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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 30년차

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외모도(일단 여자란 말이지), 성적도, 환경도, 취향도, 성격도(이건 평범보다 약간 lower)

어떤 사람들은 부러워할 지도 모르는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는 평범한 직급이지만

더 돈 많이 버는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역시 너무 평범한.

명품따위 사 댈 경제력도 없고 별로 바라지도 않지만 어쩌다 명품 지갑이라도 선물 받으면

으아 명품이 생겨버렸다 라며 혼자 어깨를 으쓱할 정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평범해서

가끔 사람 바글거리는 강남역이나 명동 쯤에 나가면

나 자신의 존재감을 나조차 잊을 만큼 극도로 평범하다

 

데모, 운동권, 광주, 5.18, 사회과학서적 이런 것들을 가깝지는 않게, 전혀 모르진 않을 정도로 경험했고

마치 사춘기처럼 그 때 그 시기에 적당히 겪고 넘어가는 것들이랄까

라며 졸업하고 취직하고 평범한 수준의 사회생활을 십 여 년째 하고 있는

 

신문도 보다말다, 보더라도 경제면, 가끔 사회면이나 문화면 위주

책은 소설류, 경영 관련, 가끔 시집 정도

게다가 기독교 - 나름 진심으로 믿는

부모님은 완전 보수, 아빠는 이북이 고향,엄마는 경상도

가끔 공정무역 커피 사먹는 게 인류를 위하는 작은 한 걸음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는 수준

 

그야말로 정치나 사회운동 등에는 무관심했고

그래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신문에서 말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고, 그런(?) 것에 크게 관심 가질 필요 없다고

무엇보다 정부와 현 정권에 반대하고 항의하는 따위의 짓은 하면 안 되는 거라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잘 먹고 잘 살려면 그런 일 하는 건 도움은 커녕 손해가 될 뿐이라고.

 

우리 부모님은 진심 무일푼으로 시작하셨다

애 셋을 키우시면서 참 고생도 많이 하셨고

그래도 셋 다 평범한 대학 졸업 시키고 평범한 사회인으로 성장시키고

서울 시내에 작은 자가주택 하나, 서해안 바닷가에 콩알딱지 만한 마당딸린 오두막 하나까지 갖고

이제는 다 큰 자식들 고민을 취미삼아 살고 계시다.

정말 존경한다. 사랑하고

 

부모님이 살아오시면서 깨달은 건, 바른 사회 만들기나 시민운동 따위는

다 쓰잘데기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당장 내 새끼들 밥 안 굶기고 살기 급급한 당신들로서는

뜨신 밥 처먹고 할 일 들이 없어서 저런 공산당 같은 소리들이나 하는 부류였으니까.

 

대학시절, 취미처럼 사회과학 동아리를 놀러다니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책 읽는 건 좋아라 해서 동아리 세미나 때마다 적당히 잘 넘어가고

그나마 좀 나은 언어감각 덕에 가끔 날카로운 지적이나 insight를 찾기도 하다가

직장인이 된 후로는 자못 깨어있는 사회인인 양 선거 때마다 집권당이 아닌 쪽에 표를 던지면서도

'난 돈 많이 모아서 나중에 탁아소나 보육원 같은 거 차려야지'라는

참 naive한 생각들의 인생이

나의 평범한 - 다 쓰고 보니 중간 이하 수준의 - 인생이었다

 

 

어느 때 부턴가

학교 급식을 무료로 받지 못하면 밥을 굶어야 하는 학생들이 있다고

폐지를 수집해서 근근히 끼니를 이어가는 1인 노인 가구가 늘어가고 있다고

강남 사는 학생들 사교육비가 대기업 직장인 월급보다 더 들어간다고

그래서 어차피 돈 없는 집 애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루저라고

시청앞 광장을 개선한다고

시청 청사를 다시 짓는다고

국회의원들이 해외골프여행들을 다녀왔다고

.. 라는 소식들이 자꾸 마음에 남아 걸리적 거려서

굿네이버스에 가입하고 해를 바꾸면서 지원금을 참새 눈물 만큼 늘려놓고

'조금씩 더 하면 되지, 난 뭔가 하고 있는거야' 하며 걸리적 거림을 퉁 치려 했는데

 

얘기를 나눠본 주변 모든 사람들이 어맹뿌를 흉봤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당선되고

하루의 절반을 함께 부대끼는 회사 상사라는 분들이 하나같이

어맹뿌가 당선돼야 회사가 안전한 거라고 하고

 

잘 모르지만 왠지 인간적으로 믿음이 가는 정치인으로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노무현 前 대통령이 어처구니 없이 돌아가시고

별로 지지하는지 안하는지도 생각 없던 김대중 前 대통령이

장례식에서 젊은 내가 보기에도 가슴 미어지도록 통곡을 하시더니

그러다가 얼마 되지 않아 또 돌아가시고

그 장례식에서 이희호 여사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그 뜻을 기린다고 하시고

 

김수환 추기경님도 돌아가시고

 

노통은 어맹뿌가 죽인 셈이라는 말들이 여기 저기 들리는 동시에

이런 말 함부로 하다간 어떻게 될 지 모른다는 농담 반 진담 반의 목소리들도 들렸다.

