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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짝마! 너 간첩이지!

철모른 국민학생 시절. 어느날 조회 시간에 선생님은 귀가 번쩍뜨이는 이야기를 한다. “오늘부터 00훈련이 시작돼. 모의간첩 훈련도 포함되어 있어. 모의간첩을 신고하면 ’포상‘도 있다.”라 하신다. 모의간첩 식별요령도 포함해서 말이다. 이른 아침에 흙 묻은 신발로 산에서 내려온다든가, 세상물정 모른다든가 하는 사람은 모의간첩이란다. 가장 중요하게는 사회를 혼란에 빠지게 만드는 게 ’진짜 간첩‘의 역할이라는 말도 빼 놓지 않았다. ’반공‘이 국시이던 시절이니 ’간첩 사냥‘은 젖먹이부터도 필수교양 코스다. 어찌되었건 ’포상‘에 눈먼 나는 모의간첩이 걸려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날. 내게도 행운이 찾아왔다. 학교 옆 건물인 경찰서. 그 담장 안에서 누군가 나를 부른다. ‘얘 이리 좀 와봐. 저기 껌 한통만 사다 줄래“ 그러면서 1,000원을 나에게 건내는 것 아닌가?

 

순간 나의 머리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껌 한통에 천원.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서 있는 그가 내 눈엔 틀림없이 선생님이 말한 그 ‘모의간첩’이다. 그의 정체를 간파한 걸 들통나면 안된다. 일단 침착하게 쉼호흡을 가다듬고 다음은 표정관리! 당황한 기색은 실패로 이어진다. 우선 모르는 척 시치미 떼고 그가 시키는대로 심부름을 하기로 했다. 돈을 쥐어들고 학교앞 구멍가게로 뛰어갔다. 주인아저씨께도 비밀이다. ‘승자독식’ 사회에서 그와 공과를 나눌 순 없다. 껌 한통을 쥐어들고 그 아저씨 앞에 섰다. 경찰서의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모의간첩’ 체포작전에 돌입하기로 한 것이다.

 

껌은 모의간첩의 손목을 잡아둘 수갑으로 둔갑했다. 껌을 내밀며 나는 그에게 당당하게 외쳤다. “꼼짝마! 아저씨, 모의간첩이지. 껌 한통이 무슨 천원이야. 내가 잡은 거다. 울 선생님한테 신고할꺼야.” 득이양양한 내 모습에 아저씨는 기가 막혔던 모양이다. 아저씨 왈 “야, 나 예비군 훈련 중야. 심부름 값을 주려고 일부러 천원짜리 준거야.” 그는 어의없다는 듯이 웃었다. 선생님 말에 의하면 ‘모의간첩’은 정체가 탄로난 순간 기가 죽고 순순히 체포에 응해야 한다. 하지만, 이 아저씨 너무 당당하지 않은가?

 

그 아저씨의 넘 당당한 모습은 난 바로 꼬리를 내렸다. 어쨌든 남은 돈은 내꺼 아닌가? 검거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당시로썬 적잖은 ‘잔돈 포상’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20년은 적잖이 흐른 요즘. 난 적잖은 혼란 속에 살고 있다. 옛적 선생님이 말하던 ‘세상물정’ 모르고 ‘사회를 혼란’에 몰아넣는 사람들이 활개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활동은 너무나 공개적이고도 공세적이다.

 

2002년에도 한 때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 출몰한 적 있다. 그는 그 때 ‘옥탑방’의 존재자체를 모르고 있었고, 나중에 해명이랍시고 ‘10대들이 쓰는 은어’로 알고 있었고 했다. 그 때 나는 국민학생 때의 충동을 번뜩 떠오르기는 했지만, 시답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최근 일련의 문제발언들은 지속적으로 나의 육감을 자극한다.

 

‘11평 아파트는 좁아서 대각선으로 누워 자야 할 정도’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정말 놀랐다. 11평은 고사하고 원룸도 아닌 단칸 자취방에서 3명이 넉넉하게 살았던 나로써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그러더니 어떤 이는 ‘버스요금은 70원’이라고 한다. 평양시내버스 요금이라면 몰라도 대한민국의 시내버스 요금이 70원이라니. 그는 탈북자도 아닌데 이런 엉뚱한 말을 하다니 납득이 가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60년 가까이 살은 사람이라고 상상하기 힘든 발언이었다. 한 술 더 떠 ‘버스요금은 70원’이라고 발언해 혼쭐이 나자 청소년용 T-Money 버스카드를 들고 자랑까지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대한민국의 경제를 책임진다는 사람은 물가관리대책 52개 품목에 들어간 것의 가격도 모른다. 특히 청주지역 판매 1위를 자랑하는 삼겹살 1인분 가격을 모른단다. 이 사람도 버스요금 모르기는 마찬가지인데 ‘주말’에만 타고 다녀 잘 모른다고 한다. 그 사람 사는 곳의 시내버스는 주중요금 따로 주말요금 따로 받는가 보다.

 

더 나아가 이번엔 40평 아파트에 공시지가 9억원 정도면 중산층이라 강변하는 사람도 있었다. 2% 안에 들어야 중산층이라는 발언에 대한민국은 발칵 뒤짚혔다.

 

국민의 반대에도 쇠고집으로 밀어부쳐 ‘사회 혼란’을 일으키고, 야심한 밤에 산에 올라갔다 한 때 금지곡이었던 ‘아침이슬’을 부르고 흙묻은 신발로 내려온 사람도 있다.

 

‘세상물정’ 모르고 ‘사회혼란’을 부추기는 이런 이들이 자주 출몰하면서 나는 이따금 수화기를 들고 111번을 누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철없던 시절의 호기를 봐야할지 고민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 때 그 선생님에게 다시 한번 자문을 받아봐야 될지도 고민이다.

 

때 아닌 간첩사건을 접하며 내가 그 시절 배웠던 ‘상식’만으론 그들은 ‘꼼짝마’ 대상이다. 사회혼란을 부추기기 위해 ‘암약’하고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발언을 서슴없이 하기 때문이다. 다시 국민학생 시절로 돌아간다면 그들은 영락없이 체포대상이다.

 

하지만, 철들었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이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더욱 절망케 한다. 국민의 삶을 모르는 사람들이 권력의 핵심을 차지고 하고 이 땅을 쥐락펴락하고 있다는 그 현실자체가 나에겐 절망이다. 그러나, 절망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럴수록 더욱 힘있게 그들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세상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간첩사건과 연이은 사상단죄 사건에 대해서도 더 많은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오늘의 과제인 듯 싶다.

 

덧붙이자면 최근 사노련 사건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을 환영한다. 하지만, 아쉬운 점을 감출 순 없다. 논쟁의 중심이 북한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친북’이냐 북에 비판적이냐가 중심이 된 점이다. 나는 설령 그들이 ‘친북’이었다 할지라도 ‘사상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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