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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이 씀

 

엄마,혹시 나 보여?
보여도 보지마.
엄마 못보고 산지가 30년이 넘었네.생각해보니까 내가 그 나이더라구. 엄마 가버린 나이.나 스무살 때.
그땐 왜 그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나몰라.쉰둘인데.쉰둘일뿐인데..그냥 엄마 많이 아프니까,아부지 뵈기싫어 죽겠는데 자꾸 집에와서 있으라하니까,
졸려 죽겠는데 새벽기도 가라 하니까,복수찬 데 돌미나리가 좋다고 한겨울에 그거 뜯어오라 그러니까,병원 갈 돈도 없는 집구석이니까,갈거면 빨랑 가라고 생각한적,
솔직히 많았어.그게 젤 걸리고.
엄마 임종 못본거 다행이라고 생각해.새끼들은 죄다 이기적이니까.
이왕 안볼거면 염하는것도 안봐야했는데 그지같은 외삼촌이 억지로 끌고가서 봐 버렸네.
복어처럼 땡땡해선 시퍼런 심줄이 미나리처럼 돋아났던 배가 시커멓게 푹 꺼졌더라구.
난 그게 다 아부지때문이라고 생각했어.엄마뱃속으로 낳지도 않은 언니들 키우면서 쌓인 스트레스거나.
엄마속이 그렇게 썩어 문드러진 게 나때문이란 생각 끝까지 안하려 했지.
엄마.엄마두 그거 알았어?엄마를 자전거 뒤에 싣고 다니는 걸 내가 참 좋아한 거.평생 40kg이 안넘어 바람에 날릴까 한손으로 등을 받쳐야 했던 우리엄마.
그냥 그렇게 달려서 도망가고 싶었다.어디든.
그걸 할수없었던 나는 번번이 엇나가 홀로 탄 자전거를 하염없이 굴려 갈수없는 길까지 가곤했다.
열다섯살 때.꽤 멀리 갔었다.
안돌아가려 했으니까.
근데 엄마가 보고 싶더라.
내가 자전거 안태워주면 그 무거운 짐을 들고 혼자 시장에서 돌아올 엄마.
산을 내려와 긴 외출에서 돌아오던 그 노을 서럽던 저녁.
장날이었던가봐.오가는 사람이 제법 많았던 먼지나던 신작로.
집언저리쯤에서 눈으로 엄마를 찾는데 엄마보다 먼저본 게 저만치에서 툭하고 떨어지던 주황색 나이롱 바가지였어.흩어지던 콩나물.콩나물위에 떨어지던 눈물.
부산와서 첫월급.그 눈물나는 돈을받아 엄마 쉐타사고 법랑냄비사니까 없더라.
그걸로 내가 지은 죄 갚았다고 생각했어.다.
엄마 유품정리하는데 그딴 게 구석구석에서 나오대.
쉐타는 반다지에서,냄비는 선반위에서 박스채로,중학교때 신문배달해서 사준 털신은 농안에서..
왜 그딴 걸 하나도 안쓰고 죽었냐
이누무 이상한 엄마야.
정신 놓았다가도 진수,진수 부르며 눈을 뜨려 기를쓰던 진수도 갔다.
진수는 니가 좀 거둬줘라.
나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내가 그 새낄 어떻게 거두냐.
엄마찾아 갔으니까 엄마가 거둬.
첫징역 살때 큰언니가 면회를 왔더라.
외포리에서 그 먼길을 오면서 멀미를 으찌 했는지 입술까지 하얘.
제대로 말도 못하고 허리펴고 서있지도 못하고 면회시간이 끝났는데 가면서 그러대.
"그르니 엄마가 일찍 죽길 을마나 다행이냐"..그런 말은 박혀.잘 빠지지도 않고.
그러고보니 살면서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던 날보다 엄마가 없어서 참 다행이다 싶은 날이 더 많았네.
근데두 엄마.보고싶을 때가 있어.한번만,잠깐만이라도,안되면 먼발치에서라도 봤으면 좋겠다 싶은 날이 있어..

