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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여성주의

  • 분류
    일상
  • 등록일
    2012/04/09 09:08
  • 수정일
    2014/11/07 12:58
  • 글쓴이
    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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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를 앞두고 MB/반MB, 나아가 자본/반자본 식의 이분법에 대한 우려가 터져나온다. 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체계와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는, 뜬금없을지 몰라도 여성주의를 전면화시켜야만 한다.

우리의 투쟁 목표를 상대의 반대항으로 잡을 때, 즉 상대를 기준으로 해서 평가할 때, 우리는 하나의 반대항을 산출해내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의 단일하고 동일한 주체라는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MB가 아닌 것으로서의 반MB를 말하는 주장이 공허한 이유는 거기에 어떤 새로움도 차이도 없기 때문이며 오히려 MB와 그 반사된 거울의 상 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초의 반사화는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발생한다. 여성은 적극성을 결여한 소극성, 능동성을 결여한... 수동성, 강인함을 결여한 나약함 등을 담지한다. 이는 다름 아니라 남성에서 남성을 부재시킨 것에 불과하다. 여성의 섹슈얼리티 역시 남성의 성적 만족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만 해석되어 왔다. 우리의 일상과 발화 방식에 여성을 등장시킬 때, 그녀는 거의 항상 남성을 기준으로 그려진다. '여자는 무거운 물건을 들지 못한다'에는 '남자에 비해' 들지 못한다는 말이 생략되어 있으며, '여자는 말이 많다', '여자는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쓴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여기에는 항상 부정적인 가치판단이 뒤따른다.

남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사회적으로 말을 많이 하는 남성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고 하지 않고 '말을 잘 한다', '발언권이 강하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이는 누구에 대한 비교로서가 아니라 그 주체 자체의 속성으로서 평가되지 않던가? 여성주의는 바로 '남성이 아닌 것'으로서의 여성을 재구성하자고 주장한다. 오로지 주체와 주체가 아닌 것, 주체와 파편화된 것만 있는 구도, 즉 이분법의 본질인 독점적 주체를 폭로하고 상호주체성의 윤리를 만들자고 한다. 이 여성주의적 사유 없이는 소위 반~로 표상되는 전선은 무너지지 않는다.

사회에 뿌리를 깊게 내린 이 이분법적 사고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 사고의 지형은 바로 인간이 맺는 최초의 관계에 그 물질성을 두고 있지 않은가? 여성주의가 본연의 투쟁 장소로 삼고 있는 가족과 그 가족에서 연유되는 가부장제/젠더 이데올로기 자체를 봐야 한다. 차이를 사유하고 여성을 주체이자 타자로 불러내는 작업은 새로운 사회를 향한 전제이자 그 자체로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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