무시무시한 진실이 ‘말’이나 글이 아니라 생생한 ‘영상’으로 눈앞에 되살아나면서 아무도 제3자가 될 수 없었다.
학교에서, 일터에서, 거리거리에서 진실을 본 자, 불의를 참을 수 없는 자들이 ‘물러가라’고 외치다 또 많은 이들이 피 흘리고, 목숨을 잃었다.
마침내는 전국 방방곡곡 모든 도시가 ‘광주’가 되고서야 결국 군사독재는 끝났다.

 군사독재가 끝났다고 해서 바로 ‘그해 5월, 광주’도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한 도시를 제물 삼아 권력을 잡았던 이에게 죄를 묻기보다 ‘화해와 용서’라는 이름으로 뭉개버린 정치놀음은 총탄과 대검날 못지않게 역사와 진실을 난도질했다. 
‘광주 비디오’와 ‘광주 사진’을 통해 영상의 힘을 알게 된 저들은 한사코 진실이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했고, 그래서 5·18이 영화나 드라마로 다루어지지 못하도록 했다.

 '오! 꿈의 나라' 상영 집요히 막은 권력의 '공륜'

 그러므로 정치권에서 5·18에 대한 최초의 장편 극영화 <오! 꿈의 나라>(1989년)가 16mm독립영화로 제작되었을 때, 사전 제작신고 및 사전 심의 규정을 어겼다며 불법으로 몰아 상영을 막고자 기를 쓴 것도 당연하다.
영화를 제작한 독립영화집단 장산곶매는 “16mm 영화가 제작신고나 사전심의 없이 공공장소에서 공연되어 왔는데도 유독 이 영화를 탄압하는 것은 광주민중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이기 때문에 이의 대중적 공개를 방해하려는 의도이며 영화인들은 이 탄압이 민족영화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을 전제로 한 것으로 인식하면서 결연한 투쟁으로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수호할 것을 다짐”했지만,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륜)의 규정을 빌어 벌어진 상영금지 공작은 집요했다.

<img src="http://www.mediatoday.co.kr/news/photo/201105/95309_82499_495.jpg">

    
영화 '오! 꿈의나라' 포스터

 
그 공륜은 1996년 헌법재판소로부터 헌법이 금지하는 사전검열기관이라는 판정을 받아 영상물등급위원회로 이름과 역할이 바뀌게 되었고,  <오! 꿈의 나라>는 ‘표현의 자유’ 를 위한 영화 운동의 선례로 남게 되었다.
<오! 꿈의 나라>의 각본은 <선택>의 홍기선 감독과 <알 포인트>의 공수창 감독이, 연출은  <접속>의 장윤현 감독,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이은 감독,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의 장동홍 감독이 공동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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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활의 노래'

 
이렇게 여전히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던 시기인 1990년, "한국영화에 닥쳐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영화진흥과 창작자유를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강하고 자주적인 영화를 만들어내는 일 자체는 계속 영화인의 책임으로 남습니다." 라는 인식을 가진 젊은 영화인들이 모여 독립 프로덕션 '새빛 영화제작소'를 만들고, 첫 영화로 만든 이정국 감독의 <부활의 노래>가 5·18에 대한 최초의 35mm 극영화이자 정식 제도권의 스크린에서 상영된 영화다.

그러나 여전히 심의라는 암초에 걸려 <부활의 노래>는 무려 28분13초가 싹둑 잘리고서야 극장에 걸렸고, 관객은 상처투성이로 만듦새가 온전하지 못한 상태의 영화를 보려하지 않았다.
3년이 지나서야 공륜 재심에서 무수정 통과되었지만 이미 대중의 관심은 식어버린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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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하사탕'

 

'박하사탕'·'화려한 휴가' 대중적 성공 뒤의 아쉬움…'박제화' 아닌 현재진행형 그려야

이렇게 가위질을 일삼던 공륜이 퇴출된 해인 1996년, 영화가 비로소 검열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만들어진 장선우 감독의 <꽃잎>은 멀티플렉스 이전 시기에 서울 관객 21만을 불러들여 5·18에 대한 영화로는 처음으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1999년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47만, 그리고 2007년에 개봉된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는 무려 730만이라는 흥행 성적을 기록하면서 5·18은 영화 소재로서의 대중성을 키워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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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려한 휴가>를 당시 중학생이었던 조카와 함께 보았다.
아직 만 15세가 안되었던 조카는 사회 시간에 배웠던 5·18을 꼭 영화로 보고 싶다며 보호자인 나와 함께 극장에 가서,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눈물을 흘리며 보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나서는 “마음 아프긴 하지만... 좀 아쉽고 뭔가 부족해.” 라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저런 일이 벌어졌었다는 걸 영화로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저런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여전히 잘 살고 있잖아.