-어버이날,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고공농성 120일을 훌쩍 넘기고 있는, 부산 민주노총 지도위원이자 27년 해고자, 한진 조합원, 김진숙 님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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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버스파업 중간보고[참세상 펌]

버스파업 35일간의 사투, 고공단식농성
[인터뷰] 호남고속 김현철, 전북고속 남상훈 쟁대위위원장
문주현 기자 2011.05.04 17:47

[편집자주] 35일간의 망루단식농성을 마치고 전북고속, 신성여객, 호남고속 쟁의대책위원장이 땅을 밟았다.
목숨을 건 망루단식투쟁이기에 회복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을 만날 수 있었던 곳은 병원이 아니라 버스투쟁본부 총회가 있던 민주노총 전북본부에서였다.
아직 전북고속 투쟁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편히 자기 몸을 챙길 여유를 이들은 갖고자 하지 않았다.


버스파업투쟁이 반환점을 돌았다.
시내버스는 현장에서 단체교섭을 쟁취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타결되지 않은 전북고속은 다부진 결의를 모아 투쟁을 이어갈 것이다. 망루단식농성으로 어쩌면 지쳐 있을 호남고속과 전북고속 쟁의대책위원장에게 지금까지의 노력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보았다.

<img src="http://www.newscham.net/data/news/photo/5/52117/g1.jpg">
 
▲  고공농성단식 당시 망루에서. 남상훈 전북고속 지회장(좌), 김현철 호남고속 지회장(가운데), 이성범 신성여객 지회장(우) [출처: 전북고속지회]


삶과 죽음의 경계위에서 단식을 하다


Q. 몸은 좀 어떤가
김현철 호남고속 쟁의대책위원장(호남) 몸은 안 좋은 상황이다.
지금까지 겪지 못했던 단식이 불가피하게 길어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35일간 단식을 해보았다. 의지와 관계없이 마음은 괜찮은데, 몸이 자꾸 휘청거리고, 똑바로 걸으려 해도 한쪽으로 치우친다.


Q. 망루에서 외롭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을 텐데 어떻게 이겨냈나
남상훈 전북고속 쟁의대책위원장(전북) 오직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그렇지만 민주노조를 세우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를 생각하면 고통스러웠다.


호남 망루단식이 파업전술 중 하나지만 삶과 죽음이 직접 연관된 곳이었기에 두렵기도 했지만 삶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그래도 고공농성이었다.
농성장이 바람에 많이 흔들리고, 비가 오면 빗물이 새고, 번개가 치면 감전의 위험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숙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했다.
아니 수면에 앞서 두려움이 앞섰다. 붕괴는 안 될까, 감전은 안 될까. 그래서 세 사람 모두 두 시간 이상 잠을 못 잤다.
그럴 때마다 책도 보고 향후 투쟁에 대해서 논의도 하고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면서 이겨냈다.


Q. 망루단식농성이 길어지면서 내려올 것을 권유했던 일들도 있었는데
전북 지난 1월에도 1주일간 민주당사에서 단식한 적이 있다.
거기서도 정치인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치인들과 사업주는 사인할 때까지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정동영의원이 올라와서 무슨 말을 해도 따라갈 수 없었다.
내려오자고 할 때도 밑에 가서 사인하고 올라오라고 했다. 끝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전북고속지회, 다시 시작하겠다는 마음으로


Q. 조합원들을 위에서 지켜볼 때 어땠나
호남 망루에서 파업이 합법 판정을 받았을 때, 많이 안도했다.
그리고 사측과 합의서를 쓰고 내려왔을 때, 많은 감정이 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분노의 아픔하고. 이제 파업을 정리할 수 있다는 안도감, 타결되지 않은 전북고속에 대한 애정이 어린 미안함, 투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결연함. 이런 느낌들이 한꺼번에 스쳐 갔다.


전북 전북고속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려왔기에 오직 조합원들을 다시 어떻게 단결시켜 끌고 갈까 고민을 했다.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갈 때 많은 동지의 박수를 받았지만, 속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래서 병원에만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전북고속 동지들만 따로 모여서 총회를 했다.
거기서 동지들의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을 보고 감동하였다. 그 자리에서 말했다.
우리 정말 다시 한 번 시작하자고. 동지들이 이 뜻을 받아들여 줘서 고맙고 감사하다.

