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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호죽

부활하는 호죽

고 정진동 목사의 삶 따라 <호죽노동인권센터> 열어

 

신영복 선생이 직접 쓴 현판 글씨가 도착했다. <호죽노동인권센터>라고 쓴 현판 글귀 오른쪽 아래편엔 어김없이 ‘쇠귀’가 쓴 글임을 알리는 빨간 낙관이 찍혀있다.

      ▲ 신영복 선생이 써주신 현판, 아쉽게도 낙관은 담지 못했다.


신영복 선생의 아호인 ‘쇠귀’는 감옥살이를 마친 이후부터 써왔다. 세상으로 나온 이후 선생이 부모님과 처음 함께 산 곳이 우이(牛耳)동이었기 때문이다. 흔히들 아호를 ‘특별한 의미’의 마을 이름을 써온 관례에 따른 것이다. 한자로 쓸 때는 牛耳라 쓰지만, 한글로 표기할 때는 말뜻에 따라 쇠귀로 쓴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중시한다는 신영복 선생. 그는 현판 글씨 요청에 신중함을 보였다. 호죽노동인권센터와의 ‘관계’와 ‘인연’이 없었던 탓이다. 그런 그가 선뜻 글을 써 준 건 ‘호죽’이 가지는 무게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호죽’은 충북지역 민중운동의 큰 별이었던 ‘정진동 목사’의 아호다. 정 목사는 청원군 옥산면 호죽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을 따서 호를 정한 것이다. ‘호죽’은 한 평생 예수의 참삶을 실천해 왔다. 30여 차례의 연행과 옥고를 치루면서도, 한평생 노동자, 도시빈민을 위해 투쟁해 온 ‘호죽’이다. 소천(召天)하기 전까지 그는 800여건이 넘는 노동자·빈민의 인권 문제를 해결했다.

        ▲ 고 정진동 목사

 

  신영복 선생이 ‘관계’도 없고 ‘인연’도 없는 그 곳에 현판 글씨를 써 주고 ‘관계맺기’에 주저하지 않은 건 이 때문일 것이다. 선생은 ‘하방 연대’를 강조해 왔다. 흘러가 바다에 닿는 강물처럼 낮고 약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자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에게 손을 내밀고 어깨를 걸었던 ‘호죽’의 삶은 이런 선생이 외침과 물길을 같이 한다. 그 물결을 견결히 하겠다는데 선생이 마다할 리 없었을 것이다.

올해부터 <호죽노동인권센터>의 법률지기가 된 조광복 노무사는 ‘비정규 노동자, 외국인이주노동자, 최저임금 노동자 등 취약계층 노동자의 법률구조활동 지원과 노동이 존중받고 노동인권이 보호되는 사회를 지향하는 활동을 펴나갈 것임을 강조했다. 그것이 평생을 노동자와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사시다 작고한 정진동 목사님이 남겨준 이름빚을 갚는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신영복 선생은 즐겨쓰던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납니다’라는 작은 글귀를 덧붙였다. 비정규노동자들의 어둠을 선명히 밝혀주길 바래는 마음을 담은 것일테다.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문턱을 낮추겠다는, ‘호죽’이 영원히 살아 있음을 보여주겠다는 <호죽노동인권법률센터>의 개소가 기다려지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게다.

 

 

2008.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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