..... 어떻게 될 지 모른다니, 지금은 2010년이라구. 그게 어떻게 농담이 되나.라는 당황스러움.

 

앞인지 뒤인지 모르겠지만 - 국민요정 최진실에 이어 최진영도 자살해 버리고

그래서 또 가슴이 미어지게 아팠는데

 

정말 모두가 말도 안 된다는 4대강 사업이 시작되고

그로 인한 폐해들이 속속 작은 뉴스로 노출되는 중에

한 쪽에서는 아는 사람의 건설회사가 그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고 달뜬 소식을 받았다.

왜 아무도 이제라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거나

우려되는 모든 이슈들을 다시 꼼꼼히 살펴보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을까

라며 생각만 하고 넘어가 버리는 나의 일상.

나도 밥 벌어먹고 살기 바쁘니까. 회사 일 하고 집에 오면 피곤하니까. 라는 핑계

 

그러다가 천안함 사건이 일어났다

 

희생자 중에 아는 사람은 커녕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도 없건만

며칠을 울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를 갈며 분노했다

삶 전체를 걸었던 나의 헌신과 노력을 콧등으로 비웃으며 끝없이 바람 피워대던 인간과

결국 남남이 된 후에조차 복수 따위는 생각도 못했던 나약한 내가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다고, 어떻게든 반드시 갚아 주겠다고 몸서리를 쳤다

정확히 복수의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누구더라도. 라며

 

그리고 5.18이 되었고

김우재 박사가 트위터에 올려 주신 강풀 작가의 만화를 다시 봤다.

http://clien.career.co.kr/cs2/bbs/board.php?bo_table=image&wr_id=3101951

그리고 동아리 때 필독서였던 '현상과 본질'을 떠올리게 하는 

프로게이머 승부조작 관련 기사를 읽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00518102804&Section=08&page=0 

 

이거 혹시, 다 내 탓 아닌가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지금껏 이 꼴들을 만들어 온 건가

그렇네. 그렇겠네.

 

저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고, 저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면 안되는 거라고

누구도 끝까지 설득해 본 적 없고 세상에 강하게 외쳐본 적도 없는

나 같은 '먹고 살기'에 급급한, '나 한 사람 더 잘 먹고 잘 살기'에만 집중한 나 같은 사람들이

아니 내가

5.18을 그냥 그렇게 넘겨 버리고

밥 굶는 애들을 지나쳐 버리고

기초생활비로만 근근히 연명하는 독거 노인들을 외면해 버리고

노통을 죽이고 사람들이 자살하게 만들고

새파랗게 어린 프로게이머가 돈 한 푼 더 가져보겠다고 승부조작을 하게 하고

천안함 사태까지 만들어 버린 거

 

이건 아닌데

내가 원한 예쁘게 사는 인생이 이런 건 아닌데

손이 거칠어 지고 발 뒤꿈치가 거칠어져 맨날 스타킹 줄이 나가도

마음 아름답게, 눈동자가 아름답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눈에 보이지 않는 도움이라도 더하며 예쁘게 살고 싶었던 건데

뒤에서 투덜거리고 입만 나불거리는 게 아니었는데

 

가슴이 또 미어진다. 미안해서 눈물이 난다.

미안해

미안합니다

정말 너무 미안합니다

 

.......... 하지만

여전히 이런 글 따위 익명의 블로그를 만들어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생계형 직장인으로서

뭘 할 수 있나

누가 볼까 두려워 떼창 트윗 한 번 맘놓고 RT 하지 못하면서

어딜 가든 밥 굶고 살겠냐는 큰 소리 칠 능력도 없는

회사에 인생 다 저당 잡혀놓고 전전긍긍하는 내가

지금 이 상황에 대체 뭘 할 수 있나

뭘 ... 하면 좋을까

 

누가 좀 알려주세요. 뭘 할 수 있을지. 뭘 해야 하는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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