<img src="http://www.newscham.net/data/news/photo/5/52117/g2.jpg">
 
[출처: 참소리 자료사진]


Q. 왜 민주노조인가
전북 40년 전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혹독한 노동을 시키지 말라고 요구하면 분신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도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노총은 노동시간을 줄이고 급료를 개선하고 노동조건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자기들 주머니만 생각했다.
한국노총 간부라는 사람들이 자기들은 70만 원을 올리고 우리는 0.88% 올렸다.
이 사실은 주주총회에서 사측이 자랑스럽게 보고한 내용이다.
그리고 노동조합 간부를 전부 간선제로 뽑고, 대의원도 지명제로 뽑는다.
수습기간은 3개월에서 약 11개월로 늘었다.
그리고 통상임금을 없애기 위해 시급을 올렸는데, 시급도 줄이려고 14시간 노동으로 계산하던 것을 2시간 깎았다.
일을 똑같이 하는데 총시급량은 줄었다. 독재보다 더한 상황이 바로 지금 버스노동자들의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입 다물고 있는 것은 인간도 아니다.


호남 우리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체계여야 한다.
그런데 버스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은 이런 다양성이 무시된 체계였다.
그러다 보니 고인 물은 썩는다고 부패의 온상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노동조건을 개선해나가야 할 시기이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노조를 선택했다.
그러다 보니 탄압이 많았고, 탄압 탓에 전주시민에게 불편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다양성과 민주노조가 시민의 품으로 돌아간다면 더 좋은 서비스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버스서비스 향상이라는 것은 곧 운전기사를 믿고 버스를 탄다는 말이다.
보다 안전운행에 중점을 두고 시민들이 편하게 탈 수 있는 노선과 배차, 환승제도의 획기적 변화 등의 길에 노동자도 함께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보조금을 받고 있으니 값싸고 편리하게 탈 수 있도록 공영제도 현실화 돼야 하지 않나. 이러한 이야기들이 우리가 민주노조건설투쟁을 하면서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의 불편이 아마 유익함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도 노력하겠다.


“현장을 넘나드는 투쟁으로 승리 쟁취할 것”


Q. 앞으로의 각오를 밝혀 달라
전북 교육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지금 복귀하면 바로 회사의 가진 구박을 받으며 살 것이다. 여기 현장에 남아 싸우면 역시 우리 가정과 가정경제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각오하고 투쟁하는 것은 사는 길을 찾아야 했기에, 싸우는 길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내버스동지들이 우리 천막부터 옮겨주었다. 그들이 희망을 주었고 힘을 주었다. 다시 한 번 뜻을 모아서 열심히 해보려고 한다.


호남 현장투쟁이라기보다 이제 출발선이다. 실제 투쟁 완성이 아니고 앞으로 밀려오는 모든 산적한 숙제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전북고속 투쟁이 하루빨리 승리해야 우리가 처음에 약속했던 공동투쟁, 공동단체교섭이 완성된다. 그 길에 함께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동지들도 전북고속이 시내버스와 함께할 수 있도록 적극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따라서 앞으로 전북고속과 함께 현장을 넘나들면서 투쟁을 할 것이다. (기사제휴=참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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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데이 122주년을 맞이하며 그 뜻을 다시 한번 되세겨 봅시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 가라!
가난과 불행과 힘겨운 노동으로 짓밟히고 있는
수백만 노동자의 운동을 없애겠단 말인가!
그렇다.
당신은 하나의 불꽃을 짓밟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당신 앞에서, 뒤에서, 사면팔방에서
끊일 줄 모르는
불꽃은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들불이다.
당신이라도 이 들불을 끌 수 없으리라."

- 사형선고 받은 미국 노동운동 지도자
                           스파이즈의 법정 최후진술 -

 

 

 

1) 미국 시카코 노동자의 8시간 노동 쟁취 투쟁

1886년 당시 미국.

놀기만 하는 자본가들이 다이아몬드로 이빨을 해 넣고, 100달러짜리 지폐로 담배를 말아피울때, 노동자들은 하루 12-16시간 장시간의 노동에 일주일에 7-8달러의 임금으로 월 10-15달러하는 허름한 판잣집의 방세내기도 어려운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5월 1일 미국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을 위해 총파업에 돌입했다.

공장의 기계소리, 망치소리가 멈추고, 공장굴뚝에서 솟아오르던 연기도 보이지 않고 상가도 문을 닫고 운전수도 따라서 쉬었다.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으면 세계가 멈춘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 날이다.

노동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힘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경찰은 파업 농성중인 어린소녀를 포함한 6명의 노동자를 발포 살해하였다.

그 다음날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30만의 노동자 시민이 참가한 헤이마켓 광장 평화 집회에서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폭탄이 터지고 경찰들이 미친듯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 이후 폭동죄로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억울하게 폭동죄를 뒤집어쓴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은 장기형 또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이 바로 세계 노동운동사에 뚜렷이 자취를 남긴 헤이마키트 사건이다.