혹시 <26년>이라는 만화 봤어?
난, 영화가 그 만화 정도는 얘기 하는 줄 알았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학교에서도 배웠는데, 저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이 멀쩡히 살고 있는데 대해서 영화같은 건 뭔가 말해줄 줄 알았지.”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오! 꿈의 나라>에서 <화려한 휴가>까지 5·18에 대한 영화들은 모두 ‘그해 5월, 광주’를 재현하는데, 그러니까 과거를 그려내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꽃잎>의 주인공은 뒤늦게 친구의 여동생을 찾아 떠나고, <박하사탕>은 아예 영화 자체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화려한 휴가>는 광주비디오와 사진으로 이미 보았던 딱 그때 그 장소를 소환해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동선을 따라 공간을 그려낸다.
아직 영화는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아직 5·18이 과거 속에서 박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때 그 시절을 겪지 않았던 세대가 더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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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화려한 휴가'

 
석연치 않은 '당선작 없음'의 ‘5ㆍ18민중항쟁 극영화 시나리오 공모’

 그렇기에 ‘5ㆍ18 관련 소재를 영화화함으로써 대중적 파급효과가 큰 영화를 통해 5ㆍ  18 정신의 승화를 꾀하고, 세계적으로 보급하여 새로운 관심과 관점을 유도하고, 국내외 영화 팬들에게 5ㆍ18정신 내면화에 기여’하겠다는 취지로 2006년 5ㆍ18기념재단이 1억 원의 상금을 내걸고 ‘5ㆍ18민중항쟁 극영화 시나리오 공모’를 크게 벌였다가, 96편의 응모작 가운데 한 편도 당선작을 내지 못하는 일도 생겼던 것이리라.
당선작을 선정하지 못한 재단 측의 심사평은 대부분의 응모작이 5ㆍ18을 다큐 형식으로  재구성하거나, 현재를 시점으로 5ㆍ18 당시의 피해자나 가해자가 어떤 형태로든 5ㆍ18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작품들인데, 안타깝게도 이 두 성향의 작품들이 5ㆍ18민중항쟁이라는 소재의 중압감을 극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각 또한 미흡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시나리오 공모 자체가 없던 일이 된 것은 공모 자체의 진정성을 의심스럽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조카가 얘기했던 만화가 강풀의 <26년>의 영화화가 발표되었다.
<26년>은 인터넷을 통해 연재된 웹툰이었다. 5·18로부터 26년이 흐른 시점에서, 남겨진 이들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 왔으며, 무엇 때문에 여전히 고통 받고,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그러나 그것을 막는 것은 또 무언지를 그려낸 <26년>은 아니나 다를까, 곧 영화화가 결정되었다고 보도되었다.
워낙 원작 만화가 강풀이 <아파트>, <순정만화>, <바보>를 비롯해 최근 조용하지만 뚝심있는 흥행기록을 보인 <그대를 사랑합니다>까지 발표하는 만화마다 바로바로 영화판권이 팔려나가는 인기있는 작가이기도 했지만, 특히 <26년>은 연재 당시 일일 조회 수 200만 건, 매회 댓글 2천여 건 이상을 기록했던 화제작이었으니 영화화가 안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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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풀의 '26년

 
화려한 라인업의 탄탄한 이야기 '26년'은 누가 엎었나

 <천하장사 마돈나>로 이름을 얻은 신예감독 이해영에, <미녀는 괴로워>로 당시 충무로의 캐스팅 일순위로 떠올랐던 김아중과 <주먹이 운다>를 비롯해 숱한 작품에서 개성 강한 연기를 보인 유승범이 캐스팅되었다는 기사를 보며 영화가 이렇게 차근차근 나아가는구나 생각했다.
원작 만화가 발표된 후 세월이 흘렀으니 그만큼의 시간을 보태 <29년>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는 영화에 대해 한동안 이런저런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샴푸 광고 모델인 김아중의 계약 조건이 긴 생머리를 유지한다는 것인데, 영화 설정 상 짧은 헤어스타일의 역할을 하려면 어찌해야 할까를 미리 걱정하는 기사까지 있었더랬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설명도 없이 <29년>은 프로젝트 자체가 취소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가 왜 취소되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5·18 당시 시민군의 아이들이 자라, 당시의 최고 권력자를 심판하려 한다는 내용의 영화가 정권이 바뀌면서 만들어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공륜은 없어졌지만, ‘절차로서의 검열’이 아니라 ‘총체적 시스템으로서의 검열’은 여전히 작동 중이라는 것을 <29년> 해프닝은 분명히 보여준다.
아쉽게도 당선작을 선정하지 못했지만 5ㆍ18민중항쟁이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로 탄생할 수 있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더니 슬그머니 발을 뺀 5ㆍ18기념재단도, <29년>이라는 영화 프로젝트를 아무런 해명없이 엎어버린 영화사도, 그런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 영화계도, 그리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도록 남의 집 불구경하듯 무심한 우리 사회도 모두 ‘검열’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총체적인 검열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한국 사회는 30년이 지나도록 ‘1980년 5월 광주’에 대해 여전히 빚지고 있는 것이며, 그 빚에 대해 어린 세대들에게 부끄러워해야 한다.
물려줄 것이 없어서 이런 빚까지 떠넘기는 것도 부끄럽지만, 그 빚에 역사가 이자까지 붙여 더 무거운 짐으로 불려나가고 있는 것을 모르쇠하는 것은 더 참담하다.
그들의 ‘화려한 휴가’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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