마지막 재판에서 노동운동 지도자 파슨즈는 이렇게 최후진술했다.

" 그렇다. 나는 지금은 비록 임금을 받아먹고 사는 노예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 노예 같은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자신이 노예의 주인이 되어 남을 부리는 것은, 나 자신은 물론 내 이웃과 내 동료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중에 하나다.

만약에 인생의 길을 달리 잡았다면 나도 지금쯤 시카코 시내의 어느 거리에 호화로운 저택을 장만하고 가족과 더불어 사치스럽고 편안하게 살수 있었을 것이다.

노예들을 나 대신 일하도록 부려 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을 걷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여기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이것이 내 죄인 것이다.

파업하는 노동자에게 폭탄을 던지라고 말한 것이 누구인가? 독점 자본가들이 아닌가? ...

그렇다. 그들이 주모자들이다.

5월 4일 헤이마켓 광장에 폭탄을 던진 것은 바로 그들이다.

8시간 노동 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뉴욕에서 특파된 음모자들이 폭탄을 던진 것이다.

재판장, 우리는 단지 그 더럽고 악랄무도한 음모의 희생자들이오."

그로부터 7년이 지나 당시 구속 또는 사형된 노동운동가들이 모두 무죄였던 것이 증명되었다.

그들에 대한 유죄판결은 조작된 허위였던 것이다.

2) 5월 1일 미국노동자의 투쟁을 전세계 노동자의 기념일로

 

1889년 7월 세계 여러나라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이 모인 제 2인터내셔날 창립대회에서 8시간 노동쟁취를 위해 투쟁했던 미국 노동자의 투쟁을 전세계로 확산시키기 위해 5.1을 세계 노동절로 결정하고, 1890년 5월 1일을 기해 모든 나라, 모든 도시에서 8시간 노동의 확립을 요구하는 국제적 시위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1890년 세계 노동자들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치며 각 국의 형편에 맞게 제1회 메이데이 대회를 치렀다.

그 이후 지금까지 세계 여러나라에서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과시하는 국제적 기념일로 정하여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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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주년 메이데이를 기념하며 [송경동 펌]

그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다

- 제 122주년 세계 메이데이 기념 축시

 

 

노동절이 아니라 메이데이다

메이데이는 영어가 아니다

그것은 만국노동자들의 새로운 약속

자본의 국경을 넘어, 제국의 침략을 넘어

만인이 자유롭고 평등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자고 피로 흘려 쓴

만국노동자들의 염원이 서려 있다

 

그렇다

백번 돌이켜보아도 그렇다

노동자에겐 노동자의 언어가 따로 있다

만국의 노동자에겐 만국의 공통 언어가 따로 있다

억양과 쓰여진 모양은 다르지만

자본의 언어와는 단 한방울도 섞일 수 없는

핏빛 적대의 언어가 따로 있다

눈부신 단결과 투쟁과 연대의 언어가 따로 있다

 

이런 만국노동자의 언어를

함부로 개량의 언어와 섞어 쓰지 말라

권력의 언어와 헷갈리지 말라

패배한 시대의 경험에 가두지 마라

우상의 얼굴 아래 가두지 마라

자기 시대의 한계에 가두지 마라

 

만국노동자들의 언어가 공통어가 될

그 세계는, 그 나라는, 그 국가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패배는 노동자의 명석한 언어가 아니다

꿈을 꾸지 않는 언어는 노동자의 명징한 언어가 아니다

실천하지 않는 언어는 노동자의 굳센 언어가 아니다

 

만국노동자의 언어에는

늘 희망이 서려 있다

만국노동자의 언어에는

늘 새로운 기쁨이 서려 있다

만국노동자의 언어에는

늘 승리의 확신이 깃들어 있다

 

보라

낡은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보라

폭압의 시대가 가고

평등평화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메이 데이

122주년 만세!

 

# 노동절은 1957년 5월 22일 이승만의 지시로 대한노총이 만국 노동자의 날인 ‘메이데이’라는 명칭과 날짜(대한노총 설립일인 3월 10일로 옮김)를 빼앗고, 지은 굴종의 말. 우리들의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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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박정히 두분 각하의 동상을 건립합시다.[하종강의 노동과 꿈 - 산하 펌]

초대와 2대 3대를 해 자신 이승만 대통령과 5,6,7,8,9대를 해 드신 박정희 대통령 두분의 동상 건립 논의가 분분하다.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이승만 대통령 동상을 광화문에 세우자고 기염을 토하기도 하셨고 성미급한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 동상 시안을 선보였다가 그분의 평생 라이벌이었던 이북의 그 분의 포즈와 너무 닮았다고 해서 파토가 나는 일도 있었다.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오래 살았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분들의 행적에 심한 유감이 있으나 굳이 그분들이 좋아 죽겠다고 동상을 세우겠다는 분들의 마음을 끝까지 반대할만큼 맘이 굳건하진 못한 바, 나는 조건부로 그분들의 동상 건립을 찬성하기로 한다.

그래서 전 세계에 세워진 유명한 동상이나 조각상의 모티브를 빌어 내 의견을 밝혀 보고자 한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은 입상보다는 좌상이 적합하다.

고령으로 돌아가신 그가 힘들게 서서 아래를 굽어본다면 얼마나 다리가 아프시겠는가.

그리고 우매한 민중들의 봉기만 아니었더라도 그의 후임자가 되었을 것이 분명했지만 자식이 쏜 총탄에 목숨을 잃어야 했던 비운의 러닝메이트 이기붕씨와 사이 좋게 앉아 계신 것도 좋을 것이다.

바로 아래의 투 샷과 같이 말이다.

 

http://pds19.egloos.com/pds/201104/20/96/a0106196_4daec9c3a614d.jpg

 

위 동상의 정체는 중국 송나라 시대의 명장 악비묘 앞에 위치한 진회의 상이다.

진회는 명장 악비에 역모를 씌워 죽인 간신이다.

그래서 악비묘에 참배하는 이들의 침샘에 침이 고일 때 처분하는 용도로 지어졌다고 한다.

당연히 이승만 이기붕 상의 위치도 4.19 묘지 앞이다.

나이 여든에 대통령 한 번 더 해먹어 보겠다고 발악하시다가, 그에 항거하여 일어난 백성들에게 총알밥을 안겼던 이승만 대통령과 "총은 갖고 놀라고 준 건 아니잖나?"고 했던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의 동상이 저 포즈로 4.19 묘지 앞에 세워진다면 나는 그 동상에 황금을 칠해도 좋고 러쉬모어 국립공원의 바위산 얼굴들처럼 커도 좋다.

내 딸의 돼지 저금통 배를 갈라서라도 그 동상 건립 위원회의 위원으로 등재할 것이며, 그 동상지기라도 되어 저분들의 얼굴을 닦고 또 닦을 것이다.

 

행여 공해나 먼지 때문에 눈이 가려져 자기들 때문에 죽어간 꽃다운 영령들을 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그래도 전직 대통령인데 무릎을 꿇는 것은 흉물스럽지 않으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다.

참 맘씨 좋은 거 하나는 알아주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기억력 사라지는 건 붕어와 초를 다투는 대한민국 백성이라지만 어쩌랴 나 역시 단군의 자손인 것을..... 최적의 장소는 4.19 장소요 최적의 포즈는 저것이지만 그래도.... 사람이 인정이 있지 않으냐는 호소에 따라 마음을 고쳐 먹는다.

제 2안으로 나는 다음 포즈의 동상을 추천한다.

 

http://pds19.egloos.com/pds/201104/20/96/a0106196_4daecb4c5c487.jpg

 

그렇다.

핀란드의 영웅 파보 누르비의 동상이다.

그는 1924년 7월 10일 파리 올림픽대회에서 영웅으로 등극한다.

1500m에서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하고 1시간 뒤 열린 5000m 결승에서도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했고 이틀 뒤에는 폭염을 뚫고서 크로스컨트리 개인, 단체 부문을 독식했고, 체력이 거덜난 3,000m마저 제패하는 경이적인 위업을 달성한다.

노령의 이승만 대통령이지만 나는 이 포즈로 동상이 세워져야 한다고 감히 주장한다.

뜀박질이야 이 박사가 당연히 늦었겠지만 6.25 가 발발한 이후 비호와같은 서울 탈출은 길이길이 기념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6월 27일 새벽 3시 귀신도 모르게 경무대를 떠난 대통령은 철마야 나 살려라 대구까지 피난을 갔다가 "이건 너무 간 거 아닌가?"하고 대전으로 유턴을 했고 그곳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방송을 했다.

 

"서울 시민 여러분 국군이 반격하고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6월 29일 용감하게 수원까지 올라가서 맥아더와 회담을 하신 노 대통령님은 7월 1일 아아..... 그 노구를 이끌고 빠른 경부 축선이 아니라 호남행 줄행랑을 치신다.

이리역에 도착하셔서 무려 8시간을 대기하신 끝에 목포까지 가셨는데 변장을 하셔서 그 누구도 용안을 알아보지 못했다 한다.

그러고도 지치지 않는 철인같은 체력을 과시하신 각하는 목포항에서 배를 타셨고 마침내 7월 2일 수천 킬로미터의 장정을 끝내시고 부산에 안착하셨다.

누르미가 나이 일흔이었더라면 저 대장정을 소화할 수 없었으리. 누르미 할애비라도 그리할 수는 없었으리. 그 놀라운 스피드와 지구력을 상징하고 기리기에는 핀란드 올림픽 스타디움 앞에 세워진 누르미의 동상처럼 지축을 울리고 달리는 노구의 각하를 우뚝 서게 해야 할 것이다.

비문은 이것이 적합할 것 같다.

 

"기차야 기다려라. 배야 내가 간다. 부산이 어디메뇨 서울 시민 안심하라"

 

이제 박정희 대통령이다.

손가락 들어 "임자 저 탤런트 이쁘구만"이라고 지칭하는 포즈의 동상 시안은 이미 폐기되었다.

 

http://pds22.egloos.com/pds/201104/20/96/a0106196_4daecf69d627b.jpg

 

지나치게 권위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도 있다고도 하고 북한의 아무개를 닮았기 때문에 찝찝해서 그랬다고도 한다.

나 역시 이에 동의한다.

무려 18년 반 동안 대한민국을 주무르신 관록이 있지, 그 동상은 절대로 저토록 평이할 수 없다.

인류 문화사에 남는 걸작품이 되어야 각하의 위명에 맞을 것이며, 그 이상 아름다울 수 없었던 그분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어야 나는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모티브 중의 하나로서 나는 이 조각상을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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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라오콘이다.

트로이의 목마의 위험성을 부르짖다가 바다에서 나온 큰 뱀에 감겨 아들과 함께 죽어가는 비운의 제사장 라오콘의 최후를 담은 이 조각상은 실로 인류 전체의 찬연한 문화유산이다.

나는 이 정도 스케일을 원한다.

뱀은 상징일 뿐이다.

민중의 저항일 수도 있고, "야수가 되어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의 변신일 수도 있다.

고통에 사로잡혀 "나는 괜찮아!"를 부르짖는 각하의 비장한 몸 오른쪽에는 기타를 든 여가수가 있어야 하고, 그 왼쪽에는 청초한 여대생이 공포에 떨며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어야 한다.

발 아래는 시바스 리갈 공병이 굴러야 하고 석상 뒤 보이지 않는 곳에는 장렬하게 화장실에 숨었다가 총맞고 죽은 차지철이 마지막 몸을 숨긴 변기가 아스라히 모습을 드러내리라.

또한 각하의 파티에는 항상 두 명의 여인이 초대되어 좌우로 앉은 바 왼쪽으로 기울어지면 왼쪽의 여자가 남고,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면 오른쪽의 여자가 남았다고 각하의 채홍사들이 증언했던 바, 이날은 미처 각하의 용안이 기울어지기 전에 사단이 났으므로 머리가 어느 쪽으로 치우져서는 곤란할 것이며, 라오콘 석상의 표정이 보여주는 그 놀라움과 비탄, 충격과 공포가 골고루 버무려진 얼굴 또한 조각가의 손 끝에서 창조되어야 하리라.

이 정도 동상이 우리 앞에 세워진다면 다시 언급하고 약속하며 누가 못믿겠다면 변호사 친구 녀석을 불러 공증이라도 하겠거니와 나는 저 동상들의 건립 위원이 되어 얼마 안되는 모든 사재를 기부할 것이다.

이것만은 마누라도 못막는다.

저 동상들이 우뚝 서서는 날 나는 마누라에게 맞아죽은 고혼이 되어도 창공을 떠돌며 기뻐 손뼉치고 그 동상의 어깨들에 깃들 것이다.

나는 그분들의 동상 건립을 찬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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